학회에 가던 길에 이번주 씨네21과 토요일자 한겨레를 집어들었다. 씨네21의 특집기사는 '내 인생의 영화평론가'인데 새로운 얼굴이 없어서 다소 실망(?)했다. 대부분이 한번쯤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었던 것(유일한 예외라면 작고한 영화평론가 이영일 선생 정도이다). 한겨레의 '책과 생각'에도 눈길을 확 잡아끌 만한 책은 들어있지 않았다. 해서 대신에 김지석 논설위원의 '종횡사해'나 옮겨놓는다. 항우울제 '프로작 20년'에 관한 기사이고 나름대로 흥미롭다(며칠전 한 여대생이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영향도 있을 법하다). 작년에 <우울증에 반대한다>(플래닛, 2006)가 출간되었을 즈음에 관련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909608) 같이 참고할 만하다.

한겨레(07. 06. 15)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 20년, ‘병 주고 약 파는’ 우울한 사회

올해 스무 돌을 맞은 건 6월 민주항쟁만이 아니다. 그만큼 두드러지진 않지만 지구촌 주민들의 생활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다. ‘프로작 혁명’이 그것이다. 프로작은 미국 회사가 개발한 우울증 치료제다. 1987년부터 시판된 이 약은 이전 약들에 비해 부작용이 적고 복용이 간편해 우울증 치료제의 새 시대를 열었다.

지금 미국에서 한해 2천만 건 이상 처방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보통 사람도 기분을 좋게 하려고 먹는 바람에 ‘해피 메이커’라고 불릴 정도다. 사람의 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있는데, 프로작은 그 중 세로토닌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약이 호전성과 자살 충동도 키운다는 논란이 커지고 있으나 아직 결론을 내릴 단계는 아니다.

우울증은 가장 흔한 질병 가운데 하나다. 지구촌 인구의 20%가량이 평생 한번 이상 경험한다. 증가 속도도 빠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까지 인류의 장애 요인 가운데 심장질환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할 것으로 내다본다. 우울증의 첫 발병 평균연령은 20대 후반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량 많으나, 50살을 넘으면 비슷해지고 노인이 되면 함께 늘어난다.

스스로 우울증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미국 작가 앤드류 솔로몬이 쓴 <한낮의 우울>(민음사 펴냄)은 ‘우울증 완전정복’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우울증은 숨겨야 할 잘못이 아니다.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의지를 갖고 꾸준히 대처해야 할 지속적 증상이다. 의료진과 주위 사람의 도움도 필수적이다. 그런데 남에게 자신의 우울증 증상을 털어놓는 일은 동성애자가 커밍아웃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우울증이 약물·알코올 중독과 대인관계 단절,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우울증 자체의 속성은 아니다. 그보다는 장애인 문제와 마찬가지로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완고한 사회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비싼 치료비 또한 좌절과 재발에 기여한다.

현대사회는 우울증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 이 병을 일으키는 주된 심리적 원인은 상실과 스트레스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학교, 사회로부터 엄청난 압박을 받는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가 학업, 외모, 재산, 지위 등 여러 면에서 비현실적이라고 할 정도로 높은 기대치를 갖게 된다. 그 기대와 현실의 거리가 상실감의 원천이다. 상실감은 일상 생활에서 안개처럼 스며들어 마음 구석구석을 갉아먹다가 적당한 계기를 만나면 절망으로 치닫는다. 속도와 다중인격을 강요하는 전자문명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앞선다. 그래서 ‘시대의 우울’과 ‘사회의 우울’이 상승작용을 한다.

현대사회는 많은 구성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치명적 결함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도 누구도 그것을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 프로작 혁명 바람을 타고 다양한 종류의 우울증 약이 개발돼 팔리고 있다. 먼저 병을 만들어낸 뒤 새 약을 개발해 산업을 창출하지만 병의 원인을 없애는 데는 무심한 것이 현대사회의 우울한 작동방식이다.(김지석 논설위원)

07. 06. 16-17.

P.S. 프로이트를 흉내내어 말하자면 '우울증과 그 불만' 정도가 되겠다(하지만 우울증의 원인이 제거 가능한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도 우울해지는 게 인간 아닌가?). 기사에서 '우울증 완전정복'으로 언급된 <한낮의 우울>에 버금하는 체험담은 엘리자베스 워첼의 <프로작의 나라>(1994/1995)이다.

<비치: 음탕한 계집>(황금가지, 2003)의 저자이기도 한 워첼에 대해서는 "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뉴요커', '뉴욕 타임스 매거진' 등의 편집자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으며 1995년 롤링스톤 대학 언론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항우울제의 나라>, <더, 지금, 다시> 등이 있다."고 소개돼 있는데, <항우울제의 나라>가 바로 <프로작의 나라>를 가리킨다. 그 후속작인 <더, 지금, 다시>도 저자의 체험담을 담고 있다. <프로작의 나라>는 2001년에 영화화되기까지 한 베스트셀러이다. 이런 책이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은 걸 보면, 우리의 우울증은 아직 정도가 심하진 않은 것인지?  

20대 초기 발병시 남성보다 두 배 높다는 여성의 우울증 발병 원인도 무엇인지 궁금하다(우울증은 히스테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워첼의 경우를 참조하자면, 우울증에서 빠져나온 여자는 '까다로운 여자(difficult women)'가 되는 것인지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ocd 2007-06-17 12: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프로작을 다년간 복용해본 자로서...통념처럼 약에 취하는 수준은 아닙니다.미국은 거대 제약회사가 대화치료(정신분석 등)의 힘을 '비과학적' 명목으로 '거세'하는 중입니다^^

로쟈 2007-06-17 12:56   좋아요 0 | URL
그러한 거세에 제약회사들의 입김도 한몫했겠네요...

가을산 2007-06-17 17:36   좋아요 0 | URL
제 느낌으로는 몇십년 후면 프로작 등이 커피나 비타민 처럼 복용될 것 같아요.

로쟈 2007-06-17 23:20   좋아요 0 | URL
프로작이 인민의 종교가 되겠군요.^^
 

지난봄 타계한 러시아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첼리스트 장한나의 '책과 인생'을 옮겨온다(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6912 참조). 12살때 스승의 부인 갈리나의 권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런 권유를 건넨 사람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나 아무튼 놀랍다. 초등학교 5-6학년 때가 아닌가(아마도 그맘때라면 나는 <삼국지> 같은 걸 읽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영어도 마스터하고 통찰력과 표현력도 길렀다지 않는가. <죄와 벌>도 읽기 힘들어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좀 각성할 일이다.

경향신문(07. 06. 16) 12살때 읽은 영문판 '백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지난 4월 타계하신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인가. 세계 동화 전집 등을 통해 독서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됐다.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 그리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동화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밥 먹을 때는 물론, 첼로 연습 시간에도 읽기를 중단하기 힘들어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처음 읽는 책에서 긴장과 스릴을 느꼈다면, 다시 읽는 책에서는 이야기 속 의미들을 찾고 즐기는 맛을 알게 됐다.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열 살이었던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공립학교의 ESL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영어 공부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12세부터 다닌 사립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11세 때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만난 갈리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영어판 <백치>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2세 소녀에게 <백치>를 권한 갈리나도, 그 말 한마디에 바로 <백치>를 읽은 나도 참 순수했던 것 같다. 인생을 바꾸는 힘이 책 안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게 아닐까 싶다.

만일 지금 내가 12세 어린이에게 책을 권해야 한다면 <백치> <안나 카레니나> <파우스트> 같은 명작을 권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작품의 위대함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서툰 영어로 <백치>를 읽은 후 과연 내 마음이 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때부터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많은 러시아 문학에 반해서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수문학,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에 빠져 영국, 프랑스, 독일 문학으로 폭을 넓혔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며 에세이를 제출할 만큼 영어 실력이 늘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를 쉽고 즐겁게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통찰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도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됐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 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장한나)

07. 06. 1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인간 2007-06-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을 '만국의 언어'라고 정의한 속설에 따르자면, 음악의 신동인 장한나는 결국 어학의 신동이 되는 것이겠지요. ^^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거의 25년이 되어 가도 영어 소설 하나 읽기가 버거운 저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위로가 됩니다. 쿨럭~ ^^

로쟈 2007-06-1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첼로를 배워야겠습니다...

수유 2007-06-1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영특한 이미지가 어려서부터의 독서에서 왔군요. 저도 요즘 조카에게 다소 두꺼운 책들을 사주고 있는데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하더라도 격려를 해주렵니다. :)

작은앵초꽃 2007-06-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또 어떻게 성장할까 늘 기대되는 첼리스트에요.
그나저나 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이라는 것, 저도 몇 개 알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요 ^^
 

에밀 시오랑에 관해 몇 마디 적기 위해서 '이재룡의 문학이야기'란 부제로 출간된 <꿀벌의 언어>(현대문학, 2007)의 한 꼭지를 읽었다. 기대 이상의 읽을 거리들을 모아놓은 이 산문집은 불문학 번역자로도 잘 알려진 저자가 2004년과 2005년, 두 해 동안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 중 한 꼭지가 '방랑하는 루마니아인'이고 저자가 직접 번역하고 소개하기도 한 루마니아의 망명 지식인/작가 3인방, 곧 시오랑, 엘리아데, 이오네스코에 대한 것이다.

한데, 예기찮게도 이들의 밝은 면보다는 '루마니아 파시즘'에의 동조라는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다. 이와 관련한 페이퍼를 준비하다가 '엘리아데'와 '파시즘'이란 두 키워드를 검색해보니 "선불교의 미국화에 앞장선 두 종교학자 스즈키와 엘리아데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룬 박노자의 글이 뜬다. 한겨레에 연재된 것인데, 이전에 읽은 적이 있어서 다시 확인해보니 옮겨놓진 않은 글이다. 해서,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얼마전 <벽암록> 완역본 출간에 관한 페이퍼와도 겹쳐읽을 수 있겠다(나는 스즈키의 <선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언급해놓았었기 때문에).

 

 

 

 

 

 

 한겨레21(02. 06. 05) 불교와 파시즘의 기묘한 만남

요즘 서양에서는 선불교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도 ‘선’(보통 일본식 발음으로 Zen)이라는 말을 모르면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렵다. 선을 ‘동양의 정신’과 동일시하여 선에 대해 상식적으로 조금이라도 아는 것을 ‘세계성’, ‘국제성’을 띠는 일로 생각한다. 골수 추종자는 많지 않아도, 선에 대한 막연하고 긍정적인 인식의 보편성은 티베트나 동남아의 불교, 정토불교 등 나머지 불교 종파의 인지도를 훨씬 앞지른다.

엘리아데가 선택한 ‘부드러운 파시즘’
선이 이만큼 보편화된 배경에는 여러 이유들이 많다. 상좌부(동남아 소승) 불교보다 계율 등의 종교적 요소를 덜 강조하고, 서양화된(사실은 왜곡된) 선이 자본주의 소비·향락 지향의 ‘주류’사회와 더 쉽게 부합하는 것과, 참선 위주의 수행법의 개인주의적 측면이 서양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선의 서양화(실제로는 서양인의 입맛에 알맞게 뜯어고치는 일)와 보편화의 배경에는 ‘주류 학계’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선에 대한 학술적·대중적 저서는 중산층의 미국·서구 젊은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식상해 ‘대안적 사상’ 찾기에 나선 1960년대부터 대량으로 출판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어 ‘선 붐’ 만들기에 크게 공헌한 사람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미르차 엘리아데(1907∼86)와,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1870∼1966)를 빼놓을 수 없다. 저명한 비교종교학의 대가이던 엘리아데는 여러 종교 사이 선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설명했고, 승려가 된 적이 있는 스즈키는 선과 일본 문화의 관계, 선의 수행법 등을 설파했다.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한 두명의 이민자 출신 미국 교수들은 일종의 상호 보완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의 미국화’ 작업 이외에,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대선배’인 스즈키가 19세기 말부터 곧잘 일본 국수주의와 일군의 대륙침략을 합리화·미화했는가 하면, ‘후배’ 엘리아데는 1930년대의 루마니아 파시즘 운동의 한 이론가였다. 그렇다면 과거의 군국주의자·파시스트들이 어떤 인연으로 선불교의 ‘미국화’와 ‘선포’의 선봉에 나섰을까. 그들의 손을 거쳐 대중화한 선불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미국 젊은이들에게 다가갔을까.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저서를 띄워준 미국의 보수적 주류 학계와 출판·언론자본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부유한 보수적 가정에서 태어나 26살에 박사학위를 따고 인도에서 범어(梵語·Sanskrit)와 요가를 배운 뒤 인도학 교수가 된 천재 엘리아데는 일찍부터 독특한 종교철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그에게 종교는 우주의 중심인 신비스러운 성(聖·das heilige)으로 인간을 인도해주는 나침반이고, 종교가 있는 한 사회가 하나의 ‘몸’처럼 잘 움직이지만, 종교가 제거되면 사회가 ‘성’으로부터의 소외와 분열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계급 개념 자체를 부정한 극단적 관념주의자 엘리아데에게는 현대사회의 교회가 ‘속(俗)적인’ 부르주아·국가의 지배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 리 만무했다. 공산주의뿐 아니라 모든 진보적 사상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 사회’인 엘리아데의 이상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 같은 위협들을 퇴치하는 방법으로, 엘리아데는 독재자 살라자르(Salazar) 치하의 당대 포르투갈이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드러운 파시즘’을 택했다. 그러다 자신의 이론적인 지도를 받은 루마니아 파시스트 운동의 일시적인 패배(1938)로 결국 미국에 정착한다.

무시무시한 무사도의 무아경
역사의 발전을 부정하는 엘리아데에게는 원시종교의 무당의 굿이나, 선승의 참선·무아체험이나 똑같은 ‘성(聖)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 발전의 부정에 따른 종교의 사회적 변혁 기능의 전면적 무시였다. 무속이든 선불교든 엘리아데에게 종교란 한 개인이나 집단의 불변적·초월적 ‘망아’(忘我·ecstasy) 지경의 도달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의 민간신앙이나 힌두교와 확연히 다른 초기 불교의 혁명적인 무소유·비폭력의 정신도, 16세기 이후 민중 기독교의 국가·폭력의 부정도 엘리아데의 관심 밖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비교 종교학의 패턴>(1949), <샤머니즘: 고대 망아의 기술>(1951), <요가: 불멸과 자유>(1952), <원시종교부터 선불교까지>(1967), <세계종교사>(1976∼78) 등의 저서는, 선불교를 샤머니즘 같은 일종의 ‘신비의 기술’로 ‘파는’ 셈이었다. 그의 선불교에서는 부처의 자비나 ‘하화중생’(下化衆生·보살에 의한 중생의 교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불교 활동가로서 매우 드물게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한문과 범어·팔리(Pali)어 등에 능통한 천재 스즈키는, 1892∼97년에 일본에서 승려로 생활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무자(無字) 화두를 들어 열심히 정진했지만, 당시 일본 제도권 불교계의 최대 화두는 점차 가열돼 가는 국가주의·군국주의 분위기에 어떻게 편승하여 ‘애국 황도(皇道) 종교’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젊은 승려 스즈키는 청·일전쟁(1894) 때 마침 불교와 국가·종교 관계에 대한 글을 발표해 ‘애국불교’ 이론가로서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스즈키에 따르면 선불교의 깨달음 체험이 생사를 초월하는 이상 견성(見性)했거나 선수련의 경력이 깊은 사람은 자신과 남의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도 버리고 남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시끄러운 야만인인 중국인을 평정하기 위해 무아경에 도달해 자신과 남을 쉽게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보살도라는 게 스즈키의 결론이었다.

결국 그는 당시의 어용적 이데올로기들이 만들어놓은 ‘황도’, ‘무사도’(武士道)의 ‘순수 일본적인’ 이념에 갖가지 궤변을 동원해 불교까지 뜯어맞추었다. 그 뒤 미국에 진출하여 활동한 스즈키는 ‘일본 문화의 정수’, ‘선불교’와 ‘무사도’를 아예 같은 범주에 넣어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에서 성공을 거둔 <선불교와 일본 문화>(1936)라는 영문으로 된 저서에서, 그는 검도(劍道) 선수를 예로 들어 ‘무사도의 고귀한 무아경 도달’을 논한다.

검사(劍士)의 ‘몸과 검의 통일’, ‘이성을 배제한, 본능에 의한 행동’이야말로 불교적 깨달음과 보리(菩提)에 가깝다는 그의 불교 소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스즈키는 <일본적 영성(靈性)>(영문판, 1972)이라는 책에서 ‘무사도, 다도,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최고의 표현’으로 평가하고, ‘생사 초월, 직감, 본능, 영성’ 위주의 동양 문화는, 이성적인 판단 위주의 사회 비판이나 물질주의적인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불교의 폭력화·어용화는 드디어 복고적 수구주의로 이어진 것이었다.

불교는 어떻게 미국 자본에 이용됐나
물론 무속 연구에 공로를 세운 엘리아데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경전의 영문 번역으로 불교의 학술적 연구·대중화에 기여한 스즈키를 무조건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언론·출판자본이 대중화한 두명의 극우적 학자의 선불교의 해석은 불교의 사회 참여적 측면을 완전히 제거하고 불교의 반(反)자본주의적·반전(反戰)적 정신을 말살해버렸다.

그렇다면 미국의 자본이 도모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엘리아데나 스즈키에게서 “역사는 속(俗)일 뿐 성(聖)이 아니다” “종교의 목적은 종교의 성(聖) 그 자체다” “전쟁도 무아경의 일종이다”와 같은 것을 배운 젊은이들은, 비판이론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바로 그걸 노린 것이었다!

1960∼70년대는 신좌파의 창조적·해방적인 이론이 미국·서구를 풍미한 시절이었다. 자본과 자본주의에 위험한 그 주제들로부터 청년층의 관심을 돌리는 방법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상업적인 포르노의 대대적 허용과 마약유통의 장려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다. 결국 극우학자들이 왜곡한 ‘미국적인’ 선불교의 유포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된다. 불교를 제대로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불교가 미국 자본에 의해 이렇게 이용됐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다(*유사한 지적은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도 읽을 수 있다).

엘리아데와 스즈키의 사례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계급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학술과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사회 참여를 부정하여 ‘순수’를 내세우는 학술·종교란, 많은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체제 옹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착취와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 옹호는 결국 학술·종교를 크게 왜곡시키지 않을 수 없다.(박노자/ 오슬로국립대교수·한국학)

07. 06. 15.

P.S. 엘리아데에 대한 최근의 평가에 대해서는 교수신문의 기사를 옮겨놓은 '엘리아데, 어떻게 볼 것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907215)를 참조.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 2007-06-16 00:12   좋아요 0 | URL
젊은 시절 루마니아 파시즘의 사상적 리더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숭산스님의 행적에 대해선 제가 잘 모릅니다...

드팀전 2007-06-20 08:10   좋아요 0 | URL
제가 가끔 불교관련 책을 읽습니다.도구적으로 읽는 편이지요.^^

"자본이 도모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엘리아데나 스즈키에게서 “역사는 속(俗)일 뿐 성(聖)이 아니다” “종교의 목적은 종교의 성(聖) 그 자체다"...

종교의 탈정치,탈역사성에 대한 케케묵은 논쟁의 주요 쟁점을 언급한 것 처럼 보입니다.
..거기에 제가 알라딘에서나 현실에서 접하는 상황은 몇 가지 다른 물감들과 교묘하게 얽혀있어보입니다...명상-불교(또는 기독교)-개인화된 내면의 변화-전근대적 선비문화에의 애정-생태주의...이런 것들이 얽히며 개인/사회의 변화의 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어보입니다. 이 라인 선상에 움직이면서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어왔거든요.그게 사실 이 라인에 힘을 싣는 효과가 되기도 하지요.잘 따지고 보면 그런 분들은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지만 추종하는-그러니까 추종만 하겠지만-많은 사람들은 그분들의 그림자만 좋아라 합니다.최근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 생가에는 아직도 발길이 이어진다네요.그러면서 '북한퍼주기'를 비판합니다..^^권선생도 퍼주셨는데...그러나 그분들의 존재를 존경하는 것과 이 라인을 성찰해보는 것은 다른 것이겠지요.이 라인이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 위의 글은 시시점을 준다고 보입니다.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권력이든 체제이든 그런 것들에 의해 홈페어진 것이든 만들어진 틀이든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본다면 음모론이 되나요?

로쟈 2007-06-22 11:53   좋아요 0 | URL
이번에 성-속의 이분법에 대해서 재고해복 됐습니다. 사실 대학 1학년 첫학기에 가장 인상깊었던 강의가 종교학개론이었고 엘리아데는 그 강의의 주연이어서 제겐 단순한 종교학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름입니다...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내한 공연을 갖는다. 기간은 이달말부터 내달 7일까지이고 장소는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이다. 공연 소식은 이달초에 접했는데, 자세한 일정은 오늘자 기사를 보고서 알았다. 변수들이 있긴 하지만 한편 정도는 관람하면 좋겠다.

이번에 내한 공연을 갖는 극단은 '스타니슬라프스키'(혹은 스타니슬랍스키)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군말이 필요없는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를 가리킨다. 그는 지난 19세기말과 20세기초 러시아 최고의 연출가였으며 안톤 체호프의 여러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그의 연출론은 이미 국내에 다수 번역/소개돼 있으며(소위 '메소드 연기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예술인생>(이론과실천, 2000) 또한 나온 지 오래이다. 겸사겸사 러시아 공연문화의 정수를 감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한겨레(07. 06. 15) 나이트가운 입은 금발의 ‘카르멘’이 왔다

치렁치렁한 긴 검은 머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정열적인 집시 여인이 금발 단발머리에 아슬아슬한 은색 나이트가운 차림의 도발적인 신세대 여성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볼쇼이극장과 마린스키극장과 더불어 러시아 공연예술의 중심축으로 꼽히는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페라 <카르멘>을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으로 해석해 1999년 초연한 작품의 여주인공 모습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오페라하우스)에서 ‘고양아람누리 개관 예술제’ 하이라이트를 꾸민다.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은 20세기 사실주의 연극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러시아의 배우 겸 연출가, 제작자인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의 의지를 60년 넘게 지켜오며 혁신적인 무대작품을 꾸준히 올리는 공연예술센터다. 이번에 방한하는 공연단은 오페라단을 비롯해 합창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무용단 등 210여명에 이른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선보이는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6월28~30일)과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7월5~7일) 등 두 작품이다.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의 걸작으로 국내에서도 한해 최소 2~3차례는 무대에 오르는 인기 작품이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은 ‘이제까지의 <카르멘>은 잊어라’고 요구한다. 집시 여인 카르멘이 신세대 여성으로 변신하는 등 배역 해석부터 파격적이다. 또한 대부분 기존 오페라들이 화려한 세트와 의상의 시각적인 부분, 그리고 가창력과 연관되는 청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데 견줘 스타니슬라프스키식 카르멘은 배우(성악가)들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섬세한 내면 연기가 도드라진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00년 볼쇼이극장이 국내에 첫선을 보였으나 자주 접할 수 있는 오페라는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는 1890년 동생 모데스트가 푸시킨의 소설을 토대로 쓴 오페라 대본을 읽고 44일 만에 3막짜리 <스페이드의 여왕>을 완성했다. 부귀와 명예를 찾아 도박에 빠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허망한 인생의 최후를 다룬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여년간 극장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레프 미하일로프가 성악가들에게 심리적인 연기 부분을 강조해 해석한 버전으로 1976년 초연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현 예술감독인 알렉산드르 티텔이 연출을 맡아 레프 미하일로프의 해석에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더해 <카르멘>과 함께 첫 외국나들이에 나선다. 알렉산드르 티텔은 함께 내한하는 노지휘자 볼프 고렐리크(74)와 함께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민예술가 지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볼쇼이극장 오페라단 주역 가수로 활동했던 손성래(39) 서울종합예술원 외래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공연한 <카르멘>과 <스페이드의 여왕>을 자주 봤는데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아 독특한 공연 경험을 맛볼 것이다”라며 “앞으로 한-러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져 수준 높은 공연이 꾸준히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단은 특별공연으로 1일에는 노루목 야외극장에서 ‘러시아 음악의 밤’(전석 무료), 2일에는 아람음악당에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도 연다.(정상영 기자)

07. 06. 15.

P.S. 참고로, 오페라 <카르멘>보다는 덜 알려진 <스페이드의 여왕>의 공연 시놉시스를 옮겨놓는다(나는 예전에 영국에서 공연된 작품을 DVD로 본 적이 있다). 아래에는 주인공이 '헤르만'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영어식 표기이며 러시아 이름은 '게르만'이다. 그리고 결말은 주인공의 자살로 돼 있지만 푸슈킨의 원작에서는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오페라 외에 이 작품은 러시아와 영어권에서 여러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제1막
1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여름철의 정원, 태양은 빛나고 유모가 어린아이를 재우고 있다. 꼬마들은 군대놀이를 하고 있다. 헤르만은 그의 친구인 톰스키 백작(바리톤)에게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때 헤르만이 사랑하는 바로 그 여자 리자(소프라노)의 약혼자인 에레츠키 공을 만나 2중창으로 감정의 평행선을 긋고 뒤이어 정원에 리자와 그녀의 조모 백작부인(메조소프라노)이 나타난다. 톰스키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이 젊었을 때 대단한 도박꾼이었고 미녀여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그 남자들 중 한 명이 백작부인에게 도박에서 반드시 등장할 수 있는 ‘3장의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그 후 그녀는 그 비밀을 다른 두 명의 남자에게 전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만약 그 비밀을 제3의 사나이에게 전하려고 하면자신이 죽게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헤르만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암울한 운명을 느끼며 리자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다진다.

2장: 리자의 방
조용한 저녁. 백작부인의 저택 리자의 방. 리자는 친구들과 함께 쓸쓸한 자신의 심정과 애수를 노래한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즐거운 러시아 민속무용을 노래하며 춤추다 가정교사에게 들켜 일단 소동은 가라앉는다. 쫓겨 나간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남은 리자는 는 집요하게 다가오는 헤르만의 형상에 안타까워한다. 그때 갑자기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헤르만. 발코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며 서로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한다.

제2막
제1장 : 화려한 무도회장
어느 귀족의 가면무도회장. 헤르만과 리자는 무도회에서 만나고 그녀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의 방 열쇠를 건네준다. 3장의 승리의 카드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다짐하는 헤르만.



제2장 : 백작 부인의 침실, 늦은 밤
백작부인의 침실. 헤르만은 백작부인의 방에 몰래 들어가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권총으로 그녀를 협박하고 그녀는 공포에 질려 숨을 거둔다. 리자가 그 자리에 들어와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카드의 비밀이었군요” 라고 말하며 절망적으로 외친다.

제3막
제1장 : 막사의 헤르만의 방
헤르만은 테이블에 앉아 리자의 편지를 읽고 있다. 죄책감과 아쉬움에 어쩔 줄 모르는 헤르만 앞에 백작부인의 망령이 음산한 음악과 함께 나타난다. (3, 7, 에이스) 라는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리자와의 결혼을 요구하며 떠나는 망령. 게르만은 넋을 잃고 망령의 말을 반복한다.

제2장 : 한방의 강둑
짐니 운하의 기슭. 리자는 슬픈 아리아를 부르며 게르만을 기다린다. 뒤이어 나타난 헤르만과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만 헤르만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3장의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도박장에 가겠다고 하는 헤르만. 그에게 밀쳐진 리자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제3장 : 도박장
시끄러운 소음과 노래들. 헤르만이 나타나 테이블에 앉는다.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사용해 2번을 내리 이기는 헤르만. 마지막 큰 승부의 상대는 연적 에레츠키 공. 마지막 카드 에이스로 승부를 내려는 게르만에게 주어진 카드는 에이스가 아니라 스페이드 퀸. 게르만은 그 스페이드 퀸에서 백작부인의 망령을 보고 그 자리에서 자살하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urblue 2007-06-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싸서 다 보지는 못하겠고, <스페이드의 여왕> 정도는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6-1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고입니다.^^

수유 2007-06-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은 아주아주 멀군요. 외삼촌댁이 있긴 하지만.. 놀토도 아니고. 그나저나 저 이파리는 깻잎? 아님 수국 이파리일까요? 열 때마다 녹색의 하늘과 이파리가 시원합니다.

로쟈 2007-06-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더 멀지요.--; 그리고 이파리는 깻잎이란 설이 있지만 깻잎은 아니고 비슷한 종류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모스크바대학 산책로에 널려 있었는데 깻잎인 줄 알고 따먹으려고 했지만 먹는 건 아니라더군요...

sophie 2009-12-07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하고 검색해봤는데 스페이드의 여왕이 있네요. 저번에 <보리스 고두노프>는 짤즈부르그에서 상연된 비디오 클립으로 봤는데 무대며 코러스 신에서 나오는 러시아 전통민요, 주인공 보리스 고두노프, 사제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푸쉬킨의 작품이네요. 선생님이 푸쉬킨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주엔 빠질까 했는데 아무래도 가게 될 것 같아요. 공연 시놉시스 고맙습니다. ^^
 

영화 <검은 집>에 대한 리뷰(http://blog.aladin.co.kr/mramor/1309219)를 옮겨놓고 보니까 문득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의 어느 대목에서 지젝이 하이스미스의 동명의 작품을 다루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로 읽는구만. 나는 나대로 읽겠다. <삐딱하게 보기>에서는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라고 읽는다)의 책들이 나온 게 어느덧 재작년 겨울이었다. 책은 두 권쯤 사둔 것 같은데 아직 열어보진 못했다. 그럼에도 물론 지젝의 얘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예전에 읽어둔 책의 서두는 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참조).

 

 

 

 

하이스미스의 <검은 집>은 <삐딱하게 보기>의 1장 중 '현실 속의 블랙 홀' 절에서 언급된다.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은 환상 공간이 텅빈 표면, 즉 욕망의 투사를 위한 일종의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환상 공간이 갖는 생생한 내용들의 매혹적인 현존은 단지 이 텅빈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27쪽)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사건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데, 그곳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면 마을의 선술집에 모여서 마을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폐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는 향수어린 추억과 마을의 전설들을 되새기곤 한다. 이 신비로운 '검은 집'은 어떤 저주에 걸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그곳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라고(그 집에 유령이 나타난다든지, 침입자는 모두 죽이는 정신병자가 혼자 살고 있다든지 하는 소문이 퍼져 있다) 여겨졌지만, 동시에 이 '검은 집'은 그들 모두를 젊은 시절의 추억과 연결해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은 그들이 최초로 저지른 범죄, 그 중에서도 성적 경험과 관련된 장소였던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그 마을에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는 젊은 엔지니어다. '검은 집'에 대한 전설을 모두 듣고난 그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내일 저녁 이 수수께끼에 싸인 집을 탐험해보겠다고 공표한다.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않했지만 암묵적으로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다음날 저녁 젊은 엔지니어는 뭔가 끔찍한 사건이, 최소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질 것은 기대하면서 그 집을 찾아간다. 잔뜩 긴장한 채 어둡고 낡은 폐가에 접근한 그는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올라가서 방마다 모두 조사해보지만 마루 위에 있는 몇 개의 썩은 매트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곧바로 선술집으로 돌아온 그는 의기양양하게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들의 '검은 집'은 단지 낡고 더러운 폐가에 불과하며 신비스럽거나 매력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노라고. 그의 말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그 엔지니어가 떠나려고 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사납게 그를 공격한다. 불행하게도 젊은 엔지니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고 만다."(28쪽)

그렇다면, 어째서 이 마을 신참자의 행동이 사람들을 그토록 경악하게 만들었을까? 지젝에 따르면 그들의 적개감은 "현실과 환상 공간의 '다른 장면(other scene)' 간의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검은 집'이 금지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향수어린 욕망과 왜곡된 추억들을 투사할 수 있는 하나의 빈 공간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으로서의 '검은 집'을 그저 낡은 폐가에 불과하다고 폭로함으로써 그 젊은 침입자는 "그들의 환상 공간을 일상적이고 흔해빠진 현실로 환원시켜버렸다. 결국 그는 현실환상 공간 사이의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접합할 수 있었던 장소를 그들에게서 박탈했던 것이다."('접합하다'는 'articulate'의 번역이다. 여기서는 '표현하다' 정도로 충분하다.)

마지막 문장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이렇게 부연한다: "이러한 점에서 필 로빈슨의 <꿈의 구장>(1989)에서 야구장으로 변형된, 수확을 끝내 깨끗해진 옥수수밭의 역할은 '검은 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그것은 환상의 형상이 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청소라는 점이다."(47쪽)

 

"<꿈의 구장>에 관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돌 것은 그 순수하게 형식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밭을 네모나게 잘라내고 그것을 담장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벌써 유령들이 그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 뒤의 보통 옥수수는 기적과도 같이 유령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의 비밀을 보호하는 신비로운 덤불로 변형된다. 요컨대 평범함 마당이 '꿈의 구장'이 되는 것이다."(48쪽)

지젝은 이 각주에서만도 세 가지 이상의 사례를 더 드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현실 속의 블랙홀'로서의 '환상 공간'이 곧 '꿈의 구장'이기도 하다는 점은 접수가능하다(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잖은가?). 여기까지 무리가 없다면 이제 중급 단계인 '환상의 윤리학'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루도록 하겠다...

07. 06.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