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발목 잡히는 일이 간혹 생긴다. 한겨레에 실린 김영민 교수의 칼럼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와 그 문체에 대한 철학자 강유원의 비판을 옮겨놓았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422055), 보기에 따라서는 '편파적'이란 인상을 주었을 법하다. 해서 내친 김에 최근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그의 공부론을 모아놓는다('공부론'은 '동무와 연인'에 이은 연재인데, 한겨레와 궁합이 잘 맞나 보다). 이소룡 편이 첫번째 연재였는지라 이어지는 건 그 두번째부터이며 나의 생각은 간간이 적어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6. 02) 공부론 / (2) 이종범, 혹은 내야수의 긴장
검도 고단자이기도 한 양선규 교수의 소설 <칼과 그림자>를 보면, “내 검도가 육체를 얻었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쉬운 말로, 저절로, 허세를 부리지 않는 지경에 들게 되었다고 해도 좋다. 혹은, 자기 생각의 틀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관념의 검도를 벗어났다는 뜻일 게다. 비록 관우의 청룡도를 얻었다고 해도 연습이 없으면 그것은 아직 ‘관념’이다.
자기 생각의 악순환 속에서 경화(硬化)하는 짓은 그 모든 공부의 지옥인데, 그 지옥을 뚫는 길은 타자(他者)의 지평을 얻는 길뿐이다. 근년의 많은 철학사상들이 필경 자기차이화(self-differentiation)의 체계에 귀속하는 변증법이나 대화주의에서 벗어나 타자의 문제에 깊이 골몰했던 것도 그 같은 시절 인연이 맺힌 풍경이다. 물론 어줍은 경험으로써 자기 생각을 박제화한 치들은 다만 절망 그 자체다. 그래서, 공부에 관한 한, 언제나 ‘조금 더’ 똑똑해지도록 겸허해야 한다. 가령 이윤기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이나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2006)과 같은 수작들은,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이 어떻게 내 생각의 탑을 허무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타자성은 일종의 폭력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폭력적 개입이 없이는 필경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 타자(打者)와 투수가 삼진과 홈런으로 주고받는 폭력적 개입, 주자와 야수의 충돌이 선사하는 새삼스러운 내 몸의 현실! 진정한 타자, 진정한 폭력과 만남(충돌)이 없는 문사들의 논쟁은 그런 뜻에서 대체로 사이비다. 피아의 구별도, 심지어 무기와 몸의 구별조차 없는 두루뭉술한 관념적 혼란과 혼동으로는 공부의 기본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지 않으므로 살지도 못하며, 그렇기에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타자성의 체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마치 도장격파(道場擊破)를 하듯이 각지의 지식인-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그 지식의 허구와 허세를 까발린 소크라테스야말로 지극히 무사적이지 않은가?
공부하지 않는 이들, 자기 생각과 경력의 오연(傲然) 속에 자의식의 깃발을 꽂은 이들, 싸워도 영영 죽지 않는 이들, 그리고 타자의 세계를 오직 자기 생각을 번식시키기 위한 뻐꾸기의 둥지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세상은 오직 자기 생각의 표상으로만 의미 있는 관념의 덩어리다. 그들에게 모든 인식(cognition)은 재인식(re-cognition)의 동화체계 속으로 내재화시키는 짓이며, 이때 타자는 자신의 거울방에 다만 그림자를 남길 뿐인 풍경이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實戰)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어떤 틈 속으로 스며든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가는 일이다.
일본 최고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1584~1645)가 쓴 병법서인 <오륜서>(五輪書)는 ‘차림새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상태’를 유독 강조한다. 문사들이 지행병진(知行竝進)을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형(型)을 뚫어내고 자기표현으로 나아간 단계로서, 이른바 검선일체(劍禪一體)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무사시의 해설을 덧붙이면, “몸이 정지해 있을 때에도 마음은 정지하지 않아야 하며, 몸이 민첩히 행동할 때에도 마음은 평정하게 하여 몸의 움직임에 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요컨대, 움직임 속에 머무름이 있고 머무름 속에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나는 지난 30년 이상 매일 몇 시간씩 버릇처럼 글쓰기를 계속해오면서 의도와 결실 사이에서 번득이는 바로 이 정중동동중정(靜中動動中靜)의 이치에 매우 익숙해졌는데, 그것은 마음이나 몸, 생각이나 손가락, 혹은 문사나 무사의 경우가 따로 나뉘지 않는다.
민활한 긴장의 일상적 배분이 생활화되는 가운데 ‘차림새가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상태’는 찾아온다. 시쳇말로 바로 그것이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할 수 있는 경지다. 야구의 천재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종범 선수의 말이다: “내야수는 투수의 공 하나하나를 놓쳐선 안 된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그게 맞아 나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생긴다. 그런 적당한 긴장감이 타석에도 이어지게 되면 타자로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수비할 때에도 공격하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승엽이라면, 수비가 곧 공격인 사람이 이종범인 것이다.(김영민/철학자)
공부인(工夫人)의 두 가지 모델이 제시된다. "마치 도장격파(道場擊破)를 하듯이 각지의 지식인-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그 지식의 허구와 허세를 까발린 소크라테스"와 전설적인 사무라이 야마모토 무사시이다. 김영민은 문사와 무사를 나누지 않으며 오히려 문사의 모델을 무사에게서 찾는다. 그것이 '몸으로 하는 공부'이다. 한데, 그가 말하는 타자는 우리를 윤리적 주체로 정립시키는 레비나스적 타자가 아니다. "진정한 타자, 진정한 폭력과 만남(충돌)이 없는 문사들의 논쟁은 그런 뜻에서 대체로 사이비다."라고 말하지만, 그때의 타자는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이 아니라 내가 '격파해야' 하는 강적으로서의 타자이다. 내가 그를 베지 않으면 내가 베이게 되는. '살벌한' 공부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겨레(07. 06. 16) 공부론 / (3) 변덕이냐 변화냐
영리한 인간은 그 근본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가 조형해온 ‘현명한 인간’이란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공부의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이다. 사과나무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충실히 사과를 맺으며 그 시절인연을 소중히 하는 법이고, 가령 일단 소크라테스를 만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 그의 자장(磁場)에 휩쓸려 들 수밖에 없다. 나는 20대의 어느 순간 키르케고르를 ‘만나’(나는 그를 ‘읽지’ 않았다!)기성의 제도 기독교로부터 섭동(攝動)했는데, 아, 실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공부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이에 비하면 영리한 것은 ‘변화’가 아니거나 혹은 기껏 ‘변덕’이다. 아, 우리의 세속은 바잡거나 반지빠른 변덕의 세상이다! 물론 변덕은 몸이 아니라 생각이 주체일 경우에 가능한 삶의 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변화의 비용이고 그것이 결국은 몸의 주체적 응답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면, 공부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한 슬기와 근기일 수밖에 없다.
영리한 인간들은 학같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솜씨있게, 날름날름 물고기들을 쪼아먹는다. 학은 자신의 깃을 물에 적시지 않는다. 칸트를 비판하는 헤겔의 유명한 말을 임의로 차용하자면,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영법(泳法)을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영리한 인간인 셈이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세속인 자본제적 삶의 형식은 이처럼 영리한 인간들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한다. ‘대학(大學)’이라는 자못 무서운 이름을 붙인 곳마저 그 영리한 인간들이 자신의 영토로 점유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두커니 서거나 이드거니 걸으면서 현명한 인간, 혹은 공부하(려)는 인간은 물속에 몸을 잠근다. 그리고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잠근 탓으로 혹간 몸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아가미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생활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단절하며, 마침내 ‘변덕’이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화’하고 마는 것이다.
영리한 인간들은 공부조차 상품으로 대하며, 값없이 냉소하는 가운데 그 필요한 부분을 발밭게 뽑아 먹는다. 그래서 공부를 ‘퀴즈화’시켜 벼락치기를 일삼는다. 임금의 호의도 무시한 채 스스로 과거시험을 피해 다니곤 했던 연암도 학술-문장-과거로 서열을 매긴 바 있고, 다산도 과거제의 폐해가 없는 일본을 한편 부러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실학자들은 과거를 아예 공부로 치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의 안팎을 막론하고 온통 현대판 과거시험들로 북새통이다.
이 수험생들은 자신의 몸으로써 공부와 만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활양식으로써 공부를 뚫어내지 않는 것이다. 아니, ‘만날 때라야 배운다(It i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서양 속담)지만, 이들에게는 ‘만남’ 그 자체가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A. Badiou)의 말처럼, 만남이 아니기에 아무런 ‘사건’일 수도 없는 것! 이들은 선생도 만나지 않고 구경하며, 책도 만나지 않고 절취(截取)할 뿐이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내가 공부를 지배하려 할 때 변덕은 변덕스럽게 기승을 부린다. (내 용어로 풀면, 앞의 것은 ‘하아얀 의욕’이고 뒷놈은 ‘박잡한 욕심’일 뿐이다.) 물론 그 변덕이 상업주의적 차이의 문화와 결탁하고 ‘결코 물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상품의 전략’(아도르노) 속으로 되먹임된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공부가 나를 지배하는 사건을 일러 변덕이 아닌 ‘변화’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만난 사건,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만난 사건, 조영래가 전태일을 만난 사건, 그리고 뉴턴이 사과를 만난 그 사건 속의 ‘돌이킬 수 없음’처럼, 그 만남 속에 개시된 공부의 물줄기는 돌이킬 수 없이 그 학생들을 휘어잡는다.
얼마 전, 사진가 정주하 교수의 소개로 전직 불교 승려였던 바라춤과 차(茶)의 명인을 만나게 되었다. 전주 인근의 외진 곳에 한옥을 개축한 집은 상당한 규모의 정원을 보듬고 있었는데, 갖은 꽃나무들이 시절을 좇아 왕성했고, 한가운데의 조촐한 연못도 주인의 기색을 닮은 듯 소담스러웠다. 2천만원의 전셋집이라는데 서울이라면 그 100배를 준다 해도 얻기 어려운 운치와 깊이가 자못 그윽했다. 두어 시간 가량 차를 대접받으면서 환담하는 사이, 그 주인 부부가 ‘녹차방’으로 쓴다는 작은 문간방을 구경하면서 나는 또 한번 그 ‘돌이킬 수 없음’의 기미에 젖는 작은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현란하고 번드레한 만화경적 도시의 공간과는 다른 공간, 돌이킬 수 없이 그 ‘깊이’와 부딪칠 수밖에 없는 공간, 도시적 영리함만으로는 도무지 지배할 수 없는 공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문(人紋)이 아로새겨진 공간, 인간 존재의 다른 차원을 불현듯 일깨우는 공간, 그리고 변덕이 없을 공간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방안을 조심스레 바장였다. 그리고 ‘욕심 없는 의욕’을 키우며 내 몸을 그 공간 깊숙이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영리한 변덕으로 일관하는 이 시대를 돌아보며 ‘어떤 공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김영민/철학자)
그에 따르면, 공부란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이 가져다주는 '변화'이다. 이로써 연애만한 공부가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생활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단절하며, 마침내 ‘변덕’이 범접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화’하고 마는" 연애!.. 그리고 그로부터 짐작해볼 수 있는 '공부'의 유형학: 사건, 사고, 스캔들...
한겨레(07. 06. 30) 공부론 / (4) 차붐, 적지(敵地)에서 배운다
그간 이런저런 학술모임에 초청받아 강의나 강연을 한 것이 줄잡아 수백 건은 되겠다. 1990년대에는 이른바 ‘심층근대화’를 위한 인문학 운동 차원에서 열심을 부리기도 했던 것인데, 막 개화되고 있던 대중들의 문화적 활성을 인문학적 가치와 연계시키려고 애를 썼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학인들과의 대화적 만남과 그 창의적 긴장 속에서 내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현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숱한 강연들의 풍경, 그 명암과 득실을 일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강연들을 돌이켜볼 때 가장 의미심장하게 남은 인상으로는 아무래도 ‘오인과 어긋남’일 것이다. 한마디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강연장은 늘 오해의 잔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리처드 로티나 헤럴드 블룸 등이 말하는 오인의 역설적 창의성도 있었을 테고, 자크 라캉의 말처럼 대화적 관계 그 자체의 조직 속에 각인된 어쩔 수 없는 오인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강연장에서 횡행하는 의사소통적 오해는 이런 식으로 변명할 수 없는 병통들로 들끓었고, 그것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우선 세태를 그 배경으로 거론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2000년을 고비로 청중들의 관심이나 열의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과 인문학의 텍스트는 사용설명서나 리모컨만 달랑 달고 나오는 제품이 아니다; 좋은 글과 말일수록 한 쪽 한 쪽, 한 문장 한 문장, 한 자 한 자씩을 자못 고통스럽게 읽고 듣고 이해하는 ‘비용’은 필수적이지만, 세태와 대중은 이런 식의 비용에 날이 갈수록 적대적이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위한 얼토당토않은 화폐의 비용은 앞다투어 치르면서도 좋은 책의 해득을 위한 정신의 비용은 좀처럼 치르려 하지 않는다. 학문 일반의 기능주의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상업주의적 키치화, 그리고 퀴즈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이며, 이는 강연장의 기운과 분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웃기기라도 못하면 주목을 받기 어려운 세속 속에서, 진지한 공부는 점점 자신의 영토로부터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강연 그 자체가 한갓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진지한 교학상장의 배움터가 되기는커녕 기성의 제도를 유지하려는 반복강박적 장치가 된 채, 서둘러 질문과 토의를 닫아 버리고 뒤풀이랍시고 술담배 속에 갖은 잡담이나 일삼는 게 예사였다. 더 이상의 얘기는 오직 각설, 각설, 하겠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려는 것은 학술행사나 강연에 참가하는 학인/지식인들의 행태다. 그리고 그 요점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문사들은 유독 학술적 대화에 만연한 오해와 오인 속에 덤으로 묻힌 채 스스로의 무능과 나태를 손쉽게 숨길 뿐 아니라, 아예 왜장치듯 실없이 떠벌리기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화술에 대한 몽테뉴의 고전적 권면과는 달리, 강연자를 위협하는 정신의 힘을 만나는 쾌락(!)은 점점 드물어만 간다.
인문학적 대화는 그 속성상 꼼꼼한 준비와 섬세한 접근, 죽도록 경청하기와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그리고 동정적인 혜안과 합리적인 대화술이 필수적이기에 일회성의 극장식 만남에 따르는 한계는 만만치 않다. 우선 강연의 형식 자체가 비인문학적이기도 하려니와 강사를 대하는 문사-청자들의 태도에서 그런 실천적 지혜와 배려, 혹은 근기를 찾아보기는 차마 어렵다. 발표할 문건을 미리 숙독하고 참가하는 이들조차 소수인데다, 그저 제 시간에 자리를 지켜주는 이들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일본 최고의 무사였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그의 병법서에서 ‘차림새가 없는 듯이 차림새가 있는’ 이치를 거듭 강조한 것은 무사의 삶이란 곧 일생일대사의 승부의 현장이고, 상대를 놓치는 순간 곧 죽음은 임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없이 많은 학술행사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자탄하는 것은 우리 문사들의 세계에서는 상대를 극진히 공대해야만 살아남는 긴박하고 위태로운 만남의 현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냉혹한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와 달리, 문사들은 ‘(나쁜) 모방적 상호성의 메커니즘’(르네 지라르) 속에서 오해의 잔치와 실수의 파티를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 죽었다는 소식이 없다. 물론 칼과 펜의 이치 사이에 놓인 어떤 심연을 까탈스럽게 모른 체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말(어휘)로 행복해지는 세상’(리처드 로티)은커녕 각자의 실력조차 제대로 점검할 수 없는 문사들의 제도화된 학술행사와 그 곤경을 더불어 성찰하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먼 이국에서 낭보를 띄워주곤 했던 갈색폭격기 차범근의 활약을 기억한다. 적지(敵地)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뛰고 피하고 부딪치고 넘어지면서 이룬 그 정직한 성취를 기억한다. 말없이 정직하던 그의 근육을 기억한다. 적들을 기민하게 공대해야만 살아남는 승부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공대하던 그의 정직한 몸을 기억한다. 오직 실력만이 통하던 그 현장의 열기를 여태 생생히 기억한다.(김영민/철학자)
다시 무사시다. 정중동동중정. 인문학 학술모임과 강연에 대한 실망감을 적으면서 필자가 되새기고 있는 것은 '무사들의 '정직한' 죽음 vs 좀비 같이 되살아나는 문사들'이다: "무사들이 정직한(!) 피를 뿌리면서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문사들은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한다." 문사들도 좀 죽어줬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람이겠다. 물론 당초의 기대는 "막 개화되고 있던 대중들의 문화적 활성을 인문학적 가치와 연계시키"고 "낯선 학인들과의 대화적 만남과 그 창의적 긴장 속에서 내 공부를 점검할 수 있는 ‘현장’으로 활용하"하려는 것이었지만 실없이 떠벌리기나 좋아하는 학인/지식인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다는 것. 그리하여 "오직 실력만이 통하"는 무사들/스포츠인들의 세계가 그립다!
한겨레(07. 07. 14) 공부론 / (5)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 한 문장만 새겨보고 여겨들어도 공부의 벼리를 휘어잡을 수 있을 테다. 물론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는 식상한 말처럼 인간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존재(ens cogitans)’다. 무념무상이 대체로 공염불에 빠지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또 다른 공상으로 미끄러질 때, 생각하기와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 사이의 사이길을 뚫어내기란 실로 어렵다. (내 지론을 서둘러 반복하면, 생각의 바깥은 역시 생활양식의 충실성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學而不思卽罔)’(논어)는 격언을 우리는 여태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면 씨알이 되고, 생각을 못하면 죽정이!’라고 절규하시면서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국훈(國訓)을 남겨주시기도 했다.
‘쯧쯔, 저 놈, 도무지 생각이 없어!’라고 하시던 이런저런 어르신들의 추억도 여전하다. 옛날, 아주 옛날, 내가 속했던 핸드볼 팀의 코치는 우리들을 개잡듯이 패면서 ‘이 X탱구리들아, 생각 좀 해라, 생각!’이라고 시합에서 질 때마다 볼멘 소리를 내뱉곤 했다. 미국에서 만난 영리한 초등학교 교사 헤이즐은 그녀의 학생들을 향해서, ‘말하면서 생각을 해요!(Think as you speak!)’라고 버릇처럼 외쳐댔다.
이 모든 삽화 속에 등장하는 ‘생각’이란 한결같이 긍정적인 무엇으로 제시된다. 데카르트주의의 통속적인 변명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긍지에 부합하는 활동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잘라 말해서 공부하는 인간이 그리 많지 않듯이, 생각이 곧 공부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라면 장삼이사 그 누구나의 것일 뿐 아니라 필부필부라면 오히려 멈출 수도 없을 지경으로 늘 과잉하지만, ‘공부’는 그처럼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그것은 해방적 ‘상상’의 근기가 ‘공상’의 백일몽적 변덕과 그 근본에서 다른 차원의 활동이라는 사실에 조응한다. 현명한 선인들은 ‘어디 가든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非往而無工夫)’며 아마추어들을 유혹하지만 오히려 눈여겨 살펴야 할 대목은 그들이 남모르게 치른 비용이다.
한때 내가 있던 대학에는 유달리 만학도가 많았는데, 그 중의 일부는 철학-공부를 자신들의 나이와 경력과 고민(‘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의 바벨탑은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대체, ‘생각’이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경탄해 마지 않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한 토막을 인용해서 살펴보자: “평소에 나는 금방 자려고 하는 대신, 지나간 옛날 우리집의 생활, 콩브레의 왕고모 댁에서, 발베크, 파리, 동시에르에서, 베네치아, 또는 그 밖의 고장에서 보낸 생활을 회상하거나 그러한 장소,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 들은 일 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한다.”(<스완네집 쪽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은하수 같은 상찬과는 별도로, 꼭 이런 짓-“…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하는 짓-을 일러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간 이런 식으로 자기-생각에 빠지는 짓을 일러 ‘자서전적 태도’라고 불러왔는데, 그 요체만을 지적하면 자기동일성을 심리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생각’ 따위를 일삼지 말라는 게 또한 순자(荀子)의 말씀이다. 요컨대,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 박혀 생각만 하느니 다 쓸 데 없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는 말인데, 이 위험이란 곧 자기-생각을 ‘자연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혹은 (괴델을 원용해서 말하자면) 그 생각의 일부로써 그 생각의 틀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쳐서 자빠지는 일이다. 혹은 내 ‘생각’만으로는 영영 너의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내 생각의 막(膜)을 찢고 나가는 모종의 실천적 근기가 없이 들먹이는 관념적 상호소통의 이상이 종종 공소하다는 사실을 느리지만 지며리 깨쳐가는 과정들이다.
문제는, 자기-생각이라는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실은 생각이 적어서 공부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실없이 생각이 많은데다 결국 그 생각의 틀 자체가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는 게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 이 경우에 전형적인 증상은 냉소와 허영이다. 냉소와 허영이란 타인들이 얼마나 깊고 크게 자신의 존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나/너(주/객)의 인식론적 이분법을 비판하고 둘 사이의 구성적 연루를 밝혀 온 것에 귀기울여 볼 노릇이다.
생각은 그 외래적 기원을 잊고 무서울 정도로 자기 자신만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잡다한 생각의 다발들로 테두리를 짓고 벽을 쌓아 올리며 일희일비하는 것이다. 일찍이 하우저는 ‘심리학은 은폐되고 불철저한 사회학’이라고 갈파하기도 했지만, 좋은 심리학은 늘 심리의 바깥에서 조언을 구하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모든 생각이 애초에 그 생각의 바깥에서 움터왔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일과 같다. 공부도 조직적인 생각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김영민/철학자)
요는 ‘어디 가든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非往而無工夫)’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제값의 공부는 지극히 드물다는 것. (잡)생각들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가 공부인바(그 많은 수험생들은 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러한 정의에 따르자면 대한민국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필자를 포함해서 몇 안되는 것이겠다. 하니 어중이떠중이들은 공부란 말을 입밖에 내는 일도 삼가할 일이다. 대중으로선 장정일식 공부가 상식에 맞는 게 아닌가 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1000883 참조).
07. 07. 19-20.
P.S. 요는 공부의 길이란 게 고고한 무사도와 같은 것이며 공부의 세계는 오직 실력만이 통하는 세계라는 것. 이 다른 차원의 공부가 대중이나 범상한 학인들이 고작 '퀴즈화'하는 공부가 아닐 것임은 당연하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궁극이다. 하니, 니들이 공부를 아느냐?..
P.S.2. 김영민에 이어서 지젝에 관한 페이퍼를 쓰다 보니 예전에 읽은 칼럼이 생각나 옮겨놓는다. 김영민 교수의 칼럼 중에 지젝이 언급된 것이어서 예전에 옮겨놓을 뻔했던 칼럼이다.
한겨레(07. 01. 12) [동무와연인] 스승의 기운이 현신한 제자
출근할 때마다 현재 김흥호(1919~) 선생의 방을 지날라치면 '사각사각', 늘 먹가는 소리와 함께 진한 먹물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 사이, 그는 묵향(墨香) 가득한 작은 서재의 창 밖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있곤 했다. 나는 그의 연구실에서 먹가는 기계를 난생 처음으로 보았고, 그를 통해서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도(道)는 실천'이라는 그 진부한 얘기가 한 사람의 생활 양식을 통해서 진득하고 이드거니 구체화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1990년대 초에 나는 현재 선생과 같은 학교에 재직했는데, 우연찮게 그의 연구실은 바로 옆 방이었다. 근 3년간 옆집살이(!)를 하면서 매일같이 스치고 대하는 중에 이런저런 인연을 쌓을 수가 있었다. 산행을 같이 했고, 일식(一食)하던 어느 자리에 운좋게 동석하기도 했으며, 일본어책을 읽다가 궁색한 곳이 생기면 냉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촉급하게 상경해서 이사할 곳을 얻지 못해 난감했을 때에는 이화여대 후문 쪽에 있던 그의 집에서 근 보름간을 기숙하기도 했는데, 그 정갈하고 소담한 정원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어느 학기엔가 그가 강의하던 <선(禪)과 철학>이라는 수업 중에 들어가 몇 차례 서양철학을 강의하면서부터 그는 내게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내 강의의 인상을 얹었다면서 <유심현묘(幽深玄妙)>라는 붓글씨를 써서 액자에 담아 선물로 보내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후로 그는 내게 편지를 보낼라치면 꼭 나를 “천재”라고 칭하곤 했고, 위당 정인보나 다석같은 분을 스승으로 두었으면서도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이 학교에서는 내가 김 교수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정색을 하곤 했다. 불과 손자뻘의 나이였던 나는, 아마도 ‘내가 몹시 귀엽게(!) 보이는가 보다’라고 여겼을 뿐, 그 드문 인연에서 내 공부길의 새로운 진경(進境)을 탐문할 지혜도 깜냥도 요량도 없었다.
근현대 한국 지식계의 근원적 불행처럼, 내게도 스승이 없었으며 스승을 찾을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당신(학생)이 나(스승)처럼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다머(H.G. Gadamer) 식의 해석학적 권위가 사라진 세상, 그것이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 한국 지식계의 비밀이다. “철학의 전수(傳授)는 스승-제자라는 제한되고 형상화될 수 없는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바디우(A. Badiou)식의 철학관이 오히려 타매되는 냉소와 권력욕망의 지옥, 그것이 한국 철학계의 비밀이다.
물론 내가 그의 스승인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필시 그같은 인연 덕분이었을 것이다. 함석헌을 비롯해서 다석 선생을 따른 제자들이 여럿 있지만, 특히 그는 스승의 자취를 진득하고 충량하게, 조용하고 지며리 따른 것으로 유명하다. 일식(一食)도 결국 다석 선생을 모방한 버릇이었지만, 그가 여든이 넘도록 일반 청중을 상대로 동서양의 경전과 사상을 넘나드는 강의-증여에 열심이었던 것도 역시 스승 다석을 모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다석 선생을 뵐 기회조차 없었지만, 만 3년간 현재 선생의 일상을 그 편린이나마 지켜보는 가운데 글로 읽은 그 스승의 기운이 현신(現身)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논문 한두 편만 썼다 하면 냉소와 객기가 하늘을 찌르는 이 토끼들의 마을- 호랑이들은 모두 파리나 런던, 베를린이나 뉴욕에 있다는 신화! -속을 살아가면서 가장 놀랐고 또 부러웠던 것은 그 도저한 권위와 그 신뢰였다. 그가 스승을 회고하는 글이나 말 속에는 스승의 권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태고의 것처럼 어둑하지만 깊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선생님이 너무 여러번 한글에 신비가 있다고 하셔서 요새는 나도 무엇인지 한글에 신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유영모 선생과 더불어 30년>. 김흥호)
스승의 길을 무턱대로 모방할 수 있는 쾌락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다. 우리같은 표절과 짜깁기의 천국에서는 언감생심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교학(敎學)의 경지일 것이다. 청산주의와 따라잡기로 일관한 한국의 정신문화적 근대가 겪었던 가장 큰 불행은 무엇보다도 마음놓고 본받을 수 있는 ‘생산적 권위’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이며 창의적 긴장의 원천으로서 후학들의 삶과 앎의 행로를 부단히 채근하거나 계고(戒告)할 수 있는 권위있는 참조인간들(Bezugspersonen)이 없었던 것이다.
수입된 종이 호랑이들이 판치는 세상! 그같은 세상 속에서는 진검승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먼 나라 맹수들의 소문만을 먹고 사는 토끼들의 마을에서는, 160㎝의 단구였던 다석 선생 앞에서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이 숨을 죽이며 죽도록 경청했던 것과 같은 진검승부의 공부와 사귐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죽도(竹刀)를 든 토끼들의 표절과 짜깁기 싸움판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것은 스승의 권위만으로 가능해지는 진정한 모방의 힘이다. 과연, 한국의 근현대 학문사는 스승들의 주검과 무덤 위에 초고속으로 뻗어올라간 눈치보기와 베끼기의 고층 아파트.
진정한 모방의 힘은, 충실하고 충실해서 마침내 그 모방을 뚫어내는 길(왜 일본은 모방의 천국이되 표절이 적은가?) 속에 있다. 가령, 라캉의 생산성이 그러하고, 지젝의 생산성이 그렇지 않던가? 지적 식민성이란 이 모방의 시대, 혹은 근대라는 번역과 인용의 시대를 충실하게 뚫어내지 못한 사정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박과 냉소가 판칠 일은 당연지사.
언젠가 나는 늦은 오후의 사양(斜陽)을 끼고 앉아 그와 담소하다가 문득 선문답같은 어투에 다소간의 호기심을 얹어 물었다: “선생님, 다석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진인(眞人), 진인이었지요!” 대답도 역시 선문답처럼, 그것, 뿐이었다.(김영민/전주한일대 교수·철학)
어제오늘 그의 공부론을 읽다보니 "수입된 종이 호랑이들이 판치는 세상! 그같은 세상 속에서는 진검승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란 문구가 비유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먼 나라 맹수들의 소문만을 먹고 사는 토끼들의 마을"에서 필자가 갑갑증을 느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