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는 책이 눈에 띄지 않아(방안에 있는 책들이 거의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있다) 해야 할일을 미뤄두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러시아 관련서 두 권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 권은 전설적인 무기상 자하로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권은 러시아 혁명기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의 자전적 소설이다... 

문화일보(07. 07. 20) 전설의 무기상 자하로프의 생애

많은 사람들이 책을 훑는 버릇 중의 하나는 책 속의 도판부터 보는 것이다. 20세기 초 전설의 무기상으로 알려진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와 시대를 다룬 이 책에도 몇 컷의 사진이 있다. 수염을 기른, 20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인물 사진에서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점은 차갑게 빛나는 눈빛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죽음의 상인’이란 제목 못지않게 바실 자하로프의 눈빛에 흥미를 느껴서였다.



10대 시절 매음굴의 문지기 등으로 일하며, 사람 심리 읽기를 배운 그가 무기상으로, 가상적국인 그리스와 터키에 잠수함을 판매한 것은 1877년이었다. 그가 무기를 파는 방식은 이랬다. 먼저 그리스에 가서 터키의 위협을 과장하며 잠수함 한 척을 판매한 뒤, 이번에는 터키에 가서 그리스의 위협을 강조하며 두 척을 팔았다. 그리고 계약이 성사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네 척을 팔았다.

“터키는 두 척의 잠수함을 구입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터키 해군은 이 잠수함 덕분에 흑해에서 귀국의 함정을 위협하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터키 같은 약소국은 두 척이면 충분하지만, 강대국인 귀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네 척은 필요할 것입니다.”

바실 자하로프가 러시아에 잠수함 네 척을 팔기 위해 보낸 편지다. 그의 정세 분석은 예리하고도 정확했지만, 세일즈 법칙은 간단했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예리한 정세분석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그의 기법은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1894년에는 영국의 최대 무기제조회사로 자리를 옮겨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함 4척, 순양함 3척, 잠수함 54척, 항공기 5500대, 중포 2328문을 팔아치우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가 개입한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뿐만이 아니었다. 189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을 비롯해 러일전쟁, 발칸전쟁 등의 교전국에도 무기를 공급했다. 1차 대전 뒤 그는 그리스 터키 전쟁을 다시 일으켜 전쟁 경기를 부추기려 했으나 실패하고 은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다 1936년 사망했다. 그는 전쟁 무기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장 조레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평화주의자 살해사건의 유력한 배후로도 지목된다.

‘죽음의 슈퍼 세일즈맨’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책은 베일에 싸인 바실 자하로프의 생애를 복원하기 위해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퍼즐 맞추기를 계속해 나간다. 이런 과정에 점차 뚜렷해지는 그의 모습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역시 베일에 가려있는 동시대의 역사다. 그가 활약한 지 10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각종의 명분으로 계속되는 시대, 지금은 어떤 뛰어난 상인이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김종락기자)

연합신문(07. 07. 18) 어느 테러리스트의 테러 일기

"나는 사는 것이 지겹다. 하루가, 일주일이, 일년이 단조롭게 늘어진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똑같은 우윳빛 안개이고, 똑같은 잿빛 평일이다. 사랑도 똑같고, 죽음도 똑같다. 삶은 좁은 길 같다."(191쪽)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직전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소설가 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의 자전소설 '창백한 말'은 소설이라기보다 한 개인의 내면적 기록이자,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사빈코프가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1904-1905년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뿌리부터 흔들렸고,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에 반발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궐기했다.

당시 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했던 사빈코프는 1904년 러시아 내무장관이던 바체슬라프 플레베를 암살하고 1905년에는 모스크바 통치자였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르비치 대공을 살해했다. '창백한 말'의 무대 역시 러시아 혁명 직전의 모스크바다. 작가는 사회혁명당에서 활동하는 조지 오브라이언이라는 테러리스트의 세 차례에 걸친 총독 테러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저질렀던 테러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테러의 정당성을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주인공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테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뇌는 "왜 테러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다"고 중얼거린다. 총독에 대한 1차 테러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을 보며 "전부 폭탄을 먹여줘야해"라며 알 수 없는 분노를 터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끝까지 기대려 했던 '테러의 정당성'은 질투심 끝에 연인의 남편을 살해하면서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것은 전혀 "명분 없는" 테러였다. 이윽고 그는 장관을 테러하라는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문한다. "어째서 살인을 합니까?"



또 다른 장편 '검은 말'은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녹색군 등으로 신분을 바꿔가며 적극적인 반 볼셰비키 투쟁을 전개했던 시기를 담은 작가의 마지막 유작이다. 1917년 혁명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케렌스키 임시정부 하에서 국방차관까지 지냈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제명되자 러시아 장교들을 이끌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항했다. 1924년 체포돼 이듬해 감옥에서 삶을 마감했다.

"내가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한 볼셰비키와 끝까지 투쟁하리라"고 선언했던 작가의 볼셰비키 정부와의 투쟁사가 소설 형식을 빌려 자세히 담겨있다.(이준삼 기자)

07. 07. 21-22.

P.S. '보리스 사빈코프'란 이름이 생소하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데, 내가 스쳐지나갔던 책들의 저자이어서인 듯하다. 위의 이미지는 '한 테러리스트의 회고록'이란 제목의 책으로 '나의 20세기'란 시리즈의 한 권이다(모스크바에서 내가 탐내던 시리즈였다). 그리고 그의 두 자전적 소설은 내가 러시아에 있던 2004년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영화화되었다(내가 소장하고 있는 영화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Савинков Б. - Всадник по имени Смерть: Конь бледный; Конь вороно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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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서 기획특집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난주부터 '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도적인 담론의 변화과정이 한국사회사의 축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봄 직하다. 이번주 '동아시아론'까지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7. 14)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1)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총론

2007년 여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린 지 오래이건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민주화시대 20년과 이를 결산하는 12월 대통령 선거가 주는 함의 때문인 듯하다. 해방 이후 60여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건국, 산업화, 민주화가 이렇게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존적 거점과 전략적 방향에 대한 질문에 지식 사회는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 담론의 역사는 민주화 과정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1980년대가 사회 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해방주의의 분출로 특징지어진다면,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의 도래와 외환위기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담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은 이제까지 제출된 이론적 테제와 경험적 분석들이 심화되고 분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주목할 것은 최근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이 좌파 대 우파,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복합 구도를 형성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에는 이념적 구도와 탈이념적 구도가 혼재하며, 서구주의와 비서구주의가 공존한다.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현대 대 탈현대,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등 복합 구도가 현재 우리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이끌어온 구도다. 오늘날 세계화가 우리 삶과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주의 담론은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한 편에서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표현되는 보편주의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서구 제도 및 가치를 특권화하는 오리엔탈리즘, 다시 말해 서구중심주의를 내포한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에 맞서는 담론이다. 우리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이른바 ‘근대의 발명품’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주의의 전통을 이어 왔다. 문제는 민족주의에 내재된 집단주의 성향과 과잉 애국주의 경향이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예각적이지만 여전히 음미할 만하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충돌에서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 담론이다. 민족국가와 세계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체제로서의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이론화하려는 동아시아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21세기 버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대항 담론이다. 동아시아론은 우리 안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모순적 공존과 새로운 화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현대 대 탈현대

현대와 탈현대 사이의 논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돌아보면 90년대 초반 문화의 시대와 더불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토론만큼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한국적 특수성을 주목해 포스트모던 논의들을 가치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미완의 과제’로서의 현대성을 옹호하려는 흐름과 ‘총체성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흐름이 팽팽히 맞서 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론의 등장은 시기상조였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외환위기의 충격은 담론의 중심을 문화에서 경제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사회와 결합된 포스트모던 현상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영화, 음악, 미술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 왔다. 제도는 여전히 현대적 질서 안에 있되, 의식 및 문화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모던화되는 ‘제2의 현대’ 또는 ‘성찰적 현대’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 산업화를 지탱해 온 패러다임은 발전국가론이다. 추격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부각시킨 발전국가론은 시장, 시민사회보다는 국가를 중시하는 이론을 유포시켰다. 전통적 유교 사상과도 잇닿아 있는 국가주의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내재한 ‘민주주의 효과’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담론이기도 했다.



시장주의가 부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의 경쟁 메커니즘이 경쟁력 및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합리성을 제고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시대가 무한경쟁의 시대인 한 시장주의는 거부하기 쉽지 않은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시장주의는 결과적으로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연대를 위협하게 되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안고 있다. 오늘날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는 기업과 대학은 물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등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지배집단의 새로운 담론의 정전(正典)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성과 국가의 공공성을 결합하려는 담론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철학으로 제시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사회민주주의를 갱신하고자 한 서유럽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최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 시대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훼손된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응답해야 한다.

#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는 오랜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우리 내부에는 개인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정체성이 공존한다. 개인주의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면, 공동체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상적 지반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개인주의든 공동체주의든 과잉에 있다. 개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게 되며, 공동체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권위주의가 강화된다.



이른바 ‘공동체 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담론이다. 서구적 자유주의와 동아시아적 공동체주의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이 담론은 80년대 이후 서구 신보수주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담론 역시 문제가 없지 않다. 개인주의를 실현해야 할 영역에 권위주의 통치로 돌아가고 공동체주의를 구현해야 할 영역에 시장적 경쟁을 강제하는 모순적 혼합물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떤 생산적인 방식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대한 철학적 숙제이자 사회과학적 과제다.

#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개발주의와 생태주의의 충돌은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또 하나의 구도다.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간의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패러다임이다. 생태주의는 근대 문명에 의한 환경의 의식적, 무의식적 파괴가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 사회에서 추진된 압축적 산업화 과정을 돌아볼 때 생태주의의 진단과 경고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생태 위기를 가져온 개발주의가 여전히 적잖은 국민들에게 친화적이며,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성장주의 내지 물질주의 전략이 다수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에 어떤 가교를 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인문·사회과학은 새로운 모색을 요구 받고 있다.

# 담론의 탄생을 기대하며

지식사회 담론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다. 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구도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복합사회 또는 다원사회로 변화돼 왔음을 증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도 이에 맞서는 다양한 이론과 대안들이 담론의 경쟁 및 투쟁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대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마감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새로운 사상적·담론적·정책적 거점과 전략을 요구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 담론들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성찰적 사유와 상상력을 좀더 발휘해야 한다. 성찰성은 타자의 논리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돌아봄으로써 설명력과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둘째,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미래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비전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비전은 새로운 담론에서 태어날 수 있다.(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경향신문(07. 07. 2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2) 동아시아론

# 담론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갭’

주식 좀 한다는 사람치고 최근 중국 증시의 활황과 관련해서 차이나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골프를 좋아한다면 저렴한 가격의 중국이나 동남아 골프투어 패키지가, 쇼핑에 관심이 많다면 도쿄나 홍콩으로의 쇼핑여행이 괜찮은 여름 휴가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오늘날 동아시아는 지식인들의 고담준론 속에서보다 평균적 한국인의 일상적 경험 속에 더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이 축적되고 순환되는 곳이며 그런 의미에서 발전과 성장의 자본주의적 시간이 가장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이 폭발적 변화 속에서 다루는 한 담론은 늘 현실에 뒤처지게 마련이며, 지식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무능력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이 생생한 현실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한 이 주제는 논의성과와는 별도로 쉽사리 도외시되거나 도태될 수 없다. 동아시아 담론의 ‘긴 생명력’과 지지부진한 ‘아웃풋’이 공존할 수 있는 비밀은 여기에 있는 셈이다.



# 동아시아 담론의 대두와 그 배경

한국의 지식지형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87년 민주화 항쟁 및 ‘북방정책’의 성과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 사회를 옥죄었던 이념 콤플렉스가 해소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는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무섭게 스스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사태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 왔던 냉전은 종식을 선언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기존의 비판적 진영이 주목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가 비판적 지식집단에서 제기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주변의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요청되었다.



# ‘창비 그룹’과 동아시아 담론의 제기

이 문제를 하나의 화두로서 비판적 지식계에 제시한 것은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라는 패러다임을 빌려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더 큰 틀의 부분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좋은 이론적 탈출구이자 역사발전이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후쿠야마식의 역사 허무주의를 반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냉전구도의 세계적 해체에도 불구하고 냉전에 기댄 한국사회의 억압적 질서는 여전히 건재했다. 비판적 지식인의 근본 과제를 분단체제의 극복으로 보는 백낙청을 위시한 ‘창비 그룹’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양자 간의 거리와 차이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시급했다. ‘동아시아’는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수준’의 범주로서 제기되었다.



# 탈근대적 상상력과 문명적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

그러나 이들이 제기한 동아시아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운동’에 익숙했던 진보적 지식진영의 ‘본류’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동아시아론이 갖는 진보 담론의 자기쇄신이라는 측면은 묻히게 되고, 반응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잡지 ‘상상’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동아시아를 진지하게 문제 삼았다. 서구 중심적 사유로는 포착될 수 없는 동아시아 고유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발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론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와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탈근대 담론’으로서 다루어진다. 창비의 문제제기에 전제되었던 정치적 성격은 탈각되면서 문화론, 문명론적 접근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보수적 입장의 문화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전통적 가치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의 상관성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의 경제적 성공 원인을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은 서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아시아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계승과 현대사회에서의 창조적 활용을 내세우는 ‘신유가(新儒家, New Confucianism)’의 철학 및 윤리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상체계로서의 신유가 혹은 현실에 대한 설명모델로서의 유교자본주의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속에 함축된 보수주의적 현실관이다. 유교자본주의론의 한국적 수용 또한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유석춘은 정경유착과 연고주의 등 유교전통에서 파생된 문화적 토양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의 발전에 장애요소가 되기보다 오히려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떤 발전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가치의 문제’ 이전에 경제적 성공이라는 ‘사실의 문제’로 논의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론이 전제되어 있었다.



# 외환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흥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적 현실긍정론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거래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높이 평가되었던 ‘아시아적 가치’가 한국경제를 나락에 빠뜨리는 주범으로 일순간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 또한 시스템의 총체적 위기상황과 긴밀히 연동된다. 서구의 금융 패권 앞에 동아시아는 공동의 운명에 놓여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시아통화기금’ 같은 금융협력체 구상도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지역 내부의 연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담론이 문화적 공동유산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의 전략적 비전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한 통합과 더불어 경제의 지역화·블록화 경향의 동시적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도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의 전진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촉진제가 되었다.



# 국가와 기업,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자

외환위기 이후의 동아시아 지역통합론은 국가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일 수 없었다. 특히 지역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중국 경제가 갖는 막강한 파워는 동아시아에 대한 기업의 관심에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국책연구소와 더불어 대기업 산하의 경제연구소가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주체로 등장하였다. 막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국가와 기업의 시각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해 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주도하는 공공적 담론영역의 의제는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버넌스와 무관할 수 없으며, 국민경제에 미치는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감에 따라 개별 기업의 문제가 공적 담론장의 중심에 놓이는 일도 빈번하다.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신세로 갈파한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의 세칭 샌드위치 위기론은 그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지식인의 담론보다 강력한 권위와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동아시아 담론이 더 이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방식으로 생산·유통될 수 없게 된 담론 생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 비판적 지식담론으로서 동아시아론의 열린 가능성

동아시아 담론은 유행 담론이 급속이 교체되는 한국 지식사회의 풍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참여정부의 ‘동북아중심국가론’은 국가적 아젠다로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정작 오늘날 여전히 비판적 입장에 서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다루어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적 시각’(최원식)에 대한 강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식과 사유를 반추하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백영서)를 제창한다. 국가나 기업의 ‘현실주의적’ 동아시아 담론과 구분되는 지식인 고유의 성찰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지적 행보에는 미묘한 중심이동이 감지된다. 비판적 싱크탱크 집단의 형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한반도의 미래구상’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국가 및 시장(기업)에 대해 취해온 ‘비판적’ 거리의 소멸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다. 진보 개혁 담론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비판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의 적극적 개입과 고유의 비판적 입지의 확보라는 어려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밀고 나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이 논의에 세대와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 담론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이정훈|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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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1 09:25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말씀대로 오늘 집을 나서면서는, 한겨레와 더불어 경향신문도 사보려고요. 한국일보는 아침에 집으로 배달되고. 경향에도 읽어볼 게 많은거 같군요.

로쟈 2007-07-21 09:46   좋아요 0 | URL
주말판은 북리뷰들도 들어있기 때문에 본전 이상을 뽑지요.^^
 

김우창 읽기를 위한 리스트. 물론 일차적인 건 그의 전집과 대담이며, 그밖에 여러 김우창론들을 참조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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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과 사유- 김우창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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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모든 주제에 대한 사유의 윤곽을 육성으로 들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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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의 관심사들에 대한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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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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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에 서서- 김우창 시평집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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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우창 칼럼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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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2:03   좋아요 0 | URL
<풍경과 마음>은 2003년에 초판이 나왔을 때ㅡ사실 이 초판의 표지 디자인이 현재의 총서 판본 디자인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인데요^^ㅡ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이 어떤 초탈하면서도 허허로운 경지에 살짝 이르셨다는 생각이 들어, 슬쩍 경외감이 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역시나 감사. 로쟈님의 리스트를 보니 솔출판사에서 1996년 보급판으로 간행되었던 <심미적 이성의 탐구>가 빠져 있는 듯 한데, 이 책은 요즘은 아마도 절판이겠죠? 오랜만에 상기된 기억의 힘을 빌어 서가에서 책을 꺼내 다시 한 번 탐독ㅡ탐욕스럽게 독서ㅡ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7-21 02:07   좋아요 0 | URL
네, <심미적 이성의 탐구>는 이미지도 뜨지 않습니다.--;

심승보 2007-10-27 00:42   좋아요 0 | URL
김우창도 후학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관문이지만, 앞으로 50년 100년 그 이상 갈 수 있는 건 바로 조동일 입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계명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지방화 시대의 한국학> 1-6권을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10-27 00:48   좋아요 0 | URL
심승보님이 먼저 자세하게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01:47   좋아요 0 | URL
www.agora.co.kr (서강 아고라)에서 '지성적 책읽기' 코너에 제가 김영건 선생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조동일 교수님의 홈페이지도 언제나 열려 있는 공간이니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었으면 합니다. http://chodongil.x-y.net/ 이 곳에서 업적목록을 잠시 개괄해 본다면 그 분의 학문이 어떤 자취를 그리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동일로 들어서는 추천도서는 기본적으로 <우리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이 땅에서 학문하기>, 좀 더 찐한 속살을 원할 경우 <세계문학사의 허실>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등을 우선 꼽을 수 있겠습니다. 로쟈님은 조동일 교수의 학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직 별 관심이 없으셨다면, 이번 기회에 한번쯤 꼭 일별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로쟈 2007-10-28 10:33   좋아요 0 | URL
몇몇 책들은 저도 읽은 것이구요(제가 더 많이 읽은 건 보다 젊은 시절의 저작들입니다). 제 관심사가 '거시적'이지 않아서 조동일 선생의 학문을 다 따라가지 못합니다. 보다 관심있는 분들이 글을 올려주시면 홍보가 되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23:34   좋아요 0 | URL
네, 이른 시기의 조동일이라면 아무래도 그 번지수가 <한국소설의 이론> <문학연구방법> <한국문학사상사시론>의 초기3부작 부근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넓혀 잡자면 정문연 시절의 <한국문학통사> 태동기 정도까지 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때까지의 저작도 물론 훌륭하지만, 조동일이 본격적으로 국문학자의 범주를 박차고 나간 90년대 이후의 작업들에 전 훨씬 더 큰 의의를 부여하는 쪽입니다. 그 쪽의 매우 풍성한 연구성과들이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정말 크나큰 불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최근의 저작들을 관심있게 읽어주시길 개인적으로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0-28 23:51   좋아요 0 | URL
국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로 다들 읽는 책들일 텐데, 한국사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하신 건 의외입니다. '학술서' 범주로 수용된 탓이 아닐까요? <우리학문이 길> 같은 책은 큰 반향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본적으론 제가 조동일 교수의 '세계문학사'론 같은 거시담론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기에 관심을 덜 갖는 면이 있습니다. 저보다 더 공감하시는 분들이 후속 작업을 열심히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심승보 2007-10-29 00:57   좋아요 0 | URL
우선 로쟈님 말씀의 초점이 다소 명료하지 못한 듯 싶습니다.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필독서로 읽는 책'이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시는 지 우선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입장을 좀 더 분명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조동일은 분명 국문학 전공자라면 '다들' 읽게 되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교과서적 권위를 지닌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국문학도 뿐 아니라 그 어떤 전공자들도 거의 읽지 않는 책들 또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한쪽 그늘, 굳이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그의 총저작물의 거의 7-80%를 족히 육박하는 거대한 그늘에 대해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한 부연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우선 <한국문학통사> 정도는 우리나라의 국문과 대다수가 교과서로 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컨대 자타 공인의 국문학과 필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문학 전공자에게 말 그대로 읽힙니다. 막상 그 다섯권을 다 읽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편의 의구심이 또 한번 솟구치지만, 어쨌든 제목은 아는 사람 참 많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신 대로 <우리 학문의 길>은 그나마 사정이 좀 괜찮습니다. 인지도가 꽤 되고, 제목의 도발성 덕인지 어느 정도 사회적 반향도 있었습니다. (그래 봤자 93년에 나온 책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290을 달리고 있습니다. 한편 2004년에 번역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어느새 3400포인트를 넘어섰습니다. ) 그럼 '통사'와 '우리학문의 길' 2권을 제한, 다른 책을 가지고 한번 이야기를 해 본다면 다음으로 어떤 책을 꼽을 수 있을까요. 공저까지 합하면 총 70권이 넘는 그의 저작 중에 기껏 10권도, 아니 아마 5권이라 해도 별반 차이는 없는 게 현실입니다, 제대로 책 제목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 과연 그 사상가가 제대로 논의되고 있는 형편인 건지 의문입니다.

로쟈 2007-10-29 01:22   좋아요 0 | URL
안타까워하실 만하지만 안 읽히고 있는 책들로 말하자면 조동일 교수의 책들만은 아니지요. 너무 방대한 분량과 체계가 전공자들을 포함한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는 것일 수도 있겠구요. '학술서' 범주라고 말씀드렸는데, '학문적 업적'으로서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학자라는 건 다들 인정하지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요?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학자들'이 읽고서 논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재는 제 취향과 관심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학술적' 성격의 논의는 가급적 배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23   좋아요 0 | URL
참고로, 제가 우리 학계 전반 또는 대학원생, 학부생들에게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아예 읽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책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겠습니다.

<동아시아문학사비교론> <제3세계문학연구입문>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세계문학사의 허실> <인문학문의 사명>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1-3>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세계문학사의 전개>

솔직히 이 중 대다수의 저서는 이미 국내 학계가 수용할 수 있는 주파수를 넘어간 것들입니다. 아마 그것이 제가 안타까워 하는 이유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승보 2007-10-29 01:30   좋아요 0 | URL
네, 로쟈님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남의 안락한 서재에 와서 훼방을 놓은 것 같아 한편 죄송합니다. 혹시나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탐구>들 또한 전형적인 최전선의 이론서, 학술서들 아닌가요. 또한 그러한 어려운 책들을 철학전공자들만 읽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동일의 책이라고 해서 뭐 그렇게 학술적이라는 이유로 읽혀서 안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요. 로쟈님 말씀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런 고집이 생깁니다. ^^;

로쟈 2007-10-29 02:3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독자들이 유행을 타서 좀 많긴 하지만 <그라마톨로지>나 <탐구>를 몇 명이나 읽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냥 들뢰즈 정도가 예외라고 해야겠지요...
 
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
김우창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있었던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문학을 이 질문을 통해서 바라보아온 것이 나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라면 문제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영문학은 한국의 전통과 관련이 없고, 우리의 삶의 급박성과도 관련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힘의 불균형에서 생겨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영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다른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읽고 쓰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16-17쪽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아니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은 철학적인 것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 문과나 철학으로 바꾸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외국문학이 국문학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지요.-18쪽

내가 서울대에 들어간 해에 서울대에 제일 많이 진학한 고등학교가 광주고등학교였어요. 왜 그랬느냐 하면, 서울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은 후퇴하고 전쟁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광주는 그런 혼란과 고통은 없고 비교적 평화스러웠거든요. 그때 서정주 선생도 조선대학에 와 있었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 중에도 서울대 박홍규 교수가 와서 가르쳤는데, 우리 3학년 담임으로는 이후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가 되신 나종일 선생이 계셨지요.-22쪽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나 대학에 다닐 때에는 책이 많았어요. 학교 공부는 적고 책은 많은 때였습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은 내가 흔히 받는 질문인데, 나한텐 독일 철학과 독문학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영향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 무렵에 그것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독일의 관념철학 또는 이상주의, 서양어로는 결국 같은 말이 되는데, 그것에 대하여 늘 친화감을 가져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24쪽

헌책방 얘기를 하였지만, 어떤 미국사람이 "아이들은 책 많은 환경에 두면 호기심 때문에 책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죠. 우리도 길바닥에 책이 많으니까 저절로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오늘날처럼 산업화, 능률화된 사회가 아니라서 책방 주인이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책방 주인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죠. -24쪽

손창섭이나 장용학, 이범선의 소설을 대학교 다닐 때 보고 비참함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인간적인 시대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잘려 먹을 것도 없는데 의사인 친구의 치과 사무실에 나가 아침부터 앉아 있다가 의사가 점심 먹으러 가면 따라가서 먹는 얘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능률화되고 경영 합리화가 되어 있는 치과에 가서 그러기 힘들죠.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가령 독일어 시험문제 같은 것은 등사된 것이었는데, 출제 교수가 직접 나와서 읽고 설명하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술하다고 할까, 인간적이랄까 그런 면도 있었지요. -28-29쪽

가장 중요했던 건 자유로웠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많지 않고 요구도 적으니까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40년째 가르치면서 출석 점검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33쪽

대학 시절 그리고 그 후에도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가 유행했는데, 김동리 선생까지 실존주의를 논했으니까 전쟁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존철학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건대, 단순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이데거는 나에게 추상적 관념이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로써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심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공리적인 조작, 과학기술적인 조작은 물론이고 관념으로 운산으로 조작되지 않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습니다. 사르트르하면 실존, 자유, 책임, 현실참여 등등을 그의 주된 개념들로 생각할 수 있지만, 되돌아보건대,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주체적 자유에 대한 독특한 이해, 독일의 관념철학에 연유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현실 속에서 특히 강조하게 된 주제척 자유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41-42쪽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하고 취직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면 몰라도 인생에서 전라도 사람이냐 경삼도 사람이냐에 따른 중요한 고비나 계기에 부딪히지 않았기 대문에, 편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전라도 사람이라는 범주가 중요한 사회적-구조적 범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질서의 확보라는 보다 일반적 과제의 수행으로써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50-51쪽

모든 사람이 작은 개체에 불과하고 또 그 개체가 주어진 사회의 조건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또 지적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반성하는 것은 바로 보다 큰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이지만, 그러한 제한 조건이 모든 정당성의 기준에서의 사실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비판 자체도 부정되는 것이죠.(...) 실존적 상황에 의하여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회 내의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작업은 자기 변명과 자기 이익의 옹호를 위한 수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기획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마르크스의 관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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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이 책이 <사유의 공간>과 함께 출간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의 학문 세계에 새삼스레 탄복하고 감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기억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2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책으로채우리 200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다 알라딘 가입에 이어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쓰모모 서점만 줄곧 이용하다 알라딘에 발을 붙이려니 낯설 달까요..여긴 방문객이 이렇게 많은 블로그도 있구나 싶고..암튼 책 선택에 편식증이 있는 저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행동과 사유가 눈에 띄어서 클릭했어요..왜인지 읽고 싶어집니다. 읽고 나면 유식해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ㅎ 품절이네요........ ㅡㅡ; 예쓰모모로 가야하나여.....ㅎ여하간 꼭 읽어보겠어요.그런데,로쟈님의 모습은 검정티 청바지 저 모습이신가요. 설마.......어떤 유명한 작가나 석학은 아니겠지요..전 모르게는게 많아요.아.궁금해.
 

최근 중국 소설들이 대거 번역/소개되고 있지만 중국 관련서들 또한 쏟아지고 있고, 그 중에는 눈독을 들일 만한 책들도 많다(내가 중국 전공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다). 생소한 저자인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 또한 만만찮은 분량이긴 하나 탐나는 책이다.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이 부제인데, 원제는 말 그대로 '만리장성(The Great Wall)'이고 작년에 나온 책이다. 아래 리뷰기사를 읽다 보니 손에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기겠다. 러시아사도 이런 책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문화일보(07. 07. 20) 신화의 덧칠 아래… 보라, 중국의 오만을

‘만리장성(萬里長城·the Great Wall)’. 흔히 2000년 전 진 시황 때 축조됐다고 알려진 성벽, 장성을 둘러싼 신화는 많고도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은 1893년 작가 로버트 리플리가 퍼뜨린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조물”이라는 말이리라. 여기서 한발 나아가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술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화성의 천문학자들이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이라고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작가와 학자들이 이렇게 나서니 허풍이 전문인 정치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장성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대장부가 아니다.” 1935년 장제스에게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공산혁명가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보낸 호소문 중 일부다. 이로부터 약 40년 뒤 죽의 장막을 헤치고, 중국의 만리장성을 찾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만리장성을 둘러싼 이런 호들갑을 증폭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다. 장성을 둘러싼 신화의 지층을 벗겨내고, 장성이라는 거대한 메타포로 중국을 제대로 읽으려는 것이 목표다. 신화 벗겨내기는 여러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우선 과녁은 ‘위대한’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허세적 분위기다. 만리장성에 부여된 최초의 신화는 그것이 수천년 전부터 하나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나, 그것부터가 오해라는 것이다. 이르게는 기원전 1000년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조들이 여러 곳에 ‘하나로 이어지지 않은’ 성벽을 건설했으나 그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다. 오늘날 수백만의 관광객이 찾는 베이징 북쪽의 말끔한 성벽은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노동력으로 복원되고 단장된 것일 뿐이다.

책의 더 큰 목표는 이런 물질로 된 장성의 허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표상으로서의 장성이다. 후대의 역사적 낭만주의자에 의해 은폐된 성벽을 제대로 살피며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장성을 뒤덮은 신화의 지층만 제대로 벗겨내면, 사실 그 성벽은 중국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완벽한 표지다.

책의 처음은 ‘왜 성벽을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답은 흉노·몽골·만주·훈 족 등으로부터 변경을 지키기 위한 방어목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장성의 역사와 흔적을 살피며, 장성의 축조 목적이 방어가 아니라 영토 획득이라고 말한다. 방어가 목적이라면 자국의 거주지를 수천리나 벗어난 곳의 사막을 가로지르며, 장벽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저자가 성벽이란 창을 통해 읽으려는 보다 근원적인 것은 성벽 축조의 근저에 깔린 중국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이다. 기원전 2000~1000년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잡고, 다른 민족을 벌레나 ‘날짐승이나 길짐승’(금수·禽獸)으로 보는 뻔뻔스러운 세계관을 완성한다. 중국인이 아닌 민족은 ‘외양은 인간이지만, 내면은 짐승인 종족’, 혹은 ‘관용을 베풀 필요가 없는 늑대’일 뿐이었다.

요컨대 성벽은 더불어 상종할 수 없는 이민족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책은 춘추전국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왕조와 시기에 걸쳐 중국을 관통한 호전적인 외국인 혐오증과 문화적 우월주의와 패쇄성을, 장성이란 표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중국의 이런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목민이 강성할 때마다 장성은 유린됐고, 때로 유목민들은 중국의 한복판에 그들의 제국을 세웠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대 왕조는 성벽 건설과 유지에 계속 매달렸다. 그때마다 죽어난 것은 성벽 건설에 동원된 민중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이를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어리석은 왕조의 탓으로만 돌리지는 않는다. 그 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장성을 쑨원(孫文), 마오쩌둥 등의 지도자들이 되살려내는 것을 보며 이런 의구심은 더욱 깊어진다. 말하자면 장성으로 은유되는 중국의 호전적 외국인 혐오증과 우월주의, 패쇄성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인터넷 공간에 세우는 방화벽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앞으로의 중국을 어떻게 볼까.

‘중국이 설령 180도 변신해 서구식의 개방적 민주자유국가가 된다고 해도, 그들은 수천년 묵은 행동 양식을 포기하거나 정치적, 문화적 독자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또는 밀물처럼 들어오는 방문객들을 감시하는 수단인 심리적·물리적 축출과 엄격한 국경 통제라는 노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역사 지식이 너무 많다.’



이렇게 정리하면 책의 문제제기와 결론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러나 책에서 저자가 드러내는 해박함과 이야기 솜씨는 눈을 비비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다 자주 저자 프로필에 눈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줄리아 로벨, 영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중국사로 학위를 받은 뒤 중국사와 중국문학을 가르쳤단다. 한동안 중국에 살다 케임브리지 퀸스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있다는 젊고 가냘픈 미모의 여성이 이 정도의 책을 쓴 것은 정말 뜻밖이다.

번역도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지명과 인명을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명으로 옮긴 것부터가 그렇다. 한시를 옮기며 영어 원서에서 중국어 원문과 맛이 달라진 부분도 일일이 원문을 기준으로 고쳤다. 책이 최근 쏟아지는 중국 관련 책 가운데 빼어난 봉우리가 된 것에는 저자의 역량 못지 않게 번역자의 공이 큰 것으로 보인다.(김종락기자)

07. 07. 20.

P.S. 최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로 두 권을 더 거명하고 싶다. 먼저 이중텐의 <제국의 슬픔>(에버리치홀딩스, 2007). 이중텐은 <삼국지 강의>(김영사, 2007)로 중국 관련서쪽으로는 올해 가장 유명해진 저자라 할 만한데(중국에서도 '역사 대중화'로 유명하다고), 이 책에서는 "전제주의 지배하의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과 음모, 비리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한편,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인, 지식인들의 이중적 삶과 애환, 갈등, 숙명 등을 지은이 특유의 필치로 드러낸다" 한다. 일독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두번째는 앞의 두 책에 비하면 좀 얄팍한데 국내 필자들이 쓴 <아틀라스 중국사>(사계절출판사, 2007). 경향신문의 간략한 소개에 따르면, "약 1만여년 전 고대 신석기 문명의 탄생부터 20세기말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책은 중국 시대사별 전문가 5명이 3년여 동안 매달려 만든 중국사 개설서다. 중국사를 시대별로 96개의 주제로 엮었으며, 저자들 각자의 역사관을 투영하면서도 통사적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양면에 걸쳐 한 주제씩이 펼쳐지는 책은 입체적인 역사지도를 중심으로 텍스트와 연표, 다이어그램, 사진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정리되고 압축된 텍스트와 도판은 사전의 역할도 가능할 듯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역사부도이다.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와 <제국의 슬픔>을 읽다가 그때그때 참조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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