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놓친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번역비평'에 관한 제언인데, 덕분에 생각이 나서 지난달말에 열렸던 영미문학연구회(영미연)의 학술대회 자료집까지 홈피(http://www.sesk.net/board_focus/content.asp?num=174)에 가서 챙기게 됐다(학술대회에 가보려고는 했지만 여력이 되질 않았다). 한기호 소장은 학회의 발표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발표문('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가운데 일부를 칼럼기사(한기호의 출판전망대)와 함께 옮겨놓는다. 많은 부분들에서 동의하며 공감할 수 있는 제안들이다. 

한겨레(07. 11. 03) '잡초’ 골라낼 번역비평 필요하다

지난해 10월,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가 따로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 이 땅에서는 번역의 윤리를 질책하는 커다란 광풍이 불었다. 일주일이 넘게 수많은 매체에서 이에 대한 견해와 논평을 요구하는 바람에 전화로 ‘마시멜로’ 소리만 들어도 입에 단내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리번역의 관행은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고 번역회사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하긴 요즘 번역회사에 번역을 맡기면 번역료가 싸고, 속도도 빠르며, 문장이 깔끔하다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단다. 하지만 오해 마시길. 문장이 깔끔하다는 것은 오역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번역회사가 문장 교열자를 따로 두어 원뜻과 관계없이 그럴싸하게 다듬어주고 있다나.

지난달 27일에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영미문학연구회(이하 영미연) 주최의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영미연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점검한 성과인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 1, 2권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날 토론에서는 번역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한 발표자가 인용한, 번역은 “터키 카펫의 뒷면”이라거나 “셰프의 요리를 운반하던 웨이터가 지독하게 진부한 대중적 취향으로 말미암아 위에다 케첩을 뿌려서 내놓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영미연의 작업에 대해서도 화초(잘된 번역)를 키울 것이냐 잡초(잘못된 번역)를 골라낼 것이냐는 논쟁이 벌어졌다. 극단적으로 잡초를 고를 시간에 화초를 키우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느냐는 지적마저 있었다. 하지만 영미연의 작업은 이 땅의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인문학이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인문학 서적만큼은 최대한 원전의 뜻을 제대로 담은 번역서를 읽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발터 베냐민이 ‘번역자의 사명’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의 본질은 누군가 ‘아니다’를 말했을 때 쉽게 드러난다. 영미연의 작업처럼 누가 잡초라고 말하며 호루라기를 불어줄 때에야 화초의 본질이 확실해지는 법이다. 물론 잡초로 지적받은 사람이 고의로 오역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 꾸준히 ‘아니다’라고 말해주었을 때 ‘이다’의 본질을 쉽게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미연의 작업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계속해야 할 작업이다. 물론 그 일이 상시적으로 지속되려면 번역비평의 저널이 꼭 있어야 할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 나는 내내 마음먹고 있던, 내년 2월에 계간 형태의 저널을 꼭 창간하겠다는 다짐을 그만 털어놓고 말았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국출판의 현황과 번역의 과제

인문학의 위기와 번역

발표자가 서두에서 『마시멜로이야기』 사건이 터졌을 때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 것은 그런 자기계발서에서는 번역의 질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심정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책은 읽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또 외국의 자기계발서는 국내 현실에 맞춰 적당히 가감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요즘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와 대리번역을 연결시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삶의 길을 터놓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좁다란 길일망정 누군가 터놓기만 하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단지 몇 사람이 지나간 흔적 때문에라도 나중에 터널도 되고 고속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가 길을 내고 누가 다닐 것인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문학은 서유럽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 길을 내기 위해 거친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가져와 활용한 면이 크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를 두고 서양의 경험적인 것을 매우 선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조동일 교수는 온통‘지식의 수입상’만 넘친다고 일갈했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과거의 텍스트를 상대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텍스트를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원전부터 충실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계가 많다. 그래서 외국 원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언어가 되지 않는’ 대중이나 기초연구자는 번역서라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사람 중에 길을 내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런데 신뢰할만한 원전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철학, 정치학 등에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플라톤의 경우 일본에서는 기무라 다카타로木村鷹太郎가 1903-1911년에 걸쳐 완역작업을 했고 후잔보冨山房라는 출판사를 통해 전집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요 저작들만 중복 출판하다가 올해 4월에서야 전집 간행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네 권 출간된 상태다. 팔릴 것 같은 책은 수십 종, 경우에 따라서는 1백 종이 넘게 변종이 생산되지만 꼭 번역되어야 할 책이 번역되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번역의 질은 또 어떤가? “번역은 배신자의 행위”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번역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인문서의 경우 더 그렇다. 나카야마 겐(中山元)의 『사고용어사전』(2000) ‘번역’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저 쪽으로(trans) 이끈다(ducere)라는 동사에서 생겨난 말인 번역. 여기에 있는 것을 저쪽 물가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이 행위는 항상 배리背理에 시달린다.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완전히 같은 가치를 가진 언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언어로 말한 것을 별개의 언어로라도 거의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 말로 바꾸지 못했다면, 철학의 보편성 자체를 보증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독일어가 없었다면 철학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한 듯한데, 일본어로도 하이데거의 사고는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와의 커다란 차이이다.

시에서는 단어 하나가 그 작품 자체이고,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을 상당히 앗아가 버린다. 시인은 언어를 한 번 쓸 수 있는 생물처럼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개념을 사용해 사고하는 작업이다. 개념이라는 것을 번역할 수 있는 한, 철학 텍스트는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번역은 배신행위이며 늘 어떤 의심에 시달린다. 원작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번역은 필터를 거친 전달에 지나지 않으며, 그 텍스트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원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번역된 텍스트는 항상 뒤떨어진 것일까? 번역으로 무엇인가가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인가?”

나카야마는 이어서 “번역이라는 작업도 원작의 의미에 가장 유사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이 의도한 것을 자세한 사항까지 애정을 갖고,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두 개의 깨진 조각이 하나의 항아리의 파편으로 인정받게 된다(발터 벤야민의 『번역자의 사명』). 번역을 할 때 원작자의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원작자가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 때로 번역자는 원작자가 사용하지 않은 표현도 덧붙인다. 그 쪽이 원작자의 의도를 잘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번역자의 자의적 생각이 존재함은 피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번역자가 애정을 갖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의적 생각을 덧붙인다면, 원작자의 표현과 번역자의 표현은 ‘커다란 언어의 두 가지 파편’처럼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카야마는 “외국어로 표현된 텍스트를 읽는 최선의 방법은 원문 읽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번역해보는 것이다. 번역해봄으로써, 원문의 텍스트에서 보고 지나쳤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번역이라는 행위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무엇으로, 그리고 역으로 언어의 차이로 인해 처음으로 부각되는 것”이라며 인문학 연구자가 스스로 번역해보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는 무엇인가?

사실 번역의 문제는 지금껏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다. 지난 몇 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의 번역지원으로 적지 않은 책이 출간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출간비용에 비해 지원액이 매우 미미해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적지 않다. 국가의 지원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를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텍스트 선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보공학의 창안자인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에 따르면 정보편집의 중요한 용법 중에 ‘계통수系統數’가 있다. 계통수란 계보系譜이고 계열系列이며, 계도系圖다.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나 물건이 과거에 어떤 흐름을 갖고 있었는지 그림으로 그려서 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지식의 툴’이 계통수라는 편집용법이다.

모든 인문학 분야의 책도 계통수로 그려볼 수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에서 그 분야의 메인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큰 가지에 해당하는 책부터 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떤가? 원 텍스트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그 텍스트에 대한 비판서는 출간된다. 이런 경우 원전은 보지 못하면서 비판만 접하는 이상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출판계 전체적으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 전문출판사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전문출판사는 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책을 출간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1천 부의 수요도 잘 이뤄지지 않는 마당에 책을 펴내려는 출판사가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문학 원전의 경우에도 꼭 필요한 텍스트는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시급히 번역되어야 할 문학원전의 목록을 예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일 것이다.

둘째, 전문번역가를 키워야 한다 
지난 5월 17일, 교육부는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교육 분야에서는 인문학 토대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하고, 해마다 번역 전문가 1000명을 선발해 1인당 500만원씩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1년에 50억씩 10년 동안 5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안이 실행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원전번역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우리 사회의 번역이나 번역자에 대한 인식이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제로 실행된다고 해서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인가? 게다가 1000명씩이나 선발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인적자원이 있는가?

한 번역가는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글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을 들었다.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국어를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수한 소설가는 번역을 잘 할까? 소설가는 단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글을 쓰기 때문에 번역을 꼭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번역은 언어능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문적 사유를 할 줄 알면서 폭넓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의 독서습관이나 인문서가 팔리는 상황을 갖고 미뤄 짐작해볼 때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을 해마다 1천 명씩 선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선발이 되었다 해도 번역문만 있으면 뭣하나? 그것이 실제 상품(책)으로 출간되어 독자와 만날 수 없다면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출판사와 연계해 책을 펴낸다는 계약서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500만원은 크게 부족한 돈이다. 돈만 던져놓고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정책을 내놓고 인문학을 살리겠다니,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학술번역의 가치를 폄하하고 홀대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문번역가란 어떻게 키워질까? 2001년에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발표한 「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는데 한국출판은 여기에서 한발작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앞에서 내놓은 방안은 대학(교육기관)과 출판현장과 번역가가 삼위일체가 되는 시스템에서 해결할 수 있다. 

지금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 있는 번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력 있는 번역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상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번역료는 10년 전에 비해 200자 원고지 한 장당 1천 원 정도 오른 것에 불과하다. 영어번역의 경우에도 대부분 장당 2,500-4,000원 수준인데 8,000-10,000원 정도가 되어도 그리 높지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2,500원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1만5천원 정가의 책인 경우 1천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이런 출판을 기피한다.

또 베스트셀러가 되더라도 번역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출판사는 상당한 부를 축적하지만 번역자에게는 처음 받은 번역료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번역자가 한 소설시리즈의 번역 인세로 수억 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그 전에 몇 년간 매절 번역료의 절반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일을 하는 희생을 감수한 후에야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전문편집자를 키워야 한다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해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심한 경우에는 200자 원고지 1장당 1천원의 번역료로 적당히 눙치기도 한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을 맡기고 그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게 되는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정도다. 일부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가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가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한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요즘에는 싼 번역료에 속도가 빠르고 깔끔하게 번역하는 번역전문회사들도 있다. 전문 ‘교열자’를 두어 거친 번역문도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원문을 대조하며 일일이 교열하는 것이 아니어서 전혀 엉뚱한 문장으로 만들어버릴 확률도 높다. 편집자 또한 그런 문장은 기계적으로 책을 펴내는 경우가 많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 내지만, 그 밖의 경우 대부분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수많은 편집자는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는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주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때도 많다.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새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만약 번역자가 이런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몇 권만 성실하게 번역해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최근에는 ‘기획출판’이 강조되면서 기획 같은 ‘고상한’ 일은 내부에서 하고 ‘교정․교열 같은 하찮은 일은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일이 늘어나 전반적으로 텍스트의 질이 저하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능력 있는 편집자를 키우자는 것이 공염불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것은 우리가 꼭 걸아가야 하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넷째, 번역비평이 있어야 한다 
규칙의 본질은 비규칙적일 때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군가 ‘아니다’라고 호루라기를 불면 ‘이다’라는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간헐적으로 번역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있지만 이것이 이뤄지는 상시적인 저널이 있어야 한다.

영미문학연구회의 회원들로 구성된 번역평가사업단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고전작품 71종의 번역물을 총 점검한 것은 사업단이 스스로 밝혔듯이 “좋은 번역을 가려내는 길잡이이자 번역문화를 혁신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1-2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저널을 통해 항구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번역의 질이 올라갈 것이다.

다섯째, 도서관 등 공적 수요부터 키워야 한다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은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번역서뿐만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천-1만 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출판뿐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을 일삼지만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07.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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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2007-11-1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번역의 경우 영한사전에 있는 단어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비우고 영영사전 등을 활용해 그 단어에 맞는 한국어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대개의 철학책들은 이 능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듯한데, 니체의 텍스트는 유독 이 능력이 요구되는 듯해서요.

로쟈 2007-11-17 23:33   좋아요 0 | URL
니체가 보다 '문학적'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반조님의 번역은 내년쯤 나오는 건가요?..

반조 2007-11-18 19:3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는 몇년 뒤 본격적인 번역준비작업에 착수한 뒤, 한 10년 뒤부터 출간해볼까 계획중입니다. 지금은 틈나는대로 니체 책을 읽고 있답니다^^ 아직도 니체에 대해 모르는 면이 너무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번역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요인이 "적은 번역료, 성급한 번역, 니체에 대한 이해 부족"인 듯하여 그런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번역하려고요. 그러니까 니체에 너무 충성하는 꼴인데, 저로서는 딱히 다른 멋진 일도 없는 듯해서^^... 이거 말만 앞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11-18 20:54   좋아요 0 | URL
10년을 더 기다려야 되는군요! 좀 아쉽네요.^^;
 

이번 대선판의 '뇌관'이라는 BBK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김경준씨가 오늘 입국했다. 뉴스특보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오늘의 최대 화제인 듯하다. 뉴스에 따르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16일 BBK 주자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귀국과 관련 "귀국을 안 하려던 사람이 대선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오는 것은 좋지 않다"며 "이것이야 말로 여의도식 정치"라고 말했다." 한다. '청와대식 정치'가 아닌 '여의도식 정치'가 표적이 된 것이 좀 특이해 보인다. 뉴스 기사를 더 읽어내려다가다 마저 읽은 대목은 이렇다(사진 왼쪽은 김경준씨의 누나라는 변호사 에리카 김). 

"이 후보의 경제정책이 '상위 20%를 위한 정글자본주의'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정글자본주의는 있지도 않은 말이고, 정치적 용어"라며 "정 그렇다면 내가 타잔이 될 용의가 있다. 그 사람들(비판하는 사람들)은 타잔 될 능력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경쟁력 있는 강한 사람에 대해서는 정부가 지나친 간섭도 지원도 할 필요도 없다"며 "정부의 역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 장애인 노약자, 이런 측면은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뉴시스)

'정글자본주의와 타잔'이란 수사학에 이끌려 떠올리게 된 시가 있다. 대학 1학년 때 쓴 <타잔>이란 시다(그해 겨울에도 대선이 있었군.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당의 선거참관인이란 걸 했었다). 종강파티에서 시낭송 퍼포먼스까지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그때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읽게 된다.  

타잔

그는 타잔
도시의 질탕한 밀림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타잔
악어 비슷한 거라면
모조리 죽이려 드는
매끈한 악어의 배를 가르며
넘치는 쾌감을 느끼는 사나이
악어백이며 악어가죽이며
도저히 참지 못하지
아아아악……어!
미친 듯이 달려가는 타잔
요즘은 미꾸라지까지 잡으러 다니며
먹어도 악어탕 추어탕만 먹는 사나이
그러다 가끔은 이상한 식인종에
쫓기기도 하지만 자랑스런
밀림의 사나이 그는
타아잔
당신은 치타!

07. 11. 16.

 

 

 

 

P.S. 이명박 후보의 책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출간돼 있다. 판매량순으로, 신화는 없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이명박 혁명까지이다. 거꾸로 읽어도 좋겠다. '이명박 혁명'부터 '신화는 없다'까지. 신화는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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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타잔 하면 윤도현밴드 1집 수록곡이 생각나네염.

로쟈 2007-11-17 11:00   좋아요 0 | URL
타잔 세대가 아니신가요?..

yoonta 2007-11-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어!" <-------이부분에서 뒤집어졌습니다..ㅎㅎㅎㅎㅎㅎㅎ

로쟈 2007-11-17 10:59   좋아요 0 | URL
ㅎㅎ

소경 2007-11-18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부분에 대칭되는 퍼포먼스 생각에 자지러졌어요. ㅋㅋ

로쟈 2007-11-19 12:29   좋아요 0 | URL
'현장'에서도 그런 반응이 있긴 했습니다...

유엔미블루 2007-11-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북리뷰계의 동방신기라지요?

로쟈 2007-11-20 19:42   좋아요 0 | URL
제가 동방신기를 잘 잘 몰라서.^^; '신화'와 'H.O.T'도 있나요?..
 

새로 번역돼 나온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을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을 주게 되는 책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이다. <쿤/포퍼 논쟁>(생각의나무, 2007)로 연초에 소개되었던 저자인지라, 게다가 출판사도 교양과학서를 전문으로 내는 곳인지라 과학자-지식인에 관한 책인 것으로 짐작했지만 리뷰들을 읽어보니 그렇지는 않다. 말 그대로 '지식인'을 다루고 있고, 부제도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이다. 국역본의 표지 또한 그럴 듯하데 분량도 만만한 만큼(그에 비하면 책값은 만만치 않다) 한번 읽어볼 작정이다. 관련 리뷰를 먼저 읽어둔다.

경향신문(07. 11. 16) 침묵은 禁, 저항하고 비판하라

무릇 지식인은 소크라테스보다 소피스트들을 본받는 게 낫다고 설파한다면 수긍하겠는가? 석가모니, 공자, 예수와 더불어 4대 성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소크라테스보다 ‘궤변론자들’을 따르라니 말이나 될 법한가.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석학 스티브 풀러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오늘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식인의 원형’이라고 우긴다. 소피스트들은 ‘경박한 박식가’ ‘거만한 허풍선이’라는 낙인과는 달리 대중이 험난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데 요긴한 지식과 방법론을 양심과 능력에 따라 전수했다는 게 그 이유다.

풀러는 소크라테스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소피스트들을 소크라테스와 비슷하게 대접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이처럼 이채로운 논리를 펴는 것은 지식인의 기본 자질이 모든 독단론을 거부하는 소피스트들의 자세에 있다는 점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graphic: bookcover

풀러가 쓴 ‘지식인(원제 The Intellectual)’은 소피스트의 복권에서도 보듯이 색다른 지식인론임에 틀림없다. 지식인의 특성과 소양, 책임에 관해 창발적인 마음의 양식으로 상을 차렸다. 그 흔한 기존 지식인론에 대한 사상사적 검토나 비판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의 지식인론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이 없음은 물론이다. 저자가 조금 특이한 사상가이긴 하지만 선행연구 참조를 금과옥조로 삼는 학자에 속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영국 워윅대학 교수인 풀러는 ‘사회인식론’의 개척자다.

지식인론을 쓰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모델로 삼은 것부터 놀랍다. 그것도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라고 들머리에서 아낌없는 헌사를 바친다. 마키아벨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에 관한 언급은 그걸로 끝이다. 책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마키아벨리는 본 무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지식인이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인지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 게 의아하다.

명색이 지식인론이라면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규범적 처방전쯤은 내려줄 법하나 그런 것조차 없다. 다만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 법을 다섯 가지로 간추린다. 첫째, 판단 능력을 잃지 않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법을 배워라. 둘째,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 셋째,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그것이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넷째,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강화하기보다 그것을 균형있게 보충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라. 다섯째, 공공 사안과 관련된 논쟁에서는 진리를 위해 끈기 있게 싸워야 하지만 일단 자신의 주장이 오류로 판명나면 정중하게 인정하라.



지은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더 이상 존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예단하는 ‘보편적 지식인’의 부활을 꿈꾼다. 반전(反戰)에서부터 사생활 윤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논급하던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은 현대사회의 공론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풀러는 그같은 패배주의를 통박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대가들의 사상을 ‘정신의 원스톱 쇼핑몰’로 이용하면서 지적 생존을 연명하고 있고, 일부는 변화된 시대에 적응해 ‘지식 관리자’로 진화하고 있다고 혐오의 화살을 날린다. 그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외치는 계몽주의의 빛바랜 깃발 같은 것도 은근히 보고 싶어한다.

저자는 ‘지적 자율성’이라는 덕목을 무척이나 아낀다. 지식인이 생각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야생으로, 제멋대로 자라도록 되어 있어서다. 지식인은 ‘오직 진리’가 아닌 ‘총체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언제나 논적들과 백병전을 벌일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독려한다. ‘지식인의 무기고에 비판보다 나은 것은 없다’며 ‘침묵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지적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더불어 지식인은 저항의식을 통해 진열대에 놓인 아무 상품이나 사들이기를 거부하는 소비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지은이는 지식인과 학자를 애써 구별하면서 흥미롭게 비유한다. “대학은 포도원인 셈이고, 학자들은 와인 생산자, 지식인들은 와인 감식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와인 생산자의 존재 이유가 팔리는 와인을 생산하는 데 있다면 감식가의 존재 이유는 어떤 음식에는 어떤 와인을 마시는 게 좋을지를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책의 멋진 마무리 말도 지식인과 학자의 차이점을 파고든다. “학자들은 과거를 다른 미래로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들은 영원히 희망을 놓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결코 도전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는 지식인의 상반된 역할도 제시한다. 하나는 특정한 관념의 배양을 금지하는 검열관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자극적인 관념 형식을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악마의 대변인 역할이다. 지식인이 풀어야 할 가장 힘든 과제는 계급과 성, 인종의 구분을 초월해 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라고 갈파하기도 한다.

이 책은 번역자도 실토했듯이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 200쪽이 약간 넘을 정도로 얇은 편인데 내용물을 많이 담으려다 보니 압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2005년 영국의 자유주의적 좌파 성향의 잡지 ‘뉴 스테이츠먼’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만큼 값진 평가를 받는다.(김학순 선임기자)

07. 11. 16.

Science Vs Religion?: Intelligent Design and the Problem of Evolution

P.S. 풀러 교수의 전작인 <쿤/포퍼 논쟁>에 관해서는 '토머스 쿤은 미국의 하이데거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043190)란 페이퍼를 참조. 올해만 3권의 책을 낸 저자의 최신작은 <과학 vs. 종교?: 지적 설계와 진화의 문제>(2007)이다. 국내에서도 '팔릴 만한' 주제인지라 어쩌면 조만간 소개될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에 대한 반응이 좋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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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17 22:49   좋아요 0 | URL
뜻밖에도 적절한 듯싶습니다.^^
 

이 주에 새로 나온 책 몇 권에 대한 '낚시질'을 하다가 첫 페이퍼부터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되기 전에). 바쁜 일들도 많은지라 그냥 '후퇴'하기로 한다. 대신에 미친 척하고 사들고 온 아리스토렐레스의 <형이상학> 두 권에 대한 '신고식'은 해둔다. 왜 두 권이냐면, 최근에 나온 완역본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 외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왔던 발췌본 <형이상학>(문예출판사, 2004)을 한꺼번에 사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로스(Ross)의 영역본을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박스에 들어가 있나?). 모스크바에서 사들고 왔던 러시아어본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러시아어 아리스토텔레스로 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시학>을 갖고 있다. 아래 이미지가 러시아어 주석본 <형이상학>이다.

Аристотель Метафизика. Переводы. Комментарии. Толкования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들의 경우 모두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영역(http://ebooks.adelaide.edu.au/a/aristotle/metaphysics/)과 러시아어역(http://www.lib.ru/POEEAST/ARISTOTEL/metaphiz.txt)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으니 대략 책을 읽을 만한 준비는 다 된 듯싶다. 그러고 드는 생각. 영어나 러시아어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리는 왜 거금을 주고 구입해야지만 읽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런 고전 류는 국가가 번역판권을 인수해서(인문한국사업 같은 데 들어가는 비용의 일부를 이런 데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비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완역본 <형이상학>의 역자는 아직 학위를 마치지 않은 소장 고전연구자로 이미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 2005)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고, 현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작품의 의의나 번역의 품을 고려할 때 거의 '올해의 번역상'의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으로 펼쳐든 '해설'에서 기본 용어들의 다소 파격적인 번역어들과 만난다. 'pathos(파토스)'를 '겪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고전연구자들끼리 '합의'가 된 번역어인지 모르겠지만 생소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새 번역어들이 입에 익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건 '있음론' 대신에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한 '존재'를 '있음'이라고 옮기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있음'이나 '있는 것'이 '존재'나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며 이해가 쉬운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것'이란 말을 쓸 일이 있는가?).

고전의 일상어 번역에 대해서는 김남두 교수(역자는 그 제자로서 이 번역본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의 견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그는 "일상어가 학술어 대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일본어 조어가 일상어를 대신해 학술어가 되었"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상어와 학술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표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했다. 당분간 우리는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과 같이 쓰는 학문 '이중어' 시대를 살아가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은 <형이상학>의 첫문장이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이다. 두 번역본에서 첫문단만을 대조해보겠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덕을 보고 있"다는 로스의 영역도 같이 옮겨놓는다(물론 그 덕은 주로 주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시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감각들 중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지각하며) (시각을 통해 사물들의) 여러 가지 차이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제이북스판, 29쪽)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러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증거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관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에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감각 가운데 그것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수많은 차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문예출판사판, 50쪽)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An indication of this is the delight we take in our senses; for even apart from their usefulness they are loved for themselves; and above all others the sense of sight. For not only with a view to action, but even when we are not going to do anything, we prefer seeing (one might say) to everything else. The reason is that this, most of all the senses, makes us know and brings to light many differences between things.

다소 특이한 점은 "원문에 좀더 충실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완역본에서 보이는 일상어와 개념어 번역의 혼용이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나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나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보다 문어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은 "[시각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보다 구어적인 쪽인 듯하지만 역시나 좀 낯설다. 이러한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쪽은 발췌역쪽이다. 물론 발췌역본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었지만('그것은' 같은 대명사 때문에).

이 <형이상학>에 대한 두 종류의 우리말 번역을 맛보기로 읽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번역서 모두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업적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일상어 번역'이란 말이 표방하는) 보다 대중적인 번역으로서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 연구자나 고급독자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아무런 각주 없이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때 '살아있는 번역'으로서 의의를 가질 테지만(가령 조안 스파르의 <플라톤 향연>(문학동네, 2006) 같은) 이번에 나온 완역본도 그렇고 국역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전공자'나 '연구자'들이다(온라인의 영역본 <형이상학>에는 아무런 각주도 붙어 있지 않으며 영어 또한 평이하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옛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은 물론 본 역서와 더불어 원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 좋은 번역은 없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옛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옛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그리스어-한글 찾아보기에 나와 있는 각 낱말의 어원 설명과 함께 해당 영어 번역어를 잘 활용하면 원어가 갖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25쪽)

역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엣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에겐 사실 이 번역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의 좋은 번역"은 없을 뿐더러 그리스어 독해력을 갖고 있는 경우엔 대개 영역이나 독역본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터여서 그걸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경우이건 국역본보다 더 이해가 용이하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앎'을 일반 독자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우이다(전공자들이야 이심전심으로, 혹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딜레마다. 아무리 전달하고 싶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공자/번역자가 원문을 읽고 갖게 된 '앎'은 어떤 앎인가? '번역 이전의 앎'이다. 그리스어 원문 자체에서 얻는 어떤 '상'이기에(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 가지 앎이지만 궁극의 앎은 아니다(전달 불가능한 앎, 곧 가르칠 수 없는 앎이니까).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번역 자체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이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가령 김소월의 아무시나 다른 언어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기에 어원 설명과 영어 번역어를 세심하게 고려해가며 읽어야 원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조언은 번역 자체의 의의를 침식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번역본만으로도 <형이상학>의 내용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도가 역자의 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독자들에게 더 충실한 번역이 한번 더 출간되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본래 앎을 욕구한다면 말이다...

07. 11. 16.

P.S. <형이상학>의 인용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대로 약간 윤색해본다. 말하자면 나대로의 '앎'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슨 필요에서가 아니라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무엇보다도 시각의 경우가 그렇다. 무얼 하려고 해서뿐만 아니라 딱히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여느 감각들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사물들간의 차이 또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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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thos를 겪이라고 번역했다고요? 헐... 겪이라는 말은 일상어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ㅡㅡ;;

로쟈 2007-11-16 14:47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일상어'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지 않나 싶어요...
 

올해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편혜영씨가 선정되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수상소식이라 덩달아 반갑다. 작가와 사소한 안면이라도 터둔 것이 반가움의 크기를 조금 더 키워주는지도 모르겠다(딱 한번 만나본 인연이지만, 자랑하자면 나는 작가가 보내준 사인본을 갖고 있다).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두었기에 따로 군말은 적지 않고 관련 인터뷰기사와 선정이유서를 옮겨둔다.

한국일보(07. 11. 16)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편혜영'

#엽기적 소설을 썼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야.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정확해. 자기 몸 하나가 있고 그 반(半)만 갖고 소설을 쓰는 것 같아. 그 반으로 자기를 넘어서려는 거야.(김윤식 본심위원)

12일 오후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 모인 한국일보문학상 본심위원(김윤식 임철우 황종연)들은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서 소설가 김애란씨가 편혜영씨에 대해 쓴 글을 화제에 올렸다. 글엔 이런 전언이 있었다. 편씨가 스무살 때 모친상을 치른 직후 밥을 지으려 쌀통을 열었는데 기다랗고 하얀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단다. 겨우 쌀을 씻어 아버지께 상을 차려 드렸지만 자기는 며칠간 집 밥을 먹지 못했다고.

황종연 위원이 말을 이었다. “첫 소설집 <아오이가든> 때 편혜영 소설은 잔혹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사육장 쪽으로>에선 사무원의 세계가 등장한다. 실제 작가 자신이 애써 진입한 세계이자 공인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금 가게 하고, 연신 독자를 허방짚게 만든다. 사무원인 동시에 소시민인 자로서의 양가감정이 독하다. 이 사람, 작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혹의 미학이 영롱한 편혜영의 ‘하드고어 원더 랜드’(평론가 이광호)가 구별짓기의 제스처가 아닌, 진정성 있는 한국문학의 신천지임을 확인한 이상 본심위원들에게 수상작 결정을 늦출 이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나지막히, 알아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들킨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이, 자기도 함부로는 질색이라는 듯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더랬다.(소설가 이신조)

13일 오후 수상자 인터뷰를 위해 편씨를 만났다. 그가 6년째 근무 중인 서울 광화문의 직장 맞은편 커피숍에서였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차림에 ‘파버카스텔’ 브랜드의 샤프펜슬을 가늘고 긴 손가락에 쥐고 마주앉은 편씨와의 대화는 편안하면서도 낭비가 없었다. 그는 듣고 이해하는 일에 능숙했고, 간결하고 요령있게 답할 줄 알았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한, 오감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예민함과 밀도 있는 건조체 문장을 고집하는 단단함에 비춰 자연인 편혜영을 예단한 일은 (앞의) 반은 틀리고, (뒤의) 반은 얼추 맞았다. 스스로는 “약간의 무대 공포가 있고, 좌중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편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노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2년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소설이든 뭐든 쓰고 싶다’는 욕구를 좇아 뒤늦게 서울예대, 한양대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꾸준히 부업을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해 현재의 직장에 입사, 이젠 팀원 여럿을 거느린 팀장이다. 4남매의 막내임에도 ‘막내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일하시느라 늘 바빴다. 어리광을 피우는 걸 잘 못한다. 부탁했다간 거절 당할 것 같다는 심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턴 출가한 언니들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편씨는 문학을 일상으로 여기는 듯 보였다. 쓰는 일을 밥 먹고, 출퇴근하고, 청소하고, 잠자는 것과 공평하게 대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주로 집에서 쓰지만 도서관, 카페 등 장소 안 가리고 어디서나 잘 쓴다”고 했고, “계간지 청탁을 받아 3개월에 단편 1편씩 쓰는 일은 직장 생활을 하지만 아주 벅차진 않다”고도 했다. 여기엔 문학에 자신의 전부를 투입해야 한다는 강박적 자세가 묻어나지 않았다. 대신 생활에 단련된 자의 여유와 기품이 있었고, 그래서 신뢰감이 들었다. 어떤 난관에도 일상은 계속되듯, 편혜영 소설도 앞으로 오랫동안 성실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하리란 믿음.

#한국일보문학상 하면 젊은 작가가 내지르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쳐주는 상이란 느낌이 들어요. 바로 그 상을 젊은 시절에 받게 되다니, 너무 기뻐요.(편혜영)

등단 7년 만에 받는 첫 상이다. 수상작에 실린 개별 단편들은 작년부터 유수의 문학상에 유력 후보로 자주 거론돼 왔다. 한국일보문학상엔 2005년부터 이미 이름을 올려왔다. 그해엔 단편 ‘시체들’, 작년엔 단편 ‘사육장 쪽으로’가 본심 후보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편씨는 소위 ‘2000년대 작가’로 분류되고, 스스로도 그 점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동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을 ‘개성’이라고 말했다. “선배 작가들에겐 전쟁, 이념, 부정해야 할 아버지와 같은 명확한 시대적 명령이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에겐 그런 게 없다. 오직 세계를 보는 개성적인 눈으로 존재 증명을 해야 한다. 창작자로선 흥미로운 환경이다.”

편씨는 현재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내년에 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등단 이후 줄곧 단편을 써왔던 그에겐 만만찮은 도전이다. 그는 “장편은 단편과 호흡이 다르다. 날마다 쓰지 않으면 쓸 수 없을 것 같다”며 긴장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 미안하게도, 전혀 걱정스럽지 않았다. 이러구러 생활에 충실하다보면 내년이 가기 전 서점 한복판에 놓인 편혜영의 멋진 첫 장편을 보게 되리란 생각만 들었다. 일상의 기시감은 강렬하고 그녀는 재능있고 성실하다.(이훈성기자)

■ 왜 편혜영인가(선정이유)

올해 한국일보문학상에는 예년과 달리 장편이나 단편 작품이 아니라 한 권의 장편소설을 포함한 여섯 권의 소설이 후보작으로 뽑혔다. 장편과 단편을 대등하게 간주하는 것은 무리이니 단편의 경우에는 한 편이 아니라 단편집을 후보작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는 예심위원들의 합의에 따른 결과라는 해명이 있었다.

이렇게 단편집을 심사 대상으로 삼게 되면 저자의 전반적인 창작 기량의 수월성 또는 '문학 세계'가 특정 작품의 우수성 못지않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다. 따라서 본심의 부담은 상당히 커진 셈이지만 예심위원들의 안목 덕분에 우리는 후보작으로서 손색없는 소설들을 대상으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윤성희의 <감기>,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 천명관의 <유쾌한 하녀 마리사>,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 이상 여섯 권의 후보작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그 나름의 특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우열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우리는 한국일보문학상이 경력, 연고, 평판 등 이런저런 이유에서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들에게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그것은 앞으로도 계승할 가치가 있는 전통이라는 점에 유념하기로 했다. 또한 단편집의 경우 수록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균일하고 '문학적인 것'을 둘러싼 의식의 고투가 치열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주목하기로 했다.

본심은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에 대해 각자 소견을 밝히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각자 의견을 내놓고 나니 어느 소설로 하자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가 논란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편혜영 씨의 단편들은 경제적으로 제어된 서술, 정교한 디테일을 통한 암시, 통일된 인상의 창출 등과 같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규범을 정확하게 습득한 바탕 위에 씌어진 것이다.

작년 한국일보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작이었던 표제작은 물론 그 밖의 단편 모두 현대의 삶에 대한 은유를 이루는 여러 가지 상황을 박진감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상황의 핵심은 겉으로는 정연한 듯한 인간 세계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어느 순간 인간 현실을 현실이 아니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출현에 있다.

편혜영 씨는 한 작품에서 잡초와 들쥐가 침입하지 못하는 단단한 집을 원하던 부부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습지에 빠져죽게 만들었듯이 일상생활의 조건을 이루는 현실의 범주들이 어떤 원초적인 미혹에 먹혀버리는 광경을 기괴한 방식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모든 의미와 상징의 질서를 헛것으로 만드는 집합적 무의식의 심층을 냉혹하게 파고든다. 인간의 내부, 그 암흑의 핵심을 향해 이토록 깊이 시추를 내린 작가는 우리 문단에 흔치 않다. 한국일보문학상이 편혜영 씨의 외로운 탐구에 격려가 되길 바란다.(본심위원 김윤식 임철우 황종연)

07. 11. 15.

P.S. 작년 겨울인가 문단의 한 송년회 자리에서 편혜영, 김애란 두 작가와 잠시 합석을 한 적이 있다(김애란씨는 이미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터이므로 안 그래도 절친한 두 작가는 이제 한국일보문학상 '가족'이 되었다). 마침 하반기에 두 작가가 쓴 작품들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대로의 상찬을 늘어놓았던 듯하다. 올해 두 사람은 나란히 작품집을 냈고 또 내게도 나란한 책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와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나는 두 권씩 갖고 있다(딸아이에게 가보로 물려주어야겠다). 따로 인사를 전하지 않았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두 작가의 후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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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혜영의 작품은 이효석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어본 '분실물'이 전부인데, 참 촘촘하면서도 깊숙히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인 작품이었답니다. 사육장쪽으로,에도 관심이 가네요- 근데 편혜영작가, 예쁜데요? ㅎㅎ

로쟈 2007-11-16 08:58   좋아요 0 | URL
실물이 더 낫습니다.^^

송연 2007-11-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 분실물을 읽고는, 다시한번 책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케 되더군요.
문체는 단순하지만, 그러한 필치가 내용을 이끌어가는데 더 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작가마다 여러 글쓰기의 방식들이 있겠지만 편혜영씨는 상황에 따른 내면의 정확하고 세심한 묘사를 통해 독자를 흡입할줄 아는 스킬을 지닌 작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카프카의 느낌도 들었었구요.
그런데 로쟈님, 궁금한것이 한가지가 있어요,
많은 이들이 김애란을 칭송하더군요, 하지만 그의 대표작 두권을 읽고난 후에 들은 저의 생각은, 작가로서의 상상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녀의 사적 경험들을 글 속에 많이 투입시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네요, 물론 그러지 말란 법도 없고 개인적 경험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녀같은 경우는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았네요... <침이 고인다>는 특히 더욱요.
그리고 <달려라 아비> 같은 경우는 신문 사설들을 꼼꼼히 읽은 작가지망생이 자신의 문장력을 어법에 맞게 잘 구성하려고 분투한 듯한 느낌을 주었구요, 제가 '나이'에 대한 선입견같은것은 없지만,(게다가 그정도의 나이면 먹을만큼 먹은 나이이구요)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면 왠지 설익은 단감을 먹고 있는듯한 착각이 듭니다. 저만 잘못 생각하고 있는걸까요?;;

로쟈 2007-11-19 12:27   좋아요 0 | URL
'잘못 생각'하실 리는 없지요. 저마다의 취향과 판단의 기준이 있는 것이니까요. 김애란 작가의 경우 많은 독자들에게 어필한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가난'에 대한 그녀의 감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