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러시아 혁명기 문학읽기'를 테마로 한 기획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69).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은 이 시기 드라마 세 편을 묶은 <광장의 왕>(글누림, 2007)과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민음사, 2007)이다. 당초 작년 가을 러시아 혁명 90주년과 맞물려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온라인 기사는 해가 넘어서야 올라왔다(나는 기사의 필자를 주선한 인연을 갖고 있다).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아래는 고리키 작 <태양의 아이들>의 한 장면).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사랑하는 자만이 불가능을 알며…’

20세기 초 러시아 문화 공간은 인류 예술사의 어느 지점보다 흥미롭고 역동적이다. 예술은 작품의 내적 공간을 넘어서 현실과 혁명의 과정에 역할하고, 정치적 현실은 때로는 예술을 위기로 내몰고, 때로는 화려한 부활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혁명 이념은 예술의 모더니즘과 격렬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나고 있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기든스나 아렌트의 시각에서 보자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이라 불릴 수는 없지만)을 이야기하는 세 편의 드라마가 수록된 『광장의 왕』과, 1917년 혁명 성공 이후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 『구덩이』는 당시 혁명과 문학적 삶의 관계를 보여주는 치열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세 편의 드라마 - 『광장의 왕』
『광장의 왕』에는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블로크의 『광장의 왕』,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가 고리키의 『태양의 아이들』, 은세기 극작가인 안드레예프의 『별들에게』가 수록되어 있다. 역자가 언급하듯, 이 드라마들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블로크의 드라마 『광장의 왕』에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비극적 인상이 지배적이다. 늙어버린 광장의 왕은 더 이상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고, 등장인물들은 구원을 가져다 줄 배를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가 발현되는 고대 사회를 희망하는 조드치와 고대 그리스적 미의 현현인 그의 딸(블로크의 시 ‘낯선 여인’의 형상과 유사하다), 그리고 광장의 왕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상징하며, 배를 기다리는 광대와 ‘소문들’은 그와 괴리된 현실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들 사이에서 부단히 동요하고 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군중에 의하여 왕과 시인, 그리고 조드치의 딸은 파멸하게 된다.

『태양의 아이들』에는 소설가 못지않은 극작가로서의 고리키의 대가적 면모가 드러나 있다. 작가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의 극복될 수 없는 거리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에서 1905년 혁명 실패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있다. 콜레라가 창궐하고 혁명이 발발한 외부 세계, ‘야수들로 가득한 삶’과 철저히 차단되어 과학과 이성의 성벽 안에 갇혀 지내는 인텔리겐차들은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학자 프로타소프는 자신을 해하려한 ‘민중’ 예고르를 혐오하면서, “사람들은 반드시 밝고 선명해야 해... 태양처럼......”(277쪽)이라고 말을 맺는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글자를 늘 대문자로 쓰곤 했던 고리키적 시각에서 이들 두 진영 어느 쪽도 아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즉 ‘태양의 아이들’은 아니었다.

드라마 『별들에게』에서 안드레예프는 혁명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보여준다. 인간 이성과 영원성에 대한 천문학자 테르노프스키의 확신은 혁명에 의한 현실 전복을 꿈꾸는 아들 니콜라이와 그의 약혼녀 마루샤의 실천적 유토피아 이념과 대립된다. 극의 종결부에서 죽은 니콜라이를 따라 혁명으로, 즉 ‘삶으로 가겠노라’는 마루샤의 말에 테르노프스키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야수들만 죽는다. 죽이는 자들만 죽는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자, 찢긴 자, 불태워진 자들은 영원히 산다.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영원의 아들에게 죽음은 없다(148쪽)”며 죽음을 통한 불멸의 테마를 역설한다. 

세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비극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실패한 혁명에서 절망만을 보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고리키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심연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이 심연을 넘는 다리를 놓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민중출신이면서 “점차로 고양되어 지식의 정상에 도달한” 인텔리겐차의 등장으로 이 간극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리키의 인터뷰, 287쪽). 작가의 이러한 믿음은 이후 장편 『어머니』(1906)에서 파벨의 형상을 통해 체현되며, 1917년 혁명 이후에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인텔리겐차가 나타남으로써 현실이 된다. 그 가장 적합한 예가 바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이다.

‘잉여의 사랑’, 또는 ‘성취의 멜랑콜리’-『구덩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그야말로 ‘혁명이 길을 열어준’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뼛속까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던 플라토노프는 역설적이게도 대표적 ‘반소비에트 작가’로 취급되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냉소적이고 풍자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1930년대 대숙청의 시기에 스탈린은 작가의 열다섯 살 된 아들을 반체제 음모죄로 유형을 보내고, 아들 플라톤은 유형지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럼에도 부단히 스탈린의 유토피아와 화해하려했던 작가는 그와 같은 의도를 담은 단편 「귀향」(1946)마저 ‘저주받을 작품’이라는 비난에 처하자, 더 이상 회복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아들에게 감염된 폐결핵으로 죽게 된다. 『체벤구르』, 『구덩이』, 『행복한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작품들은 작가 생존시에 출판되지 못했지만, 사후 영미문학권을 중심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했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러시아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프레데릭 제임슨의 『시간의 씨앗』에도 언급되듯이, 『구덩이』는 비슷한 시기의 장편 『체벤구르』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읽힌다.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자먀틴이나 오웰, 헉슬리 등의 소설과 달리 『구덩이』는 1920년대 말 스탈린의 ‘대변혁기’ 당대의 현실을 그린다. ‘전체인민의 집’을 짓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은 건물의 토대가 될 구덩이를 파고 있다(소설제목은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용 구덩이를 뜻한다. 러시아는 동토라 건물을 지을 때, 토대를 깊고 넓게 판다). 소설 후반부는 부농 척결과 집단화가 진행되는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언어와 사건들은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며 낯설다. 잘 읽히지 않는 소설 언어는 브로드스키가 일찍이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시대의 언어’, ‘유토피아의 언어’였다. 이 서걱거리는 말들은 스탈린적 유토피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개인의 사유를 방해하는 국가의 말은 주인공들의 의식에 침투하고, 작가는 이들의 말을 자기 서술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유토피아가 강제하는 이념적 속성을 노출한다.

그렇지만 소설은 현실에 대한 풍자로만, 또는 블로흐식의 이미 이루어진 것들에 대한 회의, ‘성취의 멜랑콜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진실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는 보쉐프의 말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유토피아 건설의 이념을 인간 존재 방식 전체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에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이자 노동자들의 희망이던 소녀 나스탸는 갑자기 죽게 되고, 미래의 집을 위해 파내려간 구덩이는 소녀의 무덤이 된다(아이의 희생이라는 테마는 다분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작가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결말이 대상에 대한 부정적 관계(풍자)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잉여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소녀의 죽음으로 사회주의 세대의 파멸을 묘사한 것은, 작가의 실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실수는 단지 그의 상실이 모든 과거와 미래의 파멸과도 같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잉여의 불안감 때문이다.”(『구덩이』의 에필로그)

암울했던 혁명과 내전의 시기를 겪어낸 러시아의 1920년대는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가능한 ‘대화와 대안의 시대’였다. 혁명이념에 고취되어 새로운 세계 건설의 기대에 들뜬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였다. 국내에도 번역된 불가코프, 자먀틴, 필냐크, 올레샤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당시의 산문들은 형식과 내용, 문체에 있어서 마치 누보로망의 그것처럼 현란하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토노프의 소설도 아직은 대화가 가능했던 시기의 예술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대화와 대안’의 실험들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강령의 발표 이후 오직 하나, ‘독백’의 길로 귀결된다.



포스트-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소비에트 문학읽기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던 공산주의자들의 실험은 20세기의 종결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실패한 역사의 흔적들을 재빨리 폐기하는 것, 맥도날드 표지와 레닌 초상이 함께 찍힌 티셔츠를 팔면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척하려는 제스추어에서 우리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의 문화적 경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포스트-포스트소비에트 시대에는 친소비에트/반소비에트라는 말조차 더 이상 유표가 아니다. 고리키의 『어머니』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도 이제는 이념적 맥락에서 읽히지 않는다. 이들은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 또는 『해리포터』에 밀려 서가의 뒤편에 나란히 꽂혀 있다.

그렇지만, 그럼으로 해서 소비에트러시아문학은 오늘날 새롭게 읽힐 수도 있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시대, 혁명이란 말에 무감각한 독자들이 ‘문학’과 ‘유토피아’가 동의어였던 혁명기 러시아 문학을 만날 때에, 진정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적 체험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만이 불가능을 알고, 그 불가능한 것을 죽도록 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를 가능케 할 것이다......”(플라토노프, 「태양의 후예들」)라는 젊은 공산주의자의 낭만에 가득한 선언이 혁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름답지만 여전히 광포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윤영순_경북대 노문과 강사)

08.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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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의 <문학은 자유다>(이후, 2007)에 실린 두번째 평론은 '1926년...'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부제는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 그리고 릴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러시아 시인과 한 독일 시인의 관계에 대한 평론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이 세 시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 <편지: 1926년 여름>의 리뷰에 해당하는 글이다(책은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가 편지를 교환한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릴케까지 가세했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사정을 알고 보면 또 무지가 용납될 만한 게 이 영역본(1986)의 저본은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독어본(1983)이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의 편지들만을 묶은 것으로 <영혼들이 보기 시작한다: 편지들, 1922-1936>(2004)이란 제목이고 720쪽 분량이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Борис Пастернак Души начинают видеть. Письма 1922-1936 годов

내가 아는 건 2004년판인데, 모스크바에 체류시에 구입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운 책들 가운데 하나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다). 독어본은 1926년에 한정하여, 이 두 사람에다 릴케까지 가세하여 서로가 나눈 예술적 열정(혹은 "예술의 성스러운 섬망 상태")을 모아놓았던 듯하고, 그게 영어로도 번역된 것이다.

1926년이면 츠베타예바가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하 대화 상대자였다. "파스테르나크는 츠베타예바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시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자기가 쓴 글은 츠베타예바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간 츠베타예바는 이때 서른 네 살이었고, 파스테르나크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숭배했던 릴케는 쉰한 살이었는데,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이 교환환 편지들은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를 세 꼭지점으로 하여 왕래된 것이었다.

 

 

 

 

릴케에 대해 조금의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그가 두 차례 러시아 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자신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릴케에게 큰 영향을 준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은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였는데, 그 사람과 함께 두 차례 러시아를 여행했고 그 뒤로 러시아가 자기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42쪽)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로서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멘토)였던 '그 사람'은 바로 루 살로메이다. 릴케는 1900년 살로메와 함께 두번째 러시아 여행을 떠나는데, 그때 열살이었던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릴케를 처음 만나고 짐작엔 인사를 주고받는다(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가 릴케와 면식이 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릴케가 애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기차에 오르는 모습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고 그 장면이 파스테르나크의 가장 뛰어난 산문 <안전통행증>(1931)의 첫머리에 나온다.(존경의 뜻으로 두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42-43쪽)

참고로, <안정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으로 번역됐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http://blog.aladin.co.kr/mramor/834190),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http://blog.aladin.co.kr/mramor/1529971)를 참조. 

Рильке и Россия

러시아에서는 <릴케와 러시아>(2003)란 타이틀의 책도 출간돼 있다. 역시나 2004년에 손에만 들었다가 놓았던 책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다 돈의 장난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견적이 너무 나오기 때문에 미뤄놓을 수밖에 없다(내가 바라는 건 누가 이런 책을 써주는 것이다!). 

세 사람의 편지왕래는 "파스테르나크 아버지의 주선으로 릴케와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다음에 파스테르나크가 츠베타예바에게 편지를 쓰라고 릴케에게 제안하여 세 사람의 편지왕래가 되었다. 츠베타예바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츠베타예바의 욕구, 대담성, 감정의 솔직함이 하도 강렬하고 도발적인 탓에 곧 세 사람 사이의 대화가 불타오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45쪽)

결국 츠베타예바는 릴케에게 만나자고 간청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고 릴케는 침묵에 잠긴다. 츠베타예바에 대해서는 '시인이 쓴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과 '츠베타예바의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1779102)을 참조.

하지만 "츠베타예바는 12월말 릴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 릴케에게 편지를 쓰고, 이듬해에는 긴 산문으로 된 송시(ode)를 바친다." 파스테르나크도 릴케가 죽고 5년이 흐른 뒤에 완성한 <안전통행증> 말미에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함시킨다. <안전통행증>은 "릴케의 영향 아래에서 쓴 것이며 무의식적으로라도 릴케와 겨루며 쓴 글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를 의식하며 썼다는 얘기다.

죽음이 갈라놓은 세 사람의 인연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릴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두 사람은 믿지 않으려 한다. 우주적으로 보아 도무지 부당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15년 뒤인 1941년 8월, 츠베타예바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또 놀라고 회한을 느낀다. 1939년, 츠베타예바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오기를 결심했을 때, 돌아오면 파국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파스테르나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47쪽) 파스테르나크다운 일이다.

 

손택이 보기에 세 사람의 열정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충만했다. "이 편지들에 쏟아부은 광희(ecstasies)는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서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다." 손택의 결론은 이렇다.

 


"1926년의 몇 달 동안 세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서로에게 아름답고 불가능한 요구를 할 때 타오른 그 불빛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파스테르나크의 표현이다)' 지금 그들의 열정과 고집은 뗏목처럼, 등대처럼 바닷가처럼 느껴진다."(47쪽)

 

'뗏목'과 '등대(횃불)'와 '바닷가'에 대한 그리움, 그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파스테르나크에게서나 손택에게서나, 그리고 우리에게서나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선적 형식주의'는 '바리새주의(Pharisaism)'의 번역인데, '위선적 형식주의'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선 직역해주는 게 더 나았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oday, when '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 the phrase is Pasternak's - their ardors and their tenacities feel like raft, beacon, beach."             

 



 

 

 

 

 

 

여기서 '파스테르나크의 표현(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은 그의 시 '햄릿'(1946)에 나오는바, 이 시의 서정적 화자는 햄림이자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햄릿'?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에 실린 '유리 지바고의 시'에서 맨처음에 나오는 시이다(지바고의 시들은 소설의 제 17부에 해당한다. 간혹 '부록'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생략한 국역본들이 있는데 무지하거나 무례한 경우들이다). 엘레노어 로우(Eleanor Rowe)의 영역은 이렇다.

 
The rumbling has grown quiet. I walk out on the stage.
Leaning against a door jamb,
I try to catch in a distant echo
What will happen in my lifetime.

At me is aimed the murkiness of night;
I'm pinned by a thousand opera glasses.
If only it is possible, Abba, Father,
May this cup be carried past me.

I cherish your stubborn design
And am agreed to play this role.
But now a different drama is underway;
This time, release me.

But the order of the acts has been determined,
And the ending of the journey cannot be averted.
I am alone; all drowns in Pharisiasm.
To live life is not to cross a field.

 

같은 대목을 <닥터 지바고>의 범우사판에서는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으로 옮겼고, 열린책들판은 "다른 모든 것은 바리새주의에 쏙 빠져 있다"로 옮겼다. 범우사판으로 전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을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은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시의 제목은 '햄릿'으로 돼 있지만 막 무대로 나가야 하는 배우의 대사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그래서 '햄릿-그리스도'이다). 사실 파스테르나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러시아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햄릿 배우 중의 하나는 가수이자 배우 비소츠키인데, 그의 <햄릿> 공연 서두에서는 비소츠키가 낭송하는 시가 바로 이 '햄릿'이다(http://www.youtube.com/watch?v=-r01fRADCII). 아래는 러시아어 원시인데, 비소츠키는 (3연을 제외하고) 1, 2, 4연을 절규하듯이 노래한다(그가 연기하는 햄릿의 독백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QJVsuq0tt24 참조).

 

Гул затих. Я вышел на подмостки.
Прислонясь к дверному косяку,
Я ловлю в далеком отголоске,
Что случится на моем веку.

На меня наставлен сумрак ночи
Тысячью биноклей на оси.
Если только можно, Aвва Oтче,
Чашу эту мимо пронеси.

Я люблю Твой замысел упрямый
И играть согласен эту роль.
Но сейчас идет другая драма,
И на этот раз меня уволь.

Но продуман распорядок действий,
И неотвратим конец пути.
Я один, все тонет в фарисействе.
Жизнь прожить — не поле перейти.

 

러시아 속담이지만,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는 게 아니다. 만만하지 않고 팍팍하다는 얘기다. 세 시인에 관한 얘기를 (옮겨)적은 건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겨울이면 뗏목이라도 타고 어디 눈덮인 통나무집에라도 가야 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지만(삶의 품위를 위해서), 내겐 스티로폼도 없구나...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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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6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에도 참으로 만만치 않은, 팍팍한 일상입니다. 그나저나 저번부터 츠베타예바의 글은 정말 관심이 많이 가는데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될 때 영어본이라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로쟈 2008-01-06 09:20   좋아요 0 | URL
네,영어본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한두 권 나와 있던 국역본 시집들은 모두 절판 상태구요...

2008-01-06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6 15:49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정신의 '뗏목'과 '통나무집'도 우리에겐 필요한데, 다들 '팬션'만 찾는 풍토라서요(시인들의 죽음도 우울하고). '호젓한 숲길'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필요한 것인데...

털세곰 2008-01-0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쯔베따예바의 시는 유독 외국독자, 연구가들에게 약간의 관심 밖이죠. 신난했던 삶이 오히려 포커스를 받지 그녀의 시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죠... 아, 다시 생각해보니 관심 밖이라기 보다 외국독자들에겐 러시아 독자보다 뭔가 좀 덜 전달되는 그게 있을 것 같애요. 장애물이랄까... 유독 그녀의 시는 리듬도 그렇고 읽기도 좀 뭐하고...

로쟈 2008-01-08 14:42   좋아요 0 | URL
한동안 러시아에서 연구서들이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산한 편이지만, 사실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닌 이상 문학연구는 연구자 개인의 관심사와 연관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도 논문이 두엇 가량 있을까 싶은 정돈데요...
 

주말이면 원래 각 언론의 북리뷰가 뜨기 때문에 옮겨오는 기사도 많아지는데, 이번주에는 대학원신문들까지 가세해서 할일이 더 많아졌다. 방학을 맞아 진작에 종간들을 했을 터이지만 기사들이 좀 뒤늦게 담비에 올라와 있기에 몇 편을 추릴 예정이다. 멜랑콜리에 대한 기사가 먼저 눈길을 끈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110).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8호) 멜랑콜리, 창작의 검은 원천

멜랑콜리는 원래 “검은 담즙”(고대 그리스어 melancholia = melas검은 + chole담즙)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속에는 네 가지 체액(Humour), 즉 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체액이 과도하게 흐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네 가지 기질과 성격이 형성된다. 멜랑콜리는 이렇게 분류된 네 가지 기질 가운데 하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몸속에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넘쳐흐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멜랑콜리커(Melancholiker)다. 멜랑콜리에 관한 의학적 담론은 곧 인문학적 담론의 공간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그 담론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아비첸나, 피치노, 버튼, 칸트,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파노프스키, 프로이트, 크리스테바 등등 수많은 서구 지성인들의 입을 통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철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문학/예술인들 심지어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이 주제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멜랑콜리를 주제로 프랑스와 독일 합작으로 기획된 미술전시(2005년에는 파리에서,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림)가 엄청난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는 것은 세인의 지대한 관심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서양인들의 이런 각별한 관심에 비해 국내에서 연구된 멜랑콜리 관련 논문, 저서, 전시활동 등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 아직까지 낯선 이 용어는 예술계나 정신의학계 일각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구에서 진행된 멜랑콜리 담론을 조금만이라도 살펴보면, 멜랑콜리는 서양 예술과 철학의 핵심 정조(情調)를 가리키는 말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간략히 멜랑콜리와 그것에 얽힌 담론 한 가지(예술창작의 원천인 멜랑콜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멜랑콜리의 기질적 특징
먼저 일종의 기질, 또는 정신질환으로 이해되는 멜랑콜리의 핵심적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멜랑콜리에 빠진 사람에게 멜랑콜리를 일으킨 대상 또는 원인은 불분명/불특정하다. 멜랑콜리커는 이유 없이 슬프고 우울하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이 있다면, 무의식 깊숙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둘째 멜랑콜리를 묘사하기 어렵다. 사실 모든 감정이 형용하기 어렵지만, 정체불명의 미묘한 멜랑콜리는 더 더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멜랑콜리의 언어는 간접적인 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멜랑콜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은유의 언어다.

셋째 멜랑콜리는 막연하지만 검질긴 불안감이다. 특히 미래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멜랑콜리의 주된 정조다. 불가해한 죽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멜랑콜리커는 불안에 몸서리친다. 그리고 그 불안이 현재의 삶 전체를 뒤덮는다. 불안은 임박한 미래에서 온다. 막상 고통이 닥치면, 고통스러워하느라 그것을 피하려하느라 분주하고 정신없다. 불안해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직 당도하지 않은 파국, 어김없이 다가오는 어둠, 임박한 미래의 고통이 불안을 낳고 기른다. 멜랑콜리는 도래하는 어둠 직전에 형성되는 불안감이다. 다가오는 파국을 예감하며, 지금 현재가 아니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미래를 사는 사람의 정조다. 이런 이유로 옛날 사람들은 멜랑콜리의 기질을 “황혼” 또는 “가을”과 연결지었다.

넷째 멜랑콜리는 극적 반전, 즉 극단적인 감정들의 급격한 전환을 특징으로 한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극도의 권태감으로 이행되는가 하면, 터질 듯한 충일감과 끝없는 공허감 사이를 오락가락 반복한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덕,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의 큰 기복이 멜랑콜리를 특징짓는다. 멜랑콜리의 이런 성격은 그것의 수용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멜랑콜리는 천재의 징표이면서 동시에 가망 없는 정신병이고, 천사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악마의 저주이며, 최고의 지성이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한 야수성이다. 멜랑콜리는 야누스적인 두 얼굴의 급격한 변전이고, 대립하는 양 극점의 반전이다. 이런 변신과 전환의 특성 때문에, 멜랑콜리는 뭇 금속들의 화학적 변용을 거쳐 황금을 만들려고 했던 연금술이나 신의 메시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서 전해 주는 전령, 메르쿠르(Merkur-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다섯째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감, 총체적인 무력감, 종국에는 자기 상실감이다. 갈망하는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서 시작해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자기상실감은 사실 강한 자의식을 전제한다. 세상사의 허망함에 등을 돌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해보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빈곤한 자아만을 발견하며 절망하는 자가 바로 전형적인 멜랑콜리커의 모습이다. 타자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고, 타자에 무관심하도록 만들만큼 비대한 자의식/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그리하여 운명적으로 주체할 수 없는 좌절감과 무력감 그리고 상실감에 진저리치는 자만이 멜랑콜리커가 될 수 있다.



사랑의 상실, 검게 응축되는 슬픔
정리하자면, 멜랑콜리는 일종의 슬픔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색의 슬픔이 아니라, 수많은 슬픔의 색깔들이 뒤엉키고 응축되어 만들어진 “검은” 슬픔이다. 그렇다면 멜랑콜리의 이런 어둠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꼽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어둠의 원천은 사랑의 상실, 이별이다. 사랑의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우리는 자신의 수족이 잘려나가는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애도작업이 실패할 경우) 한동안 슬픔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실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애착(愛着)은 커져가고, 애착은 집착(執着)이 되고, 집착은 자기집착으로 연민은 자기연민으로 변하여, 결국 사랑에서 시작된 멜랑콜리는 끝없이 커져만 가는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로 끝을 맺는다. 초라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은 자기혐오와 증오로 돌변하고, 이렇게 자신의 가슴을 할퀴고 상처를 낸 다음, 다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동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강도를 더해가며 반복된다. 사랑의 상실과 상처에 슬퍼하는 자기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슬픔은 슬픔을 배가시킨다. 사랑의 공복감에 제 살점을 스스로 뜯어 먹는 자기 연민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없는 멜랑콜리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사랑 대상의 상실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슬픔과 상실감의 반복적인 타격으로 영혼 전체에 어둡게 번져버린 영혼의 검은 멍이다. 하지만 멜랑콜리의 검은 반점이 이처럼 부정적인 색깔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상처, 질병, 광기, 비이성, 헛된 감상 등으로만 멜랑콜리의 어둠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따로방스키의 뛰어난 해석에 따르면, 이런 영혼의 검은 멍, 곧 고통의 농축물은 검은 담즙으로 전치될 수 있고 다시 그것은 “검은 잉크”로 전치될 수 있다. 뛰어난 작가는 멜랑콜리, 곧 인간의 고통스런 파토스를 창작의 재료, 또는 기폭제와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흰 종이 위에 자신의 검은 담즙을 잉크삼아 선명한 글자를 적어 넣을 수 있다. 농도가 짙은 검은 잉크일수록 선명한 글을 쓸 수 있듯이, 작가가 창작활동을 하는데 있어 멜랑콜리는 필수조건이며, 멜랑콜리의 색깔이 검으면 검을수록 눈에 띄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멜랑콜리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철학과 정치, 시 또는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왜 모두 명백히 멜랑콜리커였을까?”(Problems BookⅩⅩⅩ, 953a)



영혼에 남겨진 멍자욱, 창작의 원천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시작된다.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광적인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탄생한다. 그런데 모든 사랑은 시작부터 이미 거리를, 부재를, 차이를, 이별을, 결국 죽음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뇌(Leid)가 커지며, 그럴수록 열정(Leidenschaft) 또한 커져간다. 거리, 부재, 차이를 가로지르고 이별과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무한히 증폭되는 사랑은 결국 끝없는 고뇌가 되고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된다. 그런데 사랑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정이 커질수록 자신의 모든 감각과 생각의 가능성들이 최대로 확장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멜랑콜리커는 볼 수 있게 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기로 한다. “멜랑콜리커들은 격렬성으로 인해 원거리 사수처럼 정확하게 활을 쏜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급변할 수 있는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에게는 인접성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 게다가 그들의 행동은 매우 커다란 격렬성으로 인해 또 다른 행동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수면 속의 예견』). 보통의 상식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사태와 사태, 인접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단어와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 은유제작능력, 바로 그런 상상력의 비상(飛翔) 능력을 멜랑콜리커는 소유하고 있다. 보통의 상식과 안목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멜랑콜리커는 훌쩍 뛰어넘는다.

그리고 정확하게 사태를 적중시킨다. 프로이트도 멜랑콜리커가 “진리를 바라보는 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슬픔과 멜랑콜리」).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멜랑콜리커가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졌다고 판단한다. 이와 같이 멜랑콜리커가 근본적으로 “원거리 사수”가 될 수 있는 동력은, 즉 모든 멜랑콜리한 창조력의 근원은 사랑의 열정, 결국 사랑의 크기에 맞먹는 상실의 고뇌에서 나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미 시작부터 비극을 예술의 모태로 삼았던 서구인들은 타인의 심금(心琴)을 울릴 수 있는 작품 창작의 원천을, 삶(사랑)의 고뇌가 영혼에 남겨놓은 검은 멍울에서 찾았던 것이다.(김동규│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사)

08. 01. 05.

P.S. 기사에서 언급된 스타로뱅스키(스따로방스키)의 멜랑콜리론은 그의 보들레르론에서 가져온 게 아닌가 싶다. 한편, 멜랑콜리를 슬픔의 일종으로, '검은 슬픔'(크리스테바의 표현으론 '검은 태양')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슬픔'(애도)과 '멜랑콜리'(우울증)를 대비시킨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멜랑콜리'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으로 보면 되겠다. 멜랑콜리, 혹은 우울증(우울질)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다. '만국의 룸펜들이여, 단결하라!'(http://blog.aladin.co.kr/mramor/897660), '애도와 우울증'(http://blog.aladin.co.kr/mramor/909608) 등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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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6 09:12   좋아요 0 | URL
검은 담즙을 잉크 삼아 창작한다니 완전 멋진걸요!
근데 재능이나 열정도 없이 그냥 멜랑콜리하기만 한 건 어떡하나요. -_-

로쟈 2008-01-06 09:17   좋아요 0 | URL
그게 아직 덜 우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겨레에 '고금변증설'이란 꼭지가 있다. 오늘에야 알았는데, 강명관 교수의 칼럼란이다. 주자학과 돈에 대한 이번주 꼭지를 '사회적 독서'에 옮겨놓는다. 말미의 소회처럼 나도 주기적으로 우울하기에.

한겨레(08. 01. 05) 조선엔 ‘주자학’ 현대엔 ‘돈’이 교주님

1653년 윤7월 21일이었다. 송시열과 유계, 윤선거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에 모였다. 송시열이 연기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 유계를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초청해 뱃놀이를 했는데,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황산서원의 재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윤휴의 학문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야기가 번졌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경전 해석에 반기를 든 이단이라 못을 박았다. 윤휴는 송시열만큼이나 주자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또 정통했기 때문에 주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윤휴의 학설은 곧 성리학의 발전인 셈이다. 그는 단지 경전의 해석에 있어 주자와는 다른 주장을 내세웠을 따름이다. 문제는 송시열의 경직된 주자 옹호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가 이단이라면서 계속 그와 관계를 끊으라고 다그쳐 왔지만, 윤선거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날 밤 송시열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윤휴는 이단이다. 나의 말에 동의하고, 윤휴와 관계를 끊어라!” 윤선거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또 박절한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송시열의 말을 듣고 이내 수긍하지 않는다. 송시열의 말이 더 거세게 나갔다.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실로 만세의 도통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한 가지도 없고, 밝혀지지 아니한 글이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 윤휴는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우며 제 하고 싶은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대는 성혼 선생의 외손이면서도 도리어 그의 편을 들어 주자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졸개가 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에 의하면 모든 진리는 주자에 의해 밝혀졌기에 더는 진리에 대해 시비하거나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늘 궁금했다. 송시열이 살아 있다면,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모든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그 말이 요지부동의 진실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다.

사실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자신, 곧 주자의 말을 진리라 설하는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어찌 좀 수상하다. 어쨌거나 송시열의 호된 다그침에 윤선거는 윤휴를 비난하는 말을 몇 마디 내뱉었다. 한데 내심 승복하지 않았기에 조금만 더 깊은 이야기를 하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항변했다.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다.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자 이후에는 딴 말을 할 수 없다면, 진순과 진역과 같은 학자들은 어찌하여 경전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란 말은 진리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참여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주제란 말이다. 이 말은 윤휴의 주장이기도 했다. 윤휴는 일찍이 “주자만 천하의 이치를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한 바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이야 맞지 않은가.

윤선거의 항변에 송시열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근거 없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송시열은 황산서원의 모임 뒤에도 윤선거에게 편지를 보내 윤휴와 단절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 이면에는 아마 윤휴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윤휴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 “그대가 윤휴를 너무 겁내고 있는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송시열이란 이름에 접할 때마다 나는 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를 떠올린다. 다른 수도사가 이단의 서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 늙은 수도사 말이다.

황산서원에서 모임이 있었던 그해(1653)는 조선 건국(1392)으로부터 거의 2세기 반 뒤였다. 조선은 그로부터 2세기 반이 지나 망한다. 말하자면 그해는 조선조의 꼭 중간이다. 나는 그해 그 모임이 조선 역사를 전후로 가르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송시열의 발언 이후 주자학은 조선에서 절대 진리가 되었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문화와 사유가 무너지고 성리학의 이념적 독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와 국가가 쇠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리다. 하지만 진리가 독점적인 절대진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인간에게 족쇄를 채우고 인간을 압살한다. 호르헤가 지키고자 했던 기독교가 진리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했던 것처럼, 성리학 역시 같은 구실을 하다가 역사에서 퇴장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기독교의 신이 진리가 아닌 지금, 성리학의 진리가 더는 진리가 아닌 현재, 진리란 이제 없는가. 혹여 그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상대주의가 편만한 세상이니, 진리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결코 아니다.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되는,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숭배하는 유일한 진리는 지금도 존재한다. 바로 ‘돈’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여 ‘화폐’이고 ‘자본’이다. ‘돈’ ‘화폐’ ‘자본’은 이 종교의 삼일일체이고, ‘유전천국(有錢天國)’ ‘무전지옥(無錢地獄)’은 그 교리의 핵심이다. 인간은 이제 더는 다른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갖고 있는 화폐량과, 그 화폐에 의한 소비능력으로 평가될 뿐, 윤리적 실천, 진리를 향한 기원 따위는 서푼어치의 값도 없다. 우리는 물신교라는 신흥종교의 충실한 교인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직 물신교를 철저히 섬기겠다는 공약만을 보았다. 정말 우울하다.(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08. 01. 05.

P.S. 같은 지면에 실린 기사 '도덕성이 밥먹여 주냐'(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1055.html)도 같이 읽어둠 직하다. 현단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누가 도덕성을 담지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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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1-05 12:24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정말 닮았네요. 무섭고 비겁한 것두요.

로쟈 2008-01-05 18:27   좋아요 0 | URL
송시열과 호르헤 말씀이시죠. 물신교를 대체할 무엇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 좀 비관적이네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책들이 올해 몇 권 소개될 예정이다. 그 첫 주자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가 출간됐다. 원저 자체가 100여쪽 정도로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않은 분량이고 국역본도 186쪽 정도. 아직 언론리뷰들이 뜨지 않았는데, 번역만 괜찮다면 일독해봄 직하다. 해서, 장회익, 최종덕 교수의 대담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7)와 함께 어제 주문을 넣은 책이다. 영역본도 얼마전에 구했기 때문에 이 달의 독서목록에 추가한다. 간략한 출판사 소개글만을 옮겨놓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합당한 민주주의만 존재하며, 이 합당한 체제가 민주주의 문명의 지각변동을 억제한다.> 본서의 지면은 이 명제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그 관계망의 도출을 추구하는 데 할애 될 것이다. 현대의 관념체계(이데올로기)를 묘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현대의 관념체계가 존재하는 양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도 이 관념체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확실히 당대를 관통하는 관념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초래한 추사(醜事. les candale)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민주주의 이념 속에 감춰진 칼날을 간파하는 안목을 키워줄 수 있을 것이다.

소개글로 보아서는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나온 것인지 좀 의문이 들긴 한다. '이데올로기'를 '관념체계'로 옮겼다면 의외이고. 랑시에르의 철학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자크 랑시에르 워밍업'(http://blog.aladin.co.kr/mramor/1064936),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http://blog.aladin.co.kr/mramor/1066288),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철학'(http://blog.aladin.co.kr/mramor/1722976) 등의 관련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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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ebvre 2008-01-06 02:50   좋아요 0 | URL
랑시에르의 책을 오늘 받아서 좀 읽었습니다. 표지에서부터 오타가 있더군요."La haime"이 아니라 "La haine"인데...... 서론인 19쪽까지 읽은 감상은 ...... 음 ...... 랑시에르 읽기는 아무래도 견적이 많이 나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ㅠ.ㅠ

로쟈 2008-01-06 09:15   좋아요 0 | URL
좀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싶었습니다. 저도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는데, 애당초 출판사나 역자가 신뢰감을 주지 못해서요. 이런 식의 번역문화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바뀔 수 있는 건지...

로쟈 2008-01-09 22:33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배송받았는데, 실물을 봤더라면 절대로 구입하지 않았을 책이네요. 연말까지 가봐야겠지만 현재로선 '최악의 번역서' 후보입니다.--;

람혼 2008-01-06 03:38   좋아요 0 | URL
다들 참 '빠르십니다'.^^;
'견적'에 대해서라면 개인적으로 저 또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런 '불길한 예감'을 나름 즐기고 있다는 것이 아마도 저의 가장 큰 병증이겠지요...ㅠㅠ

로쟈 2008-01-06 09:16   좋아요 0 | URL
"바꿀 수 없다면 즐겨라"가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이겟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