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와의 인터뷰 기사이다. 그걸 옮겨놓으려고 하다가 최근 문제가 된 '영어 몰입 교육'에 관한 기고 기사를 대신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078000/2008/02/021078000200802180698012.html). 두어 주 넘게 화제가 되고 있으니 '이달의 토픽'이라고 부름직하다(물론 '이달의 과일'은 '오렌지'인 것이고). 더불어 아침에 읽은 박노자 칼럼도 덧붙여놓는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70368.html).

한겨레21(08. 02. 18) 지적 식민지, 잿더미가 된 우리 말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이란 강대국의 말을 열심히 배워야 살 수 있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다. 이 운명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해서, 때로 우리는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주 의식의 산물에까지 이 힘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놀라는 경우가 있다. 조선말과 조선글자를 일치시키겠다며 만든 훈민정음이, 오히려 중국 발음을 이상적인 발음으로 상정하고 이를 실현시키려는 표기원칙을 제시하는 일이 이런 예 중 하나라 하겠다(‘중국’을 ‘듕귁’으로 발음하라는 동국정운식 표기원칙이 이것이다).

이는 우리 문자의 어떤 면을 폄하하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약소국의 운명과 이것이 배태하는 순응적 삶의 관성은 문화적 무의식의 뿌리를 점령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의 말은 ‘외국어’가 아니라 사실상 ‘모어’(母語)의 지위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런 언어의 식민화 상황은 삶의 식민화와 다를 바 없는 사태를 낳곤 한다. 여기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언어와 사유 간의 소외 상황이 심화된다는 점일 것이다. 자기 사유를 담는 모어의 지위는 지극히 격하되는 반면, 자기 사유와 무관하게 힘을 가진 강대국의 언어는 물신화돼, 남의 나라 말이 아무런 내용도 없이 ‘신성한 기호’로 현성해 현실에서 전능한 힘을 얻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민족대학’도 ‘글로벌’하게 영어 강의
한국사의 주요 지배세력들의 일단의 출세 사례는 이 점에서 시사적이다. 원나라가 위세를 떨치던 13세기 고려 권문세족에는 몽고어 역관 출신이 많았고, 조선의 주요 개국세력인 조준이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 말을 잘하던 유명한 역관 집안 출신이었으며,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조선 부호들 중에는 다시 변한 세상에서 만주어 통역을 하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역관들이 많았다.

1900년대 초반까지 조선사 어디에도 특별한 자료가 없는 별 볼일 없던 이인직이 한일병합을 사실상 주도하고, <만세보>와 같은 친일 신문의 주필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도, 이완용조차 잘할 줄 모르던 일본어를 그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광용의 <꺼삐딴 리>에는 ‘일본어-소련어-영어’로의 변신을 통해, 일제시대-인공 시절-1950년대 이후를 초인적으로 살아나오는 카멜레온적 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들은 더 이상 ‘반역사적’ 풍자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조차 우리말로 대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글로벌’ 시대에, 철저히 강대국의 언어만으로 자신의 생존전략을 극대화한 그들은 오히려 ‘글로벌 선구자’들로 재평가돼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세상은 ‘민족대학’을 전통적 상징으로 외치던 국내의 한 유명 대학조차 ‘글로벌 프라이드’로 모토를 변경한 지 오래된 시대가 되었다. 이 ‘글로벌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이 이른바 ‘영어 강의’다. 단지 영문과에서의 영어 강의가 아니라, 전공을 불문하고 모든 강의에 의무적으로 영어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으며, 신임교수는 영어 강의를 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야만 교수 임용 자격이 주어지는 학교들이 늘어가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를 하며 사는 나 역시 앞으로 전임교수가 되려면 이 서약서를 써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난 도무지 내 전공을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어떻게 글로벌하게 발음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며, 이 민요조의 율격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대 한국어로도 번역이 쉽지 않은 <관동별곡>의 수많은 고전어들을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서 수업해야 할지 모르겠으며, <춘향전>에 나오는 수많은 사투리나 해학과 풍자로 넘쳐나는 민중적 어법들, 자진모리·중모리·휘모리로 이어지는 그 숨가쁘며 때로는 유장한 우리말의 호흡을 어떻게 글로벌하게 낭독하고 번역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륀지’ 요구하는 반지성적 흐름

뜻글자(표의문자)로 이루어진 한문학을 어떻게 소리글자(표음문자)인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도 난감하다. 예컨대 ‘道’는 ‘road’(길)인가 ‘law’(법)인가, ‘logic’(논리)인가 ‘principle’(원리)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do’로 번역해야 하는가?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흔들며 다의성을 증폭시키는 김수영 시의 그 모호하고 격렬한 언어의 정치성을 도대체 어떻게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촌스러운 나는 한국말로는 쉽게 떠오르는 서정주 시의 마술적 이미지와 토착적 방언의 세계가 도무지 글로벌 스탠더드화돼서는 이미지로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이 능력에 관한 한 현재에도 앞으로도 전혀 가망이 없다.

바야흐로 ‘최고경영자(CEO) 총장’ 시대다. 대학은 이제 학문이나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장사꾼들의 천박한 시장논리가 대단한 선진 정책인 양 거짓 선전되고 또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먹히는 시장통이 돼가고 있다. 평생 토목건축업에 종사하며 부동산과 주식으로 부를 축적한 대통령 당선자가, 새 건물 짓기와 대학기금 마련 같은 것을 학문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신과 비슷한 CEO 총장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그 인수위원장이 주도가 된 얼치기 글로벌리즘이 과목 불문의 ‘영어 몰입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 교육현장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려던 찰나에 간신히 ‘유보’됐다. 말의 식민화가 삶의 식민화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 우리 역사의 뼈아픈 사례이긴 하지만, 21세기에 이러한 사례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인 심화의 모습을 보는 심정은 비통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무슨 민족주의적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이러한 말의 식민화가 말과 사유의 괴리를 부추기며, 내용 없는 껍데기 언어의 물신성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정책은 사고의 심도를 높이고 지적 시야를 넓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적 관심이 아니라, ‘오렌지’를 ‘아륀지’로 발음할 줄 아는 기업형 인간이 필요하다는 ‘글로벌 장사꾼들’의 요구 이상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그리고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대한민국은 사물에 대한 복합적 사고와 세계에 대해 성찰적 시야를 열어주는 깊이 있는 독서가 아니라, 토익·텝스 시험을 위해 자신들보다도 훨씬 일천한 교양 수준을 지닌 원어민 영어 강사들에게 쩔쩔매고 매달리면서 소모되고 있다. 이 현상이 참으로 위태로운 것은, 이것이 사회 전체의 지적 깊이를 현저히 ‘얇고 평평하게’ 하는 반지성적 흐름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는가
그리스어와 계보가 연결돼 있지 않은 독일어는 원래 유럽어 중에 가장 ‘미개한’ 궁벽한 언어였다. 그러나 그 ‘시골말’을 통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유 능력을 보여준 것이 괴테나 칸트,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같은 지적 거인들이었다. 그들 때문에 독일어는 세계적인 언어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야심 있는 지도자라면, 자기 언어로 말하고 사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강대국의 언어를 맹종할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로 이루어진 지적 문화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말로 된 책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번역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말의 지위를 세계적인 것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적 식민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여, 숭례문이 불타는 것만 보이시는가? 이미 오래전에 잿더미가 된 것은 당신들의 사고요, 우리의 말이다.(함돈균 문학평론가)

한겨레(08. 02. 19) [박노자칼럼] ‘영어 제국’, 종말이 온다

1792년 가을, 혁명의 화염에 휩싸인 프랑스의 국민 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했다. 영국은 동아시아로의 경제적 침투 기반을 다지고자 정객 조지 매카트니(1737∼1806)를 대사로 위촉하여 중국행을 명했다. 러시아의 통상 요구에 부닥친 일본의 에도 막부는 영주들에게 연안 방어 강화를 명하여 유럽인들의 도전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했다.

세계가 요동쳤던 바로 그때, 조선의 통치자들은 무엇에 몰두하고 있었을까? 1792년 10월19일, 국왕 정조는 신하들을 불러 과거 답안지에 패관소품(稗官小品-중국 소설의 문체)을 이용하면서 경전류의 우아한 문체를 멀리하는 일부 지식인들을 지탄하고 중국 소설 수입 금지를 명했다. 이옥(1760∼1815) 등 문단의 이단아들의 벼슬길을 막을 ‘문체 반정’은 그렇게 예고됐다.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와 있었던 시점에 중국 소설 문체의 ‘악영향’을 국정의 핵심 문제로 삼은 정조에게 조선의 공용어로서의 한문의 수명이 100여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누군가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뛰어난 국왕이었던 그도 ‘성현의 어문’인 한문이 영원토록 세계의 중심적 위치를 유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전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어 몰입교육과 ‘오렌지’ 발음을 갖고 열변을 토하는 대한민국 국정 책임자들을 보면서 필자는 패관소품 문체의 퇴치에 올인했던 200여년 전의 국왕을 떠올려본다. 특정 제국이 영원하리라는 맹신과 어리석음으로 나라를 그르친 적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또다시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려 한다. 몰입교육을 논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볼 것이 있다. 과연 영어가 ‘공부의 중심’이 돼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다. 일부 특수 직종(학자·기자·외교관 등)을 제외한 다수에게 외국어가 필요한 것은 교역 등 회사에서의 대외 업무 수행과 외국여행 때일 것이다.

무역부터 보자. 2007년에 한국은 영어가 통하는 미국(12.3%), 영국(1.8%), 독일(3.1%)보다는 중화권인 중국(22.1%), 대만(3.5%), 홍콩(5.0%)에 약 2배 더 많은 물건을 팔았다. 외국여행도,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 여행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미국으로 간 이들은 7.2%에 그쳤다. 작년 입국자 통계를 봐도 중국·대만(21%)과 일본(35%)은 미국(9%)과 비교해서 한국 관광산업에서 훨씬 더 중요한 존재다. ‘실용주의적’ 시각으로 외국어 수요를 파악하면 학교에서는 앞으로 제1외국어를 중국어로 바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학술·기술·국제정보망의 주요 언어로서의 영어의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나, 중국어 구사 인구(12억여명)가 영어 구사 인구(약 3억4천만명)에 비해 거의 4배 가까이 된다는 점이나,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되는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2026년쯤에는 미국을 능가할 전망이어서 결국 이 우위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권에서는 중국어가 공용어로 통할 상황이 그보다 훨씬 이른 약 15∼20년 안에 올 것에 대비하면서 영어 몰입교육보다는 영어와 중국어 교육 사이의 균형과 효율성을 논해야 한다.

한문을 절대 신성시하고 고전 문체를 벗어나는 일까지도 일탈로 간주해 앞을 보지 못했던 조선 사대부 못지않게 지금 한국 사회 귀족들은 자신들의 문화자본인 영어를 국가적 물신으로까지 만들려 하고 있다. 실사구시 정신이 결여된 그들의 언어관은 자연스레 도래할 동아시아 시대에 역행하고 우리의 미래를 그르칠 뿐이다.(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08. 02. 19.

P.S. 애당초 옮겨놓으려고 했던 인터뷰 기사(http://h21.hani.co.kr/section-021067000/2008/02/021067000200802130697013.html)에서 흥미를 끌었던 대목. '노회한 이데올로그'도 간혹 입바른 소리와 예리한 통찰을 내놓는다는 걸 알게 해준다.

이명박 당선자가 내놓고 있는 대기업 중심의 성장 위주 정책 등을 보면 지나치게 보수층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이명박 당선자가 하는 것을 너무 보수적이다, 성장 위주적이다, 효율만 추구한다, 이렇게 말할 만한 게 별로 많지 않다. 인수위에서 내놓은 몇 가지 정책을 미국의 기준으로 보면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보다도 훨씬 왼쪽이다. 좌파정권 안에서 좌우 대결을 하다 보니, 자연히 왼쪽으로 끌려간 면이 있다. 다만 영어교육을 너무 중시하는 것이 지나치게 효율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영어를 잘해야 국가 경쟁력이 있다는 허상을 하나 만들어놓고 영어수업 말고도 영어로 수업을 하겠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명박 교육정책이라는 것은 방법론만 이야기하면서 교육의 목표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국어, 국사 교육을 소홀히 하고 그 시간에 영어교육을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무국적 교육이다. 인수위 안은 학원강사들이 모여서 아이디어 짜낸 것처럼 아주 지엽적이다.

영어 공교육 강화 방안도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 계획도 그렇지만, 이명박 당선자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다는 비판도 있다.
=문제는 내용이 정확한가인데, 그렇다고 대운하 같은 것을 논란에 붙이면 영원히 논란으로 끝날 것이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에도 보면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던데 이게 이명박 스타일이다. 이게 효과가 있을 때가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하다 보면 반대 세력도 전선이 여러 개니까 분산이 될 것이고, 그렇다 보면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갖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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