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세종서적, 2008)이 번역/출간됐다. 두 사람의 대표작인 <제국>(이학사, 2001) 이후에 '다중(multitude)'은 하도 많이 회자되는 말인지라(물론 <제국>의 역자인 윤수종 교수는 '대중'이라고 옮겼었지만) 두 사람의 이 후속작은 이미 번역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지만 정작 이번에 출간된 게 '진짜' <다중>이다. 2004년 영어판이 나온 지 4년만이다. 한데 책소개를 위해서 관련자료들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건 <다중>, 곧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적 기획을 지지하는 글이 아니라 비판하는 글이다. 미리 김부터 빼놓는 듯도 하지만 비판적인 리뷰는 책의 '급소'와 '논쟁점'를 파악하는 데 요긴하기에 미리 일독해봐도 좋겠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자율평론' 멤버들이 옮겼으며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가 그 부제이다.

 

프레시안(05. 12. 26) "'제국과 다중'론은 미국식 자유주의에의 투항"

[프레시안 사미르 아민/정치경제학자,제3세계포럼 디렉터] 미국의 좌파 잡지인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가 최근호(2005년 11월호)에 〈제국(Empire)〉이라는 저서의 공저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좌파 이론가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관점과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글 '제국과 다중'을 게재해 전세계 좌파 진영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국내에는 <유럽중심주의>, <주변부 자본주의론>,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가치법칙과 사적 유물론>, <모택동주의의 미래> 등이 소개됐었다.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



〈제국주의와 불균등 발전〉 등 30여 권의 저서를 낸 이집트 출신의 세계적인 정치경제학자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민은 이 글에서 '제국(Empire)'과 '다중(Multitude)'이라는 키워드로 오늘날의 세계체제를 설명하는 하트와 네그리의 이론이 "미국식 자유주의에 투항하는 이론"이며, 두 사람의 이론적 관점에서는 "지배자본이 강요하는 일방적 세계화"를 극복해내고 진정으로 민중에 이익이 되는 "진보적 대안"을 창출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 이론은 이들의 저서가 국내에서 번역, 출판되면서 진보적 이론가와 활동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지식인과 대중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왔다. 그 과정에서 일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데 그친 감이 있다. 〈프레시안〉은 이런 점에서 아민의 글이 하트와 네그리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먼슬리 리뷰〉의 허락을 얻어 그 번역문을 싣는다. 원문은 〈먼슬리 리뷰〉의 웹사이트(
www.monthlyreview.org/1105amin.htm)에서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번역문을 게재하는 것을 계기로 〈프레시안〉은 앞으로 〈먼슬리 리뷰〉에 게재되는 글 가운데 국내 독자들이, 그 논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오늘날의 세계와 담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글을 선별해 비정기적으로 번역 소개할 예정이며, 이렇게 하는 데 대해 〈먼슬리 리뷰〉 측과 합의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제국과 다중: 제국주의 이후의 제국인가, 제국주의의 새로운 확장인가?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현재의 세계체제를 '제국'이라고 부른다.(주) 두 저자가 '제국'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제국'을 구성하는 주요 특징들을 '제국주의'를 규정하는 특징들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다. 두 사람의 정의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엄격하게 정치적인 차원, 즉 '어느 한 국가의 공식적인 힘이 자국의 국경 너머로까지 확장된다'는 차원으로 축소된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식민주의와 혼동되고, 결국은 식민주의도 제국주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돼버린다. 이런 공허한 주장은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영합하는 것이다. 이 담론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식민주의 제국을 구축하려는 열망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따라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렇다고 부시(미국 대통령-역주)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이 오늘날의 세계에 대해 제시해주는 분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 분석은 자본, 특히 지배적인 자본의 축적에 필수요건이 되는 것들을 식별해내는 데 초점을 둔다. 따라서 이 분석은 지구적 차원에서 부와 권력의 양극화를 낳으면서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체제를 구축하는 메커니즘을 발견해낼 수 있게 해준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정치경제학파 사람들이 그동안 제시해 온 모든 분석들을 일관되게 무시한다. 그 대신 두 사람은 모리스 뒤베르제(프랑스의 정치학자-역주)의 법칙주의나 저속한 앵글로색슨 식 경험주의 정치학을 채택한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제국주의'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러 다양한 제국들, 예를 들어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영국 또는 프랑스의 식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러시아와 소련 등에 두루 적용되는 공통의 특징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제국들 각각이 붕괴한 것도 '서로 유사한 원인들'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이런 견해는 어떤 진지한 역사 독해라기보다 피상적인 저널리즘에 훨씬 더 가깝다. 더욱이 두 사람의 견해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특히 현재 유행하는 경향에 영합하는 것이다.

지난 20년 간에 걸친 자본주의와 세계체제의 전개과정에는 당연히 모든 영역에서의 질적인 변환이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해 과학과 기술의 혁명은 그 자체로 최근까지 국가이익의 수호와 관련되던 수준을 넘어 지구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관리의 형식들도 창출할 것이라고 보고, 더 나아가 이것은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보는 지배담론을 두 사람이 신봉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지배담론은 심각한 단순화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사실 자본의 지배적 부분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초국가적 공간에서 활동하지만, 그들에 대한 통제권은 여전히 확고하게 국가적인 성격을 가진 금융그룹들(예를 들어 미국이나 영국 또는 독일에 근거를 둔 금융그룹들을 말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유럽'이라는 곳에 근거를 둔 금융그룹은 존재하지 않으니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의 수중에 들어있다.

게다가 이 체제의 경제적 재생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 변종들을 만들어내는 '정치'의 행위들과 병행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공허하고 통속적인 자유주의만 자본주의 경제가 국가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볼 뿐 그 외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초국가적인 세계국가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세계화에 관한 지배담론은 회피하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질문을 던져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중심 자본주의의 지배적 부분들(즉 과점집단들)의 지구적 축적 논리와 그런 체제의 정치를 지배하는 논리 사이의 모순이다.



발음이 듣기 좋은 '제국(Empire)'이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하트와 네그리가 제시한 체제는 세계화의 모습에 대해 지배담론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초국가화(超國家化)'가 이미 제국주의 및 제국주의적 갈등을 근절시키고 제국주의를 '중심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는' 체제로 대체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관계의 정의인 '중심과 주변 간의 대립'은 이미 극복됐다.

여기서 하트와 네그리는 제3세계 안에도 부(富)의 제1세계가 존재하고 제1세계 안에도 빈곤의 제3세계가 존재하므로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대치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진부한 담론을 채택한다. 물론 미국에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전히 우리는 모두 계급적으로 나뉜 채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된 사회 속에서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도의 사회구성과 미국의 사회구성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일부 사람들의 적극적인 역할과 그 나머지 사람들의 수동적인 역할, 즉 세계화된 체제의 요구에 단지 적응하기만 하는 역할을 구분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현실에서 보면 이런 구분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더 타당하다. 현대 역사의 초기단계(1945~1980년)에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피지배 국가들 사이의 역관계가 그래도 주변부 국가들의 '개발'을 의제에 올리고 피지배 국가들도 세계의 변혁을 위해 스스로 적극적인 행위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형태였다. 그런데 그런 관계들이 오늘날에는 지배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극적으로 변했다. 개발의 담론은 사라졌고, 그 대신 적응의 담론이 들어섰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세계체제(즉 '제국'이라는 것)는 과거의 세계체제에 비해 제국주의의 성격을 덜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갖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만약 지배자본의 대표들이 글로 써놓은 것들에 주목하기만 했다면 위와 같은 사실을 인식했을 것이다. 믿기 어려울지 몰라도 두 사람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미국의 기성 주류세력(민주당 지지자든 공화당 지지자든)의 주요 분파들은 모두 다 자신들의 계획이 지향하는 목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들의 목표는 다른 국민들에게 해악을 초래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의 낭비적 생활방식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지구의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는 것, 그 어떤 중간 규모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그 세력이 워싱턴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경쟁자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지구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통해 이런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완전히 패배했고 세계화된 형태로 자유주의가 복원된 것은 객관적으로 진보를 의미한다는 유행담론을 채택했다. 체제에 결함이 있다면 그 결함은 체제와의 싸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체제 자체의 논리 안에서 교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네그리가 범대서양주의(대서양 양안에 위치한 미국과 유럽 각국은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역주)적 유럽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열에 동참해 워싱턴에 종속적인 극단적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하려는 그들의 프로젝트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는 자유주의 선전가들이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들에서,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그리고 제3세계의 급진 민족주의 성향을 띤 대중주의 경험들 속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지난 30여 년 동안 촉발하고 고무해 온 사회적 변혁들은 자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배논리가 초래한 사회적 요구들에 적응하도록 강제하고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억제했다. 이런 사회적 변혁의 프로젝트들은 급진적 성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데서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회적 변혁들은 대단한 것이었고, 대체로 보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 역사의 초기에 시작된 이런 변혁의 프로젝트들이 훼손되고 붕괴됨으로 인해 가능해진 자유주의의 복원은 잠정적인 것으로서 일보전진이라기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올바로 하려면 하트와 네그리의 자유주의적 담론을 폐기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세계에 대해 던져진 질문들에 대해 그동안 중요한, 그리고 물론 다양한 이론적 답변들이 나왔고, 그 중에서 특히 새로이 다듬어진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나온 이론적 답변들이 눈길을 끈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이론적 답변들을 무시한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제시한 이론적 답변의 개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과거에는 제국주의가 복수의 제국주의 세력들이 서로 영속적으로 갈등을 빚는 모습으로 존재했다. 과거에는 과점적 자본집중의 증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삼극동맹(三極同盟, the triad, 미국과 유럽 및 일본)이라는 집단적 제국주의가 등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의 지배적 부분들은 삼극동맹이라는 새로운 제국주의 체제로부터 나오는 자신들의 이익에 대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 체제에 대해 통합적인 정치적 관리를 하려는 시도는 복수의 국가들이 존재하는 현실과 충돌한다. 삼극동맹 내부의 모순은 지배적 과점자본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가 대변하는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이 모순을 "경제는 제국주의 체제의 파트너들을 통합시키지만, 정치는 관련 국가들을 분열시킨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 왔다.



다중은 민주주의를 형성하는가, 자본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가?

자본주의에 고유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처음 성립된 계몽주의 시대에는 개인은 교육을 받고 재산을 소유한 사람, 따라서 이성(理性)을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부르주아여야 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자유주의는 도외시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자유주의는 자유를 향한 인간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불멸의 진보였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운동인 사회주의도 개인을 부정함으로써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의해 협소한 한계 안에 갇히게 되거나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단지 형식적인 것만이 아니라 분명 실질적인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이런 진술에 필수적 보완조건으로 "자본주의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서는 더 이상 민주적 진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자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적 진보는 분리될 수 없다.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들은 이 보완조건을 존중하지 않았고, 따라서 민주주의 없이도, 또는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만큼의 민주주의만 있어도 진보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지점에서 한 마디를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지지자들의 대다수는 민주주의에 대한 더 이상의 요구를 거의 하지 않고 있거나, 자본주의의 원칙들을 의문시하는 것은 차치하고 가시적인 사회적 진보 없이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범주의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섰는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개인주의적 토대는 개인을 역사의 궁극적인 주체로 설정한다. 그러나 개인이 역사의 주체라는 주장은 구체제(계몽주의의 정의에 따르면 구체제는 개인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체제였다)의 역사에도 들어맞지 않고, 계급이 역사의 진정한 주체가 된 시기에 계급들 사이의 갈등을 토대로 해서 성립된 체제인 자본주의의 역사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미래의 발전된 사회주의에서는 개인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우리가 바로 그런 역사적 전환점에 이미 도달했으며, 따라서 국가나 민족과 더불어 계급도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대신 개인이 역사의 주체가 이미 됐거나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달한 전환점에서는 두 사람이 말하는 '다중', 즉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들 전체'로 정의된 '다중'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환점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하트와 네그리의 글은 아주 모호하다. 두 사람은 '인지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로의 이행, 비물질적인 생산, 새로운 네트워크 사회, 탈영토화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또 규율사회(disciplinary society)로부터 통제사회(society of control)로의 이행에 관한 푸코의 명제들을 거론한다.

이처럼 지난 30년 동안 말해져 온 모든 것, 각자의 관점에 따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또는 상투적이고 당연해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든 강력히 논박해야 할 것이든, 모든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거대한 단지 안에 뒤범벅 상태로 집어넣어진다. 그러나 현재 유행하는 그 어떤 주장도 쉽게 확신하게 하지 못한다. 네트워크 사회에 대해 마뉴엘 카스텔이 정식화한 이론적 주장이나 제러미 리프킨과 로버트 라이히를 비롯한 미국의 대중적 저술가들이 퍼뜨린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생각들의 뒤범벅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새롭고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는 문제의 '다중'이라는 용어가 창안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는 시기는 20세기를 형성해 온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운동들(즉 노동자들의 운동,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민족해방운동)이 패배한 시기다. 그 중 어떤 패배의 경우에도 그 패배에 내재된 전망의 상실이 일시적인 불안정을 낳는 동시에 그 불안정을 정당화하는 한편,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불안정이 세계를 변혁하는 데 유효한 수단이 된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준 이론적 주장들을 양산한다. 그러나 과거의 '리메이크'를 제시하는 것보다는 과거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에 의해, 그리고 모든 측면에서 사회적 진화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현실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에 의해 점진적으로 새로운 이론적 정식화가 견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는 다양한 기여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하트와 네그리의 담론은 그런 기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에 관한 자신들의 담론으로부터 이끌어낸 명제들은 그들 자신이 정식화한 형태로도 그들 자신이 처해 있는 곤경을 증언해준다. 이런 그들의 명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될 가능성을 막 보이기 시작했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명제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은 다중을 민주주의에 구성요소적 세력이 된다고 정의한다. 이는 참으로 엄청나게 단순한 명제다. 우리가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여기저기서 실시되는 선거들 가운데 일부와 같이 자유주의 권력들, 특히 워싱턴의 권력을 만족시키는 것이 분명한 소수의 표피적 겉모습들을 제외하면, 필수적인 민주주의든 미래에 실현가능한 민주주의든 민주주의는 지금 위협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가 그 정당성을 상실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상황은 종교적 또는 인종적 근본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고슬라비아에 인종관료주의(ethnocratic) 정권이 들어섰던 것이 민주적 진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를 들어 러시아의 독재정권에 봉사했던 것과 같은 한 범죄집단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대신 미국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또 다른 범죄집단의 권력을 세우는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를 위한 진보인가, 아니면 하나의 조작된 소극(笑劇)인가를 묻고 싶다. 지구를 통제하기 위한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전개가 미국 국내에서도 기본적인 민주적 인권을 위축시키기 위한 노골적인 공격이 저질러지는 데 발단이 된 것은 아닐까? 유럽에서 주요 우파 및 좌파 정치세력들로 하여금 서로 손을 잡도록 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유주의 콘센서스는 선거과정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 하트와 네그리는 침묵하고 있다.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할 하트와 네그리의 명제는 '다중의 다양성'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다중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정의하는 형식과 내용은 물론이고 그 다양성을 창출하거나 위축시키는 힘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하트와 네그리의 모든 글에 걸쳐 중대한 모순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화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격차를 축소시킨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세계화는 계속 제국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격차가 더 벌어지고 세계적 차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의 체제가 구축되면서 하트와 네그리가 말한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두 사람이 말한(사실은 북미와 서유럽 사회들에 대해서만 그들이 말했지만) 전체 체제의 지역적 구성부분들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성은 그 자체로 다양한 성격을 갖는다. 미국에서와 같이 인종적 또는 준 인종적 지역사회들도 있고, 종교와 언어상으로 다양한 지역들이 있으며, 아마도 변혁된 사회현실에 맞게 다시 정의하는 것이 좋을 듯한 계급들도 여럿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다양성들이 열거된 뒤에도 실제로 이야기된 것은 거의 없다. 그런 것들은 사회체제의 생산, 재생산, 그리고 변혁의 과정에서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내가 '정치문화(political culture)'라고 부르는 것을 개념화하지 않고서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기가 불가능하다. 이 분야에서도 역시 진지하고 적극적인 기여들이 있다. 그 중에는 분명 논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무시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도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여를 한 것이 전혀 없다.



개인을 역사의 주체로, 다중을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구성요소적 세력으로 역전시켜 설정한 것은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발상이다. 이런 발상은 현실의 사회관계들에는 아무런 변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 사고의 세계에서만 역전이 일어난 것과 같다. 내가 여기서 사고 또는 사상은 늘 현실의 수동적인 반영일 뿐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각각의 '심급(審級)'이 지닌 자율성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발전시켜 왔다. 사상은 시대를 앞설 수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이런 일반적인 명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의 사상을 포함해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시대를 앞선 것인가, 아니면 아직 극복되지 못한 '패배한 시기'의 현실을 단순하면서도 혼동되게, 그리고 모순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인가? 패배한 시기의 여건에서는 다중이 확정적이지 않고 다양하며 분절된 상태의 '다양한 것들'을 구성하는 실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선거에서의 강력한 다수와 같이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듯한 외양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 이상이 아니며, 역사에서 흔히 그랬듯이 하나의 '접합되었지만 내부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구조'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중에 관한 이야기는 1970년대의 노동자주의(workerism)가 그랬던 것과 같이 시간이 흐르면서 잊힐 것이다. 이는 〈제국과 제국주의(Empire and Imperialism)〉(Zed Books, 2005)라는 책에서 아틸리오 보론(Atilio Boron)이 지적한 대로 '부분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에의 고착'이 두 경우에 다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트와 네그리의 담론에 배후로 깔려 있는 정치문화는 미국 자유주의의 정치문화다. 이 정치문화는 미국독립전쟁과 그 당시에 채택된 미국헌법을 근대 개막시기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본다. 하트와 네그리에게 영감을 준 한나 아렌트는 미국독립전쟁이 "무한한 정치적 자유 추구"의 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오늘날에 비로소 '세계적 차원에서 최초로 가능해진' 민주주의의 구성요소적 세력인 '다중'의 등장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미국화'가 승리했음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너도나도 미국 자유주의로 몰려드는 경향은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다른 경로들을, 특히 한나 아렌트가 프랑스혁명을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제한된 투쟁'으로 축소시키고 그렇게 축소된 프랑스혁명에 미국독립전쟁을 대조시키면서 정식화한 '옛 유럽'의 다른 경로에 대한 평가절하를 수반한다. 냉전의 시기에는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등 근현대의 위대한 혁명들이 모두 폄하당해야 했다. 2차대전 이후에 반혁명의 선봉이 된 미국의 자유주의 담론에 따르면 그런 혁명들은 애초부터 전체주의 경향에 의해 오염된 것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로 하는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의문시하지 않는 개척적인 혁명을 이루고 그런 내용의 헌법도 갖춘 '미국 모델'만이 살아남은 것은 그런 혁명들, 즉 자코뱅파에 의한 프랑스혁명의 급진화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요구사항들에 의문을 제기했던 혁명들의 유산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문화에서는 프랑수아 퓌레(프랑스의 역사학자-역주)가 퍼부은 것과 같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비난, 흔해빠진 반소비에트주의, 그리고 마오주의에 대한 공격을 주요 반혁명 메뉴로 삼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하트와 네그리는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미국의 헌법은 대중적 일탈의 위험성을 완전히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방향으로 작성됐음을 확인해주는 내용의 비판적인 글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고, 게다가 이런 글들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씌여졌다. 그럼에도 하트와 네그리는 이런 글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이 이룬 성공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들과 같이 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는 유럽의 반동세력 모두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예를 들어 지스카르 데스탱은 극단적 자유주의 유럽 프로젝트의 헌법은 미국의 헌법만큼이나 '좋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미래의 구성요소적 세력으로 설정된 다중의 열망은 아주 작은 것들로 축소됐다. 예를 들면 자유, 특히 다른 나라로 이주할 자유, 그리고 사회적으로 보장된 소득에 대한 권리와 같은 것들이다. 위에서 말한 유럽의 프로젝트는 미국 자유주의에 의해 허용되는 범위 밖으로는 감히 나가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태도를 분명히 보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으로 인정될만한 것들은 모두 다 무시하며, 특히 미국의 정치문화에 의해 거부당하는 '평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새로 생겨나는 글로벌 시민권(또는 유럽 시민권)으로부터 그 효력을 근본적으로 빼앗는 정책들만 실행된다면, 그런 시민권이 변화의 추동력을 갖출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건설하는 데는 다른 요건들, 특히 전 세계에 걸쳐 대중 계급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욕구와 열망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하트와 네그리는 전세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주변부 사회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에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게 분명하다. 세계의 상이한 국가들과 지역들의 구체적이고 고유한 여건들 속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전술과 전략에 관한 논의가 하트와 네그리에게 흥미를 유발한 적은 결코 없었던 것 같다.

미국의 개입에 의해 촉진된 '민주주의'가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선거 소극'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할까? 지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풍요로운 서구로 이주할 권리 정도로 축소시키는 게 합당한 일인가? 사회적으로 보장된 소득에 대한 요구는 정당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장된 소득이 실현되면 자본에게 노동을 고용하도록, 그리고 그 결과로 노동을 착취하고 억압하도록 허용하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파괴되어 그 시점부터는 누구나 자본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창조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되는 노동자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역사의 주체를 '개인'들로 축소시키고 그런 개인들을 '다중'으로 합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도전과제들에 상응하는 역사적 주체들을 재구축하는 일과 관련된 진정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게 한다. 이 주제에 대해 하트와 네그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답변을 해준 많은 기여들이 있다. 과거의 역사에 나타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들은 분명 현대 역사의 주제들을 '노동계급' 하나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과거의 네그리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주의자들에게 이런 질책을 할 수 있다. 그들과 달리 나는 피지배 계급과 민중에 이익이 되도록 사회적 역관계를 효과적으로 변혁하는 대중투쟁의 각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유능한 사회적 집단들로부터 형성되는 역사의 주체에 대해 분석해볼 것을 제안해 왔다.

현 시점에서 이런 분석을 하는 것은 제국주의 헤게모니 블록과 매판 헤게모니 블록이 행사하는 권력에 맞서 그것을 물리칠 능력을 지닌 민주적이고 대중적이며 국가적(민족적)인 헤게모니 블록의 형성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민주적, 대중적, 국가적(민족적) 블록의 형성은 나라마다 다른 구체적 여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다중'이나 이와 비슷한 형태의 일반적인 모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중과 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긍정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찬양한 '지배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일방적 세계화'를 '협의된 세계화(negotiated globalization)'로 대체함으로써 현재의 제국주의 체제를 점진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는 민주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는 세계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긴 이행과정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다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보다는 이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다 깊이 있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길인 게 분명하다.



제국과 다중의 정치문화는 도전과제에 상응하는가?

몇 가지 문화적 요소들, 특히 종교적 요소와 인종적 요소를 불변으로 가정하고 그것을 전제로 인류의 다양성을 바라보는 관점, 즉 '문화주의(culturalism)'가 요즘 유행이다. '공동체주의'의 발달과 '다문화주의'를 인정하라는 권유도 바로 이런 역사적 관점의 산물이다. 이 관점은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과 다르다. 역사적 유물론은 계급투쟁을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형식 및 조건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시된 분석들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거쳐 온 다양한 경로들을 이해하고, 각국의 사회 내부에, 그리고 세계체제의 수준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모순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분석들은 내가 '현대 세계에 사는 대중의 정치문화 형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내가 문제제기를 한 대상은 하트와 네그리의 저작들에 바탕으로 깔려 있는 정치문화다. 그 정치문화는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 안에 있는가, 아니면 문화주의의 전통 안에 있는가? 나는 〈자유주의 바이러스(The Liberal Virus)〉(Monthly Review Press, 2004)라는 책에서 각국 국민의 정치문화를 형성하는 두 개의 경로, 즉 한편으로는 유럽적인 경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적인 경로를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이 책에서 내가 전개한 주장의 개요만을 간략하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유럽대륙의 정치문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창출, 프랑스혁명,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 및 마르크스주의의 등장, 러시아혁명 등 형성적 기능을 가진 일련의 대사건들에 의해 구축돼 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각각의 경우에 생겨난 '좌파'들에게 유럽 사회에 대한 정치적 관리권을 갖도록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유럽대륙에서 우파와 좌파가 대치하는 정치문화를 구축했다. 승리한 반혁명 세력은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 이후에 그랬듯이 구체제의 복구, 정교분리로부터의 후퇴, 귀족집단과 교회의 담합,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등에 나섰다. 그들은 민중으로 하여금 지배자본의 제국주의 프로젝트를 지지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위해 1914년의 전쟁 발발 직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과 같은 국수주의적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미국의 정치문화를 구성해 온 주요 사건들은 유럽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미국의 정치문화를 구성해 온 사건들은 프로테스탄트 중 계몽주의에 반대하는 분파에 의한 뉴잉글랜드 건설, 식민지 부르주아들, 특히 노예를 소유한 지배적 부르주아 분파에 의해 수행된 미국독립전쟁, 변경(프런티어)의 확장을 토대로 한 대중과 부르주아 사이의 동맹 및 그 결과로 나타난 인디언 학살, 사회주의 정치의식의 성숙을 저해하고 그 대신 공동체주의를 들여앉힌 대규모 이민자 유입 등이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파의 영속적 지배'라는 미국 정치문화의 특징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미국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보장하는 나라가 됐다.

오늘날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싸움들 가운데 하나가 '유럽의 미국화'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유럽의 미국화'의 목적은 유럽의 문화와 정치적 유산을 파괴하고, 그 대신 미국에서 지배적인 문화와 정치적 유산을 유럽에 들여앉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반동의 길이 오늘날 유럽의 지배적 정치세력들이 추구하는 길이 돼 있고, 그 완벽한 유럽판이 유럽 헌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싸움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지배자본, 즉 '북(North)'과 지구인구의 85%를 차지하면서도 삼극동맹이 추구하는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남(South)' 사이의 싸움이다. 이 두 개의 중요한 싸움의 중요성을 하트와 네그리는 무시한다.

미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두 사람의 섣부른 찬양은 북미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가들의 글들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이들 비판적 분석가는 '반미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애초부터 비판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간주돼 버리고 만다(그런데 누구의 눈에 그들이 그렇단 말인가? 미국의 기득권자들의 눈에?).

여기서 나는 아나톨 리븐(Anatol Lieven)의 저서 〈미국, 옳은가 틀린가(America Right or Wrong: An Anatomy of American Nationalism〉(Oxford University Press, 2004)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리븐과 나는 이념적 출발점도 학문적 출발점도 다르지만, 이 책의 결론은 나의 결론과 대동소이하다. 리븐은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그 실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을 이 나라의 태생적인, 그리고 거듭된 이민자들의 유입에 의해 지속되고 재생산된 '반계몽주의(obscurantism)'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 사회는 결국 영국 사회보다는 파키스탄 사회와 더 흡사하다. 게다가 미국의 정치문화는 서부정복의 산물이며, 이는 미국인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미국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계속 살아갈 권리를 갖는 인디언으로 간주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미국 지배계급의 새로운 제국주의 프로젝트는 공격적 국가주의를 배증시킬 것을 요구하며, 배증된 공격적 국가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오늘날의 미국은 오늘날의 유럽이 아닌 1914년의 유럽을 상기시킨다. 모든 차원에서 지금의 미국은 '옛 유럽'에 비해 더 진보하기는커녕 1세기가량 뒤진 상태에 있다. 그런데 이 점이 바로 '미국 모델'이 우파에 의해,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미 자유주의에 투항한 하트와 네그리를 포함한 일부 좌파에 의해 선호되는 이유다.

"제국주의는 시대에 뒤진 구식 용어"라는 '제국'과 "개인이 역사의 주체가 됐다"는 '다중'이라는 두 개의 개념 외에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하트와 네그리의 담론은 체념의 어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현 단계의 자본주의 발전이 긴박하게 요구하는 것들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으며, 그런 자본주의 발전에 스스로 통합되는 것만이 그 결과로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패배한 시기'의 담론이며, 그 '패배한 시기'는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하트와 네그리의 담론은 자유주의에 투항한 사회민주주의의 담론이고, 범대서양주의에 투항한 유럽주의의 담론이다. 이런 종류의 담론과는 단호하게 결별해야만 좌파라는 이름에 걸맞은 좌파, 즉 민중의 이익을 위해 진보를 고무하고 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 좌파가 부활할 것이다.



(주)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and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2004). 두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많은 근본적인 쟁점들, 예를 들어 인지자본주의나 금융자본주의, 노동과 생산의 조직, 그리고 지정학과 관련된 쟁점들은 직접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갖고 내가 두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이보다는 그들이 새로이 전개된 상황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상황으로부터 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어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나무라는 것이다. 문제의 상황변화에 대한 독해는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며, 그런 독해들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하겠다. 〈제국(Empire)〉은 2001년 9월 11일(9.11 테러사건-역자주) 이전에 저술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자국의 물질적 이익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대중의 요구에 따라 인도주의적 이유에서,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에 나섰다고 주장하는 미국 정부의 저속한 선전의 담론을 하트와 네그리가 수용한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번역/이주명 기자)

08. 02. 20.

Майкл Хардт, Антонио Негри Империя EmpireМайкл Хардт, Антонио Негри Множество: война и демократия в эпоху империи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P.S. '제국'과 '다중'에 대한 옹호로는 역자의 한 사람인 조정환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1984). 참고로, <제국>과 <다중>은 각각 2004년과 2006년에 러시아어본이 나왔다(특히 검은색 표지의 <제국>의 경우엔 자주 드나들던 모스크바대학의 구내서점에서 발견하고 잠시 놀랐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너무 고가에다가 무거워서 구입하진 않았지만).

<다중>을 잠시 뒤적이다가 '축제와 운동'이란 절을 잠시 먼저 읽어보았다. 그건 바흐친을 다루고 있어서이다. 두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에서 '다성성'과 '대화성'이란 개념을 빌려다 '다중'을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접한 바로는 '다중'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정리해두어도 좋겠다. 그러자니 아쉬운 건 국역본 <도스토예프스키 시학>가 유감스럽게도 절판된 상태라는 점. '대중'을 위해서나 '다중'을 위해서라도 다시 나왔으면 한다. 아래는 1929년의 초판본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제문제>(왼쪽)와 개정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의 제문제>(1963)을 합본해놓은 책(오른쪽, 1994). 둘다 희귀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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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20 02:04   좋아요 0 | URL
인구에 회자되었던 회수에 비할 때 <다중>의 국역은 그 시기가 조금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네요. 감사드립니다. 일독해봐야겠습니다.^^ 덧붙여, 제게도 또한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 국역본의 절판은 참으로 아쉬운 일들 중의 하나인데(국역본의 '성취도'는 어땠는지 사뭇 궁금합니다), 소장하고 있는 두 종류의 불역본도 새삼 다시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호모 사케르> 국역본의 출간 소식도 들리던데, 로쟈님의 리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쟈 2008-02-20 09:24   좋아요 0 | URL
<시학>은 읽을 만한 번역입니다(아마도 저작권 문제로 다시 못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불어본은 두 종이나 나왔나 보군요. <호모 사케르>는 덕분에 확인했습니다. 사실 '비공식' 번역본도 갖고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책은 아니지만 소문만 무성하던 책이 나와서 반갑긴 합니다. 내달에 읽어봐야겠습니다...

털세곰 2008-03-29 12:11   좋아요 0 | URL
오홋 1929년 초판본의 표지는 저렇게 생겼었군요...^^ 근데 로쟈님은 저런 사진들은 다 어디서 찾으세요?

로쟈 2008-03-29 12:14   좋아요 0 | URL
그냥 몇 군데 검색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