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매인 일들만 없다면 가장 먼저 손에 들었을 법한 책은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2008)이다. 저자는 이미 <욕망하는 식물>(황소자리, 2007), <욕망의 식물학>(서울문화사, 2002)란 책으로 소개된 바 있는 저술가이다(제목은 다르지만 뒤의 두 책은 같은 원서를 옮긴 것이다). 원저는 2006년에 출간됐으니까 일년 남짓만에 한국어로도 소개된 셈.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선정 2006 최고의 책"이라는 게 발빠른 소개의 이유가 되었음 직하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내가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런 사정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겠다. 여하튼 대중성을 갖춘 양질의 교양서라는 점에서 모범이 될 만한 책들이지 싶다. 일단은 리뷰들을 챙겨놓도록 한다.   

문화일보(08. 01. 11)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해답없는 현대인의 고민

“당신이 무엇을 즐겨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1755~1826)이 남긴 말이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마음상태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질 급한 사람은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고, 먹는 속도도 빠르다. 느긋한 사람은 천천히 식사하면서 반찬도 골고루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먹는 것, 즉 음식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본능에서 성욕이 근본적이라고 하지만, 성욕보다 식욕이 더욱 강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섹스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인간의 식욕은 여타 동물의 먹을거리에 대한 욕구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육식 동물이나 채식 동물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배 고픈 고양이 앞에 아무리 채소를 갖다 놓아도 고양이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소 앞에 고기를 덩어리째 던져 주어도 외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은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한다.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다.

책은, 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이 갖고 있는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을 파고든다. 수십, 수백만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먹을거리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원시인들은 들판에 돋아난 수많은 풀들과 나뭇잎, 열매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골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식물의 독성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기나 생선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부위를 다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며 특히 상한 고기를 먹었을 경우엔 즉시 복통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손상을 감당해야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시인들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일단 맛을 보고, 몸에 이상이 없는지 일정 시간을 기다려본 후에야 마침내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식(火食), 즉 불에 익혀 먹는 방법을 찾아낸 이후 인간은 먹을거리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이전엔 먹을 수 없었던 것들도 불에 익히면 얼마든지 섭취가 가능하게 됐다. 이에 따라 먹을거리가 훨씬 다양해졌으며,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의 틀을 세울 수 있었다. 지역마다 식문화가 형성돼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현대인은 다시 한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져 버렸다. 화학비료의 개발과 이에 힘입은 농산물의 대량생산, 숱한 가공식품, 패스트푸드와 유전자 조작식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이후 인간이 이뤄낸 먹을거리의 혁명은 가히 인류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대형마트 식품매장의 진열대 위에서 무엇을 집을 것인지 망설이게 됐다. 한국인이라면 미국산 쇠고기와 한우, 유기농 채소와 일반 채소를 놓고 과연 비싼 가격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또 과자봉지에 ‘화학조미료(MSG) 무첨가’라는 문구가 명시돼 있는지, 유전자 조작 식품(GMO)은 아닌지 등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소위 ‘건강정보’는 또 어떤가. 온갖 학설과 이론에서부터 신문·방송 등이 쏟아내는 정보들, ‘카더라’ 통신의 유언비어에 이르기까지 음식에 대한 단정과 주장들은 차고 넘친다. 지방이 비만의 원흉으로 지목받다가 어느새 탄수화물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난무하는 ‘설’에 따라 현대인은 또다시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딜레마를 직접 몸으로 추적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식사를 지탱하는 세 가지 음식사슬의 처음과 끝을 보여준다. 산업적 음식사슬, 전원적 음식사슬, 수렵·채집 음식사슬 등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저자는 옥수수의 비밀을 파고든다. 옥수수는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 중 하나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옥수수야말로 오늘날 식품매장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대표적 식품임을 알게 된다. 가공된 옥수수는 패스트푸드의 주원료이며, 우리가 청량음료를 마실 때 사실은 옥수수를 마시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저자는 보여준다.

또 ‘전원적 음식사슬’에선 우리가 과신하고 있는 유기농 식품이 사실은 유기농 방식으로 생산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더 많은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있음을 충격적으로 펼쳐 보인다. ‘수렵·채집 음식사슬’에선 보다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냥꾼으로서 말 그대로 선사 시대의 본능을 갖고 있다”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사냥을 통해 이런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멧돼지 사냥과 버섯 채집 과정을 통해 저자는 인간의 본능과 먹을거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책은, 단순히 오늘날의 식품산업에 대한 고발장만은 아니다. 저자가 직접 몸으로 부닥치는 체험들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속엔 철학과 생태학, 인류학 등 식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관점들이 녹아 있다. 또한 현대사회가 어떤 정치·사회·문화적 시스템 하에 돌아가고 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 책을 읽고나면 식탁에 올라 있는 먹을거리들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김영번기자)

경향신문(08. 01. 12) 뭘 먹지? 아니, 그게 옥수수였어?

인간이 코알라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우리를 괴롭혀온 고민 하나가 해결된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고민 말이다. 코알라라면 유칼립투스 잎만 찾아 먹으면 된다. 하지만 잡식동물인 인간은 다르다. 선택의 폭이 너무 넓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결정하는 일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낳는다. 특히 눈앞의 먹거리가 병을 일으키거나 목숨을 앗아갈 가능성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다.

풍요로 넘쳐난다는 오늘날 이 딜레마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어쩌면 전 세계-은 ‘국가적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모두 날씬해지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비만 인구는 늘어만 간다. 먹거리를 살 때마다 ‘저지방’ ‘저칼로리’ ‘트랜스지방 제로’ 등의 문구를 확인하느라 바쁘다. 음식들은 넘쳐나지만 ‘무엇을 먹을까’라는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왜 이같은 일이 생겼을까.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음식에서 너무 멀어져서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다. 그래서 ‘음식사슬’(먹이사슬)을 따라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기원을 추적한다. 거대 농업기업을 의미하는 산업적 음식사슬을 비롯해 산업 유기농, 초유기농, 수렵·채집 음식사슬이 그 대상이다.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에서 끝나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시발점은 ‘옥수수’다. 원래 풀을 먹는 소를 비롯해 닭, 돼지, 칠면조, 양, 메기, 심지어 연어의 사료로 쓰인다. 치킨 너깃·탄산음료·프렌치프라이 등 인간 식욕의 한계를 시험해온 온갖 가공식품과 치약·화장품·기저귀 등 일상용품도 옥수수 투성이다. 슈퍼마켓에 있는 4만5000가지 물품 중 4분의 1 이상에 옥수수가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공된 옥수수”라 할 만하다.

문제는 옥수수가 엄청난 규모로 재배되면서 다른 식물들과 동물들, 심지어 사람들까지 농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점. 또 옥수수 재배를 위해 뿌려진 합성비료는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무엇보다 자연선택에 의해 풀을 먹어야 할 소가 옥수수를 먹고 집중가축사육시설에서 자라면서 소는 물론 이를 먹는 인간의 건강에까지 해를 끼친다.

그렇다면 유기농은 괜찮을까. 유기농도 농업 기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원래 자신이 대체하고자 했던 산업시스템을 똑같이 닮게 됐다. 유기농 인증 사료를 먹는다는 사실만 빼면 유기농 소나 닭이 다른 소나 닭과 다르게 사는 것 같지도 않다. 푸른 들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닭과 소의 모습은 제품포장에나 인쇄되어 있는 ‘슈퍼마켓 목가극’이다. ‘산업 유기농’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아닌가. 결국 저자가 문제삼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명과 음식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산업의 논리’다. 이 논리에서는 균일성, 기계화, 예측가능성, 교환 가능성, 규모의 경제가 중시된다. 다양성, 복잡성, 공생 같은 생태학적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소떼가 목초지에서 집단가축사육시설 안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산업의 논리’는 또한 끊임없이 화석 에너지를 고갈시켜야 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사슬은 선형이다. 하지만 자연의 ‘효율’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원형을 지지한다. 저자가 일주일간 고된 노동을 한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초유기농 농장은 후자에 가깝다. 캘리포니아 숲 속에서의 야생돼지 사냥도 마찬가지다. 그곳에는 태양·흙·참나무·돼지·인간으로 이뤄지는 음식사슬이 작동한다.

저자는 “음식은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 모든 가치의 강력한 상징”이라고 역설한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건강을 위한 일일 뿐 아니라, 산업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가 상실한 모든 문화적 가치들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것은 우리 삶과 세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행위다.

인간 음식문화의 양극단에는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가 있다. 슬로푸드는 자연의 다양성을 반영하지만 패스트푸드는 산업의 창의력을 반영한다. 패스트푸드의 가격은 싼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비용은 숨겨져 있다. 이 비용은 자연이나 공중 보건, 공적 자금, 미래가 부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비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음식은 예전에는 언제나 그랬지만 슬로푸드나 패스트푸드가 아닌 그냥 푸드가 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여기서 책은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되었는지, 그리고 정말로 얼마만한 비용이 들었는지 잘 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식탁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몸이다.”

저자 마이클 폴란은 사람과 식물간의 욕망과 진화의 역사를 그려낸 ‘욕망하는 식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저널리스트다. 이번 책에서도 음식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과 정치·경제·문화·생태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을 자유롭게 풀어냈다. 500쪽이 넘는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맛깔나게 요리된 책이다.(김진우기자)

08.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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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1). 그러고 보면 지면에 쓰는 서평/리뷰도 꽤 분량이 된다(알라딘의 '마이리뷰' 편수로 잡히지 않을 따름이다). 지난주 마감일에 분치기로 쓴 글이라 지면기사에는 탈자까지 있어서 온라인기사에서 바로잡았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론 레핀과 페로프의 그림 두 점이 나란히 실린 것이 만족스럽다. 이 그림들을 소개하는 것이 리뷰의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시사인(08. 01. 07) 격렬한 삶과 희망을 담은 그림에 취하다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 미술사> 저자 이진숙씨가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일치된 반응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 발레와 음악은 있지만(곧 볼쇼이 발레와 차이코프스키는 있지만), 어인 미술인가라는 반응이었겠다. 이번에 나온 <러시아 미술사>는 저자가 러시아에서 러시아 그림들을 보고 받은 ‘충격’을 적어놓은 보고서이자, 러시아 미술에 흠뻑 취해 늘어놓은 취중록(醉中錄)이다.

흔히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동시대 시인 츄체프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인데, 저자가 러시아 미술 세계에 대한 길잡이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민속학자 르보프의 말이다. “우리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격렬한 삶이 있다.” 어째서 격렬한가? 러시아 역사 자체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이 ‘격렬한 삶’과 무관한 미술, 오직 미술만을 위한 미술은 러시아 미술이 아니었다.

저자는 러시아 중세의 이콘화(종교·신화 및 그 밖의 관념 체계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 양식)에서부터, 소비에트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 전체를 여섯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러시아 미술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19세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건 이 그림들의 일부가 최근 몇몇 아방가르드 작품과 더불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동파’란 민중에게 예술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를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열고자 했던 유파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파 화가들은 러시아 미술의 인텔리겐치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동파의 가장 대표 화가는 요즘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일리야 레핀이다.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1873)은 그의 대표작으로, 배를 끄는 인물들의 절망과 다양한 표정을 포착한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는 이 그림의 에스키스(초벌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으로도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1866)이다. 몇 년 전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인데, 추운 겨울날 물동이를 나르는 세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다.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해서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절망 속에서도 어린 소년 같은 순수한 마음과 러시아적인 어떤 것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부여했듯이 말이다”라고 적었다. 

그러한 희망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1888)에서도 읽을 수 있다. 죄수 호송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잠시 정차한 사이에 창살 너머로 비둘기들이 모이를 먹는 걸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비록 러시아 미술이 이 몇몇 그림만으로 포괄될 수는 없지만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만은 확인 가능하다.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이다. 
 
참고로, 국내에는 러시아 미술사를 통시적으로 다룬 조토프의 <러시아 미술사>(1996, 동문선), 아방가르드 미술사를 담은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2001, 시공사), 그리고 최초로 국내 필자가 쓴 현장감 있는 러시아 미술관 안내서인 이주헌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2006, 학고재)이 출간돼 있다. 이진숙의 책은 이 모두를 종합한 가장 이상적인, 러시아 미술사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러시아 미술로의 뿌리치기 어려운 초대장이다.

08. 01. 11.

P.S. 양질의 화보들만으로도 책은 값어치를 하는데, 거기에 덧붙여 저자의 그림 설명들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평이하다(그림은 기사에서 언급된 페로프의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내가 '가장 이상적인' 입문서라고 적은 이유이다. 이젠 보다 전문적인, 그리고 방대한 러시아 미술사들이 소개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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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1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러시아 미술이 다른 서구미술보다는 우리와 감성적으로 오히려 통하는 면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20세기 이전 미술에서요.) 뭐 그렇다고 제대로 알고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전에 이주헌씨 책 읽으면서 꽤 강렬한 느낌들을 많이 받았는데 이 책 빨리 읽어야겠다는 느낌이 팍팍 드네요. ^^

로쟈 2008-01-11 00:36   좋아요 1 | URL
네, 러시아 문학도 미술도 딱 우리 타입입니다. 좀 고생한 나라들이죠...

뭉실이 2008-01-1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파'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것 같네요.
대도시가 아니면 러시아 미술뿐아니라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도 보기 힘드니까요

로쟈 2008-01-11 00:51   좋아요 0 | URL
더불어, 민중미술도 진일보했으면 좋겠습니다...

털세곰 2008-01-11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에서 발행한 책자에 보니, 례삔의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에 대한 설명에, "배끄는 저 사람들의 가슴에 턱 얹힌 저 줄이 바로 그들을 묶어놓고 있는 사회적 제약에 대한 메타퍼이다" 라고 적혀있더군요.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런게 그림에 대한 해설이지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전시회에 이미테이션도 아니고 그 수천장의 스케치 중의 하나만 달랑 온것은 좀 심했다 싶었습니다.

로쟈 2008-01-11 07:59   좋아요 0 | URL
곁다리로 온 거죠 뭐. 대신에 고골의 '분신'이라고 돼 있는 그림이 반가웠고, 몇몇 그림들이 기억을 되새기게 해주더군요...

다락방 2008-01-1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시사인에서 읽었어요. :)

로쟈 2008-01-11 17:08   좋아요 0 | URL
^^

urblue 2008-01-1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전시회 보러 갈 계획입니다. 오늘 이 책 주문해야겠네요. ^^

로쟈 2008-01-11 17:08   좋아요 0 | URL
제가 광고는 잘하고 있군요.^^

마노아 2008-01-1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전시회 다녀왔는데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이 책에서 본 것과 아주 약간 차이가 있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초벌 스케치였군요. 근데 전시회에서는 '증기선'을 끈다고 설명되어 있었어요. 이주헌씨 책에는 '바지선'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 아무튼, 저도 레핀의 그림들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오히려 고흐전보다 재밌게 보고 온 듯 해요^^

로쟈 2008-01-11 17:09   좋아요 0 | URL
네, 이 그림에 대해서는 그냥 맛보기였죠.^^; 다른 그림들이 그래도 좀 만회를 해주었지만...

소경 2008-01-1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갈려고 안내서로 이번에 딱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 구입했는데 전시회도 그렇고 부담감에 마음 잡기가 어렵더군요. 벌써 부터 마음만 앞서서...
 

'기욤 드 마쇼와 유대인'은 르네 지라르의 책 <희생양>(민음사)의 1장 제목이다. 작년 가을에 나온 신장판과 영역본을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대출했는데(내가 갖고 있는 구판은 박스에나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고작 1장 정도 읽어보고 반납하게 생겼다(무얼 집중해서 읽을 만한 여유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반납하기 전에 단순오역 두 가지를 교정해둔다. 새로운 장정으로 책을 내기 전에 번역이라도 한번 더 살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약간 어이없기도 한데 첫 '오역'은 맨 첫문장에 나온다.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라는 16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시인이 있는데, 그의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Jugement du Roy de Navarre)>은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7쪽)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면 중세의 중요한 시인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기욤 드 마쇼의 생몰연대는 1300-1377년이라고 나온다. 16세기 시인이 아니라 14세기 시인인 것이다. 역자가 부주의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불어본에는 로마숫자로 세기가 표기됐던 게 아닌가도 싶다(간혹 그런 경우에는 혼동이 가능하니까. 영역본에는 'mid-fourteenth century'로 돼 있다). 그렇더라도 본문을 주의깊게 읽었다면 그의 '궁정식 문체의 장시(長詩)'가 다루고 있는 사건이 "1349년부터 1350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었던 그 유명한 페스트"(8쪽)라거나 "14세기에는 에피디미라는 이 유식한 말에서 항상 '과학성'의 향내가 풍겨나고있었는데"(12쪽)라는 문구들에서 착오를 눈치챌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지라르가 분석하고 있는 그의 작품 <로이 드 나바르의 판단>은 영어로 'Jugement of the King of Navarre'라고 옮겨진다. '로이'가 고유명사가 아닌 이상 '로이 드 나바르'는 '나바르의 왕'이라고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용상 '판단'보다는 '심판'이 더 적절한 번역어로 보인다.

이 장시의 서두에서 기욤은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제법 그럴 법한 이야기들을 뒤섞어 놓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돌들이 쏟아져 내려와 생물체들을 죽여버리고, 마을은 벼락을 맞아 모두 파괴된다.(...) 기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기독교도이면서 그들과 공범인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이 살해된다.(...) 그것은 그들의 강과 식수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하늘이 폭로함으로써 하늘의 정의가 이들을 일소한다."(7-8쪽)

대략 역사가들은 이 작품에 페스트의 재앙과 유대인 대학살이 묘사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어 보이는 기욤의 텍스트가 말해주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지라르는 마치 '(추적) 사건과 진실'의 나레이터처럼 하나하나 따져들어간다. 그걸 다 따라가볼 만한 처지는 아니어서 한 가지 오역만 더 지적한다.

"어쨌든 여기서 사건이 일어난 정황은 그다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결국 우리가 제시하는 해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 이 텍스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희생양이 실재하였기 때문에 이 텍스트는 동시에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15쪽)

세번째 문장 이하는 영역본에서 이렇게 옮겨졌다. "He would conclude that there were probably victims who were unjustly massacred. He would therefore think the text is false, since it claims that the victims were guilty, but true insofar as there really were victims."(5쪽)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는 주술관계가 모호한데, "독자들은 필시 부당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겠다. '정당하게'가 오역인 것은 바로 다음에 "이 희생양은 무고한 것이므로"라고 나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소한 부주의가 낳은 오역들이지만 덕분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독자들이다...

08.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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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4:39   좋아요 0 | URL
'roy'는 'roi'의 고어 표기인데ㅡ예를 들어 Montaigne의 Essais만 보더라도 'moi' 또한 'moy'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ㅡ, 그것을 '로이'라는 표기로 옮겼다는 사실에서 역자가 아마도 'roy'를 보고 엉뚱하게도 영어 이름 'Roy'를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군요(최소한 '루아'라고만 표기했어도 이런 의심은 없었을 텐데요).
희생양으로서의 독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일상다반사' 수준이라 이제는 좀 '무감각'해질 법도 하련만, 이런 쪽으로 촉수를 뻗은 예민함 때문에 '꿋꿋한' 독서가 방해 받곤 하는 경험은 언제나 다시금 독한 편두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로쟈 2008-01-09 14:4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서들이 정말 드뭅니다.--;

람혼 2008-01-09 15:19   좋아요 0 | URL
여담이지만, 저는 이렇게 신속한 댓글이 달리는 로쟈님 서재 방문자 여러분들의 민첩한 기동성이 언제나 부럽습니다.^^; 그나저나 'roi'의 한글 표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일전에 'Guattari'의 표기에 대해서 로쟈님이 언급하셨던 부분을 가끔 떠올려보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roi'나 'bourgeois' 등 [-wa-] 발음이 들어가는 단어의 한글 표기에 있어서 현재는 '-우아-'가 일반적인 표기법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루아', '부르주아'). 로쟈님께서 보셨던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ㅡ알려주세요~^^;ㅡ'Guattari'를 '구아타리'로 표기했던 이는 아마도 저러한 발음과 표기법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현재의 원칙 상으로는 분명 '구아타리'라고 표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이게 또 당장은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고, 또 예를 들어 '손탁'이냐 '손택'이냐, 혹은 '벤야민'이냐 '베냐민'이냐 등과 관련하여 여러 번 로쟈님께서 쓰셨던 것처럼, 이러한 인명 표기에 있어서 원칙을 적용하느냐 아니면 '관습'과의 타협을 적용하느냐의 문제는ㅡ물론 이것이 이렇게 단순히 양자 사이의 결정의 문제도 아니겠지만ㅡ참 사소한 듯 하면서도 난해한 문제라고 느껴진다는 인상 한 자락 첨부해봅니다.^^ 고견들을 듣고 싶습니다.

로쟈 2008-01-09 16:17   좋아요 0 | URL
구아타리는 <시각문화의 매트릭스>에 나옵니다. 저도 '과타리'까지는 봐주겠는데, '구아타리'는 오버라는 새각을 합니다. '망구엘'의 경우도 '망겔'이란 표기를 찾아줄 수는 있지만, 국내에 그렇게 번역/소개된 이상 '망구엘'을 존중해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제 주요한 기준은 '통용'입니다. '베르그손'보다 '베르그송'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사실 지금 든 사례들은 발음상 대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통용'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데, 벤야민의 연인 '아샤 라시스'는 최근에 나온 선집에서 '아샤 라치스'로 바로 잡혔더군요(역자조차도 예전에는 '라시스'로 표기했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교정된 표기를 선호하는 것이죠...

2008-01-09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16:21   좋아요 0 | URL
그냥 웃고 즐기는 건 괜찮은데, '유료'라서요. 그것도 비싼!^^;

소경 2008-01-09 21:28   좋아요 0 | URL
저도 1장만 대강 읽고 남겨 두었는데. "독자들은 정당하게 살해된 희생양일 거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에 구절에 대해서 전 옯다고 생각 했습니다. 평소 물론 희생양을 두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은 현용하기 어렵지만 지라르는 유태인을 희생양을 둠에 정당하다고 말하는 당시대의 풍토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이니. 누구에게로 책임을 둠으로써, 즉 희생양으로 남김으로 흡족할 수 있는 풍토를. 물론 당시 유태인의 박해에 맞물려,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를 향한 것이라 '정당하게'가 성립되야 하는 것이......

(얼핏 읽고 적으니; 자신이 없네요.)

로쟈 2008-01-09 22:08   좋아요 0 | URL
희생자들이 정당하게 살해됐다는 건 텍스트 서술자의 관점입니다.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는 희생자들이 무고하게 살해됐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텍스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희생자들이 존재했다는 건 말해주니까 그 점에서는 진실을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소경 2008-01-10 06:41   좋아요 0 | URL
현대의 독자들을 향한 글에 다른 내용을 은근히 집어 넣었군요. 맥락을 잘못 집었네요 ^^:;
 

작년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서점에서 몇 번 손에 들었다가 놓은 책은 '초기 교회의 비밀을 담은 쿰란의 문서'란 부제를 단 <사해사본의 진실>(위즈덤하우스, 2007)이다('사해사본'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마침 지난달부터 올 6월까지 전쟁기념관에서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란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기에 한번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박자 늦게 올라온 리뷰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1. 08) "사해사본 내용 은폐·왜곡됐다”

사해사본 전시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해사본의 진실〉(위즈덤하우스 출판)이라는 책이 출판됐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비밀을 담은 쿰란의 문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전시회가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고취하는 데 목적을 둔 것과 달리 사해문서를 둘러싼 의혹과 진실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사해문서가 발굴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해문서의 중요한 내용들이 공개되지도 않은 채 사해문서를 관리하는 ‘국제학자단’이란 조직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에서 시작한다. 저서는 사해문서가 발견된 사해의 쿰란공동체가 1세기의 공공사건들이나 주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숨어 있던 은둔자들이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인’으로 꼽히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물론 예수까지도 그 연관 가능성이 감지되지만, 정통 그리스도교의 수호에만 집착하는 국제학자단이 그리스도교 기원의 독창성에 대한 침식을 우려해 이를 철저히 은폐하는 데만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또 예수 이전에 기록된 사해문서의 존재는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 유사한 가르침들이 그전에도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밝히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발견으로 꼽히는 사해사본 가운데 길이가 7.34m 인 이사야서 복원본을 지난해 12월 4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특별전시관에서 전시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후 68년 사이에 쓰여져 이스라엘 사해 서쪽 쿰란 지역의 동굴에서 지난 1947년~1956년 발견된 사해사본 진본 5점과 소장국인 이스라엘에서도 진본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 복원본 3점 등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을 볼 수 있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은 5일 개막해 2008년 6월4일까지 열린다.(김정효 기자)

저자는 쿰란공동체가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추종하던 ‘나조레안들’일 것으로 추정한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장로들로 구성된 평의회를 이끄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으나 바울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 번도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한 바울은 단지 광야에서 의사 신비주의적인 체험만을 근거로 그만의 신학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예수에서 기인한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정당화해 예수를 직접 만나고 가르침을 받았던 야고보 등 초기 공동체 구성원들이 생각했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예수를 전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로 인해 초기 교인들로부터 죽음을 당하기 직전 로마병 수백명의 도움으로 위기를 피해 자취 없이 사라진 바울의 행적은 로마에 도움을 주는 밀고자나 비밀 정보원을 돕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의인 야고보’와 바울을 대척점에 놓고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하고 있다. 마이클 베이전트·리처드 레이 지음, 김문호 옮김.(조현 기자)

08. 01. 08.

 

 

 

 

P.S. <사해사본의 진실>은 결국 구입하게 됐는데, 아직 서두만을 읽었지만 잘 씌어지고 잘 번역된 책이다. 덕분에 같은 저자들이 쓴 <성혈과 성배>(자음과모음, 2005), 그리고 같은 역자의 <신의 전기>(지호, 1997)까지 독서목록에 올려놓았다. 역자는 신학대학을 나와서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는 분인데 사진쪽뿐만 아니라 기독교 관련서 번역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지 않나 싶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스티븐 랭의 <바이블 키워드>(들녘, 2007)가 눈길을 끈다. 가격이 만만찮아서 미뤄두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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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9 15:25   좋아요 0 | URL
저도 '이쪽 계통'의 책들을 서재 한 구석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몰래 모아두고 있는데요, 얼마 전 '정통 기독교도'인 한 친척에 의해 이 코너가 '사해사본처럼 발굴된' 이후로 그 친척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로쟈 2008-01-10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가끔 교회에 나가는데 기독교 서적도 좀 읽는 게 인문학 공부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8-01-10 10:18   좋아요 0 | URL
하하. 로쟈님. 저도 종교는 로만 가톨릭인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끔 교회에 나가야 한답니다. 의외로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분들이 많군요... 인문학공부. 맞겠지요? (웃음)

로쟈 2008-01-10 10:27   좋아요 0 | URL
네, 인문학 공부 맞구요, '평화'가 중요합니다.^^
 

종로의 대형서점에 잠시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아론 구레비치(1924-2006)의 <개인주의의 등장>(새물결, 2002)이다. 예전에 '개인'과 '개인주의'를 주제로 한 몇 권의 책을 꼽으면서 가장 먼저 염두에 둔 책이긴 했는데, 출간 당시에는 너무 비싸 보여서 구입하지 않았다. 5-6년을 흘려보내니 그래도 '정상' 가격으로 다운된 효과가 있다. 개인적으론 단테의 <신곡>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는 데 필요하다는 '핑계'에다가 저자가 최근(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고려했다. 책은 유럽의 5개 출판사에서 기획한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됐는데, 국역본의 경우 댓 권에서 목록이 더 늘어나지 않는 걸 보면 주줌하고 있는 모양이다(아직도 스무 권쯤이 더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완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몇년 전 관련서평과 구레비치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붙여둔다.   

한겨레21(03. 05. 08) 개인은 진화하고 있다

‘개인’(individual)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서양의 개인은 유일신 앞에서 얼굴을 감추고 엎드려 있어야 했고, 동양의 개인은 가족과 친척, 사회의 제도윤리에 칭칭 감겨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각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러시아의 역사가 아론 구레비치는 <개인주의의 등장>(이현주 옮김, 새물결 펴냄)에서 복잡다단한 개인의 역사를 파헤친다.(*아래는 책의 스페인어본.)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사람’(person)이란 말조차 없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prosopon)과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무대에서 사용되는 가면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한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여러 개의 가면을 바꿔쓰며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프로소폰 또는 페르소나는 한명의 개인을 가리키지 않았다. 성격(character)과도 유사한 개념의 페르소나는 제도와 사회가 정해준, 외부에서 결정된 정체성이었다. 프로소폰·페르소나가 한명의 사람으로 진화한 것은 중세 기독교 때였다.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를 통해 인간(human being)은 한 사람이 된다”고 13세기 문헌은 말한다.

그러나 물론 이때의 사람은 여전히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 아니다. 아론 구레비치에 따르면 개인은 “씨족적 존재에서 벗어나 사회적 신분에 따른 여러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다. 지은이는 이런 개인의 전형이 르네상스 시대 때 갖춰졌다는 많은 역사가들의 지적을 거부하고, 중세 이전 스칸디나비아 문학의 전통까지 거슬러올라가 곳곳에서 출몰한 개인의 계보를 더듬는다.

고대 노르웨이 서사시에는 뛰어난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중 대표적 영웅인 ‘에갈’은 거친 바이킹이자 세련된 궁정시인, 자애로운 아버지, 부와 선물을 기대하는 남자이며 충성스런 친구 등 모순적인 성격의 인물로 나타나는데, 에갈이 구현하는 개인성은 집단의 윤리에 자신을 완전히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인간적 겸손함을 요구하는 기독교가 개인에 대한 관심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한 것은 확실하지만, 중세 시대에도 역시 개인의 탐구는 계속됐다. 이 중 <고백록>을 쓴 성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는 기독교 안에서 개인의 ‘내적 공간’을 탐구하는 데 큰 진전을 이뤘다. 방종한 생활로 젊음을 탕진하며 살다 어느 날 진정한 신을 발견하게 된 그는 “나는 운명도 아니요, 숙명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가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창조자를 대면하는 에고”였다. 중세의 다른 저자들이 스스로를 이교도, 성서적 영웅, 복음서·역사·문학의 인물에 비교하는 것과 달리, 아구구스티누스는 자신에 대해 묵상하고 본래 그대로의 자신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글을 쓰는 지식인 집단말고도 개인은 여러 계급에서 발견됐다. 8세기의 한 조각가 밀라노 대성당의 황금 제단 위에서 왕관을 씌워주는 성자 앞에 무릎을 꿇은 인물로 자기를 묘사했으며, 다른 장인들 역시 곳곳에 자기의 서명을 남겼다. 기독교 윤리에 직업의식이 덧씌워지면서 기사와 상인 역시 각자 소명대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개인성을 형성해나갔다.

지은이는 “개인은 단선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고 결론내린다. ‘개인’은 중세 이전부터 싹을 틔웠지만, 자아에 대한 개인의 태도, 자각을 의미하는 영어의 접두어 ‘self’는 종교개혁 이후에야 등장했다. ‘개인’은 느리고 더디고 힘겹게 일상의 영역으로 편입돼온 것이다.(이주현 기자)

08. 01. 08.

P.S. '러시아의 역사가'로 소개된 아론 야코블레비치 구레비치는 러시아의 저명한 중세사가이면서 문화학자이다. 이 분야의 전공자에 따르면 중세 연구 분야에서 드미트리 리하초프, 보리스 우스펜스키와 함께 러시아의 3대 석학으로 꼽히는 대학자이다(현재는 우스펜스키만 생존해 있다). 아래는 그의 사후에 출간된 두 권의 선집.

Арон Гуревич Арон Гуревич.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Культура средневековой ЕвропыАрон Гуревич Арон Гуревич.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Древние германцы. Викинги

<개인주의의 등장>은 구레비치가 이 시리즈의 책임자인 자크 르 고프의 의뢰를 받고 쓴 것이다(구레비치의 대표작은 <중세의 세계>, <중세의 역사인류학>, <중세의 민중문화> 등이다). 그가 서론격인 1장에서 토로하듯이 "개인은 파악하기 힘"든데, 그럼에도 개인주의의 기원을 '고대 스칸디나비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유럽의 개인주의는 여러 차례 부침을 겪으면서 산발적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같은 주제를 다룬 여타의 책들과 같이 읽어보면 도움이 되겠다. 참고로, 국역본은 영어본을 옮긴 것이고, 영어본은 또 러시아어본을 옮긴 것으로 돼 있다. 한데, 러시아본의 실물이 어떤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영어본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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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8 22:4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강의하시는 '신곡'이라니. 강의 들으시는 분들 정말 부럽네요!

로쟈 2008-01-08 22:53   좋아요 0 | URL
전공 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심도 있는 강의는 어렵고요, 다만 '대표 독자' 역할을 맡은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