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포커스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9). 최근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을 번역해낸 정해창 교수가 '실용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답하고 있는 글이다. 실용주의에 대한 개관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교수신문(08. 01. 29) '가능한 대안’ 모색하는 실천의 언어

1.
최근 서구에서 실용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지난 세기 미국의 철학을 주도해온 분석철학이 ‘분석을 위한 분석’에 매달리다 그 생명력을 소진하면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신들이 무의식 중에 딛고 있던 실용주의 지반을 인식하고 그 진면목을 되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활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이 ‘분석철학의 트로이 목마’라고 불리는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의 출간(1979)이다. 고전 실용주의자들인 퍼스, 제임스, 듀이가 활동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를 실용주의의 탄생기라고 하고, 20세기 중엽을 실용주의의 확장 및 정체성 확립의 시기라고 한다면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후를 실용주의 부활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 시기 뿐 아니라 당대의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에 대하여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자는 퍼스가 실용주의에 이름만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한 곡조씩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는 어떤 것인가. 19세기말 20세기 초 태동기의 실용주의는 사후 한 세대 이상 묻혀 있던 비운의 천재 퍼스를 제쳐 놓는다면 제임스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이자 진리론으로서 실용주의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출간(1907)되면서 그 대강의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실용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을 정의해온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관념은 그 의미와 진리를 행동을 안내하는 유용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도출된다는 실용주의의 주장은 얼핏 인식론을 부정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용주의자들은 앎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전통적으로 철학이 추구해온 앎의 ‘객관적’, ‘토대주의적(foundational)’ 준거이다. 달리 말하면 앎은 다양하고 도처에 널려 있는데 어찌 한 가지 그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기준을 통과한 것만 고집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인간의 끊임없이 인식작용에서 사변보다 실천, 행위를 우선시한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실용주의를 인식론적 지평을 넘어서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즉 전통적 인식론이 ‘객관’이라는 제약 아래에서 평면적이고 수동적으로 되기 쉬운 반면에 실용주의는 광범위한 실천을 바탕으로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로 가치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고전 실용주의가 탄생하는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다. 우주가 진화한다는 것은 우주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대륙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처녀림이나 다름없었던 미국은 그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위니즘은 이런 지적, 문화적 환경과 잘 융합하는 이론이었고, 실용주의는 전통적으로 무시간적 진리만을 고집하던 철학에 시간 즉 변화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변화는 곧 행위를 의미하고 “모든 관념, 사유는 행위를 위한 계획이다”라는 실용주의의 언명은 모든 지적인 노력은 인식자와 무관한 관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순수하고 이론적 앎으로 귀결된다는 전통적 주장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유 양상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가 행위로 이어지지 않거나 종료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기질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와 같이 개인적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언명은 ‘개간해야할 땅이 너무 많았던’ 미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온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가져온 과학적 철학관이 실용주의와 유사하여 일종의 상승 작용을 하며 발전하였다. 참 또는 거짓으로 판단될 수 없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논리실증주의의 검증이론은 실용주의가 천명하는 ‘현금가치’로서의 의미 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보였다. 이 개념들을 명료하게 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자들은 실증주의자들의 자연과학적 방법, 실험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거대한 경험주의 물결에 합류하였다. 즉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태도가 실용주의 전통에 접합되면서 실용주의가 보다 기술주의적(technocratic)인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다. 즉 퍼스나 제임스가 강조하던 공동체적이고 참여적 성격이 개인적 자유와 사적 추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하는 진보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두 번째 시기는 실용주의와 논리실증주의가 뒤범벅되면서 듀이의 해명을 기다려야 했고, 도구주의에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실증주의화되고 과학화된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종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실용주의 부활의 단계인 세 번째 시기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중심에 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상황은 사실상 과학화된 실용주의에서 과학주의를 털어버리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 초 인간을 달에 보내면서 과학기술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나 곧 그 부정적인 면이 함께 부각되었다. 삶의 세계를 지배하는 요인들은 과학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좁은 의미의 경험적 합리성, 객관성보다 광범위하다. 즉 과학주의가 배제하는 윤리적, 미학적 고려, 제약 없는 표현, 공동체적 협력 등과 같은 보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관념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삶의 세계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은 곧 실증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고, 실용주의는 실증주의와 결별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래 분석철학자였던 로티는 전통적으로 철학이 매달려 온 유일한 진리, 합리성, 선의 추구는 연기를 손에 잡으려는 시도 또는 불의 색깔을 찾으려는 시도와 같이 허망하고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소위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이 메마른 땅에서 겉도는 이유를 경직된 관념적 질서에서 찾는다. 이들은 철학을 고귀한 추상의 세계에서 끌어내려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로티는 자신이 철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하이데거, 비트겐시타인, 듀이의 맥을 잇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전통적 의미의 철학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데 동의하고 대안으로서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 그리고 듀이는 도구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철학의 과학화가 철학의 고유한 기능을 포기한 재앙이라는 인식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과학적 언어의 추구는 사실상 플라톤의 이상, 실재의 비밀을 열어주는 하나의 진정한 언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고, 로티는 철학의 종언이 사람들을 이런 족쇄로부터 해방하는 문화적 결과를 동반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유, 탐구에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궁극적 토대,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언명은 바로 자유 진보주의의 천명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실용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는 진보주의가 우리의 선조들을 취하게 하였던 인간성, 자연권 등과 같은 토대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철학이 이런 본질적인 토대를 추구하는 한, 서양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선언은 유효하게 남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삶을 떠받쳐 줄 어떤 확고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는 ‘데카르트적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신학이 인간을 길들이고 협박하는 수단으로 주입한 것에 불과할 뿐 실체가 없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고전 실용주의 철학자들이 재해석되고, 현금의 일류 철학자들, 예컨대, 퍼트남, 데이비슨, 굿만과 같은 철학자들은 스스로를 넓은 의미의 실용주의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십세기 초의 언어적 전환 이후 철학은 지금 또 하나의 전환 즉 실용주의적 전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듀이가 사망한 이후 실용주의는 철학사의 한 구석으로 퇴장하는 듯 하였으나 이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부활이 근대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이성중심주의 그리고 이원론적 사유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저항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2.
내가 실용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이론을 실천으로 대체하려는 욕구, 동료들과의 대화적 제약을 제외하고는 대화에 어떤 제약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 삶의 우연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관념의 주인이 될 때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은 더 이상 설 땅이 없어진다. 이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거대한 관념만 옳고 그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예컨대, 레닌이나 히틀러와 같은 광기와 결합할 경우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음을 지난 세기에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맑은 정신’의 현실주의자 벌린에 의하면, 이 세계에서 최선의 희망 즉 품위 있는 사회의 건설은 대안에 대하여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 즉 다양한 수단과 목적들 가운데 겸손하게 선택하고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음을 전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품위 있는 사회는 잔인함을 최소화하고 그 구성원들이 인내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이다. 관념론자들은 덧없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신기루 같은 이상에만 매달린다. 더 나아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까지도 이상적으로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상상에 불과할 뿐 인간에게는 현재만이 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세기 이상 미국사회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온 실용주의는 당초 실용주의를 대수롭지 않게 폄하하던 유럽에서도 부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퍼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뿐 아니라 기호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임스, 듀이는 심리학자나 종교학자, 교육학자로서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미국화된 아시아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적인 것의 정신적 토대는 가장 덜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실용주의 연구는 고전 실용주의자들보다는 로티에 집중되어 있다. 퍼스선집을 제외하고는 제임스와 듀이의 주요 저술이 다수 번역되어 있고 로티 번역도 여러 권 나와 있다. 그 외에 루이스, 미드와 같은 실용주의자들은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퍼스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는 한권의 저서(정해창)가 유일하다. 제임스에 대한 연구는 철학 보다는 심리학이나 종교학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고, 듀이에 대한 연구도 단연 교육학 분야가 지배적이다. 철학 쪽에서는 오래 전에 듀이를 학계에 소개한 김태길이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로티에 대해서는 다수의 저서, 역서를 낸 김동식이 단연 두드러지고, 이유선, 엄정식, 노양진, 김혜숙 등의 비판적인 글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실상 소수의 학자들만 실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인문학의 위기가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우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실용주의 연구자가 몇 명 안 된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보면 인문학의 위기는 관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인문학자들의 케케묵은 관념을 들어 줄 고객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객을 위해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해야 할 일이다. 칸트의 말대로 철학자들은 모두 시시포스이다. 돌(관념)을 굴려 정상에 올려  놓을 때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돌은 영락없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20세기만 보아도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전환, 언어적 전환, 포스트모던적 전환, 실용적 전환이라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시시포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청중이 지루해 하기 보다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철학자들은 기존의 관념이 설득력을 잃어갈 때 끝없는 대체놀이에 의해서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왜 우리가 바윗돌을 정상에 올려놓아야만 하는가라고 회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대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탐험 정신이야말로 실용주의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붓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돈을 쫒아 헤매고 있는 한, 인문학은 더욱 답답해질 것이다.(정해창/ 한국학중앙연구원·철학)

08. 0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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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5 04:02   좋아요 0 | URL
Peirce가 생각했던 pragmatism의 의미와 후대의 '응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중국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

로쟈 2008-02-05 09:54   좋아요 0 | URL
아시다시피 퍼스 자신은 아예 'pragmaticism'이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듀이나 제임스와는 거리를 두지요. 로티는 그를 '칸트주의자'로 분류하여 실용주의의 본류와는 다르게 보고(아예 퍼스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까지 하니까요). 중국은 50년만의 폭설로 사정이 안 좋은데, 저로선 우연히 50년만의 '설경'을 보고 온 것이니 나름으로는 의미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던 대로 '이달의 읽을 만한 책'들을 꼽아본다. 참고로 삼고 있는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위원장 민병욱)의 목록인데, 2월에는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등 10종이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 발표됐다(http://www.kpec.or.kr/). 과학분야의 <삼엽충>은 지난달에 내가 '1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문학=D에게 보낸 편지(앙드레 고르/임희근·학고재) ▲역사 친절한 조선사(최형국·미루나무) ▲철학=이분법을 넘어서(장회익,최종덕·한길사) ▲정치=시대정신 대논쟁(이영성,김호기·아르케) ▲경제경영=세계화?(토머스 슈뢰터/유동환·푸른나무) ▲사회=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전의우·양철북) ▲과학=삼엽충(리처드 포티/이한음·뿌리와이파리) ▲예술=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조수철·서울대학교출판부 ▲교양=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릭 게코스키/차익종·르네상스) ▲아동=안녕, 스퐁나무 (하은경 글/이형진 그림 문학동네)

2월은 설 연휴가 끼어 있는 데다가 날수도 짧아서(올해는 윤달이어서, 그래봐야 1-2일이지만)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다. 간략하게만 꼽아보도록 한다.

 

 

 

 

1. 문학

먼저 문학분야에 책으로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작가 신경숙씨가 추천한 책은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내는 편지>(학고재, 2007)이다. 이미 작년에 언론에서 크게 소개됐던 책이다. "사르트르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평을 들었던 앙드레 고르는 일생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심층 분석해 온 철학자이며 언론인"이고, 그런 "앙드레 고르가 처음 만나 죽을 때까지 사랑한 아내 도린이 척추 수술로 인한 깊은 병에 걸리자 고르는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와 투병생활을 함께 한다. 『D에게 보낸 편지』는 죽기 일년 전 고르가 아내를 위한 글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쓰기 시작한 <죽음으로 봉인한 사랑의 편지>이다."

앙드레 고르의 책으론 정작 그의 '사적인 편지'들이 주저들보다 먼저 소개돼 좀 멋쩍긴 한데 어쩌면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키워든 '사랑'과 '죽음'일 텐데, 이걸 한데 묶어주는 고전이 <신곡> 아닐까? 일본의 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가 그 길잡이로 내가 2월에 읽고자 하는 책이다. 

거기에 작년 2월에 작고한 오규원 시인의 유고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를 물론 빼놓을 수 없겠다. 이 시집과 함께 끌어안을 화두는 '죽음'과 '언어'다(자세한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67292.html 참조).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저술가 이덕일씨가 추천한 책은 최형국의 <친절한 조선사>(미루나무, 2007)이다. 저자도 책도 모두 생소한데 추천사에 따르면 "한 시대 사람들의 삶의 총체적 모습을 역사라고 할 때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모습은 엄숙하기보다는 일상적이기 십상인데, 『친절한 조선사』는 각 부분을 이루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 역사책"이다.

그런 일상성도 다루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작년말에 나온 중국사로 니시노 히로요시의 <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북북서, 2007)는 제목의 세 키워드를 통해서 '중국사의 흥망을 읽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다(장성에 초점을 맞춘 책으론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을 말하다>(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있었다). 최근에 중국 관련서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라 손에 들지도 모르겠다(누가 좀 말려줘야 할 텐데). 중국을 다룬 거시사로 레이 황의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도 한번 손에 들면 좀처럼 내려놓기 어려운 책이라 같이 올려놓으면서 저어된다.

 

 

 

 

3. 철학

철학분야의 책으로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책은 마침 요즘 읽고 있는 대담집 <이분법을 넘어서>(한길사, 2007)이다. "물리학자 장회익과 철학자 최종덕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나눈 대화이다. 대화는 고전역학과 현대 물리학, 동양과 서양, 의식과 물질, 삶과 자연 등의 주제를 거치면서 풍요롭게 펼쳐지지만, 장회익의 온생명 개념이 태어난 내력과 그것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가 노련하고 해박한 최종덕의 질문 속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주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라고 추천사는 적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사이언스북스, 2005)이나 국내 필자들의 <지식의 통섭>(이음, 2007)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이분법을 넘어서'란 태도가 '실용주의'로 귀착될 필요는 없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는 이분법에 대한 거부를 필히 포함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2월에 읽어보고 싶은 책은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이다. 그와 함께 리쩌허우의 <역사본체론>(들녘, 2004)도 같이 읽어보고자 하는데, 이 책은 <학설>(들녘, 2005)의 보론적인 성격도 갖고 있는 책이다(<학설>은 이번 중국여행에 내가 들고 갔던 책이다). 그 1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하게도 '실용이성과 밥 먹는 철학'이다. 이달은 소위 '실용정부'라는 이명박 정부가 새로 출범하는 달이기도 해서 '실용'의 의미와 용처에 대해 미리 숙지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로 손호철 교수가 추천하고 있는 책은 <시대정신 대논쟁>(아르케, 2007)이다. 200쪽이 안되는 얇은 책인데, 추천사에서 밝힌 의의는 이렇다. "지난 2007년 대선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 20년, 민주화운동출신 정권 10년만에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8년 체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국과 ‘61년 체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산업화, ‘87년 체제’라고 부르는 민주화에 이어 ‘08년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는 많은 논쟁이 가능한 논쟁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시대정신 대논쟁: 87년 체제에서 08년 체제로』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각계의 전문가들이 대중적인 언어로 논쟁을 벌인 중요한 우리 시대의 대중교과서이다." 책의 편자로 참여하고 있는 김호기 교수의 <세계화 시대의 시대정신>(아르케, 2007)이 그 교과서의 참고서로 덧붙여질 수 있겠다.

내가 보태고 싶은 책은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를 포방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동시대인 바울'의 프리즘을 통해서 읽어보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기에.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경제/경영 분야의 책으로 추천한 건 토마스 슈뢰터의 <세계화?>(푸른나무, 2007)이다. 새롭지 않은 주제이고 이미 많은 책들이 나와 있지만 추천의 변이 없지는 않다. "이 책은 ‘세계화’에 초점을 둔 세계경제사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한 쪽만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책, 개념만 간단히 설명하는 책, 오늘날의 현상만 말하는 책, 또한 너무 전문적인 책이 아니다. 그 대신 세계화는 어떤 모습으로 탄생하였는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서 숨쉬고 있는지를 군더더기 없이 소개하면서 세계화의 본질과 논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분량이 얇은 것도 이 경우엔 장점이겠다.

세계화를 다룬 두꺼운 책으론 (이런 책을 누가 다 읽나 싶은) 나얀 찬다의 <세계화, 전지구적 통합의 역사>(모티브북, 2007)가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세종연구원, 2002)의 저자 조지프 스티클리츠 교수의 책들도 계속 소개되고 있는데, <모두에게 공정한 무역>(지식의숲, 2007)은 '세계화의 새로운 목표와 미완의 과제들'을 제시한다. 출간 당시 화제가 됐었지만 독자들의 호응은 신통찮다(500쪽에 가까운 경제학 번역서를 읽을 독자들이 국내에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도 경제 엘리트들은 원저를 읽을 테고). 한미 FTA 비준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정황과 관련해서라도 몇 페이지 뒤적거려볼 만하다.

 

 

 

 

6. 사회

사회분야 책으로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책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양철북, 2008)이다. 저자는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초대 기독교인의 삶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80여년 전에 시작한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리더"이고 제목 그대로 자녀교육서.   

내겐 생소한 책이지만 이미 '좋은 부모'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책인 듯하다. "부루더호프 공동체 리더의 저작인 이 책은 비폭력과 무소유를 지향한다는 공동체의 목표, 30여 년 이상 가정문제를 상담해 왔다는 저자의 경력, 게다가 뉴에이지 풍의 서적들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가족애를 강조하는 또 하나의 당위적 책자로 오인될 소지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 위기의 본질이 빈곤이나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취주의적 억압에 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통찰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라고 추천자는 적었다. 저자의 다른 책으론 <브루더호프의 아이들>(쉴터, 2000) 등이 소개돼 있다.

아이들 책만 사준다는 요즘 부모들과는 달리 '자기 책'만 사는 '나쁜 아빠'로서 내가 자녀교육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책은 고작해야 또 다시 번역된 루소의 <에밀 또는 교육론>(한길사, 2007) 정도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에밀>(한길사, 2003)이라고 다른 역자의 번역서가 나온 바 있는데, 아직 절판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싶다(제목이 달리 붙은 건 순전히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한 책은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고생대의 표준화석으로 외웠던 삼엽충.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30년간 삼엽충을 연구해 온 저자 리처드 포티 덕분에 독자들은 5억 년 전의 생물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고생대 3억 년을 누비며 다양한 모습과 엄청난 개체수로 지구의 역사와 진화의 증거를 고스란히 간직한 삼엽충의 이야기는 화석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이미 지난달에 나도 꼽았던 책이기데 군더더기 말은 필요없겠다. 다만 나도 아직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달의 목표는 서가에 꽂아놓는 것이다.

덧붙여 역자인 이한음씨의 <호모 엑스페르투스>(효형출판, 2008)를 꼽아둔다. 과학서적 전문 번역자의 첫 칼럼집이다. '호모 엑스페루투스'는 '실험하는 인간'이란 뜻. 그런 실험의 대상이 또 '인체'가 되면 좀 '끔찍한' 상황이 연상되는데,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이란 부제를 단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은 그런 연상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끄는 과학사이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미술사학자.

"런던대 교수로서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미술사학자 타이먼 스크리치는 신미술사학을 방법론으로 취해 에도 시대 일본인들이 서양 의학이나 외과도구에 놀라워하면서도 에도 문화의 심장부를 열어나간 다양한 경로를 탐색한다. 이 책의 주제는 ‘연다는 것의 의미’, 그중에서도 몸의 엶, 즉 해부학이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쇄국 정책을 실시했고, 에도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통로는 네덜란드동인도회사를 상대로 한 무역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상관의 상관장이나 의사 등은 서양 문물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어 문물뿐 아니라 문화도 전파했다. 이렇게 유입된 서구 근대의 지식은 난학 붐을 일으켰다."

이왕이면 같은 저자의 신작인 'Sex and the Floating World'(Reaktion Books, 2004)도 소개됨 직하다. 부제는 '일본의 음화(淫畵), 1700-1820' 정도라고 해야 하나(이 책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추천하지 못하겠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조수철 교수의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서울대출판부, 2007)이다. 제목만 보면 번역서 같지만 뜻밖에도 국내서다. 베토벤에 관해서도 무슨 새로운 책이 씌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책에는 글쓴이가 오랫동안 직접 여행과 수집을 통해 모은 생생한 자료들이 가득하다"고 한다. 추천사에 따르면 "흥미로운 것은 책의 구성과 시각이다. 이 책은 다분히 인간의 발달과정과 그에 따른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음악과 관계해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베토벤의 음악적 여정을 다시 한 번 베토벤 자신의 심적 상태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이전에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서울대출판부, 2004)를 낸 바 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모차르트 이펙트>(황금가지, 1999)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국내에 소개된 베토벤 전기로는 메이너드 솔로몬의 <루트비히 판 베토벤>(한길아트, 2006)이 결정판인 듯하다. 내가 더 꼽을 책은 없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르네상스, 2007). 나도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책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전공분야인 20세기 영문학의 주요 작품들의 초판본 수집가/판매상으로 겪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의 미국판 제목이 <나보코프의 나비>인데,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을 '1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두었으니 연이어 <나보코프 블루스>(해나무, 2007)도 교양서로 읽어볼 수 있겠다. 이왕이면 모리스 쿠튀리에가 엮은 <롤리타>(이룸, 2003)까지. 그 정도는 다 '교양'이다.

 

 

 

 

교양에 관해서라면 사실 이달에 읽을 만한 책들이 많다. 분량상 '장서용 교양'으로 분류해서 예외적으로 덧붙이자면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이 대표적이다. 때마침 같이 나온 <헤럴드 블룸 클래식>(생각의나무, 2008)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사전'처럼 읽어볼 만하다. 최근에 새롭게 번역돼 나온 서머셋 모옴의 <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개마고원, 2008)은 19세기 '10대 소설'들에 대한 개성적인 안내서이니 필독해 둘 만한 '교양 중의 교양'이다(작년 이맘때 이 책의 출간을 고대한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37161 참조).

 

 

 

 

10. 아동/전기

아동분야의 책으로 추천된 책은 하은경의 <안녕, 스퐁나무>(문학동네어린이, 2007)이다. "화자인 '나’가 아빠와 함께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면서 겪은 경험과 깨달음을 담고 있다"고. 앙코르와트 여행은 당분간 꿈꾸기 어렵고 지난달과 마찬가지로 나는 전기 분야의 책이나 꼽겠다.

이달엔 김덕영의 평전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이다(자세한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67294.html 참조). 김광기의 <뒤르켐 & 베버>(김영사, 2007)도 안내서 삼아 읽어볼 수 있겠다. 재미있게도 부제가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그런 고민을 잠시 해보는 사이에 우리는 봄의 문턱에 닿아 있겠다...

08. 02. 03.

 

 

 

 

P.S. 가외로 꼽는 '2월의 고전'은 <논어>다. 사실 너무 많은 번역/주석서들이 나와 있고 '정본'은 따로 없는 터라 무얼 읽어야 하는지 좀 막연하다. 그럼에도 내가 길잡이로 삼은 건 리쩌허우의 <논어금독>(북로드, 2006)이다. 거기에 물론 여러 번역/주석서들이 덧붙여질 수 있는데, 손 가까이에 있는 책들은 이강재의 <논어>(살림, 2006), 박민영의 <논어는 진보다>(포럼, 200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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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4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조선사가 눈에 띄네요. 미시사같은데 요즘 조금씩 많아지는 이런 시도들이 반갑기만 합니다. 다만 이런 시도들이 단순한 흥미위주로 흘러버리는 경우도 많아 조금 아쉬울때가 많긴 하지만요.

로쟈 2008-02-04 08:30   좋아요 0 | URL
진지한 미시사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생활사의 이모저모 범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번역된 김에 '실용주의'(혹은 '프래그머티즘') 관련서들을 모아놓는다. 듀이, 제임스, 퍼스 등의 개별 저작과 리쩌허우의 책들을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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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윌리엄 제임스 지음, 정해창 옮김 / 아카넷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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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피지컬 클럽-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루이스 메넌드 지음, 정주연 옮김 / 민음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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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
루이스 매난드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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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 대우학술총서 545
김동식 지음 / 아카넷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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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상하이에서 서울(인천)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몇 종의 신문을 읽을 수 있었는데 마침 토요일이라 북리뷰들을 싣고 있었다. 두 가지 점이 놀라웠다. 하나는 지젝의 <전제주의가 어쨌다고?>(새물결, 2008)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케넷, 2008)가 번역됐다는 점. 후자의 경우엔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반가움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머지 새로 나온 책들도 몇 권 눈길을 끌었지만 새로운 책들을 매주 나오는 것이니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또 한권의 시리즈 책으로 눈길을 끈 건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의 하나로 나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로 아예 굳어버린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대한 '다시 읽기'이다. '실용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제목에서 '와'는 단지 이 두 권의 우연한 접속관계만을 지시할 뿐이다. 이 달에 내가 관심을 갖고 읽어볼 두 권의 책(그 '우연'이 만들어낼 수도 있을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실용주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사가 눈에 띄지 않아서 한 칼럼을 대신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12. 22) [분수대] 실용주의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의 어원은 행동·실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다. 그만큼 행동과 실천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유용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다. 지식도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한 도구로 본다. 실용주의는 현대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미국이 내놓은 거의 유일한 철학 브랜드이고, 미국적 가치·프런티어 정신의 요체이기도 하다.

실용주의의 뿌리로는 19세기 말 공리주의가 꼽힌다. 당시 유럽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부르주아에겐 사회주의에 끌리는 노동자 계층에 맞서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운 공리주의가 그 대안이 됐다. 실용주의는 이런 공리주의의 미국적 전개로 불린다. 당시 미국 역시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통합을 위한 지적 치유가 필요했다. 시기적으로도 독점 자본주의의 문턱에 접어들고 있었다.

187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는 지식인 살롱 ‘메타피지컬(형이상학) 클럽’이 문을 열었다. 기호학자 찰스 S 퍼스,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교육철학자 존 듀이 등 4명이 핵심 멤버였다. 클럽은 9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책 『메타피지컬 클럽』은 여기서 실용주의와 오늘의 미국이 탄생했다고 썼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상이 ‘저 멀리’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포크나 나이프, 마이크로 칩처럼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라고 믿은 점”이다. 이들은 “사상의 생존은 그것의 불변성이 아니라 적응성에 달려 있다”며 “실용주의란 생각하는 방식에 관한 설명”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용이라기보다 태도로서의 실용주의다.

철학자 탁석산은 한 강연에서 “민생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용어로 오해받고 있지만 실용주의야말로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인이 택해 온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며 그때그때 어떤 것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가를 선택하는 사상적 틀로 실용주의를 채택해, 시대에 필요한 과제를 해결해 왔다”는 설명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가 ‘실용의 정부’를 내세우며 ‘실용’이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관심은 그저 정치적 차별화를 노린 수사로서의 실용주의가 아니다. 실용의 내용을 실용적으로 잘 채워, 실용주의의 실용성을 입증하는 일이다.(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해럴드경제(08. 02. 01) 리오타르사상 다시 읽기

포스트모더니즘을 꺼내드는 것은 철 지난 이야기일까. 혹자는 언제 포스트모더니즘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특히 IMF라는 한국적 특수성 아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소개와 소멸은 너무도 신속하게 진행됐기 때문이다. 아전인수격, 코끼리 코만지기식 해석과 이해만이 한차례 유행처럼 불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먼 말파스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윤동구 옮김,앨피)는 옮긴 이의 표현대로, 오랜기간 풍문으로만 전해지며 숱하게 오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두 리오타르의 사상 전반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리오타르 다시 읽기다. 저자는 무엇보다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과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복잡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사유하는 틀로써 그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리오타르 오독의 핵심은 그가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밝힌 "메타서사들에 대한 불신"이라고 포스트모던을 정의한 부분이다. 거대서사의 붕괴가 상실, 허무주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돼왔기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단서를 리오타르가 붙인 부제에서 읽어낸다. ‘지식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야말로 결정적 단서라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후기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지식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는 정보저장과 의사소통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들이 우리가 지식을 사용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을 변형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거대서사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리오타르는 지속적으로 역사를 사유하고 서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리오타르는 특정한 방향을 조직하는 서사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대신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가능성을 출현시키는 서사와 양식의 무한한 출현을 꾀한다. 보편성, 합리성으로 불리는 역사적 사건들의 모순은 그 균열속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아우슈비츠의 경우, 증거나 통계자료 등 지식의 규칙들 너머로 어떤 감정이 이 단어에 따라붙는데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정치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도록 요청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우슈비츠를 변형시킴으로써 경험주의적 역사를 뒤엎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 창조적 예술가의 책무가 부각된다. 인간존재의 안정성에 대한 감각을 훼손시키는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인식의 전복을 꾀하기때문이다. 리오타르는 변기와 같이 일상적으로사용되는 물품을 낯설고 불온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현대작가 뒤샹의 방식에 주목한다. 해석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예술에 응답하도록 자극하기때문이다. 이 책은 숭고, 사건, 분쟁 등 리오타르 사상의 핵심개념이자 오해의 소지가 많았던 부분들을 명쾌하게 제시할 뿐만아니라 리오타르 논의가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지도 폭넓게 보여준다.(이윤미기자)

08. 02. 03.

 

 

 

 

P.S.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함께 읽어볼 만한 책들은 <메타피지컬 클럽>을 비롯해 몇 권의 프래그머티즘 관련서이다(대부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책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실용주의 철학자 듀이와 신실용주의의 주창자 로티를 듀엣을 다룬 이유선의 <듀이 & 로티>(김영사, 2006)가 입문서격으로는 좋겠다. 개인적으론 리쩌허우의 '실용이성'과도 연관해서 이 현대 미국철학과 중국철학의 접속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리오타르의 책은 몇 종 출간됐지만 의외로 심심한 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두 가지 번역본으로 나왔었고 <지식인의 종언>(문예출판사, 1993)이 추가되지만 리오타르의 전모를 조감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스튜어트 심의 <리오타르와 비인간>(이제이북스, 2003)은 심심한 책이었고, 그의 숭고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현대미학사, 2000)와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를 참조할 수 있지만 좀 '전문적'이다. 줄리언 페파니스의 <이질성의 철학>(시각과언어, 2000) 등 몇 권의 현대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서에서 '개관'을 읽을 수 있는 게 거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 역시 개관 범주에 속하지만 그래도 가장 미더운 분량이다...

P.S.2. <실용주의>의 구 번역이 있나 찾아보니 김용배 역의 <실용주의>(민중서관, 1956)가 나와 있다. 223쪽 분량.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383쪽 분량이다. 내가 아는 원저는 얇은 책이어서 예전 번역본과 얼추 분량이 맞는데, 새 국역본의 분량이 두툼해진 이유는 실물을 봐야 알 것 같다. 또 다른 번역으론 '윌리엄 젬즈'의 <프래그머티즘>(미네르바, 1971)도 눈에 띈다. 덧붙여 'Essays in Pragmatism'을 옮긴 이남표 역의 <프래그마티즘의 철학>(중앙문화사, 1962)도 출간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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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겨레21에서 강준만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며칠 눈감고 있어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속 편했던 '한국 시사'를 따라잡기 위해 언론 사이트들을 둘러보다가 읽게 된 글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8/01/021128000200801310696017.html). 역시나 뉴스거리들은 차고 넘치는 나라가 한국인 것 같고 다른 기사들까지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굳이 '정리'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이 칼럼 정도만 '사회적 독서'에 올려놓는다(아직 알라딘에 퍼온 분들도 없고 해서). 돌아오는 기내에서 읽은 국내신문들에서 '영어 몰입'에 대한 유익한 비판칼럼들도 옮겨올 만하지만 좀 뜸을 들일 생각이다. '한국 시사'에 가장 강한 강준만의 칼럼은 역시나 대단히 한국적인 '댓글 문화'에 칼을 대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이기도 하므로 일독해봄 직하다. 개인적으로 '악플'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으나(비정규직 강사가 '유명세'까지 치른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불미스런 기억들은 몇 되기에 나름으로 '실감'나는 기사이기도 하다.

한겨레21(08. 01. 31)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

한국의 ‘댓글 문화’는 악명이 높다. 물론 ‘악플’ 때문이다.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한국 대학의 한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댓글 문화’는 서방 국가가 200년에 걸쳐 이룬 민주주의를 50년 만에 압축 도입하면서 계층·세력 간에 형성된 ‘뒤집기 문화’에서 연유한다며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고 비판했다.

소속 집단 중심의 연대 ‘마을 의식’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박노자가 최근에 출간한 <박노자의 만감일기>에서 한국 특유의 ‘관계 문화’를 지목한 게 더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며,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라면 ‘상대방’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니까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일단 얌전한 척이라도 한다고 했다. 맞다. 누구든 동의할 수 있는 한국인의 유별난 특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밀물이 있으면 그만큼 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특성은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는 게 박노자의 분석이다. 그는 이런 성향을 ‘마을 의식’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깥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 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 집단,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인 듯하다.”

골수 악플러들이 일상에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소심한 편이라는 조사 결과는 이 분석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 남궁기는 “상사의 불합리한 주문에는 순응하는 듯하다가 자기보다 힘이 약한 후배의 말에는 버럭 화를 내는 사람처럼, 특정 환경에서 평균 이상으로 공격성을 표출하는 사람은 ‘악플’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이 또한 악플이 현실의 결핍에 대한 분풀이 또는 보상심리의 산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박노자가 지적한 ‘마을 의식’은 댓글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도 설명해준다. 왜 한국 정당들의 수명은 포장마차 수명보다 짧은가? 왜 한국 정치인들은 자주 철새떼나 들쥐떼가 되는가? 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은 정치 참여만 했다 하면 무조건적 열성 지지자로 변하며, 왜 또 그들 중 일부는 반대파 처단에 앞장서는 홍위병 흉내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가? 이 물음들에는 ‘마을 의식’이 좋은 답이 될 것 같다.

소설가 조선희가 수년 전 ‘악취 진동하는 사이버 토론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온라인 공간이 “한국 정치의 드잡이 난투극을 그대로 닮아가면서 토론 문화의 첨단이 아니라 게토가 되어버렸으며, 오히려 오프라인 시절의 토론 수업 교양 과정을 훌쩍 월반해 최소한 게임의 룰조차 실종된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거점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한 것도 바로 그런 ‘마을 의식’에 대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희는 “‘욕설·비속어·인신공격’ 글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수질 관리를 하든가, 게시판이나 댓글 공간을 관리 가능한 만큼 줄이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쌍방향 소통의 대의를 당분간 접고 온라인 토론 공간을 폐쇄하는 고육지책이 필요할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첨단’ 인터넷에 주눅들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악플에 너그러운가? 이 물음에는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가 답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댓글이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하는 지표 구실을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합리와 이성, 절도가 없는 댓글의 폐해는 정도가 지나쳐 건전한 여론 형성 과정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 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 광장을 활성화하자.”

언론의 ‘인터넷 강박증’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 대해 주눅이 들어 있는 ‘인터넷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겠다.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텔레비전 맹(盲)’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준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인터넷 맹’이라고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부적응자로 본다. 인터넷은 첨단을 상징한다. 모두 다 주눅이 들어 있다. 어느 정도인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조차 눌러버릴 정도다.

최근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그간 언론은 악플 피해자들이 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악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둔감해지는 것이다”라는 식의 조언을 많이 해왔다. “피해를 당하면 극히 일부 미성숙한 아이나 열등한 성인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스스로를 달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조언이 제시되기도 했다. 이런 기사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악플을 다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경정신과 의사의 조언까지 곁들여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에선 어느 영역에서건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자질은 ‘악플을 참아내는 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그럴까? 무언가 또 다른 이유도 있는 게 아닐까? 문화평론가 강명석은 언론은 때론 악플러를 비난하지만,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공생관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터넷에서 악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개개인의 윤리적·도덕적 판단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수익을 얻는 언론매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해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포털 사이트의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즉, 악플의 문제는 단지 개개인의 인격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다. 이는 어떤 방법으로든 ‘주목’을 받아야 살아남는 포털 사이트와 그 속에서 활동하는 언론매체가 얽혀 있는 산업적인 문제다. 이것이 단지 몇몇 비정상적인 악플러들만을 비난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인터넷 강박증, 인터넷 콤플렉스
한국을 가리켜 ‘인터넷 강국’이라고 한다. 껍데기만 그럴 뿐이지만, 그 껍데기조차 그런 ‘인터넷 콤플렉스’와 ‘인터넷 상업주의’를 먹고 자란 것이다. 웬만한 나라에선 법적인 문제 때문에 불가능했을 일이 한국에선 마구잡이로 저질러져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찬사를 받기까지 했다. 한국 인터넷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관용은 ‘새것’과 ‘첨단’과 ‘세계 최고’에 걸신 들린 한국인들의 굶주림과 무관치 않다. 여기에 자유주의적 착각과 진보주의적 착각이 가세했다.

자유주의적 착각은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과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다. 악플의 폐해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그걸 통제하는 것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 얻을 게 더 많다는 논리다. 권력감시, 내부고발, 창의력 발휘 등의 장점이 열거된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이게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흑색선전과 편가르기와 극단적 주의·주장’의 사회적 비용은 잘 거론되지 않는다. 거론된다 해도 ‘분열과 혼란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원론이 답으로 준비돼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을 제대로 만들고, 모든 공적 영역을 투명하게 만드는 법과 규칙을 완비하는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는 가운데, 왜 그런 기능을 인터넷으로 대체하려는가 하는 점이다. 아니 인터넷을 그런 노력에 이용해야 할 텐데 과연 그게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적 착각은 기존 거대 매체를 보수 세력이 사실상 장악했던 과거와 비교해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대안매체로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이념적 ‘편가르기’ 논리가 인터넷에 적용된 셈이다. 실제로 ‘인터넷 실명제’만 하더라도 찬성하는 측은 대부분 보수파였고, 반대하는 측은 대부분 진보파였다.

초기엔 인터넷이 진보세력의 대안매체였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이 점점 더 돈이 되는 산업으로 커가면서 이제 그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특히 노무현 정권이 보수 신문에 대한 견제 매체로 인터넷을 택해 큰 공을 들이면서 포털과 밀월 관계를 누린 건 정권 교체와 함께 부메랑이자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습관과 관성 때문인지 아직도 인터넷에 대한 진보주의적 착각이 횡행하고 있다.



‘배설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하는 지식인들
지난 2006년 8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영국 에든버러 국제TV 페스티벌에서 행한 연설에서 “권력과 돈으로 인한 미디어 통제 때문에 민주주의가 큰 위협을 받고 있으며 해결책은 인터넷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반의 반쪽짜리 진실일 뿐이다. 기존 미디어 재벌들이 앞 다투어 인터넷 매체들을 사냥해온 건 보지도 못했나? 언제건 권력과 돈이 없는 사람이나 세력이 쉽게 생산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쏠림’ 현상을 그 속성으로 삼는 인터넷 공간에서 그 가능성의 실질적 가치는 상징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터넷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고 강력 통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거대 담론적 가치를 앞세워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를 무작정 예찬해온 자유주의·진보세력의 자세가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예컨대, 악플의 ‘표현의 자유’엔 너그러우면서 그로 인해 박탈되는 다른 ‘표현의 자유’엔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악플이 지식인의 자기 검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아 오히려 공론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은 건 아닌가?

윤태진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는 “지인 한 명이 칼럼을 쓴 뒤 느꼈던 참담함을 사석에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의 악의적인 댓글들 때문이었다. 그는 왜 정당하지 않은 비난과 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자기가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그냥 무시하라고 위로했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 불쾌감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칭찬하리라 기대하며 글을 싣는 이는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욕설과 비꼼, 비방과 인격적 모독으로 가득 찬 댓글은 글 쓰는 이들 대부분의 힘을 쏙 빠지게 한다”고 했다.

그래도 힘을 쏙 빠지게 하는 건 다행이다. 아예 글을 안 쓰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글을 쓰더라도 논쟁적인 글은 피하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언론매체에도 기사화되진 않지만, 시사적인 글을 쓰는 많은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튀기는 ‘배설물’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배설물’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을 더 세게 밀고 나가는 지식인도 있지만, 그것도 문제다. 아주 독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기계적 인간들만 제 목소리를 내고, 나머지 대다수가 ‘배설물’을 피하려는 글만 쓰려고 하는 공공 커뮤니케이션 시장이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악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콤플렉스’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일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한,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진 선진국에는 한국처럼 무분별한 댓글 문화는 없다는 비판엔 불편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문화를 가질 수 없었던 독재정권 시절의 아픈 과거가 떠오르며, 아직 그 상흔이 다 치유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책임져도 될 만한 일까지 자꾸 역사적 상흔을 앞세우거나,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익명성의 예외적인 사회적 가치를 앞세워, 계속 익명성의 보호막에 안주케 하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해 이제 더 이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기존 댓글 문화의 장점도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회적 기회비용에도 눈을 돌려보자.

08. 02. 03.

P.S. <박노자의 만감일기>에 대한 표정훈의 리뷰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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