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트에서 바디우의 <사도 바울>(새물결, 2008)에 관한 리뷰기사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9090). 필자는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이고 그의 리뷰 연재를 즐겨 옮겨오던바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컬처뉴스(08. 03. 25) 사도 바울, '다시' 논쟁의 가운데 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그러나 이렇게 말한 맑스 역시 잊은 것이 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에는 그 반복이 꼭 비극-소극 짝일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 예외적인 경우 중 하나가 사도 바울(10?~67?)과 철학자들의 조우이다. 이들 간의 첫 번째 조우는 대략 51년경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등의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하자 배꼽을 움켜잡은 채 파안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희극적이라고 할 만한 이 조우 이후 거의 20세기 뒤에 이뤄진 두 번째 조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때 사도 바울이 만난 철학자들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이었는데, 이 조우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1937~  )에 의해 촉발되어 지난 2005년 미국 뉴욕 주의 시러큐스 대학에서 제법 ‘진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바디우인가? 바디우 이전에도 사도 바울을 언급한 철학자들은 부지기수이다(바디우 본인이 작성한 명단만 봐도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바디우만이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의 두 번째 조우를 실제로 현실화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바울은 ‘사도’ 바울이기 전에 ‘투사’ 바울이기 때문이다. ‘투사’ 바울의 형상을 찾는 것 역시 바디우가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로 그려진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새로운 투사였고, 이 새로운 투사로서의 바울이 갖는 동시대적인 의미는 동료 철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번에 국역되어 나온 바디우의 1997년 저서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원래 제목은 “성 바울: 보편성의 정초”이다)는 바로 이 두 번째 조우의 발단이자 초대장 같은 책이다. 이 초대에 응할지 안 할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겠지만, 이 초대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다.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보편성’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다. 흔히 보편성이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모든 사람/사물에 적용되는 어떤 성질/원칙이다. 그런데 바디우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정초한 보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는 기존의 모든 차이와 분리를 무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보편성이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자와 후자의 보편성은 매우 다르다. 전자가 실제 대상들에서 뭔가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낸 것이라면(이런 보편성은 “……이지만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지만 인간이다”), 후자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런 보편성은 “……이고 ……이다”의 논리를 따른다. 예컨대 “그들은 성별이 다르고 그리스도교인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적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를 창안함으로써 바로 이 새로운 보편성의 윤곽을 정초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교인이 되기 위해서 그/그녀가 반드시 어떤 특정한 귀속 조건(민족, 성별, 신분 등)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봤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28)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이렇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는 묘한 ‘도약’이 있다. 통상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것 안에서 통합된다. 가령 성별의 범주로 보면 그/그녀는 남성/여성이지만, 종(種)의 범주로 보면 인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성별)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의 공통적인 것(종)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그녀의 정체성은 연속적이다, 혹은 말 그대로 동일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는 이런 연속성(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범주는 그/그녀의 정체성이 지닌 차이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에서 실제 대상들의 차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공통적인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무화’된다. 그러므로 이때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차이와 분리를 뛰어넘는(여기서 “뛰어넘는다”는 “극복한다”보다는 “초월한다”에 가깝다. 즉, 사도 바울의 보편성은 차이에 ‘무관심’하다) 제3항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은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가 창안되려면 그 이전의 주체에게서 미리 일종의 단절이 일어나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에 가담하던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을 사도 바울로 뒤바꿔놓은 것과 같은 단절 말이다. 바디우는 이 단절을 ‘사건의 도래’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단절이었다. 바디우가 그 안에서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레닌에게는 1914년 8월에 발생한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 혹은 1917년 2월 혁명이 그런 사건이겠다(흥미롭게도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 시기를 레닌의 ‘철학적 계기’라고 부른 바 있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실이 아니다. 사건은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 즉 가능성의 열림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 때문이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란 사건으로 인해 비로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사건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건은 단절이기에 “……이 아니라 ……임”의 논리를 갖는다. 바디우에 따르면 여기에서 “……이 아니라”는 폐쇄적인 특수성들을 해체하는 과정이고, “……임”은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에 주체들이 동역자(즉, 사도)로서 임해야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사건은 주체(화)와 하나의 구성적 짜임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사건이 있다. 그리고 이 이 사건을 사건으로서 볼 수 있는 주체(사도)가 있다. 이 주체는 이 사건을 사건이라고, 혹은 이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건의 사상가”가 “시인”인 동시에 “투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의 사상가는 늘 새로운 보편성을 창안하기에 시인(시인의 어원이 그리스어 ‘만들다’[ποιέω]인 점을 염두에 둬라)이며, 그 보편성에 근거해 새로운 세계를 열기 때문에 투사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식이 있다. “……이 아니라 ……임”이라는 사건의 논리.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 이 두 가지 공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주체는 사건의 논리에 따라 이미 도래한 사건을 저지하려는(또는 보지 못하는) 힘을 해체하고, 주체화의 논리에 따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료들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 만듦으로써 사건이 열어놓은 가능성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걷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서 진리의 사건=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바로 이것이 바디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가 왜 첫 번째 조우 때와는 달리 희극적이지 않았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키워드들이다(따라서 이 두 번째 조우에 “철학자들 한가운데의 성 바울: 주체성, 보편성, 그리고 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건, 주체성, 보편성. 인류의 위대한 실험이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일체의 진리가 상대화되고, 인류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원칙이 의심받으면서 국가에 맞서는 정치가 정체성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오늘날, 우리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려 한다면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의 의미를 몸소 보여준 ‘우리의 동시대인’인 사도 바울을 외면할 수 있을까? 바디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다소 뒤처진 감이 있지만, 우리는 뛰어난 국역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바디우가 내놓은 ‘미래를 위한 내기’에 동참할까 말까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내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여하는 철학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있다. 아감벤은 “……이고 ……이다”라는 주체화의 논리를 “……이지만 ……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남겨진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 2000)의 논리로 다시 읽는데, 이는 사도 바울을 “보편성의 정초자”가 아니라 “급진적인 분리의 주창자”로 읽는 방법으로서 바디우의 주체화 논리와 첨예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그리고 『까다로운 주체』(1999)에서 『꼭두각시와 난장이: 그리스도교의 도착적 핵심』(2003)[이 책의 국역본 제목은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에 이르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표한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철학자들 간의 두 번째 조우의 결과 역시 곧 책으로 발간될 예정이며, 그리고 또……. 아무튼 우리에게는 더 많은 판단 자료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바디우의 말마따나 많은 사건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사건들조차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3. 25.

P.S. 리뷰에서 언급된 아감벤의 책 <남겨진 시간>에 대해서는 '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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