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말에 선정/발표되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http://www.kpec.or.kr/)의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며칠 당겨서 발표됐다. 강제성은 전혀 없는 목록이고 그냥 일람해보는 걸로도 충분하다. 애꿎게도 나는 그걸 핑계로 몇 마디씩 보태적는 걸 월말마다 반복하고 있지만(지옥 같은 3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4월이라고 해서 '비전'이 보이는 건 아닌지라 '4월의 읽을 만한 책'을 꼽는 손길이 경쾌하지만은 않다. 개인적으론 '연옥에서의 책읽기' 정도라고 이름붙여둔다). 이것도 벌인가?..
1. 문학
소설가 신경숙씨가 추천한 문학분야의 책은 박범신의 <촐라체>(푸른숲, 2008)이다. 타이틀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는데(나는 '-체'의 일종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촐라체는 히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 남서쪽 17㎞에 위치하고 있는 6,440미터의 봉우리다. 난벽이고 거벽이다." 그리고 소설은 "현실에서 좌초한 이복형제가 촐라체 북벽을 등반하며 겪는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고. 더 구체적으론 "지난 시절 최소한의 장비로 당연히 셀파의 도움 없이 단 둘이 촐라체를 등반했다가 하산 길에 한명이 추락했으나 로프를 끊지 않고 끝내 추락자를 구해내서 생환하는 것으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최강식, 박정헌의 이야기가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정보는 생략하지만, 알다시피 네이버에 연재됐던 작품이라 웬만한 문학독자라면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듯하다.
사실 내가 아는 박범신은 <풀잎처럼 눕다> 시절의 박범신이니 어느적 박범신인가 싶다. 업데이트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범신이 만난 젊은 작가들>(문학동네, 2007)도 같이 챙겨보면서. 더불어 꼽는 건 비슷한 연배의 작가 김원우의 신작 소설 <모서리에서의 인생독법>(강, 2008)이다. 최근에 산문집 <산책자의 눈길>(강, 2008)과 같이 출간됐는데(관련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05770 참조), 동시대 두 중견작가의 '근황'에 대해서 보고서를 써볼 수도 있겠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선정한 추천도서는 <진인각, 최후의 20년>(사계절, 2008)이다. 이 선정은 전혀 놀랍지 않다. 나부터도 신간으로 소개한 바 있고(http://blog.aladin.co.kr/mramor/1921742 참조). 아직 책은 구입하지 못했지만 중국 최고의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 겪은 문화혁명 기간의 시련이 핵심이야기가 아닐까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추천사에 따르면 "국민당 대신 공산당을 선택했던, 아니 대만이란 섬 대신 대륙을 선택했던 한 역사학자의 선택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어떻게 배신당하는지, 그리고 그런 체제 아래서도 인간은 왜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전기이다."
역사책은 아니지만 중국 관련서 몇 권을 더 보태고 싶다. 작가 한샤오궁의 <열렬한 책읽기>(청어람미디어, 2008)와 이미 '베스트 저자'군에 속하게 된 이중텐의 <이중텐, 중국인을 말하다>(은행나무, 2008)가 최근에 나온 관련서들이고(한샤오궁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84746 참조), 역사서로 분류되는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도 방대한 분량의 노작이다. 특히 이 책은 국내 연구자들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사도 바울>(새물결, 2008)이다. 이미 여러 차례 다룬 데다가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도 꼽아두었었기 때문에 군말은 필요 없겠다. 간단하게만 옮기면 "알랭 바디우의 저작들은 요즘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에 관한 이 책은 가장 넓은 독자층을 거느리는 작품이다. 저자가 다루는 바울은 사도나 성자로서의 바울이 아니다. 저작의 목적은 기독교적 신앙의 찬양이나 옹호에 있지 않다. 여기서 바울은 어떤 미증유의 진리가 출현하는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 사건 속에서 예감된 진리에 충실히 복종하고 희생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주체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바울과의 만남을 바디우는 제안한다. 나로선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와 같이 겹쳐 읽으면 좋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한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론 좀 '끔찍한' 책이 올라왔다. 데릭 젠슨의 <거짓된 진실>(아고라, 2008). 저자의 책으론 <네 멋대로 써라>(삼인, 2005)부터 <웰컴 투 머신>(한겨레출판, 2006), <약탈자들>(실천문학사, 2007)까지 여러 권의 책이 출간돼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사회변혁운동가, 아나키스트, 환경운동가 등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에 앞장서는 저자 데릭 젠슨은 글쓰기 선생도 자처하며 많은 책을 낸다. 주로 현대사회와 그 가치에 의문을 갖는 글이 중심을 이룬다. 충격적인 사례를 소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섬뜩하게 느끼도록 한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그가 품는 학문과 관심 영역이 매우 다양해서인지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논증을 한다."
이 책을 추천한 김광웅 교수는 "우리가 일궈온 문명의 희생자들이 너무 많은데,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그의 명제이다"라고 정리한다. 알라딘의 소개가 간명한데, "노암 촘스키, 반다나 시바, 아룬다티 로이, 하워드 진과 함께 급진적인 사회 변혁 운동가로 주목받고 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사상가 중 한 명인 데릭 젠슨이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증오와 위선적인 문화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고찰한 책." 딱 그만큼으로 읽으면 되겠다.
5. 경제/경영
정운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론 처노의 <금융 권력의 이동>(플래닛, 2008)이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금융제국 J.P. 모건'으로 잘 알려진 금융관계 저술가 론 처노(Ron Chernow)가 썼다. 원래의 제목은 '은행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Banker)'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은행업의 종언이라고나 할까." 사실 '은행업의 종언'에 대해서 내가 특별히 애도할 건 없지만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도 소장도서인지라 뒤적여볼 수는 있겠다. 무얼 알아낼 수 있을까?
"로스차일드, 모건, 베어링, 워버그 등 전설적인 금융명가(名家)들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눈부시게 번성했다가 어느새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왜 금융계의 영원한 주역으로 남지 못하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위세를 잃게 되었을까."의 해답을 알아낼 수 있다. 20세기 정치사를 가로지르는 정치와 경제의 권력이동을 다룬다고 하니까 재미로도 자기몫은 하겠다. 더구나 "짧아서 지루하지 않고 과거의 책들에 비해 이해하기도 쉬워서 좋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겠고. 물론 금융권력의 이동에 대해서 알게 됐다고 해서 나의 신용등급이 올라가는 건 아닐 터이지만.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전혀 예기치 않게도 빌 클린턴의 <기빙(Giving)>(물푸레, 2007)이다. 추천자 자신이 미리 예상되는 '우려'들을 차단하고 있다. "대필 가능성이 농후한 유명 정치인이자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성 추문의 당사자라는 저자의 편력, 엎치락뒤치락하는 대선주자 힐러리의 홍보물로 곡해될 수 있는 소지, 게다가 미국의 봉사활동 사례들을 편중적으로 열거한 자국 중심적 내용 등 부정적 요소들을 첩첩이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눔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간명한 메시지는 그 모든 결함들을 한방에 제압한다.(...) ‘Taking’을 넘어선 ‘Giving’이 새로운 시대적 코드임을 주지시키는 이 책은 경쟁과 점유가 아닌 소통과 공생의 새로운 생활윤리를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찾아보니 국역본의 부제는 '우리 각자의 나눔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이다. 좋은 말인 만큼 여러 말 할 건 없고(말은 말일 뿐이니까) 그가 그런 삶을 실천해왔는가만 살펴보면 되겠다. 그래서 <기빙>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아예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물푸레, 2004)와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3/2007)까지 챙겨볼 필요가 있겠다(이 자서전들의 인세는 어디로 가는 건지 확인해보면서).
7. 과학
장경애 과학동아 편집장이 추천하고 있는 과학분야의 책은 <21세기를 달군 후끈후끈 달 탐사 여행>(파라주니어, 2008)이다. '달 탐사'란 타이틀에서 짐작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4월 8일.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가 우주로 향한 온 국민의 꿈을 실현시키는 날이다. 러시아 소유즈 로켓에 한국 최초의 우주인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보내 아쉬움이 남지만 올해 말 전남 고흥에 나로 우주센터가 완공되면 우리가 만든 발사체에 우리가 만든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우주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싶은 심정이다."가 추천의 배경이다. 때문에 "인류가 진행한 달 탐사 프로젝트의 처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라는 것.
그런 관심에서라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청어람미디어, 2002)도 빼놓을 수 없겠다. "우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비행사들의 내밀한 체험,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정신적인 충격"을 테마로 하고 있는 책이니까. 또 마크 트라의 <우주 여행>(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은 보다 실전적이어서 "힘들고 고된 우주인 훈련센터에서의 훈련 과정부터 무사히 우주를 향해 떠나는 모습, 우주에서의 생활과 이들이 해야 할 일들, 우주에서 바라본 풍경 등을 생생하게 담은 컬러 사진을 함께 보여주어 간접적으로나마 우주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이다. 아예 토머스 존스 등의 <NASA, 우주개발의 비밀>(아라크네, 2003) 같은 책을 손에 들 수도 있겠는데, 정작 우리가 발사체를 쏘아올리는 러시아의 가가린우주센터에 관한 책은 거명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러시아당국의 보안정책에 위배될지 모른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존 하비의 <블랙패션의 문화사>(심산, 2008)이다. 제목 그대로 블랙 패션의 문화사이면서 "패션 일반이 드러내는 옷의 코드와 의미에 대한 상상력도 자극하는" 책이란 평이다. "블랙은 본디 밤의 색이었고, 죽음과 비통의 색이었으며, 수도사와 수녀의 색이었는데, 그것이 지위와 전문성, 권위와 권력, 더 나아가 우아함과 경건함, 섹시함의 패션으로 자리하기까지 그 이면에는 무수한 정치, 사회, 문화, 심리적 변수들이 작용했다. <패션의 체계>라는 책을 쓴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 했듯이 패션이야말로 ‘널리 퍼지지만 사라져버리는 의미’를 가진 무엇이다. 언젠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검은 옷의 비밀들을 캐보는 재미를 맛보자."라는 것이 추천자의 제안이다(바르트의 <패션의 체계>는 <모드의 체계>로 번역돼 있다).
덕분에 찾아본 것이지만 패션사에 관한 책이 많이 소개된 편은 아니다. 앤더슨 블랙 외, <세계패션사1,2>(자작아카데미, 1997)가 처음 소개된 책인 듯하고 이후에 <세계패션사>(간디서원, 2005), 제임스 레버의 <서양 패션의 역사>(시공사, 2005) 등이 더 소개되었다. 작년에 나온 필리프 페로의 <부르주아 사회와 패션>(현실문화연구, 2007)은 19세기 복식사에 대한 풍부한 정보와 도판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문학 전공자들도 챙겨둘 만하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윌리엄 랑게비쉐의 <사하라 사막 횡단기>(크림슨, 2008)이다. "사막, 그것도 사하라 사막이다."로 다 설명되는 책이겠다. 사막 횡단 경험이 없기에 사막이라고 하니 나로선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정도가 떠오른다(오늘 잠깐 볼 기회가 있었다). 찾아보니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김영사, 2005)이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황금나침반, 2006) 등이 관련서이다. 이젠 사막 횡단도 '교양'이로군!..
10. 평전
최근에 나온 주목할 만한 평전 두 권은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민음사, 2008)과 정준호의 <스트라빈스키>(을유문화사, 2008)다. 네루다의 책은 물론 재작년에 나온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와 같이 읽으면 더 좋겠고, 스트라빈스키의 경우엔 그의 <자서전>(1998)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영어권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전기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다)...
08. 03. 26.
P.S. 4월의 고전은 단테의 <신곡>이다. 개인적으론 독서강좌의 강의를 맡은 탓에 이마미치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비롯해서 4종의 원전 번역본을 모두 갖고 있다(4종이면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체면치레 정도는 되지 않나 싶다). 기타 관련서들까지 포함하면 열댓 권은 되는 듯하다. 그래봐야 30년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그 수준을 알아볼 급수는 된다(바둑 급수는 낮아도 프로기사들의 기보는 읽을 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곡>의 해설자라기보다는 '길잡이' 정도가 내 역할이지 않나 싶다. 강의가 마무리되면 관련문헌들의 간략한 해제 정도는 적어놓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