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관련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나온 <차이위안페이 평전>(김영사, 2009)도 기억해 둠직하다. 차이위안페이(채원배)는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사상가라고 한다(아래 기사에서도 도산 안창호와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사를 다룬 책으로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세계일보(09. 04. 11) 중국 교육 근대화의 아버지

우리나라엔 도산 안창호와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이 있었다면 중국엔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가 있었다. 베이징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차이위안페이는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뜨거운 애국자, 5·4운동의 아버지 등 호칭도 다양하지만, ‘근대 중국의 초석을 마련한 선구적 교육자’가 가장 적합하다.

‘차이위안페이 평전-시대보다 먼저 현대중국을 준비한 위대한 지식혁명가’는 26세 때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관리로 나섰던 차이위안페이가 1894년 갑오전쟁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자 낙향해 교육자로 변신하는 과정,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유학생활, 귀국 후 두 차례의 교육부 장관과 베이징대 총장으로서의 활동 등 그의 삶 전반을 조명한다.

쑨원의 신해혁명 이후 교육부 장관을 맡은 차이위안페이는 경전강독만 중시하는 구교육을 배척하고, 남녀의 교육평등과 근대적 학제를 과감히 도입하는 등 낡은 교육체계를 하나하나 뜯어고쳤다. 프랑스 유학 중에는 일하며 공부하자는 ‘근공검학운동’을 주도했다. 200여명의 중국 유학생이 참여한 이 운동에는 훗날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도 포함돼 있다. 마오쩌둥은 차이위안페이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했으며,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근공검학회의 후원으로 유럽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차이위안페이의 평가도 명문으로 전한다. “아! 역사가 나라를 위해 죽으니 호연지기가 흥기하누나. 당년에 북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잘라 굳게 맹세하고 큰 뜻에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역수의 결의를 다지고 일격에 수치를 씻고 몸은 오히려 죽게 되었다….”(조정진 기자) 

09. 04. 19. 

 

P.S. 덧붙여, 중국철학자 펑유란(풍우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는 책, <현대 중국철학사>(이제이북스, 2006)도 참조해볼 만하다. "차이위안페이, 후스, 천두슈를 비롯해 장빙린, 쑨원, 마오쩌뚱, 슝스리에 이르기까지 현대 철학자들을 아우르는 철학사이면서, 서세동점의 시기 ‘동아시아에서의 근대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국현대사"이기도 한 이 책에는 '신문화운동의 창시자이자 교육자이며 철학자-차이위안페이'란 장이 포함돼 있다. 찾아보니, 주저인 <중국철학사>(까치)를 간추린 <간명한 중국철학사>(형설출판사, 2007)도 출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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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간 중에는 중국 관련서도 포함돼 있는데, 일본의 원로 중국학자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소명출판, 2009)이 그것이다. 찾아보니 <중국사상 명강의>(소나무, 2004), <중국의 공과 사>(신서원, 2004)가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책은 중국에 대한 시각 교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상수의 <아큐를 위한 변명>(웅진지식하우스, 2009)에 연이어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공역자의 한 사람이다.   

세계일보(09. 04. 18) '떠오르는 중국'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수십년간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앞에 이제 중국이 세계적인 중심국가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세계인은 없을 듯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이 이러한 중국의 부상을 ‘중국위협론’ 등으로 제기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 또한 중국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논리의 반영인 셈이다. 또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본 역시 중국의 이러한 성장을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는 없는 듯하고, 한국 역시 인적 물적 교류의 측면에서 중국의 강력한 힘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서구를 비롯해 동아시아 역내에서 중국은 이제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온 지 오래되었다. 이 충격은 받아들이는 이들의 입장에 따라 위협으로, 야만으로, 비민주로, 무질서와 오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근래 중국의 성장을 자신과의 관계 위에서 또는 세계 문명의 차원에서 제대로 평가해보려는 시도는 우리의 경우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충격’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쓰인 책이다. 근대 이후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자부해왔던 일본과 일본인들이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고 차별과 멸시 등의 부정적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 이 책의 기본적인 저술 배경이 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일본의 근대사에서 늘 ‘일본(선진)-중국(후진)’이란 구도의 한 축으로서 기능해 왔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의 중국 인식은 왜곡된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인식은 여전히 현상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의 대두를 전혀 문제시하지 않거나 서구의 위협론에 편승하여 그들의 부정적 중국상(中國像)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미조구치는 바로 이러한 일본의 중국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근래 중국의 부상을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충격’은 중국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본인들의 인식, 즉 낙후된 중국과 선진화된 일본이란 이중적 인식을 문제화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인 것이다. 

미조구치는 이미 학계에서 은퇴한 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 수년간 진행했던 중국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내에는 각 국가마다 그 나라의 역사적 문맥이 존재하고 있고, 이것을 통해 폐쇄적인 상호인식이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아울러 당시 동아시아에서 현안으로 대두했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중국학 연구자로서 자신의 중국 연구를 바탕으로 우선 동아시아 각국의 왜곡된 인식들을 타파하는 노력을 동아시아 지식인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각 국가 간의 왜곡된 인식이 결국 서구 근대를 수용하면서 형성된 일국(一國)적 지식의 차별구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의 연구와 지식인 연대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서구 근대의 극복을 통한 세계적인 보편 문명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조구치의 지향과 활동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로운 평화적인 질서를 수립하고 새로운 미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 등등. 중국을 대상화하는 미조구치의 작업을 참조체계로 삼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생산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과 연구가 진행되기를 희망한다.(서광덕 안양대 대만연구소 연구교수)  

09. 04. 19.  

P.S. 책에 대한 출판사 소개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이 책은 일생 중국 연구에 몸담았던 일본의 노학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가 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대적 지식 체계의 차별 구조를 타파하고 동시에 미래의 신지식에 대한 모색을 동아시아 지식인 연대 운동의 차원에서 시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가 일생 중국근대사상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왔던 것 또한 왜곡된 일본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새로운 일본사회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미조구치는 일본의 근대화를 ‘서구추수’라고 비판하면서 중국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 일본 근대의 유약함을 폭로해낸 중국문학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를 잇는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요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책들에 덧대어 읽어도 좋겠다는 것. 특히 <일본과 아시아>(소명출판, 2004)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책이다.   

부수적으론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그린비, 2007)에서 시작된 '아이아 총서'의 책들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 오키나와 문제를 다룬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그린비, 2009)이다. 

 

국내서로는 얼마전에 창비에서 나온 '근대의 갈림길' 시리즈가 유익해 보인다.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갈래>가 '총론'이고 중국편이 강진아의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이다. 최원식 교수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도 <중국의 충격>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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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의 제3의 움직임

마이클 가자니가의 <윤리적 뇌>(바다출판사, 2009)를 관심도서로 올려놓은 김에 인지과학의 전반적인 현황과 조망을 다룬 이정모 교수의 <인지과학>(성균관대출판부, 2009)에 대한 소개도 스크랩해놓는다.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다. 책은 두툼한 '교재'이다.  

  

교수신문(09. 04. 06) “생각 교환할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 필요해요”

한국의 인지심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이정모 성균관대 교수가 얼마 전 『인지과학』(성균관대 출판부)을 펴냈다. 종합과학이자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성과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이 책을 통해, 이 교수는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인지과학은 인간의 심성을 과학을 통해 해명하자는 야심찬 취지를 바탕으로 한다. <교수신문>은 이 교수와 인터뷰를 통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과학기술시대 인간의 지위에 대해서 인지과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아봤다. 

이정모 교수 약력: 퀸즈대에서 심리학 박사 취득. 한국실험및인지심리학회 회장, 한국인지과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뇌학회 고문으로 있다. 

교수님의 『인지과학』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딱히 뭔가 문제를 제기할 부분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모범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인지과학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하고 성실하게 종합을 한 책은 외국에서도 드물 것으로 사료가 됩니다. 특히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수행하신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문제에 관심을 연구하다보니 다양한 학문적 성과와 방법론에 호소를 하게 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후자의 경우 애초에 선생님을 사로잡은 학문적 문제의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다양한 학문들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정한 한 문제에 대한 단순한 심리학적 물음에서 저의 인지과학 탐색의 길이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사고에서 하나의 생각(개념)이 어떻게 해 다른 생각(개념)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 생각과 생각을 이어주는 마음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가고, 그 마음이 기억과정 중심으로 작동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의 본질은 1930년대의 영국심리학자 바틀레 교수에 의하면 ‘의미에의 노력(effort after meaning)’의 과정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기억에는 정보들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조화돼 연결돼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기억에는 생각들이 어떠한 지식구조를 이루어 저장되고 어떻게 되꺼내어 지는가하는 문제로 물음이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구조란 언어에 의존하니까 언어학의 언어와 의미에 대한 형식적 접근으로 관심이 번져갔고, 지식의 저장구조를 다루던 인공지능의 연구에,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습득, 구조화, 인출 과정들의 특성을 좌우하는 뇌의 신경적 활동에, 그리고 마음, 의미, 지식,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의 물음으로 관심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하나를 더 잘 알려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여러 학문의 성과와 방법론에 의지하며 탐색했던 것 같습니다.

인지과학은 마음의 과학이다, 다양한 인접 학문의 연구 성과를 총괄해 발전하고 있다 ... 이 정도가 일반 식자들이 가진 생각일 것입니다. 종래의 심리철학이나 심리학과는 확실히 다른 관점에서, 다른 연구방법론을 통해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 일종의 과학 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까지 볼 수 있을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저서에서도 언급을 하셨겠지만, 신문독자들을 위해) 현대의 인지과학이 지닌 혁명적이고, 독특한 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인지과학의 떠오름은 지적하신대로 하나의 과학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습니다. 1981년에 두뇌의 좌우반구 분할 연구로 1981년에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신경심리학자 로져 스페리 교수의 표현에 의하자면, 인지과학은 아래에서 위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전통적 과학적 (물리학의) 가정 대신에, 역방향적 하향적 결정론도 인정하는 것이며, 전통적 상향적 입장과 인지주의의 하향적 입장이 조합된 ‘이중 결정’ 모형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에너지 중심의 고전적 과학에 정보와 정보처리 관점, 컴퓨터 유추에 바탕한 마음 작동 원리의 탐구 및 형식화 접근을 제시함으로써 인류사회에 정보화 시대, 컴퓨터 시대, 디지털 시대가 출발할 수 있는 구체적 개념적, 이론적 바탕 틀을 제공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 이성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다 라는 전통적 사회과학의 통념을 실험적 증거에 의해 와해시켜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적 재구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뇌와 마음의 연결을 탐색하는 분야를 과학의 개척지의 핵심 분야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전통적 과학 연구의 초점을 자연계의 일반 물질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마음에, 뇌에, 그리고 그 마음을 모사한 인공지능에 돌리게 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의 연결이 과학적 탐구에서 필연적이게 했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지과학에는 인문학적 성찰도 가미가 되고, 분명 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신경과학의 등장 등은 아무래도 전통 인문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른바 환원주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그러합니다. 인지과학의 성과가 마음과 윤리에 대한 발생학적이거나 진화론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의 문제 등을 과학의 언어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지과학은 그 본래적 특성상 과거의 학문 분류 틀인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을 아우르는 학제적 과학입니다. 그러나 인지과학은 사실은 이러한 고식적 학문분류 그 자체가 21세기의 학문의 분류틀로서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뇌와 인공지능도 다루지만, 인간의 마음이 (사회적으로)만들어내는 ‘의미’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의미란 주관적 측면이 개입된 것입니다.  

인지과학이 다른 과학과는 달리 지니는 커다란 부담 중의 하나는 과학에서 객관화하기 힘들다고 여겨져 온 인간의 주관적 체험을 과학적 울타리 안으로 어떻게 끌어 들여서 다루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향성이나 도덕법칙, 정의 등은 이러한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바탕 위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주어지고 개념화되고 이해, 설명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지향성, 도덕법칙, 정의 등이 구체적으로 몸을 지니고 사회적 환경에서 적응하는 인간 개체가 이루어내는 것임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법칙, 윤리 등에 대해 이러한 후자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 설명 가능하다고 봅니다. 최근에 현상학적 철학 등과 연결돼 인지과학의 제 3의 대안으로 서구에서 떠오르고 있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tition) 접근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리라 봅니다.

<교수신문>은 작년에 디지털 치매를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의 한 가능성으로 사고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사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도 책의 말미에서 “인간과 인공물의 구분이 무너지는 가능성이 무섭게 빨리 현실로 닥쳐오고 있다”고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미래의 도래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우려와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일종의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죠. 기계를 만지작거리면서 눈빛이 멍한 요즘 아이들에서 그러한 디스토피아의 징후를 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화, 무력화, 노예화라는 우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 이래 인간, 특히 인간 마음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언어나 행정체제와 같은 소프트 인공물, 돌도끼나 컴퓨터 등 하드인공물 포함)과 공진화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체화된 인지’ 접근에 의하면 인간 마음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환경)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문제 있지요.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건 내비게이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른이건 이미 인공물은 인간의 마음의 한 부분 요소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밀접한 연결이 점증하는 것은 막기 어렵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인간의 일상적 삶의 양태일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에 대해 디스토피아 같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언급만하는 것은 인간을 제대로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지요.  

인간은 무한한 창의적 인지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인간의 창의적 인지적 능력을 이러한 기계의 폐해를 예방하고 줄이는 데에 전력투구한다면(마치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인류의 온갖 지혜를 다 짜내듯이) 이러한 비관적 예측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막을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러한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응용 인지과학의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만들어 낸 기계 등의 인공물의 폐해, 그리고 요즘 논의되는 각종 환경 파괴의 폐해의 원인이 실상은 그러한 인공물에 있다기보다는 그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인지 특성에 있음을 절실히 인식해 이를 극복하는 인간 인지기술을 창조하는 것이 인지과학의 응용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융합과학기술 개발의 목표가 신물질이나 기계의 창조가 아닌 세계 인간 기능(수행능력) 향상에 있음에 우리는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계와 공진화를 말해도 ‘사유’를 기계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에 대해선 심각한 심리철학적 논의가 전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듯이 ‘무엇을 사유라고 규정하느냐’, ‘무엇을 기계라고 규정하는가’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여간, 인간처럼 유한한 생명을 지닌 생물학적 존재가 몸을 갖고 하는 일정한 인지 양식을 사유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소위 ‘그러한 몸을 지닌 생명체가 아닌 기계가 할 수 있는 인지 양식과는 다소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 점은 인정하지만 어떠한 형태로건 형식화할(formalizable) 수 있는 사유는 소위 “기계” 가 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기계를 구현하려면 장구한 세월의 연구가 필요하겠지만요.

조금 색다른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교수님은 이 책을 저술하신 동기로 인지과학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책이 없다는 이유를 들으셨습니다. 그만큼 지식의 축적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인지과학을 비롯해서 요즘의 융합학문은 연구자들에게 전문가적 깊이는 물론이고 다방면에 빼어난 백과사전 형 지식인을 요구하는데, 과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각 분야의 지식을 연구자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결국 융합학문으로서 인지과학에 대한 총체적 조망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요 ...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적하신 문제점을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잘 알아야 제대로 인지과학적 연결 틀을 세울 수 있는 인접 분야 주제들이 계속 출현합니다. 어떤 때는 인지과학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간관련 공학의 상당부분을 빠른 속도로 흡수하면서 그 자체의 특성을 상실해 가지 않는가 하는 염려도 들고, 과연 그러한 시점에서도 통합된 조망의 인지과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듭니다. 다원적 메타포, 다원적 방법론, 다원적 수준의 설명, 그리고 심리학, 철학, 신경과학, 언어학, 인공지능, 인류학, 로보틱스, 물리학, 수학 ... 등  여러 학문의 수렴이 필요한 데, 이것은 어느 개인 한 사람이 이루어 내기 힘든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작은 주제부터 큰 주제까지 여러 분야 간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며 자연 발생적으로 전체적 유기적 조망을 창출하는 그러한 학술적 대화 마당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지적 부담을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그러한 학술적 마당이 마련돼야 하겠지요.

융합은 요즘 곳곳에서 들을 수 있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융합이니 학제 간 연구니 하는 구호가 구호에만 머문 경우가 많습니다. 인지과학의 경우처럼 진정한 학문적 필요성에서 비롯했다기 보다는, 관변 단체나 언론의 주도로 일부러 ‘융합’을 표방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학제 간 연구가 내실과 진정성을 기하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융합과학기술을 세계적 관심사로 끌어 올린  틀을 제시한 미국 과학재단의 틀에서 강조한 것은 사실은 ‘융합’이라기 보다는 ‘수렴(Convergence)’이었습니다. 여러 연구 관심사 주제, 학문 분야, 학자들의 생각이 계속적이며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상위 개념이나 조망으로 수렴돼 가는 그러한 틀을 제시한 것입니다. 미국과학재단은 이 2002년도 보고서에서 융합(수렴)을 이루어 내기 위해 주의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각 분야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낸 후의 사후의 연결적 융합이 아니라, 작은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여러 학문 분야들이 밀접히 연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수렴적 융합, 자연발생적 융합이 일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늘,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수렴적 관점에서 현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그러한 학문적 대화의 마당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이라는 기존의 학문 분류 틀이 무너지고, 학부생, 대학원생, 교수, 대학연구자, 기업연구자들이 계속해 생각을 일상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지적 흥분의 분위기가 형성돼야 합니다. 관변단체나 언론의 시도는 자극을 줄 수는 있지만 구체적 융합은 이루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대학이 본질적으로 탈바꿈하여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대학 및 국가 연구지원 체제, 대학 및 중고교 교육체제가 혁신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고서는 서구와 같이 기본 물음에 대한 진지한, 계속된 탐색과, 그리고 여러 학문과의 연결에 의한 융합을 창출해 내기 힘들다고 봅니다.

연구를 하시면서 겪었던 개인적 어려움들과 보람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 어려움의 하나는 과거에는 대학, 과기부, 교육부, 과학관련 공공기관의 종사자들, 그리고 이러한 기관의 자문위원 교수들, 매스컴 종사자들이 구시대적 개념인 물질, 기계 중심의 과학관으로 무장돼 있기 때문에 저희가 인지과학, 학제적 융합을 이야기해도 결국은 황야에서 외롭게 외치는 소리에 그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최근에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오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람의 하나는 80년대 중반에 대우대단 지원 인지과학 공동연구를 하면서 15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격주로 모여 밤늦게 토론해 용어, 개념적 이해틀의 차이를 결국은 상당히 극복하고 한국인지과학회를 창립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인지과학 자료를 소개한 것을 접한 후에 유럽, 북미, 동남아, 중국, 만주 등, 그리고 한국 내에서 전혀 일면식도 없는 인지과학에 관심있는 분들이(주로 한국인) 연락을 해 온 경우들입니다.  

향후 계획의 하나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학생, 교수, 현장연구자 등이 함께 참여해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늘 열리며, 정말 수렴적인 학문간 대화가 활발한 그러한 다학문적 인지과학 세미나를 어떤 교육기관에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진행, 참여하고 싶은 것입니다.(오주훈 기자)   

09.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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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드물게도 국내서가 번역서보다 더 많이 눈에 띈다. 창비담론총서도 나오기 시작했고,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푸른숲, 2009)는 '이주의 경제서', 이종필의 <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글항아리, 2009)는 '이주의 과학서'이다. 김태형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역사의아침, 2009)까지 관련리뷰를 다 챙겨놓지는 못하지만 모두 화제가 될 만한 책들이다. 거기에 맞서는 번역서로는 자크 데리다 등의 <마르크스주의와 해체>(길, 2009), 사이토 준이치의 <민주적 공공성>(이음, 2009) 등이 내가 주목하는 책들이다. 개정 번역판으로는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난장, 2009)도 새로 나왔다. 거기에 한권을 더 보태자면, 저명한 인지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윤리적 뇌>(바다출판사, 2009). 관심을 끄는 저자이고 주제인지라 따로 리뷰를 스크랩놓는다. '신경윤리학'이란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래도 공부에 자극을 주는 '의외의 책'에 점수를 많이 주는 편이다. 인지주의 철학자인 마크 존슨의 <도덕적 상상력>(서광사, 2008)과 같이 읽어볼 수도 있겠다. 국내서로는 이정모 교수의 <인지과학>(성균관대출판부, 2009) 등이 '교과서'이다.  

 

한국일보(09. 04. 18)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 '나'인가 나의 '뇌'인가  

현대 뇌과학은 살인범과 정상인의 뇌가 구조부터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밝혀낸 상태다. 살인범들의 뇌는 대게 심리 억제 메커니즘 기능이 있는 전두엽이 손상됐고, 공격성을 좌우하는 부분이 활성화되어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과거엔 고민 없이 살인범을 단죄했다. 하지만 뇌의 구조라는 물리적 요인이 범죄의 중요한 동인일 수 있다면 범죄자에게 물을 수 있는 윤리적 책임의 한계는 어디일까. 



<윤리적 뇌>는 이처럼 현대 뇌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던지고 있는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뇌영상을 통해 마음의 행동 및 심리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인지신경과학' 분야를 개척한 세계적인 뇌과학자로, 뇌과학과 관련한 미국의 인문학적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몇몇 주장은 사회적 통념과 격렬히 마찰할 수 있다. 태아를 언제부터 인간으로 대우할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반적으로는 수정체가 착상하고 세포분열을 끝낸 14일 된 '배반포'부터 생명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뇌과학에 따르면 태아의 뇌는 최소 23주는 돼야 생각하는 인간으로 발달한다. 저자는 이런 시각에 따라 배아나 태아를 대상으로 한 의학실험 시한 같은 것도 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비친다. 

캐나다의 스프린터 벤 존슨이 썼던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처럼, 앞으로는 '뇌기능을 향상시키는 약'도 나올 것이다. 이 경우 어떤 윤리적 기준에 따라 이 약물을 사용할지도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 뇌전극을 이용해 수험생의 뇌기능을 높이는 처치까지 가능하게 된다면 두뇌의 우열에 관한 사회적 통념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밖에 이 책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의지인지, 나의 '뇌'의 의지인지 하는, 자유의지 유무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뇌 안에 각인된 사회의 보편적 윤리 메커니즘에 관한 논의 등도 아울러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류는 보편적 윤리감각에 따라 과학의 발전이 나쁜 길을 향해 가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할 뿐이다.(장인철 기자) 

09. 04. 18. 

 

P.S. 마이클 가자니가의 책으론 <인간의 마음과 행동>(시그마프레스, 2000)이 소개된 바 있다. <심리과학>과 <인지신경과학> 같은 교재형 타이틀은 저자가 이 분야의 '스탠더드'라는 걸 시사해주는 듯하다. 그의 최신간은 <인간>이다. 관심을 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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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뇌신경학자가 본 인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09 17:11 
    <윤리적 뇌>(바다출판사, 2009)로 처음 소개된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신간이 출간됐다. <왜 인간인가?>(추수밭, 2009). 지난번 <윤리적 뇌>가 나왔을 때 검색해보고 궁금해한 책인데, 의외로 빨리 번역됐다. 부피는 좀 있지만, 요즘 뇌과학자들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일독해볼 만하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연합뉴스(09. 11. 09) 인간은 동물과 어떻게 다른
 
 
hnine 2009-04-18 13:38   좋아요 0 | URL
어느 시기부터 태아를 생명체로 보느냐 하는 것도 아직 통일이 안되어 있는 상황이지요. 이런 제반 문제들이 과연 인간의 수준에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범죄인의 뇌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용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범죄인들 특유의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미리부터 어떤 '조치'가 취해지거나 '격리'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인간의 뇌에 관해 밝혀낸 빙산의 일각 같은 결과를 가지고 너무 큰 것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경솔함이 가끔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뇌' 란 '나'와 별개가 아님에도 기자는 제목을 저렇게 붙여놓았군요.

로쟈 2009-04-19 11:57   좋아요 0 | URL
'나의 뇌'와 '나' 사이에는 그래도 '시차'가 있지요.^^
 

어젯밤에 한 교양강좌의 다음 학기 일정을 짜보았다(니체와 쿤데라 등을 읽을 예정이다). 대학강의 중에도 미리 일정이 예정돼 있는 것이 있다(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읽을 예정이다). 그런 '스케줄'을 짜다 보면, 한 학기와 1년이 얼마나 짧은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하기야 요즘 같은 세월은 몇 년 없는 걸로 쳐도 무방하겠지만 말이다. 새로운 이상 전집 출간 소식을 접하고 먼저 든 생각은 또 내년 봄엔 이상 문학에 대한 강의도 집어놓어야겠다는 것(이상의 나이도 이제 100세가 된다!). 금방이라도 일년이 지나갈 것만 같다. 그렇게 한 4년쯤 어서 지나갔으면 싶다... 

경향신문(09. 04. 17) 권영민 교수의 새로운 해석, 다시 태어난 ‘이상’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61·서울대 국문과)가 새로운 <이상 전집>(총4권·뿔)을 펴냈다. 이상의 문학과 습작 노트 등을 총망라하고 새로운 해석을 보탰다. 전집 출간과 이상의 기일(4월17일)을 기념하기 위해 문학평론가 이어령·김윤식, 시인 고은·이승훈·김승희, 안상수 홍익대 미대 교수,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등 16명이 15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 모였다. (사진) 

 

권영민 교수는 “이상은 한국 사회의 근대화, 물질문명의 발달 등 소위 ‘모더니티’의 문제를 가장 먼저 질문한 작가”라며 “ ‘모더니티’의 문제는 현재에도 계속 제기되는 만큼 이상 문학을 해석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1977년 이상 전집을 펴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는 “이상의 좋은 작품이 계속 연구돼 새롭게 해석되는 것은 한국 문학계의 경사”라고 했다. 90년대 초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전집을 펴냈던 이승훈 시인은 “이상은 내 창작의 뿌리”라며 “이상의 전위적 실험성, 아웃사이더적 성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상 시에 나타난 타이포그라피적 측면을 연구한 안상수 교수는 “이상은 한국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첫 발자국을 찍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권 교수는 전집에서 모든 작품의 원전과 함께 현대 표기법에 맞는 한글본을 실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토록 했다. 또한 이상 작품의 난해성과 파격적 실험성 때문에 방치되었던 구절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는데, 특히 성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 해석된 몇몇 작품을 바로잡은 것이 눈길을 끈다. 시 ‘且8氏의 出發’(차8씨의 출발)의 경우, 그간 성행위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됐지만 절친했던 화가 구본웅과의 우정을 그린 시라고 풀이한다. 차(且) 아래 팔(八)을 붙여 쓰면 그것이 바로 구씨의 성인 구(具)자가 되고, 아라비아 숫자 8은 꼽추였던 구본웅의 기형적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상 탄생 100주년인 내년에는 이상과 주변 사람들의 작품과 그림 등을 모아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이영경기자) 

09. 04. 17. 

P.S. 예전에 나온 전집들의 이미지도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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