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고골의 가장 유명한 단편이자 러시아 단편문학 백미 중 하나인 <외투>의 새 우리말 번역본이 두 종이나 더 출간됐다. 새로 나온 창비세계문학의 러시아편 <무도회가 끝난 뒤>(창비, 2010)에도 수록돼 있고, 펭귄클래식으로 나온 <코 외투 광인일기 감찰관>(펭귄클래식코리아, 2010)에도 들어가 있다. 마침 내주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고골의 작품들을 다루는데, <외투>의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한 재미이겠다. 혼자 누리려다가 누설해놓는다. 같이 누리면 재미가 두 배가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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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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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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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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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외투 (양장)
니꼴라이 고골 지음, 김세일.송정수 옮김, 임양 그림 / 가지않은길 / 2006년 7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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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1 10:04   좋아요 0 | URL
코, 광인일기가 1830원으로 보이는 리스트입니다...^^

로쟈 2010-01-21 11:12   좋아요 0 | URL
'성공적인' 리스트로군요.^^

목동 2010-01-21 14:29   좋아요 0 | URL
서울 면적의 1/13정도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근대 유물의 분포 밀도로 으뜸이라 하던데요. 도시내 250개의 각종 박물관중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년 260만의 관광객이 몰린다니, 역사적 유물과 스토리가 곧 자원이군요. 가보고 싶습니다.
 
레르몬토프의 고독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내가 강조한 건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이 자의식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점이다(레르몬토프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도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가장 좋아한 작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곧 늙어가면서 그의 고독과 낭만적 환멸에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됐지만, 엊그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레르몬토프의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려니까 다시금 뭔가 아련한 감상 같은 것에 젖게 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Bl9VDbRwOxo). 그녀의 노래는 국내에서 언젠가 TV드라마의 주제가로도 쓰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우리시대의 영웅>의 새 영화 버전도 유튜브에는 올라와 있다(영화는 1966년판, 1975년판, 2006년판 등이 있다). 겸사겸사 어제 강의 자료의 일부와 함께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아래 자료는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이기도 한데(학위논문인지라 말은 좀 어렵게 써놓았다), 논문은 올 하반기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푸슈킨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네긴과 작별을 고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그의 분신적 형상인 페초린과 보다 긴밀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1인칭 시점하에 페초린의 내밀한 언어로 보다 밀착된 페초린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레르몬토프는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서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한 타치야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페초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가 버린  베라를 (벼락을 맞은 듯이 서 있던 오네긴과는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가는 페초린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내 말이 10분만 더 달릴 힘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계곡에서 올라와 산에서 벗어나 가파른 모퉁이에 이르자,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말을 일으키려고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들릴 듯한 신음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몇 분 후에 말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채 홀로 초원에 남았다.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낮의 불안감과 간밤의 불면 때문에 기진맥진한 나는 축축한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민음사판으론 217쪽) 

그렇게 울기 시작한 페초린은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의연함’과 ‘냉정함’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인용한 대목에서는 페초린의 가장 약한 모습이, 그의 ‘성격갑옷’이 일시적으로 제거된 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이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현실에서 좌절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정서적인 상관물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그것은 페초린 자신이 곧 자인하듯이, 대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경멸적으로 외면할 만한 모습이다. 때문에 평소의 페초린이라면, 철저하게 가장했을 터인데, 이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페초린 자신의 분신이자 그의 신체의 연장(extension)으로서의 말은 가파른 모퉁이에서 쓰러지는데(이 말이 쓰러지자 페초린은 더 걷지 못한다), 모퉁이란 두 공간이 서로 이접되는 지점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모퉁이, 즉 전환점에서 시간이 이접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간축 상의 전환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접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예비)어른의 경계이다. 하지만, 페초린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징계적 차이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며/않으며 상상계적 자아상에만 집착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왜소함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후에만,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꿈을 단념한 연후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요구에는 이러한 인정/단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전부에 대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며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이며, 그런 점에서 작가 레르몬토프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초린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압돼 있으며, 카프카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너무 나약한 권위의 ‘아버지’인데(페초린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만>에서의 얀코가 유일한다), 이것은 레르몬토프적 상황과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레르몬토프적 상황이란 것은 2자적 관계에서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상실하고 3자적 관계에서 그가 이상적-자아로서 지향해야 할 ‘아버지’는 약화/결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낳은 원인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그는 상상계와의 이접 이후에 상징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할당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선 ‘상징적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팔루스적인 어머니’ 혹은 ‘남근을-가진-어머니’가 대신한다.  

‘남근을-가진-어머니’란, 성교 중에 아버지의 음경을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이다. 레르몬토프에게서 이러한 팔루스적인 어머니상과 일치하는 것은 외조모 아르세니예바 부인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자신 속에 ‘나’를 다시 집어넣은, ‘나’를 다시 흡수한, 그래서 ‘나’를 자신의 팔루스로, 혹은 무(無)로 환원시켜버리는 ‘어머니’이며, 그것은 행복과 죽음의 현혹이다. 이에 대한 레르몬토프적인 공포는 페초린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반영돼 있다. 그에게 결혼이란 말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불가피한 결혼에 대한 연상은 모든 열정에 종말을 가져오며, 그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만든다. <공작의 딸 메리>에서의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 결혼만 아니라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스무 번이라도 내 생명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내기에 걸겠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팔아넘길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가? 그 속에 있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타고난 공포이며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 거미나 바퀴벌레나 쥐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고백해야할까?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한 노파가 어머니에게 나의 대한 점을 쳐준 일이 있다. 그때 노파는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내게 예언했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나의 마음에는 결혼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혐오감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가 노파의 예언이 실현될 거라고 내게 말해주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늦춰지도록 노력할 것이다.(민음사판으론 186-7쪽)

여기서 페초린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사람들이 거미나 바퀴벌레, 쥐를 무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타고난 공포’라는 것이고,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란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될 수 없는 것이며, 이 ‘타고난 공포’는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와 양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파의 예언이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는 것도 사실 <운명론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페초린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다. 페초린적인 태도는 결혼이 두려워서 회피하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나보코프는 페초린의 죽음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도중의 불행한 결혼과 연관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 이유는 페초린의 제2의 본성(second nature)으로서 결혼에 대한 공포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억압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란 무엇일까? 레르몬토프의 전기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남근을-가진-어머니’에 대한 공포, 즉 거세 공포이다. ‘본능적으로’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선 ‘무의식적으로’란 의미인데, 거미나 바퀴벌레 등 다리가 많은 동물들의 무의식적인 상징 또한 거세공포이다(다리가 많은 것은 자신의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서 ‘남근을-가진-어머니’는 자궁회귀본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이며, 이 ‘팔루스적인 어머니’로의 회귀가 ‘어린아이’로서는 죽음에의 현혹이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페초린의 경우에 노파의 예언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이 거세 공포에 대한 상징적인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파의 예언은 그의 거세공포에 대한 사후적인 승인에 해당한다.   

결혼의 불가라는 예언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균질화된 시간이다. 그러한 지평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지 않다. 레르몬토프의 공간적 상상력이 대지와 하늘을 두 축으로 한 은유적인 상상력이었다면, 그의 시간적 상상력은 (페초린의 경우에 미루어서 말하자면) 예언에 속박된 환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환유적 상상력 속에서 ‘나’는 세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지만, ‘너’라는 타자의 세계로의 비약은 가능하지 않다. 때문에 레르몬토프의 창작세계에서 ‘나’의 고독은 필연적이다... 

10. 01. 19. 



P.S. 2006년작 <우리시대의 영웅>의 하일라이트는 http://www.youtube.com/watch?v=UENblKYDTMY 참조. '공녀 메리'('공작의 딸 메리')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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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9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馬)이라는 상징성에 남성상(男根)까지 비유하는 건 좀 무리겠죠?" -책도 안 읽어보고 페이퍼의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의견-

로쟈 2010-01-19 23:24   좋아요 0 | URL
러시아문학에선 보통 여성을 상징합니다.^^

목동 2010-01-1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단락은 '페티시즘(Fetishism)'과 비슷한데요.

로쟈 2010-01-19 23:26   좋아요 0 | URL
연물주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목동 2010-01-20 08:11   좋아요 0 | URL
예,,신체의 특정부위나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인데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왜곡현상중에 하나로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에서 뛰어나게 묘사되던데요.

카스피 2010-01-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재간되었군요.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21 07:29   좋아요 0 | URL
네, 고전은 정의상 다시 읽는 책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1-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남자배우가 정말 미남이군요.여배우들보다 더 눈에 띕니다.특히 눈썹과 수염이 예술이네요.

목동 2010-01-22 19:43   좋아요 0 | URL
권총든 얼굴이 로쟈님과 비슷(?)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2 23:50   좋아요 0 | URL
그건 좀...
 

<뉴레프트리뷰2>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소개기사는 물론 책 자체가 눈을 씻고 봐도 뜨지 않는다. 연간 체제로 나온다고 했고 작년 2월에 1권이 나왔으니까 '제때'이긴 하다. 어떤 볼륨으로 어떤 글들이 묶였을지 궁금하지만 확인은 하루이틀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대신에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하루키의 <1Q84> 덕에 작년에 때아닌 <1984> 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전체주의 비판 소설 탓에 많이 가려진 것이 '사회주의자 오웰'의 면모다(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의 그 많은 학생들이 <동물농장>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그에게 공정하자면 '동물농장'에만 들를 것이 아니라 '위건 부두'도 같이 둘러보아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동물농장>과 <1984>밖에 읽지 못한지라 그의 르포르타주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웰이 사회주의자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온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오웰은 '얼치기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래 기사를 읽으며 되새겨보게 된다...       

한겨레(10. 01. 16) 사회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자 비판 

그는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마흔일곱,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믿었고 그 주의를 옹호했다. 조지 오웰(1903~1950). 그는 현대문학의 고전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을 쓴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평론가였고 직접 혁명전선에 나선 행동가다. 



한데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년>은 일종의 반공 우화 소설로, 사회주의의 ‘적자’로 군림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흔히 소개되고 그렇게 읽힌다. 아이러니다. 아니, 반토막 진실이다. 그가 1937년에 발표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런 독해가 상당 부분 오독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36년 초 오웰이 좌익 출판단체로부터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대량 실업 문제에 관한 르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그는 편집자 빅터 골란츠의 부탁을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과 리버풀,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집중 취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묵는 하숙집과 탄광노동자의 가정에 머물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집다운 집에서 살 권리도 박탈당한 노동계급의 삶을 체험했다. <위건 부두…>는 당시 대량 보급되며 반향을 일으켰는데, 오웰은 스스로 <위건 부두…>를 통해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작가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훗날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진지한 작품들은 그 어느 한 줄이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쓴 것들이다.” 

 

<위건 부두…>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글로 돼 있다. 1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은 오웰이 목도한 영국 노동계급의 궁핍한 생활상과 실업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기록한 르포다. 낱낱이 묘사되는 1930년대 영국 공업지대의 빈곤과 주택난, 도시재건축의 살풍경은 오늘 한국사회를 연상시킨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을 논한 2부는 에세이 형식으로 쓴 정치평론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논쟁적인 것은 바로 이 글이다. 1930년대 영국 좌파 사회주의 리더들을 직접 겨냥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청탁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오웰이 파시즘과 싸우러 스페인에 간 틈을 타서 오웰의 논지에 대해 반론하는 서문을 넣고 출판했다. 골란츠는 그 뒤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1938)에 대한 출판도 거부한다.

1936년은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때이자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세력을 키워가던 때다. 오웰의 말을 따르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세상”이며 “사회주의가 후퇴”하던 때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 당시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가 보기에 “누구라도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때에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더 못 받는 것은 바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잘못된 전술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책자에 글줄이나 쓰며 말끝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태도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들이다. 오웰의 비판 대상에는 평생 사회주의자로 산 버나드 쇼도 포함된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 규탄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사회주의엔 오직 증오만이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과 대중들에게 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물질적인 유토피아를 사회주의의 목표로 선전하고 ‘미련한’ 러시아(스탈린) 숭배와 기계 숭배의 냄새를 풍김으로써 사회주의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으로 돌아서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직직원 등 중산층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것이 오웰의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오웰의 사회주의자 비판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놓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악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고까지 오웰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웰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반파시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사회와 그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파시즘을 아울러 ‘전체주의’라고 이해한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요체를 ‘정의와 자유’, ‘압제에 대한 반대’라고 말한다. 그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을 찾으려 하면 일순 모호해지는 감이 있다. 오웰이 보기에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오웰이 반대했던 것은 파시즘이었다. 그 전체주의였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그 압제적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늉만 했을 뿐 그 전체주의적 성격에서 흡사한 면모를 보이며 사회주의를 오도했던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맹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당대의 파시즘 승리에 대한 오웰의 경고와 통찰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 떨릴 만큼 현실적이다. “상황은 절박하다. 사회주의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 운동이 되었으며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하고 있다. …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오웰은 말한다.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웰이 던진 숙제는 오늘에도 유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진보논객 박노자씨는 이 책의 추천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웰은 20세기 문학을 통틀어 가장 선명한 ‘비판적 개인’이다. 오웰이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이다. 그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는 21일은 오웰 사망 60주기가 되는 날이다.(허미경 기자) 

10. 01. 17.  

P.S. 참고로 지난 2003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다. 올해도 겸사겸사 몇 권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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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작가의 작품이라면 두 권 이상은 읽어야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10-01-17 13:43 
    단행본 단위로 책을 읽는 시기는 조금씩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저작이 1권만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좀 신경써서 봐야 하는 작가는 최소 2~3권 정도는 읽어야 그 사람의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최초의 전작주의 시도는 도스또옙스끼였는데 후기 장편을 읽으면서 독서의 맛을 알았다. 그 다음은 김유정, 김수영... 작가 작품목록 단위로 읽으면 단편적으로 섭렵한 정보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동 2010-01-17 11:43   좋아요 0 | URL
19세기경 영국 수상들을 배출한 '이튼'칼리지 등은 '존로크'의 교육철학을 기본으로 교육이 진행되었죠. '이튼'을 졸업한 조지오웰은 다음 코스인 옥스퍼드를 진학할 정도의 성적이 못돼 경찰을 지원합니다. 요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해병대 등을 지원하는 고교졸업생 정도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식민지(버마)의 경찰관이 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실태를 경험하게 되고, 급기야는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을 합니다. 아마 그것은 어떤 속죄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의 경찰관되어서부터 유럽의 경향에(파시즘)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듯합니다. 어쩌면 영국 교육의 효과(?)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오웰의 작품들은 <버마의 나날>의 아류일 가능성 높습니다. 우리의 일제강점기때 오웰같은 일본 경찰관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50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철도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영화 <철도원>이 생각납니다.

로쟈 2010-01-17 11:45   좋아요 0 | URL
네, <버마의 나날들>(1934)이 데뷔작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다음이군요. 연보를 보니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다음이 바로 <카탈루냐 찬가>(1938)이구요. <1984>가 마지막 작품이란 걸 새삼 확인합니다...

주니다 2010-01-17 11:40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상금도 꽤 되는군요. 책 구입에 많은 힘이 되시겠네요.^^ 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빕니다.

로쟈 2010-01-17 11:47   좋아요 0 | URL
감사. 언제 한번 뵈야 할 텐데요. 다들 바쁘신가 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13:52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

진보가 꼭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하기 주저스런 이유가 저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로쟈 2010-01-17 15:25   좋아요 0 | URL
오웰식으로 하면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죠...

승주나무 2010-01-17 13:55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오웰이 1903년생이니 100주년 아닌가 합니다. 200주년이라고 해서 깜놀했습니다^^;;

로쟈 2010-01-17 15:24   좋아요 0 | URL
오타가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오웰 전기를 읽고 느낀 건데 오웰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들 간의 살육전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회의주의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물론 그런 자세를 성찰이 깊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로쟈 2010-01-17 15:33   좋아요 0 | URL
<위건부두>는 참전 전에 쓴 거니까 이미 그런 단초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mirror 2010-01-18 04:26   좋아요 0 | URL
박노자 얘기에서 뿜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오웰은 박노자와 한겨레를 가장 비판했을 거예요. 가장 경직되고 엉뚱하며 비현실적인 소리만 해대는 관념좌파 박노자가 오웰의 이 책의 서문을 쓰다니, 오지랍도 넓습니다. 유럽좌파 지식인 운운하는 것도 한겨레 기자의 농담인 듯..

로쟈 2010-01-19 09:53   좋아요 0 | URL
'왼쪽으로'를 주장하지만, 박노자는 비교적 온건한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걸로 아는데요. 박노자를 포함하여 그 '왼쪽'이 몽땅 비판대상이라면, '좌파'가 얼마 안 남을 거 같습니다...

mirror 2010-01-20 05:45   좋아요 0 | URL
이 기사에 따르면, 오웰은 당시 영국의 좌파를 과격하다고 비판한 것은 아니지요. 지금 과격과 온건의 여부가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 박노자가 온건한 사민주의를 주장하건, 과격한 공산주의를 주장하건, 이것은 저의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세프 하임 예루살미의 <프로이트와 모세>(즐거운상상, 2009)가 출간됐을 때 모아놓고 읽어보려다가 기회를 놓친 바 있는데, 이번에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그린비, 2010)가 새로 출간됐기에 다시 되살려볼까 한다. 프로이트의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창비, 2005)가 내가 염두에 둔 책이다. <이집트인 모세>에 대해서는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0. 01. 16) 유일신교의 종교적 적대성 분석·해체 

인류는 늘 평화를 외치면서도 편을 갈라 충돌하고, 전쟁과 살육까지 벌인다. 그 갈등의 뿌리에는 종교간 분쟁이 많다. 종교간 분쟁의 핵심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유일신교들이 얽혀있다. 고대 다신교들과 달리 유일신교의 등장은 ‘구별’을 낳았다.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곧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신앙공동체간 배제와 차별·적대를 불렀다. 



독일의 저명한 인문학자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원제 MOSES THE EGYPTIAN:The Memory of Egypt in Western Monotheism)는 유일신교의 탄생과정을 추적, ‘모세 구별’(유일신교적 구별)이 서구사회에 어떻게 기억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구별·배제의 근원을 드러내는 이 작업은 곧 그 구별의 해체를 통해 구별이 낳는 적대성을 극복해내는 일이어서 의미가 크다. 종교적 적대성은 기독교·이슬람교 근본주의 간의 충돌, 이주자에 대한 차별·배제 등에서 지금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인 알라이다 아스만과 함께 문화적 기억이론으로 유명한 저자가 제시한 ‘모세구별’은 “종교에서의 진리(참 종교)와 거짓(거짓 종교) 사이의 구별”을 말한다. 출애굽을 실현한 모세는 유일신을 내세우고, 우상숭배를 금지함으로써 이집트와의, 다신교와의 구별을 지었다. 유일신교들은 “그들 밖의 다른 모든 종교들을 이방인·우상숭배로 배척”하기에 근본적으로 ‘반종교’다. 적대성을 배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종교적 적대성 극복을 위해 저자는 이집트인인지 히브리인인지 논란이 이는 “역사적 모세”가 아니라 “기억되는 인물로서의 모세”를 내세운다. 성경 속 모세·유대인 모세가 ‘모세구별’을 낳는다면, ‘이집트인 모세’는 “구별·적대가 아니라 화해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미 모세를 이집트인으로 보고, 이 책에서처럼 유일신교의 시원을 모세가 아니라 기원전 14세기 이집트왕 아나케톤으로 분석한 것은 프로이트의 마지막 논문 <그 사람 모세와 유일신교>(국내엔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로 출간)다.

저자는 “모세구별의 가장 노골적 반대자, 그 잔인한 구별을 해체하고자 한 이는 유대인 프로이트”라며 자신의 작업도 “(프로이트 이후)학계가 잊어버린 질문들을 기억하고 되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한국 지식계에 새로운 공론의 장을 만들고, 신자유주의의 분석·해체를 시도하자는 취지로 출간되는 ‘프리즘 총서’의 첫 책이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등이 뒤를 이어 나올 예정이다.(도재기 기자)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이집트인 모세-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
얀 아스만 지음, 변학수 옮김 / 그린비 / 2010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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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es the Egyptian: The Memory of Egypt in Western Monotheism (Paperback, Revised)
Jan Assmann / Harvard Univ Pr / 1998년 10월
74,820원 → 56,110원(25%할인) / 마일리지 57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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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모세- 유대교, 기독교, 반 유대주의의 정신분석
Yerushalmi, Yosef Hayim 지음, 이종인 옮김 / 즐거운상상 / 2009년 10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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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Freud's Moses: Judaism Terminable and Interminable (Paperback, Revised)
Yosef Hayim Yerushalmi / Yale Univ Pr / 1993년 7월
41,880원 → 34,340원(18%할인) / 마일리지 1,7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1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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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17 15:29   좋아요 0 | URL
역시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적 기억이 문제로군요.이름하여 만들어진 고대,만들어진 전통도 이놈의 기억이 농간을 부리는 거죠.
 

루쉰 연구자인 유세종 교수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특이하게도 만해 한용운과 루쉰을 비교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 2010)이 그것인데, 아직 알라딘에는 입고되지 않은 듯하지만 소개기사가 흥미를 끌기에 옮겨놓는다. 봄에는 일본 작가 몇 사람에 대한 강의도 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올해 중국 관련서들을 챙기기 시작한지라 루쉰에 관해서도 모아놓은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책도 리스트에 넣어두어야겠다.   

  

경향신문(10. 01. 15) '불교적 깨달음’으로 연결된 루쉰과 한용운 

“절망은 허망한 것, 희망이 그러하듯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루쉰(1881~1936)과 한용운(1879~1944)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시기뿐만 아니라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둘 다 나라를 잃고 수배와 감시의 망 안에서, 고독과 부자유,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식민지 지식인이다. 인용한 두 문구는 각각 두 사람의 대표적 작품집인 <들풀>과 <님의 침묵>에 나온다. 조국이 서구 근대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서양과 똑같은 강자가 되는 것 또한 궁극적인 해답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던 두 사람으로서 허무와 절망을 피할 길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이 허무와 절망을 극복한 방식은 지금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루쉰 문학을 전공한 유세종 한신대 교수는 최근 저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에서 두 사람 작품을 하나의 선상에 놓고 분석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아우르는 사상의 공통점을 불교적 깨달음, 즉 화엄(華嚴)의 세계관으로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보고 겪으며, 머물러 있는 듯한 자신들의 전통을 비판했고, 그래서 강자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가거나 러시아를 시작으로 세계를 돌아볼 필요를 느끼기도 했던 두 사람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이 근대가 가진 폭력성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서구적 근대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중간 지점에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작가이면서 승려였던 한용운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해도 그것은 모두 무한의 시간과 무변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진리에 처음부터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 머무름 없이 끊임없이 속세와 법계를 넘나들며 혁명을 꿈꾸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쉰은 구복(求福)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현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자기 안의 화엄적 세계관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1914년 10월4일 일기에 “오후에 <화엄경>을 다 읽다”는 구절이 나온다든지 “인간의 일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깊은 곳에 그 근본이 있다”고 쓴 <문화편지론>의 구절은 표면적인 증거일 뿐이다. 신해혁명의 실패 후 민중의 열악한 정신 수준에 절망한 그가 말한 ‘혁명의 일상성’은 ‘지금 이곳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혁명적 대응이 대안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한용운이 말한 “사람이 다 각기 그 마음을 가진 동시에 그 마음이 곧 불(佛)인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을 성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도 만난다. 그러니까 “근대가 가져온 물질문명의 각종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힘과 신자유주의의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동력, 평등과 자유를 향한 꿈꾸기, 그리고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등 지금 사람들이 처한 난제는 루쉰과 한용운을 읽음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손제민 기자) 

10.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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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10-01-16 09:43   좋아요 0 | URL
지식인들과 역사의 인물들이 꾸준히 주장했던 것은 일상속의 변화임을 역설했습니다(도산의 4대 정신을 비롯하여). 사회가 발전할 수록 개인부터가 아닌 사회적 시스템이 개인이 원하는 쪽으로 변해주었으면 하는 수동성이 있지만 지난 촛불광장처럼 개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변화(표현 등)를 이끌어 내는 분야별 리더의 스토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네, 변화는 같이 일어나야죠...

목동 2010-01-16 23:58   좋아요 0 | URL
예,,찔리네요.(저는 관리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