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어제 '뒷북성'으로 발견한 책은 왕사오광의 <민주사강>(에버리치홀딩스, 2010)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경제대국 중국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책으로 소개됐는데, 사실 저자의 민주주의 비판은 '상식'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가라타니 고진이나 지젝의 민주주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현재의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를 갱신하고 재발명하기 위해서라도 사고를 '무장'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9. 25) 서구식 민주주의가 진정 옳은 길인가 

중국,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고민한 책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을 위한 정치 체제에서 진정 옳은 길인가”라고 묻는다. 중국은 이제 서양식 민주주의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콩 중원(中文)대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공공관리학원 교수인 저자는 중국은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갖고 미국 민주주의를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원과 변화,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과 운영 등을 살펴보고, 서구 민주주의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중국은 이제 서양식 제도가 아닌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정성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로버트 레인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시장 민주주의 제도에서의 행복의 유실’에 따르면 1972∼94년 스스로 ‘대단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미국인의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민주주의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투표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저자는 “서양에서 수입해온 민주주의 모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최후에 맞이하게 될 결과는 기껏해야 남원북철(南轅北轍·마음과 행위가 모순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의 꼴”이라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제도 기초 위에다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정승욱 기자) 

 

서울신문(10. 09. 29) 대통령, 차라리 로또로 뽑는게 어때? 

정당에 대한 불신 증가, 투표율 저하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로 꼽히는 것들이다.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 여기 대담한 제안이 있다. 민주주의(Democracy) 대신 ‘대표표본주의’(Demarchy), ‘주사위주의’(Klerostocracy) 혹은 ‘로또주의’(Lottocracy)는 어떨까. 대표자를 뽑는 선거 따윈 집어치우고 국민들 가운데 임의로 선정한 대표표본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사위나 로또로 통치자를 뽑아보자는 것이다. 평소 하는 행태로 봐서는 그다지 나를 대표해주는 것 같지도 않은 후보나 정당을 고르느라 골머리 썩일 필요도 없고, 후보자 시절을 까맣게 잊은 당선자들의 행태를 보고 열 받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막가자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책 ‘민주사강’(김갑수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을 통해 왕사오광 홍콩 중문대 교수가 진지하게 내놓은 제안이다. 왕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예일대 정치학과에서 10년간 교수 생활을 한 정치학자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책 전반에 걸쳐 미국식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로버트 달 예일대 교수의 주장을 수차례 인용한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의 ‘중국 옹호+미국 때리기’ 측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근본개념을 파고 드는 급진적 문제 제기만큼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먼저, 왜 선거 대신 추첨인가. 왕 교수는 아테네 민주정은 계급제 때문에 불완전했고, 현대 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 덕분에 좀 더 완전해졌다는 상식을 뒤엎는다.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의 직접 지배(Cracy)를 뜻한다. 여기서는 ‘지배하는 자가 지배 받는다.’는 동일성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선거에 나올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근사한 학위가 있거나, 줄 잘 대서 공천 잘 따내거나, 돈이 많거나, TV에 얼굴을 자주 디밀었던 사람이 아닌 이상 출마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당선은 더 어렵다. 그러나 추첨을 하면 못난 사람, 조금 덜 배운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추첨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아테네 민주정이 더 민주적이다. 비록 노예와 여성을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제도 역시 이미 돈과 명성 등의 기준으로 수많은 예비후보자들을 탈락시킨 상태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참가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추첨제가 낫다는 주장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왕 교수는 ‘추첨은 민주정에, 선거는 귀족정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몽사상가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 교수는 그 원인을 민주정의 공포에서 찾는다. 당시 지식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머릿수가 많은 노동자·농민층이 의회를 장악해 혁명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순치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바로 오늘날 현대인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라는 게 왕 교수의 진단이다.

예컨대 미국은 영국 왕이 싫어 독립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의회에 맞설 수 있되 세습하지는 않는 왕’을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만들었고, 귀족도 없으면서 각 주(州) 간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상원을 만들고, 헌정주의란 이름 아래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위헌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했다. 한마디로 하원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따라서 왕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거세된’ 민주주의, ‘순한 양으로 길들여진’ 민주주의라 부른다. 왕 교수의 결론은 중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 말고 좀 더 노동자·농민의 이익에 걸맞은 방식의 민주주의를 찾아야 한다는 데 도달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대표표본주의, 주사위주의, 로또주의가 정말 가능할까. 반사적으로 현실성이니 전문성이니 하는 반론이 튀어 나온다. 왕 교수는 반문한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가장 엄밀해야 한다는 법원의 재판에서도 이미 이런 요소들이 배심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됐거나, 도입되고 있지 않으냐고. 시민의 상식, 그게 바로 민주주의 기반 아니더냐고.(조태성기자)  

1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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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서 분야에서 올해의 저자라면 마이클 샌델이 되겠지만, 시야를 좀 좁히면 올해는 테리 이클턴의 해도 된다. 실제로 방한하기도 했지만 '이글턴의 귀환'이라고 할 만큼 그의 책이 여러 권 출간됐기 때문이다. 대미를 장식한 것이 <이론 이후>(길, 2010)다. 번역 소식은 진즉에 알고 있었고, 원서도 오래 전에 구해놓은 터라 출간되자 마자 손에 넣었다. 사실 그의 히트작인 <문학이론입문>을 '즐독'하던 시절이 20년쯤 전이어서 이글턴은 내게 '청춘의 독서'를 상기시켜주는 저자다. 내년 강의준비도 할 겸 다시금 '즐독'에 빠져봐야겠다(원서를 어디에 두었나 찾아봐야겠다).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12. 18) 포스트모더니즘에 종언을 고함 

<이론 이후>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 테리 이글턴(1943~·사진)의 2003년 저작이다. 2003년이면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이라크를 초토화하던 시점이다. 이글턴은 “미국 정부를 장악한 극단주의자들과 반(半)광신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이런 반인륜적 광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진보운동이 주저앉은 이유 가운데 하나를 ‘이론의 무기력’에서 찾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의 통설”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다. 아무런 전망도 저항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임의 이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글턴은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했다고 선언한다. 이 책은 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경로로 서구 좌파의 대세를 장악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이 이념이 무기력 속에서 파산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글턴 특유의 생기 넘치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이론’이란 ‘문화이론’을 가리킨다. 문화이론은 1960년대의 격동 속에서 태어났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흐름을 타고 격렬해진 서구 학생운동이 문화이론의 산파 구실을 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복무하는 인문학을 격하게 거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인문학이 전면적인 자기성찰을 감행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문화이론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이란 것은 바로 인문학의 비판적 자기 성찰이다.” 문화이론의 황금기는 1965년부터 1980년 사이 15년이었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이 문화이론의 황금기를 수놓은 사람들로 이글턴은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루이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를 거명하고 또 “레이먼드 윌리엄스, 뤼스 이리가레, 피에르 부르디외, 줄리아 크리스테바, 자크 데리다, 엘렌 식수, 위르겐 하버마스, 프레드릭 제임슨, 에드워드 사이드”를 불러 세운다. 거의 전부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끈 프랑스 출신 좌파 이론가들이다.

이 빛나는 별들을 쏘아올렸던 ‘문화이론’은 1980년대에 들어와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몰락해 버렸다. 그 이론의 폐허 위에 깃발을 꽂은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이글턴은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의 대항문화가 낳은 이론들 속에서 자라났으나 결국에는 그 이론들의 건강한 비판성을 잃어버린 껍데기 이념이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로 구체적인 인물을 특정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 그리고 몇몇 급진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넌지시 지목한다.

이글턴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적 흐름은 “총체성, 보편적 가치, 거대한 역사적 담론, 인간 실존의 튼튼한 기반,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거부한다. 또 “진리·통일성·진보에 회의적이다.” 요컨대, 영원한 보편적 진리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치도, 인간 실존의 굳건한 토대도 없다고 보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어서, 거기서 진리나 보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주장들이 모두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글턴이 예로 드는 것이 규범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규범적인 것’을 ‘억압적인 것’과 동일시한다. “규범은 억압적이다.” 정말 그런가. 어떤 규범은 억압적일 수 있지만 규범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규범이 없다면 유아살해범을 처벌할 수도 없고 홀로코스트를 규탄할 수도 없다. “규범이 늘 우리를 구속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낭만적 망상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진리는 도그마다’라는 명제일 것이다. 이글턴은 이 명제야말로 우리의 행동을 옭아매는 가짜 명제라고 단언한다. 진리를 옹호하는 것은 교조주의도 아니고 광신주의도 아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악이다”라는 명제는 인종차별주의의 희생자들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니다.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서 진리는 존재한다. 그런 진리를 옹호할 수 없다면 여성이 억압받고 있다든가 기업의 탐욕이 지구 생태계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없다.

이글턴은 말한다. “초국적 기업들이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펴져나가는 동안 지식인들은 보편성이란 일종의 환상이라고 목청 높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2003년의 전 지구를 뒤덮은 네오콘 광기였다. 이런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 회의와 자기 부정에만 골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끝에 다다른 듯하다.” 이글턴은 “이론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숙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이론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론적 파산’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이론이 자본주의의 저 야심만만한 전 지구적 역사와 싸워나가야 한다면 자기만의 책임있는 원천을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문화이론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저 숨 막힐 듯한 통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제들을 탐구하라.” (고명섭 기자) 

10 12 19.  

P.S. 올해 더 나온 이글턴의 단행본 저작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오면 좋겠다 싶은 책 세 권은 아래와 같다. <악에 대하여>, <삶의 의미>, <타인을 만나는 어려움> 등이다. 처음 두 권은 비교적 얇은 책이고 '윤리학 연구'란 부제가 붙은 세번째 책은 야심작이다. <문학이론입문>의 개정판으로 <문학이론입문>(3판)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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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제 2011-01-01 2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래 세 권을 읽어보셨나요?

로쟈 2011-01-02 11:14   좋아요 0 | URL
<악에 대하여>는 아직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읽어보려는 책이고, 번역본이 나온면 좋겠다는 뜻이죠...
 

오늘자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를 거리로 삼았다. 개인적으론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샌델의 핵심적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철학'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도 덤으로 얻은 소득이다.  

한겨레(10. 12. 18)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라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특히 정치철학은 미국의 공헌이 아주 미미한 분야인데,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그 이유를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에서 찾는다. “종교전쟁, 쇠퇴하는 제국, 실패한 국가, 계급투쟁은 안정된 제도보다 더 풍부한 철학적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열거한 사항은 모두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쟁쟁한 정치철학을 배출한 유럽대륙과 관련이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정치철학이 빈곤한 것은 유럽과 달리 ‘안정된 제도’를 운영해온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을 듯싶다.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가장 앞선 정치철학을 가질 법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이어지는 추정은 깨달음을 준다. 미국 철학사상의 대표적인 명언들은 어쩌면 철학자가 아니라 공직자들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철학의 빈곤을 충분히 상쇄하는 다른 전통을 미국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보기에 미국에 정치철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대통령,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 올리버 웬들 홈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등의 법률가 내지 연방대법원판사 등의 입에서 나왔다. 예외라면 비정치인으로서 미국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 정도이다.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는 이름을 떨치게 됐지만,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의 평판은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비판한 데뷔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자주 묶이곤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의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주의가 정의의 원칙을 특정 공동체나 전통에서 찾는 걸 뜻한다면, 그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에 도덕적 가치나 선을 정의원칙의 정당화 근거로 삼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자이다.

어떤 차이인가? 예컨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연설을 하거나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지역에서 민권운동가들이 가두행진과 연설을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가지 사례 모두 지역 공동체의 일반적인 의사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셈인데, 자유주의자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지배적 가치에 따라 두 가지 시도에 모두 반대한다.

하지만 샌델은 대량학살과 혐오를 선동하는 신나치의 연설과 흑인의 민권을 얻어내려고 한 민권운동가의 연설은 그 ‘대의’에 따라 구별돼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절차적 정당성만 옹호하거나 다수결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으로 미흡하다. 물론 무엇이 대의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논의를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공공철학적 논쟁을 강화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새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뒤에 여당 원내대표는 그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이제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보자는 제안으로도 들린다. 

10. 12. 18.  

P.S. 참고로, <왜 도덕인가?>의 말미에 '가상인터뷰'라고 들어가 있는 꼭지는 '공동체주의의 한계'란 제목의 글을 옮긴 것으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2판)의 서문이다. 샌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글이다. 한편, 번역본에서는 샌델이 비판거리로 삼는 'procedural republic'을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겼는데(191, 295, 296쪽), 그게 합의된 번역어인지는 모르겠다. '형식적 민주주의'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걸고 생각되긴 하지만, 국내 학술논문에서는 '절차적 공화국', 그리고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서는 '절차적 공화정'이라고 옮겨졌다. 그리고 8장 '관행과 제도에 내제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는 원제가 'The Procedural Republic and the Unencumbered Self'로 샌델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잘 요약해주는 글이어서 요긴하다(원문은 인터넷에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   

'Unencumbered Self'는 '무연고적 자아'라고 옮기는데,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정의론>에서 그가 내세우는 원초적 입장이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의 첫번째 강연인 '자유주의와 무연고적 자아'를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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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니체 이후에 '목적론'을 정치철학에 다시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되면 샌델의 이론은 '위장된 신학' 아닙니까? 전 샌델 책 읽으면서 그를 B급 철학자라고 분류하였습니다.

로쟈 2010-12-19 09:5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왜 도덕인가> 후반부는 꽤 설득력이 있는데요. 나름대로 반론을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2010-12-1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0-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참 묘한 나라입니다.
그들이 얻는 혜택의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카라는 분단된 묘한 지역적 구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가피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나라...

로쟈 2010-12-19 09:58   좋아요 0 | URL
'미국들'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 얼굴을 가진 나라이기도 한 듯해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길, 2010)이 출간됐다. <존재와 사건>, <세계의 논리> 등의 주저는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 <사도 바울>(새물결, 2008) 등을 더하면 바디우 철학의 윤곽은 잡아볼 수 있겠다. 해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참고로, 바디우의 사랑론을 라캉의 정신분석과 비교한 글로는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의 '철학과 정신분석'이 <라깡, 사유의 모험>(마티, 2010)에 수록돼 있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존재와 사건 1
알랭 바디우 지음, 김재민 옮김 / 새물결 / 2010년 1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11년 01월 01일에 저장
절판

사랑 예찬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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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위한 선언
알랭 바디우 지음, 서용순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12월 14일에 저장

비미학
알랭 바디우 지음, 장태순 옮김 / 이학사 / 2010년 1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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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1-01-03 20:19   좋아요 0 | URL
존재와 사건이 나왔네여...

근데 사랑예찬은 제가 읽으면 열불날 것 같은데여.
염장 of 염장...

로쟈 2011-01-04 19:57   좋아요 0 | URL
주문했는데, 일시품절로 뜨네요...
 

위키리크스의 외교문서 '폭로'에 대한  미 정부의 압박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설립자 어산지는 영국에서 성폭행 런던의 독방에 갇혀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더불어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식도). 위키리크스라는 '국적없는 언론'의 힘을 거꾸로 보여주는 사례 같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작성한 외교문서들도 공개된 문서 리스트에 포함돼 있어서 향후 어떤 '폭발'이 가능할지 예단할 수 없다. 세계언론사의 한 획을 긋는 게 아닌가 싶다. 위키리스크의 활동을 지지하는 칼럼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12. 11) [시론]위키리크스 사태와 언론의 자유 

지난 11월 말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수집한 외국 정부와 국제기구, 그리고 국제 주요 인사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담은 미국 국무부의 외교전문 25만건을 폭로해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국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은 연일 위키리크스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면서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를 1917년에 제정된 간첩법(Espionage Act)을 적용해 처벌할 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서버 제공업체 서비스 중단
그뿐만 아니라 그동안 위키리크스에 인터넷 서버를 제공해 왔던 아마존닷컴이 서버 제공을 중단하고, 스위스의 포스트 파이낸스 은행이 어산지의 은행계좌를 차단했다. 또 그동안 위키리크스와 아무 문제없이 거래를 해왔던 마스터 카드와 비자카드 그리고 온라인 결제업체인 페이팔(PayPal) 등이 위키리크스 지지자들의 기부금 결제를 중단하는 등 위키리크스에 대한 압력이 전방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이러한 압력의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위키리크스의 이번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공공의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지지하는 언론사와 국가 비밀 누설로 국가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비난하는 언론사로 양분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언론인 폭스뉴스(Fox News)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국의 외교활동에 큰 상처를 입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떨어뜨려 미국의 역할을 약화시켰다며 맹비난했다. 반면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미국 정부의 외교 목표들과 성공·타협·좌절 등을 그 어떤 자료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어 이번 폭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며 위키리크스의 폭로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처럼 위키리크스의 외교 전문 폭로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된 가운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국가 안보와 국제사회에서 국가 위상의 중요성을 내세워 정부 기관이 행하는 언론 자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 효과(Chilling Effect)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번 외교 전문 폭로로 위키리크스는 그동안 인터넷 서버를 이용해 왔던 회사로부터 서비스 중단 통보를 받았고, 거래를 맺어왔던 은행과 기업들과도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이번에 위키리크스와 관계를 청산한 업체들은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나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관계 청산에는 어떤 형태로든 정부 기관의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고, 이는 전형적인 권력기관의 언론에 대한 간접적인 위협효과 중 하나다.

언론에 대한 명백한 탄압행위
많은 언론사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앞으로 언론매체의 인터넷 의존도가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번 위키리크스의 사태처럼 인터넷 서버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외부 압력에 의해 서비스를 갑자기 중단할 경우 언론사가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인터넷상에서 언론의 자유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탄압 행위다.

지난 1971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내부 고발자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sberg)’의 제보를 바탕으로 베트남전 1급 비밀문서인 일명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폭로한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대해 정부기관의 비리나 비행을 폭로한 행위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키리크스가 이번에 폭로한 내용도 미국 외교관들이 비정상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수집한 비밀정보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최진봉 텍사스주립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한겨레(10. 12. 13) [김선주 칼럼] 국적없는 언론, 위키리크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이 2010년 10대 뉴스의 두 번째로 꼽은 것은 위키리크스의 ‘거침없는 폭로’이다. 폭로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우면 위키리크스는 꿈의 언론이다. 2007년 폭로전문 사이트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위키리크스는 2008년엔 이코노미스트가 주는 뉴미디어상을 받았고, 2009년엔 국제앰네스티로부터 미디어상을 수상했다. 위키리크스는 새로운 미디어임이 분명하고 국적 없는 세계언론이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등 세계 유수의 언론은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건을 받아서 2차적으로 가공해 보도하고 있을 따름이다.

모든 저널리스트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닌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거기에 의거해서 보도하고 비판하고 논평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기사가 어떤 단체가 필요에 따라 공개한 정보에 의해서만 쓰여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라는 엄청난 의구심에 자주 휩싸인다. 돈과 권력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나 빅브러더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앉아서 기자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나 아닌지 항상 뒤꼭지와 발밑이 불안하고 써늘하다.

위키리크스가 아니면 교황이 추기경 시절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왜 반대하였는지,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무엇 때문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생체정보가 필요했는지, 미국 군인들이 아파치 헬기에서 어떻게 바그다드의 행인을 조준사격하면서 낄낄거렸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언 어산지는 지금 성폭행 혐의로 런던의 감옥에 갇혀 있다. ‘세계 외교가의 9·11 사태’를 가져온 미국의 극비 문서 25만건 공개 뒤 인터폴은 세계 188개국에 어산지를 수배했다. 그가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특정한 집단을 파괴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세계의 빅브러더만 겨냥하고 있고 그 폭로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구명을 위해 그가 어떤 권력과도 어떤 거래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또 그러리라 믿는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이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정의와 자유, 선과 진실, 인류 보편의 가치가 유린당하면 남의 일이라도 자신의 일로 간주하고 간섭하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이고 언론인 또한 이 범주에 속한다. 저널리즘의 역사는 정보나 사실을 감추는 특정 기관이나 단체와 싸워 정보를 찾아내 공개한 역사이고 그로 인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어산지의 주장은 옳다. 폭로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는 비판은 옳지 않다.

부당한 정보수집을 해 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집단이 자국 국민이나 세계 여론을 향해 정당성과 필요성을 입증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국가가 미친 짓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나라의 국민들을 배척하지 않을 세계인의 양식이 필요할 뿐이다.

‘국경없는 의사회’나 ‘국경없는 기자들’처럼 국경없는 언론이 필요해진 세상이다.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인류 역사상 국가는 결코 도덕적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글로벌한 세상에서는 그래서 국적없는 언론이, 글로벌한 세계인의 양식, 혹은 집단지성의 도덕적인 힘이 개입해야만 한다. 무한경쟁의 세계시장경제체제 속에서는 글로벌한 기준이란 강자에게는 달콤하지만 약자에겐 횡액일 뿐이다. 어떤 나라든 어떤 빅브러더이든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짓을 했을 때 그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더라도 사후에 압박하고 세계 혹은 해당 국가의 여론에 의해 더 좋은, 더 겸손하고 더 이상적인 정부로 갈 수 있도록 압박은 해야 한다. 위키리크스가 해놓은 국적없는 언론의 폭로는 그래서 가치가 있고 옹호되어야 한다

10. 12. 13.  

P.S. 위키리크스라는 한 가지 '대안' 이전 언론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나? '미디어 카르텔'과 '거짓말'이 판치고, '여론조작'으로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을 속이는 현실이었다. 반전을 위한 '폭로'의 행진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최시중 방통위원장과 방통위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실명비퍈으로 눈길을 끄는 <미디어 카르텔>(마티, 2010)에 대한 리류기사는 http://news.nate.com/view/20101213n226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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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3 15:16   좋아요 0 | URL
어샌지를 살해해야 한다던 새라 페일린이라는 cerebrum이 empty하신 nyun이 미국의 최고 스타덤에 있는 정치인이라지요? 그리고 그런 스타덤에 오른 큰 비결이 바로 그런 무뇌아적 발언들 덕분이고요...

로쟈 2010-12-14 16:05   좋아요 0 | URL
미국의 '힘'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12-16 17:32   좋아요 0 | URL
푸틴이 어샌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더군요.글쎄...푸틴이 언론자유를 논하다니 참 이상합니다.

로쟈 2010-12-16 23:42   좋아요 0 | URL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던 미국식 민주주의는 뭐가 다르냐는 거겠죠. 어샌지를 비판한다면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