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존재감’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어제 '뒷북성'으로 발견한 책은 왕사오광의 <민주사강>(에버리치홀딩스, 2010)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판한 책으로 경제대국 중국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책으로 소개됐는데, 사실 저자의 민주주의 비판은 '상식'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가라타니 고진이나 지젝의 민주주의 비판도 맥락을 같이한다). 민주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현재의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를 갱신하고 재발명하기 위해서라도 사고를 '무장'할 필요가 있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9. 25) 서구식 민주주의가 진정 옳은 길인가 

중국, 중국인의 눈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고민한 책이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을 위한 정치 체제에서 진정 옳은 길인가”라고 묻는다. 중국은 이제 서양식 민주주의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거부하고, 중국식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홍콩 중원(中文)대 교수, 중국 칭화(淸華)대 공공관리학원 교수인 저자는 중국은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갖고 미국 민주주의를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원과 변화, 현대 민주주의의 발생과 운영 등을 살펴보고, 서구 민주주의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중국은 이제 서양식 제도가 아닌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공정성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로버트 레인 예일대 명예교수의 저서 ‘시장 민주주의 제도에서의 행복의 유실’에 따르면 1972∼94년 스스로 ‘대단히 행복하다’고 느끼는 미국인의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민주주의가 반드시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근간 중 하나인 투표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저자는 “서양에서 수입해온 민주주의 모델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최후에 맞이하게 될 결과는 기껏해야 남원북철(南轅北轍·마음과 행위가 모순되는 상황을 비유한 말)의 꼴”이라면서 “중국은 사회주의 제도 기초 위에다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출발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여야 하며 폭넓게 참여하는 민주주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정승욱 기자) 

 

서울신문(10. 09. 29) 대통령, 차라리 로또로 뽑는게 어때? 

정당에 대한 불신 증가, 투표율 저하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로 꼽히는 것들이다.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 여기 대담한 제안이 있다. 민주주의(Democracy) 대신 ‘대표표본주의’(Demarchy), ‘주사위주의’(Klerostocracy) 혹은 ‘로또주의’(Lottocracy)는 어떨까. 대표자를 뽑는 선거 따윈 집어치우고 국민들 가운데 임의로 선정한 대표표본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주사위나 로또로 통치자를 뽑아보자는 것이다. 평소 하는 행태로 봐서는 그다지 나를 대표해주는 것 같지도 않은 후보나 정당을 고르느라 골머리 썩일 필요도 없고, 후보자 시절을 까맣게 잊은 당선자들의 행태를 보고 열 받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막가자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책 ‘민주사강’(김갑수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을 통해 왕사오광 홍콩 중문대 교수가 진지하게 내놓은 제안이다. 왕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예일대 정치학과에서 10년간 교수 생활을 한 정치학자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책 전반에 걸쳐 미국식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로버트 달 예일대 교수의 주장을 수차례 인용한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의 ‘중국 옹호+미국 때리기’ 측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민주주의 근본개념을 파고 드는 급진적 문제 제기만큼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먼저, 왜 선거 대신 추첨인가. 왕 교수는 아테네 민주정은 계급제 때문에 불완전했고, 현대 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 덕분에 좀 더 완전해졌다는 상식을 뒤엎는다.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의 직접 지배(Cracy)를 뜻한다. 여기서는 ‘지배하는 자가 지배 받는다.’는 동일성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나 선거에 나올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근사한 학위가 있거나, 줄 잘 대서 공천 잘 따내거나, 돈이 많거나, TV에 얼굴을 자주 디밀었던 사람이 아닌 이상 출마 자체도 어려울뿐더러 당선은 더 어렵다. 그러나 추첨을 하면 못난 사람, 조금 덜 배운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가 돌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추첨으로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아테네 민주정이 더 민주적이다. 비록 노예와 여성을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제도 역시 이미 돈과 명성 등의 기준으로 수많은 예비후보자들을 탈락시킨 상태에서 치러지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참가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추첨제가 낫다는 주장이다.

한발 더 나아가 왕 교수는 ‘추첨은 민주정에, 선거는 귀족정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몽사상가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 교수는 그 원인을 민주정의 공포에서 찾는다. 당시 지식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머릿수가 많은 노동자·농민층이 의회를 장악해 혁명적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정치참여 욕구를 적당히 받아들이면서 순치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바로 오늘날 현대인이 소중히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간접’ 민주주의, ‘헌정’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다원’ 민주주의라는 게 왕 교수의 진단이다.

예컨대 미국은 영국 왕이 싫어 독립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의회에 맞설 수 있되 세습하지는 않는 왕’을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만들었고, 귀족도 없으면서 각 주(州) 간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상원을 만들고, 헌정주의란 이름 아래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위헌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사법부에 부여했다. 한마디로 하원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따라서 왕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를 ‘거세된’ 민주주의, ‘순한 양으로 길들여진’ 민주주의라 부른다. 왕 교수의 결론은 중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미국식 민주주의 말고 좀 더 노동자·농민의 이익에 걸맞은 방식의 민주주의를 찾아야 한다는 데 도달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대표표본주의, 주사위주의, 로또주의가 정말 가능할까. 반사적으로 현실성이니 전문성이니 하는 반론이 튀어 나온다. 왕 교수는 반문한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가장 엄밀해야 한다는 법원의 재판에서도 이미 이런 요소들이 배심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됐거나, 도입되고 있지 않으냐고. 시민의 상식, 그게 바로 민주주의 기반 아니더냐고.(조태성기자)  

10.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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