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를 거리로 삼았다. 개인적으론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더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샌델의 핵심적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철학'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도 덤으로 얻은 소득이다.  

한겨레(10. 12. 18)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라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이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특히 정치철학은 미국의 공헌이 아주 미미한 분야인데,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그 이유를 미국 민주주의의 성공에서 찾는다. “종교전쟁, 쇠퇴하는 제국, 실패한 국가, 계급투쟁은 안정된 제도보다 더 풍부한 철학적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열거한 사항은 모두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쟁쟁한 정치철학을 배출한 유럽대륙과 관련이 있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정치철학이 빈곤한 것은 유럽과 달리 ‘안정된 제도’를 운영해온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을 듯싶다.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가장 앞선 정치철학을 가질 법한 나라는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샌델의 이어지는 추정은 깨달음을 준다. 미국 철학사상의 대표적인 명언들은 어쩌면 철학자가 아니라 공직자들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철학의 빈곤을 충분히 상쇄하는 다른 전통을 미국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이 보기에 미국에 정치철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매디슨,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대통령,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 올리버 웬들 홈스, 루이스 브랜다이스 등의 법률가 내지 연방대법원판사 등의 입에서 나왔다. 예외라면 비정치인으로서 미국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 정도이다.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는 이름을 떨치게 됐지만,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의 평판은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이론을 비판한 데뷔작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에서 비롯됐다. 덕분에 그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자주 묶이곤 한다. 하지만 샌델은 공동체주의의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주의가 정의의 원칙을 특정 공동체나 전통에서 찾는 걸 뜻한다면, 그는 자신이 공동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에 도덕적 가치나 선을 정의원칙의 정당화 근거로 삼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하는 목적론적 정의론자이다.

어떤 차이인가? 예컨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연설을 하거나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지역에서 민권운동가들이 가두행진과 연설을 할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 두 가지 사례 모두 지역 공동체의 일반적인 의사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셈인데, 자유주의자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연설 내용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본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자는 공동체의 지배적 가치에 따라 두 가지 시도에 모두 반대한다.

하지만 샌델은 대량학살과 혐오를 선동하는 신나치의 연설과 흑인의 민권을 얻어내려고 한 민권운동가의 연설은 그 ‘대의’에 따라 구별돼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절차적 정당성만 옹호하거나 다수결주의만을 고집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으로 미흡하다. 물론 무엇이 대의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적 논의를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대의에 대한 공공철학적 논쟁을 강화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새해 예산안을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뒤에 여당 원내대표는 그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이제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따져보자는 제안으로도 들린다. 

10. 12. 18.  

P.S. 참고로, <왜 도덕인가?>의 말미에 '가상인터뷰'라고 들어가 있는 꼭지는 '공동체주의의 한계'란 제목의 글을 옮긴 것으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2판)의 서문이다. 샌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글이다. 한편, 번역본에서는 샌델이 비판거리로 삼는 'procedural republic'을 '절차적 민주주의'라고 옮겼는데(191, 295, 296쪽), 그게 합의된 번역어인지는 모르겠다. '형식적 민주주의'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걸고 생각되긴 하지만, 국내 학술논문에서는 '절차적 공화국', 그리고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서는 '절차적 공화정'이라고 옮겨졌다. 그리고 8장 '관행과 제도에 내제된 정치철학은 무엇인가'는 원제가 'The Procedural Republic and the Unencumbered Self'로 샌델의 정치철학적 입장을 잘 요약해주는 글이어서 요긴하다(원문은 인터넷에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   

'Unencumbered Self'는 '무연고적 자아'라고 옮기는데, 롤스의 자유주의 정치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정의론>에서 그가 내세우는 원초적 입장이 '무연고적 자아'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의 첫번째 강연인 '자유주의와 무연고적 자아'를 더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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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니체 이후에 '목적론'을 정치철학에 다시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렇게 되면 샌델의 이론은 '위장된 신학' 아닙니까? 전 샌델 책 읽으면서 그를 B급 철학자라고 분류하였습니다.

로쟈 2010-12-19 09:54   좋아요 0 | URL
글쎄요, <왜 도덕인가> 후반부는 꽤 설득력이 있는데요. 나름대로 반론을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2010-12-1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8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9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0-12-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참 묘한 나라입니다.
그들이 얻는 혜택의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카라는 분단된 묘한 지역적 구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불가피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나라...

로쟈 2010-12-19 09:58   좋아요 0 | URL
'미국들'이란 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두 얼굴을 가진 나라이기도 한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