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문학신간 중 관심도서는 돈 드릴로의 <마오 Ⅱ>(창비, 2011)이다(처음엔 <마오 1>이 어딨는지 찾았다!). 중국 관련서를 몇 권 읽어야 할지도 모르는 터여서 내겐 적절한 타이밍에 출간된 책이기도 하다. 드릴로의 책은 <화이트 노이즈>(창비, 2005)만 구해놓고 아직 손대지 못하던 참인데, 시작은 <마오 Ⅱ>부터 해야겠다...

 

한국일보(11. 01. 08)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문학의 위상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74)는 동년배 작가인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미국 포스트모던소설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소비자본주의, 미디어와 이미지, 문학과 예술의 위상, 테러 등 현대 미국 사회를 다각도로 탐구해 온 지성파 작가인 그가 1991년 발표한 장편소설 <마오 Ⅱ>는 이듬해 펜/포크너 상을 받으며 그의 문학적 명성을 굳힌 작품이다.

89년의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레바논 베이루트를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해 이란의 종교ㆍ정치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폄훼했다며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사망했고, 레바논에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이 절정을 맞아 테러가 난무했다. 이런 격동기를 배경으로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던 유명 소설가 빌 그레이가 베이루트에 인질로 억류된 스위스 시인을 구출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과정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이 소설은 그러나 서사 구조가 상당히 복잡하고, 그 의미 또한 상징적, 은유적이다. 주인공 빌을 비롯, 그에게 초상사진 촬영을 의뢰받는 사진작가 브리타, 치밀한 전략으로 빌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비서 스콧, 런던에서 베이루트 테러 단체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죠지 등은 저마다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적 지점들을 대변한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작가 드릴로는 특히 세계적 규모의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문학의 무기력과 왜소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데 공을 들인다. 빌의 비극적 죽음은 곧 문학의 죽음으로 읽힌다. 뉴욕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20년 넘게 세 번째 소설의 문구를 다듬는 자폐적 삶을 살던 빌은 브리타와의 만남에서 자극을 받고 내처 런던으로 건너가 납치된 시인의 구명에 나선다. 그러나 그를 덮친 것은 기자회견장에서의 폭탄 테러와 불의의 교통사고. 중상을 입은 그는 시인 대신 인질이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레바논행 배를 탔다가 그곳에서 죽고, 종내 신분을 증명할 소지품마저 도난당한다.

그러나 스콧은 빌의 실종을 되레 그의 상품가치를 높일 호기로 여긴다. 상업주의에 포섭돼 독자적 가치를 잃어버린 문학에 대한 드릴로의 강도 높은 냉소로 읽힌다. 나아가 그는 호메이니의 장례 인파, 양키스타디움의 통일교 합동결혼식, 마오쩌둥(毛澤東)의 5,000만 홍위병 등을 강렬한 스냅사진처럼 작품 곳곳에 삽입, 테러리즘 시대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종교적ㆍ정치적 집단주의를 인상적으로 폭로한다. "미래는 군중들의 것이다"(30쪽)라는 문장이 묵시록의 한 대목처럼 읽힌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방점을 찍을 대목은 무력할지언정 문학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빌의 고투일 듯싶다.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 이름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243쪽) (이훈성기자) 

11. 01. 08.  

P.S. 기사의 서두에 토머스 핀천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국내에는 작품보다 연구서가 더 많이 나와 있는 듯싶은 그의 대표작 <중력의 무지개>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묵직한 분량으로 나올, 올해 가장 기대가 되는 타이틀 가운데 하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고세운닥나무 2011-01-08 15:18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민음사에서 번역된 <브이를 찾아서>까지 세면 핀천의 소설이 2권 번역돼 있죠. 일본에선 핀천의 전집도 간행중이라고 하던데요.
<중력의 무지개> 기대되네요.

로쟈 2011-01-08 15:41   좋아요 0 | URL
네, <브이>도 세계문학전집으로 곧 다시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획회의(28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작년에 쓴 마지막 리뷰가 지면에는 새해 첫 리뷰로 실렸다. 20대 블로거 박가분의 '블룩'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거리로 삼았다. 예상보다 독자의 반응이 없는 책인데(언론리뷰도 거의 뜨지 않았다), 분석이야 저자나 출판사의 몫이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올해도 단독 저서와 공저들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조만간 주목받게 되리라고 본다.  

기획회의(11. 01. 05)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꿈꾸는 혁명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을 위한 인문학!’ 뒷표지에 박힌 문구다. 두 가지가 강조돼 있다. 저자가 ‘20대 젊은 블로거’라는 사실과 그가 ‘혁명을 위한 인문학’을 제안한다는 점. 그리고 의도와는 좀 다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제안은 ‘20대 젊은 블로거의 혁명’까지도 아우르는 듯싶다. 2006년에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고 하니 저자는 아직 새파랗다. 그때부터 4년간 블로거 활동을 하며 올린 글들을 책으로 갈무리한 결과라고 하니 얼핏 ‘치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책은 저자가 제때 대학에 들어간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정치한 문제의식과 탄탄한 내공을 뽐낸다. “입발린 소리를 잘 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문학에 미래를 향한 새로운 상상력이 잠재해 있다고들 말하지만 나와 같은 20대에게 인문학의 미래는 ‘저임금 시간강사’이다.”라는 현실 고백이 엄살로 들릴 정도다.   

블로그 활동(혹은 블록질)이 일상화된 시대인 만큼 ‘20대 블로거’야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인문학 오타쿠’(인덕후)라고도 지칭되는 블로거는 많지 않다(알고 보니 나도 그런 별칭으로 불린다). 언젠가 네이버 블로그 ‘붉은서재’를 알게 됐고, 주인장 ‘박가분’의 활동에 주목하게 됐다. 그가 20대이고 (당시에) 군복무 중이란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보다 더 이후였던 듯싶은데 박가분은 내가 활동하던 다음 카페 ‘비평고원’에도 자주 출몰하여 글을 올리곤 했다. 개인적으론 그를 한 계간지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다. 생각보다 왜소한 체구에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었는데(그래도 사병보다는 장교 스타일의 머리였다), 말년 휴가를 나왔다고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에도 한두 번인가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책이 언제쯤 나오느냐고 물었고 그는 조만간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박가분 본색’이라고 할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이다.  

책은 ‘인문독서 후기’ ‘문화비평’ ‘인문적 사유’ ‘시사비평’ 네 부로 구성돼 있는데, 실상은 전체가 인문독서 ‘후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란 ‘읽어내기’이고 현재의 정세와 삶 속에서 그 실천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자가 독서에서 비평과 사유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면서도 자연스런 경로라는 말이다. 서문에 적고 있지만, 전체 26편의 글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도 않고, 논조 자체도 시종일관 차분하고 공평무사한 시선과 멀다.” 그것은 “나름대로 인문학을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방식으로 읽어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과 관심사가 드러나는 대목인데, 인문학 전공이 아니고 전문적인 인문학 연구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가 인문학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 ‘정치성’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적인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여전히 인문적 사유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사상적으로 ‘예고’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내가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 특히 정치철학에 경도된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경도’는 개인사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세대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블로그 출판의 사례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예로 들면서 이들과 차별화된 지점을 “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서 찾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경험의 세대성이다. 그는 소위 ‘인문학 대중화’의 수혜를 입은 세대에 속한다. 이건 40대 독자로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흥미로운데, 저자의 고백은 이렇다.  

“내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할 당시에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푸코, 들뢰즈에 관한 유행이 여전히 한창이었고, 유학길에 올랐던 젊은 연구자들이 돌아와 속속들이 현대 철학분야의 최신 번역서들을 내놓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알라딘의 서재꾼 로쟈의 도움도 매우 컸다.”  

‘서재꾼 로쟈’도 거명돼 멋쩍긴 하지만, 20대 시절의 내게는 그런 ‘가이드’가 없었던 걸 고려하면 분명 다른 환경이다. 실제로 저자의 ‘인문독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최신 번역서들’을 통해서 접한 현대 철학자들이다. 푸코와 들뢰즈 등을 비롯하여 가라타니 고진을 경유한 칸트와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자크 라캉, 자크 랑시에르, 그리고 발터 벤야민 등이 주요 탐독 대상이자 정치적 이론과 입장을 창출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흔히 386세대(지금은 486세대)가 사회과학서적에 몰입하던 세대였다면 2000년대 대학생 세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저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 서클 내부의 학회들만큼 최신 인문철학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의 논리구성 자체가 사회적으로 ‘사상적 힘’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지적을 빼놓지 않지만, 그럼에도 특정 인문학 저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그 안에서 가능한 주체적 자율성에 관한 희망을 담지하는 한에서”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나마 그런 힘을 가졌다.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모색이 ‘그 일부 학생들’에 속하는 저자의 화두이다. 그가 ‘88만원 세대’ 문제나 ‘김예슬 대자보’ 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래서 모든 유형의 ‘탈정치화’ 전략과 세태에 비판적이다. 가령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통해 ‘88만원세대 새판짜기’를 시도한 우석훈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젊은이들의 탈정치화 현상을 부추기는 공범”이라는 혐의를 제기하며, “결국은 세대모순조차도 수많은 자본주의적 모순의 상이한 측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통치전략 안에서 생성된, 혹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안에서 강제되는 ‘개인성’과 과감하게 작별할 것을 요구한다. 같은 세대 20대에게 던지는 저자의 강령적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20대에게서 가능한 정치적․저항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 외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외부의 권력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20대 자신의 책임을 호명하는 고유한 방법과 수단들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기성세대의 경제적․정치적 재생산 구조에서 젊은이들이 ‘자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으로부터의 독립, 학교로부터의 독립, 나아가 관료사회와 대기업 노동시장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  

그가 복학 이후 정치철학 세미나를 주도하면서 좌파 대학생들 간의 생활공동체, ‘공동생활전선’을 꾸리고 있는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혁명가이고자 한다.  

11. 01. 08.   

P.S. 작년초에 나왔던 인터뷰집 <요새 젊은 것들>(자리, 2010)에는 박가분과의 인터뷰도 포함돼 있다. 아울러 그가 '박원익'이라는 본명으로 낸 공저로는 <아바타 인문학>(자음과모음, 2010)이 있다. 그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prologue/PrologueList.nhn?blogId=paxwonik 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11-01-0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너무 없네요^^어부지리로 일등 놀이! 저도 박가분님 블로그에 가끔 들렀던 독자여서요.

로쟈 2011-01-10 12:51   좋아요 0 | URL
상품이 없어서 죄송한데요.^^

jobonzwa 2011-01-1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가분 동지와 함께 공동생활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동생활전선 공식카페로 퍼가겠습니다^^

로쟈 2011-01-11 22:09   좋아요 0 | URL
네, 얼마든지요.^^
 

제도권 바깥의 연구공간이나 지식공동체, 하면 떠올리기 쉬운 건 '수유+너머'이지만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곳이 조금 더 있는 걸로 안다.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도 그런 경우인데, 자세하게 소개해주는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특히 올해의 세미나 주제인  ‘자본·미국·한국 지식인’의 성과가 빨리 묶여서 나오길 기대해본다.

한겨레(11. 01. 07) ‘진보적 지식’ 나누는 제도 밖 연구 공간

“인도 웨스트벵골주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20년째 장기 집권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개입한 공산당 대학살 이전, 전성기 때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에 주목하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이 과연 우리나라엔 얼마나 될까요?”

많은 지식인들이 대학, 연구소, 국가기관 등 이른바 공식적인 ‘지식의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제도를 벗어나 ‘대안적인 지식 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지식인들 역시 자본이나 미디어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느냐는 항상 체제의 요구에 따라가기 마련이다. 체제는 또 전문 지식인에게 권력을 주는 방식으로 지식 생산의 위계적 질서를 끊임없이 재생산해낸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독립적인 연구 공간을 표방하는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seumnet.com)은 이러한 지식 생산의 체제를 거부하는 곳이다.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커짐에 따라 그동안 대중이 모여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아카데미나 연구 공동체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설립 취지와 운영 방식을 볼 때 새움만큼 급진적인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4일 서울 합정동 새움 세미나실에서 만난 새움 회원 한형식(43), 유승민(34)씨는 인터뷰 내내 “우리는 각각 한 명의 회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신들의 말이 마치 새움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우려한 탓이다. 새움에는 대표나 상근자, 실무자 등이 따로 없다. 또 회원에 대한 자격조건도 따로 없다. “전문적 지식인에서부터 일반 대중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으며, 오직 참여와 공감만이 회원이 되는 최소한의 자격조건”이라고 한다. 강좌와 세미나 등 모든 활동은 무료로 이뤄지며, 오직 회원들의 자발적인 분담 노력만으로 재정을 충당한다. 세미나실 청소나 도서 정리, 문단속 등 모든 크고 작은 일들도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진다. 새움의 유일한 의사결정 기구는 한 달에 한 번,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운영위원회뿐이다.

새움이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해 온 한형식씨는 “대안적인 지식을 만들어내려면, 대안적인 삶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존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권력과 자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대안적인 지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새움의 시초는 8~9년 전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만들었던 정치철학 세미나라고 한다. 그 뒤 유승민씨와 같은 정치경제학 전공자들이 합류하면서 공부의 영역이 확장됐고, 점차 지금과 같은 틀이 만들어졌다. 새움이라는 이름을 단 지는 올해로 5년째라고 한다.

자발적인 회비로 굴러가는 곳에서 안정된 생활의 근거를 찾기란 불가능할 터. 그동안 새움을 거쳐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학과 같은 제도 안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학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꾸준히 새움을 찾아온다고 한다. 유승민씨는 “고등학생 자녀를 둔 중년의 여성 회원이 꾸준히 ‘<자본론> 강독’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며 “(새움의 운영이)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으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강좌·세미나에 참여하는 인원은 70~80여명. 지난해에는 ‘새움총서’ 시리즈의 첫 책으로 한형식씨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정체성 때문이겠지만, 새움에서 이뤄지는 세미나 주제들은 대부분 제도권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다. ‘아시아 저항운동’, ‘라틴아메리카 사상’ 등의 주제가 눈에 띈다. 한씨는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하자’는 것이 우리의 모토”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 첫번째고, 학계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서구 담론이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발전해나간 마르크스주의를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이 두번째다. 국가와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권 학계가 주목하지 않는 지점이 되레 새로운 대안의 싹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씨는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짚기 위해서는, 서구의 주류 담론을 붙들고 있지 말고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맥락에 처했던 지역에서 일어났던 움직임들을 포착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움의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주제는 올해 처음 시작하는 ‘자본·미국·한국 지식인’ 세미나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지식이 생산되고 유포되는 과정에서 어떤 계획과 제도들, 그리고 정치경제적 힘이 작용했는가”를 문제의식으로 삼고 있다. 곧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가 형성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다. 한씨와 유씨는 “지식에 대한 권위를 물려받아온 제도권 학계에선 절대 손댈 수 없는 주제”라며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연구의 결과들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엔 새움의 역량이 아직 미비한 것이 아닐지? 독립적 연구 공간으로서 이제 미약하나마 자리를 다졌다고 보는 새움 회원들은, 앞으로 다른 단체 및 개별 연구자들과의 연계와 협력을 통해 콘텐츠를 더욱 확대해나갈 계획을 짜고 있다. 비록 새움에 직접 참여하진 않더라도, “지식은 조건 없이 나눠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할 연구자들은 없을 것이란 기대다.(최원형 기자) 

11. 01. 07.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rk6 2011-01-07 19:57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 좋은 정보가...

감사합니다~ㅎㅎ

로쟈 2011-01-08 09:17   좋아요 0 | URL
흠, 새로운 정보는 아닌데요.^^;

롯데명품위즐 2011-01-07 21:05   좋아요 0 | URL
1. 10 (월) 19:00에 <맑스주의 역사> 강좌가 있습니다.
1. 13 (목) 19:00에 <맑스 경제학 입문> 강좌가 있습니다.
맑스 엥겔스 저작 읽기 세미나는 2. 7 (월)에 있고요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 세미나는 1. 11 (화) 19:00 입니다.
<자본, 미국, 한국 지식인> 세미나는 1. 13 (목) 19:00 시작입니다.
seumnet.com입니다.
그냥 참고하시라고요;;;

로쟈 2011-01-08 09:18   좋아요 0 | URL
네, 홈피에 일정이 나오더군요.^^

자꾸때리다 2011-01-07 23:52   좋아요 0 | URL
여기에 노홍철 형님 노성철 님도 활동하시던데...

로쟈 2011-01-08 09:18   좋아요 0 | URL
자꾸때리다님도?^^

자꾸때리다 2011-01-08 20:08   좋아요 0 | URL
아뇨 그냥 몇 번 가보기만 했어요.

starover 2011-01-13 09:00   좋아요 0 | URL
그린비 오픈캐스트를 통해 들어가셨는데...... 혹시 이 서재랑 그린비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로쟈 2011-01-13 10:15   좋아요 0 | URL
관련은 없고, 그린비에서 링크를 해놓은가 보네요...
 

지난 12월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 전집의 하나로 <문학의 공간>(그린비, 2010)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철학자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낭시의 책은 12월 30일이 발행일자다. 2010년의 '마지막 책'이 아닐까. 책을 손에 든 건 엊그제이고 예전에 구해놓은 영역본도 어제 책장에서 찾았다. 다른 독서계획이 잔뜩 밀려 있어서 언제 차근차근 읽어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짝'은 맞춘 듯해서 흡족하다.  

  

'짝'이라고 한 건 블랑쇼와 낭시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를 보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두 권 모두 역자는 박준상 교수다.  

   

블랑쇼 연구서로 <바깥에서>(인간사랑, 2006)를 이미 펴냈고, 예술론이자 타자론으로 <빈 중심>(그린비, 2008), 그리고 블랑쇼 전집 번역으로 <기다림 망각>(그린비, 2009)을 펴냈다. 앞으론 블랑쇼란 이름과 함께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될 '전문가'이다.   

국내에는 <문학의 공간>(책세상, 1990), <미래의 책>(세계사, 1993) 등으로 처음 소개가 됐지만(그의 소설 일부가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돼 나온 건 있다), 블랑쇼란 이름을 접한 건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에서였다. 그가 중요하게 다룬 20세기 후반의 비평가 네 사람이 사르트르와 바르트, 바슐라르, 그리고 블랑쇼였기 때문이다. 내게 각인된 블랑쇼의 키워드는 '죽음' '부재' '침묵' 등이다(푸코는 '바깥'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또 조교시절 일로, 대학원에 진학하려다 그만둔 한 후배가 가장 좋아하는 비평가가 누구냐는 나의 질문에 '블랑쇼'라고 답해서 놀란 적이 있다(그는 다소 침울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 후배 또한 블랑쇼란 이름이 연상시켜주는 이가 됐다. 그리고 세번째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다.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제목을 들뢰즈 표현에서 따왔다고 하셨는데, 비평을 보면 이 외에도 철학자, 평론가들의 차용이 많이 나오거든요. 사유의 돌파구가 된 사람은 누구였나요?

"마음 속에 항상 들어있는 사람은 두 명이에요. 벤야민과 모리스 블랑쇼. 두 사람이 쓴 책은 20대 때 읽기 시작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도 첫 구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때, 왼손에는 벤야민, 오른 손에는 블랑쇼를 들어요.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긴 합니다만, 동세대 중에는 들뢰즈 보다 바르트에 더 손이 가고요."   

하지만 아직 나는 '나의 블랑쇼'를 갖고 있지 않다. <문학의 공간>을 예전에 숙독해보지 않아서이다. 나는 그가 좀 비의적이고, 너무 은둔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정치평론 1953-1993>(그린비, 2009)은 그러한 인상을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해서 <정치평론>을 경유하여 <문학의 공간>으로 재진입하는 게 올 상반기 독서계획 가운데 하나다. 문학을 '다시' 읽는 계기나 영감 같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모리스 블랑쇼에 다가가기...  

11. 01. 0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1-07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7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1-07 13:58   좋아요 0 | URL
사진 속 인물이 블랑쇼인가요? 워낙 은둔의 삶을 산데다 책에 자신의 사진을 싣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미남형이네요. 생전에 유일하게 너나들이한 친구가 레비나스였다죠? 이래저래 독특한 사람이네요^^

로쟈 2011-01-08 09: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도 국내에선 알게 모르게 매니아 독자들이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공통점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1>(인물과사상사, 2010)을 펼쳤더니 '왜 '통섭 미국사'가 필요한가?'란 문제제기가 머리말이다. 마침 이 머리말을 중심으로 '강준만식 미국사'의 의의를 짚어준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여하튼 다작의 생산성과 수집광적 면모, 사회적 문제의식과 글쓰기의 열정은 다시금 놀랍고도 놀랍다.  

한겨레(11. 01. 01) 종횡무진 경계초월…‘강준만식 미국사’ 

3월 중순에 나온 제1권 ‘신대륙 이주와 독립전쟁’으로 시작한 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이 약 10개월 만인 12월 말에 제17권 ‘오바마의 미국’을 끝으로 마침내 완간됐다. 18권짜리 <한국 현대사 산책>과 10권짜리 <한국 근대사 산책>에 이은 이 17권짜리 미국사 ‘산책’ 또한 강 교수다운, 그리고 어쩌면 강 교수만이 해낼 수 있는 대중적 역사 쓰기의 새 경지를 보여준다. 그의 역사책은 우선 읽기 편하고 재미있다. 강준만의 ‘산책’에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대개의 나라 안팎 역사 서술들이 일반인들에겐 지겹고 따분한 ‘그들(전문연구자들)만의 놀이’처럼 돼 있는 현실에선 더욱 그러하다.

강 교수는 이번 산책을 시작할 때 머리말 ‘왜 통섭 미국사가 필요한가?’에서 몇가지 중요하고도 인상적인 서술원칙을 밝혔다. 우선 세분화된 자신들의 영역만을 파고드는 전문연구자들의 ‘좁고 깊게 파기’를 지양하겠다고 했다. 그런 ‘학술적 글쓰기’가 연구실적 올리기에 좋고 또 학계 인정도 받는 길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통합적인 역사인식이라는 역사연구와 서술의 애초 목적 자체를 훼손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역사란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낳는 데 기여해왔다. 강 교수는 친미냐 반미냐, (한국사의 경우) 자학이냐 자위냐식 이분법적 역사이해의 편식이나 폐단도 그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왜 모든 분야와 주제들을 ‘비빔밥’처럼 요리해 통합적으로 자세히 보여주는 시도가 이렇듯 외면받아야 한단 말인가?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 문화, 언론, 영화, 방송, 학술, 과학, 기술, 문학, 언어 등 모든 분야가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게 아닌가? …어느 한 분야에만 집착할 경우 포괄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놓치게 되고 그로 인해 긍정과 부정의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되는 건 아닌가?”  

이게 강 교수의 문제의식이고 ‘산책’ 기술 기본원칙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 교수에게 중요한 또 하나의 역사기술 원칙은 파편적으로 파고만 들 게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상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지금 한국 사회의 이해가 어딘가 크게 잘못돼 있고, 그걸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닿아 있다.

문제는 그게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냐는 것일 터. 그 능력이 바로 강준만 역사쓰기의 비결이요 요체다. 미국 조지아대, 위스콘신대에서 미국언론사·대중문화사·커뮤니케이션사를 공부한 강 교수는 굉장한 수집가다. 국내외 전문서적, 신문, 방송 보도, 잡지, 논문 등 그가 인용하는 방대한 자료들을 보면 사료를 찾는 그의 안테나와 채집망이 얼마나 강력하고 광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기성 연구나 보도자료들을 적절히 채집하고 활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적당히 나열하는 차원을 넘어서려면 수집력 못지않게 그것을 선별해내고 재조립·재해석하는 선구안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건 또 엄청난 독서력과 판단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공을 넘나드는 서술방식이다. 예컨대 제1권의 경우,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기원전 역사부터 시작에서 곧바로 15세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갔다가 다시 ‘콜럼버스는 과연 영웅인가, 약탈자인가’에 관한 21세기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과 종교개혁 등 콜럼버스와 그의 후예들을 아메리카로 밀어낸 유럽 사정을 파고들었다가 포카혼타스 신화 등 아메리카 원주민 사정, 그리고 노예무역과 인디언 사냥, 독립전쟁, 유럽의 죄수유배지가 된 호주 원주민의 비극 등으로 확장해간다. 오바마 정권의 등장과 향후 전망을 축으로 최근의 위키리크스 파장과 ‘구글-위키피디아-아이폰’ 정치학까지 다루는 마지막 제17권은 ‘왜 미국은 제2의 한국인가?’라는 짧지 않은 맺음말을 따로 붙였다.

애초 강 교수는 이 책을 ‘미국사를 중심으로 한 세계사’로 꾸밀 작정이었고, 한국인을 위한 미국사 산책이니만큼 특히 한-미 관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장면들과 겹치는 이 책의 미국사 부분은 좀더 온전한 한국현대사 이해에도 유용하다. 강 교수는 한국과 미국이 닮은 점으로 압축성장, 평등주의, 물질주의, 각개약진, 승자독식 등을 꼽고, 한국의 반미주의와 사대주의의 정체에 대해서도 파고든다. 그는 여기서도 친미냐 반미냐, 사대주의냐 아니냐 식의 이분법적 시각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섣불리 이론화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진 않는다. 그가 말하는 ‘통섭’은 친미-반미뿐만 아니라 좌-우, 진보-보수 등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겠다는 게 대원칙이다. 편식하지 않도록 다양한 재료로 적절히 요리해서 내놓을 테니 최종판단은 독자가 하라는 것이다. 물론 사관이 없을 수 없다. 그 방대한 자료들을 가려내고 재배열할 때의 선구안 그 자체에 이미 강준만의 역사관·세계관이 작용하고 있다. 그게 이 책에 의미를 채워주는 또 하나의 기둥이다.(한승동 선임기자) 

11. 01. 07.  

P.S. 하워드 진의 '미국사' 외에 어떤 책들이 더 나와 있나 찾아봤더니 앨런 브링쿨리의 3권짜리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휴머니스트)가 가장 두툼한 분량으로 보인다. 강준만식 '비빔밥' 미국사가 갖는 희소성을 한번 더 말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