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은 '여름의 책꽂이'가 특집이다. 분기별 서평코너인데(계졀별이군), 인문사회과학쪽 추천위원을 맡고 있어서 이 분야의 서평을 쓰게 됐다. 중복추천을 받은 책이 없어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를 골랐다. 지난해 '정의'에 이어서 올해는 '분노'가 사회적 화두가 됨직하다는 생각에서다. 서평은 지면에 나간 대로 고쳐놓았다(약간 어색한 대목도 있다). 

  

시사IN(11. 07. 02) 늙은 투사가 노래하는 '폭력적 희망'

인문서로서 2010년 최고의 화제작은 100만부가 넘게 팔려나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덕분에 ‘정의사회’ 같은 관제적 구호, 혹은 ‘사법정의’ 같은 전문가 용어에서나 구경하던 ‘정의’를 한국사회의 언중은 되찾아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토론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이 낳을 수 있는 효과로선 충분하지 않았을까.   

기대를 모은 건 ‘정의 이후’였는데, 독자들의 선택은 정의에 대한 사회 관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처지를 돌보는 쪽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보이는 젊은 세대의 호응은 공적인 관심과 사적인 고민 사이에 놓인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던지는 조언과 위무의 수신자이고자 했다. 사적인 고민에만 매몰된다고 부정적으로만 볼일은 아니다. ‘홀로 선’ 청춘들이 공감의 공동체로 묶일 수 있는 가능성도 주어지는 것이니까. 그 공감이란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 ‘사회적 고통’이기도 하다는 인식까지는 한 걸음이다. ‘반값 등록금 투쟁’은 우리시대 ‘사회적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이다. 그것은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다. 대졸자가 80%를 넘어가는 사회에서 등록금 투쟁은 곧 사회 전체의 투쟁이다. 단순히 ‘반값’의 쟁취가 핵심인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사느냐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이냐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이러한 고민과 투쟁에 힘을 보태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로 읽힌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넘게 팔린 이 소책자에서 1917년생 레지스탕스 투사는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과거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세상에서 비켜났다고 비판한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며, 노동이 창출한 부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이 스테판 에셀 같은 이들이 기획한 사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없었다.” 그의 판단에 이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사회’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할밖에……”라고 말하는 것은 최악의 태도라고 에셀은 질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다. 자연스런 분노이면서 동시에 자각적인 분노.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가 바로 분노였다고 말하면서 에셀은 그 정신을 되살릴 것을 젊은 세대에게 호소한다.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 한국어 번역판은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총대’라고 할 만하다. 사실 분노의 용도라면 사르코지의 프랑스보다 훨씬 더 많은 게 우리의 자랑 아닌 자랑 아닌가.    

2차 대전 이후에는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한 에셀은 분노를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론 격분을 경계한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이며 그 격분의 한 표출방식이 테러리즘이다. 그가 테러리즘 같은 폭력적인 수단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폭력적인 투쟁과 평화적인 봉기를 권유한다. 그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폭력은 희망의 폭력, 혹은 폭력적인 희망이다.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빌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93세의 노투사가 희망을 노래한다면 우리에게도 절망은 없다. 

11. 06. 28.  

P.S. 아폴리네르의 시구는 번역본을 따른 것인데, 문맥을 살려 “희망은 어찌 이리 폭력적인가!”라고 해도 좋았겠다(이 시구는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것으로 번역본 시집 <알코올>에서는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라고 옮겨졌다). 한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책을 언급하니까 자연스레 '저항'을 주제로 한 책들도 떠오른다. 레지스탕스 총서로 나온 <호모 레지스탕스>(해피스토리, 2011)와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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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노와 기쁨과 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7-04 23:39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 2011)에 대한 지난번 리뷰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대목을 마저 적었다.경향신문(11. 07. 05) [문화와 세상]분노의 기쁨‘분노하라’는 메시지로 프랑스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의 올해 나이는 94세다. 1917년생인 그가 지난해 가을에 펴낸 <분노하라>는 30여쪽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페크pek0501 2011-06-28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신문 보니깐 그 책을 샀다는 사람은 많은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드물다고 하던데, 전 이 책을 끝까지 정독했어요. 그것도 밑줄 그어가면서... 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ㅋ 다른 책 세 권쯤을 읽은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할까요.

제가 이 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세상엔 인간이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 또는 상황들이 있다는 거예요. 문제의 답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 제시가 훌륭했어요. 이 책에 해법은 나와 있지 않지만, 최고의 결정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또는 나 자신이 늘 옳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에요.

로쟈 2011-06-29 20:41   좋아요 0 | URL
일단 독파하신 데 의의가 있습니다.^^

2011-06-2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9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11-06-2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가장 경계한 것은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성임 최근에 느겼는데요.

로쟈 2011-06-29 20:43   좋아요 0 | URL
자유주의 철학자들이 '잔혹성'이라고 부르죠...

seti83 2011-06-30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했습니다. 분노하고 있어요~!

로쟈 2011-07-01 21:33   좋아요 0 | URL
책을 낸 보람이 있네요.^^;
 

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2011)을 서가에 꽂아둔 지는 꽤 됐는데, 아직 책을 펼쳐보진 못하고 있다. 지난주 교수신문에 편역자인 박동천 교수가 책의 의의를 짚어주는 기사를 실었기에 옮겨놓는다. 편역자 해제에도 적혀 있지만, 책은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이란 단행본과 <원시사회의 이해>라는 논문을 같이 묶은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발상(The Idea of a Social Science)>은 1958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며 1990년에 2판이 나왔다고 한다(2판에 붙이는 머리말 정도가 더 붙었을 뿐이라고). 편역자도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의 철학>(서광사, 1985), <사회과학의 이념>(현대미학사, 1997)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번역된 바 있기에 이번이 세번째 번역서이다(나는 현대미학사판도 갖고 있다). '철학에서 이념으로, 그리고 이념에서 다시 발상으로'가 번역서명의 변천사이다. 피터 윈치의 사회학을 해설/옹호하는 책의 제목이 <사회과학 같은 건 없다>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교수신문(11. 06. 15) 사회연구,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까

피터 윈치의 짧은 책, 『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 담겨있는 성찰들은 심오한 만큼 대단히 넓은 방면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함의를 가진다. 윈치는 이어 발표한 논문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다시 사회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과 관련해서 과학이라는 탐구 방법이 가지는 의미의 한계를 분명하게 구획했다. 이 두 작품을 모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고, 나는 거기에 『사회과학의 빈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윈치가 말하는 주요 논지 중에 하나는, 실재라는 것이 언어의 바깥에 언어와 무관하게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분이 언어 안에서 이뤄진다는 논증이다.  “습도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은 언어를 상상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길이 전혀 없는 언어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242쪽).” 이 때문에 실재/비실재의 구분은 언어에 의존하는 관습적 구분이 아니라 언어 바깥에서 저절로 존재하는 구분인 것 같은 착각이 쉽게 발생한다.

사회 연구에서도 과학적 탐구 방법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무제한적 발상의 바탕에는 이처럼 ‘객관적 실재’라는 개념의 논리적 지위를 분별해내지 못한 착각이 작용한다. 이는 과학이 무엇인지, 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과학과 철학이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등을 분명하게 식별해내지 못한 혼동의 소산이다. 이러한 혼동과 착각을 윈치는 베버, 파레토, 밀, 에반스-프리차드 등등, 일급 지식인들의 강점을 최대한 인정한 위에서 착오가 일어나는 지점만을 추려내는 세밀한 언표에 실어 부각하고 비판한다.

사회연구와 자연과학의 차이를 윈치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 나라가 전쟁 중이라고 할 때, “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의 행태 안에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다. 하지만 중력이라는 개념은 낙하 중의 사과가 보이는 행태에 그와 같이 본질적으로 소속돼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과의 행태에 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 소속된다(217쪽).”설령 사과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과의 행태에 관한 물리학자의 설명에서 사과의 생각은 적실성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자연과학이 목표로 삼는 설명에서 정당하게 사용돼야할 개념들은 연구 대상과 단지 외부적인 관계만을 가진다. 이와는 달리,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싸우는지가 본질적인 요소로서 고려에 포함돼야 한다. 군인과 정치인과 후방 민간인들의 행태에 관한 통계적 일반화로써 이해가 완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중국어의 단어 각각이 나타나 쓰이는 지점에 관한 통계적 확률을 간파(201쪽)”하는 것으로써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완결됐다고 치부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연구 도중에 제기되는 매우 중요한 이론적 문제 가운데 많은 수가 과학에 속하기보다는 철학에 속한 문제이고, 따라서 경험적 탐사에 의해서보다 개념적 분석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는 종류(73쪽)”임을 윈치가 지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회 연구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행동 및 제도와 관습을 이해하는 데 있다. 물론 도중에 과학적 탐구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실상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 연구에서 과학적 탐구 방법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낳는다. 왜냐하면 사회 연구와 관련되는 수많은 주제들 가운데 과학적 방법이 유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분별은 전형적으로 과학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회과학의 빈곤』에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윈치의 입장만이 아니라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그의 입장도 함께 들어 있다. “인간의 정신이 실재와 어떤 종류라도 접촉을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이고, 나아가 만약 가질 수 있다면 그 점으로 인해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런지가 또한 문제인 것(62쪽)”이라고 한 버넷의 지적을 윈치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하나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냥 놓아둔다(185쪽)”라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표 또한 그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사람들의 정신, 즉 개념은 실재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접촉하지 못하기도 한다. 각 개인이 가진 생각이 실재와 접촉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아가 접촉한다면 어떻게 접촉하며 못한다면 어떻게 못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또한 달라진다. 이때 철학의 역할은 어떤 정신이 어떤 실재와 어떻게 접촉하는지 또는 어떻게 접촉하지 못하는지를 분별하고, 또 그러한 접촉 여부와 양태에 따라 당사자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데서 그친다. 실재와 접촉하지 못하는 개념은 폐기하라든지, 어떤 식으로 접촉하는 편이 다른 식으로 접촉하는 편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등의 권고는 철학에 속하는 사항이 아니다. 어떤 방식의 삶이 더 좋은지에 관한 판단이나 선택은 각 개인이 실제 생활에서 내리고 스스로 인생을 통해서 결과에 책임질 사항으로 철학자도 물론 생활인으로서 그러한 결정에 일상적으로 봉착하게 되지만, 철학의 일환으로서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실증주의 사회과학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타자화의 문제라든지, 지식이 권력과 유착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고발, 그리고 문화적 상대성과 같은 논제들은 오늘날 한국의 지성계에서도 새로운 화두는 아니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이해」에서 윈치가 비판의 과녁으로 삼은 에반스-프리차드 역시 문화적 상대성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인정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막스 베버 역시 단순한 실증주의의 신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연구에서 행위자들의 주관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를 선구적으로 강조했던 인물임에도 과학에 관한 착각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해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에서 윈치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윈치의 세심한 비판은 동시에 그들의 자취에 대한 깊은 존경의 표현임을 모든 독자가 알아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이 바른 길을 가려고 의지했고 또한 실제로 바른 길을 향해 여러 발걸음을 떼었다는 업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 뗀 걸음을 비판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지적 주장의 가치를 곧 비판할 만한 가치에서 구하는 자세 역시 윈치가 철학을 이해한 방식에서 본질적인 구성 요소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에서 과학의 유용성이 어디까지 인정돼야 하는가, 그리고 철학의 정당한 역할은 무엇인가에 관해 윈치가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지식 공동체에서 동료에 대한 비판과 경의가 어떤 식으로 표명되는 것이 지적 탐구의 본령과 어울리는지에 관해 행간과 문체를 통해 대변되는 그의 입장까지도 한국 지식인 사회의 현재에 대해 풍성한 함축을 지닌다고 나는 믿는다.(박동천_전북대 정치외교과)   

11.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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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주말에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문학평론가(이자 가라타니 고진 번역자)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도서출판b, 2011)이다. 개인적으론 보론으로 실린 '세계문학전집의 구조'의 학회 발표 때 토론을 맡은 인연이 있다. 더 보태자면, '문학들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강의를 위해 백낙청의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2011)과 같이 읽어보려고 한 책이기도 하다. 몇권 더 얹어서 문학과 세계문학에 대한 생각거리를 만들어놓는다. 저자가 번역중인 가라타니 고진의 신작 <세계사의 구조>에 대한 기대도 덧붙이면서, 리뷰기사도 옮겨놓는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11. 06. 25) 한국문학에 대한 비판… 설득력은 '글쎄'

한국문학은 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 했을까. 대개의 대답은 '훌륭한 작품은 많지만 지원과 관심 부족으로 번역이 제대로 안 된 탓'이다. 한 걸음 더 나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해 세계 수준을 만족시킬 만한 작품이 없었다'는 자기비판적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여기서 더 비딱하게 나간 답변은 이렇다. '한국에는 근대문학 자체가 없었다.' 이 과격한 주장을 펴는 이는 소장 문학평론가 조영일(38·사진)씨다. 제도적 문단의 바깥에서 '비평고원'이란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며 문단 주류를 거침없이 비판해온 그는 올해 초 소설가 김영하씨와의 논쟁으로 대중적 인지도까지 얻었다. 네티즌들에겐 그의 인터넷 필명인 '소조'가 더 익숙할 터다. 

앞서 <한국문학과 그 적들> 등 한국문학을 비판하는 두 권의 비평집을 통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잘 쓴 통속소설'이라거나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노년의 자아도취적 넋두리다' 등 일급의 작가들을 대놓고 비판했던 그가 2년 만에 낸 새 비평집 <세계문학의 구조>에서는 한국문학이 부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진단한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애초에 국민문학의 토양인 국민 공통의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식된 문학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 근대문학이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매체였다는,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리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특히 조씨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사례를 열거하며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통의 경험이 다름아닌 '제국주의적 전쟁'이었고, 이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로선 제대로 된 근대문학이 나올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가 겨냥하는 것은 '한국문학을 세계화하자'거나 '민족문학을 발전시켜 세계문학에 기여하자'는 식의 한국문학 응원가들이다. 대개가 출판상업주의적 구호거나 한국문학 권력자들의 공허한 담론이라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을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조씨는 근대국가와 공생관계인 근대문학을 지양하는 세계문학을 추구하자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과격한 그 주장의 설득력은 둘째치고 그가 파괴하려는 것이 제도권 문학을 넘어 문학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은 떨떠름한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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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의 구조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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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그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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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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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지도에 별로 관심을 가진 바 없어서 지도의 역사에도 둔감한 편이다(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지리 대신 세계사를 고른 탓인지도 모른다. 지리와 역사가 상호배제적이라니!). 그래서 올해가 대동여지도 15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도 몰랐다. 게리 레드야드의 <한국 고지도의 역사>(소나무, 2011)의 출간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저자의 학덕과 열정이 느껴지는 책이다. 해외 한국학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한국 고지도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도 내세울 만한 학술적 업적이 있는 것인지?). 박범신의 소설 <고산자>(문학동네, 2009)에까지 관심이 생겼다...

  

서울신문(11. 06. 25) “콜럼버스 ‘강리도’ 가졌다면 동쪽으로 항해 떠났을 것”

올해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지난 4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특별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시작했고 전국 곳곳에서 잇따라 전시, 강연행사를 가진 뒤 오는 10월 20~21일 서울대에서 종합학술대회를 연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기념학술사업준비위원회’가 마련한 150주년 기념행사의 결정판이다. 성대하면서도 꼼꼼히 김정호를 기념하고, 그의 손길이 깃든 성과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 보는 자리다.

‘조선 후기까지 조정에 제대로 된 지도가 한 장도 없어 김정호는 10년 동안 조선팔도를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8번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무지한 조정은 나라의 기밀을 적들에게 알려줬다며 김정호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워 죽음에 이르게 하고 지도와 판목은 압수해 불살랐다.’

이제껏 ‘청구도’, ‘대동여지도’ 등을 만든 김정호에 대한 보통의 인식이었다. 시대와 불화한 삶 속에 관련 문헌의 부족, 게다가 비극적 최후까지 더해졌다니 ‘전설’ 또는 ‘영웅’이 될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춘 셈이다. 하지만 이는 1934년 일제 총독부가 만든 ‘조선어독본’에 실린 내용이 해방 이후 교과서에까지 이어지며 빚어진 오해와 편견이다.

일제는 김정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조차 없는 것으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며 왜곡하는 식민사관을 주입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학계 일각에서 ‘김정호 바로세우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이뤄져 온 인식의 벽은 여전히 두껍다.

최근 번역 출간된 ‘한국 고지도의 역사’(장상훈 옮김, 소나무 펴냄)가 반가운 이유다. 한국역사학의 권위자인 게리 레드야드(79)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석좌명예교수가 쓴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한국 지도학의 발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 세계 지도학계에 알린 노작(勞作)이다. 레드야드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을 ‘김정호의 열렬한 팬’이라고 소개하며 ‘김정호 이전의 성과’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지난 22~23일 두 차례에 걸쳐 레드야드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사 전문가인 그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지만 “고령으로 귀가 어두워 전화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며 양해를 구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한국사와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이글이글했다. 



→한국사 전문인데 지도학에 관심을 두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저는 사실 평생에 걸쳐 한국사를 연구해왔고 한국의 지도학은 역사의 한 부분으로 공부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1990년 위스콘신대 지리학부로부터 한국의 지도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습니다. 바로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해당되는 원고였죠. 애초 60쪽 정도로 예상했으나 정리하다 보니 300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 편집위 또한 한국 고지도의 중요성을 흔쾌히 인정했습니다.

→‘세계 지도학 통사’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세 권을 펴낸, 전 세계와 고금을 아우르는 세계 지도학의 종합연구서 시리즈입니다. ‘한국 고지도의 역사’는 제2권의 아시아 동남아시아편에 수록돼 있습니다. 모두 8권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적어도 20년 더 걸려야 마칠 수 있는 현재진행형 작업이죠. 애초 위스콘신대에서 편집기획을 시작한 영국 출신 지리학자인 J B 할리 교수와 데이비드 우드워드 교수는 이미 돌아가셨고 새로운 편집기획위원을 선정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디지털 과학기술의 발달도 반영할 생각입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서관이 이 책을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김정호 팬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지도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부터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가 중요한 연결 고리였군요. 그런데 왜 대동여지도의 팬이 되신 겁니까.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세계의 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대동여지도와 같이 구체적인 성취에 대한 것은 잘 모르죠. 제가 ‘세계 지도학 통사’ 원고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그는 이것을 ‘동아시아 최초의 진정한 세계지도’라고 일컬었다-에도 관심이 남다릅니다. 아시아편 표지 사진으로 ‘강리도’를 실은 이유이지요. 아마 콜럼버스가 1492년 이 지도를 갖고 있었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항해를 떠났을 겁니다. 세계사도 많이 바뀌었을 테고요. 



→한국의 옛 지도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지.

-글을 쓰는 데만 2년 반이 걸렸습니다. 한국의 많은 저작은 물론 일본, 중국, 유럽 학자들의 이론도 충분히 검토하고 종합했어요. 그 과정에서 김정호나 대동여지도 외에도 한국 지도학에 많은 성취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너무 대동여지도에만 관심을 쏟으며 다른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앞서서 노력한 이들, 예컨대 양성지(梁誠之·1415~1482), 정척(鄭陟), 정상기(鄭尙驥·1678~1752) 등에 대해 좀 더 주목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날마다 한국 뉴스를 챙겨 본다.”는 레드야드 교수는 “김정호와 같은 천재를 둔 한국인 여러분에게 축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정겹게 말했다. 대동여지도 150주년 행사에 대해서도 축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국내판은 흑백 도판을 쓴 원서와 달리 컬러 도판으로 바꿨다. 번역을 맡은 장상훈 박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다.(박록삼기자) 

11. 06. 25.  

P.S. '06. 25'란 날짜를 적고 보니 한국전쟁에 관한 책도 언급해둔다. 러시아와 중국, 미국, 3개국의 학자가 쓴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일조각, 2011)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다. 원제는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1993)이다.   

다소 오래된 책이긴 한데, 부제대로 소련과 중국, 스탈린과 마오의 '미덥잖은' 파트너관계를 조명한 책이다. 자세한 리뷰는 '6.25전쟁 관련저서'를 특집으로 다룬 <해외 한국학평론2>(일조각, 2001)에 수록된 이완범 교수의 서평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김학준의 <한국전쟁>(박영사, 2010)에서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중국쪽 시각에서 본 한국전쟁 관련서도 몇 권 나와 있다. 하지만 스탈린과의 관계는 <흔들리는 동맹>이 가장 자세히 다룬 듯싶다. 책의 집필 자체를 러시아의 외교관이자 중국문제 전문가 세르게이 곤차로프가 주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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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11-06-25 17:12   좋아요 0 | URL
빗소리 들으며 로자님의 글을 읽으니 좋네요. 이제 산에서도 들에서도 잠시 로자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로쟈 2011-06-26 12:23   좋아요 0 | URL
스마트폰을 쓰시나 보군요.^^
 
대청제국과 사고전서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 <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 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 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에서 한 장서가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책을 사모으느라 가산을 탕진한 집이었다) 이런 책들을 미리 읽었다면 느낌이 조금 달랐을 듯싶다.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세계일보(11. 06. 18) 100년 전 중국의 서재를 엿보다

‘서림청화’는 청나라 말기 판본학·목록학의 대가 섭덕휘(葉德輝·1864~1927)의 저술로, 책 자체를 다룬 저작으로는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듣는 중국 서지학의 고전이다. 고서의 판본에 사용되는 각종 용어와 명칭을 정리하고 그 근원을 추적했으며, 또한 역대 출판기관과 그곳에서 출판한 서적들을 시대별로 개괄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판본학, 목록학 분야의 고전이 된 ‘서림청화’는 이후 등장한 수많은 저술에서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중국 고서의 판본과 고대 중국의 출판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당한 저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옮긴이의 생각이다.

저자 섭덕휘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했고 장서에 취미가 있었다. 섭덕휘가 수집한 고서 중에는 송·원대의 판본도 있었지만, 명·청 이래의 정각본(精刻本)·정교본(精校本)·초인본(初印本) 및 초교본 등이 핵심이었다. 특히 청대 장서가들의 장서가 포함된 별집(別集)은 당대에 독보적이었는데, 이는 섭덕휘 장서만의 특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시대 고문헌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옮긴이 박철상씨가 ‘서림청화’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중국의 출판문화와 중국 고서에 대한 이해야말로 조선시대 우리 출판문화 이해의 첩경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물의 저본(底本)이었다. 조선시대 출판 방식의 하나는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입하여 활자나 목판으로 재간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출판은 정보의 수입과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추진되었고, 간행된 서적도 상당수에 이른다. 중국 고서가 조선의 출판과 장서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조선과 중국 출판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상업출판의 성행 여부에 있었다. 안정적인 수요층을 전제로 하는 상업출판은 광범위한 서적의 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책이 다양해진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빈약한 경제력과 주자학 위주의 사상적 흐름, 일부 계층에 한정된 서적 수요는 관판(官版) 중심의 출판 시스템을 유지하게 했고, 본격적인 상업출판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이때 중국본의 수입은 조선 출판문화의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출판되지 않은 서적들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또한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의 공백을 보충해 주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출판 시스템이 붕괴되었던 시기에는 그 역할이 더욱 컸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문화적 파괴가 자행된 시기였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중요한 전적(典籍)의 상당수가 멸실되었고, 출판의 핵심이었던 동활자와 고려조부터 전해오던 왕실도서들이 약탈당하거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출판을 하려고 해도 그 저본마저 구하기 어려운 출판 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멸실된 전적들을 정비하기 위해 국내에 흩어져 있던 서적들을 수집하는 한편, 사행을 통해 명나라로부터 수입을 추진했다. 중국본의 수입은 빠른 시일 안에 부족한 서적을 보충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들의 장서구조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문학과 사상에까지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중국본을 대량으로 수장한 새로운 형태의 장서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후 정조가 등극하면서 출판과 장서문화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정조가 청나라 문물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을 대량으로 수입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본을 직접 수입해 지적 갈증을 채워나갔고, 청나라 문사들과 교유를 넓히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이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에 넘쳐나게 되었다.(조정진기자) 

11.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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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덕끄덕 2011-06-27 03:05   좋아요 0 | URL
葉을 '섭'이라고 읽는 오류를 박철상씨도 범하고 있군요. 분명히 '葉'의 중국어 발음은 '엽'(ye, 중국음으로는 '예')과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 두 가지입니다. '셔'(She)의 중국어 표기법이 대문자인 이유는 저 발음이 고유명사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지명인 경우와, 고대인의 성씨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문만 공부한 사람들은 저 음을 무조건 '섭'이라고 읽습니다. 물론 이는 잘못이고요. 이런 오류는 중국 고대문헌에 '葉'자가 고유명사로 나온 경우, '섭'으로 발음한다는 주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도 저 글자가 성씨나 지명으로 읽을 때 '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달린 주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특히 명청시대에 들어와서는 성씨의 경우도 저 음을 '예'(ye)라고 발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청대부터도 '葉'을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이라고 발음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떤 중국사람도 葉을 섭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없고요. 따라서 우리는 엽덕휘도 근대인이니, 당연히 섭덕휘가 아닌 엽덕휘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중국어로 저 인물을 언급할 때 '셔더후이'(She Dehui)가 아니라 '예더후이'(Ye Dehui)라고 발음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덕택에 유명해진 중국의 권법가 '엽문'(葉問)이라든가, 대만출신의 유명한 영화배우 엽천문(葉蒨文)을 영화계에서는 모두 '엽'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경우가 타당해 보입니다.
사소한 문제이겠지만, 국내 한학계 상당수의 학자들이 습관적으로 葉氏를 무조건 섭씨라고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지적해봤습니다.^^

로쟈 2011-06-27 10: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중국어는 너무 어려운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