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위 소집훈련이 있는 날인지라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지난번에 빠졌기 때문에 '보충1차'였다). 민방위도 벌써 8년차인데, 언제 소집 해제되는 것인지?(물론 편한 소리이긴 하다. 예비군때만 해도 총자루를 어깨에 매고 어슬렁 거리며 '터널 경비'도 하곤 했으니.) 여하튼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시작한 하루였고, 그래서인지 버스-전철-버스 출근길에서 마지막 버스는 자리에 앉아서 타고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출근길에 집어든 '한국일보'를 대중문화면 정도는 다 읽어볼 수 있었다. '세 편의 영화'는 아침에 읽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각기 다른 소개 기사이다.  

먼저. 박선영 기자가 쓴 영화 <스위트룸> 소개는 '그날 밤, 추악한 욕망의 공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스위트룸은 공간의 폐쇄성과 화려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인간 욕망의 극단을 실험하기에 썩 괜찮은 장소다. 1950년대 미국 연예계를 배경으로 화려한 쇼비즈니스 세계의 허구와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까발리는 영화 <스위트룸>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손아귀에 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조명하는 ‘인간 욕망의 보고서’다. 미국 연예계 최고의 스타 콤비인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의 화려한 이면에는 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생활이 숨겨져 있다. 제멋대로인 악동 래니와 젠틀한 매너의 빈스가 약물과 성에 탐닉하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동안 매니저 루벤(데이빗 헤이먼)은 이들의 모든 뒤처리를 전담한다.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소아마비 기금 생방송’ 전날,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웨이트리스 모린(레이첼 블랜챗)을 불러 환각의 섹스파티를 벌이지만, 다음날 방송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들을 기다리는 건 모린의 전라 시체. 래니와 빈스의 알리바이가 뚜렷해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결별을 하고, 20년 뒤 이들의 열혈 팬이었던 작가 카렌(알리슨 로만)이 그 사건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접근하면서 감춰졌던 진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 영화 <일급살인>, <‘미스틱 리버> 등을 통해 미국적인 자유분방함을 선보여온 케빈 베이컨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에서 영국 신사의 전형을 보여준 콜린 퍼스가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약물중독과 동성애, 양성애 등의 파격을 연기하는 모습이 다소 낯설다. 원제는 ‘Where the truth lies’(2005)로 <엑조티카>를 만든 캐나다 출신 아톰 에고이안(아래 사진)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 '스위트룸'의 제목이나 줄거리는 그다지 눈길은 끄는 게 아닌데, 감독 '아톰 에고이안'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의 <엑조티카> 등도 보았지만, 아마도 동시대 캐나다 감독들 중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감독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칸느영화제 등의 단골이기도 하다). 그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하니까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는 평을 보면, 기대는 우려에 가까운 듯하지만.  

두번째 기사는 라제기 기자가 쓴 '씨네 다이어리'로 '외설 무서워 영화 못보나'란 타이틀이고 최근 개봉된 차이밍량의 영화 <흔들리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10여년 전 한 동시상영관에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을 친구와 함께 관람했다. 친구는 극장 문을 나설 때 “욕망은 무슨…”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동시상영관이라는 야릇한 장소와 꿈보다 해몽이 좋은 제목이 만들어낸, ‘뼈와 살이 타는’ 화끈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욕망의 낮과 밤>의 원제는 'Tie Me Up, Tie Me Down'이었다. '나를 묶어주세요, 나를 풀어주세요' 정도의 뜻인지.)

 

-한때 동시상영관이 욕정 해소의 동의어 역할을 한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에로 비디오 사업이 ‘배설구’ 역할을 대신하면서 동시상영관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활황을 누리던 에로 비디오도 짧은 전성기 끝에 ‘포르노의 바다’ 인터넷에 밀려 사양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예술공헌 은곰상 등 3개 상을 수상한 대만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흔들리는 구름>이 약 2분 가량 삭제된 채 지난달 31일 개봉됐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수입사 유레카픽처스가 낸 18세 관람가 등급 신청에 대해 2차례나 제한상영(성인영화 전용 상영관에서만 상영 가능)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인 전용관이 전무해 제한상영 판정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수입사는 자진 삭제를 선택해야만 했다.(*<몽상가들>의 선례도 있는데, 굳이 '제한상영' 판정을 내려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덕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려던 생각이 싹 가셨다.) 

-<흔들리는 구름>은 무척 야해 보이는 영화다. 남녀의 하얀 나신이 무시로 등장하며 다양한 성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웬만한 포르노는 저리 가라 할만한 결말은 정말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영화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숨막힐듯한 관능을 내뿜거나 관객의 몸을 뜨겁게 달구지 않는다. 가뭄으로 표현되는 삭막한 인간관계 속에서 애정에 목 말라 하는 주인공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가슴을 짓누를 뿐이다. <흔들리는 구름>은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대만에서 무삭제로 개봉돼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인터넷이 ‘에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극장에서 숨은 욕정을 털어내려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흔들리는 구름>이 무삭제 개봉됐어도 ‘예설’ 대신 ‘외설’을 탐닉하려는 관객, 특히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우리 청소년들이 '포르노의 바다'를 놔두고 왜 엉뚱한 데서 헤엄을 치겠는가?) 18세와 20세 사이의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현행 등급분류 체계의 제한상영 규정이 애먼 예술영화의 정상적인 상영만 가로 막는 게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고민은 고민이고 짜증은 짜증이다. 아침부터 좀 짜증이 났다. 우리에게 포르노를 보여달라!)

세번째는 다시 박선영 기자의 <연리지> 리뷰이다. 인터넷판 타이틀은 '한국멜로의 불치병 <연리지>'인데, 지면에는 '"바보야, 나 죽어" 또 그 소리네'로 돼 있다.

-멜로영화 만들기가 갈수록 힘들다. 연인들을 애절하게 떼어놓는 게 멜로영화의 관건일진대, 신분이나 계급 차별은 줄어들고, 어지간한 병은 치료만 잘 받으면 죽음에까지 이르진 않는다. 작가와 감독들은 기를 쓰고 희귀병과 사회적 금기를 찾아 보지만,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영화건 드라마건 한국멜로의 두 가지 공식은 희귀병이거나 (알고보니) 남매이거나, 이다.) 

-한류스타 최지우의 스크린 복귀작 <연리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설득기제를 찾으려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친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한국 멜로영화의 ‘불치병’인 불치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나름의 변주와 반전을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출해보려 한 감독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되레 두 배의 황당함과 실소를 선사하며 ‘불치병 코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한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멜로영화의 관습들을 고스란히 집대성한 <연리지>는 천하의 바람둥이 민수(조한선)가 원발성폐고혈압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혜원(최지우)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기시감(旣視感)으로 충만한 장면들에 빼곡히 나눠 담았다. 두 연인은 비오는 날 난폭운전으로 흰 옷에 빗물을 튀기면서 우연히 만나고, 차에 탄 여자는 약속한 듯 휴대폰을 두고 내린다.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천진발랄한 그녀는 남자와 첫 키스를 하다 수줍게 도망치고, 장대비를 맞고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바보야, 나 죽어”를 울며 외친다. 가히 클리셰의 총출동이라 할 만한 상투적 서사 전개로 인해 반전의 효과는 코웃음 속에 묻혀버리고, 두 주인공의 감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관객은 지루하다 못해 외로울 정도다.

-영화는 신파의 혐의를 벗기 위해 최성국, 서영희 커플의 코믹한 사랑 이야기를 곁들이며 로맨틱 코미디의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코믹과 신파는 물과 기름처럼 시종 겉돈다. 30대 여배우들이 나이에 맞는 다양한 배역으로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요즘, 서른 한 살의 최지우가 극중 배역과 유리된 채 ‘지우히메’의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이 아름다운 한류스타의 미래를 심히 염려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치병이 어디 <연리지>만의 잘못이겠는가. 사랑의 슬픔은 불치병 같은 외부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 내적 기제에 의해 자체 소멸하고 침식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왜 한국영화만 간과하고 있는지(*'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정식이 말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최근 한 해 동안만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파랑주의보> <백만장자의 첫사랑> 등이 불치병 릴레이를 펼치며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붙어 하나의 나무로 합쳐지는 현상으로, 불치병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는 제목이다.(*아래는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

해서, 세 편의 영화는 각기 '진실'과 '외설'과 '불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뭘 봐야 하나?). 아침부터 그런 걸 생각, 해보게...

06.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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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는 좀 아쉽더군요. 그의 장기가 고스란히 들어있고 연기 좋고 기술적인 부분도 좋고 다 좋은데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드니 함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조만간 볼 생각이구요.

로쟈 2006-04-0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에 그럴 거 같았습니다. 저는 비디오로나 봐야 할 거 같은데, 차이밍량 영화 같은 건 비디오가게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다소 철지난 자료이지만, 체첸과 러시아에 관한 기사 중 드물게도 한국 기자가 현지 취재를 통해 작성한 것이고 현장의 목소리들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해서 여기에 옮겨놓고 잠시 '체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쟈료는 <신동아>(2003년 1월호, 470-83쪽)에 실렸던 것이며, 필자는 김기현 특파원이다(재작년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한 술자리에서 합석한 기억이 있다). 인용해온 글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강조와 이미지와 군말들은 물론 모두 나의 것이다.   

편집자: ‘신동아’에서는 신년 호부터 ‘세계의 갈등 지도’를 연재합니다. 체첸 북아일랜드 이스라엘 유고 등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을 매달 한 곳씩 골라 현황과 문제점에 대한 심층취재와 더불어 문화·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첫 순서인 이번 호에서는 최근 모스크바 인질사건으로 화제가 된 체첸사태를 다뤘습니다.

-모스크바극장 대규모 인질사태 후 러시아는 전면적인 체첸반군 섬멸전에 들어갔다. 러시아가 체첸 독립을 허용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송유관이다. 세계 최대 유전인 카스피 해에서 생산된 석유는 체첸을 거쳐 러시아와 유럽으로 공급된다. 2002년 10월26일 세계의 눈과 귀를 잡아끌었던 모스크바 뮤지컬극장 인질 사건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은 채 3일만에 막을 내렸다. 치명적인 마취가스를 무차별 살포해 사태를 강제진압한 러시아 당국의 무모함도, 국제사회의 외면으로 ‘잊혀진 전쟁’이 돼버린 체첸사태를 초유의 극장 인질극으로 다시 부각시키려던 체첸반군의 시도도 함께 묻혀버렸다. 마치 세상이 무너질 듯 호들갑을 떨던 CNN 등 서방의 거대 언론들도 이라크 사태 등 다른 뉴스거리를 찾아 모스크바를 떠났다.(*아래 사진은 인질극이 일어났던 극장.)



-인질 사건이 일어나자 미-러 정상회담까지 취소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2년 11월11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럽연합(EU)-러시아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체첸정책은 더 가혹해졌다. 체첸에서 병력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려는 계획은 취소됐다. 대신 체첸 주둔 러시아군은 전면적인 반군 섬멸전에 들어갔다.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으로 전개되고 있는 체첸전이 격화되면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될 것인가?(*아래 사진은 장례식 모습.)



-그러나 ‘반군 색출’을 명목으로 체첸 전역에서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는 무차별 체포와 총살 강간 약탈 등 러시아군의 만행은 이제 외부로 알려지기 힘들게 됐다. 푸틴 정부는 인질사태를 계기로 소련 시절에나 볼 수 있던 엄격한 언론통제에 들어갔다. 러시아 언론사는 반군의 주장을 전하거나 심지어 반군의 모습을 화면이나 사진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폐쇄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관련 언론인이 구속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스크바 지역방송인 모스코비야가 폐쇄되고 폭로전문 주간지 베르시야가 압수수색을 당하자 러시아 언론은 숨을 죽이고 있다.

-전화(戰禍)를 피해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체첸인들은 이제 잠재적인 테러범 취급을 받고 있다. 이들은 경찰의 일상적인 검문과 체포 폭행 등에 시달리고 있다. 경찰뿐 아니라 ‘스킨헤드’라고 불리는 신(新)나치주의를 신봉하는 극우파청년들이 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닥치는 대로 체첸인을 사냥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이들의 초법적인 테러를 못본 척한다. 푸틴 정부는 이번 인질사건을 그동안 러시아에 불리했던 국제여론을 반전시키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체첸사태가 거론되면 늘 수세에 서야 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은 체첸에서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들어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했다.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등 유럽 일부 국가들은 자국 내에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 활동을 허용해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이라는 반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질사건 이후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 공세에 나서고 있다. 체첸전을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대(對)테러 전쟁과 연결시킨 것이다. 체첸 망명정부와 반군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나 알 카에다와 마찬가지로 테러조직이라는 것이 러시아의 논리다. 여기에는 러시아가 그동안 ‘테러와의 전쟁’에 협조해왔으니 서방도 앞으로 체첸사태에 눈감아 달라는 은근한 압력이 포함돼 있다.



-러시아는 체첸반군을 국제테러조직에 포함시켜 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반군사령관 샤밀 바샤예프 등 대부분의 체첸 지도자가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의해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러시아는 덴마크 정부가 수도 코펜하겐에서 세계 체첸인 대회의 개최를 허용하자 마침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던 EU-러시아 정상회의를 거부해 결국 회의 장소를 벨기에 브뤼셀로 옮겼다. 체첸 망명정부의 대표부가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이의 폐쇄를 요청했다. 해외에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체첸인들의 유일한 창구인 체첸 대표부는 독일 등 몇몇 유럽국가와 터키 등 이슬람권에 있다.

-미국은 그동안 러시아와 외교적 갈등을 빚을 때마다 은근히 체첸사태와 인권문제를 연결시키며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왔다. 그러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한 미국은 당분간 체첸사태를 거론하는 일조차 삼갈 전망이다. 인질 사건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은 듯 보이는 러시아가 오랜 골칫덩어리이던 체첸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기자는 2000년 5월, 1주일 동안 체첸을 취재했다. 당시 취재허가를 내주면서 러시아군 당국은 “체첸전은 이미 사실상 종료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1999년 10월 체첸을 다시 침공해 2차 체첸전을 시작한 러시아군은 석달 만에 수도 그로즈니(Groznyi)를 비롯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체첸군은 남부 카프카스 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피해 산악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사진은 체첸전은 소재로 한 세르게이 보드로프 감독의 <카프카즈의 포로>(1996). 주연은 영화에서 체첸군의 포로가 된 러시아군 병사들로 나오는 올렉 멘쉬코프와 감독의 아들 보드로프 주니어가 맡았다. 국내 출시명은 <코카서스의 죄수>이고 영어판 제목은 'Prisoner of the Mountains')

-그러나 체첸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러시아군의 설명을 믿기 어렵게 됐다. 러시아군 수송기를 타고 체첸 접경 모즈도크 군기지에 온 기자는 헬기로 갈아타고 체첸 주둔 러시아군사령부가 있는 한칼라로 들어갔다. 기자는 “자동차로 다니며 현지 정세를 상세히 취재하고 싶다”고 공보관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사령부 공보관인 알렉세이 바신 대령이 어이없다는 듯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미스터 김, 체첸은 처음이지”라고 되물었다. 그때 체첸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조금만 먼 거리는 헬기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육로로 이동하다가는 매복에 걸려 몰살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헬기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헬기는 늘 전속력으로 날아다녔다. 대공포나 이동식 지대공 미사일에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요 도시는 점령했지만 이들을 잇는 도로는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점(點)은 확보했지만 선(線)은 확보하지 못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그로즈니에 들어갔더니 러시아군은 어두워지면 벙커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시내 곳곳에 숨어있는 저격수들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시내 여기저기서 총성이 멎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군은 낮에만 그로즈니의 주인이었고 밤이 되면 시내는 다시 반군 세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국 러시아군은 그나마 점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사진은 체첸전쟁으로 파괴된 수도 그로즈니.)

-러시아군 당국의 공식 발표와 달리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한 기자는 한칼라 기지에서 만난 러시아 국방부 기관지인 '크라스나야 즈뵤즈다(赤星)' 기자에게 물었다.

“언제쯤 전쟁이 끝날 것 같습니까?” 현역 육군 대령인 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무슨 전쟁 말인가? 이 전쟁은 200년도 넘게 계속돼 왔어. 여기는 늘 전쟁중이야.”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 체첸전쟁의 역사를 다시 짚어보자. 우리는 흔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2차 체첸전’이라고 부른다. 1차 전쟁은 1994년 12월 러시아군이 체첸을 침공하면서 시작돼 1997년 1월 체첸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된 전쟁을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체첸인들의 항쟁은 2세기 넘게 계속돼 왔다.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는 러시아어로 ‘무서운 곳’이라는 뜻이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폭군인 이반 대제를 러시아어로 ‘이반 그로즈니’라고 부른다(*사진은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 '이반 그로즈니'.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폭군 이반>의 원제가 '이반 그로즈니'이다.) ‘무시무시한 이반’이라는 뜻이다. 왜 러시아인들은 체첸의 수도를 ‘무서운 곳’이라고 이름지었을까? 제정(帝政) 러시아는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팽창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를 지나 극동까지 진출했고 중앙아시아로도 뻗어나갔다.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남쪽으로 카프카스(Kavkaz) 정복으로 이어졌다.(*아래 사진은 카프카즈 동부의 최고봉 '카즈벡'. 해발 5033m이다.)

-영어로 코카서스(Caucasus)라고 하는 카프카스 지역은 카스피해(海)와 흑해(Black Sea) 사이에 카프카스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진 지역이다. 카프카스 산맥은 유럽 최고봉인 엘부르스(5642m)를 비롯해 4000m가 넘는 험준한 고산들이 1200㎞에 걸쳐 이어져 있다.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은 생전에 “카프카스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다”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산과 물, 기후와 공기 등 자연환경이 좋아 장수촌(長壽村)으로 유명했다. 기자는 몇차례 카프카스 지역에 갈 때마다 ‘지상의 마지막 낙원’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곳은 소련 시절에는 대표적인 휴양지였다.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라서 그런지 일찍부터 다양한 민족이 모여들어 복잡한 인종분포를 이루며 살아왔다. 현재도 50개 이상의 민족이 카프카스 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까지 밀고 내려온 러시아 정복군은 1800년에 그루지야를 귀속시키고 1830년에는 카프카스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카프카스산맥에 근거를 둔 유목민족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들은 7세기부터 이 지역에 살고있던 이슬람교도인 나흐(Nakh)족이었는데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었다. 당시 유럽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러시아군이었지만 고전을 거듭해 무려 50여 년 동안 전쟁이 계속됐다. 나흐족 중 서부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그나마 일찌감치 손을 들었지만 동부에 거주하던 나흐족은 끝까지 항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동부 나흐족을 체첸인으로, 서부 나흐족은 잉구슈인으로 부르며 구분하기 시작했다. 체첸인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러시아와 체첸의 길고 질긴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중반 체첸에는 셰이크 샤밀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까지 나타나 더욱 조직적인 반(反)러 항쟁을 주도했다. 결국 당시 러시아 최고의 용장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장군까지 직접 현지로 내려가 독려한 끝에 1859년 샤밀을 체포하고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군이 체첸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얼마나 몸서리쳤으면 수도를 그로즈니라고 이름 붙였겠는가? 그러나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체첸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어났다. 20세기초 제정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다시 항쟁이 시작됐다. 이 때는 민족적 자각에 이슬람원리주의까지 더해졌다. 러시아로부터의 민족해방 전쟁이면서 동시에 슬라브정교의 러시아에 대항하는 이슬람 성전(聖戰)의 성격까지 띠게 된 것이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곧이어 백군과 적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자 체첸인들은 한때 이웃 다게스탄 지역까지 포함된 체첸-다게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소련은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해 잉구셰티아와 합쳐 체첸-잉구셰티아 자치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러시아인과 슬라브정교에 대해서만큼이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감을 보였다. 결국 1930년대 스탈린 시대의 광풍이 체첸까지 몰아쳤다. 1937∼38년 소련 비밀경찰은 북카프카스 전역에서 지식인과 민족 지도자 등 10만여 명을 검거해 처형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추방했다.

-체첸인들은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또다시 독립을 시도했다. 체첸인들은 카프카스 지역을 일시 점령한 나치 독일군과 힘을 합쳐 소련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대가는 엄청났다. 1944년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든 체첸인과 잉구슈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역사다. 스탈린은 1937년 극동 지역에 살고 있던 20여만명의 한인들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체첸인과 우리 민족은 비극적인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탈린이나 당시 소련 비밀경찰 대장으로 강제이주를 지휘했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러시아인이 아닌 그루지야인이었다. 그루지야 역시 카프카스 지역에 속해 있다. 체첸인들은 이웃 민족 출신으로부터 탄압을 당한 것이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가던 일부 체첸인은 탈출해 소련에 대항하기도 했으나 강제이주와 항쟁 과정에 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0여만명이 희생됐다.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체첸인들은 스탈린 사후인 1957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제이주 사건으로 체첸인들은 더 이상 소련 체제에 맞서 대규모 저항을 벌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반러 감정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프카스 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가 독립해 주권국가가 됐다. 그러나 체첸을 비롯해 잉구셰티아, 북(北)오세티아, 다게스탄 등은 여전히 자치공화국으로 러시아연방에 남아 있게 됐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구 소련군 장성 출신인 조하르 두다예프(1944-1996)다. 체첸 출신으로 소련군에서 가장 출세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마자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그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대통령직에 재임했다).  

-러시아 국경 인근 체첸 난민촌에서 어린이가 추위도 잊은 채 전쟁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소련 해체 직후의 혼란 때문에 러시아는 체첸에 관심을 돌릴 여유도 없었고 이 틈에 체첸은 사실상 독립국 행세를 했다. 그러나 겨우 한숨을 돌린 러시아는 1994년 12월 체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1개 공정여단만 보내면 당장 체첸을 평정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라초프 장관은 과거 체첸인들이 막강한 제정 러시아군이나 소련군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 해체 후 러시아군의 전력은 크게 떨어졌다. 러시아군은 단숨에 수도 그로즈니까지 밀고 내려갔지만 그때부터 지루한 시가전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이 과정에 엄청난 피해를 봤다.

-전쟁이 1년 넘게 이어지자 러시아 내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났다. 특히 체첸전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병사들의 어머니회’를 만들어 반전여론을 주도했다. 탈영병도 속출했다. 허약한 옐친 정부는 체첸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러시아군은 인공위성으로 두다예프 대통령의 위치를 확인해 미사일 공격으로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체첸군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1996년 대선에서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한 옐친 대통령은 체첸과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이 해 8월 평화협정이 맺어졌고 러시아군은 체첸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미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체첸의 지위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첸은 국제법이나 러시아 헌법상으로는 여전히 러시아연방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다.

-체첸은 경상북도만한 넓이인 1만7000㎢로 러시아 전체 국토의 1700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작은 나라다. 인구도 겨우 80여만명.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용납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송유관을 들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규모의 유전으로 떠오른 카스피해 유전에서 생산된 석유는 체첸을 거쳐 러시아와 유럽으로 공급된다. 체첸은 독립할 경우 이 송유관 통과료가 가장 큰 국가 수입이 될 것으로 여길 정도. 반면 러시아는 안보자원 중 하나인 석유 수송을 체첸에 의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체첸은 대규모는 아니지만 상당한 양의 원유도 갖고 있다. 일부는 이미 개발해 러시아와 전쟁하는 비용으로 충당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1999년 10월 체첸을 재침공하면서 유전과 정유공장 시설부터 폭격했다.

-체첸을 풀어줄 수 없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 러시아는 89개 지방정부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이다. 물론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 등 슬라브계가 다수지만 그 외에도 수십여 소수민족이 역내에 살고 있다. 21개 자치공화국은 러시아인이 아닌 다른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자치공화국은 외교권은 없지만 상당한 수준의 주권을 보장받고 있다. 공화국 수반은 연방정부 수반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으로 불리고 공화국 헌법도 가지고 있다. 타타르인들의 나라인 타타르공화국 등은 지금 당장 독립해도 될 만한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출범한 러시아연방은 연방해체에 대한 불안을 갖고 있다. 소련이 15개 국가로 나눠졌듯이 러시아도 또다시 몇조각으로 쪼개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우려다.

-실제로 체첸처럼 내전을 벌이면서까지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경우는 아니지만 타타르도 한때 연방헌법 비준을 미루는 등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90년대 중반에는 시베리아의 몇몇 공화국과 주(州)가 가칭 ‘시베리아 공화국’을 구성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해 중앙정부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러시아가 체첸의 독립을 허용할 경우 다른 자치공화국의 독립 열망을 자극해 자칫하면 전국적인 내전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 각지에 배치돼 있는 핵무기 통제도 어려워져 미국 등 서방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러시아의 국민감정도 체첸 독립에는 반대다. 2차례의 전쟁과 체첸인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테러에 매일같이 시달리면서 “차라리 체첸을 독립시켜주자”는 여론도 높아졌지만 여전히 체첸의 분리독립에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하다. 전문가들은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욕심과 아직도 남아있는 제국주의적 정서 때문으로 분석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덩어리를 갖고 있는 러시아지만 한치의 땅이라도 잃는 것은 참지 못한다. 일본으로부터 뺏은 북방 4개 섬을 되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이나 중국과 전쟁까지 하면서 국경분쟁을 벌인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것을 아직도 아쉬워하면서 선거 때마다 알래스카 반환 추진 공약이 나오는 판이다. 물론 미국이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한때 미국과 세계 질서를 좌지우지하던 초강대국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대국으로 몰락한 현실에 대한 묘한 보상심리까지 있다. 체첸 등의 독립을 마치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상실하는 것과 같은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다. 조그마한 체첸은 러시아 국내정치에도 핵폭탄급 영향을 끼치는 변수다. 옐친 전 대통령이 임기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임기도 못 채우고 하야하게 된 배경에는 건강문제와 경제난 등도 있지만 결국 체첸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다.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로 전비를 낭비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체첸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정치적인 해결도 하지 못하자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지도력이 약화된 것이다.



-반면 체첸사태를 이용해 뜬 인물도 있다. 바로 푸틴 대통령이다. 1999년 8월 총리로 전격 임명됐을 때까지만 해도 푸틴 대통령은 지지율은커녕 인지도도 미미한 무명의 정치신인이었다. 거의 평생을 국가보안위원회(KGB)와 크렘린궁 등 음지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첸침공을 시작하자 인기가 치솟았다. 더구나 2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은 1차 전쟁과 달리 초반부터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순식간에 그로즈니 등 주요 도시와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했다. 

-옐친 전 대통령은 민간인 희생을 우려해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푸틴이 주도한 2차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융단폭격과 로켓포 공격을 퍼부었다. 기자가 러시아군이 점령한 그로즈니에 갔을 때 도시 전체는 완전한 폐허가 돼 있었다. 민간인 희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 공격이 2차 전쟁 초기 러시아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원인이다.

-반군이 남부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으로 맞서면서 2차 전쟁도 1차 전쟁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계속되는 장기전이 됐다. 그러나 1999년 12월 옐친 대통령의 조기 퇴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푸틴 대통령은 전쟁 초기의 인기를 등에 업고 2000년 3월 대선에서 압승해 크렘린궁의 주인이 됐다. 국민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했던 인물이 8개월만에 대권을 차지한 드라마의 배경에는 체첸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이 재침공을 시작할 수 있는 명분은 체첸쪽이 먼저 줬다. 바샤예프가 이끄는 체첸반군이 체첸-다게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겠다며 먼저 다게스탄을 침공했다. 게다가 1999년 8월부터 모스크바 등 러시아 전역에서 끔찍한 폭탄테러가 계속돼 300여 명이 희생됐다. 러시아당국은 이를 모두 체첸측의 소행으로 몰아붙였고 체첸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때 ‘혜성같이’ 등장한 신임 푸틴 총리가 체첸 침공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위기에 처한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신께서 차르(Tsar·제정러시아 황제로 러시아의 지배자를 가리킴)를 보내주신다는 러시아의 전통적 정서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지만 왠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가?


-푸틴 대통령을 옐친의 후계자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이었던 러시아의 최대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사진 오른쪽)는 지금 유럽에 망명중이다. 러시아판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하고 푸틴의 최대 정적이 된 그는 최근 “당시 폭탄테러는 러시아 연방보안부(FSB)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고 폭로하면서 비디오 테이프 등 증거까지 제시했다. 구 소련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KGB출신인 푸틴은 바로 KGB의 후신인 FSB의 부장(최고 책임자)을 지냈다.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고한 자국민을 희생시키고 일부러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 엄청난 폭로에 러시아 국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푸틴이 반군 지도자 바샤예프(사진)를 매수해 다게스탄을 침공하도록 사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이다. 반군과 짜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 체첸의 강경파 지도자인 바샤예프는 온건파인 마스하도프 대통령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러시아와의 긴장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푸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푸틴이 이를 빌미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할 줄은 몰랐던 바샤예프가 결국 푸틴에게 당한 셈이 됐지만…. 우리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이지만 도무지 내부 사정을 들여다볼 수 없는 크렘린궁의 정치 음모는 늘 상상을 초월한다.

-음모론이 나온 김에 ‘러시아를 위한 변명’을 시작하려고 한다. 체첸전이 주목받을 때마다 국내 독자들의 편지를 많이 받는다. 식민통치를 경험한 우리 민족의 정서로는 러시아는 일제(日帝), 체첸반군은 독립군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등식과는 조금 어긋나는 얘기를 하자면 우리 독립 투사들은 극장에서 수백명의 관객을 잡고 인질극을 벌이거나 민간아파트를 폭파하는 테러는 하지 않았다. 체첸반군은 1996년에도 체첸 인근에서 병원을 점거하고 환자와 수천 명의 마을 주민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역사상 세계 최대 규모의 인질극이었다.

-반군의 도덕성을 의심할 만한 대목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납치(拉致). 카프카스에 종군한 적이 있던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카프카스의 인질>(*보통 <카프카즈의 포로>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작품까지 썼을 정도로 카프카스의 인질극과 납치는 악명이 높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이 무수히 많을 정도.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납치해 아내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어서 서슬 퍼런 소련 체제도 이런 악습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

-요즘도 체첸에서는 납치가 매일같이 일어난다. 러시아 군인이나 친(親)러시아계 관리들은 물론 내외신 기자나 외국인도 대상이다. 심지어 체첸 구호를 위해 온 국제기구 직원들까지 마구잡이로 납치됐다. 국제적십자사 등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체첸이다. 납치는 정치적 이유보다는 엄청난 몸값을 원해서다. 몸값을 주지 않으면 잔인하게 살해한다. 체첸 인근 다게스탄에서 통신시설을 설치하던 영국인 기술자 4명이 납치돼 목이 잘린 채 발견됐고 평소 체첸에 동정적인 기사를 쓰던 러시아 여기자도 납치돼 거액의 몸값을 주고야 겨우 풀려났다.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최근 카타르의 알-자지라 방송이 공개한 것처럼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전 체첸 대통령 등 체첸 망명정부 지도자들은 해외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 체첸 망명정부는 과거 우리 임시정부와 달리 돈 나올 곳이 많다. 1차 체첸전이 끝난 후 러시아가 지원한 복구자금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석유판매에서 나온 수입도 상당하다(*러시아 일반인들이 체젠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와 막후 거래를 했다거나 마약 밀수에 손을 댄 적은 없다. 앞서 음모론을 얘기했지만 실제로 많은 반군 지도자들이 돈이나 이권에 따라 러시아와 체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마약이나 무기 밀매로 한몫 챙기고 있다.

-체첸인들 전체가 독립을 열망하는 것도 아니다. 제2의 도시 구데르메스를 비롯한 북부지역은 친러 성향이 강하고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반군 지도부는 남부 산악지역 출신이다. 러시아군의 잔혹행위가 주로 거론되고 있지만 반군 역시 이 못지않게 잔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은 잔인하게 살해되기 일쑤다. 러시아에 대한 체첸인들의 뿌리깊은 원한에 대해서는 앞서 얘기했지만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내 다른 소수민족이 체첸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어떨까? 스탈린 시대 강제 이주된 한인동포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역시 강제 이주돼온 체첸인들을 만났다. 한인 작가인 아나톨리 김은 “체첸인과 한인의 관계는 무척 나빴다”고 회고한다.

-카프카스 지역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도 체첸인이라면 고개를 내젓는다. 거칠고 잔인하기 때문이라는 것. 12세만 넘으면 남자들은 모두 전사(戰士)다. 러시아군은 민간인에 대한 과잉탄압 시비가 나올 때마다 “체첸인은 모두가 총을 쏠 줄 아는데 어떻게 민간인과 반군을 구분하느냐”며 항변한다. 총이나 칼 등 무기에 대한 체첸인들의 집착도 유명하다. 자신과 가족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선지 남자들은 대부분 무기를 갖고 있다. 소련 당국이 정기적으로 체첸 마을을 둘러싸고 집집마다 수색을 벌여 무기를 압수했는데 얼마 후 다시 수색을 하니 또 무기가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체첸 남자들은 돈이 생기면 총부터 장만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은 오랜 탄압 속에서 살아오면서 길러진 남다른 생존력으로 볼 수도 있다. 1993년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러시아 10월 사태도 체첸과 관련이 있다. 당시 옐친 대통령에게 도전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1942- ) 최고회의(의회) 의장이 바로 체첸 출신. 옐친 정부는 탱크까지 동원한 시가전 끝에 겨우 사태를 진압했지만 하스불라토프는 체첸인으로는 처음으로 크렘린궁을 노렸던 인물이다. 그의 뒤에는 유명한 ‘체첸 마피아’ 조직이 있었다.

-소수민족이지만 체첸인은 러시아의 범죄세계만은 석권하고 있다. 러시아 마피아 중 최대 패밀리가 바로 체첸 마피아다. 그루지야 마피아와 아제르바이잔 마피아 등 러시아 범죄조직은 공교롭게도 카프카스계가 휩쓸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체첸 마피아는 마약 무기 매춘 청부살인 등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손대고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모스크바에는 성공한 체첸 출신 사업가가 많은데 이들도 대개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당연히 체첸인 하면 범죄부터 연상하기 쉽다. 이런 역사적 민족적 배경까지 살펴보면 체첸사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그런데 최근의 체첸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소련 해체와 함께 체첸뿐 아니라 카프카스 전체가 유럽의 화약고가 돼버렸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소련 말기인 1988년부터 무력분쟁을 벌였다. 아제르바이잔 내에 있지만 주민 대부분이 아르메니아인인 나고르노-카라바흐주(州)의 영유권 분쟁 때문이었다. 두 나라는 모두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이면서도 6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인 끝에 겨우 휴전을 했으나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러시아는 같은 정교도인 아르메니아를 은근히 지원했고 터키계인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계기로 탈(脫)러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루지야에 속한 압하지아 자치공화국도 분리독립을 선언해 내전 상태다. 그루지야와 사이가 나쁜 러시아는 압하지아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이에 발끈한 그루지야는 러시아군에 쫓긴 체첸반군이 역내로 들어오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러시아는 최근 그루지야 국경을 넘어 체첸반군을 소탕하겠다고 위협해 러-그루지야 분쟁으로 확장될 위기에 놓였다.

-국제테러리즘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면서 체첸전의 국제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체첸에는 원래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이 강했다. 체첸전이 일어나자 “체첸의 이슬람 형제들을 돕자”며 아랍이나 수단, 심지어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이슬람 의용병들이 체첸으로 몰려왔다. 용맹스런 반군 지휘관으로 러시아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에미르 하타프(전사했음)는 알고 보면 아랍 출신으로 체첸말은 하지도 못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이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용된 용병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이슬람전사 중 일부는 과거 아프가니스탄전에 참가했던 용사들로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가 줄기차게 “체첸반군은 국제테러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러시아는 체첸반군 지도자들이 탈레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연계돼 있다고 주장해왔다. 알 카에다 전사들로서도 미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체첸반군들 사이에 섞여 체첸의 산악지대나 그루지야의 판키시 계곡에 은신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도 체첸반군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특수부대를 그루지야에 파병하기까지 했다.

-200년 동안 계속돼온 체첸사태가 가까운 시일에 해결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하려는 러시아 정부나 이에 결사항전으로 맞서는 반군이나 조금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게다가 지구상의 다른 분쟁과 마찬가지로 얽히고 설킨 국제적 이해관계에서 체첸사태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자는 체첸 남부 우루스마르탄에서 잠시 전투가 멎은 틈에 보았던 카프카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양떼를 몰고가던 순박한 표정의 촌부를 보면서 잠시 평화로운 이국의 정취마저 느꼈다. 그러나 탱크의 무한궤도 소리와 상쾌한 공기 속에 묻어 있는 매콤한 화약냄새 때문에 곧 전장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체첸과 카프카스 전역에서 총성이 멎을 날은 과연 언제일까?

06. 04. 05 -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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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형도(1960-1989)의 기일은 3월 7일이지만, 내가 그를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날은 4월 5일, 식목일이며, 그건 순전히 그의 시 '식목제' 덕분이다(그는 전세주 엘리엇의 '4월' 한달 가운데, '5일' 하루를 자신의 것으로 임대하고 있다). 1983년 연세대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니까 그가 20대 초반에 쓴 것이며 그런 만큼 푸르고(상승에의 의지) 어둡다(침잠에의 강박). 요즘은 고등학교의 문학교과서에도 들어가 있다는 시이므로 '기본교양' 차원에서라도 아는 체 해두는 게 좋겠다.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 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기 전에, '교과서식' 요점정리를 옮겨온다.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야 '안심'이 되는 독자들도 있기 때문에.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감상적, 독백적, 회고적, 애상적, 연민과 회상의 어조
-심상 : 시각적, 상징적,
-어조 : 우울하고 비판적인 어조, 자기 고백적인 어조, 연민과 회상의 어조
-제재 : 식목제, 나무 심기
-주제 : 식목제에서 느끼는 비관적인 삶, 유년의 아픔에 대한 회상(回想), 전망이 부재하는 삶에 대한 인식과 성찰
-표현 : 지은이의 경험과 의식을 개인적 상징을 통해 독창적이면서도 우울하게 표현
-구조 : 과거(뿌리)-현재(이파리)-미래(줄기)로 시상이 전개된다.

 

1연 : 1-13행 :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13행까지에서 화자는 ‘과거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시적 화자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니 그것은 땅속에서 묻힌 나무의 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고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기에 화자는 현재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한다.


2연 : 14-26행 : 화자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정한 목표나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느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 삶에는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으며 때로는 삶의 결실도 있으나 화자의 삶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힘없이 진행되고 있다.


3연 : 27-36행 : 과거에 대한 회상을 기반으로 한 ‘앞으로의 삶’이다. 화자는 살아가면서 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그 과거는 쉽게 포착되지 않으며, 먼 과거일수록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과 마주치게 된다. 나뭇가지가 모두 한 뿌리에서 뻗어나가듯 희망과 절망도 모두 같은 곳에서 연원함으로 아직은 ‘짧은 넋’이지만 과거를 반추하여 앞으로의 삶의 길을 '흘러간다.‘

 

 

기형도 식의 기본구도에 대해서는 이전에 '기형도의 보편문법'이란 글에서 적어놓은 바 있다. 전기적으로 참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1975년 5월에(그러니까 중3 때이다) 기형도의 바로 손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은 일. <기형도 전집>의 연보에서는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씌어 있다. 이러한 전후관계를 그대로 수용하자면, 기형도 시의 발생론적 밑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누이의 죽음이라는 외상(트라우마)이다. 그리고 이 '상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삶의 정처없는 유동성(흘러간다, 떠내려간다)을 낳는다.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그러한 맥락에서, 시의 시작 부분은 아주 구상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물 묻은 저녁', 그러니까 울적한 저녁에 '물끄러미 팔을 뻗어' 가늠할 수 있는 대상이란 유년시절에 같이 팔베개 하고 누워있기도 했을 누이이다. 하지만, 그 '너'는 없다.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듯이 '너'는 중의적으로 외상적 근원으로서의 '죽은 누이'이다(해설서들에서는 제목을 고려하여 '너'를 '나무의 의인화'로 보며, 나중에 화자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시적 자아)가 '죽은 누이'(대상)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이것은 그대로 우울증의 발생도식을 따르는 것이 된다. 프로이트가 규정한바, 우울증이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 대명사 '나'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대상과 자아의 동일시에 의해서 변형된 자아이다(기형도의 시적 자아 '나'는 '원래의 자아'와 '죽은 누이'의 합체이다). 그것은 낯선 사람들이 '누이'(대상)를 묻어 두고 떠난 벌판에서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시적 자아는 마치 망자의 유령처럼 어떤 형체(육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흘러간다'. 바로 앞대목은 그런 문맥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망가진 소리'란 '괭이 소리 삽 소리', 즉 죽은 자를 매장하던 소리였으며, 그것은 '망가진 육체'에 상응한다. 어둠, 혹은 '나'의 무의식은 그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렇게 길어올려진 '이파리'가 바로 시적 자아의 (엘리엇의 용어를 쓰자면) '객관적 상관물'이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것은 그러한 '나=이파리'의 유령적 삶이다.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 속에 섞여 든' 그의 삶은 기형도 버전의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d)'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겐 삶의 일상적인 '즐거움'과 '슬픔'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 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에서 보이는 두 '자아'의 분리/대립이다. 그것은 시적 자아로서의 '나=이파리'와 '누이'(대상)의 죽음과 함께 같이 매장된 원래의 '나' 사이의 분리/대립에 대한 '확인'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확인'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 즉 성찰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라는 구절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힘없는 추억들'이란 '나=이파리'의 추억들이며, 그것은 '살아있는 죽음'의 '숨죽인' 추억들이다. 이러한 추억들로는 삶도 세상도 물론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확인/성찰이 '없어질 듯 없어질 듯'한 생이 아니라 '견고한' 새로운 생의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시의 대단원이자 '발견'이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마주보이는 시간'은 더이상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구름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 '미루나무'처럼 곧게 서 있는 시간이다. 그러한 시간을 두려움 속에서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시적 자아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그 발견은 '줄기'의 발견이다.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고로, 시적 자아에게서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나-이파리'에서 '나-줄기'로의 이행에 대응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는 의지의 표명은 그러한 구도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의지가 이제 당당하게 과거를 호출한다 "어디 있느냐/ 식목제의 캄캄한 밤이여". 또 이와 동격을 이루는 것: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동일한 구문형식으로 돼 있는 이 두 문장에서 짝이 되고 있는 것은 '식목제의 캄캄한 밤'과 '유년의 짧은 넋'이다. '짦은 넋'은 '짧은 생애를 산 넋'이란 뜻으로 읽으면 되겠다(그래서 '캄캄한 밤'과 조응한다). 즉, 그의 '죽은 누이'를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동시와 그 누이와 합체가 된 서정적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이 근원적 과거의 시점("어느 날이냐")과 장소("어디 있느냐")를 이제 불러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래의 대한 '나'의 당찬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더이상 '이파리'가 아닌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란 구절이 뜻하는 바이다. 여기서 '불의 입상'은 나무의 은유이면서 (나무가 흔히 상징하듯이) 한 가계(家系)의 기둥이다. 더이상 '나-이파리'가 아닌, '나-줄기', 더 나아가 '나-불의 입상'이 될 거라는 다짐 혹은 예감.

 

앞에서 '나무심기'(=식목)가 죽은 누이의 매장(하관)에 대한 알레고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식목제'에서의 '제(祭)'가 뜻하는 건 말 그대로 '제의(ritual)'이다. 이 제의는, 반복하지만, '니-이파리'에서 '나-줄기'로의 통과제의이다. 성년의 문턱에서 기형도가 반드시 넘어가야 했을 어떤 과정이면서 절차.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인 기형도의 생애에서 그러한 이행은 완수되지 않는다. '견고한 불의 입상' 같은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는 그에게서 지극히 예외적이라는 것이 한 반증이다. 더불어,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이 행가름에 있어서 지극히 혼란스러우면서 중의적인 것도 예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 대목에서 통사론과 의미론이 서로 길항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파리' 존재론과 단절하지 못했다. 물론 이에 대한 총체적 해명은 보다 널따란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06. 04. 05.

 

P.S. 기형도의 '제망매가'로 씌어진 시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기형도 전집>에 수록돼 있는 '가을무덤'(연도 미상)이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육필 원고(사진)가 남아 있는 시 '풀'은 1979년, 그러니까 대학 1학년때 씌어진 것인데, 2연과 4연을 옮기면 이렇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정맥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

 

이제를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이 시의 구도 또한 '식목제'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하지만, 그의 뿌리는 너무 얕은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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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4-0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낮에 봤을 때 진행중이었는데, 금방 이리 긴 글이..^^ 자주 오는데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어렵기는 하지만 가끔은 추천하고 퍼가기도 했음을, 뒤늦게 고백합니다..^^

로쟈 2006-04-05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처음 뵙겠습니다. 식목일 행사가 (생각보다) 좀 길어져서 저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집에서 밤참 라면을 먹으면 글을 친다(이미지들은 이전에 미리 올려놨지만). 여하튼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번에 다룰 새로 나온 책들의 컨셉은 '세계 여행'이다. 이 여행은 공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기도 한데, 가장 먼저 둘러볼 곳은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이고, 1969년이다. 이때의 일본은 전후 최대 문제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나라이다.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새물결, 2006)가 증언해주고 있는.

 

 

 

 

1969년이면 작년에 개봉됐던 이상일 감독의 영화 <69 식스티나인>의 시간적 배경과 동일한 해이다. 그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1960년대 말 일본의 자민당뿐만 아니라 공산당까지도 기득권 세력으로 비판하면서 ‘미·일 제국주의 타도’와 ‘제국대학 도쿄대 해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투쟁한 극좌파 학생운동조직인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마침내는 동경대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던 해이다(해서, 프랑스 파리의 1968년에 대응하는 것이 일본 동경의 1969년이다).

그런 전공투가 극우파 지식인 작가의 거두 미시마 유키오와 1969년 5월 13일에 동경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만나 2시간 30분 동안 격론을 벌였고, 그 녹취된 내용을 1999년 토론 30주년 맞아 장년이 된 전공투 참여자들이 벌인 후일담 토론 내용과 같이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이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책이라 한다. 극우와 극좌의 만남이었지만 토론의 분위기는 '의외로'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 리뷰들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 다만, 리뷰들 가운데 가장 유익했던 문화일보의 리뷰를 부분적으로 옮겨오면 이렇다.

-단순한 우파와 좌파가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극 우파 미시마와 극좌파 도쿄대 전공투 학생들은 당시 왜 만나 얼 굴을 마주대하고 토론을 벌였을까. 역사의 전설로 남은 69년 대 화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99년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가 돼 다시 자리를 함께 한 전공투 출신 인사들이 당시 토론을 반추 하고 평가한 내용을 담은 책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추진된 일본 근대화는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 근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 준다.

-2시간30분 가량 진행된 미시마와 전공투의 격론을 보면, “정말 근대를 둘러싼 중후하고 약동감 넘치는 활기찬 토의였다”는 30 년 뒤 전공투쪽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다. 토론장 입구에 자신을 고릴라 모습으로 캐리커처한 그림을 보고 웃었다는 미시마나 “약간의 비아냥과 예의의 표시로 교복을 입고 마중나갔는데, 폴로 티셔츠를 입은 러프한 모습으로 미시마가 나타났을 때 ‘아차 한방 먹었구나’ 생각했다”는 69년 집회를 기획한 기무라 오사 무(木村修)의 회고 등은 당시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렇다면, 미시마와 도쿄대 전공투의 만남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양쪽은 자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가 대변해온 ‘전후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현대사를 철저하게 전복시키려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공통 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실 양자에게 당시 좌파와 우파는 뿌리 부터 잘못된 근대의 쌍둥이 질병에 다름 아니었다. 미시마가 전공투 와의 토론을 끝내며 “제군들의 열정만은 믿는다”고 말했던 이 유이기도하다. 폭력과 시간의 연속성, 전공투, 정치와 문학의 관계, 천황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미시마는 천황이란 이름으로 상징되는 일본 민중의 저변에 있는 것, 일본민족이 오랜 시간 지속시켜 온 멘탤러티에서 해결책을 찾은 반면, 전공투는 혁명을 통한 새로운 공간의 창출로 근대를 초극하려 한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종래 리버럴로 분류됐던 지식인들이 이념적 성향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분화되거나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좌우의 입장을 극한으로 밀고가 일본을 근본에 서 사유하려 했던 미시마와 전공투의 토론과 30년 뒤 평가를 담은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뉴라이트다 뉴레프트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사이비’ 좌파와 우파만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 우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작년봄에 '커밍아웃의 윤리'를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소리만 요란한 좌파나 소위 '할복'하지 않는 우파를 신뢰하지 않는다.) 

사실 작년은 미시마의 탄생 80주기가 되는 해였고, 나는 그걸 대비하여 재작년에 러시아어로 된 두툼한 미시마 선집(사진)을 구해 왔었다(러시아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거의 모든 작품이 여러 판본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하지만, 그걸 읽을 만한 여유가 여태 없었는데(앞으로도 없을까봐 걱정된다), 이 <미시마 유키오 대 전공투>는 그에 대한 관심을 새삼 불러일으켜주는바, 미시마 '입문서'로서도 제격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러시아본의 표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상당한 근육질의 몸매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다. 알폰소 링기스의 <낯선 육체>(새움, 2006)의 서문에서 미시마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대목: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고대 일본의 무예들과 현대의 생리학적 기술들이 그에게 허락한 극한의 훈련과 고통에 그의 육체를 복종시킨 바 있다. 그는 그런 훈련과정에서 그의 육체가 가장 강렬하게 관능화되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고대 일본의 서사시적이고 영웅적인 윤리를 부활시키고 그것을 그의 육체와 언어를 이용하여 미래 속으로 던져넣기 위해 현대 생리학과 심리학적 기술들을 철저히 연구했다."

 

 

 

 

"그의 실험적인 육체 편력을 육체의 능력을을 키우기 위한 무제한적인 투자가 주도하는 '육체의 전투'를 우리에게 폭로하고, 근육들이 고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그리고 근육들을 규약하는 타자들과 결합한 권력이 부양하는 상상력에서 해방된 '권력의 긴장'을 우리에게 폭로한다. 그는 인간의 영광의 정점은 세속적인 수단들이나 목적들과는 거리가 먼, 시커먼 죽음의 빛 앞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는 찬란한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15쪽)

인용문에서 '찬란한 권력의 상징'은 'a figure of radiant power'를 옮긴 것인데, '인간의 영광의 정점'을 받는 술어로서는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이 대목에서 'power'는 '권력'의 아니라 (육체의)'힘'을 가리키며, 'a figure of radiant power'는 '광채나는 근육질 몸매'란 뜻이 아닐까 한다(그것이 미시마가 보기엔 인간의 '최고의 영광'이라는 것). 미시마가 자신을 근육질 '몸짱'으로 만든 이유가 달리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미시마는 1970년 일본 자위대 본부를 점거한 채 자위대의 총 궐기와 일본의 재무장을 호소하면서 전통무사식으로 할복자살한다.  

 

 

 

 

두번째 책은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작가들, 2006). 때는 1904년, 장소는 우리의 제물포 앞바다. 그리고 두 주연은 러시아와 일본의 수병들이다. 저자는 1904년 '르 마탱' 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는데, "그 해 4월 1일 밤 그는 러시아 수병들로부터 한 전투 이야기를 취재했다. 그 전투는 바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열강이 벌인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 즉 러일전쟁의 서막을 연 제물포해전이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특유의 문학적 필치로 기사화하여 신문에 연재하고, 이를 묶어 책으로 출간하기에 이른다"는 게 책의 출간배경이다.

우리로서는 예기치 않은 역사적 사건에 관한 예기치 않은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개를 좀더 옮겨오자면, "100여년 전의 문헌을 발견하여 번역한 이 책은 제물포해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사료 중 하나이자 유럽인의 (편향된) 시각에서 재현한 전쟁 기록이기도 하다. '제물포의 영웅들'을 만나게 된 과정, 그들과의 인터뷰, 제물포 해전 이후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묘사와 지은이가 만난 러시아 수병들과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교차하는 구성을 띠고 있으며, 외교문서와 여러 관련 자료로 제물포해전의 실체를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가 패배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반일친러의 시각에서 러시아 병사들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지은이의 묘사,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임에도 한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구성, 전쟁의 잔인한 참상에 대한 문학적이고 생생한 묘사 등으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할 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200쪽 남짓이니까 비교적 가벼운 분량인데, 사실 '제물포 해전은 이듬해 벌어지는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의 서막일 테니까 이 책 또한 그 서론쯤으로 읽힐 수 있겠다. 그럼, 본론은? 러시아쪽에서 나온 책 두 권이 눈에 띄는데, <러일전쟁사>(건대출판부, 2004)와 콘스탄틴 플레샤코프의 <짜르의 마지막 함대>(중심, 2003)가 그것이다. 후자는 출간당시 언론의 관심을 끈 책이지만 곧 잊혀진 듯하다.

저자는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해협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쓰시마 해전'을 인류 역사상 세계 5대 해전 가운데 하나로 꼽으면서, 이 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발틱함대의 길고도 험난한 항해와 순식간의 처참한 패배를 생동감있게 그려내고 있다고. 물론 이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반면에 러시아는 혁명의 불길에 휩쓸려 제국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른다(러시아제국은 크림전쟁(1853-56)에서의 패전 이후 이 또 하나의 이 치욕적인 패배를 겪으며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쪽 시각에 대해서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명문각, 1992)을 참고할 수 있다고 한다. 

 

 

 

 

세번째 책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미국의 1920년대 풍경을 다루고 있는 F. L. 알렌의 <원더풀 아메리카>(앨피, 2006)이다. 책 자체가 '고전'인데,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좋았던 옛날;에 대한 기록"으로서 "1931년 출간된 이래, 수정과 증보를 거치면서 당대의 모순과 역동성에 대한 세밀화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듣는 고전적 저서"라고. 원제가 'Only Yesterday'인 국역본의 부제는 '미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시대에 대한 비공식 기록'이다.  

소개를 부분적으로 옮겨오자면, 책은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의 종결부터, '쿨리지Coolidge(후버Hoover) 호황'을 극적으로 붕괴시킨 1929년 11월 13일 주식시장 대폭락까지 11년간의 역사를 아우르며 무한한 낭만과 가능성이 살아 숨쉬던 미국의 청년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정숙한 여성과 신여성의 치마 길이 차이, 알 카포네(사진)가 들고 다닌 명함 문구 등 사소한 사건들로부터 당시 대중들의 사고방식의 변화를 읽어내고, 적색공포―스캔들에 대한 열광―매너와 도덕의 혁명―부자의 꿈―지식인의 반란―부동산 투기 열풍―대활황 주식시장―주식시장 대붕괴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거대한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1920년대의 매력'을 생생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 국역본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들이 1,000점 포함되어 이해를 돕는다고 한다. <제국의 부활>이나 <미국이라는 이름의 후진국> 혹은 마이클 무어의 미국('더티 아메리카')과는 좀 다른 시대, 다른 모습의 미국을 들여다볼 수 있겠다. 무어가 되돌려달라고 하는 미국이 '원더풀 아메리카'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류하자면, 시대사이면서 문화사에 속하는 책인데, 같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문화의 유행을 다루고 있는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3)를 비교해가며 읽어볼 수도 있겠다. 한편, 러시아의 1920년대는 혁명 이후 신경제정책(NEP) 시기에서 스탈린 시대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였다. '원더풀 아메리카' 못지 않게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사의 거리가 될 텐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에 관한 책들은 소개돼 있지 않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에서 그 뼈대 정도를 간추릴 수 있을 따름이다.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현장증언과 함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이 관통한 시대이기도 했던 1920년대...

 

 

 

 

네번째 책은 지중해로 넘어간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5인의 공저인 <지중해의 역사>(한길사, 2006)이 그것인데, 포괄적인 통사 형식의 지중해사는 처음 소개되는 게 아닌가 싶다. 소개를 옮겨오면, "지중해를 둘러싼 장대한 문명의 변화상을 담아낸 역사서"로서, "프랑스, 이탈리아[구 로마제국], 그리스 등의 유럽 국가들과 이스라엘, 오스만투르크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과 아랍 국가 등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쳐온 역사가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진다. 충실한 구성으로 프랑스의 지중해 관련 수업과 강의에서 교재로 자주 선택되는 책이다." 즉, 지중해사 '교과서'라고 보면 되겠다.

지중해 문명과 관련한 국내서로는 국내 저자 13인이 힘을 모은 책, <지중해, 문명의 바다를 가다>(한길사, 2005)가 있다. 김진경 교수의 <지중해 문명산책>(지식산업사, 1994/2001)과 진원숙 교수의 <지중해 문화사 이야기>(노벨미디어, 2003)도 관련서이고,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사랑의 풍경>(한길사, 2003)도 부제가 '지중해를 물들인 아홉 가지 러브스토리'인 만큼 이 분야의 책으로 꼽아볼 수 있겠다.

 

 

 

 

그렇게 꼽자면, 사제지간인 그르니에-카뮈의 지중해도 빠뜨릴 수 없겠는데,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한길사, 2003; 청하, 1990)은 그 기본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카뮈 전공자인 김화영 교수의 산문집 <행복의 충격>(책세상, 2001)도 <지중해, 내 푸른 영혼>(민음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듯하고, 그게 카뮈의 <결혼. 여름>과 함께 '지중해'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듯하다. 거기에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영화 <지중해>(1991)릉 얹으면 지중해에 대한 나의 '추억'은 거의 완성된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언제나 한 여름의 그 바다!..

 

 

 

 

<지중해의 역사>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책으로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비엔나>(구운몽, 2006)도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19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빈)에서 얻어진 지적·예술적·문화적 성취들을 탐구한 저작으로, 198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원제는 'Fin-de Siecle Vienna: Politics and Culture'이다.  

소개를 더 옮겨보면, "지은이는 '포스트니체 문화(post-nietzschean culture)', 즉 니체 이후의 지성사와 문화사를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모델로 비엔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문학, 도시계획, 조형예술 등 각 분야에서 비엔나의 문화현상과 대표적인 인물들의 활동상을 역사가와 문화분석가의 입장에서 깊이 접근해 들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쓰여진 총 7개의 장은 각각의 개별적인 연구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이다." 가령, "압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비엔나 공간에서 일어나는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표현한 건축가들, 자유주의의 몰락 속에서 발생한 표현주의 문화 등을 분석"하면서,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 아르놀트 쇤베르크(음악), 쿠스타프 클림트(회화) 등 '아버지에 대한 저항'을 기본 코드로 빈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지성인들을 다뤘다."

비엔나 건축에 대해서는 임석재 교수의 <추상과 감흥>(문예마당, 1995)이 오래전에 나온 책이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는 두말한 건덕지도 없고, 쇤베르크 관련서로는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를 주제로 한 노명우의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문학과지성사, 2002)가 읽을 거리이다. 이 참에 새로 나온 클림트 화집도 구해보실 수 있겠다. 이 모두가 동시대 비엔나의 소산이라고 하니까 쟁쟁하기 그지 없다. 다만 거기에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빈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 삶을 조명한 책", 스티븐 툴민의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를 더 얹으면 금상첨화겠다.  

 

 

 

 

당신이 비엔나까지 둘러봤다면, 이제 모국행을 서두를 때이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2006)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책은 "2005년 3월부터 1년간,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묶"은 것으로 그 대부분을 읽은 터이지만, 책으로 묶어서 읽는 맛은 또 다르다. "우리 신문학 백년사에서 제 방 하나를 너끈히 가질 만한" 시인 50명의 시집을 한권씩 소개하는데, 이만한 연재가 우리 언론사에서 자주 있었던 것인가를 묻고 싶다. 내가 금요일은 뺀 평일에 한국일보를 주로 보는 것은 순전히 고종석 때문이라는 걸 굳이 고백해야 할까? 아마도 내년 이맘때쯤에는 고종석 버전의 <말들의 풍경>도 출간될 것인바, 그런 일만으로도 나이먹는 일의 허망함이 절반은 상쇄된다고 말하고 싶다(나머지 절반의 허망함은 각자가 누리도록 하자).

거기에 덧붙여, 김윤식 교수의 새 평론집 <작가론의 새 영역>(강, 2006)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 그밖에 책에 관한 책들, 곧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6),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마티, 2006), 그리고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 2004)의 저자 최종규의 <헌 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 2006)은 도대체 책이 무엇인관데, 란 질문을 던지게 해주는 책들이겠다. 그런 질문들에 미처 답하지 못하더라도 <조선 최고의 명저들>(휴머니스트, 2006)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조선왕조실록>, <열하일기>, <난중일기> 등 조선시대를 대표할만한 14개의 명저들을 소개"하면서, "기행문과 일기, 보고서, 문집 등 국보급 기록에서 당시 민중 사이에서 즐겨 읽힌 베스트셀러까지, 각 문헌의 주요 내용과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 당대인들의 사상과 문화적 깊이를 살핀다"고 하니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06. 04. 05 - 06.

P.S. 부록으로 클림트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키스'를 이 자리에 옮겨놓는다. 책읽기에 지친 영혼들께서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용맹정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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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8 00:25   좋아요 0 | URL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다라는 말에 다소 의외였었는데 이 책을 보니까 그 말이 이해가 되더군요. 다치바나가 말한 것은 '상대적' 바보였던 것이지요. 동경대 전공투의 말이 다소 매끄럽진 않지만 서양 철학, 특히 현상학을 섭렵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이였습니다. 일본 대학생이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68혁명에 동참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그런 지적 기반이 있지 않았나 새삼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6-10-28 00:50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구입도 못한 책인데요(^^;)...
 

집에 인터넷이 개통된 지 일주일만에 '주간 서재의 달인'의 되어 어제 5,000원의 적립금을 받았다. 31등을 목표로 한 '서재질'이긴 했지만 대번에 20위권 안으로 진입하게 되어 좀 머쓱했다(더불어 느낀 건 약간의 우쭐함과 함께 '배신감'이었다. 남들은 이런 '허접한' 일에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구나! 라는 데 생각이 미친 때문). 어제 거기에 대한 감상을 '알라디너의 길'이란 제목의 페이퍼로 썼는데, 등록하기를 누르는 순간 먹통이 되더니 날아가버렸다. 나의 '뼈저린 반성'과 함께(황지우의 시 '뼈아픈 후회'를 패러디한 반성문이 어제 쓴 글의 골자였다). 여하튼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쓴다. 내용이 그대로 보전될 리는 물론 없지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책 이야기들을 좀 내뱉음으로써 나대로는 '청결한' 정신상태를 유지하자는 게 페어퍼들을 올리는 기본 취지인데, 보기에 따라서는 유난스러워 보일 만도 하고('이 사람'을 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젠 적립금 '수혜자'까지 돼 버렸으니 발뺌도 못하게 됐다. 지난주부터 집에서 야심한 시각에도 서재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된 탓에 얻게 된 장점은 '진행중'인 글을 거의 만들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고, 그건 내심으로 내가 가장 부듯하게 생각하는 것이다(물론 예전에 '진행중'이라고 미뤄놓은 글들이 채무처럼 아직도 꽤 남아있지만).

 

하지만, 이런 시간투자는 다른 일들(특히 생계!)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당연 든다. 한데, 문제는 나날이 늘어나는 '수거물'들이다. 거의 처치 곤란한 수준이다. 떠오르는 단상들과 참견들을 긁어모으면 매달 책 한권 분량은 적어내려갈 듯하다. 하니, 취지야 그럴 듯하다고 쳐도 방도는 좀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을 가다듬으며 다시 읽는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도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도로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젋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들 넣어주는 바람뿐

 

 

나는 이런 식의 과장된 수사나 자기 비하에 공감하는 바가 거의 없다. 거기에 모든 게 걸려 있지 않다면, 그냥 후회의 포즈에 불과하기 때문에. '폐허'를 간직하고 있다지만 작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에 조직위의 예술총감독으로 참여하면서 보여준 공로로 얼마전 문화훈장까지 수상한 황지우 시인은 올해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지난 2월 신입생들 맞으면서 그가 '공인'으로서 건넨 축사의 일부는 이렇다고:

 

“바람둥이 제우스가 앙앙대는 부인 헤라와 부부 싸움을 하다가, 패기 시작했는데, 요즘 말로 하면 가정 폭력의 원조였다. 아들 헤파이스토스가 대드니까, 제우스는 아들을 발로 차버렸다. 하늘 끝에서 지상으로 추락한 헤파이스토스는 절름발이가 됐지만, 그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됐다. 무릇 예술가란 어딘가 눈에 띄는 결함이나 결핍이 있다. 예술가는 견딜 수 없는 결핍 속에서 위대한 무엇을 해낸다. 여러분도 자신의 결함을 자신의 특징으로 ‘잇빠이’ 키워라.”(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총장님 말씀에 끼어든 '잇빠이'가 시인의 표징이자 자존심이다. 더불어 처신에 대한 그의 자기 정당화이다. 또한 더불어, 이 예술가론은 막바로 그의 시론이기도 하다는 걸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뼈아픈 후회'는 그 자신의 사소한 '결함'을 '잇빠이' 뽑아낸 게 아닐까? 연이어 공직을 맡게 된 시인의 소감은 이렇다: “인생 ×됐다. 몽골 초원에서 양떼를 키우며 살고 싶었는데, 또 덫에 걸려 시간을 차압당했다. 지금 몽골의 내 양떼들이 눈을 맞으며 흩어져 있을 텐데….” 그 양떼들이 아마도 시인/총장 황지우가 또 '잇빠이' 키우고 있는 자신의 내밀한(공공연한) 판타지일 것이다. 게눈 속의 연꽃처럼. 아래는 시인/총장 황지우.

 

  

여하튼 그의 '뼈아픈 후회'를 본받아 '뼈저린 반성'을 산문적으로 해보자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책들이 놓였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책들, 어딘가 몇 군데는 찢기고 해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책들의 사막도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도로 이 무시무시한 책탐에까지 끼어들어오지는 못했다(오, 숱한 구박이여!).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아빠는 자기 생각만 해!")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이어지는 운문.

 

책에 묻혀 아무도 사랑해 볼 틈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저린 반성은 바로 그거다

그 시덥잖은 책들을 위해 그 누구누구를 더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젋은 시절, 철없는 욕심에

내가 자청한 책사기는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잔소리 없이는 들어오지 않는 나의 서재

다만 죽은 저자들의 머리맡에 가라앉는 책먼지뿐.

 

 

신이시여, 이것이 정녕 알라디너의 길이옵니까?!

 

06. 04. 04.

 

P.S. 얼마간 예상했던 것이긴 한데, 오늘(04. 05)로써 서재를 즐겨찾는 분이 600명에 이르렀다. 300명을 넘어선 지 대략 9개월만이다. 과거에도 혼자서 자주 써오던 '독서일기'였지만, 본의 아니게(나는 알라딘의 '고객'이었을 뿐이었다!) '나의 서재'라는 블로그를 갖게 된 이후에는 다른 이들의 이목에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즐겨찾는 분들의 1/3 가량은 '로쟈'에 대한 이런저런 '비호감' 때문에 서재를 찾는 '적들'이 아닌가 싶고, 반대로 1/3 정도는 소극적으로라도 로쟈를 지지/응원해주시는 '우군'들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경우이든, 그리고 언제든 나는 배울 준비가 돼 있다(나의 '수다'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다). 즐겨 찾으시는 만큼 즐겨 꼬집어주시고 가르쳐주시길 기대한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알라디너 모두의 '파이팅!'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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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6-04-04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아가버린 것'은 허망합니다. '날아가버린 것'은 더이상 로쟈님의 것이 아니니 넘 미련두지 마셔요....^^;

twoshot 2006-04-0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립금 5천원...5천만원도 아니고 5천원 아니겠습니까. 요새는 시집도 6천원이니까 별 도움은 안되겠군요. 그냥 사막을 건널때 낙타에게 물 한모금 먹이면 되겠네요...그리고 낙타를 잡아먹어야 하는건가...쿨럭..

2006-04-04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4-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흔한 일인데요, 뭐.
marcus님/ 낙타들은 당연히 먹어치워야 하지 않을까요? '책'에 그렇게 나와 있다면!
**님/ 제딴엔 가벼운 수다들이 '무게중심'을 잡는다시니까 제가 무게 좀 잡겠습니다. 한데, 지금 타고 계신 건 뭔가요?^^

마늘빵 2006-04-0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오천원 받을 만한 자격 충분해요. 저 방금 로쟈님한테 땡스투 두 개 눌렀어요. 잘했죠?

로쟈 2006-04-04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하셨습니다.^^

로드무비 2006-04-05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덥잖은 책들을 위해 그 누구누구를 더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밑줄 쫘악.^^


연우주 2006-05-1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늦은 댓글이지만 글 너무 좋은데요? 황지우 시집 검색하다 찾았습니다. 와우! 패러디 글도 너무 좋습니다.

2006-06-17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1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력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