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이긴 하지만 '문자중독증'이 있는 나는 여하튼 뭐든 읽을 거리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없다고 해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경증'이다). 거의 언제나 손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또 대개는 너무 많은 책들을 넣고 다닌 탓에 팔길이가 좀 늘어나기까지 했다(하긴 중고등학교 때의 무거운 책가방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가방 모찌' 경력은 4반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저녁시간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도 (특별한 읽을 거리가 없는 한) 신문이라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엊저녁에도 '문화일보'를 읽다가 얻은 소득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놓는다(한동안 읽을 거리가 없는 신문이었는데, 최근에는 제값을 한다). 언젠가 패러디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인용해먹을 생각인 인터넷유머 '고스톱 만가' 시리즈와 함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은 이왕주 교수의 칼럼 '진정한 영웅'이었다(이런 자질구레한 쓸 거리들을 다 적어놓기에도 '하루'는 역부족이다. 하긴 별것도 아닌 벌이에 충당해야 하는 시간으로도 모자란 것이니! '벌이'가 아닌 글들의 8할은 바람결에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철학풀이, 철학살이>(민음사, 1994)부터 최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까지 뜸하지는 않을 만큼의 저서를 내고 있는 저자의 글을 내가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소설 속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7) 같은 책이 그렇듯이 '칼럼집'이라는 가벼운 형식과 '철학'이라는 무거운 콘텐츠가 잘 버무려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내가 별로 갖고 있지 않아서였다. 어제 읽은 칼럼은 그런 생각을 재고해보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의 <쾌락의 옹호>(문학과지성사, 2001) 같은 '가벼운' 책을 오늘이라도 사들게 될 것이다. 아래의 칼럼 때문에.

 

 

 

 

문화일보(2006. 04. 27) 한국계 천재 소녀 골퍼 미셸 위가 국내 재벌기업이 후원하는 골 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한다. 한 신문은 미국에 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 열일곱 살짜리가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이 우리 돈으로 약 2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셸 위. 어쨌든 대단하다(*그녀는 잔디밭의 영웅이다). 하인스 워드의 경우처럼 미셸 위의 방한은 영웅에 목마른 이 반도를 또 한번 들뜨게 할 것 같다.



-그러나 대중의 이런 환호에는 돌이켜 살펴봐야 할 대목이 있을 것이다. 공자도 ‘모든 인간들이 달려들어 환호하는 일에 반드 시 반성해서 살펴야 할 무엇이 있다(衆好之必察焉)’ 고 충고했다. 워드와는 달리 미셸 위 신드롬은 이뤄놓은 성취가 아니라 이루게 될 성취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터잡고 있다. 그만큼 위태로 운것이다. 속절없이 스러져버린 미래의 천재, 가능성의 영웅이 얼 마나 많더냐.

-며칠 전 서울 등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다. 부모 없는 사이 초등학생 세 명이 라이터놀이하다 불을 낸 것이다. 마침 서울 화곡여자정보산업고 1학년 여학생 10명이 그 곁을 지나다가 연기와 화염에 싸인 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이들을 합심하여 침착하게 구해냈다.(*이 여학생들은 지난 월요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 여학생들도 남들처럼 그 상황을 무심히 스치거나 외면하거나 기껏 119에 신고하는 것쯤으로 떼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히 그 상황 안으로 뛰어들어 하마터면 화마 속에 사라져갈 뻔한 어린 생명들을 건져냈다. 그 여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동갑내기 미셸 위처럼 유명하게 될지 어떨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모두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직하거나 결혼해서 이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갈지 어떨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제 좀더 예민한 후각과 눈으로 이웃과 주위에 고통 받는 이웃은 없는지, 상처로 휘청거리는 타인은 없는지 살피며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난자들에게 기꺼이 손을 뻗쳐 붙들어주리라는 것을.

-영웅은 대중의 환호나 갈채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이 이름 없는 여학생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으로 보인다. 자가용 비행기쯤이야 없으면 어떠냐. 그 치열한 성장기에는 그냥 우산없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걸어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로 열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애 동안 지켜내는 것이다.(*이 여학생들은 '이미지'도 없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에서 주인공인 가출 청소년 홀든 콜필드는 머나먼 서부로 떠나기에 앞서 만난 여동생 피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조그만 꼬마들이 뛰어노는 넓디넓은 호밀밭을 늘 눈앞에 그려보곤 해. 수많은 꼬마 녀석들이 있을 뿐 어른은 나밖에 없는 거야. 오직 나밖엔. 나는 언제나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지. 내가 하는 일은 그 꼬마녀석들 중에 누구라도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서려면 달려가서 붙잡는 거야. 애들이란 달릴 때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럴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들어주는 거야. 이게 내가 하루종일 하게 되는 일의 전부지. 나는 정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이게 바보짓인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야.”(*주인공의 이 대사는 사실 이 작품의 감동을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우리 청소년들에게서 회의와 절망만을 확인하는가. 이런 소녀들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 모두가 그저 이기적인 공부벌레가 되어 책상 앞에만 붙들려 있는 것도 아니고,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열광하거나 컴퓨터 게임 같은 것 에 몰두하면서 생을 소모하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 어린 영혼들이면서 더 어리고 더 약한 영혼들이 뛰노는 호밀밭 가장자리의 낭떠러지 곁을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나서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표상이 아닐까. 누가 그 이름을 기 억하는가, 기억하지 않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잊어진다는 것, 그냥 사라져간다는 것, 그게 또 무슨 상관이랴. 호밀밭의 파수꾼은 훈장을 위해, 그 잘난 포상을 위해 낭떠러지를 지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이다.

06. 04. 28.

P.S. 좌파니 우파니, 뉴라이트니 뉴레프트니 하는 치들이 아니라 세상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인 이 파수꾼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는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다. 적어도 '잔디밭-세상'이 아닌 '호밑밭-세상'에서는 그렇다. 참고로, 홀든은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인 바틀비의 짝패이다. 밥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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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4-28 11:48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오...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로 열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애 동안 지켜내는 것이다." 진짜 어려운 말이네요!

로쟈 2006-04-28 16:31   좋아요 0 | URL
'말'이 어려운 건 아니고 실행하는 게 좀 어려운 일이죠.^^
 

강의준비를 위해 지난 학기 강의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프린트아웃 해놓은 모스크바 통신문 하나를 읽었다. 2005년 1월 17일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진 것인데, 귀국을 2주 가량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거의 막바지 통신문이었고, 분량으로 보아 5-6시간은 족히 걸렸을 법하다. 최근에 교수신문에서 '우리 학문과 철학'이란 기고문을 옮겨놓은 바 있는데, 그와 관련한 '나의 의견'으로 참조가 될 만하겠기에 정리해서 '창고'로 옮겨놓는다(다시 읽으면서 '철학적 농담'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라는 이전 통신문의 '보유'로 씌어진 것이지만, 여기서는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로 제목을 고쳐달도록 하겠다. 내가 보유하고자(보태어 채워넣고자) 했던 문단(=구멍)을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아래는 모스크바 대학 건물의 일부).

 

짐작에 주로 ‘구멍’에 해당한 건 다음의 한 단락이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와 비교할 때 다른 구멍들은 부차적/부수적이거나 사소한 듯하며, 나는 이 문단에 대해서만 주로 군말을 채워넣기로 하겠다.

이 문단에서 나는 로고스에 대한 모종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는데(‘로고스’는 이성, 논리, 언어를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겠다), 나열된 걸로만 따지자면 로고스에는 철학적 로고스도 있고, 소설적/시적 로고스도 있다(다른 문단에서 ‘과학적 로고스’도 언급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하에서라면, 소설적/시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라고 통칭하겠다)의 포함 유무에 따라 (내가 보기엔) 철학의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1)철학=철학적 로고스, (2)철학=철학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 그러니까, 인용한 문단은 그러한 유형학을 풀어서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첫번째 유형의 사례로 후설의 현상학과 초기 분석철학(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을 들었고, 두번째 유형의 사례로 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을 들었다(흔히 ‘철학의 미학화’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유형이다).

나는 이 두 유형 사이에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 않았다. 내가 주장한 건 이 두 가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반대로 문학의 경우에도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문학=문학적 로고스, (2)문학=문학적 로고스+철학적 로고스.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를 모두 구성인자로 갖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엔 철학이 되고 어떤 경우엔 문학이 되는가란 질문이 가능한데, 나는 각각의 경우에 (야콥슨의 용어를 쓰자면) ‘지배소(dominant)’가 다른 거라고 답하겠다(쉽게 말하면, 방점이 다른 것). 해서, ‘문학적인 철학’(실존주의가 대표적이다)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인 시/소설’(릴케나 퐁주의 시, 혹은 투르니에나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을까)도 있는 것이다.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를 양 극점으로 놓는다면, 철학과 문학의 이 네 가지 유형은 스펙트럼화될 수 있다.

<철학적 로고스 – 철학적/문학적 로고스 – 문학적/철학적 로고스 – 문학적 로고스>

이러한 스펙트럼이 갖는 장점은 철학과 문학의 관계를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철학이냐 문학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더불어, 너무 철학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각각의 ‘동네’에서 배제되는 ‘경계적’ 작가/철학자들을 이러한 구도에서는 정당하게 고려할 수 있다(가령, 니체의 경우).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놓이는 것은 ‘기의-논리의 극대화’와 ‘기표-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전자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내가 이해하는 ‘백색의 신화’이다), 후자는 단어에 폭탄을(아니면 쓰레기통이라도) 갖다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킨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문학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가령,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란 동요에서 리듬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나리 나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에 철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불필요한 ‘잉여’이지만, 문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오히려 필수적인/본질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지난 통신문의 제목을 만들어준, 나보코프의 칼람부르 ‘dental and transcendental’은 철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불쾌한 넌센스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유희적 ‘통찰’을 담고 있다. 거기에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언어의 유형학 또한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그건 아래와 같다.

<인공어(=기호) - 자연어 - 시어 - 자움어(=새의 언어)>

‘2차 모델화 체계’(유리 로트만)로서의 문학어는 자연어를 재모델화, 재코드화한 것이다. 그러한 재모델화/재코드화의 방식은 다양해서, 장르나 문체, 기법 등을 포괄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슈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문학)이란 기법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로트만에 따르면, 이 기법에는 또 플러스(+) 기법과 마이너스(-) 기법이 있다. 문학이론도 깊이 들어가자면 나름대로 복잡한데,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했다).

문학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문학은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문학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문학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문학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 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문학이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우리가 학교 졸업하면 군대 가듯이). 그리하여 좋은 문학이 우리를 도취시키는 문학이라면, 좋은 철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빈틈도 내보이지 않는 깐깐한 철학이다(칸트에게, 헤겔에게, 스피노자에게 빈틈이 있던가?). 이러한 철학이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JSA 출신인 한 후배는 요새도 자세가 나온다).

 

알다시피, 철학사에서 그러한 보편어의 역할을 해온 것이 중세와 근세의 라틴어였고, 요즘은 영어이다(아마도 독어가 넘버2 정도이고). 해서, 적어도 국제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 하다 못해 철학 전공이라고 명함이라도 내밀기 위해서는 영어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하는 것(한국어로 논문을 쓴 철학박사들? 그들도 최소한 번역투의 문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영어나 독어에서 바로 번역한 듯한 논문. 즉, “이게 원래는 한국어 논문(수준)이 아닙니다”는 걸 보여주고 암시하는 논문 말이다). 이때 영어는 일개 자연어가 아니라 특별한 자연어, 즉 보편어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미국이 일개 국민/민족국가 레벨을 넘어서듯이). 그러니 다들 철학은 주로 미국에서(혹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이며(러시아 철학 전공자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철학을 말할 때는 영어나 독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이다(한국어라는 자연어는 철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철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재미철학자 김재권의 경우, 미국의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철학논문 문장의 모범으로 제시될 정도로 탁월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대학생 때 미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어를 거의 망실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한국어라는 자연어가 그의 ‘보편적’ 사고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 나는 대학 1학년때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심재룡 편)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글에서 김재권이 강조한 것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보편적’ 자세였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 국적이란 건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자연어의 구속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 철학의 문제들이란 보편적이기 때문에(하지만, 그에게 자연어인 영어는 동시에 보편어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분석철학 계통의 심리철학 권위자인 김재권의 ‘보편적 문제’란 심신문제, 즉 ‘mind-body problem’이다. 주로, 마인드(=심리현상)와 바디(=물리현상)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형식논리상으로 기본적인 입장은 둘로 나뉜다. 관념론(마인드는 바디와는 별개로 ‘실재’한다)과 유물론(마인드는 부재하거나 바디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물론 각각의 입장은 다시 세분되며(가령, 유물론은 환원적 유물론과 비환원적 유물론으로 나뉠 수 있다) 김재권은 자신이 제창한 ‘수반이론’으로 유명한데, 분류하자면 ‘환원적 유물론’에 속한다(내가 이해한 대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으로 심리현상은 물리현상으로 환원가능하며, 물리현상에 수반되는 현상이라는 것).

나는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 동의는 ‘심신문제’라는 (임의적인) 문제틀을 고수하는 한에서이다. 그 문제틀의 임의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김재권의 내한 강연을 언급하면서 김용옥이 지적한 것인데(아마도 무슨 TV강연에서였다), 가령 기(氣)철학적 세계관 혹은 논리에 선다면, 마인드와 바디라는 별개의 ‘실체’는 인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인드가 바디에 수반된다든가 하는 논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우리말의 ‘몸’/‘맘=마음’ 또한 마인드/바디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김재권은 심신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수반이론이 진지하게 수용/검토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영미권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일 뿐이다(혹은 그러한 문제틀이 ‘이식된’ 한국 대학의 철학과도 포함될는지 모른다).



물론 수반이론은 대단히 ‘논리적인’ 이론이며, (비판도 허용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론의 논리성이 반드시 문제틀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그건 나름대로 재미있는 ‘미식 축구’가 ‘재미의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수반이론을 말하고 김재권을 대단한 철학자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론이 보편적이거나 최고의 심신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한국인, 적어도 한국계 철학자이기 때문이다(비록 그가 한국어를 거의 잊었다고 하더라도).

김재권이 분석철학계의 가장 저명한 한국인 철학자라면 현상학계에서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한국인 철학자는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가경이다(훨씬 아래 세대로는 분석철학의 이승종, 현상학의 이남인 정도가 유명한 듯하데, 공통적인 건 영어/독어로 책을 썼다는 것). 그의 초기 주저가 한국어로 쓴 <실존철학>인데, 이후에 외국으로 떠난 그가 독어, 혹은 영어로 써서 명성을 얻은 책들은 내 기억에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기 서구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두 조류가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고 할 때, 두 한국인 철학자가 관련학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인’ 철학자일 뿐이며, 자연어로서의 ‘한국어’가 걸려있는 ‘한국철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그건 ‘한국인 문학’이 ‘한국문학’과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한국어 철학, 즉 자연어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인데, 사실 그러한 문제의식의 결여/부재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철학적 입장/강령에 기본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결여/부재가 새겨져 있다?).

 

20세기 서구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특징지을 때(한때 분석철학계의 기린아였던 리처드 로티는 <언어적 전회>란 책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아주 당연하다(아예 “적은 우리 안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주객이 전도된 것이지만, 분석철학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사병-언어의 닦달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맥아더-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일 뿐”이라는 어록까지 남기며 철학계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기호로서의 인공어이다. 철학논문은 가급적 기호논리와 명제함수, 수식 등으로 가득 채우고, 자연어는 가급적 배제할 것(비유컨대, 이러한 인공어들이 ‘특전사’라면, 자연어는 ‘방위병’이었다). 철학은 점점 소수정예화하며, 자신들의 은어만으로 소통하게 된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방위병-자연어의 애환이 무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이 직면했던 문제는 영미의 분석철학과는 다소 달랐다. 한전숙의 <현상학>(민음사)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릴 적에 후설은 무슨 공이 같은 걸 죽창 갈아서 송곳을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이런 케이스를 의대생들은 흔히 ‘옵세(obsessed)’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후설의 ‘라디칼리즈무스’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내가 현상학을 정의하자면, 그건 ‘Obsessed Radicalism’쯤 되겠다(‘강박적 급진주의’ 혹은 ‘강박적 근본주의’?). 왜 근본적/급진적이냐면,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다시 정초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로티의 분류에 따르면, 현상학 또한 정초주의적 철학에 속한다. 정초주의적 철학들이 목을 매는 것은 철학의 확실한 토대, 곧 ‘확실성’이다. 어떠한 ‘지진’과 ‘해일’로부터도 자유로운. 혹은 그럴 거라고 착각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주저인 <논리연구>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상학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면 그 방대한 저작을 영어나 독어로 읽으라는 것. 나는 <현상학> 입문서나 <현상학적 운동> 같은 책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어로는 후설이 제법 번역돼 있다), 후설은 수학적 대상들이 논리적인 것이냐(=논리주의) 심리적인 것이냐(=심리학주의)는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3의 것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했는데, 주로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대두하던 심리학으로부터 철학 고유의 영역을 발견/보존하는 것이었다(당시 늙은 철학은 학문계의 새로운 강자인 심리학과 ‘의식’이란 방을 같이 쓰게 됐으므로 자기-갱신이 요구됐던 것. 철학의 회춘).

상식적인 얘기를 좀 늘어놓자면, 그렇게 해서 그가 발견한 것이 ‘지향적 의식작용’(=노에시스)과 ‘지향적 대상’(=노에마)이다. 지향적 의식이란 건 특정 개인의 심리상태나 의식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의식’이고(<논리연구>와 거의 동시에 나온 책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인데, 현상학은 철저하게 ‘의식철학’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과 대비된다. 현상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수용한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그는 무의식을 ‘자기기만’이자 ‘넌센스’로 간주했다), 지향적 대상은 그러한 의식에 현상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실제 대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대상’이다.



어떤 개별적 의식이 어떻게 초월적 의식이 되는가? 그건 옵세적 ‘집중’을 통해서이다. 공이를 갈아서 송곳을 만들듯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텅빈 상태가 된다. 멍청하게 되는 거지만, 좋게 얘기하면 사심(私心)으로부터 자유로운 ‘맑은 연못’처럼 된다(현상학과는 좀 다른 방식이지만, 롤즈의 <정의론> 또한 그런 식의 ‘맑은 연못’, 혹은 백지상태로의 환원을 상정한다. 정의의 조건으로서). 그 ‘맑은 연못’이 초월적 의식이다. 그건 개별적인 의식과 무관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상관물로서 연못에 비치는 것이 초월적 대상이다. 이제 그렇게 비친 것이 대상의 본질이며 그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그게 현상학적 기술이다.

대학 1학년 첫학기에 들은 종교학 강의에서 ‘종교현상학’에 정통하던 담당교수는 현상학의 예로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篇 意自現)”이란 한문 구절을 들었다. 책을 백번(백편?)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현상학적 연애술?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책을 백번 읽는 게 말하자면 ‘송곳 갈기’이고, 지향적 의식작용이다. 그러면, 먹물 뿌려놓은 글자들(=실제 대상)에서 ‘뜻’이라는 지향적 대상이 우리의 머리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옳거니, 그거로군!”).

사실 여기까지는 방법론상으로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지향적 대상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무엇으로? 자연어로! 후설의 철학적 작전은 나무랄 데 없지만(제갈공명 뺨 치지만), 작전을 실행할 병사들(=방위병들!)을 그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비유컨대, 분석철학은 훈련만 뭐빠지게 하고, 현상학은 작전만 아주 열심히 세운다. 해서 분석철학엔 작전이 부재하고, 현상학은 병사들이 부실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언어보다는 의식이며, 언어 이전의 경험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후설이 ‘언어적 전회’ 이전의 철학자라고 보는 이유이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사르트르의 <구토> 얘기를 잠깐 했지만, 이 소설은 셀린느의 소설 외에도 후설의 현상학이 없었더라면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933년(28세) 베를린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불어를 가르치면서 1년간 체재하는데(레이몽 아롱이 부추겼다던가?), 거기서 후설의 현상학을 접하고 폭 빠지게 된다. 아마도 후설을 오래 사숙했더라면, 후배인 메를로-퐁티처럼 ‘정통’ 현상학자가 됐을지도 모르지만(메를로-퐁티는 벨기에의 루뱅에 있는 후설-아카이브에서 후기 후설의 원고들을 직접 열람하고 <지각의 현상학>을 구상한다), 사르트르는 살짝 현상학의 맛만 보고 돌아오기 때문에(혹은 폼만 잡고 돌아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상학을 전개하게 된다. 그게 <상상력>과 <존재와 무> 등의 저작으로 출현하게 되고.

이 사르트르(혹은 로캉탱)의 지향적 대상은 주로 잉크병이나 물컵 종류이다. <구토>는 시작에서부터 현상학적 집중/환원을 시연(試演)해 보이는바, “예를 들어 여기에 나의 잉크병이 든 종이 상자가 있다고 하자. 내가 ‘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으며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런데 그것은 직육면체요 테이블 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말이 없다. 바로 그런 일을 피해야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구토>, 하서, 5-6쪽)

로캉탱의 말을 빌어오자면, 현상학은 현상학적 환원이란 절차를 통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잉크병 하나, 맥주병 하나에 대해서도 책 한권 분량을 써낼 만한 ‘꺼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현상학이 아니라면 <존재와 무>는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상학이 그런 꺼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역사’이다(‘역사현상학’이라고 최근에 좀 개척되는 듯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는 지향적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시간 경험이나 지각 경험 따위는 자신의 직접적인(내밀한) 경험의 대상으로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후설이나 하이데거나 다 ‘시간’만을 존재의 중요한 범주로서 다루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환원하는가?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현상학은 현실의 긴급성에 대응하지 못한다. 송곳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하고, 뭐가 나타날 때까지 백번을 보거나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폭격 장면을 백번쯤 반복해서 보면 혹 모르겠다, ‘미 제국주의’라는 뜻이 노에마로서 현상하는지도...

 

나는 앞에서 언어적 전회의 내용이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면서 동시에 (철학어로서) 자연어의 자격미달(=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했는데, 그럴 경우 그에 대한 방책으로서 두 가지 방향성이 주어진다. 왼쪽으로도 갈 수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것. 비유컨대, 방위병-자연어/일상어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특전사-인공어로의 길과 당번병-시어로의 길(특전사와 ‘특권층’인 당번병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논리실증주의)의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반면에 현상학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나선 이기상 교수가 하이데거 전공자인 것은 자연스럽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학적 대상의 이념성’이라는 후설적 주제의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했지만(‘철학자 데리다’에 대한 정치한 분석서를 쓴 로돌프 가셰는 데리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가 후설이라고 말했다), 끝내 완결짓지 못하고 그라마톨로지와 차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데리다의경우도 하이데거와 유사한 ‘전향’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데리다 전문가로서 김상환 교수가 가장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리다 전문가가 글을 못쓴다는 건 넌센스이다). 지향성이나 이념성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인 것이다(사실 언어와 철학이란 문제는 훨씬 방대한 규모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정도의 글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와 정면대결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방위병들을 데리고?).

대략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서두에서 ‘구멍’으로 제시한 문단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나의 방점은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괄호안의 내용은 그 사례이다.

 

 

 

 

러셀은 자신의 <서양철학사>에서 서양철학자들을 신학적 계보와 수학적 계보로 구분한바 있다. 그에 따를 때,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 등은 모두 수학적 계보에 속한다. 나는 후설의 현상학이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떤 근거에서 무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현상학적 환원의 사례로 자주 드는 것도 삼각형 같은 것인데 말이다(어떠한 변양에도 동일성이 유지되는 이상형/이념형으로서의 삼각형이 삼각형의 노에마이다). 사실, 후설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 관심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차적 관심이다. 내가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철학자에 대해서 여러 말을 늘어놓지 않겠다(그런 후설이 내게 지향적 대상으로 현상할 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이어서,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제껏 해명해 온 것이니 여기서도 이해하기에 억지스러운 대목은 없어 보인다(에스토니아 태생의 레비나스는 어린시절 읽은 러시아 문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철학에서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두번째 유형, 즉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교합으로 이루어진 철학(그건 문학이어도 무방하다)에 애착을 갖고 있다(나는 이미 지난번 통신문의 말미에서 갈채와 꽃다발을 던진바 있다). 때문에, 사르트르와 데리다가 나의 ‘영웅’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로고스의 마임극을 사랑하는 것이다… 

 

 

 

 
P.S. 짧게 마감하려고 했던 글이 본의 아니게 또 (예상보다) 길어졌다. 좀 딱딱한 글이었던 것 같아서 시 한편을 옮겨둔다. 오규원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이다(언젠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한국현대시와 현상학’이란 테마의 평문을 쓴다면, 내 생각에 오규원은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다만, 그의 주된 관심은 의식과 대상이 아니라 현상과 언어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잉크병을 바라보듯이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를 바라본다. 아마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으리라. 세보고 또 세보았으리라. 그리고 그걸 기술한다. 정확하게 있는 것들만. 정확하게 반짝이는 것들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 하지만, 없지 않고 차라리 있는 것들이 때로 정겹고 그냥 아름답다. 비록 깨어져 있더라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P.S.2. 이 ‘깨어져 있음’에 대한 관심이 내게 빈틈없는 철학적 로고스보다는 문학적 로고스에 끌리도록 만든다(‘빈틈없는 것들’이 철학적 로고스에 끌린다면, ‘깨어진 것들’은 문학적 로고스에서 안식을 찾는다).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깨어져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즉 ‘거기에 있음(being-there)’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being-broken-there)’이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음(being-scattered-there)’이다.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being-battered-there)’이다. ‘모어-베터-블루스(More better blues)’를 들으며(이 ‘blues’에 군복이란 뜻도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그렇게 (얼룩덜룩) ‘희미해져 있음(being-blured-there)’이다. 그렇게 ‘어색해져 있음(being-awkward-there)’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를 흥얼거리며, 신병반(awakward squard)으로 들어갔었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당번병 방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었지. 거기서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음(being-waiting-there)’.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출근하는 대신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농담>을 빌려와 읽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물어보았어. “O my life, o my God, you have to be joking?!” 그러더니 쩝쩝, 아직도 이런 농담을 쓰고 있네, 젠장...

06.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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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2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님 철학의 어떤 분야 강의하세요? 궁금궁금.

로쟈 2006-04-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문학강의 하는데요(--;)...

마늘빵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로쟈님 철학 전공 아니셨나요? 아 러시아 문학이세요? 엄... 온갖 철학자들을 다 다루셔서 철학전공하신줄 알았어요.

로쟈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농담'이 부전공입니다...

마늘빵 2006-04-2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단하신 내공이십니다.

로쟈 2006-04-2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에도 내공이 필요하긴 합니다. 거울 보면서 매일 연습합니다.^^

2006-04-27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akeaftermopo3 2021-09-2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는 ...
 

내일, 곧 4월 26일은 지난 1986년 구소련(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맘때 이런저런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어느 새 1년이 흘렀다. 따로 준비한 건 없고, 대신에 녹색연합의 블로그에서 '체르노빌, 잊지 못할 이름'이란 글을 옮겨온다. 열심히 준비한 글이며 필자는 김미영 활동가이다. 문단조절이나 원문에 첨부된 2장의 사진 외의 이미지 부가 등은 모두 나의 조작이다.

-며칠 전부터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기사가 드문드문 보이더니 사고 당일인 26일에 가까워오자 버스 안 라디오 뉴스에서도 그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체르노빌에 관한 글 한편을 써보겠다고 다짐한 이후 체르노빌이란 글자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지고 그 글자가 들어간 잡지도 여느 때와 달리 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올해가 20주기 되는 해인지라 다른 때보다 기사가 더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사고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 저는 올해가 그 사고가 일어난 지 20년 째 되는 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사고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진행되었고 후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과 잡지 신문을 토대로 제가 나름대로 쌓은 내용을 지금부터 나누려고 합니다.

-체르노빌은 그 당시의 구소련,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입니다. 1986년 4월 26일 이른 새벽 1시 경에 체르노빌 원전에서는 출력을 낮추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원자로 중 제 4호기에서 그 실험은 진행되었는데 사고 전까지는 가장 좋은 운전실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원자로에 주게 될 부담과 안정성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운전 담당자와 안전 담당자가 충분히 정보를 교환하지 못한 관계로 실험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불행히도 운전원들이 자동정지 장치를 꺼버리는 실수로 인해 원자로 출력은 순간적으로 치솟았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열이 발생하여 핵연료는 녹아내렸습니다. 이어서 뜨거운 핵연료와 물이 만나 증기폭발이 발생하였고 추가적인 폭발로 인해 원자로 및 건물의 지붕까지 날아가 버리는 대형사고가 터지게 된 것입니다.



-그 폭발 당시 원전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상상할 수 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방사성 파편, 흑연조각(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먼지 등이 거대한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핵실험 시 생기는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진화작업으로 수천 톤의 납과 모래를 부었지만 거대한 불길은 열흘이 지나서야 잡혔습니다. 당시 발전소에 있던 연구원들이나 관리요원들이 사망하거나 방사능에 노출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화작업을 하던 소방요원들도 그대로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사고 후 소련의 대처방법은 사고만큼이나 끔찍합니다. 인근 다른 국가들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 지역의 주민들도 전혀 사고 소식을 몰랐다고 합니다. 방사선 물질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밭을 일구고 야외파티를 하고 운동을 했겠지요. 스웨덴 과학자들이 평소보다 높은 농도의 방사능을 감지하고 바람방향을 이용해 역추적을 한 결과 사고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소련은 원전 사고를 시인했고, 상세한 내용을 발표한 것은 2주일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주변 지역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고 되도록이면 사고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소련은 서둘러 사고를 수습, 오염을 제거하려고만 하였고, 이는 오히려 피폭 피해를 더욱 가속화하였습니다. 현장정리에 제대로 된 안전장비 없이 동원된 사람들이 모두 8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당시 소련의 사고 대처는 슬프기까지 합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현재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고 피해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체르노빌 주변지역에는 유독 기형아출산율과 암 발생률이 높습니다. 기형적으로 머리가 큰 어린이 사진, 갑상선 수술 후 목에 난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소녀 사진,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 사진을 보면 인간이 고안해낸 기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주변국인 영국, 스웨덴 등지에서도 고농도의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피해 규모 통계 자료는 조사단체마다 너무나 다르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린피스가 내 놓은 조사 자료에 의하면 20년 전의 이 사고로 인해서 앞으로 발생할 암이 27만 건이라고 합니다. 덧붙여서 그린피스는 그중에서 약 10만 건은 무척이나 치명적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습니다.  유엔의 자료는 또 다릅니다. 4만 명이 암에 걸릴 것이고 그 중에서 1만 6천명은 갑상선암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방사선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바로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라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란 어렵겠지요. 하지만 사고 지역과 가까운 벨로루시에서 사고 이후에 갑상선 암 발생률이 30배나 높아졌다는 일례만 보더라도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선 유출이 인체에 치명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암 뿐만 아니라 성장장애, 노화촉진, 정신질환, 기형아출산 등 그 피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직도 그 곳 주민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향후 30년간은 계속 추이를 지켜봐야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방사능을 피해서 고향을 떠나야했던 슬픔, 피폭된 자들이라고 낙인 찍혀야했던 삶의 고통은 수치화 할 수 없겠지요.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사고가 일어난 후 소련은 인근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지금은 그곳에서 허가받은 사람들만이 외부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식품과 정기건강검진을 제공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땅은 사고 당시 방사능 물질을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방사능의 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물질에 따라 평균 30년 정도) 이곳의 숲, 강에서 잡히는 동식물들의 방사성물질은 먹이사슬을 타고 인간에게까지 충분히 올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로 반핵의 움직임이 크게 일었습니다. 그러나 유가는 계속 올라가고 기후변화 협약으로 이산화탄소를 절감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자 너도나도 다시 핵에너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통계자료를 들이대며 서로의 입장을 정당화 시킵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연구실에서 좀 더 안전한 방식의 핵발전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수력원자력 역시 가동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는 가동 방식이 확연히 다르고 훨씬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한 우리는 방사성물질 누출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핵폐기물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핵폐기물을 아무리 꽁꽁 싸매어 깊이 묻어 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것도 어떻게든 인간의 손을 거쳐 다시 처리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미래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청정에너지로서 핵발전소를 가동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핵 발전소의 사고와 처리 곤란한 핵폐기물을 미래세대에게 영원히 물려주느니, 이제부터라도 햇빛과 바람을 이용한 안전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적 연구와 과감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20주기 맞이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25일 화요일 오전 11시에는 종로에서 추모 퍼포먼스가 있고 오후 6시에는 인사동 남인사 마당에서 추모 촛불 문화제가 열립니다. 이 때 사진 전시와 영상물 상영, 문화공연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금도 www.enviroasia.info 및 각 환경단체 홈페이지에서 핵 확산 저지 한-일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는 체르노빌 핵사고 사진전이 27일에서 28일 양일간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체르노빌 사고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체르노빌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다. 체르노빌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알 수 없는 근심걱정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사건이다.”   



06. 04. 25.

 

 

 

 

P.S. 체르노빌 사고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사회주의 재건(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을 '넌센스'로 만들어놓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5년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붕괴되었다. 어떠한 이념도 그러한 재난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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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가끔 와서 올려놓으신 귀한 자료 함부로 퍼갔습니다. 용서해주실거죠? 또 퍼갈게요.^^

로쟈 2006-04-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 자료인데요 뭐.^^

twoshot 2006-04-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끔찍합니다. 그리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노아 2006-04-2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체르노빌 이야기를 소재로 쓴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퍼갈게요.

여울 2006-04-2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재활용되지 않는 폐기물을 남기는 사업이 (담수화와 친환경)이란 광고로 주입되고 있는 것은 아시죠.
중동에 설치해서 담수를 생산한다고 하면, 전쟁으로 피격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안전하다고, 돈 벌기위해 수출한다는 것을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아도 납득을 할 수 없군요.  갖은 돈을 들여 광고로 세뇌되는 현실... ...???
 

원자력硏-두산重, 해수 담수화 본격 추진

한국원자력연구소(소장 장인순)와 두산중공업(대표 김대중)이 원자력을 이용한 해수 담수화 기술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원자력연구소는 29일 연구소 대회의실에서 두산중공업과 이 분야 사업을 공동으로 본격 추진키 위한 상호협력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원자력연구소와 두산중공업은 이 협정에 따라 원자력연이 해수 담수화 등을 위해 지난 2002년 우리 고유 모델로 개발한 `일체형 원자로(SMART)'의 산업화와 해외시장 개척, 수주때 공동 또는 컨소시엄 형식으로 상호 협력해 나가게 된다.

일체형 원자로는 다목적 중소형 원자로로, 원전터빈에서 사용한 폐증기를 활용,바닷물을 증발시켜 높은 순도의 식수 및 공업용수를 1일 4만t씩 생산할 수 있을 뿐아니라 10만KW 정도의 전력도 생산할수 있는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인 최첨단 원자로다.

원자력연은 이 일체형 원자로의 기술검증을 위해 지난해 세계 해수 담수화 설비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두산중공업 등과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추진키로 했으며, 두산중공업 등은 2008년까지 총 2천500억원이 투입되는 이 플랜트 건설사업비의70%인 1천750억을 부담할 예정이다.

원자력연 관계자는 "두 산.연은 이를 통해 얻은 일체형원자로의 설계 및 건설기술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2011년께는 우리나라도 약 20억t의 물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일체형 원자로를 이용한 해수 담수화 사업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미래식수원 확보와 함께 소규모 전력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물이 부족한 중동,북부 아프리카 및 중남미 지역에 진출할 수 있는 국가 수출전략 품목으로도 부상할 전망이다.

< 출처 : 대전=연합뉴스, 2004. 1. 28 >

sayonara 2006-04-2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르노빌 사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신문을 보니 방사능 오염으로 수박만해진 사과를 보고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_-; 어린 시절이란 때론 철없이 잔인한가 봅니다.

로쟈 2006-04-2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cus님/ 남의 일이 아닌 거 맞습니다.
마노아님/ 저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작년에야 기억해 냈습니다.
여울마당님/ 2004년 일이면 벌써 상당히 진행중일 수도 있을 거 같군요. 사실, 배아줄기 세포 연구에 투자할 비용이라면, 대체 에너지쪽이 더 '현실적'인 것도 같은데요...
sayonara님/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유난한 싼 채소, 감자 따위는 먹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었죠. 체르노빌산이라고 해서...
 

 

 

 

 

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걸 정리해놓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특별히 '생산적인' 뭔가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이때 '생산'은 노동가치와 관련된다), 해야 할 일들이 계속 미뤄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이런 '일' 때문인가?). '들뢰즈와 경험론'에 관련한 읽을 거리들도 머리속에 몇 개 생각해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책들도 분산돼 있기 때문에 한번에 작업을 끝내지 못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이디어는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 중 '보론'으로 포함돼 있는 글 '경험론과 철학 -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를 정리하면서 살을 붙인는 것이었다. 이 보론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들은 많이 제공해주는 유익한 글이다. 나는 막바로 3절부터 시작하겠다. '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란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들뢰즈와 데리다를 레비나스를 사이에 두고 비교하는 내용이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많은 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같은 종족으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들은 사상적으로 그리스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는 것, 로고스 없이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이다."(64쪽)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철학의 고향을 아테네가 아닌 다른 곳을 가정하므로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다. 대신에 레비나스가 '예루살렘'을 새로운 고향으로 지목하는 데 반해서, '노마드' 들뢰즈는 그러한 태생적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차이일까?

저자가 이어서 읽고자 하는 것은 <글쓰기와 차이>에 실린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의 한 구절인데, "경험론과 관련하여 데리다와 들뢰즈의 극명한 대립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줄 이 구절은 물론 레비나스 비판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65쪽)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주장은 무엇이었나?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폭력은 존재 사건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소 희망해볼 수 있는 것이다."(이 '존재와 다르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저자의 <차이와 타자>, <일상의 모험>을 참조.)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경우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데, 그런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것. 즉, 레비나스여, 그게 가능합니까? 라고 젊은 철학자 데리다는 묻는다.

데리다 왈: "레비나스에 따르면 비폭력적인 언어는 동사 '존재하다'가 금지된 언어, 즉 어떤 술어적 기능도 없는 언어일 것이다. 술어적 기능은 최초의 폭력이다. 동사 '존재하다'와 술어적 활동은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비폭력적인 언어는 궁극적으로... 모든 '동사'로부터 정화된 언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언어가 여전히 언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인들은 그런 언어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명사들과 동사들의 얽힘을 전제하지 않는 로고스는 없다고 말한다."(65-6쪽)

데리다의 견해로는 레비나스적/윤리적 언어가 술어적 기능을 갖는 '존재' 사를 금지할 경우 그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언어'란 이름에 값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윤리는 언어적 표현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그와는 반대로, "타자들을 그들의 진리 속에 '내맡겨져' 있게끔 하는 유일한 것"이 존재이며(보가 구체적으로는 '존재(est/is)'라는 계사(copula)이며), "존재의 이 근본성 때문에 데리다는 동사 '존재하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책상'이란 말에는 '책상(이 있다)'가 함축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건은 경험론이 '존재하다'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가이며, "진정한 경험론은 존재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멸망하기는커녕, 바로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비판하기 위해 옹호하는 그 존재동사 'est'를 극복해야 할 표적으로 삼는 데서 비로소 경험론으로서 존립한다. 데리다와 정반대로, 경험론은 모든 동사들과 명사들을 존재 동사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66쪽)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들뢰즈이다. 그가 <디알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론의 핵심은 이렇다: "철학, 철학사는 존재의 문제 때문에, 이다EST 때문에 방해받는다. 사람들은 속사(속성)의 판별(하늘은 푸르다le ciel est bleu)과 현존의 판별(신은 있다Dieu est)을 논의한다... 그것은 항상 '존재etre' 동사와 원리에 관한 물음이다. 오로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만이 접속사들을 해방시켰고, (주어와 속사 사이를 맺는) 관계들에 대해 반성해왔다." 문단이 길기 때문에 잠시 쉰다. 여기서도 '앵글로-색슨' 들뢰즈의 면모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존재 동사에 대한 접속사들의 종속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변조시키며, 존재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리는 관계들과 만나야 한다. EST를 ET로 대체해야 한다(A 'et' B).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 모든 관계들을 열어주는 길이다. 그것은 관계들이... 존재, 일자, 전체 바깥에서 짜이도록 만든다.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 EST를 사유하는 대신에, EST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ET와 '더불어' 사유하는 것, 경험론에 이것 말고 다른 비밀은 없다."(66-7쪽)

경험론의 유일무이한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만큼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국역본 <디알로그>(동문선, 2005)에서 한번 더 인용하기로 한다. 2장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대목이다.

"철학, 철학사가 존재의 문제, 즉 -이다/있다(EST)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이러한 관계들의 지리학은 그만큼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전제하는, 귀속판단(하늘은 파랗다)과 존재판단(신은 있다)에 대해 논하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존재' 동사이고 원리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영미인들만이 접속사들을 자유롭게 하고 관계들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이는 영미인들이 논리학에 대해 아주 특별한 태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109쪽)

서동욱의 인용에서 생략된 부분을 마저 인용하면 이렇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논리학을 제1원리들을 은닉하는 본래적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당신들은 논리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중 하나를 발명하게 되겠지요!' 논리학은 정확히 대로(大路) 같은 것으로, 처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관계들의 논리학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관계판단의 권리들을 존재판단 및 귀속판단과 별개인 자율적 영역으로 재인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접속사들(가령 '그런데' '그리하여'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관계들이 존재동사에 종속된 채로 남지 못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110쪽) 요는 관계판단 또한 존재 동사에 종속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

즉,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접속사들이 존재동사에 계속해서 종속되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접속사들의 존재동사의 둘레를 돌게끔 만드는 수단이죠. (따라서) 더 멀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관계들과의 마주침이 모든 것을 꿰뚫고 망가뜨리도록, 존재를 침식시키도록 만들어야 하고, 존재가 동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다/있다(EST)를 그리고(ET)로 대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A 그리고 B."

"그리고(ET)는 특별한 관계도, 특별한 접속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 모든 관계들의 길을 연결하는 것이죠. 관계들이 그 항들의 바깥, 그 항들 집합의 바깥, 존재나 일자나 전체로 결정될 수 있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질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불어에서 EST와 ET는 발음이 동일하다. 이게 영어로는 IS와 AND이다. 우리말로는 좀 번거루운데, '-이다/있다'와 '과(와)'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 관계들은 여전히 그 항들 사이에서 혹은 두 집합들 사이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성립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관계들에 다른 방향을 부여하고, 항들과 집합들이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도주선 위로 차례차례 도주하도록 만듭니다. -이다/있다(EST)를 사유하거나 -이다/있다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그리고(ET)와 함께 더불어 사유하기 - 경험론에는 이것 외에 다른 비밀이 결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110-1쪽)

대동소이한 두 번역에 대해서 따로 이견을 달지 않겠다. 다만,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와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란 번역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약간 부절적하며, 두 경우 모두 '-존재'라고 풀어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생각에 ET/AND는 무슨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존재-바깥'이며 '존재-사이'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으로 포섭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요컨대, 철학은 'EST철학'(IS철학)과 'ET철학'(AND철학)으로 대별될 수 있다(편의상 'IS철학'과 'AND철학'이라 부르겠다). 'IS철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론을 집약하는 별칭이라면, 'AND철학'은 들뢰즈적인 접속론의 다른 이름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더 갖다 쓰자면, 'IS철학'은 '나무-철학'이며, 'AND철학'은 '리좀-철학'이다.

이 두 철학은 세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술/분절한다. 가령, "들뢰즈 IS 철학자"와 "들뢰즈 AND 철학자"로. 이 'AND철학', 혹은 들뢰즈적인 경험론은 IS(계사)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사들끼리(혹은 머리들끼리) 막바로 헤딩하게 한다.  

 

 

 

   

여기서 콜브룩의 안내를 잠시 따라가본다(이 책은 순서상 '초월적 경험론' 장부터 읽는 게 타당하다). "들뢰즈에게 경험론은 철학적 이론이나 특별한 사상학파에 대한 인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질 들뢰즈>, 135쪽). 여기서 '인정(commitment)'은 '관련'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이 경험론이 갖는 함축: "들뢰즈는 매개에 반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관념들에 의해 매개되거나 질서 잡히는 삶이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삶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들이 우리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계 자체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결과로서 드러나는, 그런 관념들이나 이미지들을 생산한다."(136-7쪽) 그리하여 "오히려 관념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너무 오래 끌고 있어서 '남은 비밀'은 다음에 누설하기로 한다...  

06. 04. 25 -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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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4-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있었는데..다시 시작하셨군요...^^
팍팍 진행되길 바랍니다..

저는 들뢰즈의 계사존재론과 지젝이나 라캉의 주체론을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는데..로쟈님은 이건 어떻게 보시는지...


로쟈 2006-04-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팍팍'은 안되네요(--;). 일단 한두 권도 아닌 책들이 분산돼 있어서 한꺼번에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고, 또 견적이 견적인지라... '재미있는 이야기'는 yoonta님이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브리핑하기에도 벅찹니다.^^

yoonta 2006-04-2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낼정도로 구체화시키질 못해서요..지젝이나 라캉의 매개없는 주체..공백으로서의 주체와 들뢰즈의 계사존재론과는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다고 보거든요..로쟈님이 들뢰즈뿐만 아니라 지젝에 관심이 많으신분이라 한번 여쭤봤습니다.

로쟈 2006-04-2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계사존재론'은 아니죠.^^ '접속사론'이고, 이게 (지향하는 건) '존재론-바깥'이니까.

yoonta 2006-04-2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아이러니인거 같아요..계사"존재"론이 아니라는 님의 말도 맞지만 여전히 로고스적 언어(존재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의 접속사론도 서양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전통속에 있다고 보거든요..그런점에서 계사'존재'론이라는 표현도 여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로쟈 2006-04-2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가 말하는 건 적어도 AND존재론인데, AND가 '계사'는 아니지 않나요? 물론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라고 했으니까 '접속사존재론'이란 말도 어폐가 있긴 하지만, 뭐라고 부르기는 해야 하니까... 더불어, 들뢰즈가 여전히 '로고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죽은 철학자가 좀 유감스러워할 거 같습니다. 그는 적어도 '비틀거리는 언어'로 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그래서들 읽기 어렵다고 하는 거지만)...

yoonta 2006-04-28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고보니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is가 계사고 and가 접속사죠..들뢰즈는 접속사존재론이라고 해야겠네요...
 

 

 

 

 

레프 도진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자료들도 모아두고 몇 자 적기로 한다. 원래 이름이 '체호프 기념 모스크바 예술극장'인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극장/극단은 안톤 체호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자신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예술극장의 배우였던 올가 크니페르(1870-1959)와 1901년에 결혼하기도 했으니까 예술극장은 어쩌면 극작가 체호프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문장은 <갈매기> 초연을 기념하기 위해 박아놓은 '갈매기'이다. 그리고 그 연출자가 스타니슬랍스키였다. 아래는 재작년 모스크바에 머물 때 시내에 나갈 때마다 지나가곤 했던 카메르게르스키 골목의 모스크바 예술극장 사진들이다.

 

Крупнее

이 극장의 현 예술감독이 저명한 배우이자 연출가인 올렉 타바코프(1935- )이다. 모스크바 예술극단 출신인 그는 자신의 극장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감독직도 겸하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국민배우'이자 연출가, 예술감독.

'몰리에르'와 '살리에리' 전문 배우로도 유명한 연극무대에서뿐만 아니라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맑은 하늘>이나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전쟁과 평화> 같은 고전적인 영화에서부터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같은 대중영화, 그리고 니키타 미할코프의 1980년대 영화들에서도 타바코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는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미할코프의 영화 <오블로모프>(1981). 국내에는 <오브로모프의 생애>인가란 제목으로 출시됐었던 작품. 그의 표정만으로도 게으르지만 선량한 오블로모프의 넉넉함이 묻어난다(미할코프는 영화에서 천하의 게으른 지주 오블로모프를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포착한다).

06. 04. 25-27.

P.S.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규모에 걸맞는 이야기는 당분간 미루어두어야겠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이건 '쇼케이스' 페이퍼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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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nwise 2009-11-2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만들어졌군요 저는 엊그제 이책을 읽어서 요즘 매일같이 러시아란 나라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