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증이긴 하지만 '문자중독증'이 있는 나는 여하튼 뭐든 읽을 거리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없다고 해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경증'이다). 거의 언제나 손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또 대개는 너무 많은 책들을 넣고 다닌 탓에 팔길이가 좀 늘어나기까지 했다(하긴 중고등학교 때의 무거운 책가방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가방 모찌' 경력은 4반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저녁시간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도 (특별한 읽을 거리가 없는 한) 신문이라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엊저녁에도 '문화일보'를 읽다가 얻은 소득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놓는다(한동안 읽을 거리가 없는 신문이었는데, 최근에는 제값을 한다). 언젠가 패러디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인용해먹을 생각인 인터넷유머 '고스톱 만가' 시리즈와 함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은 이왕주 교수의 칼럼 '진정한 영웅'이었다(이런 자질구레한 쓸 거리들을 다 적어놓기에도 '하루'는 역부족이다. 하긴 별것도 아닌 벌이에 충당해야 하는 시간으로도 모자란 것이니! '벌이'가 아닌 글들의 8할은 바람결에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철학풀이, 철학살이>(민음사, 1994)부터 최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까지 뜸하지는 않을 만큼의 저서를 내고 있는 저자의 글을 내가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소설 속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7) 같은 책이 그렇듯이 '칼럼집'이라는 가벼운 형식과 '철학'이라는 무거운 콘텐츠가 잘 버무려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내가 별로 갖고 있지 않아서였다. 어제 읽은 칼럼은 그런 생각을 재고해보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의 <쾌락의 옹호>(문학과지성사, 2001) 같은 '가벼운' 책을 오늘이라도 사들게 될 것이다. 아래의 칼럼 때문에.


문화일보(2006. 04. 27) 한국계 천재 소녀 골퍼 미셸 위가 국내 재벌기업이 후원하는 골 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한다. 한 신문은 미국에 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 열일곱 살짜리가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이 우리 돈으로 약 2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셸 위. 어쨌든 대단하다(*그녀는 잔디밭의 영웅이다). 하인스 워드의 경우처럼 미셸 위의 방한은 영웅에 목마른 이 반도를 또 한번 들뜨게 할 것 같다.

-그러나 대중의 이런 환호에는 돌이켜 살펴봐야 할 대목이 있을 것이다. 공자도 ‘모든 인간들이 달려들어 환호하는 일에 반드 시 반성해서 살펴야 할 무엇이 있다(衆好之必察焉)’ 고 충고했다. 워드와는 달리 미셸 위 신드롬은 이뤄놓은 성취가 아니라 이루게 될 성취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터잡고 있다. 그만큼 위태로 운것이다. 속절없이 스러져버린 미래의 천재, 가능성의 영웅이 얼 마나 많더냐.
-며칠 전 서울 등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다. 부모 없는 사이 초등학생 세 명이 라이터놀이하다 불을 낸 것이다. 마침 서울 화곡여자정보산업고 1학년 여학생 10명이 그 곁을 지나다가 연기와 화염에 싸인 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이들을 합심하여 침착하게 구해냈다.(*이 여학생들은 지난 월요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 여학생들도 남들처럼 그 상황을 무심히 스치거나 외면하거나 기껏 119에 신고하는 것쯤으로 떼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히 그 상황 안으로 뛰어들어 하마터면 화마 속에 사라져갈 뻔한 어린 생명들을 건져냈다. 그 여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동갑내기 미셸 위처럼 유명하게 될지 어떨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모두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직하거나 결혼해서 이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갈지 어떨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제 좀더 예민한 후각과 눈으로 이웃과 주위에 고통 받는 이웃은 없는지, 상처로 휘청거리는 타인은 없는지 살피며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난자들에게 기꺼이 손을 뻗쳐 붙들어주리라는 것을.
-영웅은 대중의 환호나 갈채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이 이름 없는 여학생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으로 보인다. 자가용 비행기쯤이야 없으면 어떠냐. 그 치열한 성장기에는 그냥 우산없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걸어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로 열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애 동안 지켜내는 것이다.(*이 여학생들은 '이미지'도 없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에서 주인공인 가출 청소년 홀든 콜필드는 머나먼 서부로 떠나기에 앞서 만난 여동생 피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조그만 꼬마들이 뛰어노는 넓디넓은 호밀밭을 늘 눈앞에 그려보곤 해. 수많은 꼬마 녀석들이 있을 뿐 어른은 나밖에 없는 거야. 오직 나밖엔. 나는 언제나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지. 내가 하는 일은 그 꼬마녀석들 중에 누구라도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서려면 달려가서 붙잡는 거야. 애들이란 달릴 때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럴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들어주는 거야. 이게 내가 하루종일 하게 되는 일의 전부지. 나는 정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이게 바보짓인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야.”(*주인공의 이 대사는 사실 이 작품의 감동을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우리 청소년들에게서 회의와 절망만을 확인하는가. 이런 소녀들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 모두가 그저 이기적인 공부벌레가 되어 책상 앞에만 붙들려 있는 것도 아니고,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열광하거나 컴퓨터 게임 같은 것 에 몰두하면서 생을 소모하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 어린 영혼들이면서 더 어리고 더 약한 영혼들이 뛰노는 호밀밭 가장자리의 낭떠러지 곁을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나서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표상이 아닐까. 누가 그 이름을 기 억하는가, 기억하지 않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잊어진다는 것, 그냥 사라져간다는 것, 그게 또 무슨 상관이랴. 호밀밭의 파수꾼은 훈장을 위해, 그 잘난 포상을 위해 낭떠러지를 지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이다.

06. 04. 28.
P.S. 좌파니 우파니, 뉴라이트니 뉴레프트니 하는 치들이 아니라 세상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인 이 파수꾼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는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다. 적어도 '잔디밭-세상'이 아닌 '호밑밭-세상'에서는 그렇다. 참고로, 홀든은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인 바틀비의 짝패이다. 밥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