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페이퍼란의 '모스크바 통신' 카테고리를 비공개로 돌렸다. 이미 2/3 가량은 수정버전이나 이미지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다른 카테고리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내용상 중복이 되는 걸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어 보였고(나머지 1/3도 유효성이 있는 대목들에 한에서 틈나는 대로 정리할 생각이다), 재작년의 '객담'인지라 이젠 그냥 조용히 혼자만의 창고에 넣어두고 보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최근에 나온 책들' 시리즈도 에피소드까지 다 정리한 줄 알았더니 자투리가 남아있길래 여기에 옮겨둔다. '오역의 세 가지 대상'이란 모스크바 통신문의 서두에 들어 있던 내용이다. 

지난 일요일에(*이 글은 2004년 6월초에 씌어졌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식당이 가장 많이 밀집돼 있는 ‘아를료뇩’호텔(표기는 ‘오를료뇩’이고 모스크바대학에서는 걸어서 30분 거리이다)의 한국식당에서 일행들과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동아일보 복사판이 눈에 띄길래 들고 왔다. 마침 토요일(29일)자 신문이어서 북리뷰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0일(토)자 이후 처음으로 읽는 한국의 일간지 서평이었다(물론 인터넷에도 뜨긴 하지만).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란 책이 1면에 다루어지고 있었고, 학술란에도 눈길을 끄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먼저, 안토니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이 번역/출간된 걸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아직 <제국>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참견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에게서 ‘정치’와 ‘혁명’이 당위적인 도덕론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복종하지 말고 자유롭게 행동하라. 죽이지 말고 생성하라. 착취하지 말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정도가 ‘혁명’의 강령이라면 말이다. 분석이 결여된 강령에 대해서 나는 신뢰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한 시간관만 하더라도 미래(future)와 도래(to-come)의 구분에 대한 저작권은 내가 알기엔, 데리다에게 있다. 서평자는 “가난을 연민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주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네그리는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와 만나는 셈”이라고 썼는데, 네그리는 어느새 성자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인지.

어쨌든 네그리에 따르면, “탈근대의 상황에 놓인 가난한 자들은 ‘다중’이라는 새로운 공통의 이름을 획득함으로써 ‘도래할 민중’이 된다. 동시에 ‘제국’은 혁명의 시간을 거치며 다중의 ‘코뮌(communism)’이 된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예언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당위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인지 헷갈린다(예언적 당위인가?). 사적 유물론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더불어, “네그리에 따르면 정치란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을 뜻하고, 혁명은 권력의 전복이기 이전에 자기 삶을 긍정하며 구성하는 사건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이때 변신/변혁의 주체이자 근거인 ‘자기’는 기계와의 접속 이후의 “사이보그 혹은 일반지성”에서도 관철되는가 혹은 연속적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기계적인, 영속적인 신체와 지성을 얻게 된 이후에도 ‘나’로서 ‘자기’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가? 그때도 우리는 가난한 ‘다중’이고 ‘주체’인가? 그리고, 그때는 무엇이 변하는 것인가? 그때도 삶은 삶이고, 긍정은 긍정인가?(혹 네그리를 신뢰하는 분이 계시다면 답변을 주시길. 얇은 책이니까 금방 읽어보실 수 있을 거 같다.)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다(아동도서 같은 책 표지는 뭔가?). 알다시피, 커니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철학교수’이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남의 철학을 잘 소화해서 대중에 소개하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이란 부제에서 그 ‘도전’은 아마도 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다루고 있는 다른 철학자들의 것일 게다. 어쨌든 커니는 기존의 ‘쟁쟁한’ 타자론들을 ‘초월적 입장’(데리다, 리오타르, 레비나스 등이 속할 것이다)과 ‘내재적 입장’(프로이트나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 계열)으로 나누고, ‘제3의 길’로 ‘비판적 해석학’(딜타이나 가다머)을 내세운다고 한다. 이 입장은 해체주의처럼 타자를 무조건 환대하지도 않고, 정신분석학적 입장처럼 타자를 묵살하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해석자와 피해석자라는 두 자립적 타자가 만나는 지평의 융합과정”이란 게 무엇인가? 책읽기 아닌가? 그렇다면, ‘비판적 해석학’ 모델에서의 타자와의 조우란 것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만나게 되는 경험 아닌가? 이때의 ‘추상적 저자’가 자립적 타자인가? 게다가 ‘저자’를 숭배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서평으로만 판단하자면, 커니는 여전히 좋은 철학교수로 남아있는 것이 낫겠다. 참고로, 그의 <현대철학자들과의 대화>는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한국외대출판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수록된 ‘대심문관’에 대한 러시아 석학들의 평론집이라고 한다. 이 ‘러시아 석학들’의 면면이 어떠한지 나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388쪽이니까 분량도 제법 되는 책이다. 혹시 읽으시는 분은 서평이라도 올려주시길. 지금은 절판된 책이지만, 르네 월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에도 대심문관을 다룬 글이 두 편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참고로, 대심문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바로 다음 장 '러시아의 수도사'를 같이 읽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린다. 그래야 균형이 맞게 된다.

어제는 푸슈킨거리에 있는 고리키문학연구소에 갔다가 작년부터 새로 나오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18권) 중 제3권을 사들고 왔다. 이 책은 현재 5권까지 나와 있는 듯하며, 책임편집자는 자하로프 교수이다. 새 전집은 창작/발표 연대별로 수록하는 게 원칙인 듯한데(이 원칙에 따른 새로운 푸슈킨 전집이 곧 나올 예정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이 필요해서 산 3권은 총 688쪽이고, 1850-62년까지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대개의 일반전집보다는 큰 판형이며(연구자용으로서는 좀 거추장스럽다), 장정도 유려하고 가격도 저렴하다(고리키연구소가 좀 싸긴 하지만, 우리돈 6,500원 가량. 1-2권은 더 싸다). 발행부수는 10,000부. 문제는 언제나 완간될까 하는 것. 도스토예프스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 본 소리이다(이런 등속의 얘기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북리뷰에 크게 건 작게 건 소개된 책은 총 29권이고, 그 중 번역서가 18권이었다. 학술서는 6권 중에 5권이 번역서였고. 대략 2/3가 번역서인 셈. 그만큼 우리의 출판과 독서문화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그런 비중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양산되고 있는가이다. 즉, 제값이 번역서들이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 북리뷰의 한 서평은 “하지만 그의 현란한 문장이 설익은 채 번역돼 가끔은 읽기 어려운 게 흠이다.”라고 말미에 사족을 달고 있는데, 일간지 서평자들이야 출판사나 저자들이 송부해온 책을 보는 것이니까 그런 ‘흠’에 대해서 관대할 수도 있겠다.

해서, 나는 이런 서평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건 적어도 ‘사서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이다. 내가 모든 책에 쪽수와 함께 악착같이(?) 책값을 병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악착같이(!) 오역에 대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본전 생각’ 때문이다. 책은 책다워야 하며, 비싼 책은 비싼 책다워야 한다(이걸 ‘정명(正名)사상’이라고 하던가? 다르게 말하면, ‘정가(正價)사상’이다!).

2004.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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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6 1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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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연극평을 옮겨놓는다. 연극평론가 노이정씨의 글이다.  

교수신문(06. 06. 03) 7시간 30분의 감동…연극 한편의 놀라운 힘 

얼마전 내한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형제자매들’에 쏟아졌던 관심만큼이나 그 여파가 적지 않다. 연극 한편이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레프 도진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연극의 힘을 재발견했다. 특히 우리 연극인들에게 반성의 거울이 됐다. 배우들, 극작가들, 연출가들에게 이 연극은 우리가 연극에 담긴 가능성을 얼마나 지레 포기하고 있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이렇게 쉬우면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니!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기 직전 초연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순회공연을 해온 이 작품은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서 레프 도진의 초기작이다. 스탈린 시대 러시아 북부 아르항겔스크 지역을 배경으로 한 아브라모프의 소설 4부작 중 앞의 3부(‘형제자매들’(1958), ‘두 해 겨울과 세 해 여름’(1968), ‘길과 갈림길’(1978))를 연극화했다. 공식적으로는 2년 간 준비했다지만 1977년 배우들과 함께 아브라모프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직접 찾아가 생활하는 등 도진의 고백에 따르면 준비기간은 10년에 이른다.

공연 전 우리가 주목했던 건 7시간 30분(순수 공연시간 5시간 20분)이라는 공연시간이다. 세계적으로 10시간을 넘는 연극 작품도 꽤 있지만 요즘 국내 연극은 2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을 효율로, 속도로 계산하는 시대에 몸으로 대항하는 이 연극은 우리 관객에게도 느린 호흡으로 살 기회를 제공했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동지들이여, 시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이라는 스탈린의 연설과 함께 배경에 1940년대 전쟁기록영화를 투사하면서 시작된 연극은 1941~195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러시아 집단농장 콜호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줬다. 러시아판 인생유전이라 할만하다. 나이가 차지 않아 참전 못한 청년 미하일과 남자들이 없는 마을을 책임지는 콜호즈 여위원장 안피사 등의 이야기가 이 펼쳐지는 제1부 ‘만남과 이별’, 전쟁이 끝나 남자들이 돌아오고 스탈린 독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2부 ‘길과 갈림길’ 사이에 십 년의 세월이 있다.

연극은 많은 사람들의 운명의 교차를 다룬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는 이 위로도 배신으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불신과 분열의 분위기가 무대를 지배하게 된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 도시로 간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영광의 인물과 위기의 인물도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것이 정해진 스토리대로, 쓰여진 텍스트대로 진행된다면 아마도 매우 지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주요 인물들의 에피소드에 집중돼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긴장과 이완을 체화한다. 보는 관객도 그 흐름에 따라 집중과 이완을 하게 된다. 이것을 도진은 하나의 교향악이라 표현했다. “드라마에는 그 자체에 멜로디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 긴 시간 동안 관객이 편안히 연극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에 들어있는 음악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마리아 셰브초바는 이 연극의 스타일을 ‘산문의 연극’이라 칭했다. 배우들이 “소설을 온전히 공연하면서” 즉흥적 시도를 통해 “대본의 신체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소설의 강건한 내러티브는 배우들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응축된다. 전체적으로는 비극적인 톤을 가진 이 작품을 우리가 힘들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건이 끝나면 다른 사건을 맞기 위한 여유가 생기고, 비극적 사건들 사이에는 긴 희극적 릴리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아니한가. 



여성과 남성 집단으로 나뉘어 질펀한 음담패설을 나누는 마을 주민들의 집단적 휴식, 씨뿌리기도 축제와 같이 함께 하는 농촌의 전통이 이 연극에 희극적 에너지를 부여한다면, 불행하게도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양이 적어진다. 집단농장의 삶이 곤고해지면서 사람들의 집단성은 분열되고 이기심이 싹트며 연극 첫 막에서 제시되던 카니발리즘적 에너지는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집단성의 해체, 혹은 코러스로 합류해 들어가는 개인에서, 개인으로 해체돼가는 코러스로 변화를 보여주면서 연극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는 명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머니즘이 살아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어떤 한 시기의 정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허구와 그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 사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고발이다.

이 긴 공연의 모든 사건 속에 뗏목과 장대들이 있다. 10여 년의 삶의 다양한 무대들, 방과 집, 헛간, 목욕탕 등의 사적 공간과 파종과 축제의 무대가 되는 공적 공간들은 뗏목 모양으로 만들어져 무대 중앙에 매달린 단 하나의 나무판으로 만들어진다. 360도로 회전하고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모든 장면의 배경이 되어주는 이 뗏목은 나무로 만들어진 등장인물과도 같다. 무대를 감싸고 선 20개의 장대들은 숲인 듯 감옥인 듯 이곳을 탈출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에워싼다.

이 공연을 보고 아무도 이것이 새롭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이 공연은 ‘새로움’이 아니라 ‘낡음’을 강조한다. 목재로만 제작된 무대, 배우의 연기와 제스처만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들, 모든 관객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삶의 원초성에 대한 대사들. 그런데 왜 이 연극은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이 연극이 처음으로 서유럽에 소개될 때 서유럽 관객들도 연극에 놀랐다. 1988년 파리 가을축제에 초청된 이 공연을 보고 현 보비니 극장 예술감독인 파트릭 소미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건 우리가 연극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것들의 종합이잖아. 코러스적 성격, 준 자연주의성, 서사적이고 교훈적인 인물. 이건 이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것들인데.” 그런데 도진과 말리극장의 연극들은 계속 서유럽에 초청됐고 인정받았다. 1992년에 초청된 ‘가우데아무스’(2001년 내한)와 1994년의 ‘폐소공포증’은 유럽의 새로운 연극 현상인 ‘코러스성’(등장인물들이 코러스가 되는 현상)의 문제를 무대로 회귀시킨 작품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2002년 유럽연극상을 수상한 도진은 인터뷰에서 그의 연극의 근원을 스승과 제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사회가 진보의 행렬 속에서, 새로운 지식습득의 방법 속에서 상실한 것 중 하나로 그는 ‘전통적 가르침’을 들었다. 피와 살이 흐르는 선생이 인터넷과 컴퓨터로 대체되는 상황. 그는 선생은 제자들에게 사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사람이며 제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유년기부터 자신의 삶을 만들어온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첫 연극 스승은 두브로빈이다. 메이어홀드의 제자였으나 소련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연극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자 전문적 활동을 포기하고 어린이들과 작업했던 그의 스승. 도진은 12살 때 수영강좌가 마감돼 연극을 하게 됐고, 그를 만났다. 도진이 말하는 두브로빈의 수업은 다음과 같다. 스승은 자기 주위에 아이들을 둘러앉게 하고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들은 아무거나 물었고 그는 마치 랍비와 같이 모든 것에 대해 설명했다. 도진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부터 그에게 극장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이 선생에게서 도진은 즉흥의 방법, 낡은 텍스트를 바꾸는 기적을 배웠다.

피터 브룩의 러시아 순회 공연과 조르지오 스트렐러 작품 ‘벚꽃동산’의 단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상상력이 불타올랐다고 고백하는 도진은 실상 가장 중요한 훈련은 제자들과 수업이라고 단언했다. 제자들은 자신의 젊음을 이야기하여 선생을 늙지 않게 한다. 그리고 선생은 같은 것을 다른 세대에게 반복해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

이 이야기에 새로운 것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거기엔 다만 우리에게 잊혀진 것이 있다.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인간과 연극의 진실에 관한 오랜 믿음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생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 시대에 그의 연극은 사람 사이의 교류에 대한 오랜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리안느 므누슈킨이나 피터 브룩, 오태석 등 우리가 아는 연극의 대가들은 모두 이 믿음에서 연극을 시작한다.(노이정/ 연극평론가) 

06.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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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05년 연초에 모스크바 통신문으로 '서비스란 무엇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오늘 예상대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당의 선거 참패 원인은 노무현 정권의 '무능' 때문이라고. '무능력'이라는 게 노정권의 '프레임'이 돼 버렸다), 문득 김훈의 인터뷰에 관해 쓴 그 글이 생각나서 옮겨온다. 그 글 또한 AS차원에서 작성됐던 것인데, 격으로 치자면 이 글은 AAS(애프터 애프터 서비스)쯤 되겠다. 강의준비를 잠시 손놓고 잠시 AS를 손본다(그나저나 지방선거 이후의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젠가 나는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통신문을 쓴 적이 있는데(*이건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놓았다), 최근에/연말에 인터넷에 뜬 이들의 인터뷰/칼럼을 우연히 읽으며 세 사람에 대해서 한번 더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규항에 대해서 쓴 걸 재정리한 것이 '희망에 대하여'이다). 어쩌면 연말연시이고 귀국날짜가 다가오면서(*나는 한달 후에 귀국했다)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는지도 모르고(젠장!), 또 어쩌면 ‘반복’에의 욕구가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냥 AS(애프터 서비스) 정신인지도.

(*)김훈과 관련하여 최근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건 그가 과거 직장 후배들인 한국일보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대화)이다. “우리는(=후배들은) 17년 동안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선배 김훈(56)을 보았고, 이 시대 문장가요, 소설가인 그를 만났다.” 아마도 오랜만에 만났을 선후배들이므로 대화는 장시간이어졌을 테지만, ‘정리’된 건 (기대보다) 소략했다. “대화는 45만부나 팔린 소설 <칼의 노래>로 시작됐다.”고 하는데 역시 작가의 ‘밥벌이’로서는 소설만한 게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권당 인세를 1,000원씩만 잡아도 4억 5천만원이다. 이 정도면 그는 한때의 이문열과 조정래, 황석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지영, 은희경을 뺨치겠다. 그만하면, ‘가장(家長)’으로서 그가 목에 힘을 줄 만하다(생각하면, 나도 이런 통신문들 대신에 소설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큰소리치는 ‘가장’이 돼 보나?).

(*)그러니, 그가 ‘소설가’를 주업으로 삼고, ‘에세이스트’를 부업 정도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니, 필연적이다. 파스칼의 단장을 비틀자면, “적성, 돈 -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돈되는 일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니까. 하긴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벌어들인 돈은 소설가로서 번 돈에 1/10이나 되었으면 다행일 것이다(소설가의 책상을 쪼개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열 개도 더 나올 것이다. 아니 열의 열제곱?). 이하의 인터뷰는 부분적으로 축약된 것이며, 내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표시가 돼 있다.

-<칼의 노래>에 대한 우리사회, 특히 정치권의 반응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느낌은.

(*)이순신 외에도 이명박, 이병철에 관한 드라마들이 방영중인 걸로 안다. 이런 군인/기업가들의 ‘실명’ 내지는 ‘모델’ 드라마가 유행하는 것은 ‘미지근한’ 현정부의 소위 ‘무능력’을 보상하기 위한 차원이 아닌가 싶다. 질베르 뒤랑 같은 상상력 이론가의 용어를 빌리자면, ‘상상력의 균형잡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한국사회는 이른바 ‘주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이명박, 이병철은 모두 한 시대의 ‘주인기표’들 아닌가? 왜 이런 주인기표들이 요구되는가? ‘노무현’이란 기표가 주인의 행세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집의 제목을 비틀자면(<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현정부의 지난 2년은 “한다던 일 하지 않고”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카리스마를 갖고 견주자면, 김대중-노무현의 비주류정권 커플은 과거 군사정권의 전두환-노태우 커플을 반복하고 있다. 집권초기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고 하면서 필요한 ‘권위’마저 청산해버린 것은 아닌지?

“(단호하게) <칼의 노래>를 386애들이 읽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때 배 12척 갖고 300척을 부순 것처럼 하겠다는 거야. 무지몽매에 빠진 거지. 이순신이나 되니까 한 거야. 걔들이 갖고 나가면 다 죽어. 12과 300은 현대사회에서 적용이 안되는 이야기야. 중세 이야기를 쓴 건데 어떻게 현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TV에다 대고 말하는 거야. 그걸 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미쳤구나. 요새 내가 글을 잘못 써 가지고 어린 것들 망치는구나’ 했어. 진짜로 내 소설을 읽는 건 고마운데, 적이 300척 갖고 나올 때 지도자라면 최소한 200척은 갖고 나가야지. 12척을 갖고 나가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니들이 12척을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다’는 말을 TV에서 했는데 MBC가 빼버려 나만 바보가 된 거지. 얼마나 약 오르는지. 드라마? 안 봐. 처음 한 번 봤는데 아동극 수준이야.”(*김훈이 약이 올랐다고 하길래 이 대목은 축약하지 않았다.)

-그럼 왜 쓰셨어요.

“그때, 그분(이순신)의 실존적인 부분을 썼는데, 현실을 지휘하는 리더들이 12척으로 300척을 깨듯 ‘경제를 살리겠다’니. 미치겠다 이거야. 적이 300척이면 500척 갖고 나가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그래서 상종을 안 했어.”

(*)현정부의 ‘아마츄어리즘’에 대한 비판을 김훈도 공유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그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김훈은 소설가로서는 아마츄어이지만, 둘의 범주가 다르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런 과정에서 우리사회가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라진 것 아닌가요.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 곧 ‘회색분자들’이 나의 용어로 하면, “덜 나쁜 사람들”이고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연옥에 갈 사람들이다.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세계이며, (혁명이 아닌) 정치는 그런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윤리와도 구별된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나는 김훈과 의견을 같이한다. 나는 우리가 ‘적당히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우리의 나쁜/얕은 본성을 간과/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컬하지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간은 ‘벌레’로서 과소평가돼서도 안되지만, ‘천사’로서 과대평가돼서도 안된다.



-이어 그는 특유의 섬세한 분석으로 지금, 우리 사회를 해부했다. “386이 리더가 됐잖아. 근데 걔들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는 아해들이야. 그래서 도덕적인 거지. 인간의 선의를 모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 아름답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거든. 엄청난 세금을 내고, 반드시 아들을 군대 보내는 것은 우익이거든. 우익에겐 세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아 그래야 우익이 완성되는 거 아냐. 그런데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

-그러면서 자신도 굳이 말하라면 ‘중도 우익’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좌익과 진보는 세상을 맡을 수 없어. 물적토대가 없으니까.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야.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야."

(*)내가 강조한 대목들에서 김훈의 기본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난번에 김훈의 세계관을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러한 세계관/태도가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물적 토대’라는 건 물론 ‘밥벌이’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밥벌이’의 토대를 건설한 ‘가장(家長)’이고(그러니까 여기서 ‘박정희’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이며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이순신’이 그런 것처럼). 이 밥법이란 건 항상 ‘타협’을 전제로 한다(흔히 하는 말로, ‘기분대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家長)의 세계란 건 도덕적인 선, 혹은 아름다움에 못 미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와는 무관한 세계이다. 가장들이 휴일에 주로 하는 일이란 낮잠 자는 것이며, 그들의 주특기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내가 그랬었나?” “그게 아니고…”). 그런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도덕한 가장’이 아니라 ‘무능력한 가장’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을 내세우는 도덕적이고 기개 높은 유전자들은 아름답고 고상할지언정, 굶어죽기 십상이어서 자손을 남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의 ‘성공한’ 조상들은 도덕/명분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적당히 불의와 타협도 하고 남을 이용해먹기도 했던 양반들일 것이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단, 남들 이상은 곤란하다.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는 사회”는 곤란하다(그런 사회는 부숴야 한다!). 그러니까 우익삼락(右翼三樂)을 누리지 못하는 우익은 우익으로서 자격미달이다: (1)세금 왕창 내고, (2)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3)질서를 지키고(공공질서?). 한데, (1)세금 왕창 내기는커녕 공과금 내기도 버거운 데다가, (2)(아들 군대보낼 일은 물론 없거니와) 최전방 ‘부근’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하고, (3)무단횡단으로 두 번 범칙금 낸 바 있는 나는 우익이 되고 싶어도 못되겠다. 근데, 반대로 좌익의 조건은 어떤 건가?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김규항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님 홍세화?

(*)하여간에 그런 조건이라면, 우익단체에서 자발적으로라도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우익 자격증이라도 부여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래야 우익으로서 자부심/자긍심을 가질 것 아닌가? 또 그래야지 (1)탈세/탈루를 밥먹듯이 하고 (2)돈주고 아들 군대 빼고 (3)각종 편법으로 국가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작자들이 ‘족보’도 없는 우익 행세를 하거나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런 작자들한테 일당 받고 우익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해서, 사이비-우익들만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좌익의 준동이 아니라 우익의 결핍이다.

(*)김훈의 말마따나, 경험도 없는 ‘아해들’(=좌파들)이 무얼 알겠는가?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 즉 펀더멘털을 책임지고 있는 건 우익 아닌가? 그러니, 작금의 경제불황도 다 우익의 책임이며, 현정부의 무능도 (그들을 쥐고 흔드는) 우익의 책임 아닌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비분강개하여 자진(自盡)하는 우익 하나 없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우리의 우익은 일본의 야쿠자만도 못한 것이다).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그토록 ‘우려’하면서(그 우려는 ‘값싼 노동력’ 상실/훼손에 대한 우려인가?) 통일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는 우익들만 득세하는 것도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나는 김훈의 ‘커밍아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훈의 ‘보수주의’를 비난하는 좌익 소아(小兒)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건 “새는 좌우의 양날개로 난다”(이영희)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위대한가요.(*내 식으로 번안하자면, “가장이 그렇게 위대한가요?”)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아마도 이런 ‘기성세대’의 마인드가 ‘젊은’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박정희’란 기표는 ‘박정희의 시대’를 가리키는 주인기표이다. 그건 ‘정주영’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고, ‘이병철’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다. 소위 한국사회의 산업화/근대화라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부르주아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게 ‘사실’이고 ‘리얼리즘’이다. ‘민주주의’란 상부구조는 그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 내가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리얼리즘’이 생물학적/생태학적 사실과 리얼리즘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사실’은 ‘당위’와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는 어떻게 하고요.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리더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해. 다중(대중?)이 하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박정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이나.”

 

 

 

 

(*)내 생각에 김훈의 착각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가 그의 ‘치적’과 구별/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실상 박정희의 ‘치적’을 낳은 ‘물적 토대’는 그의 ‘정치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과연 그 시대의 ‘성장 드라이브’가 (‘정치적 무과오’로 가정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을까? 성장과 도덕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더 잘 살면서 동시에 더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김훈은 ‘박정희주의자’로서, 그리고 ‘가부장적 마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는 박정희/가장(家長)의 (불가피한) 정치적/도덕적 과오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때요.

“노대통령의 마음은 로맨스야. 선한 마음을 담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거지. 그의 낭만주의야말로 역대 누구에도 없던 아름다움이야. 뜻은 옳고 바르고 도덕적이지만, 그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현실적 물적 토대가 없는 거야.”

(*)여기서도 김훈은 ‘아름다움/물적 토대’의 이분법을 쓰고 있다. 그 이분법은 ‘아름다움/책임’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현정부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책임질 만한 ‘물적 토대’가 없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음미해볼 만한 것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즉 박정희 말기에 은밀하게 추진되다 실패하고 만 핵미사일 보유 시도 말이다. ‘가장(家長)’으로서의 박정희는 군사적/외교적 대미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적 토대’(=핵)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사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뻣뻣하게 나오는 것도 그 긴가민가한 핵 때문 아닌가?(물론 실상은 외부의 ‘군사적 위협 요인’에 대한 미국 자체내의 요구가 그런 ‘북한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듯하지만.)

 

 

 

 

(*)무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장부들의) 큰소리는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평화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지켜낼 만한 힘에 의해서 지켜진다. 그럴 만한 힘이 없다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 해서, 나의 의견은 (일부 수구보수들의) 친미/숭미적 태도와 박정희 숭배는 모순적이라는 것이며(물론 기회주의적 꼴통들이 이 ‘모순’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일부 ‘아름다운’ 좌파들의) 물적 토대(=힘) 없는 정의에의 요구는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기자와 소설가 중에 어느쪽이 좋은지.

“기자로 못한 원한을 지금 풀고 있는 거야. 기자 할 때는 6하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데 소설을 쓰니까 너무 편해. 근데 나는 사실 6하원칙이 위대한,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해. 사실과 그것을 확인하는 것의 존엄함을 알아야 해. 지금 신문들을 보라고.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어. 보수신문이나 진보신문이나 똑같아. 의견을 사실인 양 떠들고 있으니 미쳤지. 나는 두 발짝 세 발짝 물러났어. 너무 진이 빠져서.”

(*)나는 6하 원칙이 ‘최고의 문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존엄’하다고는 생각한다. 이 존엄함을 던져버린 신문들은 보수나 진보나 곧 다 망할 것이다.

-이번 문학동네에 소설 <머나먼 속세>를 쓰셨던데, 만족하십니까.(*얼마전에 출간된 <강산무진>에 수록돼 있다.)

 

 

 

 

“작가는 실패할 수도 있지. 기자라고 기사를 매일 잘 쓸 수 있냐? 내년 2월부터 ‘치정’에 관한 소설 쓰려고.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도록 만들게. 여기 후배들 예쁘지만 다들 소설 못쓰게 해야지(웃음).”

(*)이런 대목에서 김훈은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그가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을 만한 걸작, 그것도 ‘치정’에 관한 걸작을 써주길 나도 기대한다. 치정(癡情)?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말한다. 그걸 끝내줄 수 있는 치정소설? 그가 그 어지러운 미로 속에서 그저 생환해 오기만을 바란다.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다.(*요즘은 좋아하는 후배들이 아니라 부러워하는 후배들이 많은 거 아닌가.)

“나는 잡놈이여.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깨지는 인간이 바로 김훈이야. 내 살과 뼈는 김구 선생 따라다니던 아버지(김광주)에게서 받은 것이거든.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 세상의 바탕이 폭력이라는 걸 알았던 아버지를 존경하지. 난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 길바닥, 잡놈 사회서 배운 거야. 기자라는 건 잡놈 근성이 있어야 돼.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여기선 약간 오버하는 듯하다. 염상섭, 채만식(?)도 기자였으며, 그들의 소설세계란 것이 또한 아카데니즘이 아닌 리얼리즘의 세계인데 말이다(이념적으로도 두 작가는 김훈과 마찬가지로 ‘중도 우파’ 정도 아닌가?). 그러니까 그가 소설가로서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소설가로서 아직 덜 깨져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긴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쓰는 족족 상을 받으니. 참고로, 작가의 부친은 기자였으면서 중국 고전의 번역자, 무협소설 작가로도 활동했다.  

-한 후배의 고향이 경남 밀양이라고 하자, 그는 최근 그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바로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 자행된 그 곳. 그는 탄식했다. “나라가 망했더라.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 단군 이래 최악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기 자식밖에 몰라.”

(*)이 대목에서 김훈은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다. “나라가 망했더라”거나 “단군 이래…”라는 식의 수사는 기자의 것으로도, 소설가의 것으로도 좀 수준이하이다. 물론 잡담의 수준은 된다. 집단 성폭행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남자 새끼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살해 암매장이라도 한 건가?), 짐작에 ‘단군 이래’ 그보다 더한 사건도 널리고 널린 게 대한민국이고, 새삼스러울 것 없는 우리의 역사다. 따라서, “나라가 망했더라”라는 호들갑은 오히려 사건/현실의 준엄함을 욕보이는 것이 된다.

(*)대신에, 나로서 흥미로운 건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란 김훈의 표현이다. 자세히 지적한바 있지만,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에서 핵심적인 건 도덕/윤리로부터의 ‘열외’이다(그것이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대장부’와 두말하는 ‘가장’의 차이이다). 열외이긴 하지만 완전한 면제는 아니어서 그것은 심리적 외상, 곧 트라우마로 남는다.

 

 

 

 

(*)알다시피,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은 ‘정치적 과오’이며, 거기에 견줄 만한 김훈의 아킬레스건은 (한국일보 기자로서) ‘5공 시절의 부역’이다. 그런 그로서 가장 입에 담기 어려웠을 말, 그래서 좀 해보고 싶었을 말은 대놓고 속시원하게 “도덕과 윤리가 없어!”라고 남들을 비판하는 말일 것이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남자 새끼 엄마들’이다. 그런데, 그 ‘미친 엄마들’이야말로 가장(家長)으로서 ‘정신없는 아빠들’의 대응물 아닌가?

(*)아빠들이 ‘식구들’ 때문에 정신없었듯이, 엄마들은 ‘자식들’ 때문에 미쳤다. 그러니, 도덕과 윤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서도 김훈은 자신의 트라우마의 실재(the Real)과 대면하지 않으며, ‘남자 새끼 엄마들’이란 판타지(=핑계)로 빠진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가 자기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보다도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캐릭터가 아닌 김훈은 에세이스트 김훈이며, 그 김훈이 내가 존경/존중하는 김훈이다).

(*)부분적으로 축약한다고 해놓고서는 인터뷰 전문을 옮겨놓고 말았다. 분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농간’도 부리지 않은 것이 된다. 개인적으론 김훈이 내년 2월부터 쓰겠다는 ‘치정’에 관한 소설이 관심이 간다. 그것이 우리 동시대의 이야기라면. 알다시피,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등은 ‘역사소설’(루카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냥 역사적 인물이나 소재를 빌미로 한 ‘이야기’이다(우리말의 ‘이야기’도 상당한 오지랖을 자랑한다).

(*)그러니 그런 걸 쓴 작가를 내가 소설가로 불러야 할지, 이야기꾼으로 불러야 할지 헷갈리는 게 나의 결벽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이전에 감상을 썼지만, 나는 <화장> 같은 ‘분바른’ 단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정’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 수도 있다.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등과 같은 근대소설의 걸작들이 다 치정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고 또 단련될 것이다...

06. 05. 31. 

P.S. 김훈의 <강산무진>을 사놓은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읽을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방학 때나 무진 기행을 다녀올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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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0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이나 김규항 보다는 김훈 얘기를 하실때가 더 흥미롭습니다.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언젠가 김훈론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로쟈 2006-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따로 정리할 필요가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훈에 대해서는 다른 두 사람보다 아무래도 훨씬 오랜 인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블루비니 2006-06-0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 동물세계에 인간사회의 개념인 '부도덕'이라는 판단을 할수가 있을까요 ㅎㅎ

로쟈 2006-06-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이란 건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옴표는 그래서 붙인 겁니다...

종이달 2022-05-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교수신문(06. 05. 31)에 문학평론가이자 지방대학 국문학 (여)교수 김용희의 영화평 '선생 날라리들의 빨간 마후라'를 옮겨온다. 지난 3월에 개봉됐었던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대한 것인데, 우연히도 어제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다가 막간에 절반쯤 봤다는 게 옮겨온 이유이다. 영화 자체는 (예상대로) 별로 성에 차지 않지만, 혹 생각해볼 거리들이 있나 리뷰들을 더 찾았다. 김용희 교수의 평에 이어지는 것은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리뷰이다.   

 

 

 

 

-사실 영화의 촉발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었다. 1998년 중학생들이 유희적 자작극처럼 만든 비디오<빨간 마후라>.(*<스물살>이란 영화 등도 같은 소재를 취해서 만들어진 '허접한' 영화였다.) 

-여중생의 실제 성관계를 찍은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오, 갓! 놀랍게도 이들은 대학교수가 되어있더란 말이지. 아니ㅡ 그럼, 중학교 때 양아치였던 이들이 개과천선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리가. 한국의 영화관객은 ‘대한늬우스’가 나오던 과거 계몽의 훈계에 이미 넌더리가 난지 오래다. 그러니까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교수의 숨겨진 과거,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훔쳐보기, 대중의 관음증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런 점에서, 이 영화 자체의 발상 또한 대단히 '부도덕'하다. 과거지사와 현재 사이의 '끄나풀'을 물고 늘어지면서 연좌제식의 윤리를 추궁하고 있기에).

-지방 전문대학의 염색과 교수 조은숙과 만화과 교수 박석규. 이들은 중학교 때 최고의 양아치, 양아치의 ‘깔대기’였던 과거를 자신의 비밀로 묻어두고 있다 우연히 대학에서 교수로 만나게 된다.(*한때 살인자도 개과천선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이다. 하물며 '양아치'가 무슨 '절대악'이라도 되는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갖은 교양과 품위 있는 말투로 자신을 치장하고 숨기며 살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지는 순간이다(*한번 양아치이면 영원한 양아치인가?).

-조은숙(문소리 분)은 스스로의 품위와 지적 풍모에 취하여 높은 비음으로 자작시를 낭송한다. 함께 회식을 하던 남자교수들은 거의 실신할 듯이 감탄을 하며 여교수를 바라본다. 여교수는 광택나고 몸에 붙는 브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남성들의 숱한 관능적 시선을 스스로 즐기면서 자기도취적으로 몸을 꼬며 걸어간다. 여교수는 자신의 관능미를 마음껏 펼치며 지적 내숭으로 남성을 유혹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완벽한 코메디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지식인들의 내숭과 위선을 포복절도하며 비웃어보라 한다.(*이 영화는 쓴웃음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포복절도까지는 아니다.) 

-아무렴, 세상에 이런 여교수는 없다. 실제 대학현장에서 대개 여교수는 중성적이어서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야 한다(여성은 중성화내지 남성화됨으로써 비로소 남성중심 사회에 끼어들 수 있으므로). 여성 학자는 중성적일 때 좀더 지적인 풍모와 안정감을 보장받는다. 사실 여성 학자에게서 아름다움 특히 관능적 미모란 그들의 지성의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잣대일 뿐이다. (“어떻게 저렇게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공부란 것을 할 수 있겠어? 말도 안돼!”)

-그렇다. 여교수는 쇼트커트나 단발머리에 거의 원불교 전도사나 수도승처럼 검정, 회색, 곤색 슈트를 번갈아 입고 검정색 단화를 신어야 한다. 만약 영화에 나오는 여교수와 같은 여성 학자가 있다면 그들은 남성 교수에게서 ‘애인’의 그룹에 속하게 되지 ‘동료’의 반열에 놓이지 않는다.(*이 무슨 오버스런 반응인가? 영화는 여교수와 기자간의 기예적 섹스신을 보여주는 서두부터 '리얼리즘'과 무관하다는 걸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 교수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용감하게 맞장 뜨고 서로 통쾌하게 웃어버릴 담대한 호기조차도 없다.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숨긴 채 내숭을 떨고 체면을 차리면서 “적어도 공인이니까” 자위하면서. 제도권 하에서, 당위적 삶의 표본 아래서, 점잖은 목소리와 성숙한 교양으로 욕망을 저당 잡힌 채. 서로를 “선생님,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지성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우리는 어떤 비밀과 공모를 안전하게 숨기고 있는 것인가.(*이 또한 평자의 '유머'인 듯하지만, 별로 웃기지 않다. 지방대학 유머인가?) 

-하여 영화에서 대학 교수는 말한다. “교수생활? 편하거든, 아무렴...... 교수야 입으로 먹고 사는 거지. 그래도, 겁도 나지, 얘들한테 구라쳐서..... 그렇다고, 함부로 못하지. 얘들이 보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빨간 마후라’의 날라리 같은 끼를 반납한 채 어느 정도 내숭을 떨면서 시대의 지성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에 가서 한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아오고 양아치였던 과거를 숨긴 채. 그러니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우리 시대 교수 상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블랙유머가 아니고 무엇인가. 흥미로운 陰畵(음화)가 아니고 무엇인가.(*영화도 그렇지만, 영화평 또한 기대에 못 미친다. 시읽기에 나름대로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 평자의 영화 읽기는 왜 이리 허술한가? 그리고 제목은 왜 '교수 날라리...'가 아니라 '선생 날라리...'인가?)

(*)건성으로 보던 영화에서 '러시아어' 몇 마디가 들리길래 다시 돌려보기도 했다. '블랙유머'나 '흥미로운 음화'라기보다는 '양아치'적 발상의 영화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빨간 마후라' 운운하지 말고 '날라리 교수사회'를 정공법으로 풍자하든가 말든가 했어야 했다(애꿎은 '지방 전문대 교수'들이나 도마에 올려놓지 말고). 어느 평자의 '짝퉁 홍상수'란 평조차도 과분해 보인다. 차라리 <스물살> 같은 어설픈 에로영화가 '정직'해 보인다. 더불어, '은밀한 매력' 어쩌구저쩌구 해놓고는 애꿎은 여배우의 전라 연기까지 요구할 건 무언가? 이 영화의 '은밀함'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06.04. 05) 황진미, '매혹되기에는 너무 값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이 영화는 첫째, ‘지식인을 조롱하는 영화’가 아니다. 둘째, ‘모호하고 매혹적인 여성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주변부 떨거지인 그들을 지식인이라 하기엔, 아직까지 ‘지식인’이란 말이 아깝고, 그녀에게 매혹되기엔 그녀가 너무 싸구려다. 영화는 그녀를 닮았다. 겉으론 ‘교수’라는 직함에 외모도 그럴싸하지만 천박한 정신에 자아도취가 전부인 그녀처럼, 영화 역시 그럴듯한 제목에 세련된 포스터와 예고편을 내세우지만, 형편없는 주제의식과 자의식 과잉이 전부이다.

-시(詩)를 읊고 살짝 다리를 저는 설정처럼 영화 또한 온갖 형식미학을 어수선히 차용하고, 적당히 언밸런스하고 깨는 듯한 편집을 통해 짐짓 예술영화인 척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첫 장면이 중요하다. 사진 찍는 수녀들의 시선이 머무는 바닷가 여인은 두개의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지방성(地方性)을 화두로 삼는 <무진기행>이요, 다른 하나는 히스테리아를 화두로 삼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두 텍스트에 대한 거명은 평론가의 안목이면서 동시에 고육지책처럼 여겨진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실제 지명이 아니다. ‘안개가 특산물인 항구’이자, ‘서울과 대비되는 곳’의 의미로 지어낸 이름이다. ‘심천’ 역시 실제 지명이 아니라,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의 의미로 지어낸 것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무진에 내려와 처음 만나는 것은 ‘잘 차려 입고 지적(知的)이라는, 미친 여자에 대한 수군거림’이다. 이것이 작가가 잡아낸 ‘지방성’의 첫인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 대도시에선 바닷가에 성장(盛裝)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구경거리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녀들의 주시는 지방성의 징표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지방방송 TV출연을 대단한 일인 양 여기고, 그녀 역시 “TV스타” 운운하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리포터가 아니라 PD라는 말에 표정이 바뀌고, 상대를 그럴듯하게 보아 동침한다. PD는 “SBS와 SBC가 다를 게 뭐냐?” 대들지만, 곧 “여기 PD가 PD냐?”며 반문한다. 그나마 서울에서 내려가는 박 작가는 “지방 전문대에서… 애들 가르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PD는 의식은 하되 인정하려들지 않으며, 박 작가는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지방성’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교수’니, ‘선생’이니, ‘작가’니 높여부르지만, 서로를 비웃고 서로의 진성성을 의심한다(“콤플렉스 때문”, “단체엔 연애하러 오나?”, “개나 소나 다 교수”).

-<무진기행>의 그들도 그랬다. “무진에선 누구나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내가 대학 다닐 때’를 말끝마다 붙이는 음악선생에게 <목포의 눈물>을 청해 들으며, 그녀를 둘러싼 애정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녀 역시 유행가나 듣는 그들을 경멸하면서, 애정관계를 이용해 ‘결혼’이든 ‘서울행’이든 뭔가를 얻고자 한다.

-여기서 ‘지방성’을 거론하는 것은, 지방 사람들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낼 때, 과연 무엇에 대한 풍자가 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부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은 ‘지식인들’의 심장부에 꽂히지 않고, ‘주변부의 지식인인 양 구는 떨거지들’에게 빗맞는 것이다. 풍자는 어설픈 ‘허수아비 논박’이 될 뿐이며, 이로써 중심부 지식인들은 표적을 빠져나간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문학박사이자 비평가인 그녀가 사실은 동거남에게 논문을 얻었고, 동거 사실을 숨긴 채 시집을 가고자 돈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폭로가 된다. 그러나 심천대 염색과(대사 “뭐 그런 과도 다 있냐?”) 교수인 미혼녀가 주변의 지인들과 돌아가며 연애를 한다 한들 무슨 풍자가 되는가? <선데이서울> 기사거리도 안 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와 톱스타의 데뷔전 이야기는 스캔들이 되지만, 만화가(대사 “만화 안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와 지방대 교수의 중학 시절 유명하지도 않은 일화가 무슨 흥밋거리가 되는가? 시에 대한 조롱은 <넘버.3>의 베스트셀러 시집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에서 이미 끝났건만, 아마추어 시인인 그녀를 내세워 무슨 변죽을 울리는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서생>이 발칙했던 건 그들이 단순한 양반 나부랭이가 아니라, 중앙의 최고권력층이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 파문’과 ‘국회의원 성추행’이 실시간인 시대에 지식사회와 중심부 권력에 정조준하지 못하고, 어디다 시시한 총구를 겨누는가?(*내 말이 그 말이다.) 그래도 제일 깨끗해 보이는 환경단체를 조롱한 건 신선하지 않냐고? 이미 수년 전 존경받던 환경단체장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포커스도 맞지 않고, 신랄하지도 않으며, 시대에도 뒤처진 솜방망이 헛손질이 불쌍할 뿐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시작, 영국 해변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이며, 미쳤다는 것. 그러나 귀족 청년은 그녀의 지성과 모호함과 특별한 사연에 매혹된다. <여교수…>의 첫 장면, 바닷가의 그녀를 보고 “죽이지 않냐? 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그녀에 대한 수군거림. 교수란다. PD가 그녀에게 매혹되는 지점은 외모와 살짝 장애와 교수라는 직함이다. 훨씬 얄팍하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과거는 아예 ‘창녀, 미친년’이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녀 스스로 꾸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여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로 귀족을 매료시키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든다. <여교수…>의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의 그녀는 일찌감치 섹스를 하게 된 여자였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에 의해 교환 양도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니가 이겼다며?”) 남성 중심의 성관계를 내면화한다. 그녀의 섹스는 남자들간의 힘의 논리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녀의 의지나 취향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언제이고 남자친구 앞에서 고해져야 하는 것이다(“했냐?”). 그녀는 남자의 전리품이다.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상대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지, 그저 문란하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그녀 역시 여왕벌이 아니다. 환경단체 남자들 모두와 시간차를 두고 섹스를 한 듯한 그녀는 그들의 공공연한 치근거림을 받는 상대이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여러 명이 그녀와 자고 싶어하니까 그녀에게 지배권이 있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그녀는 그들의 정욕과 경쟁심의 ‘대상’이요, 매개항일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그들을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녀가 누구와 자든지 감히 상관할 수 없어야 한다(<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의 애인이 딴 남자와 있을 때, 황정민은 사과하고 돌아간다). 그녀 뒤를 캐는 유 선생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여러 남자와 섹스를 할 뿐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까놓고 말하면 유 선생의 유언처럼 “네가 갖든지, 형이 갖든지, 돌려서 처먹든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PD라는 직함에 호감을 표하고 섹스를 한 뒤 아이로부터 “엄마 없다”는 대답을 유의미하게 듣는다. 유부남과 관계를 가지면서 부인의 존재 유무에 여전히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다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피한다. 유 선생이 PD에 대해 묻자 “결혼할 사람”이라 대답하고, 유 선생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쩔쩔맨다. <프랑스...>의 그녀가 결혼제도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자유로웠던 것에 반해 <여교수…>의 그녀는 결혼제도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그녀가 수치스러운 과거를 만들어 모호한 매력으로 삼았듯이 <여교수…>의 그녀는 장애를 만들어내어 매력으로 삼는다(“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남다은도 지적하듯(<씨네21> 545호 ‘욕망을 배신하라, 스타일을 배신하라’) 그녀가 다리를 저는 증상은 히스테리아이다. 그 증거로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고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히스테리아는 ‘증상에 대한 무관심’이 특징이다. (또 감독은 인터뷰에서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보호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습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환후(幻嗅) 역시 히스테리아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환후는 적개심의 표현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오닉 성격장애(hysterionic personality disorder)임을 알 수 있는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여학생에겐 심하게 질투를 느낀다. 또한 언제나 ‘개인극장’ 안에서 배우인 양 연극적으로 말하며, 이따금 팜므파탈처럼 차갑게 지시하고, 심한 욕설을 내뱉는 것도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그녀가 히스테리아적 주체라고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성중심 사회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이 신체언어로 발화한다고 말할 때, 즉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고 할 때, 그 언어는 누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프랑스...>에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성의 신경증에 관한 의학 논문과 판례 등이 작품에 삽입되어 있고, 그녀를 ‘남자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악녀’로 진단하는 신경증적 분석이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그녀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입으로도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시점의 문제이다. <프랑스…>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1인칭 시점을 끼워넣듯이 <여교수…> 역시 특이한 시점을 보여준다. 대개의 영화들이 3인칭 시점이고 드물게 1인칭 시점이 활용되는 반면, <여교수…>의 장면들은 2인칭으로 구성된다. 시점숏을 대부분 정면응시로 처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을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녀를 2인칭으로 봄으로써 그녀를 3인칭, 객관적 관점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필요를 폐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증상을 관객 눈앞에 늘어놓으며 스스로 ‘play’(놀다, 연기하다)할 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녀의 몸은 붉은 꽃이요, 그녀의 자궁은 미궁이다. 즐!

(*)해서, 평자가 주목하는 것은 '여교수'가 아니라 '그녀'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녀는 모호한 히스테리적 주체로 남는다는 것. 나는 이 모호함이 그녀의 '은밀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은밀함'은 그보다는 값비싸고 숭고한 어떤 것을 요구한다...

06. 05. 31. -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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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31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날선생>도 봐야겠어요.

로쟈 2006-05-3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말씀드리지만, 추천해드리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난주에 프린트해놓은 대담을 잠시 짬을 내어 읽었다. 씨네21(06. 05. 24)에 게재됐던 '우리 시대 대표적 시네필-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을 만나다'가 그 대담이다. 영화평론가 홍성남씨가 대담자로 나섰는데, 지난 전주영화제 참석차 이 '걸출한' 평론가가 내한했다는 소식은 '필름2.0'에서 이미 읽었었다('필름2.0'에도 짧은 대담이 실렸다). 시네필도 평론가도 아닌 나로선 '로젠봄'이란 이름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고전적인 영화들에 '명불허전'이란 말이 전해져오듯이 '영화평론가'의 명성이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대담을 읽으며 알게 됐다. 해서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로젠봄에 대한 '소개'격의 서두는 제쳐놓고 막바로 대담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고다르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 시대의 앙드레 바쟁”이라고 할 만한 동시대 비평계의 거목이 전주영화제 ‘인디비전’ 부문 심사위원 자격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고다르의 말은 로젠봄이 '우리 시대 최고의 비평가'란 뜻이다). 하지만 굳이 심사대상작이 아니더라도 매시간 영화를 보러 다니느라 인터뷰 시간을 좀체 잡기 힘들었던, 그래서 그 성실함을 눈으로 확인케 해주었던,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시네필-평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로젠봄으로부터 영화비평과 영화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시네필'이란 말을 굳이 덧붙이는 것은 그만큼 그가 많은 영화들을 본다는 뜻이겠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 ‘인디비전’ 심사위원 자격으로 전주를 방문했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어떤 영화들에 관심이 갔는가? 그리고 어떤 경향을 발견한 것이 있다면.

조너선 로젠봄: 전주에 온 것도, 한국에 온 것도 처음이라 이번 영화제의 전반적 경향을 말하는 건 어렵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좋았던 영화는 경쟁 외 부문에 있었다. 리트윅 가탁의 영화 2편 <구름에 가린 별>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미친 한 페이지> <원웨이 부기우기/27년 후>가 좋았다. 경쟁작들 중에서는 <방랑자> <아름다운 천연> 두편이 가장 좋았다. <가족> <뮤추얼 어프리시에이션>도 좋게 봤다. 개막작인 <오프사이드>도 포함시켜야겠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번 경쟁작 일부에도 반영됐는데, 한 영화에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돼 있다는 것이다. 아주 모호한 방식으로.

홍성남: 어느 글에서인가 칼 드레이어의 영화를 10대에 봤고 그때는 오해를 했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처럼 어려서부터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영화를 접했던 것 같은데.

 

 

 

 

조너선 로젠봄: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는 1961년 내가 18살쯤이었을 때 인권에 대한 급진적 캠프에 참가했다가 보게 됐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영화가 싫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평가를 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외의 영화들은 할아버지의 극장에서 봤다. 소규모 극장체인을 하시던 분이어서 공짜로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할아버지가 극장을 갖고 있다는 것도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유력한 조건이다!).

-칼 드레이어 영화 같은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60년대는 학문적으로 영화 연구(Cinema Studies)라고 불리는 개념이 아직 없던 시기였다(*영화학의 역사란 그토록 짧다). 미국에서 영화에 대해 공부하려면 도서관에 가야만 했다. 그나마도 책이 4∼5권뿐이었고 좋은 책들도 아니었다. 비디오나 DVD도 없었기 때문에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극장이 유일했다. 뉴욕과 파리는 경우가 좀 달라서 영화를 구해서 보는 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나 역시 60년대 대부분을 뉴욕에서 살다가 60년대 말에 파리로 이사했다.

홍성남: 에세이스트이자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필립 로페이트는 60년대 시네필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 보기의 영웅적 시기(heroic age)”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인 특권을 가진 위치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가진 영화문화의 공과를 다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가.

조너선 로젠봄: 내 세대 사람들은 60년대를 황금기로 보고 오늘날에는 영화가 죽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반대한다. 60년대가 굉장히 활기찬 시대이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칭찬하는 60년대 영화들은 당시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고다르의 가장 중요한 영화들이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고,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도 늘 논쟁의 대상이 됐고 그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당시보다 요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점은, 그때 같은 스노비즘이 지금엔 없다는 점이다.

-요즘은 영화의 역사를 알기 위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 세계 어디서든 영화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오히려 영화가 너무 많아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더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도 영화를 분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 자신도 영화를 분류하고 목록을 만드는 데 대한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오늘날엔 영화문화가 어떤 중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decentralized) 6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니 파버, 피터 보그다노비치, 조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폴린 케일 같은 사람들이 <필름 컬처>라는 잡지 하나에 다 글을 썼다. 요즘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말이다.(웃음)(*로젠봄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건 정말로 불행한 일이다.)    

-오늘날 생긴 또 한 가지 문제는 저널리즘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과 아카데믹한 입장에서 글을 쓰는 이들이 서로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도 스노비즘이 존재하긴 한다. 여하튼 실제로는 아카데믹하게 영화를 접근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기보다 그저 지위만 갖고 있는 것이다.

홍성남: 당신은 ‘영화연구’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당신은 그 현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와 관련해 예를 들어보자면, <필름 코멘트>에 글을 쓰는 유능한 영화평론가인 켄트 존스는 원래 영화를 만들려다가 영화연구쪽으로 분야를 옮겼는데, 그 연구란 것이 프랑스 인문학을 영화에 ‘잔혹하게’ 적용하는 데 질려서 그만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연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쪽에서는 자신들을 저널리즘과 차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차이를 두려고 심각한 척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저널리즘이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름에도)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영화연구가 (영화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막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건 미국에서는 예술보다 사회과학에 더 치중하는 경향, 심지어 예술을 불신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너무 비판적으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내 일자리를 지키고 내 미래를 확보하는 데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이상 자리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시카고 리더>에 글을 쓸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무직자였을지도 모른다(*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운도 따라야 한다).

홍성남: <시카고 리더>에 매주 글을 쓰는 걸로 아는데, 글을 쓸 영화를 고르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내 관심을 끄는 영화, 영화를 보고 할 말이 있을 영화, 다른 비평가들은 안 할 것 같은 말이 있을, 그런 영화를 선택한다. 시카고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많이 쓴다.  

홍성남: 당신의 글이 아주 평범한 저널리스틱한 비평과는 다르긴 해도 여하튼 저널리즘 비평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영화산업이나 신문·잡지 편집자들은 저널리즘 비평을 영화 마케팅의 일부로 생각하고 그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하는 면도 있지만 나는 저널리즘 비평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영화에 관한 논쟁을 촉진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의 글들에서는 (영화)형식에 대한 민감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형식을 거론하는 당신의 방식은 영화연구쪽에서 형식을 고려하는 방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디서 그와 관한 통찰을 얻는가.  

조너선 로젠봄: 노엘 버치의 책 <영화 실천의 이론>(Theory of Film Practice)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이미 오래전부터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인 버치의 책이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영화학계의 직무유기이다). 그리고 내가 본 많은 영화들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알렝 레네 같은 이들의 영화 말이다. 이런 영화감독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형식 면에서 접근해야지 단순히 내러티브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가들도 내게 영향을 끼쳤다. 파리에서 5년간 살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에서 쓰여진 평론들은 형식과 스타일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홍성남: 프랑스에서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에 자크 타티와 작업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프랑스에서 살았다는 것이 지금의 일을 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조너선 로젠봄: 자크 타티와 일한 것 말고도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몽상가의 나흘 밤>)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이 준 무엇보다 큰 영향은 쾌락주의(hedonism)- 예술에서의 쾌락을 포함한- 라고 생각한다. 매우 쉽게 훌륭한 영화들을 볼 수 있었고, 사는 곳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극장이 엄청나게 많았다.(*이 또한 영화평론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집주변에 극장이 많아야 한다는 것. 파리처럼.) 프랑스에서의 생활이 영화를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홍성남: 당신은 지금 시대의 대표적인 시네필-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국내에서는 평론가 정성일 정도를 '시네필-평론가'로 꼽을 수 있겠다. 조건은 영화를 절대적으로 많이 보고 많이 써야 한다는 것.)

조너선 로젠봄: 만약 당신이 시네필이 아닌 그냥 평론가라면 사회학이나 마케팅에 대해 글을 쓰지 예술형식에 대해 쓰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것이 회화나 문학평론가들에게는 그림이나 문학을 좋아하는지 않는지를 묻지 않는데 유독 영화평론가에 대해서는 영화를 좋아하느냐 아니냐를 문제삼는다. 영화를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홍성남: 당신이 하는 작업 중 놀라운 점 하나는 다른 영미권 평자들이 전혀 다루지 않고 다루기도 힘든 영화감독들, 예컨대 마스무라 야스조나 라울 루이즈 같은 이들의 영화들을 힘들게 찾아서 보고 연구해왔다는 것이다.

조너선 로젠봄: 마스무라의 영화는 30년 전에 파리에서 처음 보았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졌고, 접근하기 힘든 그의 영화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또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내게 일종의 목표가 되었다. 이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마스무라의 영화를 보았는데, 일례로는 일본에서 후원금을 받아 2주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한 여자 대학원생이 장면마다 시놉시스를 알려준 덕에 자막 없이도 영화를 이해하며 볼 수 있었다.(*국내에선 마스무라 야스조 걸작선이 작년 11월에 개최된 바 있다. 마스무라의 재발견에 로젠봄이 큰 기여를 했다는 얘기.)

-라울 루이즈의 작품은 로테르담영화제를 포함한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할 때마다 찾아서 봤다. 영어자막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힘든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은 내게 더 큰 추진력이 된다. 마스무라가 최근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기뻤다.

홍성남: 남들이 잘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평가할 수도 없는 영화들을 보고 알리는 것이 평론가의 책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단순히 보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관심이 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봐서 흥분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영화가 단지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의 가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발견되는데, 나는 거기엔 반대하는 입장이다.

 

 

 

 

홍성남: 앞에서 거론했던 마스무라나 루이즈처럼 혹은 ‘현재의’ 알랭 레네처럼, 어떠한 이유로든 남들이 비평적 영토에서 배척한 영화감독들에 대해 꾸준히 글을 써오고 있다. 당신이 (재)조명하는 미국 감독들, 예컨대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앤서니 만, 니콜라스 레이, 오토 프레밍거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당대에 어떤 ‘오해’를 받았던 감독들이지 않나.

조너선 로젠봄: 맞는 지적이다. 오슨 웰스도 그 리스트에 포함된다.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그들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이 비평가로서 내가 가진 임무가 아닌가 한다.

홍성남: 오슨 웰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걸로 아는데, 그것들과는 다른 입장의 책일 것 같다.

조너선 로젠봄: 내가 과거에 웰스에 대해 쓴 글들의 모음집이면서 새로 쓴 글들도 들어 있다. 새 글들은 웰스에 대한 잘못된 자료와 오해를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웰스가 영화산업 내에서 일한 사람 같지만 실제로는 영화산업 밖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매우 많다. 나는 많은 자료조사를 했고, 피터 보그다노비치 같은 이와도 인터뷰를 했고, 게리 그레이버(웰스의 생애 후반기에 촬영감독으로 웰스의 가까운 협력자 역할을 한 사람으로 현재 오슨 웰스 아카이브를 운영하고 있다)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이들이 오슨 웰스에 대해 느낀 점들과 알고 있는 점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종의 중간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잘 팔리고 유명한 책일수록 잘못된 정보가 많다는 것이다. 웰스에 대한 데이비드 톰슨의 책(<로즈버드: 오슨 웰스 이야기>)은 페이지마다 틀린 정보가 수두룩하다(*톰슨이 엮은 책으론 <비열한 거리>가 번역돼 있다).

홍성남: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조너선 로젠봄: 틀린 정보를 전할 뿐 아니라 편견도 심해서 문제다. 전쟁사가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입장에서 쓰여지듯, 영화사도 감독 입장이 아닌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진다. 심지어 찰스 하이엄같이 훌륭한 학자의 저서(<오슨 웰스: 한 미국인 천재의 흥망>)도 스튜디오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편견으로 가득하다. <로즈버드…> 같은 경우 웰스는 자기 중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써내려간 책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변호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톰슨의 책엔 자신이 조사해서 쓴 게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다시 한번 글로 써서 남긴 것뿐이다. 예를 들면 웰스는 부유한 혁명가들만 좋아한다고 했는데 절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웰스의 주변에는 가난한 빈털터리 혁명가 친구들이 많았다. 내 책의 제목은 <오슨 웰스의 발견>(Discovery of Orson Welles)인데, 이미 완결된 상태이고 출간은 내년쯤에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은 흔히 웰스가 이런 사람이라고 확실한 결말을 짓고 싶어하는데, 찰스 디킨스 전집을 갖고 있으면 그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웰스를 완벽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세계란 퍼즐과 같다.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발견의 과정이고, 우리는 소실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이 대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상식적인 주장이지만, 상식이 언제나 존중되는 것은 아니다.)  

홍성남: 웰스의 <오셀로>에 대해 당신이 쓴 글을 본 적 있다. 왜 미국에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한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조너선 로젠봄: 데이비드 톰슨의 저서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웰스를 ‘실패한 할리우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이라고 보고 싶다. 몇번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이용할 기회가 있었던 성공한 독립영화감독으로서 말이다. <오셀로>는 <시민 케인>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고, 촬영방법과 예산을 모은 방법 등에서는 <시민 케인>보다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이 영화는 제작비 문제로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여러 장소를 전전하며 찍은 것으로 유명한데 웰스는 그같은 시공간적 ‘간극’들을 훌륭하게 메워낸 완성본을 만들어냈다). 이를 실패한 할리우드영화로만 보면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홍성남: 웰스가 할리우드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당신이 지적하는 것은, 허우샤오시엔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현재 미국의 극장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신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너선 로젠봄: 미국 관객은 어떤 영화가 되었든지 간에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꽤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단지 앞에서 이야기한 감독들이 선보일 기회, 노출될 기회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 관객에겐 <오셀로> 같은 작품이나 허우샤오시엔, 키아로스타미 같은 감독들을 접할 기회가 없을 뿐이지 그들이 그런 감독의 영화를 특별히 거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알고 또 그들의 영화를 봐야 거부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는가. 정보가 없는 게 문제라고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키아로스타미가 미국 대중에게 소개되기만 하면 그가 단번에 스필버그처럼 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은 바로잡고 싶다. 많은 이들이 ‘대중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단정짓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건 대중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 가지, 박스오피스 수치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중은 자신들이 알고 있고 고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영화들을 보는 것뿐이다.

홍성남: 앞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영화문화는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인 것 같다. 하지만 종종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에 있어 당신이 너무 이상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곤 한다. 여하튼 당신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조너선 로젠봄: 우선 비평가들이 더 많은 영화를 알아야 한다. 돈을 들여 홍보가 잘되는 영화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다른 건 60년대의 이상적 조건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는 어떤 영화나 감독들이 소문이나 전설을 통해 퍼졌다. 고다르도 주류에 의해 알려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하면서 알려졌다. 이런 현상들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영화 티켓 판매 정도보다 DVD 판매 정도가 더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박스오피스만 보고 영화문화가 이렇다고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자신보다 젊은 시네필 평론가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외계에서 온 이들이 서로 모르면서 지구에 흩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지금의 고쳐져야 할 영화문화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그렇다. 내가 알기론 그런 힘이 될 비평가들이 전세계에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버라이어티>에 있다가 <로스앤젤레스 위클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스콧 파운대스는 아주 공격적이고 진지한 글을 쓴다. 내가 좋아하는 캐나다 잡지 <시네마 스코프>에 DVD 리뷰를 쓰는 필자들도 훌륭하다.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면 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로 진행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 내 저서를 심도 깊게 읽고 와준 것도 고맙고 놀랍다.

홍성남: 마스무라 야스조에 대해 말하길, 그가 직접적인 연결이 없으면서도 동시대를 산 다른 감독들, 새뮤얼 풀러, 더글러스 서크, 니콜라스 레이, 프랭크 태슐린 등과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흥미가 갔다고도 했고. 그러면서 ‘전지구적 동시성’(Global Simultaneity)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최근에 그런 현상을 발견한 대상이 또 있었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무비 뮤테이션즈>(Movie Mutations, 로젠봄과 에이드리언 마틴이 편집을 맡아 2003년에 출간된 책) 자체가 그런 관심사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것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1960년대생 시네필들, 예컨대 니콜 브레네즈(프랑스), 켄트 존스(미국), 에이드리언 마틴(호주) 등에게서는 비슷한 취향이 공유되고 있음이 발견되더라. (내 취향은 아니지만) 필립 가렐, 몬티 헬먼, 존 카사베츠 같은 감독을 좋아하는 성향 말이다. 그래서 ‘전지구적 동시성’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요즘은 전세계 어디서나 영화의 역사를 공유한다. 단순히 모든 나라에서 대형 제작사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결속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시를 싫어하고, 미국인들도 부시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 공통성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공통분모를 연대로 이어갈 수 있는 기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키아로스타미에 대한 책을 이란 사람(이란의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이기도 한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과 같이 썼다. 그것도 그런 국제적 결속의 한 노력이지 싶은데, 앞으르도 그런 식으로 작업할 생각이 있는가.

조너선 로젠봄: 그 책뿐만 아니라 <무비 뮤테이션즈>도 동일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노력을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메흐르나즈 사에드 바파가 프랑스 잡지 <트래픽>에 글을 쓸 때, 그녀의 이름만 올라 있지만 그 글의 형상화에 내가 도움을 줬다. 그 역시 내가 이란의 비평가들과 얘기할 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책에 실린 두 사람의 대화 부분이 이란과 호주 잡지에 동시에 실린 것을 보고 기뻤다. 이 책을 쓸 때 키아로스타미와는 팩스를 통해서 인터뷰를 했다.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어로 내 이름 쓰는 걸 배우기도 했다.

홍성남: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려는 조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미권 비평에서는 고다르에 대한 논의가 어느 시점에서 멈춰져 있는 상태이고 그의 ‘현재’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다르의 현재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 몇 안 되는 영미권 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조너선 로젠봄: 전세계적으로는 고다르에 관한 커다란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다르 영화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놓은 책도 있고, 일본에서는 <영화사> DVD가 훌륭한 모양새로 나왔다(*고다르가 찍은 영화 100년의 역사를 말한다. 국내에는 언제 소개되는 것인지?). 사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가보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글도 아무 생각없이 500만명이 읽는 것보다 5명이 읽고 감동받아 세상을 바꾸자고 생각한다면 그게 더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스튜디오 마케팅 때문에 수치에 연연하는데, 나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고다르와 동년배이면서 점점 더 비평적 주가를 높여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그에 대한 당신 글은 그리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하나.

조너선 로젠봄: 사실 이스트우드에 대해서도 글을 많이 썼다. 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을 가장 좋아한다. 액션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대해서도 글을 썼고 매우 좋아한다. 그외에도 여러 가지 썼는데 지금 떠오르는 영화들은 이렇다. 그는 전적으로 어떤 대본을 갖게 되느냐에 좌우되는 감독이다. 물론 연출력이 출중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는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양식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높이 살 만하지만 같은 이유로 과대 평가될 위험도 있다.

 

 

 

 

-자신이 대본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떤 대본을 갖고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의 질이 들쭉날쭉하다. 사실 그가 개봉 전 시사회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선 찬사를 보낸다. 그럴 수 있는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스필버그만 해도 개봉 전 시사회를 열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상업영화를 거부하거나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스필버그의 'A. I.'같은 작품은 최근 나온 영화 중 걸작이라고 할 만하다.

홍성남: (빼도 무방할 것 같은 사항)세르주 다네나 레이먼드 더그냇 같은 뛰어난 평론가들에 대해서도 꾸준히 글을 써왔다(*다네는 '카이예 뒤 시네마' 편집장을 지낸 프랑스의 최고의 비평가이다).

 

 

 

 

조너선 로젠봄: 두 사람 다 친구였다. 다네와는 특히 친했고 함께 작업한 적도 있다. 흔히 비평가들에 대해 얘기할 때 그들간의 경쟁에 주목하는데, 나는 비평가들 사이에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굉장히 영향력있는 비평가인 로저 에버트의 경우 그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고, 시카고에서 시사회에도 자주 같이 간다. <무비 뮤테이션즈>에 참여했던 많은 비평가들과도 친하다. 크리스 후지와라 같은 이는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도 매우 좋아한다. 비평가들이 서로의 글을 많이 읽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홍성남: 테크놀로지가 발전하고 다른 시각문화들도 발전하면서 영화라는 존재가 예전보다 힘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대에 영화의 지위와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영화는 여전히 굉장한 영향력이 있는 매체다. 단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 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5편을 집에 두고 계속 볼 수 있는 시대, 그래서 영화와 더 친밀해져서 집안에서 그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영화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대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한다.

홍성남: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당신은 부당하게 간과되거나 무시당한 감독들에 대해 집중해왔다. 현재의 감독 중 그런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조너선 로젠봄: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최근에 그의 작품을 봐서 그런지 제임스 베닝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딱 이 사람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내 연배의 인물인데 그렇게 잘 알려지지는 않아서 미국에서는 DVD도 거의 안 나와 있다. 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는 굉장한 실험영화인이다.

(*) 로젠봄의 책으론 <무비 뮤테이션즈>와 최근에 나온 <이센셜 시네마>를 얼마전에 구했다. 한국의 '로젠봄'들이 그만한 시야와 부피의 책들을 얼른 써주기를 기대한다. 

06.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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