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05년 연초에 모스크바 통신문으로 '서비스란 무엇인가'란 글을 띄운 적이 있다. 오늘 예상대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여론조사에 따르면 여당의 선거 참패 원인은 노무현 정권의 '무능' 때문이라고. '무능력'이라는 게 노정권의 '프레임'이 돼 버렸다), 문득 김훈의 인터뷰에 관해 쓴 그 글이 생각나서 옮겨온다. 그 글 또한 AS차원에서 작성됐던 것인데, 격으로 치자면 이 글은 AAS(애프터 애프터 서비스)쯤 되겠다. 강의준비를 잠시 손놓고 잠시 AS를 손본다(그나저나 지방선거 이후의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젠가 나는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이란 통신문을 쓴 적이 있는데(*이건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다시 정리해놓았다), 최근에/연말에 인터넷에 뜬 이들의 인터뷰/칼럼을 우연히 읽으며 세 사람에 대해서 한번 더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규항에 대해서 쓴 걸 재정리한 것이 '희망에 대하여'이다). 어쩌면 연말연시이고 귀국날짜가 다가오면서(*나는 한달 후에 귀국했다)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는지도 모르고(젠장!), 또 어쩌면 ‘반복’에의 욕구가 우리에게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냥 AS(애프터 서비스) 정신인지도.

(*)김훈과 관련하여 최근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건 그가 과거 직장 후배들인 한국일보 기자들과 나눈 인터뷰(대화)이다. “우리는(=후배들은) 17년 동안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선배 김훈(56)을 보았고, 이 시대 문장가요, 소설가인 그를 만났다.” 아마도 오랜만에 만났을 선후배들이므로 대화는 장시간이어졌을 테지만, ‘정리’된 건 (기대보다) 소략했다. “대화는 45만부나 팔린 소설 <칼의 노래>로 시작됐다.”고 하는데 역시 작가의 ‘밥벌이’로서는 소설만한 게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권당 인세를 1,000원씩만 잡아도 4억 5천만원이다. 이 정도면 그는 한때의 이문열과 조정래, 황석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지영, 은희경을 뺨치겠다. 그만하면, ‘가장(家長)’으로서 그가 목에 힘을 줄 만하다(생각하면, 나도 이런 통신문들 대신에 소설을 써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큰소리치는 ‘가장’이 돼 보나?).

(*)그러니, 그가 ‘소설가’를 주업으로 삼고, ‘에세이스트’를 부업 정도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니, 필연적이다. 파스칼의 단장을 비틀자면, “적성, 돈 -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돈되는 일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니까. 하긴 에세이스트로서 그가 벌어들인 돈은 소설가로서 번 돈에 1/10이나 되었으면 다행일 것이다(소설가의 책상을 쪼개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열 개도 더 나올 것이다. 아니 열의 열제곱?). 이하의 인터뷰는 부분적으로 축약된 것이며, 내 생각은 (언제나 그렇듯이) (*)표시가 돼 있다.

-<칼의 노래>에 대한 우리사회, 특히 정치권의 반응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느낌은.

(*)이순신 외에도 이명박, 이병철에 관한 드라마들이 방영중인 걸로 안다. 이런 군인/기업가들의 ‘실명’ 내지는 ‘모델’ 드라마가 유행하는 것은 ‘미지근한’ 현정부의 소위 ‘무능력’을 보상하기 위한 차원이 아닌가 싶다. 질베르 뒤랑 같은 상상력 이론가의 용어를 빌리자면, ‘상상력의 균형잡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한국사회는 이른바 ‘주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 이명박, 이병철은 모두 한 시대의 ‘주인기표’들 아닌가? 왜 이런 주인기표들이 요구되는가? ‘노무현’이란 기표가 주인의 행세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집의 제목을 비틀자면(<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현정부의 지난 2년은 “한다던 일 하지 않고”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카리스마를 갖고 견주자면, 김대중-노무현의 비주류정권 커플은 과거 군사정권의 전두환-노태우 커플을 반복하고 있다. 집권초기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겠다고 하면서 필요한 ‘권위’마저 청산해버린 것은 아닌지?

“(단호하게) <칼의 노래>를 386애들이 읽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때 배 12척 갖고 300척을 부순 것처럼 하겠다는 거야. 무지몽매에 빠진 거지. 이순신이나 되니까 한 거야. 걔들이 갖고 나가면 다 죽어. 12과 300은 현대사회에서 적용이 안되는 이야기야. 중세 이야기를 쓴 건데 어떻게 현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TV에다 대고 말하는 거야. 그걸 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미쳤구나. 요새 내가 글을 잘못 써 가지고 어린 것들 망치는구나’ 했어. 진짜로 내 소설을 읽는 건 고마운데, 적이 300척 갖고 나올 때 지도자라면 최소한 200척은 갖고 나가야지. 12척을 갖고 나가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니들이 12척을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다’는 말을 TV에서 했는데 MBC가 빼버려 나만 바보가 된 거지. 얼마나 약 오르는지. 드라마? 안 봐. 처음 한 번 봤는데 아동극 수준이야.”(*김훈이 약이 올랐다고 하길래 이 대목은 축약하지 않았다.)

-그럼 왜 쓰셨어요.

“그때, 그분(이순신)의 실존적인 부분을 썼는데, 현실을 지휘하는 리더들이 12척으로 300척을 깨듯 ‘경제를 살리겠다’니. 미치겠다 이거야. 적이 300척이면 500척 갖고 나가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그래서 상종을 안 했어.”

(*)현정부의 ‘아마츄어리즘’에 대한 비판을 김훈도 공유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그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김훈은 소설가로서는 아마츄어이지만, 둘의 범주가 다르므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런 과정에서 우리사회가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라진 것 아닌가요.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 곧 ‘회색분자들’이 나의 용어로 하면, “덜 나쁜 사람들”이고 (천국이나 지옥이 아닌) 연옥에 갈 사람들이다. 소설은 그런 사람들의 세계이며, (혁명이 아닌) 정치는 그런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윤리와도 구별된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나는 김훈과 의견을 같이한다. 나는 우리가 ‘적당히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우리의 나쁜/얕은 본성을 간과/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컬하지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간은 ‘벌레’로서 과소평가돼서도 안되지만, ‘천사’로서 과대평가돼서도 안된다.



-이어 그는 특유의 섬세한 분석으로 지금, 우리 사회를 해부했다. “386이 리더가 됐잖아. 근데 걔들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는 아해들이야. 그래서 도덕적인 거지. 인간의 선의를 모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 아름답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거든. 엄청난 세금을 내고, 반드시 아들을 군대 보내는 것은 우익이거든. 우익에겐 세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아 그래야 우익이 완성되는 거 아냐. 그런데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

-그러면서 자신도 굳이 말하라면 ‘중도 우익’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좌익과 진보는 세상을 맡을 수 없어. 물적토대가 없으니까.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야.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야."

(*)내가 강조한 대목들에서 김훈의 기본적인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지난번에 김훈의 세계관을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러한 세계관/태도가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물적 토대’라는 건 물론 ‘밥벌이’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는 ‘밥벌이’의 토대를 건설한 ‘가장(家長)’이고(그러니까 여기서 ‘박정희’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이며 일종의 메타언어이다. ‘이순신’이 그런 것처럼). 이 밥법이란 건 항상 ‘타협’을 전제로 한다(흔히 하는 말로, ‘기분대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가장(家長)의 세계란 건 도덕적인 선, 혹은 아름다움에 못 미치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와는 무관한 세계이다. 가장들이 휴일에 주로 하는 일이란 낮잠 자는 것이며, 그들의 주특기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내가 그랬었나?” “그게 아니고…”). 그런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부도덕한 가장’이 아니라 ‘무능력한 가장’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차라리 죽을지언정”을 내세우는 도덕적이고 기개 높은 유전자들은 아름답고 고상할지언정, 굶어죽기 십상이어서 자손을 남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의 ‘성공한’ 조상들은 도덕/명분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적당히 불의와 타협도 하고 남을 이용해먹기도 했던 양반들일 것이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단, 남들 이상은 곤란하다.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는 사회”는 곤란하다(그런 사회는 부숴야 한다!). 그러니까 우익삼락(右翼三樂)을 누리지 못하는 우익은 우익으로서 자격미달이다: (1)세금 왕창 내고, (2)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3)질서를 지키고(공공질서?). 한데, (1)세금 왕창 내기는커녕 공과금 내기도 버거운 데다가, (2)(아들 군대보낼 일은 물론 없거니와) 최전방 ‘부근’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하고, (3)무단횡단으로 두 번 범칙금 낸 바 있는 나는 우익이 되고 싶어도 못되겠다. 근데, 반대로 좌익의 조건은 어떤 건가?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김규항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님 홍세화?

(*)하여간에 그런 조건이라면, 우익단체에서 자발적으로라도 엄격하게 심사를 해서 우익 자격증이라도 부여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래야 우익으로서 자부심/자긍심을 가질 것 아닌가? 또 그래야지 (1)탈세/탈루를 밥먹듯이 하고 (2)돈주고 아들 군대 빼고 (3)각종 편법으로 국가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작자들이 ‘족보’도 없는 우익 행세를 하거나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런 작자들한테 일당 받고 우익으로 동원되는 일이 없어질 것 아닌가. 해서, 사이비-우익들만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좌익의 준동이 아니라 우익의 결핍이다.

(*)김훈의 말마따나, 경험도 없는 ‘아해들’(=좌파들)이 무얼 알겠는가?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 즉 펀더멘털을 책임지고 있는 건 우익 아닌가? 그러니, 작금의 경제불황도 다 우익의 책임이며, 현정부의 무능도 (그들을 쥐고 흔드는) 우익의 책임 아닌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비분강개하여 자진(自盡)하는 우익 하나 없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우리의 우익은 일본의 야쿠자만도 못한 것이다).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 그토록 ‘우려’하면서(그 우려는 ‘값싼 노동력’ 상실/훼손에 대한 우려인가?) 통일에 대해서는 경원시하는 우익들만 득세하는 것도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나는 김훈의 ‘커밍아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훈의 ‘보수주의’를 비난하는 좌익 소아(小兒)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건 “새는 좌우의 양날개로 난다”(이영희)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위대한가요.(*내 식으로 번안하자면, “가장이 그렇게 위대한가요?”)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아마도 이런 ‘기성세대’의 마인드가 ‘젊은’ 독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만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박정희’란 기표는 ‘박정희의 시대’를 가리키는 주인기표이다. 그건 ‘정주영’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고, ‘이병철’이라고 바꿔불러도 무방하다. 소위 한국사회의 산업화/근대화라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부르주아는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게 ‘사실’이고 ‘리얼리즘’이다. ‘민주주의’란 상부구조는 그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 내가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 ‘리얼리즘’이 생물학적/생태학적 사실과 리얼리즘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사실’은 ‘당위’와는 또다른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는 어떻게 하고요.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리더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해. 다중(대중?)이 하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박정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이나.”

 

 

 

 

(*)내 생각에 김훈의 착각은 박정희의 ‘정치적 과오’가 그의 ‘치적’과 구별/분리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하지만, 실상 박정희의 ‘치적’을 낳은 ‘물적 토대’는 그의 ‘정치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과연 그 시대의 ‘성장 드라이브’가 (‘정치적 무과오’로 가정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을까? 성장과 도덕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더 잘 살면서 동시에 더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김훈은 ‘박정희주의자’로서, 그리고 ‘가부장적 마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는 박정희/가장(家長)의 (불가피한) 정치적/도덕적 과오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때요.

“노대통령의 마음은 로맨스야. 선한 마음을 담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거지. 그의 낭만주의야말로 역대 누구에도 없던 아름다움이야. 뜻은 옳고 바르고 도덕적이지만, 그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현실적 물적 토대가 없는 거야.”

(*)여기서도 김훈은 ‘아름다움/물적 토대’의 이분법을 쓰고 있다. 그 이분법은 ‘아름다움/책임’의 이분법이기도 하다. 현정부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책임질 만한 ‘물적 토대’가 없다는 비판이다. 이 대목에서 음미해볼 만한 것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즉 박정희 말기에 은밀하게 추진되다 실패하고 만 핵미사일 보유 시도 말이다. ‘가장(家長)’으로서의 박정희는 군사적/외교적 대미 종속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적 토대’(=핵)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사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뻣뻣하게 나오는 것도 그 긴가민가한 핵 때문 아닌가?(물론 실상은 외부의 ‘군사적 위협 요인’에 대한 미국 자체내의 요구가 그런 ‘북한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듯하지만.)

 

 

 

 

(*)무얼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장부들의) 큰소리는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평화는 말이 아니라 평화를 지켜낼 만한 힘에 의해서 지켜진다. 그럴 만한 힘이 없다면, 알아서 기어야 한다. 해서, 나의 의견은 (일부 수구보수들의) 친미/숭미적 태도와 박정희 숭배는 모순적이라는 것이며(물론 기회주의적 꼴통들이 이 ‘모순’을 헤아리기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일부 ‘아름다운’ 좌파들의) 물적 토대(=힘) 없는 정의에의 요구는 기만적이라는 것이다.

-기자와 소설가 중에 어느쪽이 좋은지.

“기자로 못한 원한을 지금 풀고 있는 거야. 기자 할 때는 6하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데 소설을 쓰니까 너무 편해. 근데 나는 사실 6하원칙이 위대한,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해. 사실과 그것을 확인하는 것의 존엄함을 알아야 해. 지금 신문들을 보라고.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어. 보수신문이나 진보신문이나 똑같아. 의견을 사실인 양 떠들고 있으니 미쳤지. 나는 두 발짝 세 발짝 물러났어. 너무 진이 빠져서.”

(*)나는 6하 원칙이 ‘최고의 문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존엄’하다고는 생각한다. 이 존엄함을 던져버린 신문들은 보수나 진보나 곧 다 망할 것이다.

-이번 문학동네에 소설 <머나먼 속세>를 쓰셨던데, 만족하십니까.(*얼마전에 출간된 <강산무진>에 수록돼 있다.)

 

 

 

 

“작가는 실패할 수도 있지. 기자라고 기사를 매일 잘 쓸 수 있냐? 내년 2월부터 ‘치정’에 관한 소설 쓰려고.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도록 만들게. 여기 후배들 예쁘지만 다들 소설 못쓰게 해야지(웃음).”

(*)이런 대목에서 김훈은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그가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을 만한 걸작, 그것도 ‘치정’에 관한 걸작을 써주길 나도 기대한다. 치정(癡情)?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을 말한다. 그걸 끝내줄 수 있는 치정소설? 그가 그 어지러운 미로 속에서 그저 생환해 오기만을 바란다.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다.(*요즘은 좋아하는 후배들이 아니라 부러워하는 후배들이 많은 거 아닌가.)

“나는 잡놈이여.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깨지는 인간이 바로 김훈이야. 내 살과 뼈는 김구 선생 따라다니던 아버지(김광주)에게서 받은 것이거든.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 세상의 바탕이 폭력이라는 걸 알았던 아버지를 존경하지. 난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 길바닥, 잡놈 사회서 배운 거야. 기자라는 건 잡놈 근성이 있어야 돼.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여기선 약간 오버하는 듯하다. 염상섭, 채만식(?)도 기자였으며, 그들의 소설세계란 것이 또한 아카데니즘이 아닌 리얼리즘의 세계인데 말이다(이념적으로도 두 작가는 김훈과 마찬가지로 ‘중도 우파’ 정도 아닌가?). 그러니까 그가 소설가로서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소설가로서 아직 덜 깨져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긴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쓰는 족족 상을 받으니. 참고로, 작가의 부친은 기자였으면서 중국 고전의 번역자, 무협소설 작가로도 활동했다.  

-한 후배의 고향이 경남 밀양이라고 하자, 그는 최근 그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바로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 자행된 그 곳. 그는 탄식했다. “나라가 망했더라.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 단군 이래 최악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기 자식밖에 몰라.”

(*)이 대목에서 김훈은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다. “나라가 망했더라”거나 “단군 이래…”라는 식의 수사는 기자의 것으로도, 소설가의 것으로도 좀 수준이하이다. 물론 잡담의 수준은 된다. 집단 성폭행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나(‘남자 새끼들’이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하고 살해 암매장이라도 한 건가?), 짐작에 ‘단군 이래’ 그보다 더한 사건도 널리고 널린 게 대한민국이고, 새삼스러울 것 없는 우리의 역사다. 따라서, “나라가 망했더라”라는 호들갑은 오히려 사건/현실의 준엄함을 욕보이는 것이 된다.

(*)대신에, 나로서 흥미로운 건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란 김훈의 표현이다. 자세히 지적한바 있지만, ‘가장(家長)의 허무주의’에서 핵심적인 건 도덕/윤리로부터의 ‘열외’이다(그것이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대장부’와 두말하는 ‘가장’의 차이이다). 열외이긴 하지만 완전한 면제는 아니어서 그것은 심리적 외상, 곧 트라우마로 남는다.

 

 

 

 

(*)알다시피,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은 ‘정치적 과오’이며, 거기에 견줄 만한 김훈의 아킬레스건은 (한국일보 기자로서) ‘5공 시절의 부역’이다. 그런 그로서 가장 입에 담기 어려웠을 말, 그래서 좀 해보고 싶었을 말은 대놓고 속시원하게 “도덕과 윤리가 없어!”라고 남들을 비판하는 말일 것이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남자 새끼 엄마들’이다. 그런데, 그 ‘미친 엄마들’이야말로 가장(家長)으로서 ‘정신없는 아빠들’의 대응물 아닌가?

(*)아빠들이 ‘식구들’ 때문에 정신없었듯이, 엄마들은 ‘자식들’ 때문에 미쳤다. 그러니, 도덕과 윤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서도 김훈은 자신의 트라우마의 실재(the Real)과 대면하지 않으며, ‘남자 새끼 엄마들’이란 판타지(=핑계)로 빠진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가 자기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보다도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캐릭터가 아닌 김훈은 에세이스트 김훈이며, 그 김훈이 내가 존경/존중하는 김훈이다).

(*)부분적으로 축약한다고 해놓고서는 인터뷰 전문을 옮겨놓고 말았다. 분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농간’도 부리지 않은 것이 된다. 개인적으론 김훈이 내년 2월부터 쓰겠다는 ‘치정’에 관한 소설이 관심이 간다. 그것이 우리 동시대의 이야기라면. 알다시피,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등은 ‘역사소설’(루카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며, 그냥 역사적 인물이나 소재를 빌미로 한 ‘이야기’이다(우리말의 ‘이야기’도 상당한 오지랖을 자랑한다).

(*)그러니 그런 걸 쓴 작가를 내가 소설가로 불러야 할지, 이야기꾼으로 불러야 할지 헷갈리는 게 나의 결벽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이전에 감상을 썼지만, 나는 <화장> 같은 ‘분바른’ 단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정’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 수도 있다. <보바리 부인>이나 <안나 카레니나> 등과 같은 근대소설의 걸작들이 다 치정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훈은 그들과의 경쟁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고 또 단련될 것이다...

06. 05. 31. 

P.S. 김훈의 <강산무진>을 사놓은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읽을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번 방학 때나 무진 기행을 다녀올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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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0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이나 김규항 보다는 김훈 얘기를 하실때가 더 흥미롭습니다. "그는 ‘사실’/‘리얼리즘’을 강조하지만, ‘실재(the Real)’와는 대면하지 않는다"...언젠가 김훈론으로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로쟈 2006-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따로 정리할 필요가 생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훈에 대해서는 다른 두 사람보다 아무래도 훨씬 오랜 인연을 갖고 있으니까요...

블루비니 2006-06-0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적당한 부도덕’은 용인되거나 오히려 ‘능력’으로 인정된다. 이건 아주 상식적인데 -> 동물세계에 인간사회의 개념인 '부도덕'이라는 판단을 할수가 있을까요 ㅎㅎ

로쟈 2006-06-0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이란 건 '이기적 유전자'란 표현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옴표는 그래서 붙인 겁니다...

종이달 2022-05-1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