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올해는 중국의 문화혁명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전 '한겨레21'에서는 이에 대한 심층특집을 다룬 바 있다. 그걸 잘 정리해놓으려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어졌었는데, 마침 오늘자 문화일보(06. 06. 13)에 문화혁명과 관련한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의 기고문이 실렸길래 옮겨온다. 읽고 정리하기에 부담이 없는 분량이기도 하고('로쟈의 생각'으로 정리하는 건 미래의 일이고 당장은 '인용'으로 때우도록 한다).

 

 

 

 

-올해로 40돌을 맞이한 문화대혁명,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결코 되새기고 싶은 기억이 아니다. 40돌을 맞으면서도 그것이 중국인들의 입이나 언론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는 원인도 여기에 있을 것 이다. 그렇지만 그 처절한 교훈은 모든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발발 원인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과오에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왜 대륙전체가 삽시간에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고 온나라가 집단적 열광으로 내란, 내전에 몰입됐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이 별로 없다. 어찌 보면 오늘의 50세이상 대부분이 바로 그 열광 속에 있었기에 그 답을 꺼리는 것 같이도 보인다. 거의 모두가 참여자였기에 그 교훈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모든 개개인에 돌려진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다! 한편으로, 공산주의는 계속적인 '혁명'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아닌가? 스탈린은 마오쩌둥보다 30년 앞서서 '대숙청'을 통해 이를 입증해 보였다. 사진은 1949년 모스크바에서의 마오와 스탈린.


-농민혁명과 대중혁명의 기치를 들고 간난신고 끝에 정권을 창출 한 마오는 바로 그 정권을 똑같은 방법, 즉 군중운동의 방식으로 유지하려 했다. 대중의 힘을 하늘처럼 믿었던 마오는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 낡은 것을 짓부수는 반란정신, 심지어 실패하면 능지처참이 되더라도 과감히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는 정신을 고취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어찌 보면 평생의 이상을 문화대혁명으로 마무리하려 한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그 정신을 받든 홍위병들이 반란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으려 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한다는 격이었다. 마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권자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들이 장악했던 당조직과 정부는 사실상 그 기능을 잃어버렸다. ‘모든 권력은 반란파에게’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정권탈취’라는 구호가 신문을 뒤덮었고 각 성과 지방마다 이른바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의 ‘홍색정권’이 창출됐다. 홍위병운동은 반란파, 보수파, 중간파라는 파벌로 나뉘어 전국을 내전으로 내몰았다. 그때 쌓인 불신의 앙금이 오늘까지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정도다.


-무엇이 이러한 통제불가능의 사태를 불러왔을까. 어찌 보면 대명, 대방, 대자보라는 형식의 중국식 ‘민주’도 크게 한몫한 것 같기도 하다(*오늘날의 인터넷은 그 유사-대자보가 아닐까?). 누구나 대명, 대방, 대자보를 이용하여 마오를 제외한 어떠한 권위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이 갈리는 무대였다. 낙후한 생산력은 결국 이 초현실주의 이상을 소화 해내지 못하고 충돌과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실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부터 줄곧 안정국면을 강조하고 대명, 대방, 대자보를 법적으로 금지한 것도 바로 그 교훈을 되새긴 일례라고 하겠다.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실업인구의 증가, 산발적인 소란 같은 현실문제를 심각하게 안고 있는 오늘, 중국은 경제발전에 걸맞은 정치체제 개혁과 시민사회·민주사회 건설을 지향하면서도 문화대혁명의 교훈을 되새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어찌 보면 딜레마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문화대혁명’으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문화대혁명이 관려주의와 부패일소에 공을 세웠다는 논리도 펴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에 다시 문화대혁명의 일막이라도 재현한다면 그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초현실주의 생산관계와 낙후한 생산력 간에 빚어진 갈등이었다면 작금의 중국은 발전하는 생산력에 순응해 점진적인 체제개혁으로 문제점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사회는 혼란이 아닌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을 해야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에서 철저히 부정되고 있는 역사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하겠다.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이 없었다면 과거에 대한 부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개혁·개방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교훈이 중국인에게 난관을 헤쳐나갈 지혜를 안겨준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을 잘 모르면 오늘의 중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06. 06. 13.

P.S. 참고로 지난 봄 '한겨레'에 연재됐었던 이상수 베이징 특파원의 '천안문의 마르크스' 중에서 '(4)사상의 좌우 난독증'(06. 04. 26)을 옮겨온다. 최근 중국의 사상/이념 지형에 대해서 안내해주는 기사이다.

-최근 중국에서 이른바 ‘좌파’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자주 터져 나오고 있다. 홍콩 <명보>는 지난해 중반 이후 중국 내에서 ‘개혁의 성씨가 자씨(자본주의)인지, 사씨(사회주의)인지’를 묻는 논쟁이 자주 터지고 있다며, “이런 사상논쟁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래 최고조”라고 보도했다.

-좌파와 자유파로부터 비판받는 당국=지난해 8월 궁센톈 베이징대학 교수(법학)는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과 상임위원들 앞으로 공개편지를 보내, 당시 상임위가 심의중이던 물권법 초안이 ‘사회주의 공유제를 주체로 한다’고 규정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이 법 추진 중단을 요청했다. 물권법의 성씨가 ‘자씨’ 아니냐는 얘기다. 지난 3월 전인대 4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될 예정이던 물권법은 궁 교수 등 ‘좌파’들의 저항으로 유보됐다.

-물권법이 ‘좌파’의 저격을 받자 개혁 성향의 이론가 황푸핑은 월간 <재경>에 발표한 글을 통해 “개혁개방 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를 ‘시장화’의 책임으로 돌려선 안 되고, 이는 개혁의 심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며, “새로운 좌경화를 경계한다”고 ‘좌파’에 반격을 가했다.

-중국 당국을 공격하는 건 ‘좌파’만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되레 당국의 개혁이 너무 더디다고 비판한다. 당국에 의해 한때 정간 당했던 <중국청년보> 주말 부록 <빙점>의 리다퉁 전 편집장이나 해직당한 자오궈뱌오 전 베이징대 교수, 그리고 허웨이팡 베이징대 교수(법학) 등은 인터넷과 해외 매체 기고 등을 통해 전면적인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보장과 다당제 개혁 등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좌파’는 개혁개방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고, ‘자유파’는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포함한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극좌와 극우의 상호침투=프랑스 대혁명 이래 ‘좌파’는 적극적인 개혁의 주창자들에게, ‘우파’는 보수적인 이들에게 따라붙는 별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누가 진정한 ‘좌파’이고 누가 ‘우파’인지 알 수 없는, 심각한 난독증을 앓고 있다.

 

 

 

 

-친후이 칭화대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역사학)는 오늘날 중국에서 좌·우 개념이 혼란스러워진 원인으로, 문혁 때의 극좌적 오류와 더불어 90년대부터 진행된 ‘국유자산 사유화’ 과정을 꼽는다. “과거에 이른바 ‘공유제’를 실시하고 있을 때도 국유기업의 자산 처분권은 명목상으로만 전 직원의 소유일 뿐, 사실은 당서기와 공장장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국유기업이 이른바 ‘시장화’ 개혁을 거치면서 공장 ‘영도 간부’들은 공장을 분양해 한몫씩 챙겨 나갔지만 노동자들은 퇴직금과 의료보험은 물론 그동안 삶의 터전이던 일터까지 상실했다.”

-친 교수는 이 과정에서 공유제 아래 극좌파이던 ‘영도 간부’들이 순식간에 ‘극우파’로 변했다고 지적한다(*이건 한국의 경우에도 예의가 아니다). “자유파와 극우파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러나 극우파와 극좌파는 매우 가깝다. ‘전인민적 소유’란 명목으로 ‘영도 간부’가 독점 소유하는 것이나, 극단적인 시장화로 노동인민을 내몰고 이들이 이권을 다시 독차지하는 것은 사실상 같기 때문이다.”

-실사구시로 개혁개방의 길 찾기=중국 당국이 좌파와 자유주의파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는 건 오늘날 중국의 복합적인 과제를 말해준다. 자유주의파의 공격에선 개혁개방의 확대와 지속적 추진이 부각된다. 좌파의 공격에선 개혁개방을 신자유주의적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한 젊은 사회과학자는 “오늘날 중국에서 단순히 좌파 또는 우파의 시각만 고집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실사구시파’로 불러달라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소개한다.

-친후이 교수는 중국이 올바른 개혁개방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의 ‘사회적 공정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전국의 국유자산 가운데 절반쯤이 ‘시장화’된 상태다. 이 시장화 과정에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토론조차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런 불건전한 시장화가 중국 경제에 안정적이고 공평한 시장 환경과 질서를 형성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지난 3월 전인대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확고하게 말했듯 “개혁개방의 추진”은 흔들릴 수 없는 중국 당국의 정책 방향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미 심각하게 불거진 불공정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중국 개혁개방의 미래상을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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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에 <씨네21>을 읽다가 러시아 영화 개봉 소식을 접했다. 이번주에 개봉한다는 <러시안 묵시록>이 그것인데, 지난 200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되어(포스터를 보니 12월 9일에 개봉됐다)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는 블록버스터이다(그때 모스크바에 있었던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시나 그해 봄에에 개봉되어 여름에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던 <나이트 워치>에 이어서 러시아산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데 의의가 있는 영화인 듯싶다.

 

 

 

 

<나이트 워치>를 우리의 <쉬리>에 견주는 의견들도 있었는데, 체첸반군의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쉬리>와 더 잘 비교되는 영화는 <러시안 묵시록>이겠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닐 테지만(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떠올리면 되겠다(<나이트 워치>). 하도 오랜만에 소개되는 러시아 영화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nkino의 전은정 기사가 쓴 리뷰로 제목은 "<러시안 묵시록> - 테러를 필요로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비행기 한 대가 뉴욕의 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전세계인들의 마음 속에 테러가 ‘남 일’이 아닌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게 각인됐다. 특히 9.11 사태는 현실에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테러를 ‘현실’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아랍과 이슬람 문화권을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지 않는 공동의 적으로 확실하게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7백만 달러 이상을 투입했다는 ‘매머드급 액션 스릴러’ <러시안 묵시록 Lichnyy Nomer>(*러시아어 원제는 '개인번호', 곧 '군번'이란 뜻이며, 영어제목은 'Countdown')의 소재 역시 ‘테러’다. 러시아 역시 테러와 인연이 깊은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테러의 조합은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영화는 군사 첩보 활동을 벌이다가 체첸 독립군의 포로가 된 알렉세이 스몰린 소령(알렉세이 마카로프)이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자백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스몰린 소령의 증언이 고문에 의한 것이었음이 알려지고 난 후, 체첸 반군과 손잡은 이슬람 과격파 안사르 알의 대형 테러 계획, 그리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러시아 연방 보안국, 테러의 중심부에 카메라를 들이댄 열혈 여기자 캐서린 스톤(루이스 롬바드) 등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영화는 1816년 카프카즈 정복으로 시작된 러시아 팽창 정책의 희생자인 체첸인들이 세기가 바뀌도록 끊임없이 러시아를 향해 투쟁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많은 체첸인들이 회교도라는 사실도, 그들이 벌이는 테러의 정치적인 목표도 관심이 없다. <러시안 묵시록>은 명백히 대중들의 취향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액션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슬람 과격파와 손잡은 체첸 반군과 러시아 정부와의 대립과 그와 관련된 정치적인 배경보다는 화려한 볼거리, 그리고 영웅적인 한 사내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볼거리라는 면에서 볼 때 <러시안 묵시록>은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크게 쳐지지 않는다. 러시아군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에 의해 실제 군사기재들이 총동원 된 이 영화의 전투 신들은 꽤 사실적이다. CIA 작전부 부사령관과 러시아연방보안국 부사령관, 러시아 공군 총사령관 등이 영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느니, 장갑차 추격 신에서 레닌 거리를 완전히 봉쇄하고 찍었다는 식의 홍보 문구 역시 ‘실감나는’ 영화의 그림을 강조하고 있다.  

-대중영화가 필요로 하는 영웅,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돈 많은 악당, 영웅을 돕는 조력자도 당연히 등장한다. 안사르 알과 체첸이 러시아 서커스 극장에 모인 아이들과 일반인들을 인질로 삼고 유엔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할 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또한 사랑하는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홀로 서커스장에 진입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중심인물이 바로 스몰린 소령이다.

-체첸 측의 포로였다가 살아남은 러시아 장교 알렉세이 가르킨이 겪은 사건과 2002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테러범들의 인질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관객들에게 사실적인 공포를 전달하려 한다. ‘볼거리’로서 제공되는 테러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노출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는 진짜 현실의 모습은 없는 경우가 많다.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7천원으로 살 수 있는 ‘테러’란 그냥 단순한 흥밋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다.(*씁쓸하지 않은 러시아 영화들도 물론 많이 있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을 따름이다.) 

06. 0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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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06. 06. 12)에 홍윤기 교수의 반론('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참조)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교수의 재반론이 실렸다. 반론문의 말미에 '노마디즘 논쟁 일지'가 정리돼 있기에 같이 옮겨온다. 이 정도면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며 마무리되었으면 싶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은 듯하다. 나로선 방학때나 '노마돌로지'를 읽어보고 몇 마디 거들 계획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핵심적인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침략주의인가, 천규석의 주장이 과연 근거 있는가, 아니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이라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유목주의/노마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논증된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진경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하자)

-‘노마디즘’은 이중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목민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회귀라는 패러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상품논리로서의 ‘유비쿼터스’ 전략이라는 패러디이다. 둘 다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패러디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패러디가 훨씬 심각하다. 국민국가들을 매개 고리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적 ‘공리계’(화폐 회로들의 장)에 저항하고자 하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을 완전히 거꾸로 ‘침략주의’, ‘시장제국주의’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규석의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것을 항간에 유행하는 천박한 “유목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침략주의”라는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1)개념/이론이 아니라 인상/이미지로 받아들이고 2)그것을 상상/억측한 후 3)그것에 대해 전혀 빗나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기계”라는 말을 듣고서 거기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피 냄새가 난다’, ‘칭기즈칸의 정복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욕망’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둥, 우스꽝스러운 상상/억측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개념을 듣고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인상을 근거로 상상/억측한 후 다시 그것을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 이것이 천규석/홍윤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이다.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정말 그런가?). 그것은 1968년(‘68혁명’) 이래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운동, 생태운동 등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며, 국가장치/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면서 투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으로 얄궂은 것은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체공동체야말로 다름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전쟁기계의 좋은 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상상/억측할 때 천규석도 침략주의자이다. 천규석은 ‘농사꾼 철학자’이고 따라서 농사와 철학을 가로지르면서 유목하고 있지 않은가(*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이정우에게서의 '유목'이다. '가로지르기'로서의 유목. 그리고 그의 유목은 사실 들뢰즈의 유목과도 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천규석은 침략주의자가 된다. 이 무슨 기묘한 결과인가. 이런 식의 “연상 고리들”을 끊고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언급하고 평가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말한다면, 홍윤기는 홈 패인/매끄러운, 유목/정주, 리좀/수목형을 비롯해 들뢰즈/가타리의 구분이 개념적 구분일 뿐 실체적/실재적 구분이 아니라는 내 지적을 논박하기 위해서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그림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봐라, 들뢰즈/가타리가 실체의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첫째,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둘째, 이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chemical substance를 ‘화학물질’로 번역하는 것을 상기하면 되겠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 그러니까 홍윤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철수의 키와 성격’, ‘영희의 키와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을 ‘키의 철수와 영희’, ‘성격의 철수와 영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천의 고원’ 58-60쪽, 한글본 92~95쪽을 숙독할 것을 권한다) 요컨대 홍윤기는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근거”를 제시한 후에, 그는 오히려 내가 “원전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06. 06. 13.

P.S. 참고로, 북매거진 <텍스트>(2006년 5월호)에 게재됐던 인터뷰에서 이정우 교수가 말하는 '유목'의 뜻을 옮겨온다. 비생산적인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맥락이 좀 이질적인데요, 사실 그런 맥락들이 아무런 구분없이 '유목을 하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이라는 말이 공허하고 티비 선전문구처럼 사용되죠. 유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 네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유목이 있죠. 이건 중아시아의 유목민들을 일컬을 때의 유목민들을 말하는 경우 같은 거죠.

-그런 맥락과는 다르게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가령 들뢰즈나 가타리가 말하는 유목이 있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관련은 되지만, 그것으로 이해하면 아주 희한한 이야기가 되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철학적 사유의 방식으로의 유목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들뢰즈 같은 경우는 유목적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도 잘 안 갔다 오거든요. 디지털 유목이라는 말도 좀 이상한 개념이죠. 왜냐하면 인터넷 세계를 막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몸은 가만이 방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노마디즘인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노마디즘이지만 자신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는 유목은 이런 것과는 관계가 없고 공부를 담론세계에서 문학, 철학, 과학 등으로 전공을 정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데 돈, 이권, 권력 등과 얽혀서 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의식,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기존의 섹션화된 학문에 얽매이지 말고 폭넓게 사유하자는 의미입니다(*요컨대, '폭넓게 사유하자'가 이정우의 '유목을 하자'이다. 그리고 이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도 전혀 별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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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13 00:40   좋아요 0 | URL
논쟁 좋아요. 학문은 역시 논쟁을 통해서 무언가 밝혀지는 거라고 그래도 믿어 봅니다 :) 홍윤기 선생은 이쪽이 전공이 아니시지 않나요? 연세가 꽤 되시는 철학과 교수님으로 알고 있는데. 반면에 이정우 선생이나 이진경 선생 같은 경우는 소장 학자이고 들뢰즈, 가타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기대됩니다. 로자님의 논평도요 ^^

마늘빵 2006-06-13 07:57   좋아요 0 | URL
이런 논쟁이 좋아요.

비로그인 2006-06-13 12:51   좋아요 0 | URL
홍윤기 교수도 그닥 연장자는 아니지 않나요? 이정우 박사와 비슷한 세대인 것으로 아는데요.

yoonta 2006-06-13 12:53   좋아요 0 | URL
일단 이정우씨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했다는 표현을 하여 오해를
유발했다는 측면에서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정우씨가 재반론에서도 언급했지만 내용/표현의 구분에서도 실체substance와
실재reality등의 용어들을 분명히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홍윤기씨처럼 실체 혹은
실재라는 개념을 이원론적으로 사용하는 분에게 이정우씨가 말하고자하는 의미에서의 "개념"이 무엇인지 분명히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개념"은 실재적/실체적이지 않다고 함으로써 홍윤기씨로하여금 오해를 유발시켰다는 것이죠.

한편 내용/표현이라는 항을 잘못 읽었다는 이정우씨의 비판만큼은 정확해보입니다.
홍윤기씨는 <천개의 고원> 797쪽에서의 내용과 표현을 내용/표현의 실체와 형식이 아닌 실체/형식의 내용과 표현으로 읽었다는 이정우씨의 지적은 맞기 때문입니다..

홍윤기씨는 내용과 표현상의 차이가 소위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과정을 통해서 생성되는 실재적real 구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고원93쪽>
전쟁기계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의 첫번째 분절로서의 내용의 실체와 형식이 생성되고 그리고 두번째 분절로서의 표현의 실체와 형식이라는 것을 보지못했다는 것이죠. 이정우씨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지적은
홍윤기씨의 그런 잘못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정우씨의 이야기에도 뭔가 불분명해보이는 부분이 있네요..특히 이부분..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여기에서 무엇인가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닌것 같네요..
왜냐하면 분명 내용과 표현이 있기 이전에 질료matter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질료matter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그가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으로 혹은 유기적으로 조직되지않고 탈지층화된 물체가 "있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불안정한 질료들, 모든 방향으로 가는 흐름들, 자유로운 강렬함들 또는 유목민과 같은 독자성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친 입자들"<고원85쪽> 등등은 어떤 실체와 형식성을 부여받기 이전의 질료적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체substance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고원88쪽>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설명되고 있고 내용content라는 개념도 이중분절과정중 첫번째 분절의 결과 형성되는 상대적으로 헐거운 질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죠..두번째 분절은 구조structure의 형성과 관련되고 그럼으로서 보다 유기적이고 안정적인 질료의"표현"과 상관적인 개념이죠.
코드화되기 이전의 지구/자연 혹은 기관없는 몸체가 스피노자식으로라면 "신" 그 자체라면 어떤 특정의 물체로 이어지는 발생의 과정성에서 생기는 코드화와 덧코드화overcoding 혹은 영토화/탈영토화과정등등은 "신의 심판"<고원86쪽>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정우씨의 "무엇인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거나 보다 분명한 맥락을 생략한채 사용한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고싶네요.."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있기 이전의 상태..즉 <질료matter로서의 어떤 것>을 먼저 이야기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정신과 실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상태에서의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일원론적 관점에서하는 말이라면 이해가 되긴합니다. 특히 들뢰즈처럼 "계사존재론"적 철학보다는 관계사에 의한 연결접속에 중요성을 두는 철학에서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원론적인 "내재성의 평면"혹은 <기관없는 신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것으로 보아야만 그로부터의 어떤 "연결접속" 혹은 "이중분절"도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이정우씨의 이야기는 맥락이 생략된 부정확한 설명이라는 거죠.

그리고 노마디즘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정우씨가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로지르기적 사유도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적 사유의 한 양태임에는 분명해보이는데요. 로쟈님은 그것을 "별개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네요? 제가보기에는 그러한 사유로서의 유목도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의 한 양태인것 같은데 "다르다"라고 한다면..어떤 점에서 다른지 좀 설명을 부탁합니다..로쟈님..^^




로쟈 2006-06-13 14:32   좋아요 0 | URL
'다르다'고 한 건 이정우씨의 발언을 제가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인용한 인터뷰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최소한' 네 가지 다른 '유목'을 구분하고자 하며, (1)문자 그대로의 유목, (2)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유목, (3)디지털 유목, (4)이정우식 유목 등이 그 네 가지입니다.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면, 혹은 한 가지의 다른 양태라면 그의 '구분'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제 구분은 '경제적 노마디즘'과 '철학적 노마디즘', 두 가지였고, 이들은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앉아서 하는 유목'으로 환언될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똑같이 앉아서 하는 거라는 점에서 저는 들뢰즈/가타리와 이정우의 유목을 같이 다루었습니다). 한데, 이정우씨의 말을 들어보면, 더 세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고, 그 경우엔 '다르게' 보이는 것이죠. 이정우식 관점으로 해석하면, (고작) '폭넓게 사유하자' '가로지르며 사유하자'가 소위 들뢰즈/가타리의 그 '대단한' 노마디즘인가요?(그건 좀 의외가 아닌가요?)

yoonta 2006-06-13 15:17   좋아요 0 | URL
질료적 상태로 있는 어떤 "잠재적인 것"은 여러가지 양태로 "표현"됩니다. 그 표현의 양태가 1번 2번 3번 4번등으로 나타날수있다는 거죠. 전쟁기계개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전투와 전쟁이 어쩔수없이 전쟁기계로부터 유래하더라도" 전쟁기계가 무조건 "전쟁"을 목표로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맥락속에서만 그렇다<고원797쪽>는 말도 그렇게 이해할수있다고 봅니다. 그런점에서 이정우씨가 설명하는 전쟁기계개념 즉 어떠한 전쟁기계인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속에서 이해할수 있죠..

이처럼 어떤 잠재성은 여러가지 표현양태로 나타날수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혹은 이정우식의 노마디즘으로도 표현될수있다는 거죠. 이지점에서도 이정우씨는 좀 부정확했던 것 같아요. 자신의 "폭넓게 사유하기" "가로지르며 사유하기"도 넓게 보면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인데..그것을보고 "내가 말하는 유목은 이런 것(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해버렸으니 말이죠. "섹션화된" 개별분과학문들이 특정한 형태로 표현된 다양한 "고원들"이고 그렇다면 그것들을 가로지르면서 분과학문들의 영역을 허무는 노마디즘적인 "탈영토화"작업으로 자신의 노마디즘을 설명할수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했다는것은 개념의 창조와 사용을 주로 행하는 철학자로서는 좀 부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6-06-13 15:19   좋아요 0 | URL
배아줄기세포로서의 '잠재성'은 물론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 잠재성으로서의 노마디즘, 곧 문자 그대로의 노마디즘이 되기도 하고, 철학적 노마디즘이 되기도 하는 어떤 '질료적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이건 에이리언의 어떤 모체를 연상케 하는데요) 노마디즘에 대한 천규석/홍윤기의 '비판'을 무력화시킨다고 보시는 건가요?..

yoonta 2006-06-13 15:25   좋아요 0 | URL
이정우씨의 논지는 결국 "어떠한 노마디즘인가?" 를 정확히 보자는 것 같아요. 천규석씨나 홍윤기씨는 분명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오독하고 있죠. 이정우씨는 단지 그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이정우씨가 그들을 비판하면서 어떤 정치적 맥락을 개입시키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정우씨는 그것 즉 노마디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이야기하면서...원전도 읽지 못한다는 둥..불필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홍윤기씨나 기타다른 분들으리 비판을 촉발시킨 측면이 있죠. 그런점에서는 이정우씨는 분명 잘못했다고 봅니다. 단순히 윤리적 측면에서뿐만아니라..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도요...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 경의 <자유론>(아카넷, 2006)이 번역/출간됐다.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다룰 여유가 없기에 언론 리뷰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것인데, 보수주의 석학의 책인 만큼 두 보수 언론의 '경의'는 마땅해 보인다. 이미 평전 <칼 마르크스>와 <낭만주의의 뿌리>의 저자로 소개된 바 있지만, 벌린의 저작은 좀더 읽히는 것이 온당하다. 에누리 없이 '교양의 문턱'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뿌리>의 공역자이기도 한 강유원은 <공산당 선언> 강의에서 이렇게 적었다.

"앞서 소개한 마르크스 평전 중 하나를 쓴 이사야 벌린은 오늘날 대표적인우파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일단 '근대인'이라 하면 우파적인 교양을 갖추는 게 기본이다. 우파적 교양을 기본으로 갖추고 거기서 좀더 나가서 골고루 먹고사는 문제, 그러니까 평등의 문제 등을 고민하면 좌파인 거다. 우파건 좌파건 근대인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들 모두 교양인이다. 한국에서 우파라 불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된다. '한국 우파의 금자탑' 운운하는 조갑제 같은 사람을 떠올리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힘센 보스를 그리워하는 노예근성의 똘마니들일 뿐이다."(51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자신이 교양인이라고 떠들어대는 이라면, 우파건 좌파건 간에 먼저 벌린 정도는 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론>은 얼마전에 재출간된 칼 포퍼 경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민음사, 2006)과 함께 '우파 교양서'의 전범적인 저작이므로 필히 아는 체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 정도 읽어주지 않으면, 우파건 좌파건 '똘마니'라 불리는 걸 면하지 못한다. 적어도 근대인/교양인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일단은 두 개의 서평을 참조하시길.

동아일보(06. 06. 10) 영국의 지성사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진면목은 같은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1892∼1982)와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카는 케임브리지 출신으로 러시아혁명을 높이 산 진보적 역사학자였다. 반면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 러시아혁명을 목격한 벌린은 옥스퍼드 출신으로 혁명에 기반한 전체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전통적 자유주의자였다(*그러니까 벌린의 경우도 '좌파 이후의 우파'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카를 마르크스의 평전을 냈다는 공통점도 지닌다(*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평전도 썼다. 한편, 벌린이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한 러시아의 작가/사상가는 투르게네프와 게르첸이다). 학계에서는 사회주의에 경도된 카의 평전보다는 자유주의자였던 벌린의 평전을 더 높이 평가한다. 한국에서는 카의 영향이 압도적이지만 2000년대 들어 벌린의 저서가 잇따라 번역되면서 그의 만만치 않은 내공에 감탄하는 이가 늘고 있다.

-이 책은 ‘자유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1968년 출간된 것을 그의 사후인 2002년 대폭 보완해 새롭게 출간한 것이다. 벌린은 이 책에서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의 거센 광풍 아래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비판 받은 자유주의가 얼마나 심오하고 진취적 사상인가를 펼쳐 보인다.

-네 편의 논문 중 ‘역사적 불가피성’은 인류의 역사가 필연적이라는 결정론적 사고와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을 도덕적으로 찬양·비난하는 윤리적 행위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역사에서 개인의 선택을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격하시킨 카의 역사관을 교조적 유물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벌린이 역사의 필연성을 부인하거나 영웅사관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유주의는 이런 모순을 깊숙이 파고드는 회의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두 개념’은 일체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즉, 우리의 상식에 대한 재고를 요청한다). 자유주의의 진취성은 진리는 하나라는 교조주의와 그 진리를 전유(專有)하려는 전체주의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확인된다. 벌린의 이런 관점으로 인해 이 책은 다원주의의 고전으로도 꼽힌다. 이 개정판에는 ‘자유에 관한 다섯 번째 논문’이 될 뻔했다가 시한에 쫓겨 빠진 ‘희망과 공포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그가 12세 때 소설 형식으로 러시아혁명의 모순을 다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와 ‘냉전의 설계자’라 불린 미국 외교정책의 브레인 조지 케넌에게 보낸 서한 등이 수록돼 있다.(권재현 기자)

조선일보(06. 06. 10) 1997년 11월 영국 사상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타계 소식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날 뉴욕타임즈 지는 벌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기사를 한 면 통째로 실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에게 영국 국왕은 기사 칭호와 공로 서훈을 내렸다. 이 책은 벌린의 주저로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어 간 ‘자유에 관한 네 편의 논문’의 수정증보판을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벌린의 사상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여러 가지일 뿐 아니라 때로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따라서 윤리학이나 정치학 등의 인간 관계 학문 분야에서 ‘최종성’(finality) 즉, 일원론을 기대한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박해와 불관용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벌린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면서 자유에 대한 논의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다. 벌린은 자유의 근본 개념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지나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추출한다. 그렇다면 외부의 간섭이나 방해가 없는 소극적 자유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적극적 자유론은 이성에 입각한 자기 지배를 이상으로 한다. ‘하나의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벌린은 유일 진리에 대한 허황된 맹신(盲信)이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전체주의자 등에 의해 악용될 소지에 대해 극구 우려하고 있다.

-벌린은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 선택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한다. 다원주의와 소극적 자유가 인간적 상황을 넘어가는데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 유일 진리 따위에 대해 환상을 가진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오만이며, 이는 곧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덕적·정치적 미숙(未熟)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벌린의 글 속에는 이 시점 한국 사회를 향한 질문도 발견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진리는 끝내 승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증오를 부추기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북한 체제를 미화하는 언동 등도 토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책을 곰곰이 읽어도 그가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 분간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선택에만 촛점을 맞출 뿐, 선택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벌린은 시종일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적 이론은 존재할 수가 없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소극적 자유를 자유의 알파요 오메가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유에 대한 생각과 인간 존재론이 떼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면, 가치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자유에 대한 입장도 달라야 마땅하지 않은가? 가치의 객관성에 대한 회의를 바탕으로 소극적 자유를 강조하는 벌린의 문제의식은 현대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조(基調)와 거의 그대로 중첩된다. 따라서 벌린의 한계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벌린 특유의 만연체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의 진지한 노력 덕분에 책이 쉽게 넘어간다. 성실한 주석도 크게 도움이 된다. 벌린의 사상을 큰 틀에서 조망하고 평가하는 글이 빠져 아쉽지만, 8년에 걸친 번역의 수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

06.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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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6-12 06:47   좋아요 0 | URL
음... 이사야 벌린의 글을 함 읽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움이 되는 포스트로군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6-06-12 07:44   좋아요 0 | URL
분량이 만만치는 않지만, '예의상' 읽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瑚璉 2006-06-12 11:21   좋아요 0 | URL
그냥 똘마니하면 안될까요 (T.T).

로쟈 2006-06-12 18:58   좋아요 0 | URL
'교양인' 노릇한다는 게 좀 힘들긴 합니다. '무시'당하지 않고 산다는 게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닌 것처럼...
 

재작년 8월 중순에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제목으로 올렸던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히치콕/지젝의 맥거핀 이야기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지젝의 히치콕 읽기를 예전에 대략 다 정리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제오늘 비가 좀 흩뿌린 휴일이었던 만큼, 비 얘기부터...

모스크바에는 하루 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제법 많이 비가 내렸고, 토요일과 무관하게 나날이 '휴일'인 룸메이트와 나는 오후에 감자를 삶아먹고 마지막 남은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비 오는 날 창밖이나 바라보며 감자를 삶아먹는 일이,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행복한 삶’, 곧 ‘더 바랄 나위 없는 삶’이었는바(그 이상을 바라는 건 몰염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하루치의 ‘유토피아’를 산 셈이다. 게다가 저녁을 잔뜩 먹고 저녁잠까지 잤으니, 누릴 호사는 다 누린 셈이다.

정신을 차리고(=각성하고!), 요일과 무관한 본업에 또 착수하기 위해, 먼저 커피 한잔 마시려고 룸메이트의 방에 갔다가(주전자가 그 방에 있다), 룸메이트가 지난번에 공수해온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손이 갔다(내가 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룸메이트가 보드카를 마시러 간 사이에 잠시 둘러본다는 게 그만 뭔가를 쓸 만한 ‘구실’까지 찾게 되었다. 그건 ‘맥거핀’이다. 맥거핀에 대한 정의 그대로,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액션이 이루어지기 위한 순수 구실”의 역할을 하는 맥거핀. 이 글쓰기(=액션)는 순수하게 그 맥거핀 때문에 씌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지젝의 책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3, 초판2쇄), <이라크>(도서출판b, 2004), 이 3권이다(앞의 두 권은 룸메이트의 것이다). 이미 <히치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읽은 바 있고(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몇 편을 제외하곤), <이라크>는 두 번째 읽고 있으며(따로 읽을 책도 없으니!), <숭고한 대상>은 가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영어본으로도 절반쯤 읽었었다). 읽는다는 건, 읽고 교정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얘기이다.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나의 할 일로 현재 확정된 것은 몇 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릴케와 지젝, 들뢰즈를 읽는 것 등이다. 그래야 나의 밥값이 떨어진다(*결과적으론 밥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는 귀국했다).

적어도 역자들만큼은 자세하게 읽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조만간(그래도 9월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정리한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어느 정도는 계획을 이행했다). 그런 정리를 자청하는 건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이지만, 지젝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좀더 ‘편하게’ 그의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나는 지젝이 좀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좋아한다는 건 많은 일의 ‘구실’이 되어준다!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지젝의 말을 약간 비틀면, 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너무 자세히 읽고 떠들어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더불어, 적당히 입다물며 침묵하는 건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표현을 빌면, 거의 자신이 저자인 걸로 착각한다(왜 아니겠는가!)...

 

 

 



이 글을 시작한 구실이 되었던 맥거핀은 앞에서 나열한 세 권의 책에 모두 나온다. 그건 히치콕 자신이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그가 종종 인용했다는 이 이야기의 주된 출전은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먼저, 세 권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히치콕>에서의 직접적인 인용자는 지젝이 아니라 믈라덴 돌라르이다).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판을 다 독해해야 한다.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히치콕>, 72-3쪽)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에 관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그게 바로 맥거핀이다.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숭고한 대상>, 276-7쪽)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그것을 예시하기 위해 히치콕은 종종 다음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여기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 (<이라크>, 21-2쪽)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물론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이 대목을 읽어보지 않아서(그리고 분실했다) 이 일화가 어떻게 번역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내가 참조할 수 있는 건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제목은 <히치콕이 말하는 영화>(모스크바, 1996) 정도의 뜻인데,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걸로 돼 있다. 러시아어본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1962년에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52시간 분량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며(사실 이런 류의 책으론 최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경우, 작년인가 나온 정성일의 ‘임권택과의 대화’는 바로 이 트뤼포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헬렌 스코트가 통역을 맡았다(그러니까 트뤼포는 불어로 얘기하고, 히치콕은 영어로 얘기했다).

해서, 나온 책이 불어본(파리, 1966)과 영어본(런던, 1967)이며, 1980년(4월 24일) 히치콕이 사망하자 트뤼포는 마지막 16장을 추가하여 다시 책을 내는데, 제목을 <히치콕/트뤼포>(1983)라고 다시 붙였다(러시아어본의 겉표지 제목이 <히치콕/트뤼포>이다). 한국어본은 어느 판본을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맥거핀’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할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지젝이 맥거핀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간에 그 출처는 바로 이 책의 일화(=농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세 인용보다 먼저 인용되어야 할 것이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인 셈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지젝(돌라르)의 인용 번역만을 가지고 맥거핀 일화(번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저마다 다르게!



먼저, 일화로 안내하는 내용.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를 보거나 <히치콕>을 보더라도, 히치콕이 이 ‘농담’을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은 없다. 러시아어본의 이 대목을 옮기면, “히치콕은 이 대상에 이름(=맥거핀)을 붙여준 일화(=농담)을 얘기하는데, 우연찮게도 ‘열차 속의 이방인’ 종류의 일화이다. 이 일화에는 결말이 다른 유고슬라비아 판(본)도 있다.” ‘우연찮게도’라는 건 같은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1951)이란 영화를 히치콕이 찍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류’라고 했는데, 만약에 이 농담이 여럿이라면 열차-속의-이방인 ‘시리즈’라고 해야 할 것이다(거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음,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와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핵심은 맥거핀이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라는 점이다.

번역에 대한 참견하자면, 읽기에 편한 번역은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해주는 번역이다. 사진으로 치면, 핵심은 뚜렷하게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놓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누가 찍더라도 대충 대상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찍은 사진과 평범한 사진의 차이는 그 초점 맞추기에 있다. 이야기를 가동/작동시킨다고 할 때, 초점은 ‘이야기’일까, ‘가동/작동’일까? 내가 보기엔 ‘이야기’인데,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면 아마도 ‘operate’를 옮긴 듯한 ‘가동/작동시키는’은 좀더 약화되어야, 즉 흐릿하게 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끌고가는’이나 ‘진행시키는’으로.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데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serve to operate’의 번역일까?).

같은 맥락에서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도 너무 강하다. 그것과 병렬관계에 놓여 있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 견주어서 그렇다. “특별한 중요성” 정도라고 하면 되고, 실제로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러시아어본으로 짐작해 보건대) ‘unusual’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국역본에 따르면, ‘fatal’인 듯도 하고). Unusual을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이라고 옮기는 것은 좀 과장이다. 아무런 의미/가치도 안 갖고 있는 맥거핀이 그들(=등장인물)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게 이 문장에서는 ‘핵심’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이제 본론이다. (1)“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2)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3)“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1)에서 돌라르는 아예 대화체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이 예시적으로 잘 보여주는바 이 일화/농담에서 핵심은 두 사람이 대화이다(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결말이다). 나머지는 다 약화되어도 무방하다. 즉 두 사람 혹은 두 남자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의 꾸러미/짐가방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내용. 일단 (1)에서 ‘하이랜드’는 좋은 번역이 아니다. 나처럼 ‘하이랜드?’하면서 영한사전을 뒤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the Highlands’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이건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며,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닌 이상 고유명사 ‘하이랜드’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고지/고지대’ 정도로는 옮겨줘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라고 친절하게 옮겨주는 것도 초점을 잘못 맞춘 과잉친절이다).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도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로 충분하다(농담은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하므로 짧게 받아쳐야 한다). ‘꾸러미/짐가방’으로 옮겨진 건 ‘pack’ 종류 같은데, 가장 무표적인 건 ‘가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3)은 좀 비경제적이다. 일단 ‘두 신사’가 만난 것부터가 그렇다. 히치콕은 그냥 ‘two men’이라고 했을 거 같은데, 지젝이 ‘two gentlemen’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을까? 이 농담에서 신사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무표적인 ‘두 사람’ 정도가 가장 무난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옆사람’ 혹은 ‘앞사람’이면 된다. ‘운반하는’은 ‘갖고 가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라고 실제로 ‘이상하게’ 물어봤을까? 적어도 농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자’가 ‘표범’으로 바뀐 건, 지젝의 착각인지 유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충실한’ 역자의 ‘창작’일 리는 없을 테니까(주전자가 항아리로 바뀌는 것처럼). 어쨌든,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도 좀 어색하다. (1)에서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죽이다’는 ‘kill’의 번역일 테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말로는 (2)에서처럼 ‘잡는다’고 한다.



이제 가장 핵심이 되는 결말. (1)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2)“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3)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1)과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2)/”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3)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는데, 보다 적절해 보이는 건 다수인 (2)/(3)이다. 그리고, “그것은 맥거핀이 아니다”의 원문은 “it is not McGuffin.” 같은데(“McGuffin is not”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러시아어본은 마치 “So, it means, McGuffin is nothing at all.”을 옮긴 것처럼 돼 있다. 그리고, 이게 좀더 흥미롭다. 즉, “맥거핀이 아닙니다”란 부정/부인 대신에,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란 뉘앙스의 ‘정의(definition)’가 이 농담에는 함축돼 있는 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지젝이 말하려는 바가 더 잘 전달된다. 즉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라거나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but it works!” 어떤 도구가 잘 작동/작용한다는 뜻을 우리말 구어에서는 어떻게 전달하는가? “잘 들어요?” “잘 먹혀요?” 그럼, 이제까지의 내용을 재구성해보기로 하자. <숭고한 대상>의 번역을 바탕으로 ‘의역’하면: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기, 짐칸에 있는 가방은 뭔가요?” “아, 그거요,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지요?” “아, 그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거예요.” “그런데, 거긴 사자가 없잖아요?” “맞아요,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네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마지막 대답만 다르다. “그래도, 얼마나 잘 먹혀 드는데요!” 그리고 실상 <이라크>에서 지젝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때 누락하고 있는 것은 그 작용/효과이다. 그게 맥거핀이라는 걸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이었다.

맥거핀이 작용한다, 효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작용/효과의 대상은 무엇인가? 히치콕에게선 이야기이다(부시에게선 전쟁이었지만). 그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구실(만)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상(=밥)은 누구인가? 맥거핀에 말려든/먹혀든 순진한 동승인이다(그리고 파병 중인 한국이다). 그 기의만을 옮길 때 맥거핀에 가장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헛물’이다. 마신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없는 물이 ‘헛물’이다. 히치콕의 농담에서 직접적으로 헛물을 들이킨 사람이 바로 동승인이며(한국이며), 그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다(궁극적으로는 그 헛물을 들이킨 자가 부시이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들)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맥거핀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젝을 반복하자면,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유사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맥거핀은 신이라는 것!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맥거핀 신자들이 맥거핀 전쟁을 비난하는 건 따라서 모순이다.)

04. 8. 14-15.

 

 

 



P.S.1. 이 글의 절반 이상은 토요일 저녁 이곳 NTV에서 방송된 히치콕의 <프렌지(Frenzy)>(1972)를 보면서 작성한 것이다. 나머지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면서. <프렌지>는 히치콕 말년의 작품으로, 그는 1976년에 <가족의 음모(Family plot)> 한 편만을 더 만들었을 뿐이다. 다음주 토요일에도 히치콕의 영화를 방영한다는 걸로 봐서 NTV에서는 한동안 히치콕의 영화들을 내보낼 모양이다(좋은 기회이다!). <프렌지>는 여자들을 넥타이로 목 졸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의 얘기니까, 제목이 뜻하는 바는 ‘미친 놈’ 정도이겠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야코죽이는 ‘유영철’을 다룬 (가상의) 영화 제목은 <프렌지, 프렌지, 프렌지>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S.2. 맥거핀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참견의 말을 했는데, 실상 이론서 번역은 그렇게까지 섬세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섬세하지 않은 건 ‘오역’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만하지만, 이론서는 내용(=뜻)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론서 번역은 ‘이해한 내용’만을 옮겨주면 된다. 반면에 문학작품 번역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작문’해야 한다(기표, 혹은 형식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 쉬운 쪽은 이론서 번역이다. 거기서는 다만, 이해의 난이도가 문제될 따름(그래도/그래서 나는 이론서 번역에서 한국어의 유려함이 이해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나의 ‘참견’은 공허하다. 다만, 공허한 참견을 일삼는 것은 모든 번역에는 ‘긴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부터도 번역에 매달려 있지만, 그것이 오역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이라크>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지만, 이론서 번역으로서는 무난하다. 그렇다고 오역이 없는 건 아닌데,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랭보의 말을 비틀면, “오역 없는 번역이 어디 있으랴!”이다. 이 자리에서 크고 작은 오역의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을 일단 지적해둔다. 사드에 관한 것이다(중요하다고 한 것은, 사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규방철학>에서 돌망스는 “우리에게서 작열하는 빌어먹을 천국 불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외제니를 부른다. 이것은 휠덜린이 시인의 개념을 ‘천국에서 온 불’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라고 전개한 것과 동일한 해에 쓰여졌다.”(225-6쪽)

동일한 해라는 건 1806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시기적으론 사드(1740-1814)의 말년이며, 그래서 <규방철학>은 그의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은 <안방철학>이란 제목으로 국역돼 있지만, 역자가 참조한 것 같지는 않다(나는 절판된 그 책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했었는데, 내 기억에는 마광수 교수가 서문인가를 썼다). 일곱 개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은 분량이 200쪽 정도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러니까 책을 다시 낼 만하다는 얘기이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세 번째 대화에 나온다.

인용에서 ‘천국의 불’ 혹은 ‘천국에서 온 불’이란 비유가 뜻하는 바는 도덕 법칙이고 양심이다(혹 역자는 ‘천국의 불’을 ‘향유’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따라서, 사드의 주인공인 ‘향락주의자’ 돌망스가 자신의 파트너인 외제니를 “도덕률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부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이론서 번역에서 그런 경우는 대부분 오역이다). 도덕법칙을 향유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어본을 다시 옮기면, 돌망스는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천국의 불을 정액의 물줄기(=홍수)로 끄기 위해서” 외제니를 부른다(그래야 말이 되지 않는가?).



러시아어본 <규방철학>(1992)은 이 대목에서 ‘정액’이란 말을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은어로 썼다(*이 글이 씌어진 이후에 국역본 <규방철학>이 재번역돼 출간됐다). 그래서 짐작에 ‘빌어먹을’이라고 역자가 옮긴 것이 정액을 뜻하는 영어 은어이지 않을까 싶다. ‘거시기의 물줄기’. 아무래도 역자가 사드를 너무 칸트적으로 (점잖게) 읽어서 빚어진 오역이 아닐까 한다. 알다시피, 라캉의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Kant with Sade)’란 ‘교훈’이 뜻하는 바는 사드를 칸트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칸트를 사드적으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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