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06. 06. 12)에 홍윤기 교수의 반론('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참조)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교수의 재반론이 실렸다. 반론문의 말미에 '노마디즘 논쟁 일지'가 정리돼 있기에 같이 옮겨온다. 이 정도면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며 마무리되었으면 싶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은 듯하다. 나로선 방학때나 '노마돌로지'를 읽어보고 몇 마디 거들 계획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핵심적인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침략주의인가, 천규석의 주장이 과연 근거 있는가, 아니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이라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유목주의/노마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논증된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진경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하자)

-‘노마디즘’은 이중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목민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회귀라는 패러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상품논리로서의 ‘유비쿼터스’ 전략이라는 패러디이다. 둘 다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패러디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패러디가 훨씬 심각하다. 국민국가들을 매개 고리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적 ‘공리계’(화폐 회로들의 장)에 저항하고자 하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을 완전히 거꾸로 ‘침략주의’, ‘시장제국주의’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규석의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것을 항간에 유행하는 천박한 “유목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침략주의”라는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1)개념/이론이 아니라 인상/이미지로 받아들이고 2)그것을 상상/억측한 후 3)그것에 대해 전혀 빗나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기계”라는 말을 듣고서 거기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피 냄새가 난다’, ‘칭기즈칸의 정복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욕망’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둥, 우스꽝스러운 상상/억측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개념을 듣고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인상을 근거로 상상/억측한 후 다시 그것을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 이것이 천규석/홍윤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이다.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정말 그런가?). 그것은 1968년(‘68혁명’) 이래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운동, 생태운동 등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며, 국가장치/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면서 투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으로 얄궂은 것은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체공동체야말로 다름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전쟁기계의 좋은 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상상/억측할 때 천규석도 침략주의자이다. 천규석은 ‘농사꾼 철학자’이고 따라서 농사와 철학을 가로지르면서 유목하고 있지 않은가(*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이정우에게서의 '유목'이다. '가로지르기'로서의 유목. 그리고 그의 유목은 사실 들뢰즈의 유목과도 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천규석은 침략주의자가 된다. 이 무슨 기묘한 결과인가. 이런 식의 “연상 고리들”을 끊고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언급하고 평가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말한다면, 홍윤기는 홈 패인/매끄러운, 유목/정주, 리좀/수목형을 비롯해 들뢰즈/가타리의 구분이 개념적 구분일 뿐 실체적/실재적 구분이 아니라는 내 지적을 논박하기 위해서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그림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봐라, 들뢰즈/가타리가 실체의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첫째,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둘째, 이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chemical substance를 ‘화학물질’로 번역하는 것을 상기하면 되겠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 그러니까 홍윤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철수의 키와 성격’, ‘영희의 키와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을 ‘키의 철수와 영희’, ‘성격의 철수와 영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천의 고원’ 58-60쪽, 한글본 92~95쪽을 숙독할 것을 권한다) 요컨대 홍윤기는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근거”를 제시한 후에, 그는 오히려 내가 “원전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06. 06. 13.

P.S. 참고로, 북매거진 <텍스트>(2006년 5월호)에 게재됐던 인터뷰에서 이정우 교수가 말하는 '유목'의 뜻을 옮겨온다. 비생산적인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맥락이 좀 이질적인데요, 사실 그런 맥락들이 아무런 구분없이 '유목을 하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이라는 말이 공허하고 티비 선전문구처럼 사용되죠. 유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 네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유목이 있죠. 이건 중아시아의 유목민들을 일컬을 때의 유목민들을 말하는 경우 같은 거죠.

-그런 맥락과는 다르게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가령 들뢰즈나 가타리가 말하는 유목이 있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관련은 되지만, 그것으로 이해하면 아주 희한한 이야기가 되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철학적 사유의 방식으로의 유목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들뢰즈 같은 경우는 유목적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도 잘 안 갔다 오거든요. 디지털 유목이라는 말도 좀 이상한 개념이죠. 왜냐하면 인터넷 세계를 막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몸은 가만이 방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노마디즘인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노마디즘이지만 자신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는 유목은 이런 것과는 관계가 없고 공부를 담론세계에서 문학, 철학, 과학 등으로 전공을 정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데 돈, 이권, 권력 등과 얽혀서 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의식,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기존의 섹션화된 학문에 얽매이지 말고 폭넓게 사유하자는 의미입니다(*요컨대, '폭넓게 사유하자'가 이정우의 '유목을 하자'이다. 그리고 이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도 전혀 별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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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13 00:40   좋아요 0 | URL
논쟁 좋아요. 학문은 역시 논쟁을 통해서 무언가 밝혀지는 거라고 그래도 믿어 봅니다 :) 홍윤기 선생은 이쪽이 전공이 아니시지 않나요? 연세가 꽤 되시는 철학과 교수님으로 알고 있는데. 반면에 이정우 선생이나 이진경 선생 같은 경우는 소장 학자이고 들뢰즈, 가타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논쟁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기대됩니다. 로자님의 논평도요 ^^

마늘빵 2006-06-13 07:57   좋아요 0 | URL
이런 논쟁이 좋아요.

비로그인 2006-06-13 12:51   좋아요 0 | URL
홍윤기 교수도 그닥 연장자는 아니지 않나요? 이정우 박사와 비슷한 세대인 것으로 아는데요.

yoonta 2006-06-13 12:53   좋아요 0 | URL
일단 이정우씨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했다는 표현을 하여 오해를
유발했다는 측면에서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정우씨가 재반론에서도 언급했지만 내용/표현의 구분에서도 실체substance와
실재reality등의 용어들을 분명히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홍윤기씨처럼 실체 혹은
실재라는 개념을 이원론적으로 사용하는 분에게 이정우씨가 말하고자하는 의미에서의 "개념"이 무엇인지 분명히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개념"은 실재적/실체적이지 않다고 함으로써 홍윤기씨로하여금 오해를 유발시켰다는 것이죠.

한편 내용/표현이라는 항을 잘못 읽었다는 이정우씨의 비판만큼은 정확해보입니다.
홍윤기씨는 <천개의 고원> 797쪽에서의 내용과 표현을 내용/표현의 실체와 형식이 아닌 실체/형식의 내용과 표현으로 읽었다는 이정우씨의 지적은 맞기 때문입니다..

홍윤기씨는 내용과 표현상의 차이가 소위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과정을 통해서 생성되는 실재적real 구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고원93쪽>
전쟁기계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의 첫번째 분절로서의 내용의 실체와 형식이 생성되고 그리고 두번째 분절로서의 표현의 실체와 형식이라는 것을 보지못했다는 것이죠. 이정우씨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지적은
홍윤기씨의 그런 잘못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정우씨의 이야기에도 뭔가 불분명해보이는 부분이 있네요..특히 이부분..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여기에서 무엇인가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닌것 같네요..
왜냐하면 분명 내용과 표현이 있기 이전에 질료matter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질료matter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특히 그가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으로 혹은 유기적으로 조직되지않고 탈지층화된 물체가 "있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불안정한 질료들, 모든 방향으로 가는 흐름들, 자유로운 강렬함들 또는 유목민과 같은 독자성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미친 입자들"<고원85쪽> 등등은 어떤 실체와 형식성을 부여받기 이전의 질료적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체substance는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고원88쪽>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설명되고 있고 내용content라는 개념도 이중분절과정중 첫번째 분절의 결과 형성되는 상대적으로 헐거운 질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죠..두번째 분절은 구조structure의 형성과 관련되고 그럼으로서 보다 유기적이고 안정적인 질료의"표현"과 상관적인 개념이죠.
코드화되기 이전의 지구/자연 혹은 기관없는 몸체가 스피노자식으로라면 "신" 그 자체라면 어떤 특정의 물체로 이어지는 발생의 과정성에서 생기는 코드화와 덧코드화overcoding 혹은 영토화/탈영토화과정등등은 "신의 심판"<고원86쪽>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이정우씨의 "무엇인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거나 보다 분명한 맥락을 생략한채 사용한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고싶네요.."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있기 이전의 상태..즉 <질료matter로서의 어떤 것>을 먼저 이야기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정신과 실재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상태에서의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일원론적 관점에서하는 말이라면 이해가 되긴합니다. 특히 들뢰즈처럼 "계사존재론"적 철학보다는 관계사에 의한 연결접속에 중요성을 두는 철학에서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원론적인 "내재성의 평면"혹은 <기관없는 신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것으로 보아야만 그로부터의 어떤 "연결접속" 혹은 "이중분절"도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이정우씨의 이야기는 맥락이 생략된 부정확한 설명이라는 거죠.

그리고 노마디즘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정우씨가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로지르기적 사유도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적 사유의 한 양태임에는 분명해보이는데요. 로쟈님은 그것을 "별개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네요? 제가보기에는 그러한 사유로서의 유목도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의 한 양태인것 같은데 "다르다"라고 한다면..어떤 점에서 다른지 좀 설명을 부탁합니다..로쟈님..^^




로쟈 2006-06-13 14:32   좋아요 0 | URL
'다르다'고 한 건 이정우씨의 발언을 제가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인용한 인터뷰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최소한' 네 가지 다른 '유목'을 구분하고자 하며, (1)문자 그대로의 유목, (2)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유목, (3)디지털 유목, (4)이정우식 유목 등이 그 네 가지입니다.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면, 혹은 한 가지의 다른 양태라면 그의 '구분'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제 구분은 '경제적 노마디즘'과 '철학적 노마디즘', 두 가지였고, 이들은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앉아서 하는 유목'으로 환언될 수 있습니다(그러니까 똑같이 앉아서 하는 거라는 점에서 저는 들뢰즈/가타리와 이정우의 유목을 같이 다루었습니다). 한데, 이정우씨의 말을 들어보면, 더 세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고, 그 경우엔 '다르게' 보이는 것이죠. 이정우식 관점으로 해석하면, (고작) '폭넓게 사유하자' '가로지르며 사유하자'가 소위 들뢰즈/가타리의 그 '대단한' 노마디즘인가요?(그건 좀 의외가 아닌가요?)

yoonta 2006-06-13 15:17   좋아요 0 | URL
질료적 상태로 있는 어떤 "잠재적인 것"은 여러가지 양태로 "표현"됩니다. 그 표현의 양태가 1번 2번 3번 4번등으로 나타날수있다는 거죠. 전쟁기계개념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전투와 전쟁이 어쩔수없이 전쟁기계로부터 유래하더라도" 전쟁기계가 무조건 "전쟁"을 목표로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맥락속에서만 그렇다<고원797쪽>는 말도 그렇게 이해할수있다고 봅니다. 그런점에서 이정우씨가 설명하는 전쟁기계개념 즉 어떠한 전쟁기계인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이런 맥락속에서 이해할수 있죠..

이처럼 어떤 잠재성은 여러가지 표현양태로 나타날수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혹은 이정우식의 노마디즘으로도 표현될수있다는 거죠. 이지점에서도 이정우씨는 좀 부정확했던 것 같아요. 자신의 "폭넓게 사유하기" "가로지르며 사유하기"도 넓게 보면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 분명 관련이 있는 것인데..그것을보고 "내가 말하는 유목은 이런 것(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해버렸으니 말이죠. "섹션화된" 개별분과학문들이 특정한 형태로 표현된 다양한 "고원들"이고 그렇다면 그것들을 가로지르면서 분과학문들의 영역을 허무는 노마디즘적인 "탈영토화"작업으로 자신의 노마디즘을 설명할수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말했다는것은 개념의 창조와 사용을 주로 행하는 철학자로서는 좀 부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6-06-13 15:19   좋아요 0 | URL
배아줄기세포로서의 '잠재성'은 물론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런데, 그 잠재성으로서의 노마디즘, 곧 문자 그대로의 노마디즘이 되기도 하고, 철학적 노마디즘이 되기도 하는 어떤 '질료적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이건 에이리언의 어떤 모체를 연상케 하는데요) 노마디즘에 대한 천규석/홍윤기의 '비판'을 무력화시킨다고 보시는 건가요?..

yoonta 2006-06-13 15:25   좋아요 0 | URL
이정우씨의 논지는 결국 "어떠한 노마디즘인가?" 를 정확히 보자는 것 같아요. 천규석씨나 홍윤기씨는 분명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오독하고 있죠. 이정우씨는 단지 그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이정우씨가 그들을 비판하면서 어떤 정치적 맥락을 개입시키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정우씨는 그것 즉 노마디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이야기하면서...원전도 읽지 못한다는 둥..불필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홍윤기씨나 기타다른 분들으리 비판을 촉발시킨 측면이 있죠. 그런점에서는 이정우씨는 분명 잘못했다고 봅니다. 단순히 윤리적 측면에서뿐만아니라..철학을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