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씨네21>을 읽다가 러시아 영화 개봉 소식을 접했다. 이번주에 개봉한다는 <러시안 묵시록>이 그것인데, 지난 200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되어(포스터를 보니 12월 9일에 개봉됐다)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는 블록버스터이다(그때 모스크바에 있었던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시나 그해 봄에에 개봉되어 여름에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던 <나이트 워치>에 이어서 러시아산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데 의의가 있는 영화인 듯싶다.

 

 

 

 

<나이트 워치>를 우리의 <쉬리>에 견주는 의견들도 있었는데, 체첸반군의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쉬리>와 더 잘 비교되는 영화는 <러시안 묵시록>이겠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건 아닐 테지만(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떠올리면 되겠다(<나이트 워치>). 하도 오랜만에 소개되는 러시아 영화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nkino의 전은정 기사가 쓴 리뷰로 제목은 "<러시안 묵시록> - 테러를 필요로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이다.

-비행기 한 대가 뉴욕의 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전세계인들의 마음 속에 테러가 ‘남 일’이 아닌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게 각인됐다. 특히 9.11 사태는 현실에서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테러를 ‘현실’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아랍과 이슬람 문화권을 실체가 정확히 규명되지 않는 공동의 적으로 확실하게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7백만 달러 이상을 투입했다는 ‘매머드급 액션 스릴러’ <러시안 묵시록 Lichnyy Nomer>(*러시아어 원제는 '개인번호', 곧 '군번'이란 뜻이며, 영어제목은 'Countdown')의 소재 역시 ‘테러’다. 러시아 역시 테러와 인연이 깊은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와 테러의 조합은 꽤 자연스러워 보인다. 영화는 군사 첩보 활동을 벌이다가 체첸 독립군의 포로가 된 알렉세이 스몰린 소령(알렉세이 마카로프)이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자백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스몰린 소령의 증언이 고문에 의한 것이었음이 알려지고 난 후, 체첸 반군과 손잡은 이슬람 과격파 안사르 알의 대형 테러 계획, 그리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러시아 연방 보안국, 테러의 중심부에 카메라를 들이댄 열혈 여기자 캐서린 스톤(루이스 롬바드) 등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영화는 1816년 카프카즈 정복으로 시작된 러시아 팽창 정책의 희생자인 체첸인들이 세기가 바뀌도록 끊임없이 러시아를 향해 투쟁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많은 체첸인들이 회교도라는 사실도, 그들이 벌이는 테러의 정치적인 목표도 관심이 없다. <러시안 묵시록>은 명백히 대중들의 취향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액션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슬람 과격파와 손잡은 체첸 반군과 러시아 정부와의 대립과 그와 관련된 정치적인 배경보다는 화려한 볼거리, 그리고 영웅적인 한 사내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볼거리라는 면에서 볼 때 <러시안 묵시록>은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크게 쳐지지 않는다. 러시아군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에 의해 실제 군사기재들이 총동원 된 이 영화의 전투 신들은 꽤 사실적이다. CIA 작전부 부사령관과 러시아연방보안국 부사령관, 러시아 공군 총사령관 등이 영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느니, 장갑차 추격 신에서 레닌 거리를 완전히 봉쇄하고 찍었다는 식의 홍보 문구 역시 ‘실감나는’ 영화의 그림을 강조하고 있다.  

-대중영화가 필요로 하는 영웅,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는 돈 많은 악당, 영웅을 돕는 조력자도 당연히 등장한다. 안사르 알과 체첸이 러시아 서커스 극장에 모인 아이들과 일반인들을 인질로 삼고 유엔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할 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또한 사랑하는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홀로 서커스장에 진입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중심인물이 바로 스몰린 소령이다.

-체첸 측의 포로였다가 살아남은 러시아 장교 알렉세이 가르킨이 겪은 사건과 2002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테러범들의 인질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이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관객들에게 사실적인 공포를 전달하려 한다. ‘볼거리’로서 제공되는 테러의 모습은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노출되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는 진짜 현실의 모습은 없는 경우가 많다. ‘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지만 7천원으로 살 수 있는 ‘테러’란 그냥 단순한 흥밋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에서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다.(*씁쓸하지 않은 러시아 영화들도 물론 많이 있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을 따름이다.) 

06. 06.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