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자 한겨레의 책-지성 섹션을 챙겨보는 편인데, 가끔 '아깝다 이책'란에 눈길이 오래 머물곤 한다. 오늘도 그러한데, 작년 11월에 출간된 책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2005)에 대해서 출판사 기획실장 임병삼씨가 쓴 글을 읽으면서 '한동안 잊었던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왜 다루지 않았을까 의아한 생각이 드는데, 여하튼 초판의 절반 정도가 창고에 남아있다고 하니까 책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뒷북치는 기분으로 임병삼씨의 글과 함께 언론의 리뷰 두 편, 그리고 구로사와의 영화 <데르수 우잘라>에 대한 소개 영화평 하나를 차례로 옮겨놓는다. <데르수 우잘라>에 대한 나대로의 '자료집성'이다. 

 

한겨레(06. 06. 16) 전화가 뜸한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부천에 산다는 독자였다. <데르수 우잘라>를 감동 깊게 읽었고 이런 책을 볼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단다. 그러면서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의 다른 책이 국내에 나왔는지, 없다면 갈라파고스에서 낼 생각이 있는지 묻는다. 잠시 머뭇거리자 왜 책이 잘 안 팔리느냐면서 그렇다면 자기라도 열심히 ‘입선전’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 책을 내고 여러 사람에게서 이런 전화를 받았다. 인터넷 서점의 어느 독자는 리뷰란에 이 책을 보고 왜 자기가 울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이 책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출판동네 15년이 넘지만 낸 책을 잘 보았다는 독자 전화를 받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이쯤되면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지 않는가? 하지만 또다른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 때문이다. <데르수 우잘라>는 초판 2000부를 발행해 반년이 지난 지금, 초판의 반 가까운 부수의 재고가 오늘도 독자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 책에 대해 러시아의 대문호 고리키는 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귀하의 책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과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풍부한 자연묘사와 특유의 표현력에 저는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귀하의 친구였던 데르수는 이제 더는 ‘짐승의 발자국을 뒤쫓는 야만적인 사냥꾼’이 아닙니다.그는 우리가 이룩한 문명에 대한 심판자이며,또한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예술의 본질’을 일깨워준 선구자입니다.귀하의 삶에 이런 친구가 있었다는 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은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과 교감했던 원주민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의 삶을 그린 논픽션이다. 지은이 아르세니에프는 러시아군의 극동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의용병 부대의 지휘관이며, 러시아 극동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이며 작가였다(*사진은 저자인 아르세니에프와 데르수 우잘라의 초상을 담은 소련의 우표). 당시의 의용병 부대는 수렵과 탐사가 주임무로, 오지를 수색할 때가 많았다. 전투훈련 대신 시호테 알린 일대와 연해지방의 지형 및 도로를 조사했으며, 전시에는 정찰과 길안내를 맡았다. 이 책은 이곳의 원주민이었던 데르수 우잘라가 1902년부터 1910년에 걸쳐 아르세니에프의 탐사대와 함께한 나날들, 그리고 그가 총과 돈을 노린 러시아 사람에게 살해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데르수는 항상 사냥해온 것을 이웃과 똑같이 나눠가졌다. 발자국, 모닥불 흔적으로 그 사람의 나이와 행적을 알아맞힌다든가 달무리나 메아리의 크기로 다음날 날씨를 예견하고 별, 폭포, 강 등 자연물은 물론 물고기, 얼룩바다표범, 호랑이, 사슴 등 동물과 교감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 책은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소위 문명화된 인간에게 퇴화된 능력을 어디까지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복과 승리 대신 공존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야생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은 키플링이 쓴 <정글북> 혹은, 페니모어 쿠퍼의 <모히칸 족의 최후>와 비견될 만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75년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데르수 우잘라>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를 만들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과 모스크바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오는 8월 정년퇴임을 앞둔 성공회대학 신영복 교수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수업에서 `사회는 우직한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나아간다’는 교훈을 주고싶다”며 “어리석은 사람의 우직함 때문에 세상이 더 나아진다는 가르침을 전해 주려한다”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데르수 우잘라’야말로 신영복 선생님이 말한 그런 사람의 전형이 아닐까. 

동아일보(05. 11. 26) 차갑고 조용한 밤이었다. 데르수는 숲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뭐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계곡을 타고 조잘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이 어제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마른 풀은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탄한다고 말했다. 데르수의 모습이 벌겋게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신비롭게 비쳤다. 어둠 저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푸른 달빛을 닮아 있었다. 이 야만인은 하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무슨 원시적인 종교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매번 그의 설명은 싱거웠다. 별이 뭘까?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그러면 하늘은?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무한함 앞에서 느끼는 공포와 허무의식, 그것은 문명인만이 갖고 있는 것일까.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데르수 우잘라. 그는 20세기 초반만 해도 태곳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시베리아의 원주민 고리드족의 후예다. 생명이 생명으로 대접받던 원시의 나날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냥꾼이다.

-데르수는 1902년부터 저자가 이끌었던 러시아 극동탐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수렵부대의 지휘관으로 있던 저자는 당시 지도상의 빈칸으로 남아 있던 연해주 시호테알린 산맥 중부지대를 훑었다. 저자는 데르수와 동행하며 자연과 더불어 모든 생명체와 나눔의 기쁨을 함께하는 원시인의 삶의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 책은 그 생생한 기록이다.

-평생을 숲과 함께 살아온 데르수는 아무 욕심이 없었다. 사냥을 하면 이웃과 똑같이 나눠 가졌고, 얼룩바다표범과도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짐승을 ‘사람’이라고 불렀지만 ‘잉크’라는 말은 몰라 ‘더러운 물’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10년에 걸친 탐사가 끝나자 데르수를 데리고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왔다. 그의 몸은 병들어 더는 숲에서 혼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로운 영혼은 갑갑한 문명을 견디지 못했다. 한번은 수도요금을 계산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미쳤다! 물마시고 돈 준다! 강에 돈 안 줬다!” 데르수는 아무르 강을 떠올렸다. “거기 물 많다!”

-그는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각박한지 조금씩 깨달아 갔다. 그는 도시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호랑이가 아닌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에게는 풍요로운 도시보다는 춥고 배고픈 숲이 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데르수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2주일 뒤 변시체로 발견된다. 강도의 소행이었다. 숲에서 태어난 데르수는 결국 숲에 묻혔다. 커다란 시베리아소나무가 곁을 지키고 있는 그의 무덤가에 어디선가 참새 한 마리가 후르르 날아들었다. “의젓한 사람!” 데르수는 이 새를 그렇게 불렀었다….

한겨레(05. 11. 25)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펴냄)는 1907년 6월22일부터 이듬해 1월4일까지 지도상의 빈칸이었던 연해주 시호테 알린 산맥 동쪽지역을 탐사한 기록이다. 원제는 <우수리 지역의 밀림에서>(*사진은 러시아어 원본). 지은이는 러시아 극동군 소속 정찰부대 지휘관.

-군용 보고서와 별도로 1923년 출간된 이 책은 출간당시 고리키로부터 풍부하고 꼼꼼한 자연묘사와 표현력으로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75년, 일본인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눈에 띄어 ‘데르수 우잘라’라는 고리드족 출신 원주민 안내자한테 초점이 옮겨와 영화로 만들어진다. 2005년 한국 독자한테도 사정은 비슷하다.

-발자국, 모닥불 흔적으로 그 사람의 나이와 행적을 알아맞힌다든가 달무리나 메아리의 크기로 다음날 날씨를 예견하는 따위는 데르수의 신기한 면모일 따름. 그는 별, 폭포, 강 등 자연물은 물론 물고기, 얼룩 바다표범, 호랑이, 사슴 등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실제로 물고기로부터 그곳에 야영을 하지 말라는 말 뒤에 정체불명의 야수가 스멀거렸다든가, 바다표범이 인간의 머릿수를 세고 있는 것에 분개한다든가, 설득하여 물러가는 호랑이를 쏘아 죽인 뒤 가슴 아파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그의 진면목은 인간과 자연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 어느 날 저녁, 지은이가 모닥불에 던진 찌꺼기 고기를 끄집어내면서 “우리는 내일 떠나지만 여기에 다른 사람이 온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은 너구리, 오소리, 까마귀, 쥐, 개미였던 것. 금을 찾다가 굶어죽은 밀림속 조선인 인골, 화전과 담비 사냥으로 물레방아와 맷돌을 이용하며 사는 이주 조선인 대목에서는 일제하 유랑했던 윗대의 삶을 엿보게 한다.

씨네21(02. 09. 12) 구로사와 낯설게 보기, <데르수 우잘라>

-구로사와 아키라의 65년작 <붉은 수염>은 두 주인공이 영광스럽게 걸어들어가는 진료소의 문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데, 돌이켜보면 이것은 구로사와의 빛나던 한 시대가 이제 그만 막을 내리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로 구로사와는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실의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폭주 기관차>나 <도라! 도라! 도라!> 같은 미국과의 합작 프로젝트가 연이어 불발로 그쳤는가 하면, <붉은 수염> 이후 무려 5년 만에 내놓은 야심찬 ‘실험작’ <도데스카덴>(1970)은 (상업적)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구로사와는 그새 일본의 제작자들로부터 흥행성이 없는 영화감독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래서 좀체 영화제작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구로사와에게 길을 터준 것이 바로 소련의 영화제작사 모스필름(Mosfilm)이었다. 모스필름으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은 구로사와는 조감독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프로젝트- 러시아 탐험가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에프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는- 를 꺼내놓았다. 그렇게 구로사와의 열망까지 채워주며 그야말로 오랜만에 만들어진 <데르수 우잘라>(1975)는 침체에 빠져 있던 그의 70년대를 그나마 완전한 불모의 시기가 되지 않게 막아주었다고 기록될 만한 영화다.

-영화는 1910년, 아르세니에프(유리 살로민)라는 전직 군인 겸 탐험가가 옛 친구 데르수 우잘라(막심 문주크)의 묘지를 찾아와 데르수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1902년 지형탐사차 시베리아의 우수리 지방에 온 아르세니에프는 몽골계 사냥꾼 데르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데르수가 낯선 땅에서 고생하던 아르세니에프 일행의 안내인 역할을 맡으면서 아르세니에프와 데르수는 서로간의 신의를 쌓아간다. 아르세니에프 일행이 탐험 임무를 완수하자 두 사람은 헤어지고 1907년에 재회한다.

-구로사와의 영화들을 어느 정도 본 사람들에게 <데르수 우잘라>는 구로사와의 영화치고는 아주 ‘낯설다’는 인상부터 주게 될 그런 영화다. 이건 이 영화가 구로사와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일본 외의 지역에서 일본인이 아닌 배우들을 데리고 찍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구로사와의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상이한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데르수 우잘라>는 구로사와의 영화라고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특징들, 즉 갈등들이 정묘하게 엮여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치밀한 스토리구조라든가 역동적인 시각적 스타일 같은 것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유의 영화인 것이다.

-단적으로 이것은 여느 구로사와 영화들처럼 관객을 적극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참여의 영화’가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한 발짝 물러 선 자리에서 다소 초연한 태도로 보게 만드는 ‘관조의 영화’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비주얼 설계면에서나 연기면에서 과장, 장식 혹은 기교를 거의 배제한 ‘자연스런(혹은 자연주의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데르수 우잘라>가 구로사와적인 표지를 완전히 지워버린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증거로 우리는 여기서도 구로사와의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1943)에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사제관계라는 모티브가 여실히 드러나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데르수는 아르세니에프에 대해 확실히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데르수의 자발적인 선의는 아르세니에프의 감탄과 신뢰를 사기에 충분하고 심지어 데르수의 타고난 용기와 총기는 아르세니에프의 생명마저 구해주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붉은 수염>에서 결국에는 완전한 이해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그것과는 달리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제관계이다.

-이건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데르수는 ‘자연’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이고(주위의 모든 것, 태양, 달, 바람, 물, 불 등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반면 측량일을 하는 아르세니에프는 어쩔 수 없이 자연에 문명의 침입을 가져오게 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에 동화하기보다는 종국에는 그의 운명에 ‘탄식’을 던질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여하튼 구로사와는 아르세니에프가 몹시 그리워하는 어조로 “데르수…” 하고 던지는 두번의 탄식을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에 배치해놓음으로써 데르수가 체현하는 그 가치에 대해 끔찍이도 향수를 가지고 있음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내비친다. 즉 <데르수 우잘라>는 데르수가 대변하는, 지금은 상실했고 또 사라져버린 어떤 아름다운 세계와 그 가치에 대해 애조띤 밭은 탄식을 던지는 영화인 것이다. 그것이 너무 진부하거나 보수적이지는 않은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말이다.(홍성남)

06.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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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6-16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몇 안되는 책이었습니다.
로쟈님의 수고로움의 덕택에 얌체처럼 낼름 퍼 가요.

로쟈 2006-06-17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관해서라면 파란여우님이 '원조'이시죠.^^
 

내일 아침 신문들을 검색해보다가 '서울대 2008 논술 예시문항'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 예시문항 중 "인문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에게도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가에 대해 그 이유를 들어 논술하시오"란 문제가 그래도 흥미를 끌어서 잠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제시문의 출처자 진 캐리의 <지식의 원전>이라고. 개인적으론 박사과정 수료 후에 몇 년간 중고생들에게 논술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는데, 아직도 '가락'이 남아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과학이 무신론이고 윤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는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하는 ‘문화인’들 사이에서 과학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채질하곤 했다. 이 두 가지 반감의 원인이 타당한 것인지는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과학자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무신론자들에게는 이것이 지루한 과학과 극단적 기독교의 만남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같이 저명한 과학자가 분자구조를 이용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것을 비웃을 수는 없다(*물론 모든 과학자가 무신론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시도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

 

 

 



-물론 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도 많이 있다. 동물학자인 도킨스는, 모든 종교는 무한히 복제되는 정신적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문화적 밈의 일종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유신론자들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과학적 발견 역시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을 발견한 것이므로 종교적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학의 본질을 무조건 비종교적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과학자나 종교학자가 모두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고도 할 수 있다(*그래서 신학이 포퍼 등이 말하는 '반증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는지?). 과학이 물리적 우주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라면, 신학은 신에 관한 진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이나 혹은 어느 정도 신학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고 우주를 통해 신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신과 우주가 근본적으로는 뚜렷이 구분되는 대상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경심리학자인 리처드 그레고리는 ‘과학이 전통적인 믿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과학과 종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반대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운동은 전통적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과학은 증거에 의존하는 반면 종교는 계시된 사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들 간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인들에게는 계시된 사실이 바로 증거이다. 지속적으로 신에 관한 증거들에 대해 회의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신학을 과학이라고 간주하더라도 결코 모순은 아니다. 사실 그것을 신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과학적 연구가 몇몇 과학자를 신에게 인도했던 것처럼, 신학연구가 그 신학자를 무신론자로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다(*하지만, 그때의 무신론자를 우리는 여전히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과학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이다. 과학은 지식의 범주에 있지만, 정치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견해/의견의 영역으로서의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는 얘기이다. 한데, '신학정치론'은?). 정치는 좋아하느냐 마느냐를 문제 삼는 분야로, 단지 말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치는 인물과 웅변술에 의존하고, 사회계층과 인종, 그리고 민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과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정치는 갈등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와해된다면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즉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이는 세상에서는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따라서 전체주의에는 정치가 부재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를 범형으로 갖고 있기에).



-반면에 과학은 대립이 아닌 상호 협조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과학사는 지독한 논쟁과 고뇌, 그리고 반대이론의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의견일치에 도달하면 과학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한다(*종교 또한 그러한가?). 또 다른 핵심적인 차이로 정치는 인간을 구속하려 든다는 점이다. 정치의 주된 관심은 권력의 집행에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정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전쟁, 학살, 테러 등)을 사용할 수도 있으며, 가끔 실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열역학 제2법칙과 같은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전쟁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전쟁까지야 불사하지 않겠지만 테러 정도라면?) 물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정반대 의미의 과학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 실제로는 다른 모든 것처럼 과학도 정치에 의해 유린되고 왜곡되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과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정치의 책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의 비정치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과학이 초윤리적(超倫理的)이라는 비난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읽다 보니까 아주 나이브한 견해이다. 과학적 탐구 자체는 비정치적일지 모르지만, 과학자는 지극히 정치적이지 않은가? 한편, 과학이 초윤리적인 만큼 종교 또한 초윤리적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과학의 초윤리성을 과학의 문제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과 순수성으로 인식해야 한다.

-한편, 정치는 윤리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정치는 창자 속의 촌충처럼 윤리성 혹은 개념의 선악을 규정함으로써 발전해간다. 따라서 과학이 초윤리적이지 않고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이 또한 정치에 대한 한 가지 견해, 혹은 편견 아닌가? 정치에서 문제되는 것은 도덕적/윤리적 알리바이이지, 도덕/윤리 자체가 아니다. 정치는 마키아벨리즘의 영역이다).

 

 

 



-윤리적인 용어로 냉정하고 논리적이며 비인간적인 인생의 접근방식을 종종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과학적 방법을 윤리적 관점으로 단순히 연결시키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은 그것이 냉정한 것이든 아니든 윤리적 관점과의 연결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서는 동일한 과학적 명제들이 매우 상반되는 윤리적 평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가령 인간을 원숭이와 관련짓는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격하시키는 것처럼 비추어졌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브루스 프레데릭 커밍스는 이 진화론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요컨대, 과학자도 춤을 춘다는 것. 한데, 작가 카잔차키스는 진화론 때문에 가출했다).



 

 

 

-나로서는 내가 다른 동물들과 가까운 친족관계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나의 유인원 조상들을 선망하며, 그들이 자랑스럽다. 내가 한때는 숲 속에 사는 무수히 많은 털을 가진 유인원이었으며, 바다의 한천류로부터 활유어, 물고기, 공룡, 그리고 원숭이를 거치는 지질학적 시간대를 통해 지금의 내 틀이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누가 이런 생각을 에덴동산에서 어슬렁대는 한 쌍의 남녀와 바꾸려 들까?(*과학고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어디로 갔는가?)



 

 

 

-과학자 개개인은 연구를 추구하는 윤리적 혹은 초윤리적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이 그들의 발견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그 발견이 발견자의 동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옳은 것이 될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신학/종교 또한 그러한가?). 데이비드 보다니스처럼 파스퇴르의 대중을 혐오하는 성향과 그가 밝혀낸 질병과 박테리아 사이에 어떤 관련성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스퇴르가 밝혀낸 사실의 과학적 신뢰성은 인간을 불신하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강화되지도 혹은 약화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과학이 윤리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왜 독자들이 구태여 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답은 과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지식에의 의지는 우리를 과학으로 이끈다?). 이에 대한 반대는 무지일 뿐이다. 콜리지는 이러한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과학자는 관찰대상이 그에게 식량이나 피신처, 무기, 도구, 장신구, 또는 장난감을 제공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의 희열을 찾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사람이었다(*아르키메데스 이후에 스트리킹한 사례를 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많던 희열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된 무지의 크기도 커졌다(*'부정적 발견의 시대'라는 표현은 이러한 무지의 확대도 내포한다. 종교니 윤리니 들먹이지 말고 차라이 이 문제에 더 집중하는 게 좋을 뻔했다). 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만 교육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20세기 후반의 현대적 지식 대부분에서 몽매한 암흑의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지의 추방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의 역사상 처음으로 새로운 형태의 무지한 지식층이 생겨난 것이다(*필자가 빼먹고 있는 지적은 전문화되어 있는 과학 또한 이러한 무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층 중에서 그래도 나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통렬히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20세기 미국의 뛰어난 문학비평가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이오넬 트릴링은 ‘근대사의 특징적 성취라고 불리는 상상적 형태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지적 자기만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탄식했다(*트릴링의 책은 번역된 책이 한권도 없는 것인가? 참고로 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학위논문이 트릴링의 소설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좀더 최근에는 과학에 대한 무지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했는데, 과학을 지구 오염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녹색운동이 이러한 부분에 기여하였다. 또한 과학을 남성중심적 권력의지의 발현으로 몰아세우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이다(*필자의 비판은 '다른 과학'에 대한 주장인 듯하다).

-이러한 비난을 제기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을 포기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과학이 정치에 의해 잘못 사용되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공해문제의 해결은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환경문제의 해결도, 성차별의 문제도 '과학적 수단'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 레벨에서조차 위험에 처한 식물이나 동물을 조사하고 보호하며 보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과학적 노력에 의해서 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흔하게 하는 말이지만, 과학은 목적합리성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는가?).

 

 

 



-과학이 남성의 목적이나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고 불평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여성의 과학에 대한 무지와 배타적 성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학교육과 연구 분야에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 것이다(*이러한 판단은 '과학적 판단'인가?). 이러한 관점은 가장 강경한 여권운동가 중 한 사람인 에블린 팍스 켈러의 저서 <성과 과학에 관한 고찰>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수리생체물리학자였고,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인 바버라 맥클린톡의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켈러는 과학적 지식이 ‘남성적 발현의 결과’라는 식의 파괴적인 표현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이상적인 ‘공동의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등 과학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힘을 더해준 책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이 책으로 인해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문화적 조류에 따라 흔들리고 객관적 진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유에 의해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생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확신을 얻게 되는 과정에 관한 쿤의 설명은 그 개념에 대한 진위 여부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과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대개의 과학자들은 쿤의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을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다양한 움직임들은 무지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미화하기까지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국의 대학교수들은 대부분의 문학이나 예술계 학생들이 그들의 학창시절에 배운 미미한 과학적 지식마저도 쉽사리 잊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 옥스퍼드 대학의 한 문학 세미나에서 나는 존 던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그가 이 시를 쓴 1612년에는 아무도 피가 어떻게 심실에서 다른 심실로 이동하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세미나에서 학생들이게 실제로 피가 어떻게 이동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곳에는 학위과정의 막바지에 와 있는 30여명의 매우 지적인 학생들이 앉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바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학생만이 머뭇거리며 일어나 삼투현상 때문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피가 몸속을 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두 문화' 문제의 반복적인 제기이다).

-매년 영국의 대학에서 문예 분야의 강좌를 듣기 위해 몰려드는 엄청난 수의 수강신청자에 비해 미미한 숫자의 과학계 강의 수강신청자들을 보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서 과학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러한 점은 고쳐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문예 분야가 쉽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으며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과학계 강좌에서 요구하는 지적 수준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 일반적이다(*일부 대학은 문예계열 학생들에게도 자연과학도와 똑같이 과학과목을 이수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문제는 각 대학이 가진 커리큘럼이며, '과학적 지식'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우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피터 메다워 경의 생각을 한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메더워는 1953년 크릭, 윌킨스, 프랭클린과 함께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하여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명한 젊은 과학자 제임스 D. 왓슨의 경력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왓슨과 같은 재능 있고 천재성을 가진 학생들이 문예계열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분자생물학의 첫 세대가 활동하던 1950년대에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문학부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다. 그들은 왓슨 수준에 버금가는 젊은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총명하고 창조적이며 똑똑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왓슨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를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지식을 탐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과학자들만의 장점이며, 그들은 이러한 장점을 능력에 관계없이 향유하고 있다."(*왓슨은 천재적인 과학자이지만, 좋은 성격의 과학자는 아니다. '좋은 성격'이 과학자에게 필수적이지 않은 것처럼, 과학적 지식도 인문학도에게 필수적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똑똑하다는 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아니다. 또한 이것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적 연구에 의해 일어난 위대한 사회적 혁명 중의 하나는 배움의 민주화였다. 어느 누구나 통상의 상식과 보통수준의 상상력을 복합시킬 수만 있으면 창조적인 과학자가 될 수 있다(*같은 논리라면 어느 누구나 창조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넓힐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이 결정된다면, 그는 적어도 행복한 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메더워의 주장, 특히 과학자들은 현명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문예계열의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셰익스피어나 톨스토이가 전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냐는 항의를 들어야만 했다. 한편 과학이 천재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의 핵심적 메시지는 바로 이 부분이다.

-영국이 경제난국에 처하지 않기 위해 과학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젊은이들을 과학 분야로 끌어들이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과학이 국가경쟁력이라는 얘기도 마찬가지겠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글을 통해 메더워가 말하는 기쁨과 자기만족이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과학계통의 일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행복을 위한 과학? 이게 정말로 유인이 되는 것인지? 더불어, 기쁨과 자기만족은 초과학적이다. 즉, 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니 왜 하필 과학을?).

-만약 독자들이 문학교수인 내가 무슨 생각으로 각종 지식 원전들을 한데 모으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 그리고 콜리지의 말처럼 ‘알게 된다는 것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만들었다고 대답할 것이다.(*<지식의 원전>이란 편저의 서문인 듯한데, 사실 이 한 문단으로 족하다. 앞부분은 장황한, 게다가 재미없는 서두는 '무슨 생각'으로 집어넣었는지 모르겠다. 문학교수에게 문학적 자질이 요구되는 건 아니더라도 과학적 논리는 필요하다는 걸 이 '싱거운' 서문은 보여준다. 어쨌거나 인문학도에게 자연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기쁨과 자기만족을 위해서란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왜 그것뿐이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06. 06. 16.  

P.S. 논술의 요체는 한 가지이다. '말이 되게' 쓰는 것. 즉, 말(語)를 가지고 썰(說)을 푸는 것, 성설(成說)하는 것이 논술이다.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담론의 시장에서 '성설'은 '성인(成仁)'만큼이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시험'을 보며, 그래서 '장사'가 된다. 논술로 먹고 사는 이들의 기쁨이요 자기만족이라 하겠다...  

 

 

 

 

P.S.2. 쓰다보니 좀 멋쩍게 됐다. 조금 만회하기 위해서, '인문학과 과학'이란 주제로 묶을 수 있는 책 몇 권을 꼽아본다. 이 책들에서 혹 '기쁨과 자기만족'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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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6-16 01:52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을 아주 소박하게 표현하면....
"연역이 제풀에 날아가는 것을 붙잡아 놓기 위한 추로써의 귀납이 필요하다." 입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하면 논술 빵점 맞나요? ^^a

아, 또... "연역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는 소재로서의 귀납도 필요하다."
두 문장 됐어요.

비로그인 2006-06-16 06:36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도에게 인문과학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로쟈 2006-06-16 11:35   좋아요 0 | URL
역시나 기쁨과 자기만족 때문 아닐까요?^^

네모선장 2006-06-17 08:32   좋아요 0 | URL
과거의 수학자들 중 상당한 학자들이 철학자였습니다.
자연과학의 이론이 그냥 그 분야의 학문만 한다고해서 깊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이론은 대부분 자연현상 속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도,자연과학도 모두 서로 어떤식으로의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서로의 사고방식을 배우며 더 멋진 생각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참고로 전 수학교사 입니다.
인문학을 좋아하는데 단지 기쁨 자기만족만은 아니예요.^^

로쟈 2006-06-17 13:17   좋아요 0 | URL
물론 다른 유익들까지 있다면 더욱 좋겠죠.^^

2006-07-04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04 11:15   좋아요 0 | URL
**님/ 생색은 '혼자' 다 내시네요.^^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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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9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28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MIFF)가 오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다(칸느영화제 바로 다음이다. 모스크바영화제는 식장에 파랑 카페트를 깐다. 지난번 칸느영화제에서는 '러시아의 날' 행사도 개최됐었다). 점심을 먹고 재작년 이맘때 쓴 모스크바 통신을 잠시 읽어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영화제 홈피에 들어가보고 알게 된 것이다. 영화제의 약력을 살펴보니 1935년에 처음 개최된 이 영화제는 국제영화제로선 베니스 영화제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59년부터 1995년까지는 격년에 한번씩 열리다가 1995년 이후로는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는 저명한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가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데(사진은 2001년 행사장에서 잭 니콜슨과 포옹하고 있는 미할코프), 올해도 그런지는 모르겠다(변동사항이 있는 듯하다).

해마다 메인행사가 개최되던 극장도 이번엔 바뀌었다는데(원래는 푸슈킨거리의 러시아극장(사진)이 주극장이었다),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의 멀티플렉스 '10월(Oktyabr)'이 그것이다. 지난해 9월 개관한 이 극장은 9개의 상영관과 3,174석의 객석을 갖고 있다. 아래는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 극장은 24번지에 있다고 한다.

대충 그렇다. 어차피 구경도 가지 못할 영화제에 대해서 주절거리는 것도 속없다. 대신에 재작년에 구경했던 모스크바 영화제 얘기를 약간 덧붙이도록 한다(그때 모스크바는 오늘처럼 부슬비가 자주 내리던 날씨였다). 2004년 모스크바 영화제는 6월 18일에 개막된바, 그맘때 쓴 통신문의 한 대목을 옮겨오려는 것(그때 본 영화들 얘기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다). 주로 미국의 영화감독 퀜틴 타란티노와 프랑스의 여배우 소피 마르소에 대한 것이다.

오늘 저녁에 모스크바영화제의 전야제가 열린다. 26일까지인가가 영화제 기간인데, 2-3일 전부터 세계영화계의 몇몇 명사들이 모스크바를 찾고 있다.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퀜틴 타란티노인바, 그의 <킬빌2>가 이번에 모스크바에서는 개봉됐다. 나는 이 영화의 복사본 비디오CD를 3,200원 주고 사서 보았는데, 이미 두어 달 이전부터 이 복사본 <킬빌2>는 비디오/음반 가게마다 깔려 있었다(한국은 모스크바보다 영화시장이 크니까 이미 개봉했을 걸로 짐작된다). 나는 <킬빌1>, <킬빌2>를 모두 모스크바에 와서 봤는데, 타란티노판 이 ‘무협판타지’의 주제는 다소 고전적인 ‘엄마 되기의 어려움’이다(이하의 내용은 일부 스포일러일 가능성이 있음). 그런 의미에서 ‘불량소녀들’이 반드시 보아야 할 ‘교육용’ 영화.

 

 

 



아니, ‘엄마 되기’보다는 ‘엄마로 태어나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첫 아이를 낳을 때 산모들은 아이를 낳으면서 동시에 ‘엄마’를 낳는다). 영화에서 무협 판타지는 ‘산고(産苦)’에 대응하는바, 그때 태어나는 것은 ‘아이’라기보다는 ‘엄마’이다. 우마 서먼은 자신이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즉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무자비한 복수를 결심/결행하게 되며, 결말에서는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엄마가 되기 위한 조건이 ‘킬빌’이라는 것. 여기서 ‘빌’은 (아이의) ‘아버지’이니까, ‘킬빌’은 일종의 ‘부친살해’인 셈이다. 물론 이 부친살해는 전도돼 있다(지젝식으로 말하면, ‘트위스트’돼 있다).

이 영화에서의 부친살해 욕망은 아이가 엄마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갖게 되는 욕망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에게 갖게 되는 욕망이다. 영화에서 우마 서먼은 그 욕망을 실행한다. 왜 ‘아버지’가 제거되어야 하는가? ‘나쁜’ 아버지, 혹은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없어 보이는 ‘부족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형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킬빌>은 내러티브상으론 포스트모더니즘 영화가 아니라, 모더니즘 영화이다. 지젝이 <히치콕>의 ‘모더니즘’에 대해서 지적한바, “(악마적, 외설적인) 부성적 인물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히치콕>, 16쪽).



다른 한편으로, <킬빌>의 이러한 주제는 타란티노식 영화의 비밀을 엿보게 한다. 즉 타란티노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라는 것. 타란티노가 ‘작가’라면(그러니까 그의 ‘유희정신’에 어떤 ‘진정성’이 있는 걸로 가정한다면), 아마도 그에겐 ‘아버지’가 결여돼 있거나, 적어도 ‘아버지의 이름’이 결여돼 있다. 이른바, ‘부성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전매특허적인 패러디 혹은 패스티쉬(=짜집기) 스타일은 그러한 결여가 낳은 ‘자유’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방황의 산물이다. 그는 ‘아버지’를 부정하면서(그것이 스타일의 유희를 낳는다), 동시에 그리워한다(그것이 스타일에 대한 오마주를 낳는다).

러시아의 한 비평가는 타란티노에 대해, ‘비상한 재능’이 아니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감독(이라기보다는 비디오가게 점원)이라고 평한바 있는데, 그때 ‘기억’의 대상이 되는 것은, 즉 그 ‘기억’의 ‘주인-기표’는 ‘아버지’이다. 그 ‘아버지’가 부재하는 한 그는 계속 ‘악동’으로 남을 것이다(그러한 타란티노와 비교해볼 만한 또 다른 ‘악동’이 페도르 알모도바르이다).

어쨌든 <킬빌>의 타란티노는 현재 모스크바에 있지만, 히로인 우마 서먼과 대릴 한나는 동행하지 않았는데, 오늘자 <이즈베스찌야>에는 이 두 여배우와의 현지 인터뷰가 실렸다. 어제는 ‘정치적 활동가’이기도 한 수잔 서랜든과의 인터뷰가 실렸고(흥미로운 부분을 발췌해볼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한 마디’가 또 어디로 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의 우상이었던 프랑스의 여배우 소피 마르소도 어제 러시아를 방문했다. 모스크바 영화제와는 무관하게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한 프랑스 귀금속 전시회의 ‘얼굴’로 온 것인데,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러시아를 다녀간 바 있다. 하긴,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주연도 맡았었으니까 인터뷰대로 러시아는 익숙하겠다. 영화배우에다가 감독으로도 근래에 데뷔했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이 여배우도 어제 TV인터뷰를 보니까 어느덧 ‘나이’가 완연했다(내 기억에 그녀는 나보다 한 살 더 많다).

 

오늘자 <이스베스찌야>에 실린 인터뷰를 보니까, 그녀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정원을 산책하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무일 없이 쉬는 것. 그러니까 아무런 할일이 없으면 불안해 하는 타입인 듯하다(‘할일’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대중의 주목, 혹은 시선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그녀가 장 폴 벨몽도(한때 프랑스 영화는 알랭 들롱의 영화와 벨몽도의 영화로 나뉘었다)와 함께 주연한 영화가 이곳 TV에 방송됐었는데(지난달에는 <라붐> 시리즈도 방영됐다), 내가 거의 20년 전에 본 영화였다. 고등학교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에만 유일하게 일찍 집에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런 기간에 나는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다. 바로 그렇게 본 영화 중 하나. 그런데, 내가 놀라는 것은, 정작 그 20년이란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그 20년의 시간에 대한 ‘감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냉담한 것인지, 관대한 것인지, 혹은 아직 젊은 것인지, 너무 늙어버린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질 않는다...

04. 06. 18/ 06. 06. 14.

P.S.(*타란티노의 러시아 언론과의 인터뷰도 같이 옮겨놓는다.) 지난 금요일(18일)에 타란티노의 <킬빌2>가 공식 개봉됐고, 어제(19일) <이즈베스찌야>에는 타란티노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어는 칸느 영화제 얘기를 할 때 언급됐었는데, 마리야 쿱쉬노바이다. 짧은 인터뷰에서 주요 질문은 세 가지였는데, 첫번째 질문은 (한 편의 영화를 찍은 다음에 둘로 나눈 게 아니라) 처음부터 <킬빌>을 두 편의 영화로 따로 찍을 생각을 했느냐는 것. 타란티노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다만, 문제가 됐던 건, 시나리오였는데, 원래는 한편의 영화를 목표로 씌어졌다는 것. 타란티노는 그걸 도저히 90분에 다 집어넣을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빼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제작자가 둘로 나누는 게 어떨까라는 제안을 해서 “만세!”를 불렀다는 것.

두번째 질문은 <킬빌3>도 나오느냐는 것. 이에 관해서는 흥미를 느낄 만한 팬들도 있을 듯한데, 타란티노의 대답은 역시 그렇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킬빌1>을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대충 <킬빌3>가 어떤 내용이 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첫장면에서 우마 서먼이 블랙맘바와 결투를 벌일 때 블랙맘바의 유치원생 딸(니키)이 끼어든다. 우마 서먼이 결국은 맘바를 죽이게 되는데, 그 장면을 본 니키에게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복수하러 오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다. 기다리겠다고. 그게 <킬빌3>다. 그런데, 어린 니키가 엄마의 복수라도 하려면 좀 커줘야 될 게 아닌가? 그래서, 타란티노의 대답은 <킬빌3>는 한 15년쯤 후에 나올 거라는 것이다. 그는 니키가 커가는 과정을 미리 찍어둘 예정으로 있다.(*아래 사진은 어린시절의 타란티노.)



그렇게 되면, 복수는 끝이 없는 게 아닐까?(우마 서먼도 딸이 있으니.) 타란티노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지만, ‘타란티노의 세계’(관객이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에서는 이게 완결편이 될 거라고. 그래서 <킬빌>은 아마도 타란티노판 ‘복수의 3부작’이 될 것이다(<킬빌2>에는 “복수는 곧 사랑”이라는 대사도 있으니까, ‘사랑의 3부작’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리고 이 ‘복수의 3부작’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박찬욱이다. 쿱쉬노바이 세번째 질문은 그에 관한 것이다. 이 대목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번역하겠다.



-(쿱쉬노바) 칸느에서 당신은 한국영화 <올드보이>에 표를 던지셨죠. 똑같이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올드보이>가 비극적인 복수자를 다루고 있다면, 당신의 영화에서는 복수도 (자기)만족일 뿐인데요.

 

 

 

 

-(타란티노) <올드보이>는 영화제에서 아주 뛰어난 영화였죠. 저로선 이 영화가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진짜 걸작이라고 생각돼요. 영화는 한국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화 현상으로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복수에 대해서는… 당신이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주제에 관해 두 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Sympathy for Mr. Vengeance)>과 <올드보이>. 그리고 지금은 세번째 영화를 찍을 건데, 이 세 편의 영화에서 그는 복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각기 다른 결론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복수가 사랑으로 손에 손을 맞잡는 게 아니라면, 해석의 여지는 활짝 열려 있어요. 비극적인 복수자를 보여줄 수도 있고, 복수의 유익함, 즉 정의의 승리를 보여줄 수도 있죠. 또 복수자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나 환희, 만족감을 보여줄 수도 있죠.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역시 복수에 대한 영화라는 건 나로선 처음 듣는 얘기인데(*다시 읽으니 코믹하다. 우리는 그가 무얼 어떻게 찍었는지 알고 있다!), 타란티노의 말인 만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현재 어느 정도 진행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계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된 만큼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사실, 객지에서 이런 류의 기사나 인터뷰를 읽는 일은 ‘만족감’을 준다. 그 만족감은 TV에서 한국기업들의 광고들을 볼 때 느끼는 ‘대견함’과는 차원이 좀 다르다. “너 돈 좀 있구나”와 “너 뭘 좀 아는구나”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요즘은 타란티노가 외교관 열 명이 달려들어도 못할 일들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한국 외교관이 <이즈베스찌야>와 인터뷰 할일이 있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화현상”이라!..(*아래 사진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무덤을 찾은 타란티노. 파스테르나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타란티노가 좀더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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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축구 '한국:토고'전을 보고(이 게임은 호주:일본 전 다음으로 재미있었다) '프랑스:스위스'전을 기다리는 막간에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지젝의 <이라크>의 제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를 읽으며 정리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최근에 최장집 교수의 논문집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2006)가 출간된 것도 민주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유인한다.

 

 

 

 

한데, 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문했지만, 막상 책이 온 걸 보니 그건 아니었다. '민주주의' 전문출판사(?)로 나선 후마니타스 편집진의 '작품'이었던 것. 내가 기대했던 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란 근간인데, 마저 출간되어야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3부작이 될 듯하다. 물론 그 원조로 꼽을 수 있는 책은 10년 전에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6)이 되어야겠지만.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함께 내가 주문했던 책은 정치이념(이데올로기) 사전용으로 적합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이며,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미국 민주주의론의 권위자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등을 같이 읽어둘 만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게 실현가능한 기획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럼, 이 정도에서 마이크를 2004년 9월 22일 모스크바대학의 본관 강당으로 넘긴다. 그날 모스크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방러 중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강연'이 있었고(노무현 정부는 최장집 교수의 신랄한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자세한 현장 중계는 시효가 많이 지난 관계로 생략하고 한러 관계의 우호적 전망에 대한 대통령의 강연이 끝난 이후부터 따라가 보기로 한다(참고로 푸틴의 지지율은 줄곧 70%를 넘어서고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율과 합하면 얼추 100%가 되겠다. '노빠 파시즘'이나 '대중독재'란 표현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강연에 이어서는 노대통령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와 (학교를 대표하여) 총장의 기념품(나무로 조각한 수공예품 백조였다) 증정이 있었고, 끝으로 한 한국인 성악가(여기 유학생인가?)와 모스크바대학 합창단이 우리 가곡 ‘선구자’를 불렀다(이 노래가 3절까지 있는 줄은 새삼/처음 알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어놓고 보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구절은 모호하다. “거친 꿈이 깊었나?” 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가란 뜻인가?(선구자는 이미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러서 될 일이 아니고 발굴해야 될 일 아닌가?)

‘선구자(先驅者)’란 말 그대로, ‘먼저 말을 달린 자’란 뜻이다(왜 ‘강가’에서 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떤 일에 앞장 선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ct)하는, 즉 앞으로(pro) 내던지는(ject) 사람. 기업가이기도 하고 혁명가이기도 한 사람.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레닌주의’이다. 지젝이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두 번째 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의 결론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러시아의 (생각하면 눈물나는)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다.

 

 

 



“1990년은, 즉 공산주의의 붕괴는, 통상 정치적 유토피아의 붕괴로서 지각된다. 고귀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공포로 끝나고 마는가에 대한 혹독한 교훈을 배운 오늘날 후-유토피아적 실용주의적 행정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이른바 유토피아의 붕괴라는 것에 뒤이어서 최후의 거대한 유토피아, 즉 ‘역사의 종말’인 세계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가 10년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9.11은 바로 이 유토피아의 종말을 가리킨다.”(159쪽)

즉,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 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 년을 기고만장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었다. 전자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그때 나는 군복무중이었다), 후자의 종언을 보여주는 ‘실재적’ 사건이 바로 9.11이다.

그러니까, 1차 유토피아(1917-1991), 2차 유토피아(1991-2002)가 모두 끝장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뒤이어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역사의 현실)로 회귀”했다. 궁극적 유토피아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환상은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란 말의 의미를 특화해야만 한다. 가장 내밀한 곳에서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를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리가 없는(u-topic) 공간의 건설이다. 즉 기존의 매개변항들 –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무엇인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가를 규정하는 매개변항들 – 바깥에 있는 사회적 공간의 건설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가능한 것의 좌표를 바꾸는 제스처이다.”(159쪽)

여기서 지젝이 제안하는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아니 올바른 정의이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매개변항’이란 건 ‘parameter’의 번역 같은데, 여기선 그냥 ‘변수’나 ‘한계’(혹은 울타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읽기에 편하겠다).



지젝이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레닌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1914년 재앙(러시아어 번역은 ‘비극’)의 잿더미로부터 등장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 그 자체를 뜻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상설적인 군대나 경찰이나 관료가 없이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코뮨적 사회 형태를 발명하라는 근본적 명령. 레닌에게 그것은 어떤 머나먼 미래를 위한 이론적 기획이 결코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160쪽)


 

 

 

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근본적인, 즉 래디컬한 명령(=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1)부르주아 국가, 즉 국가라는 것 자체를 분쇄하고 (2)새로운 코뮨적 사회형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코뮨에서는 만인이, 즉 모두가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관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레닌에게 단지 ‘이론적인’ 기획이 아니었다는 것. 이어지는 레닌의 발언은 레닌주의를 집약하는 것으로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인데,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잘못 번역돼 있다.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건 굳이 레닌이 아니더라도 만인이 떠들 수 있는 말이다. 이게 레닌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가 구상했던 코뮨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젝은 이 발언을 닐 하딩(N. Harding)의 <레닌주의>(Duke University Press, 1996), 309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지젝이 레닌과 관련하여 자주 참조하는 책이다), 내 생각엔 하딩이 잘못 번역했거나 (그보다 확률이 높은 건) 우리말 역자가 잘못 번역했다(설마 지젝이 잘못 인용했을까?). 아마도 <국가와 혁명>에 나오는 구절인 듯하므로, 국역본 <국가와 혁명>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어로는 <레닌전집> 34권, 316쪽에 나오는 말인데(요즘 러시아에선 <레닌전집>을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레닌이 실제로 한 발언은 이렇다. “우리는 이천만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러시아어 원문(레닌은 러시아어로 말했으므로, 이 경우는 영어본의 번역이 중역이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분명 그런 내용이며(지젝이 쓴 <레닌의 13가지 경험>이란 책까지 뒤졌는데, 거기도 같은 문장이었다),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이천망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이천만명은 아니더라도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이야말로 레닌주의에 값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는 러시아어본에서 “이러한 어떤 순간의 절박한 요구(=명령)가 진정한 유토피아이다.”라고 옮겨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엄밀히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에서의) ‘광기’를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어느 쪽인가를 따져본다면, 현실주의적 ‘상식’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즉 여기서의 대비적 구도는 ‘레닌=유토피아주의=광기’ 대 ‘스탈린=현실주의=상식’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가 잃어버린 것은 레닌주의의 ‘유토피아적 광기’이다(그런 ‘광기’를 계승했던 이는 내 생각에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였다).

 

 

 

 

(*)최근에 읽은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에서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바체슬라브(*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고위의 비밀직책들을 갖고 어떤 볼셰비키보다도 더 오랫동안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을 섬겼다. 노년에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엄격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레닌이지. 레닌이 스탈린에게 너무 부드럽고 진보적이라고 꾸짖던 일이 생각나네.'" 파이프스의 결론: "이것으로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처음에는 트로츠키가, 다음에는 흐루시초프가 유행시킨 신화)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 경우 스탈린의 '상식'은 광기의 일상화가 낳은 상식이다).  아래는 1917년의 스탈린과 레닌.

이런 대목의 지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를 높이 들고서 스탈린주의의 청산과 레닌주의에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킨다. 현실 사회주의가 더 강력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재건/재구축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유토피아적이었다(즉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가, 그리고 러시아 국민이 선택한 것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열변을 토한) 옐친이었고(그 옐친은 ‘욕조=스탈린주의’와 함께 ‘아이=레닌주의’도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걸로 이에 화답했다), ‘현실 자본주의’였다. 그건 상식적인 것이었을까? 91년 이후 몇 년간의 러시아사(=역사적 혼돈)는 남의 나라 역사임에도 나를 눈물나게 한다.

계속 지젝을 따라가본다. “다시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토피아가 실제 삶을 추상한 이상적 사회에 관한 꿈꾸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가능한 것’의 매개변항들 내에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생존의 문제로서 우리가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유토피아는 정치적 유토피아들에 대한 표준적 개념, 즉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도조차 기본적으로 없었던 기획들을 포함하는 책들에도 분명하게 대립되는 것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자체의 유토피아적 실천으로 통상 언급하는 것에도 분명 대립되는 것이다.”(160-1쪽)

즉 유토피아는 실제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몽상과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더 이상 ‘가능한 것’의 한계(=울타리) 내에서 살아갈 수 없을 때 제기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불가피성(=필연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상식적인/표준적인 유토피아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유토피아’란 개념을 발명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 같은 언급인바, 유토피아 전략의 심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유토피아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심미적 차원에 놓여있다. 종종 제기되는 주장에 따르면, 자크 랑시에르는, 심미적 차원을 정치에 내재한 것으로서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이미 그 시대가 확실히 가버린 19세기의 포퓰리즘적 반란들을 회향적으로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가?” 디저트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사소한 오역이 있다. 일단 우리말로, “자크 랑시에르는 무엇을 동경하고 있다”는 게 종종 주장으로 제기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정말로 그런가, 즉 랑시에르는 그런 걸 동경하고 있는가?

물론 그건 넌센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 랑시에르가 무얼 어쨌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버렸다는 것이고, 지젝이 반문으로 제기하는 건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인가? 랑시에르 얘기는 그 시대를 수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즉 19세기 민중 반란의 시대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건 그러한 정치적인 사건에 내재한 심미적 차원인 것이고. 지젝은 그러한 심미적 차원의 정치성을 포스트모던적 정치상황에서도 읽어내고자 한다. 즉, “피어싱이나 옷바꿔입기에서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후근대적인’ 저항의 정치야말로 심미적 현상들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161쪽) 하는 것.



‘공개적 스펙터클’이란 말이 나오는데, ‘포스트모던적’ 저항으로서의 ‘공개적 스펙터클’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은 ‘플래시 몹’이다. “플래시 몹이라는 진기한 현상은, 최소한의 뼈대로 환원된 가장 순수한 심미-정치적 항의를 나타내지 않는가? 사람들은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서 어떤 짧은 행위를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흩어진다. 플래시 몹이 아무런 실제 목적도 없는 도시의 시(詩)로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플래시 몹은 일종의 ‘정치의 말레비치’가 아닌가? 그것은 최소한의 차이의 표식인 그 유명한 ‘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에 대한 정치적 대응물 아닌가?”



말레비치는 물론 ‘절대주의’를 주창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화가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다(‘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말레비치는 한번 더 언급되는데,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설명하는 절에서이다. “(네 가지 담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상징적 재배가라는 사실에, 즉 하나의 존재자를 그것 자체와 그것이 구조에서 차지하는 자리로 재배가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그 자리는 말라르메의 ‘자리만이 발생한다’나 말레비치의 흰 표면상의 검은 사각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둘 모두는 자리 그 자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혹은 차라리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하는, 하나의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최소한의 차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173쪽)

인용문에서 재배가는 reduplicatio(=reduplication)를 옮긴 것인데, 이건 ‘배가’라고 해야 맞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 뜻은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 즉 두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우리말로 ‘배가(倍加)’라고 한다. ‘재배가’는 배가된 걸 다시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산술적으론 네 배가 된다(영어에서 duplication이나 reduplication은 거의 같은 뜻이다). ‘존재자’로 옮긴 entity(‘실체’로도 많이 번역된다)는 being과 함께 하이데거의 용어인 ‘존재자’의 영어 역어로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entity가 우리말 ‘존재자’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우리말에서 ‘존재자’란 말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영어의 소문자 being처럼, 그냥 우리말 일상어의 ‘존재’로 충분하다.



말레르메의 시구 ‘자리만이 발생한다(rien n’aura eu lieu que le lieu)’는 어느 시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주사위 던지기>에 나오는 시구이다), 뒤에 붙은 설명으로 봐서 불충분한 번역이다(러시아어본에서는 불어를 따로 옮겨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로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말라르메와 말레비치와 나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즉,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자리(=장소)가 이미 하나의 요소로서 다른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자리 자체를 분리/규정해내고자 한 것(*한 말라르메 전공자는 "장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옮기고 있다. 이해하기 편하다).

즉 말레비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검은 사각형’이란 요소만이 아니다. 거기엔 ‘흰 바탕’이란 요소가 이미 선행해 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흰 바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라캉의 네 가지 담론에서 이 ‘흰 바탕’ 즉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작인(agent), 타자(other), 진리(truth), 산물(production)이다(나로선 ‘작인’이란 역어가 내키지 않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부터 ‘작인’이란 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정치의 말레비치’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지젝 자신이 플레시 몹 같은 같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대해선 보다 본격적인 분석과 제안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젝이 새롭게 규정/제안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제스처와 전망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지젝은 3장 ‘지배와 그 너머’의 끝부분에서도 다시 유토피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확인하면서 나는 ‘공식적인’ <이라크> 읽기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보다 일반적 수준에서, 이른바 금지된 지식의 실정적, 구성적 지위 개념은, 즉 우리의 욕망이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직접적 충족은 지연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보기보다 더 복잡하다.”(226쪽) 왜인가? “핵심적인 사실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성적으로 재배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적이란 역어는 reflective(ly) 정도를 옮긴 것일 텐데, 우리말이 너무 ‘조밀하기’ 때문에 번역이 까다로운 경우이다. 즉, 영어의 reflection은 우리말의 반성, 반영, 반사, 성찰이란 뜻을 모두 포괄하며 reflective나 reflexive는 ‘재귀적’이란 뜻도 갖는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중요한 것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선 그것이 재귀적으로 배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용이하다. 재귀적인 배가? “금지 자체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7쪽)



“즉 금지는 그 실정적인 차원 속에서 금지처럼 보여서는 안되고 욕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 단순한 외적 장애물처럼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잣말할 수는 없다. '그건 진정으로 그녀는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해. 그녀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위반의 아우라, 금지된 영역에 들어가는 것의 아우라야. 그것은 그녀의 현실을 넘어서는 나의 상상력의 힘과 과잉이야!' 그런 직접적인 통찰은 분명 ‘실용주의의 모순’인데, 그것은 실상 가정되면 나의 욕망을 망쳐놓는다.”

실용주의의 모순? 물론 오역이다. ‘Pragmatic contradiction’ 정도의 역어일 듯싶은데,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옮겨야 한다. 이 ‘화용론(話用論)’을 일어에서는(일본사전을 베낀 영한사전에서도) ‘어용론(語用論)’이라고 옮기는 듯하다(우리말에서 왜 어용론이란 역어가 기피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어용(御用)’이란 말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약간 변칙이지만, 더 이해하기 쉽게 옮기려면,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어떤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다. 거기서 그런 류의 혼잣말(=통찰)과 열정은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이 부분을 ‘능력’에 관한 걸로 옮겼지만, 전후 문맥상 ‘금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사랑하는 사람)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앎)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무엇이 금지돼 있다는 앎 혹은 언표 자체의 금지이다. 해서, 스탈린 시대의 허식재판(show trial)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공산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공식적으론 보증/허용되었지만 은밀하게는 금지돼 있던, 자유발언(=비판) 권리 자체의 ‘실행’이었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의 마력을 깨지 않기 위해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그것의 일체의 통속적 현실 속에서 떠맡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숭고한 지위를 유지할 각오가 되어 있다. 즉 마르틴 루터에 대한 헤겔의 주해를 말바꿔(=바꿔 말해) 보자면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228쪽) 나라면 ‘저속함’이란 역어는 ‘비속함’으로 바꾸고 싶다(나의 취향이 비속한가?).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사랑은 욕망에서 해방된, 아니 욕망을 초과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정치적 교훈’은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본다’는 이런 자세가 갖는 정치적 교훈(혹은 차라리 함축)은 기존 현실을 신비화하는, 그것에 가짜 색깔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숭고한(유토피아적) 전망을 힘껏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 요컨대 유토피아를 힘껏 실천하는 일이다.” 마치 무슨 강령이나 구호처럼 돼 있어서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유토피아적 전망과 일상적 실천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젝의 결론을 우리의 문맥에서 조금 일상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인 ‘비속한’ 한국 여자들에게서 ‘숭고한’ 러시아 여자들을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갖는 일상-정치적 교훈은 기존의 한국 여성들을 (러시아 여성들처럼) 신비화하는, 그것에 분칠하고 떡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이 통신문의 원제목은 '크레믈린-보드카-러시아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러시아 여성의 이미지(=비전)를 힘껏 한국 여성의 일상으로 번역해내는(=옮겨오는) 일, 요컨대 이상적 여성이란 유토피아를 먼 나라에서 구할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힘껏 찾아보는 일이다. 너무 가깝다고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04. 09. 23./ 06.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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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요, 감사~^^

기인 2006-06-1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도 월드컵 보시나요? ㅎㅎ 저는 기분이 야릇해서 잘 못 보겠습니다 ^^;

로쟈 2006-06-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한 경기 정도는 보게되네요. 오늘밤엔 스페인과 우크라이나 전 같은. TV에서 다른 거 하지도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