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 '한국:토고'전을 보고(이 게임은 호주:일본 전 다음으로 재미있었다) '프랑스:스위스'전을 기다리는 막간에 재작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지젝의 <이라크>의 제2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를 읽으며 정리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야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최근에 최장집 교수의 논문집 <민주주의의 민주화>(후마니타스, 2006)가 출간된 것도 민주주의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유인한다.

 

 

 

 

한데, 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문했지만, 막상 책이 온 걸 보니 그건 아니었다. '민주주의' 전문출판사(?)로 나선 후마니타스 편집진의 '작품'이었던 것. 내가 기대했던 건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란 근간인데, 마저 출간되어야 최장집 교수의 '한국민주주의' 3부작이 될 듯하다. 물론 그 원조로 꼽을 수 있는 책은 10년 전에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한길사, 1996)이 되어야겠지만.  

<민주주의의 민주화>와 함께 내가 주문했던 책은 정치이념(이데올로기) 사전용으로 적합한 <현대 정치사상의 파노라마>(아카넷, 2006)이며,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미국 민주주의론의 권위자 로버트 달의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등을 같이 읽어둘 만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게 실현가능한 기획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럼, 이 정도에서 마이크를 2004년 9월 22일 모스크바대학의 본관 강당으로 넘긴다. 그날 모스크바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방러 중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강연'이 있었고(노무현 정부는 최장집 교수의 신랄한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자세한 현장 중계는 시효가 많이 지난 관계로 생략하고 한러 관계의 우호적 전망에 대한 대통령의 강연이 끝난 이후부터 따라가 보기로 한다(참고로 푸틴의 지지율은 줄곧 70%를 넘어서고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율과 합하면 얼추 100%가 되겠다. '노빠 파시즘'이나 '대중독재'란 표현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강연에 이어서는 노대통령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와 (학교를 대표하여) 총장의 기념품(나무로 조각한 수공예품 백조였다) 증정이 있었고, 끝으로 한 한국인 성악가(여기 유학생인가?)와 모스크바대학 합창단이 우리 가곡 ‘선구자’를 불렀다(이 노래가 3절까지 있는 줄은 새삼/처음 알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생각나는 대로 가사를 적어놓고 보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구절은 모호하다. “거친 꿈이 깊었나?” 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가란 뜻인가?(선구자는 이미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불러서 될 일이 아니고 발굴해야 될 일 아닌가?)

‘선구자(先驅者)’란 말 그대로, ‘먼저 말을 달린 자’란 뜻이다(왜 ‘강가’에서 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떤 일에 앞장 선 사람을 말한다. 무엇인가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ct)하는, 즉 앞으로(pro) 내던지는(ject) 사람. 기업가이기도 하고 혁명가이기도 한 사람.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레닌주의’이다. 지젝이 <이라크>(도서출판b, 2004)의 두 번째 장 ‘민주주의와 그 너머’의 결론에서 하고 있는 얘기를 잠시 들어보자. 러시아의 (생각하면 눈물나는)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다.

 

 

 



“1990년은, 즉 공산주의의 붕괴는, 통상 정치적 유토피아의 붕괴로서 지각된다. 고귀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어떻게 전체주의적 공포로 끝나고 마는가에 대한 혹독한 교훈을 배운 오늘날 후-유토피아적 실용주의적 행정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이른바 유토피아의 붕괴라는 것에 뒤이어서 최후의 거대한 유토피아, 즉 ‘역사의 종말’인 세계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유토피아가 10년간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9.11은 바로 이 유토피아의 종말을 가리킨다.”(159쪽)

즉,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 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의 붕괴(=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 년을 기고만장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었다. 전자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그때 나는 군복무중이었다), 후자의 종언을 보여주는 ‘실재적’ 사건이 바로 9.11이다.

그러니까, 1차 유토피아(1917-1991), 2차 유토피아(1991-2002)가 모두 끝장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뒤이어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역사의 현실)로 회귀”했다. 궁극적 유토피아는,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환상은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란 말의 의미를 특화해야만 한다. 가장 내밀한 곳에서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를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유토피아를 특징짓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자리가 없는(u-topic) 공간의 건설이다. 즉 기존의 매개변항들 –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무엇인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가를 규정하는 매개변항들 – 바깥에 있는 사회적 공간의 건설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가능한 것의 좌표를 바꾸는 제스처이다.”(159쪽)

여기서 지젝이 제안하는 것은 유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아니 올바른 정의이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 세계에서,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매개변항’이란 건 ‘parameter’의 번역 같은데, 여기선 그냥 ‘변수’나 ‘한계’(혹은 울타리)라고 옮기는 것이 더 읽기에 편하겠다).



지젝이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레닌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1914년 재앙(러시아어 번역은 ‘비극’)의 잿더미로부터 등장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국가 그 자체를 뜻하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하고, 상설적인 군대나 경찰이나 관료가 없이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코뮨적 사회 형태를 발명하라는 근본적 명령. 레닌에게 그것은 어떤 머나먼 미래를 위한 이론적 기획이 결코 아니었다. 1917년 10월에 레닌은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160쪽)


 

 

 

레닌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근본적인, 즉 래디컬한 명령(=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은 (1)부르주아 국가, 즉 국가라는 것 자체를 분쇄하고 (2)새로운 코뮨적 사회형태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코뮨에서는 만인이, 즉 모두가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관리’?)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레닌에게 단지 ‘이론적인’ 기획이 아니었다는 것. 이어지는 레닌의 발언은 레닌주의를 집약하는 것으로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것인데,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잘못 번역돼 있다. “이천만 인민이 아니라면, 열명으로 구성되는 국가기구를 즉시 작동시킬 수 있다”는 건 굳이 레닌이 아니더라도 만인이 떠들 수 있는 말이다. 이게 레닌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가 구상했던 코뮨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젝은 이 발언을 닐 하딩(N. Harding)의 <레닌주의>(Duke University Press, 1996), 309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지젝이 레닌과 관련하여 자주 참조하는 책이다), 내 생각엔 하딩이 잘못 번역했거나 (그보다 확률이 높은 건) 우리말 역자가 잘못 번역했다(설마 지젝이 잘못 인용했을까?). 아마도 <국가와 혁명>에 나오는 구절인 듯하므로, 국역본 <국가와 혁명>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어로는 <레닌전집> 34권, 316쪽에 나오는 말인데(요즘 러시아에선 <레닌전집>을 좀처럼 구하기 어렵다), 레닌이 실제로 한 발언은 이렇다. “우리는 이천만명이 아니더라도, 천만 명으로 구성된 국가기구를 즉각 도입할 수 있다.”

내가 읽은 러시아어 원문(레닌은 러시아어로 말했으므로, 이 경우는 영어본의 번역이 중역이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분명 그런 내용이며(지젝이 쓴 <레닌의 13가지 경험>이란 책까지 뒤졌는데, 거기도 같은 문장이었다), 영어본의 문장도 특별히 난해할 것 같지 않은데, ‘이천망명-천만’조차 ‘이천만-열명’으로 탈바꿈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로 앞에서 만인이 사회적 문제들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코뮨이라고 했으므로, 이천만명은 아니더라도 천만 명이 내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문맥상 ‘논리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방식이야말로 레닌주의에 값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이와 같은 그 순간의 절박함이 진정한 유토피아다.”는 러시아어본에서 “이러한 어떤 순간의 절박한 요구(=명령)가 진정한 유토피아이다.”라고 옮겨지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바로 이러한 레닌주의적 유토피아의 (엄밀히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에서의) ‘광기’를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어느 쪽인가를 따져본다면, 현실주의적 ‘상식’으로의 회귀를 나타낸다.” 즉 여기서의 대비적 구도는 ‘레닌=유토피아주의=광기’ 대 ‘스탈린=현실주의=상식’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스탈린식의 ‘현실 사회주의’가 잃어버린 것은 레닌주의의 ‘유토피아적 광기’이다(그런 ‘광기’를 계승했던 이는 내 생각에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였다).

 

 

 

 

(*)최근에 읽은 <공산주의>(을유문화사, 2006)에서 저명한 러시아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바체슬라브(*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고위의 비밀직책들을 갖고 어떤 볼셰비키보다도 더 오랫동안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을 섬겼다. 노년에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엄격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레닌이지. 레닌이 스탈린에게 너무 부드럽고 진보적이라고 꾸짖던 일이 생각나네.'" 파이프스의 결론: "이것으로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의 거부를 뜻한다는 신화(처음에는 트로츠키가, 다음에는 흐루시초프가 유행시킨 신화)는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즉, 스탈린주의가 광기였다면, 그것은 레닌주의 충실한 계승이라는 것(이 경우 스탈린의 '상식'은 광기의 일상화가 낳은 상식이다).  아래는 1917년의 스탈린과 레닌.

이런 대목의 지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기치를 높이 들고서 스탈린주의의 청산과 레닌주의에로의 복귀를 주창했던 고르바초프를 연상시킨다. 현실 사회주의가 더 강력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재건/재구축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는 유토피아적이었다(즉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가, 그리고 러시아 국민이 선택한 것은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서 열변을 토한) 옐친이었고(그 옐친은 ‘욕조=스탈린주의’와 함께 ‘아이=레닌주의’도 과감하게 내다버리는 걸로 이에 화답했다), ‘현실 자본주의’였다. 그건 상식적인 것이었을까? 91년 이후 몇 년간의 러시아사(=역사적 혼돈)는 남의 나라 역사임에도 나를 눈물나게 한다.

계속 지젝을 따라가본다. “다시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토피아가 실제 삶을 추상한 이상적 사회에 관한 꿈꾸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가장 내밀한 곳에 있는 절박함의 문제이며, ‘가능한 것’의 매개변항들 내에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 생존의 문제로서 우리가 떠밀려 들어가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유토피아는 정치적 유토피아들에 대한 표준적 개념, 즉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도조차 기본적으로 없었던 기획들을 포함하는 책들에도 분명하게 대립되는 것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자체의 유토피아적 실천으로 통상 언급하는 것에도 분명 대립되는 것이다.”(160-1쪽)

즉 유토피아는 실제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이상적 사회에 대한 몽상과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우리가 더 이상 ‘가능한 것’의 한계(=울타리) 내에서 살아갈 수 없을 때 제기되는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불가피성(=필연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상식적인/표준적인 유토피아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유토피아’란 개념을 발명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디저트 같은 언급인바, 유토피아 전략의 심미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유토피아 전략들 가운데 하나는 심미적 차원에 놓여있다. 종종 제기되는 주장에 따르면, 자크 랑시에르는, 심미적 차원을 정치에 내재한 것으로서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이미 그 시대가 확실히 가버린 19세기의 포퓰리즘적 반란들을 회향적으로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그런가?” 디저트니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도 사소한 오역이 있다. 일단 우리말로, “자크 랑시에르는 무엇을 동경하고 있다”는 게 종종 주장으로 제기될 만큼 중요한 일인가? 정말로 그런가, 즉 랑시에르는 그런 걸 동경하고 있는가?

물론 그건 넌센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 랑시에르가 무얼 어쨌다는 게 아니라 어떤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버렸다는 것이고, 지젝이 반문으로 제기하는 건 정말로 그런가, 정말로 (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인가? 랑시에르 얘기는 그 시대를 수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다. 즉 19세기 민중 반란의 시대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건 그러한 정치적인 사건에 내재한 심미적 차원인 것이고. 지젝은 그러한 심미적 차원의 정치성을 포스트모던적 정치상황에서도 읽어내고자 한다. 즉, “피어싱이나 옷바꿔입기에서 공개적 스펙터클에 이르기까지 ‘후근대적인’ 저항의 정치야말로 심미적 현상들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161쪽) 하는 것.



‘공개적 스펙터클’이란 말이 나오는데, ‘포스트모던적’ 저항으로서의 ‘공개적 스펙터클’ 사례로 지젝이 들고 있는 것은 ‘플래시 몹’이다. “플래시 몹이라는 진기한 현상은, 최소한의 뼈대로 환원된 가장 순수한 심미-정치적 항의를 나타내지 않는가? 사람들은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장소에 나타나서 어떤 짧은 행위를 수행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흩어진다. 플래시 몹이 아무런 실제 목적도 없는 도시의 시(詩)로서 묘사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이 플래시 몹은 일종의 ‘정치의 말레비치’가 아닌가? 그것은 최소한의 차이의 표식인 그 유명한 ‘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에 대한 정치적 대응물 아닌가?”



말레비치는 물론 ‘절대주의’를 주창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화가이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다(‘흰 표면 위의 검은 사각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라크>에서 말레비치는 한번 더 언급되는데,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설명하는 절에서이다. “(네 가지 담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상징적 재배가라는 사실에, 즉 하나의 존재자를 그것 자체와 그것이 구조에서 차지하는 자리로 재배가하는 것에 기초해 있다. 그 자리는 말라르메의 ‘자리만이 발생한다’나 말레비치의 흰 표면상의 검은 사각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둘 모두는 자리 그 자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혹은 차라리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하는, 하나의 요소와 그것의 자리 사이의 최소한의 차이를 공식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173쪽)

인용문에서 재배가는 reduplicatio(=reduplication)를 옮긴 것인데, 이건 ‘배가’라고 해야 맞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도 그렇게 옮기고 있다). 뜻은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 즉 두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우리말로 ‘배가(倍加)’라고 한다. ‘재배가’는 배가된 걸 다시 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산술적으론 네 배가 된다(영어에서 duplication이나 reduplication은 거의 같은 뜻이다). ‘존재자’로 옮긴 entity(‘실체’로도 많이 번역된다)는 being과 함께 하이데거의 용어인 ‘존재자’의 영어 역어로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entity가 우리말 ‘존재자’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우리말에서 ‘존재자’란 말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영어의 소문자 being처럼, 그냥 우리말 일상어의 ‘존재’로 충분하다.



말레르메의 시구 ‘자리만이 발생한다(rien n’aura eu lieu que le lieu)’는 어느 시에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주사위 던지기>에 나오는 시구이다), 뒤에 붙은 설명으로 봐서 불충분한 번역이다(러시아어본에서는 불어를 따로 옮겨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로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말라르메와 말레비치와 나란히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즉,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자리(=장소)가 이미 하나의 요소로서 다른 요소들간의 차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자리 자체를 분리/규정해내고자 한 것(*한 말라르메 전공자는 "장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옮기고 있다. 이해하기 편하다).

즉 말레비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검은 사각형’이란 요소만이 아니다. 거기엔 ‘흰 바탕’이란 요소가 이미 선행해 있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흰 바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라캉의 네 가지 담론에서 이 ‘흰 바탕’ 즉 ‘자리’에 해당하는 것이 작인(agent), 타자(other), 진리(truth), 산물(production)이다(나로선 ‘작인’이란 역어가 내키지 않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역자부터 ‘작인’이란 역어를 선택하고 있다).

‘정치의 말레비치’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지젝 자신이 플레시 몹 같은 같은 ‘포스트모던적’ 저항의 정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거기에 대해선 보다 본격적인 분석과 제안이 뒷받침되어야 하리라. 다만, 이 자리에서는 지젝이 새롭게 규정/제안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제스처와 전망을 우리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필요할 따름이다. 지젝은 3장 ‘지배와 그 너머’의 끝부분에서도 다시 유토피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확인하면서 나는 ‘공식적인’ <이라크> 읽기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보다 일반적 수준에서, 이른바 금지된 지식의 실정적, 구성적 지위 개념은, 즉 우리의 욕망이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직접적 충족은 지연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보기보다 더 복잡하다.”(226쪽) 왜인가? “핵심적인 사실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반성적으로 재배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적이란 역어는 reflective(ly) 정도를 옮긴 것일 텐데, 우리말이 너무 ‘조밀하기’ 때문에 번역이 까다로운 경우이다. 즉, 영어의 reflection은 우리말의 반성, 반영, 반사, 성찰이란 뜻을 모두 포괄하며 reflective나 reflexive는 ‘재귀적’이란 뜻도 갖는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문장은 “중요한 것은 금지가 작동하기 위해선 그것이 재귀적으로 배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용이하다. 재귀적인 배가? “금지 자체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27쪽)



“즉 금지는 그 실정적인 차원 속에서 금지처럼 보여서는 안되고 욕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가로막는 단순한 외적 장애물처럼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나는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혼잣말할 수는 없다. '그건 진정으로 그녀는 아니야, 그녀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해. 그녀를 그토록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위반의 아우라, 금지된 영역에 들어가는 것의 아우라야. 그것은 그녀의 현실을 넘어서는 나의 상상력의 힘과 과잉이야!' 그런 직접적인 통찰은 분명 ‘실용주의의 모순’인데, 그것은 실상 가정되면 나의 욕망을 망쳐놓는다.”

실용주의의 모순? 물론 오역이다. ‘Pragmatic contradiction’ 정도의 역어일 듯싶은데, ‘화용론적 모순’이라고 옮겨야 한다. 이 ‘화용론(話用論)’을 일어에서는(일본사전을 베낀 영한사전에서도) ‘어용론(語用論)’이라고 옮기는 듯하다(우리말에서 왜 어용론이란 역어가 기피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어용(御用)’이란 말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약간 변칙이지만, 더 이해하기 쉽게 옮기려면, ‘수행론적 모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즉,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자는 어떤 여자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다. 거기서 그런 류의 혼잣말(=통찰)과 열정은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현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현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차지하는 금지된 자리라는 정황에 관한 바로 그 지식이다.”

<이라크>를 두 번 통독하면서 가장 난해했던 문장인데(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 읽어야 했다), 평범한 듯한 번역문이 잘 안 읽혔던 것은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 이 부분을 ‘능력’에 관한 걸로 옮겼지만, 전후 문맥상 ‘금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옮기면, “따라서 진정으로 금지된 지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대상(=사랑하는 사람)의 ‘아무것도 아님’이라는 실상에 관해서 결코 알아서는 안 된다는, 대상을 나의 욕망의 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앎)이 금지돼 있다는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무엇이 금지돼 있다는 앎 혹은 언표 자체의 금지이다. 해서, 스탈린 시대의 허식재판(show trial)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공산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공식적으론 보증/허용되었지만 은밀하게는 금지돼 있던, 자유발언(=비판) 권리 자체의 ‘실행’이었다.

따라서, “사랑하는 대상의 마력을 깨지 않기 위해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그것의 일체의 통속적 현실 속에서 떠맡는 것과 동시에 그것의 숭고한 지위를 유지할 각오가 되어 있다. 즉 마르틴 루터에 대한 헤겔의 주해를 말바꿔(=바꿔 말해) 보자면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228쪽) 나라면 ‘저속함’이란 역어는 ‘비속함’으로 바꾸고 싶다(나의 취향이 비속한가?).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사랑은 욕망에서 해방된, 아니 욕망을 초과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정치적 교훈’은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상적 저속함의 십자가에서 숭고함의 장미를 알아본다’는 이런 자세가 갖는 정치적 교훈(혹은 차라리 함축)은 기존 현실을 신비화하는, 그것에 가짜 색깔을 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숭고한(유토피아적) 전망을 힘껏 일상적 실천으로 번역해내는 일, 요컨대 유토피아를 힘껏 실천하는 일이다.” 마치 무슨 강령이나 구호처럼 돼 있어서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유토피아적 전망과 일상적 실천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지젝의 결론을 우리의 문맥에서 조금 일상적인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일상적인 ‘비속한’ 한국 여자들에게서 ‘숭고한’ 러시아 여자들을 알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갖는 일상-정치적 교훈은 기존의 한국 여성들을 (러시아 여성들처럼) 신비화하는, 그것에 분칠하고 떡칠하는 일이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이다(*이 통신문의 원제목은 '크레믈린-보드카-러시아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러시아 여성의 이미지(=비전)를 힘껏 한국 여성의 일상으로 번역해내는(=옮겨오는) 일, 요컨대 이상적 여성이란 유토피아를 먼 나라에서 구할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힘껏 찾아보는 일이다. 너무 가깝다고 주저하지 말고 말이다…”

04. 09. 23./ 06.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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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요, 감사~^^

기인 2006-06-1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로쟈님도 월드컵 보시나요? ㅎㅎ 저는 기분이 야릇해서 잘 못 보겠습니다 ^^;

로쟈 2006-06-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에 한 경기 정도는 보게되네요. 오늘밤엔 스페인과 우크라이나 전 같은. TV에서 다른 거 하지도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