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자 한겨레 북리뷰를 인터넷에서 미리 훑어보다가 '한국의 책쟁이들' 시리즈에서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편을 읽었다. 이 연재물을 즐겨 읽지만 유독 이 글만을 옮겨올 생각을 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띄어서이고 또 그가 현재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중이라는 소식이 반가워서이다. 이만한 저술가/책쟁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역정'을 잠시 따라가본다.

한겨레(06. 08. 11) “나 자신이 미디어라고 생각해요”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이게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도 더 배울 점이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인문학의 다른 분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글 구본준 기자)

06. 08. 11.

P.S. 따져보니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책은 <미술로 보는 20세기> 한권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 미술관 소개를 나는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한다(사진은 트레챠코프 미술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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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덕분에 좋은 정보 얻었습니다. 아직 본 책이 없는데 챙겨 봐야겠어요. 몹시 궁금해집니다. ^^
헉, 지금 클릭해 보니 50일 간의---는 절판이네요ㅠ.ㅠ

로쟈 2006-08-1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를 2005년판으로 바꾸었습니다. 절판되지 않았으니까 걱정마시길.^^

마노아 2006-08-11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다행이에요^^

바람돌이 2006-08-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은 제게 각별한 책입니다. 이후 이주헌씨의 팬이 되었다죠. 이주헌씨의 책은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던 것이 <미술로 보는 20세기>였어요. 근데 누가 가져가서 안돌려주네요. 누군지가 기억에 안나니.... ㅠ.ㅠ 하마 돌아올까 기다리는데 목만 빠지고 있어요. ^^

로쟈 2006-08-11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도 모르신다면, 보시하신 셈 쳐야 하지 않을까요?^^

chika 2006-08-1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몰래...로쟈님 글 읽고 퍼가고 했었는데요...추천이 없어서 문득 댓글 남기고 싶어졌어요. 다른땐 추천이 많더니...^^;;; (저도 이주헌님 책 많이 갖고 있거든요.ㅋ)

해적오리 2006-08-1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치카언니가 퍼간글보고 왔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전 아직 이주헌님 책을 한권도 보지 못했는데 ;;; 이 페이퍼 읽다보니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저도 퍼갈께요.. 참 추천도요..^^

로쟈 2006-08-1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사실 퍼온 글로 추천받으면 머쓱하긴 합니다.^^

해콩 2006-08-1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펌~ 감솸~
 

퇴근길에 사든 문화일보에서 이번주에 나온 김영하의 신작소설과 지난주에 나온 김인숙의 신작소설 리뷰를 읽었다. '위기의 한국소설'을 구원해줄 '스타작가들'? 내막을 조금 따라가본다. 개별 소설에 대한 리뷰 기사 두 편도 같이 옮겨다 놓는다.  

문화일보(06. 08. 10) ‘위기의 한국소설’ 구원투수?

-김영하(38·), 김인숙(43)씨.각종 문학상을 받으며 문학계 내부에서 인정을 받고, 또 대중에 게도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작가들이다(*다섯 살의 나이 차이를 갖고 있지만 63년생 작가군의 한 명으로 '80년대 작가'인 김인숙과 '90년대 대표작가' 김영하는 문학적으로 한 세대의 격차를 갖는다. 그 차이가 두 작품에도 각인돼 있지 않을까 싶다). 386세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한국 현대사의 풍경 속 에 개인의 쓸쓸하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진 장편 소설을 잇달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9일 출간된 김영하씨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발행)은 남파간 첩을 주인공으로 분단상황에 쫓기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앞서 나온 김인숙씨의 <봉지>(문학사 상사)는 한 시골소녀가 민주화과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성장하 는 이야기다. 당대의 시대상을 담고 있으나 사회, 역사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흔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탄탄한 서사구조와 더불어 힘있는 문체로 독자를 흡인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문학계는 각기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두 작가의 신작 장편이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국내소설판에 독자를 끌어오는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빛의 제국’의 풍경 =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따 왔다. 하늘은 청명한데 땅은 어두운 그림의 풍경이 소설 전체에 배경으로 깔린다. 20여년간이나 남쪽에 적응해 살고 있던 김기영은 어느날 24시간 후 귀환하라는 평양의 명령을 받고 고민에 휩싸인다. 1963년 평양 태생인 그는 67년생으로 둔갑,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졸업 후 영화수입업자로 일해왔다. 운동권 후배와 결혼해 딸을 둔 기영은 95년에 그를 남파한 북쪽 담당자가 실각함으로써 ‘잊어진 스파이’가 됐다.

-“처음엔 주인공 기영의 시점으로만 글을 썼다가 없애버리고, 주요 인물마다의 시점으로 다시 썼어요. 8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를 입체적으로 그려가는 데 필요해서였지요.” 작가의 의도대로 등장 인물 하나하나의 가족사가 현대사의 골짜 기를 이룬다. 이 골짜기에서 어떻게든 살아 온 인물들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이다.

-대학시절엔 임수경을 질투하며 평양에 가고 싶어 안달했던 기영의 아내 장마리는 스무 살이나 어린 대학생들과 섹스놀이를 즐기고(*얼마만큼 리얼리티가 있는 설정일까?), 기영의 뒤를 주도면밀하게 뒤쫓아온 남쪽 정보기관원 박철수는 실향민인 할아버지와 코미디언인 아버지의 삶을 애틋하게 반추한다. 이들의 모순된 모습에 당혹해하면서도 끝내 애정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의 밀도 있는 묘사력 때문이다.

◆‘봉지’의 과거와 미래 = 1970, 80년대를 건넌 청춘들에 대한 회상록이다(*김인숙의 데뷔작이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였던가?). 제목은 주인공 봉희가 어린 시절에 패싸움을 하는 오빠를 부르러 싸움판에 들어갔다가 자전거 체인에 맞아 이마가 비닐봉지처럼 찢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을 옮긴 것. 봉지는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매사에 당당해서 친구인 순미, 영주, 가현의 부러움을 산다.

-봉지는 어느날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진영을 보고 사랑을 품게 되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진영에게 시골 소녀의 풋사랑은 대수롭지 않은 일. 봉지는 서울의 한 간호전문 대에 입학, 진영의 학교로 그를 찾아가지만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거리가 있다. 봉지는 어느날 당국의 수배에 쫓기는 진영을 숨겨줬다가 어딘가로 연행돼 고문을 받는다.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과거로 여행하는 일은 봉지에게 추억을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지우기에 가깝다. ‘찢어진 봉지’와 같은 삶을 어느 누군들 껴안고 미래로 가고 싶을까.

-이 작품은 작가 김씨가 1983년 등단 이후 줄기차게 성찰해 온 시대적 고민을 좀 더 개인사 쪽으로 내면화한 느낌을 준다. 중년에 이른 봉지의 독백은 참혹한 세월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과거에 담담하게 악수를 건넨다. ‘지나온 생을 견딘 힘만으 로도 남은 생은 괜찮은 법이다.’(장재선 기자)

서울신문(06. 08. 11) 남북 분단 그린 장편 ‘빛의 제국’ 펴낸 김영하

-소설가 김영하(38)가 장편 <빛의 제국>(문학동네)을 냈다.2004년 한해에 이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독식하며 문단의 스타로 떠올랐던 그가 <검은 꽃>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다. 흡혈귀, 자살안내인 같은 비일상적인 설정에서 멕시코 이민사의 거대 서사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전복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적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온 작가는 이번에도 내용과 형식 모두 기존 소설과 차별되는 실험적 작품을 내놓았다.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으로 20년을 살아오다 갑작스럽게 북으로의 귀환 명령을 받은 40대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김기영은 엘리트 출신 공작원을 남한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시켜 학생운동을 주도하려는 당의 계획에 따라 스물두살이던 1984년 서울로 남파된다. 대학 졸업 후 영화수입업을 하며 임무를 수행하던 김기영은 1995년 북측의 책임자가 실각하면서 잊혀진 스파이가 되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소설은 김기영이 귀환 명령을 받은 그날 오전 7시부터 다음날 같은 시간까지 단 하루 동안 김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 딸 현미에게 일어난 일상을 긴박하게 엮어나간다.

-생의 절반은 북한에서, 나머지 절반은 남한에서 지낸 한 남자의 삶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조명하는 소설의 구조는 최인훈의 <광장>과 닮아 있다.“처음부터 <광장>을 염두에 뒀다.”는 작가는 “1980년대 이후 달라진 남북의 변화상을 통해 ‘광장’이 지닌 시대적 한계들을 돌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말하자면 김영하 버전의 <광장>,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광장>쯤 되겠다). 노동당원인 김기영이 대학 운동권서클에서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비극적 아이러니는 <빛의 제국>이 <광장>과 결별하는 지점이다.

-스파이가 주인공이지만 30·40대 남성들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보편적인 이야기로도 읽힌다(*나도 때론 내가 고정간첩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작가는 “과거를 잊고 평범한 일상을 지내다 하루아침에 소환명령을 받는 주인공은 언제든 세상으로부터 해고를 당할 수 있는 이 시대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어느 한순간 중심을 잃어버린 채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추락하는 것이다.

-<빛의 제국>은 계간 ‘문학동네’에 지난해 가을호까지 4차례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만 제외하고 시점이나 구성을 완전히 바꿔 새로 썼다. 지난 겨울부터 칩거하면서 몸무게가 10㎏이나 빠질 정도로 작품에 열중했다.“착상이나 진행방향 등에 자신이 있었고, 쓰여져야 할 책이라는 확신도 컸다.”는 그는 “지금까지 작가로서 쌓아온 모든 역량을 총체적으로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작가 김영하의 모든 것이 담긴 야심작이라는 얘기다.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설은 속도감 있고, 재밌게 잘 읽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희미해진다. 작가는 “다시 쓰여진 <광장>처럼 보이나 뒤로 갈수록 그 의미가 사라지도록 했다. 독자가 책을 읽은 뒤 안개 숲속을 즐겁게 헤맸다는 느낌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국 작가인 그의 신작은 벌써 해외 에이전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영문 시놉시스만 보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먼저 출간 제의를 해올 정도. 작가는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빛의 제국> 해외 출간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이순녀 기자)

국민일보(06. 08. 07) “찢어진 비닐봉지 같은 성장기”

-소설가 김인숙(43)은 요즘 중국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다. 유학간 딸을 돌보기 위해서지만, 밥짓는 냄새나 오폐수 냄새가 진동하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걷다보면 흘러간 시간들이 발에 툭툭 채인다. “어쩌다보니 중국에 살게 되었지만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는 반짝이는 목적 의식 같은 거는 없어요.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 무대를 옮겨서 살아보는 것이 나쁜 경험은 아닌 거 같아요. 자극도 되고요.”

-그의 새 장편소설 <봉지>(문학사상사)는 베이징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써내려간 소설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처럼 찢어지거나 채워지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한 여자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본명은 김봉희로 별명은 봉지. 17세 여학생때 봉희가 오빠의 싸움을 말리려다 자전거 체인에 이마를 맞아 열두 바늘이나 꿰매야 했던 일을 겪고나서 친구가 붙여준 별명이다.

-“봉지의 머리에는 구멍이 뚫여버렸다. 그녀의 생각,자신이 젖은 창호지에 뚫린 구멍 같다고 여겼던 상상은 그녀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던 자전거 체인을 비키지 못한 순간에 현실이 되어 버렸다. 미세한 바늘이 촘촘히 기울 수 있었던 것은 찢어진 살뿐이었다. 구멍은 그대로 남았다.”(33쪽)

-봉희의 이마에 난 구멍은 일종의 성장통을 뜻하는데 소설은 봉희가 14년 전에 쓴 ‘김봉지의 자전소설’을 풀어놓는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제재소집 날나리 친구 순미,읍내에서 제일가던 여자 깡패 가현,봉희가 좋아하는 운동권 대학생 진영,봉희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동창 수호 등이 등장한다. 왜 이 소설을 썼는지, 로밍 서비스로 중계되는 국제전화를 통해 물었다. “바로 내 세대의 이야기지요. 참 오래전에 지나버린 시대같은데 내 안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들이 있지요. 무엇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오늘의 나를 이루었을까. 내 안의 그 시대, 내 안의 그들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등장인물들은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회 혼란과 혼돈을 통과한다. YH사건, 부마항쟁, 12·12쿠데타, 광주사태, 학내 프락치 사건, 통금해제,프로야구 출범…. 봉지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을 때 바깥 세계 역시 거대한 구멍과 균열의 가운데에 있었다. 혼돈의 시대를 통과한 그들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순미는 화려한 삶을 꿈꾸며 술집에 나가는 여대생이 됐고, 23세에 미혼모가 된 가현은 미용사로 성공했으며 간호사로 일하던 봉희는 병원에서 만난 약사와 결혼한다. 진영은 감옥에서 나온 후 유학을 갔다가 소설가가 되었고 수호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한다.

-꿈은 작아지고 스러지지만 작가는 “작아지고 스러져가고 어긋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얘기한다. “몸속에 든 것이라고는 텅 빈 바람밖에 없던 비닐 봉지. 그 찢긴 봉지에 무엇이 담길 수 있었을까. 유년의 순진했던 기억들이 찢어진 자리로 흘러나간 후,봉지는 그 찢긴 자리 때문에 다시는 완전히 부풀어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의 비어있는 자리로부터 살아 있는 소리를 낸다.”(149쪽)

 

 

 



-소설은 쓸쓸한 삶의 풍경, 여전히 텅빈 봉지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숱한 상처를 지나왔지만 그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 영광이 스며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그 안에는 존재에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나름대로 절절했던 ‘완전한 순간’이 들어 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이 삶을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놓는 삶의 불가해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녀는 다시는 그러한 순간을 갖지 못하리라는 것, 어떤 남자를 만나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그런 순간의 느낌을 다시는 갖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과는 다른 것, 말하자면 완전한 순간인 것이다.”(314쪽)(정철훈 전문기자)

06.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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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1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8-1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정신분석쪽에 관심을 갖고 계신 듯하네요.^^ 그 방면의 분석을 언제 한번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장마리의 변태섹스행각'에 관해서 제가 궁금한 건 '장마리'가 아니라 작가의 생각입니다. 그런 인물설정이 가능하다고/필요하다고 본...

2006-08-13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8-13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 관심이 조만간 멋진 비평문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복날이었지만 딸아이의 생일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바쁜 하루였다. 실상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케익까지 먹는 '장정'이었을 뿐 따지고 보면 한 일도 없지만(생일카드를 늦게 주었다는 이유로 딸아이한테 반성하라는 경고를 먹었다. 물론 생일선물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 있다는 부담감과 무더위 때문에 더욱 피로한 하루이기도 했다. 아이가 그래도 '즐거운 하루'였다면 잠자리에 드니까 막판에 면피는 했구나란 안도감이 든다. 그나마 다행이다.

잠시 짬을 내 '고상한' 학술기사들을 찾아보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없다(이런 복더위에 무슨 공부를 하랴!). 대신에 가짜 명품 사기 사건으로 사회란이 도배돼 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코믹하고 또 '예술적'이어서 몇 마디 참견을 한다. 먼저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하는 동아일보의 기사부터 시작해보자(요 며칠 새 유행어가 된 '된장녀'도 그렇지만 이 '빈센트' 시계 건도 석사논문감은 된다. 학술은 딴동네에 있지 않다).

동아일보(06. 08. 09) “다이애나 비도 차던 시계래” 연예인도 부유층도 홀렸다

-“일본에서 스위스산(産) ‘빈센트 앤드 코(Vincent & co)’ 시계를 봤는데 한국에서 파는 곳이 어디예요?” 최근 국내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 코너에 올라온 질문이다. 질문 아래에는 ‘고가의 제품으로 한국에도 곧 수입된다’는 내용과 함께 매장의 위치를 소개한 답글이 달렸다. 하지만 이 질문과 답변은 모두 연예인과 부유층을 상대로 가짜 명품 시계를 팔다 사기 혐의로 검거된 일당이 올린 것. 실제 스위스에는 ‘빈센트 앤드 코’란 상표의 시계가 없다.

-이모(42) 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에 각각 시계유통업체 사무실과 40여 평 규모의 매장을 차렸다(*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서울 강남에서 벌어지는 각종 파티에 참석하면서 연예계 등 각계에 인맥을 쌓았다고 하는 이 이모씨가 청담동 일대에선 '필립'으로 통했다고. 이름하여 '청담동 필립' 되시겠다). 이 씨는 이곳에서 한국과 중국제 부품으로 만든 저가 시계를 100년 전통의 스위스산 명품 시계로 둔갑시켜 판매했다(*이 정도면 거의 '신지식인' 아닌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세계 인구의 단 1%만 착용할 수 있는 시계’라는 그럴듯한 허위 광고에 허영심 많은 일부 연예인과 부유층은 매료됐다. 이 씨는 지난달 초 청담동의 한 바를 빌려 부유층과 연예인을 초청해 호화 제품 소개회를 열기도 했다. 또 이 시계를 유명 MC와 탤런트 등 8명에게 무상으로 나눠 줘 홍보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씨는 부유층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계 부품을 스위스 현지로 가져가 조립한 뒤 완제품 형태로 국내로 다시 들여와 정상적인 수입신고필증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원가 6만 원짜리 시계가 580만 원짜리로 부풀려졌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이만한 고부가가치 산업이 많지 않을 듯싶다. 일부 부유층 명품족들을 상대로 한 이 사기극이 서민경제에 특별히 피해를 주었을 리도 만무한데 이러한 '재능'이 감옥에서 썩는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 가령 비상한 두뇌의 해커들을 생각해보라. '뛰어난 재능'은 활용될 필요가 있다).

-200여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를 박은 원가 300만 원짜리 시계에는 무려 9750만 원의 가격표를 붙였다(*당연한 말이지만 원가 300만원을 붙였다면 그만큼 주목받지도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품질'이 아니라 가격 아닌가?). 이 씨는 32명에게 35개의 시계를 팔아 4억4600만 원의 판매 수익을 올렸다. 한 부유층은 원가 150만 원짜리 시계를 6750만 원에 사갔고 연예인 5명도 이 씨의 고객이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선 이 시계가 ‘행운의 시계’로 불리며 선물용으로 인기를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8일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이 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또 시계를 만든 박모(41) 씨는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이들은 국내 판매권을 넘기겠다고 속여 4명에게서 15억6700만 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최근 검증되지 않은 수입 귀금속이 명품으로 팔려 나가는 사례가 많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임우선 기자)

=사건의 전말에 대한 좀더 심층적인 분석 기사를 읽어본다. 이 동네는 조선일보가 좀 잘 아는 모양이다.

조선일보(06. 08. 09) 연예인도 부자도 ‘가짜’에 홀렸다

-‘세계 1% 명품’이라는 광고에 우리 사회 부유층이 넘어갔다. 중국산 부품으로 국내에서 조립한 싸구려 시계지만, ‘스위스산(産) 시계명품’이라고 포장하자, 강남 일대의 부유층과 유명 연예인들이 달려들었다. 원가 10만원도 채 안 되는 시계가 수천만원에 팔려나갔고, 유명 백화점이 특별전을 열어 ‘명품족(族)’을 꾀었다.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일부 계층의 허영심을 파고 든 ‘대(大) 사기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것이다.

◆싸구려 시계의 둔갑
-미국 영주권자인 이모(42)씨(*역시 미국산 사기가 스케일이 다르다). 그의 명품시계 사기극은 2000년 ‘빈센트 앤 코(Vincent & Co)라는 시계 브랜드를 만들면서 수년의 준비를 거쳐 치밀하게 추진됐다. 스위스와 우리나라에 법인 및 상표등록을 한 뒤,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는 중국에서 시곗줄과 연결고리를 들여왔다. 여기에 시침, 분침, 외장케이스 등 값싼 국내부품을 경기도 시흥의 제조업체에서 결합했다. 원가 8만~20만원.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워낙 고가품이라 강남의 일부 고객들이 ‘스위스 직수입’인지 확인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시계를 분리해 스위스로 가져간 뒤 현지에서 다시 조립해 정상적인 통관절차를 거쳐 수입신고필증을 받아냈다. 그렇게 수입신고필증까지 얻고 나니 장애물이 싹 걷혔다. 을지로 주변 인쇄소도 동원했다. 가짜 품질보증서를 만들어 붙여 구석구석 명품의 흉내를 냈다.

 

◆화려한 마케팅
-이씨는 철저하게 강남 일대 부유층을 겨냥한 마케팅에 나섰다. 명품 패션잡지와 TV, 인터넷 등에 ‘100년 동안 영국 등 유럽 왕실에서만 판매되던 스위스 명품 시계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다이애나비, 그레이스 켈리, 한국 유명 여배우 등이 차는 바로 그 시계’라며 허영심을 자극했다. 또 소수 부유층과 유명 연예인들을 불러 모아 청담동의 클럽에서 호화 런칭쇼(제품 출시를 앞두고 제품을 소개하는 패션쇼)를 열고,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VVIP(초우량고객)들만 초청해 특별전까지 가졌다. 지난 5월엔 압구정 로데오 거리 근처에 40평 규모의 매장도 열었다.

-연예인들에게 시계를 공짜로 제공한 뒤 사진을 찍어 잡지 등에 홍보하는가 하면, 유명 미용실 관계자들에게 홍보용 시계를 제공했다. 입소문이 나도록 ‘협찬 마케팅’도 빠뜨리지 않았다. 포털사이트의 댓글도 활용했다. 이씨는 직접 “일본에서 이 시계를 봤는데 국내 매장이 어디죠?”라고 질문을 올린 뒤, 마치 다른 사람이 답하는 것처럼 댓글로 매장 위치와 제품정보를 올렸다.

◆연예인·재벌2세·정치인 아내 등 미끼 물어
-이씨의 명품 마케팅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580만원’ 가격표를 붙여놓은 골프 시계가 연예인, 재벌 2세, 정치인 아내 등에게 인기 좋게 팔렸다.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시계는 9750만원에 팔렸다. 모 유명 여자 연예인의 경우, 원가 20만원의 제품을 500만원대에 구입했다. 연예인 5명이 직접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고, 홍보용으로 협찬·대여받은 연예인을 합치면 13~14명에 이른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이 시계는 ‘행운의 시계’로 통했다. 여기에 재벌 2세와 정치인 아내도 ‘가짜 명품’ 구매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은 모두 30여명이 ‘빈센트 & 코’ 시계를 샀다고 확인했다. 경찰은 “시계 구입자 명단은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시계 판매로만 4억5000만원, 대리점 운영 희망자들로부터 받은 보증금까지 합치면 23억원을 벌어들였다(*투자비용을 고려하면 생각만큼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는 아니었군).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며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던 이씨는 “연예가, 방송가 주변에 값비싼 시계가 공짜로 돌고 있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 결국 덜미가 잡혔다.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8일 사기 혐의로 이씨를 구속하고 제조업자 박모(41)씨를 불구속 입건했다.(최규민 기자)

=그래도 역시 최강의 분석기사는 중앙일보의 것이다(기자들이 '특종'을 다루듯이 여럿 움직이는군). 다른 기사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지만 그대로 옮겨온다.

중앙일보(06. 08. 09) 강남 파고든 '허영 마케팅'

#1 올 6월 1일 서울 강남 청담동에 있는 T바. T바에선 유명 명품의 런칭(판촉) 행사가 자주 열린다. E.L씨 등 유명 연예인들이 눈에 띄었다. 각계의 저명인사도 있었다. 무려 400여 명이 참석했다. '빈센트 앤 코(Vincent & Co)' 시계의 한 모델인 '어반 토네이도 라인' 국내 런칭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뱀 가죽 시계줄을 사용한 이 제품 소개를 위해 온몸에 보디 페인팅을 한 러시아 무희들과 살아있는 뱀 여러 마리가 동원됐다(*러시아는 여기서도 제몫을 다하는군. 그런데, 이 컨셉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가져온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필립은 자신의 사기술이 갖는 존재론적 함축까지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행사장 여기저기엔 제품 부스가 차려졌고 2층 쇼룸엔 빈센트 시계의 모든 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값은 비싼데 디자인이 좀…." 행사장 구석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호화로운 분위기에 묻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날 행사 비용만 1억3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 7월 초 강남의 한 유명 백화점 상설 전시장.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다이애나비, 모나코 그레이스 켈리 왕비 등만이 산 제품"이라는 광고문구가 나 붙었다. 빈센트 앤 코 전시행사였다. 이날은 판매는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나던 백화점 고객들은 두 번 놀라야 했다. 백화점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던 명품 시계를 전시한다는 것에 놀랐고, 가격에 또 놀랐다. 시계의 가격은 수백만원에서 1억원에 육박하는 것도 있었다. 유명 백화점에서 가짜를 전시할 것이란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미국 영주권자이자 빈센트 앤 코 대표 이모(42)씨는 이런 방법으로 중국산 부품으로 만든 손목시계를 스위스 최고급 명품으로 속여 강남 부유층과 연예인을 공략했다. 이씨는 원가 8만원짜리를 580만원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300만원짜리 시계를 9750만원에 팔았다고 한다.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는 8일 가짜 명품 시계를 스위스산 최고급 명품으로 속여 판매한 혐의(사기)로 이씨를 구속했다. 이씨에게 시계를 납품한 N사 대표 박모(41)씨도 불구속 입건했다.

◆ '국적세탁' 수법 동원=경찰에 따르면 가짜 명품 시계는 경기도 시흥의 N사에서 중국산 부품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2005년 3월부터 최근까지 유명 연예인과 강남 부유층 인사들을 상대로 7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이씨는 총판 운영권을 준다며 박모(46)씨 등 4명에게서 15억6700만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고 있다.

-이씨는 2000년부터 가짜 명품시계를 국내에 팔 계획을 세웠다. 스위스와 한국에 '빈센트 앤 코'라는 법인과 상표를 등록했다.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에 각각 사무실과 매장도 열었다. 올 2월에는 홍콩에 유령회사를 차렸다. 이로써 스위스에 본사가 있고 국내에서 수입하는 형식을 갖추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백화점 행사 땐 진가를 발휘한다. 전시행사를 했던 백화점 관계자는 "보통 명품 브랜드나 신규 브랜드 초청 전시회를 할 때 담당자가 검사하는 수입 면장과 본사 확인서 등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 인터넷에 자문자답(自問自答) 홍보도=준비를 마친 이씨는 고객 확보에 나섰다. 우선 강남에서 잘나가는 고급 미용실을 공략했다. 원장에게 시계를 뿌렸다. 미용실에 다니는 연예인과 부유층도 주요 목표였다. 이들에게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며 구매 대기자 명단까지 보여줬다. '행운의 시계'란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한 미용실 관계자는 "이씨가 재벌회장 누구를 안다며 친분을 과시해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고객이 '수입신고필증'을 요구하면 국내에서 부품을 갖고 스위스에서 들어가 조립한 뒤 정상 수입절차를 거치는 '국적세탁' 수법까지 동원했다. 또 인쇄소에서 품질보증서를 가짜로 만들어 붙였다.

-이씨는 언론을 이용해 가짜 명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도 신경 썼다. 명품을 다루는 잡지에는 여러 차례 광고를 실었다. 올 들어서는 주요 일간지도 접촉했다. 홍보대행사를 통해 접촉한 언론 중 일부는 이씨의 뜻대로 움직여 줬다. 6월에 한 경제지에는 '빈센트시계 한국 매장 오픈'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인터넷 포털에는 댓글을 올려 이씨 스스로 자가발전을 했다. 그는 포털사이트에 "일본에서 이 시계 봤는데 국내 매장이 어디죠"라는 질문을 올린 뒤 댓글을 올려 매장의 위치와 제품정보를 알려줬다.(이철재.문병주.조도연 기자)

-강남 명품족의 심리를 이용한 이씨의 수법은 인맥 관리에서 또 한번 진가를 발휘한다. 청담동에 있는 매장의 총판을 맡은 회사의 대표는 현재 국내에서 잘나가는 진짜 명품의 마케팅 책임자의 친오빠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입수한 이씨의 장부에는 구매자로 여당 중진 의원의 부인과 모 재벌 그룹 고위경영자의 부인이 포함돼 있었다. 또 여자 탤런트 C씨, 남자 탤런트 L씨 등 10여 명의 유명 남녀 연예인들이 이 업체의 사기에 속아 시계를 구입하거나 협찬품으로 받았다. 이들은 경찰에서 "명품으로 소장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빈센트 앤 코' 가짜 명품 시계 사건은 청담동으로 대표되는 명품 소비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서울대 여정성(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부(富)의 상징, 즉 다른 사람보다 내가 많이 가졌다는 걸 드러내는 기호로 이른바 명품이 등장했다"며 "이번 사건은 명품으로 치장하려는 허영 심리를 교묘히 활용한 것으로 천민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패션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명품과 유행을 좇는 일부 계층의 심리를 파고든 사례로 분석한다. 패션 마케팅 관계자는 "비싸고 희소가치가 있는 명품이라고 선전하면 그것을 사는 것이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며 "(이번 사건은) 그런 바람 같은 사람을 공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센트 앤 코가 유럽에서도 상위 1%만 아는 브랜드라며 '한정판(리미티드 에디션)'을 판다고 내세운 것도 이런 심리를 역이용한 것이다.

-연예인과 패션계의 일그러진 공생관계도 확인됐다. 소위 명품 브랜드나 신규 브랜드의 런칭 행사 때 연예인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연예인을 동원하지 않으면 명품의 소비계층인 부유층을 유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에 동원되는 연예인은 급수에 따라 행사에 소개되는 200만~500만원가량의 물품을 받는다. 연예인들은 물건을 받는 것 외에 명품 브랜드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행사에 참여한 것을 홍보에 이용한다.(조도연 기자)

 

 

 

 

학술적으로 정리를 해보자면, 먼저 이 사건은 '세계 1% 명품'이라는 사기홍보에 넘어간 자칭 '대한민국 1%'의 부유층, 곧 유한계급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우물이있는집, 2005)을 막바로 떠올리게 한다. 베블런은 "자본가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은 일치하며, 경쟁체계는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고전경제학의 주요 명제를 반박하며, 당대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명예'와 '과시성'이 갖는 계급적 의미를 논리적으로 드러냈다." '과시적 소비' 와 '과시적 여가'라는 말의 저작권자가 바로 베블런인바, 이번 사기 사건은 '과시적 소비'의 흔한(하지만 빼어난) 사례로 분류될 수 있다(그러니까 '연습문제' 정도는 되겠다). 또한 베블렌 이론의 사회학적 영감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부르디외의 '취향의 사회학' 혹은 '사회학적 판단력 비판'은 사회계급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조명할 수 있는 틀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두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도 오히려 그 기호적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보드리야르의 통찰이다. 게다가 그는 현대사회에서 TV 등 영상산업,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현실을 모사한 것들이나 이미지들 즉 ‘시뮬라크르’가 오히려 거꾸로 현실이나 실재를 지배한다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제창하는 바, 진짜보다는 가짜/짜가가 판을 치는 요지경 포스트모던 사회의 실상을 예리하게 해명한다(비록 별다른 대안을 제사하지 않아서 패배주의적이란 비난을 무릅쓰고는 있지만). 겉보기에 '명품'이고 남들이 명품이라 하면 그게 또 명품인 것, 그게 시뮬라시옹의 세계 아닌가?

 

 

 

 

세번째는 그러한 과시적 소비와 과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극대화되는 모방욕망이다. 이 경우는 명품 그 자체보다도 짝퉁 명품의 소비 현상을 설명하는 데 보다 유용하다. 이번 케이스는 짝퉁을 명품으로 오인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지만 짝퉁인 줄 알면서도 명품유사품으로서 그 효과를 발휘하는 짝퉁에 대한 선호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제대로 알고 구입하느냐 모르고 구입하느냐의 차이가 여기엔 걸려있는 듯하지만, 실상한 동일한 현상의 이면이다. 어떤이의 소비가 그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그리고 상위 1%의 소비를 모방함으로써 자신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욕망. 그러한 욕망의 발생과정(스캔들)에 대한 면밀한 해명은 지라르 이론의 특장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의 실제적 사례 아니었을까? "우리는 '명품 시계'가 벼락처럼 강남 명품족을 강타하는 것을 본다." 

 

 

 

 

네번째는 사건의 주모자인 '청담동 필립'의 절묘한 사기술이 경탄을 유발한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는 대한민국 1%의 소비심리와 그 구조적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었고 이를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이를 테면 명품시장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한 공로가 그에겐 있다. 핵심은 언론과 연예인, 그리고 인맥을 이용하라, 이고,  이아무개가 아닌 '필립'으로 행세하라, 이다. 스위스 현지에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법인등록을 했다는 게 이 '필립'의 '플러스 알파'가 되시겠다. 신형 사기술의 귀감으로서 그의 사기술은 '합법성'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재음미될 가치가 있다(사실 그가 판 것은 '명품'이라기보다는 '명품효과'이다. 명품의 진품성이란 건 그 효과가 한 가지 지탱요소일 뿐 본질적인 건 아니다. 그는 적어도 적발되기 전까지는 '진짜' 명품-효과를 판매했다!).

이 모든 문제성과 함께 내게 떠오른 것은 러시아 작가 고골(1809-1852)의 <죽은 혼>(1842)이다('죽은 혼'은 러시아어로 '죽은 농노'를 뜻한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주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은 농노들을 장부상으로 사들인 다음 그걸 담보로(장부상으론 많은 농노를 거느린 대지주가 된다) 거액의 대출을 받으려고 한 희대의 사기꾼 치치코프의 행각을 통해서 당대의 비틀린 러시아 사회를 실감나게 묘사/풍자하고 있는 소설, 아니 '서사시'가 <죽은 혼>이다(국내에 아직 정본 번역이 안 나와 있다는 것은 유감스럽다. 참고로 3부작으로 기획됐던 이 소설의 1부만이 완성되었고 단테의 <연옥>과 <천국>에 해당하는 2, 3부를 마저 완성시키지 못하는 자괴감에 고골은 괴로워하다가 굶어죽는다. '속물' 묘사에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선한 인간은 그려낼 수 없었다).

차이라면 치치코프가 '죽은 혼'들을 거래했던 반면에 명품 시계 사건에서는 '죽은 혼'들이 거래의 당사자라는 것. 지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낭만적 거짓'에 빠져있는 주인공들처럼. 혹은 사도 바울의 경고를 빌자면, "너희가 살아있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줄 아느냐?" 이때 필요한 것은,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공백으로서의 주체'를 메우기 위한, 이 경우엔 치장하기 위한 모든 명품-주체화로부터 탈피하는 것, 그러한 환상을 횡단하는 것이다. '신성한 광기'란 그러한 탈피/횡단의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우리가 주체화에 안주하게 될 때, 인조인간의 운명은 곧 우리 자신의 운명이기도 하다. 아래는 <블레이드 러너>에서의 인조인간 조라).

=이제 마무리를 지어보자. 한겨레의 사설과 조선일보의 '만물상' 칼럼을 옮겨온다.

한겨레(06. 08. 10) 허영이 부른 가짜 명품시계 사건

- 일부 부유층과 연예인들이 치밀한 사기꾼에게 호되게 당했다. 원가 8만~20만원짜리 시계를 최고 수천만원에 사서 차고 다녔다고 한다. 웬만한 직장인의 한 해 소득쯤 되는 액수를 시계 구입에 썼다는 것도 놀랍지만, ‘명품’에 눈이 멀어 어이없이 당했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서울 강남 등의 일부 부유층이 서양 부자들 흉내내는 ‘국제 감각’은 익혔어도, 가짜를 알아보는 안목까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내실은 없이 겉치레만 신경 쓰는 일부 계층의 행태를 상징하는 듯하다(*그러니까 '대한민국 1%'가 '세계 1%'가 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얘기이다. 벼락치기 교양의 한계인 것일까?).

-사기 수법은 더욱 혀를 내두르게 한다. 사기 유통업자는 삐뚤어진 부유층의 허점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유럽 왕족’을 내세운 점, 화려한 제품 발표회로 현혹한 점, 특권 의식을 한껏 부추기는 ‘초우량 고객 전용’ 마케팅 수법 등이 특히 그렇다. 마치 일부 부자들을 비웃어주기로 작심한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그런 의혹은 나도 갖게 된다). 치밀성도 놀라울 정도다. ‘스위스 직수입’을 확인시키려고 현지에 직접 법인까지 차리고 상표까지 등록했다고 한다. 한탕에 거액을 챙기려는 사기범들도 이젠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됐다.

-이번 사건은 돈이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은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요즘 날로 번져가는 ‘명품 집착증’의 밑바닥에는, 돈으로 치장해야 알아주고, 돈이 곧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사서 쓰는 상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소비 만능주의의 또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크게 한탕을 벌여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사기범 또한 물신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허영심과 돈을 최고로 여기는 한탕주의가 빚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중산층에까지 번지고 있는 고급 선호 현상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질이 좀 떨어져도 국산품을 쓰자는 주장이 먹혀들던 시절도 지났다. 소비자의 고급스런 안목이 국산품의 품질 향상을 자극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문제는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가 사회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이다. 분수에 맞지 않더라도 부유층을 흉내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과 이를 이용하는 상술이 진짜 걱정이다. 단순히 합리적인 소비만 강조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물질만능 풍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고민이 언제 끝나시는 건지 의문일 뿐더러 한겨레의 결론은 식상하게도 '물신만능주의'와 '한탕주의'에 대한 훈계로 마무리되고 있다. 아무런 사고도 자극하지 않는, 맥빠진. 과연 "분수에 맞지 않더라도 부유층을 흉내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문제인가? 그래서 분수를 지키자?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는 또 무엇인가? "분수를 모르는 일부 부유층"? 그러니가 부유하기는 한데 아직 세계 수준에는 미달인 졸부들? "문질만능풍조"에 대해서 고민하면, 무슨 정신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같은 검색어로 뜨긴 했지만) 조선일보 칼럼까지 읽게 된 건 한겨레의 칼럼이 너무 맹탕이어서였다.

 

 

 

 

조선일보(06. 08. 10) [만물상] 신종 명품 사기극

-16세기 로마의 조르조 추기경이 큰돈을 들여 ‘잠자는 큐피드’를 샀다. 고대 조각상이라 했다. 알고 보니 젊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이었다. “자네 작품을 땅에 묻었다가 고대 로마 작품이라고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받을 걸세.” 한 친구가 미켈란젤로를 꼬드겼다. 미켈란젤로는 큐피드상을 파묻었다가 친구에게 건넸다. 친구는 그걸 로마로 가져가 다시 땅 속에서 묵힌 뒤 추기경에게 팔았다.

▶르네상스시대 영국과 독일 귀족들이 자식들을 3~4년씩 파리와 이탈리아로 보내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다. 자식들은 세련된 문화인 행세를 하느라 비싼 예술품을 잔뜩 갖고 돌아왔다. 태반이 가짜였다. 예술품 위조의 맥은 1980년대 영국의 모작(模作) 거장 에릭 헵번에게 이어 왔다. 그는 “내가 500점 넘게 그린 가짜 그림 목록을 폭로하면 미술시장이 마비된다”고 했다. “내 그림이 대영박물관과 워싱턴 국립미술관에도 걸려 있다”고 비웃기도 했다.

▶예술품은 물론 약품부터 자동차까지 베끼지 못할 게 없는 세상이다. 세계 위조품시장은 10년 사이 17배나 팽창했다고 한다. 2003년 한 해에 4500억달러어치의 위조품이 세계를 휘저었다. 세계 무역의 6%에 이르는 덩치다. 하도 교묘하게 만들어서 진품 가게가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위조품들도 자꾸 늘어난다.

▶‘루이뷔통은 변호사 40명과 조사관 250명을 전 세계에 풀어 놓았다. 이들이 2003년에 덮친 위조 현장만 4200곳에 이른다. 그래 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된다. 명품 회사들은 때 되면 모여 머리를 맞대곤 하지만 밀려드는 위조의 해일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 세계적 ‘짝퉁 전쟁’에서도 보지 못한 신종 명품 사기극이 서울에서 벌어졌다. 연예인과 부유층이 원가 8만~20만원짜리 국산 시계를 스위스 명품으로 속아 수천만원까지 주고 샀다.

▶이 사기꾼은 명품을 위조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있지도 않은 브랜드를 하나 창조한 뒤 최고 명품이라고 거짓 선전했다. 중국 부품을 국내에서 조립한 시계를 스위스로 가져가 통관 서류까지 받아 되들여 왔다. 백화점에서 특별전까지 열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여왕의 시계’라는 말에 넘어갔다. ‘짝퉁’은 명품의 후광을 맛보려는 서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이번 사기극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허영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고소한 구석이 없지 않다.(주용중 논설위원)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이번 사기극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허영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고소한 구석이 없지 않다"는 것. 이게  "문제는 일부 부유층의 지나친 행태가 사회 전반에 끼치는 악영향이다"라는 한겨례의 판단보다 현실적이며 합리적이다. 몇 천만원짜리 시계도 차 본 사람이나 차며 부러워하는 사람이나 부러워한다. 돈이면 다 되는 사회라고 해서 다 죽은 혼들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06. 08. 09-10.

 

 

 

 

P.S. 이번 사건으로 챙기게 된 사실은 '명품'이란 표현 자체의 이데올로기이다. 중앙일보에서 정리해준 바에 따르면, "명품(名品)=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사치품'으로 불리다 1990년대부터 '명품'이란 단어로 대체됐다. 일반적으로 값이 비싸고, 역사가 깊고, 소량 생산되는 제품을 말한다." 진정한 사건은 '가짜 명품' 따위가 아니라, '사치품에서 명품으로의 이행'에 있었던 것이다. 아래는 그와 관련한 칼럼.

한국일보(06. 08. 16) 사치품과 명품

-인간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찾는 합리적 소비를 추구한다는 가정은 경제학을 떠받치는 기본 전제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감소한다는 것이 유명한 마샬의 수요법칙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비쌀수록 도리어 수요가 늘어나는 비합리적 소비행태가 버젓이 존재한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베블렌은 이를 사치적 소비를 통해 신분을 과시하려는 현상이라고 설명, ‘베블렌 효과’라는 용어를 낳았다. 비싸고 쓸모도 적은 은제품이 상류층의 식기로 널리 쓰이는 유일한 이유는 과시적 소비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싸구려 중국시계를 스위스 명품이라고 속여 수 천만원씩 받고 판 명품시계 사건은 베블렌 효과를 극적으로 활용한 사기 수법이다. 최근에는 180년 전통의 이탈리아 명품이라던 시계 역시 가짜라는 보도가 있어 경찰이 가짜 명품에 대한 전면 수사에 나섰다. 문제의 가짜 명품업체는 강남 한복판에 초호화 매장을 내고 유명 연예인을 개점행사에 대거 동원했는가 하면 유명 인사들에게 시계를 선물로 뿌리는 판촉전략을 썼다. 명품을 찾는 소비심리에는 천박한 과시욕과 함께 명품을 쓰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점을 간파한 상술이다.

-허황된 명품소비 심리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명품이란 말의 남용이다. 요즘 명품으로 통하는 제품들은 실은 사치품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대만 해도 이들 제품은 사치품이라고 불렸다. 영어로도 ‘값 비싸고 호화스럽다’는 의미의 럭셔리(Luxury) 제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들 사치품이 장인정신과 예술혼이 살아 있는 작품을 의미하는 명품으로 슬며시 간판이 바뀌었다. 사치라는 단어의 거부감을 없애고 예술작품이라도 소장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말장난이 절묘하다.

-과시적 소비는 베블렌이 19세기말 2차 산업혁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벼락부자들의 타락적 소비행태를 질타하면서 쓴 용어다. 당대에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 전통적 부자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돈을 물 쓰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소비행태의 이면에도 갑작스레 부를 얻은 졸부들의 과시욕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구두 굽이 닳는 것을 막기 위해 징을 박아가며 30년 동안 같은 구두를 사용한 것이 사후에 밝혀져 새삼 감동을 주었다. 진정한 부자의 소비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배정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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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이재현의 '가상 인터뷰'에서 프리모 레비 편을 옮겨온다. 이 연재에서는 이전에 <모크샤>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 편을 옮겨온 기억이 난다. 국내에는 직접적으로 소개된 바 없지만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나 증언자로서 가장 저명한 지식인 작가이다. 나도 사실 그의 책을 실제로 처음 본 건 모스크바의 구내 헌책방에서였는데, 영어본 몇 개가 꽂혀있었던 것. 나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건 그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최근에 레바논 사태와 관련하여 한번쯤 귀담아볼 만한 '인터뷰'이다.

 

한국일보(06. 08. 08)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며 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했던 유태계 이탈리아인. 자신이 태어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홀에서 투신 자살했다. 토리노에서 태어난 레비는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가 최초의 인종차별법을 공포해서 유태인들은 공립 학교에 다니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재학생들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졸업증서에는 ‘유태인’이라고 기재되었다. 졸업 후 제약 공장에 다니던 그는 반파시스트 저항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진다.



-독일의 패전 후 어렵게 복귀해서 도료 공장에 일자리를 구한 레비는 1946년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을 써서 이듬 해 출판한다. 1963년에도 수용소 체험 에세이집 ‘휴전’을 출판하고, 이어서 단편집 ‘자연스러운 이야기’(1967) ‘형식의 결함’(1971) ‘주기율표’(1975) ‘릴리트와 단편들’(1981), 시집 ‘브레마의 선술집’(1975) 및 노동자에 대한 민속지학적 이야기 책 ‘멍키 스패너’(1978), 에세이집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1986) 등의 작품을 출간해서 이탈리아 안팎에서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치가 그에게 문신했던 수인 번호 174517는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비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의 ‘공격적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 이에 ‘저항할 책임’을 주장했고, 또 디아스포라(이산)의 국제적 체험에 깃든 관용의 사상적 전통을 지켜내야 한다고 역설했다(*서경식 선생의 책들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주 참조된다. 아우슈비츠의 또다른 생존 체험기로는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책들이 있다. 물론 그 수용소장 <헤스의 고백록>도 참조가 되겠다).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던 이스라엘 국방장관 샤론이 다시 권력에 복귀했을 때에도 애써 낙관적으로 역사와 현실을 보려고 했던 레비가 끝내 자살을 하게 된 것은 다큐멘터리 ‘쇼아’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동으로 소위 ‘역사가 논쟁’이 독일에서 터진 탓이다. 1986년 독일의 우파 역사가들은 학문의 외피를 쓴 채 독일 파시즘의 불가피성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리모 레비는 40년에 걸친 자신의 증언에 대해 절망적으로 회의하게 되었다(*이러한 절망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함께 아직 현재진행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계속 살아 남아서 글로 증언하고 했던 정신적 계기는 바로 ‘기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의미’이며 ‘인간은 불행한 경험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의무’와 ‘그 경험을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그 자신이 믿어 왔는데, 그렇게 ‘증인의 의무를 갖고 지옥에서 나왔지만’ 이제 우파 역사가들의 뻔뻔스러운 역사 왜곡 앞에서는 ‘증언자로서 자신의 자격에 대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자살은 당시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재현(이하 현) 레비 선생님, 이스라엘의 광기가 너무 무섭습니다. 최근에는 민간인 마을을 폭격해서 수십 명을 학살했습니다. 여기에는 너덧 살 된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답니다. 3주 넘게 계속된 무차별 공격으로 숨진 레바논 측 민간인 사망자가 7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지난 7월말 현재 난민 숫자는 레바논에서만 68만 명이고 시리아, 요르단, 사이프러스 및 걸프 지역에도 22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프리모 레비(이하 레비) 살해된 민간인 다수는 피난민들이고 사망자 절반 가까이는 아이들이야. 공습으로 죽은 유엔 감시단원들은 이스라엘측이 고의적으로 정밀 폭격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 무너진 건물에 깔려 있는 시신을 포함하면 죽은 사람들 숫자는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을 게야.

현: 지금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거의 모든 곳을 아우슈비츠로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홀로코스트(대학살) 범죄자라고 하면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파시스트 도살자들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레바논 침공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이 홀로코스트의 범죄자들로 전락해 버린 셈입니다. 전세계에서 지탄을 하고 고발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민간인들을 대낮에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야만적 전쟁 범죄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란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과연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요?



레비: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되어버린다고 말이야.

현: 이스라엘은 이번 침공의 발단이 헤즈볼라에 의한 이스라엘 병사 2명의 납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레비: 우선 ‘납치’란 말이 잘못 된 거야. ‘납치’란 말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입장에서의 표현인 거고. 헤즈볼라 입장에서는 1982년 창설된 이래 이스라엘과 전쟁 중이니까 이스라엘 병사들은 엄연히 전쟁 포로인 거지(*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침공 자체는 정당화되는 것인가? 민간인 학살만이 문제될 뿐?). 그리고 원래 이번 사건은 지난 6월 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민저항위원회(PRC)의 지도자 아부 삼하다나 등 4명을 살해하고, 가자 지구 북부 해안을 폭격해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7명이 사망하고 30명 넘게 부상하게 된 사건이 발단이라네. 그 사건 이후 하마스는 2005년 2월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사이에 성립된 휴전의 무효를 선포하고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기 시작한 걸세. 헤즈볼라 측의 공세는 이 전투의 연장인 거야.

현: 헤즈볼라는 뭐고 하마스는 뭔가요?

레비: 헤즈볼라는 ‘신의 당’이란 뜻을 가진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주의 정치 조직인데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때 창설되었고, 1992년에 처음 의회에 진출해서 현재 전체 128석의 의회에서 14석을 차지한 합법 정당을 갖고 있기도 해. 물론 산하에는 무장 조직도 있고, 평소에 의료와 교육 등의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 운동’이란 뜻의 팔레스타인 수니파 이슬람주의 정치 조직인데 1987년의 제 1차 인디파타(봉기) 때 ‘무슬림 형제당’의 가자 지구 조직으로 출발했어. 2004년 3월에 하마스 지도자 야신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암살된 적이 있고, 올해 1월 총선에서 하마스가 압승해서 팔레스타인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지. 하마스가 집권하자마자 미국은 팔레스타인 원조를 끊어 버렸지.

현: 헤즈볼라와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공통점을 가졌군요. ‘무슬림 형제당’은 1928년과 1929년 사이에 이집트에서 창설된 최초의 ‘정치적 이슬람주의’ 조직이고,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이란에서의 시아파 집권이지요. 그러니까 헤즈볼라와 하마스는 단지 이슬람 율법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국가의 창설을 통해서 이슬람화를 정치적으로 성취하려는 이념을 갖고 있는 거네요. 그들의 무장 투쟁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침탈과 지배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인 거고요.

레비: 국민 국가마다 세부적인 사정은 다르지만 대체로 그런 거지. 그런데 문제는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우파 강경 집단이야. 1995년에는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1993년에 팔레스타인 측과 오슬로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해서 이스라엘의 극우파에 의해 암살된 적이 있지. 또 올 3월에는 이스라엘 총선에서 카디마 당이 승리를 했는데 이 카디마 당은 강경 우파 정당인 리쿠드당 당수로서 총리가 된 샤론이 작년에 새롭게 출범시킨 정당이야.

현: 샤론은 1967년 3차 중동 전쟁에서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다음, 국방장관 시절이던 1982년 메나헴 베긴 당시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난민촌을 공격해서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적이 있지요?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도살자’라고 불리기도 했구요.

레비: 그런 샤론이 총리 취임 후에는 독자적인 제안을 만들어, 이를 기반으로 작년 9월에 38년 간 점령했던 가자 지구를 포기했다네. 그 제안이란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 이전의 점령지는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고 그 대신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쪽에 돌려준다는 내용이지.

현: 그런데 헤즈볼라나 하마스는 이 제안을 인정하지 않는 거네요. 제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던 1948년 이전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 제안은 애당초 말이 안 된다는 거지요?

레비: 이러한 학살과 증오와 광가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비판 없이 잠정적인 정치 협상 기술만으로는 절대로 참다운 평화가 만들어질 수가 없어. 게다가 아랍 내 일부 친미 권위주의 국가들의 집권층은 팔레스타인에 자치와 연대에 기초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속으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어. 대부분의 아랍 사람들이 현재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 때문에 헤즈볼라를 지지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지.

현: 그럼 이번 레바논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또 어떻게 힘을 보태야 하나요?

레비: 나라고 해서 해답이 있는 건 아냐. 다만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 26곡의 오딧세이 부분에서의 인용문을 들려주고 싶네. “너희들은 짐승 같은 야만적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도록 내게 힘을 주었던 구절이라네.



현: 어쨌든 일단 즉각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져서 레바논 사람들이 한숨을 돌렸으면 좋겠네요. 협상은 그 다음에 하면 되는 거니까요. 우선 사람이 살고 봐야지요.(문화비평가 이재현) *프리모 레비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책이 이후에 출간됐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가 그것이다.


 

 

 

 

06. 08. 08

P.S. 이어서 헤즈볼라측 의견을 들어본다. 한겨레의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씨가 헤즈볼라의 창설주역이자 레바논의 국회부의장 하스 하산을 만나서 들어본 이야기이다. 그는 "군인 둘 때문에 전쟁 일으키는 이스라엘을 국제사회는 이해하지 못한다”며 모든 책임은 이스라엘에 있다고 말한다.  

 

 

 

 

한겨레21(06. 08. 03) 조건 없는 휴전, 협상은 그 다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치란 참 실없는 짓이구나. 늘 현실과 동떨어진 딴 세상에서 놀고 있다.” 뭐, 이런 비관적인 건데, 멋지게 꾸며놓은 레바논 의회- 사실은 세상 모든 의회- 앞마당에 설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7월25일, 504호 의원실 문을 두드렸다. 헤즈볼라당 의원이며 레바논 국회부의장인 하스 하산 후세인(Dr. Has Hassan Houssein). 그는 1982년 헤즈볼라를 창설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현재 14개 의석을 지닌 헤즈볼라당 출신으로서 헤즈볼라 최고지도자인 나스랄라를 정치적으로 보좌하는 인물이다.

-어제 헤즈볼라 쪽에서 휴전을 제의했는데.

=야만적인 이스라엘의 공격을 보라. 수많은 시민을 살해하고, 레바논 사회를 파괴시키고…. 이스라엘이 공습한 베이루트 남부 지역은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민간인 거주지일 뿐이다.

-그런 거 말고, 휴전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

=그래서 휴전하자는 거다. 조건 없는 휴전부터 하자는 거다.

-왜 지금 와서 휴전하자는 건가? 처음부터 개전을 말았어야지.

=이건 우리(레바논) 전쟁이 아니다. 그이들(이스라엘)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켰다.

-‘무조건 휴전’을 내걸었는데, 그 다음은?

=휴전부터 하고 협상해나가면 된다. 포로 교환을 포함해서 모든 사안을 하나씩.

-이상적이긴 한데, 이스라엘이 들어줄 것 같은가? 휴전협상도 흥정인데.

=그러니 조건 없이 휴전부터 하자는 거다. 서로 조건 내걸면 휴전하기 어려우니.

-무조건이란 것도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방이 받아들일 만한 ‘거리’를 주는 거 아니겠나? 예컨대, 헤즈볼라가 납치한 군인 두 명의 석방을 넌지시 보장한다든가.

=그건 무조건이 아니지. 우린 완벽하게 조건 없는 휴전을 제의한 상태다. 그런 건 휴전 뒤에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먼저 휴전해서 시민 희생부터 줄이자는 게 우리 뜻이다.

-형식상 이스라엘은 납치당한 군인 둘을 빌미로 공격을 시작했는데, 명분 없이 휴전을 하겠나?

= (말 자르고 흥분하며) 군인 둘 납치와 전쟁은 다른 사안이다. 전쟁을 그렇게 쉽게 벌이나?

-그럼, 헤즈볼라는 군인 둘을 납치할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 못했다는 건가?

=세상이 모두 이스라엘을 예상할 수 있다. 레바논을 파괴시키겠다는 건 이스라엘과 미국의 계획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이걸 ‘새로운 중동’의 시작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 예상했으면서 왜 이스라엘에 말려들었는가.

=(얼굴을 돌려버리며) 이런 유의 대화라면 그만두자.

-내 뜻은 헤즈볼라가 영리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스라엘에 전쟁의 빌미를 줬잖은가.

=군인 둘을 납치했든 안 했든, 그런 건 이스라엘에 아무 상관이 없다. 군인 둘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시민을 마구 죽일 수 있는 이스라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나?

=(좀 누그러지면서 겸연쩍은 듯 크게 웃고) 내가 당신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국제사회가 그렇다는 거다. 이스라엘을 이해하지 못하니 국제사회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인 둘을 납치할 땐 전쟁을 예상했겠지? 나스랄라가 올해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에 감금된 헤즈볼라 석방을 공언했고, 이번 작전명도 ‘진실한 약속’이 아니던가.

=그게 어떻게 전쟁이 되어야 하나? 그러면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일 권리가 있다는 건가? 이렇게 시민을 살해할 권리가 있다는 건가? 힘 있는 자는 아무나 죽여도 된다는 건가?

-그러면 계획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으니 이번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에 놀랐겠네?

=왜 놀라나? 이스라엘은 늘 그런 식이었는데. 내가 놀란 건 이스라엘의 공격이 아니라 그런 이스라엘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제사회다.

-이번 전쟁으로 누가 이익을 챙길 것으로 보나?

= 이스라엘이고 미국이겠지. 잃는 쪽은 레바논과 아랍 전체고(*이건 사실과 다르다. 8월 7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4주째 이스라엘의 공세에 맞서고 있는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46)가 ‘아랍세계의 새로운 상징’,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고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아랍인들은 나스랄라를 ‘약속을 지키는 인물’ ‘정치·군사적 능력을 겸비한 아랍지도자’로 평가한다. 60년 베이루트 동부 빈민가에서 야채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나스랄라는 이라크와 이란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헤즈볼라에 참여했다. 92년 전임자가 이스라엘 로켓에 암살되자 사무총장에 선출돼 헤즈볼라를 레바논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조직으로 키워냈다." 그러니까 이번 전쟁으로 이익을 챙기는 축에는 헤즈볼라도 포함되는 것.) 

-그럼, 헤즈볼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건가? 뭐 때문에 싸우나?

=물리적으로야 헤즈볼라도 타격을 입겠지만, 우린 정신적인 것들로 계산한다. 우린 잃을수록 더 강해진다. 헤즈볼라는 이 전쟁으로 더 강해질 거고, 이스라엘은 결국 패하게 된다.

-헤즈볼라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텐데, 장기전에 돌입한다면 버텨낼 수 있겠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헤즈볼라의 역사를 봐라. 아랍에서 이스라엘을 물리친 유일한 조직이다.

-레바논이 다시 내전에 빠질 가능성은 없겠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현재 총리를 포함해 의회까지 모두 하나다. 내전은 없다. 적은 하나다. 이스라엘뿐이다.

-동료 의원이 그의 방으로 찾아와서 자리를 털었다. “빨리 휴전하고 복구해야 할 텐데….” 인사랍시고 던졌지만, 공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정치는 현실과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기만 했다. 그이 말이 모두 옳을지언정, 이 시간에도 수많은 시민이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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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8-08 18:38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가 계단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서경식의 책에선 계단에서 떨어졌다고 묘사)
그의 책엔 펠릭스 누스바움과 프리모 레비가 단골로 출연하지요.
지금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를 읽고 있는데
재일조선인과 팔레스타인, 아우슈비츠 모두 공통점이 있음에 씁쓸하군요.
날이 겁나게 더워서 컴 켜고 당최 뭘 끄적거리는 일이 끔찍하군요.
읽는 즐거움만 배가시키고 있답니다. 퍼갑니다.

로쟈 2006-08-08 18:53   좋아요 0 | URL
조르지오 아감벤이란 이탈리아 철학자의 아우슈비츠 3부작이 있는데,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고대하고 있는 책입니다. <호모 사케르> 같은 건 근간으로 돼 있는데도 빨리 안 나오네요. <난민과 국민 사이>는 저도 벼르고 있는 책인데, (맨날 하는 소리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군요(--;)...

오드라데끄 2006-12-02 20:31   좋아요 0 | URL
이재현 씨 저 가상 인터뷰 보고 불쾌했어요. 레비 책을 하나도 안 읽고 그냥 레비가 레바논 침공과 독일의 역사가 논쟁에 영향을 받아 자살했다는 서경식 이야기 한 마디만 듣고 썼더군요.(서경식은 아주 조심스럽게 내리는 추론인데 그걸 거칠게 가져다 써놓고 마치 자기 이야기인 척하는 것도 불쾌하고요) 레비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런 피상적인 대사들을 그것도 그의 글쓰기의 핵심인 세밀한 묘사, 위트, 겸손한 어조, 고도의 상징 등을 하나도 살리지 못한 채 무슨 고리타분한 랍비처럼 보이게 만들다니...... 레비의 팬으로서 너무나 너무나 불쾌합니다. 아니 신문 한면 통째로 글 쓰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게다가 레비는 자신은 목격자,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아주 치밀하게 말하고 싶다고 했지요. 아 예전에 신문에서 보고도 분개했었는데, 다시 한번 분그 불쾌감이 고스란히 떠오르는군요. 아뭏튼 정말 정말 맘에 안 들어요. 이 사람. 왜 우리 신문에는 이렇게 자기가 모르는 걸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아는 척하는 글들이 많은 걸까요. 아우 승질나.

로쟈 2006-12-03 01:1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프리모 레비의 책들이 한권도 소개되지 않은 터라 '소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옮겨왔는데, 오해의 소지도 있다면 참조하겠습니다. 제대로 소개된다면 '아는 척하는 글들'이 알아서 꼬리를 내리겠지요...

오드라데끄 2006-12-16 17:37   좋아요 0 | URL
헉, 제가 너무 흥분해서 글을 옮기신 로쟈님이 불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이런 자료들을 링크 걸어주시는 건 너무너무 도움이 됩니다. 위의 책 모음도 그렇고요. 그리고 제 마지막 문장에 방점은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였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저도 로쟈 님 리뷰나 페이퍼들을 아주 유용하게 보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랍니다. 님 말씀대로 제대로 소개가 되면 오해의 여지도 줄어들겠지요... 제대로 소개다 되어야 할 텐데... ㅠㅠ (관련자로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로쟈 2006-12-17 01:2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관련자'분들의 의견들이 더 많이 나와야지요.^^ 듣기에 내년엔 레비의 책들이 두어 권 나올 거 같더군요. 얼마간 해갈이 될 걸로 기대해 봅니다...
 

문학과 여성에 대한 일련의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탓에 여성문학과 페미니즘 관련서들을 책상에 쌓아두고 있다. 독일 작가 엘케 슈미터의 <자르토리스 부인의 사랑>(황소자리, 2006)이 눈에 띈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은 두 가지 점에서 특징적인데, 일단 제목에서 허다한 부인들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작가의 오마주일 수도 있고 자신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분량이 200쪽밖에 안된다는 점(실제 원서는 더 적은 분량일 테니까 '중편소설' 범주에 들어갈 듯하다). 동아일보의 리뷰를 자료로 옮겨온다.

 

동아일보(06. 08. 05) 많은 걸작은 바람난 부인들에게 빚을 졌다. <안나 카레니나> <테스> <보바리 부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 여기 한 부인이 있다. 제목부터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원제 Frau Sartoris·자르토리스 부인) 이 책의 주인공, 자르토리스 부인이다.

 

 

 

 

-테스처럼 첫 남자에게 배신당했고 보바리 부인처럼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에 지친 안나 카레니나처럼 무료한 삶을 보내다가 앞선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바람이 난다. 2000년 독일에서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일간지 ‘타게스슈피겔’이 “모든 극과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을 위한 오마주”라고 찬사를 보낸 것처럼, 이 책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작품 속 많은 ‘부인’들을 다시 한번 불러낸다.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남편과 마음이 잘 맞는 시어머니, 예쁘장한 딸과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자르토리스 부인.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첫사랑의 상처를 지울 수 없다. 20여 년 전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첫사랑 남자가 약혼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쫓기는 마음에 부랴부랴 결혼한 뒤 벌써 나이 마흔 살에 이르렀다.

-중년에 다시금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자르토리스 부인. 그러나 상대는 유부남, 그것도 유산이 많은 아내와 잘 자란 두 아들, 시청 문화국장이라는 타이틀까지 갖고 있다. 잠깐 한눈은 팔아도 야반도주를 저지를 리 만무하다. 남편에게 편지까지 써 놓고 사랑의 도피를 꿈꾸지만 약속 장소에는 아무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이 중년 남자의 애인 노릇을 한다는 걸 알았다. 부인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얼핏 진부한 듯 보이지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구성이 독특하다. 자르토리스 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들려주는 중간 중간에, 도시에서 벌어진 뺑소니 사고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삽입된다(부인의 사연과 뺑소니 사고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데, 이런 점 때문에 평범한 연애소설이라기보다 미스터리물 같은 느낌도 준다).

-신파와 낭만을 철저하게 걷어낸 문체도 매력적이다. ‘자르토리스 부인의 불륜’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긴 어렵겠지만, 눈물 섞인 목소리가 아닌 담담하고 체념적인 고백은 ‘많은 것을 갖췄으면서도 하나를 갖지 못해’ 한없이 쓸쓸한 심정을 잘 전달해 준다.(김지영 기자)

06. 08. 07.

P.S.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가 엘케 슈미터는 "1962년 독일 크레펠트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한다. 약력을 보니,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의 좌파 일간지인 'TAZ'의 편집장을 지냈고, 1994년 이후 중도 좌파 주간지인 '디 차이트'와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는 시사주간지 '슈피겔'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니, 전/현직 통틀어서 언론인이다.

 

 

 

 

언론인 출신의 여성작가, 하니까 떠오르는 이는 한겨레(씨네21) 기자 출신의 조선희씨이다. 엘케 슈미터보다 두 살 더 많다. 굳이 떠올리게 된 건 그녀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기자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하이에나가 되기 위해서? 하이에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것이 개인차인지 아니면 한국과 독일의 (직장)문화적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려나 우리도 '자유부인'을 넘어선 우리식 부인전을 가질 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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