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국역본은 <만물은 서로 돕는다>)을 해설한 책이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의 여섯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지난주이고, 나는 몇 가지 이미지들을 챙겨놓았었지만, 외부 리뷰들을 참조할 수 없었던지라(더불어 옮겨올 수도 없는지라)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알라딘의 소개를 참고로 해서 몇 개의 이미지 정도만을 띄우도록 한다. 저자는 이미 아나키즘 관련 문헌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하승우씨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쓴 아나키즘의 고전 <상호부조론>은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나온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 사회발전의 원리라는 사회진화론적인 논리에 대항하면서 아나키즘의 당위성을 세운 저서로,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다." 일제하 한국의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러시아의 귀족 출신인 크로포트킨은 역사, 과학 등에 박식한 지식인이기도 했지만 귀족의 작위를 버리고 인민들에 대한 애정을 보인 혁명가의 면모를 가진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런 크로포트킨이 사회진화론의 논리에 맞서 내놓는 개념은 '상호부조'이다.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가 인간사회의 이끌어온 힘이었으며, 그 힘은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동물학, 역사학, 인류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증명한다." 아래는 러시아에서 출간된 크로포트킨 선집이다. 제목이 <아나르히야>로 돼 있다. '아나르히야(αναρχία)'는 '아나키(anarchy)'의 그리스 어원이다 



"책은 크로포트킨의 삶과 <상호부조론>으로 촉발된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 전반을 짚으면서, 그의 사상이 한국 아나키즘운동과 맺는 관계에도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경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강한 엘리트가 살아남아 약자를 지배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상호부조론>은 당시 식민 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침략을 반대하는 근거로서 굉장한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해방 전후의 아나키즘 운동의 맥락을 새로이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아나키즘에 관해서는 이전에 관련서들을 훑어본 바 있어서 따로 다루지 않는다. 아나키즘 또한 여러 이론과 운동의 분파를 거느리고 있는데, 최근에 강세를 보이는 건 생태주의와 결합된 아나키즘인 듯하다. "상호부조의 전통에서 아나키즘의 정당성과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는 한편, 비폭력적인 투쟁을 지지하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에서 테러리스트로 지목받곤 하는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풀기도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 등을 통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아나키즘의 그림자를 만나볼 수도 있다." 아래는 크로포트킨의 저명한 자서전(재작년 모스크바대학 구내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다). 러시아어 제목은 <한 혁명가의 수기>이다.

매트 리들리가 쓴 <이타적 유전자(원제: 미덕의 기원)>(사이언스북스, 2001)에 보면 프롤로그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이 크로포트킨 공작의 탈출기이다. 1876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차르의 감옥에서 탈출한 사건이야말로 크로포트킨의 살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리들리는 이렇게 덧붙인다.



"오랜, 아주 오랜 세월 뒤에도 탈옥수는 자신의 자유가 손목시계를 넣어준 여자와 바이올린을 연주한 여자, 마차를 몬 동료와 마차 뒤에 앉아 있던 의사, 그리고 마차가 도주하는 동안 길이 막히지 않게 도와준 여러 친구들의 용기 덕택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의 탈옥은 동지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오랜 세월 후에 인간의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점화시키도록 예정되어 있었다."(11쪽) 그 '인간의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란 게 바로 '상호부조론'이었던 것(그러니 '상호부조론의 기원'이라 할 만하다). 아래는 리들리가 참조한 <크로포트킨 평전>(1950)과 영역본 <상호부조론>.



요컨대, 우리가 서로 돕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빵'에 가봐야 하고 또 거기서 '탈옥'해 봐야 하는 것. 물론 빠삐용처럼 탈출하면 안되고 반드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탈옥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광복절 특사' 같은 걸로 나오는 것도 곤란하다. 아나키스트가 되는 대신에 내셔널리스트가 되지 않겠는가?..

06. 08. 27.

P.S. 성공한 탈옥을 다룬 영화로 기억에 남는 건 베아트리스 달이 주연한 영화 <샹떼>(1992)이다. 영화에서 베아트리스 달이 수감돼 있는 남편을 탈출시키기 위해 마차를 몬 게 아니라 헬기를 몰았다는 게 크로포트킨의 경우와는 좀 다르다고나 할까(아니면 이건 그냥 '부부부조론'의 사례에 불과한 걸까?)...



P.S.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의 저자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09. 09) “아나키즘은 무정부 아닌 공동체”

-'아나키즘(anarchism)’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 어원(語源)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나키즘 하면 ‘무질서’ ‘혼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아나키즘은 결코 질서 없는 사회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크로포트킨을 봐도 무정부가 아니라 코뮨(공동체)과의 연대를 말했고, 분별 없는 테러리즘을 비판했어요.”

-하승우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36)는 최근 펴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을 통해 아나키즘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낸다. 아나키즘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표토르 크로포트킨과 그의 저서 ‘상호부조론’을 중심으로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그 현재적 의미를 살폈다.

-<상호부조론>은 인간사회를 이끌어온 힘이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상호부조라고 주장한다. ‘사회진화론’이 갈등과 경쟁만을 강조함으로써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반대했다. 하교수는 “당시 사회주의조차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고, 사회진화론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힘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무정부주의’와 ‘테러리스트’라는 오해와 비난 속에 역사에서 점점 사라졌다. 서구에선 지배층의 탄압과 볼셰비키의 성장으로 세력을 잃어갔다. 사정은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분단, 한국전쟁, 군부독재를 겪으면서 쇠퇴했다.

-아나키즘은 최근 들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사회가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하면 할수록 ‘푸른 초원을 힘차게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로움’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마음 한 구석에 몰래 남겨뒀던 사람냄새 나는 공동체’를 소환한다. “우리 사회가 ‘20대 80의 사회’로 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같은 사회를 꿈꾸지는 않을 겁니다. 모두들 냉혹한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의 대안을 찾고 있는 겁니다.”

-현실화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이상이 아닐까. 그는 “아직 큰 물줄기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지 아나키즘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풀뿌리민주주의운동, 신자유주의반대운동, 대안공동체운동, 생태주의운동 등은 아나키즘의 명칭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그 근본정신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사회는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1987년 이후 사회운동세력은 위에서 아래로의 조직화 노선을 걸어오면서 자기체계를 갖춰갔지만 권위적, 관료적 노선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나키즘은 그 같은 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아나키즘은 또 기존 사회 흐름의 반대 방향에서 그 대안을 고민토록 하고 있습니다. 아나키즘이 현대사회의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진지한 화두는 던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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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8 15:19   좋아요 0 | URL
혹시 <크로포트킨스캬> 역시, 저 양반의 이름을 딴 건가요?

로쟈 2006-08-28 16:20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난번에 소개한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을 어제 받았다. 이달말쯤 배달되는 걸로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배송되었다. 덕분에 나의 '가을'이 좀 일찍 시작되었다. 하긴 내일모레면 이미 '새학기'가 아닌가? 문학과 여성을 주제로 한 강의들을 맡은지라 지젝의 몇몇 책들을 재독하며 정리해둘 필요성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느낌만으로 뭐가 될 리는 만무하고 책을 손에 잡을 여가를 그간에 갖지 못했다.

다급한 처지에 '요약정리'라도 미리 읽어두기 위해 펼쳐든 것이 <슬라보예 지젝>이다. 책의 4장이 '성차이의 실재계'이기 때문이다. 한데, 조금 읽다가 곧 주마간산으로 뒤적거리게 됐다. 어제 서문을 읽으면서 번역본이 별로 미덥잖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원서를 참조하지 않는다면 낭패를 볼 만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어서이다. 그런 걸 몇 가지 지적하기 전에 먼저 번역본이 다소 무성의하다는 걸 꼬집고 싶다. 혹은 교만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게 아니라 그간에 출간된 지젝 번역서들의 제목이나 내용이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무성의/교만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이다. 역자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삐딱하게 보기>, <향락의 전이>, <까다로운 주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등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서명을 갖다 쓰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로,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는 <너의 증상을 즐겨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물어보지 못한>으로, <진짜 눈물의 공포>는 <진정한 눈물의 공포>로, <환상의 돌림병>은 <환상의 역병> 등으로 다르게 옮겼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대신에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옮기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점뿐만 아니라(나는 두번 읽어봤지만 책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오역으로 범벅돼 있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도 제목이 참조된 걸로 보아 여기에 특별한 '규칙'이 적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임의적인 것이다. 역자는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도 국역본 제목인 <앙띠 오이디푸스>를 취하고, 버틀러의 책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도 제목을 그대로 갖고 오는 것으로 보아 말 그대로 '랜덤'이다.

그리고 인명 표기의 경우 'Lacan'은 가끔씩 '라캉'이란 표기도 나오지만 대부분 '라깡'으로 통일시키고 있는데, 그게 '원칙'이라면 'Foucault'는 왜 '푸꼬'가 아니라 '푸코'이고, 'Guattari'는 왜 '가따리'가 아니라 '가타리'이며, 'Althusser'는 '알뛰세'가 아니라 '알튀세'일까?(그런 한편으로 '쥬디스 버틀러'는 '쥬디쓰 버틀러'로 표기됐다.) 또 지젝의 동료이자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주요 멤버인 'Mladen Dolar'는 어떤 표기 규칙에 의해 '믈라덴 돌라르'가 아닌 '밀러던 돌러'로 표기되는 것일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냥 임의적이란 것. "모두가 번역자 맘이다!"

그러니 나의 참견은 좀 주제넘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자의 맘 혹은 구매자의 맘이란 것도 함부로 무시할 건 아니라는 뜻에서 몇 마디 참견을 보탠다. 내가 잠시 들여다본 페이지들에 국한하자면, 먼저 133쪽에서 "그러나 그는 페니스(penis)와 남근(phallus)의 차이점에 대해 개의치 않기 때문에 종종 둘을 혼돈한다"라고 옮겼는데, 페니스/남근의 이분법을 택한 것은 역자의 권리이지만, '혼동한다'를 '혼돈한다'로 적은 것은 오류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역자 자신의 것이기도 해서, 분명 역자후기에서는 'enjoyment'를 '향락'으로 'pleasure'를 '쾌락'으로 번역했다고 설명해놓고 있지만 상당수의 'enjoyment'는 그냥 '쾌락'으로 옮겨졌다(가령 <까다로운 주체>의 부제인 '정치적인 요소로서의 쾌락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 그런 차이점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인가? 

"사실 지젝은 성 인식이라는 사회적 내용에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에서도 '성 인식'은 (좀 놀랍게도) 'gender identity'의 번역이다. '성 인식'과 '성 정체성' 사이엔 그래도 개념상 얼마간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는데, 역자는 그런 데 비교적 무관심한 편이다. "마찬가지로 여자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란 문장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보편성에 대해 도전"한다는 표현은 "challenging the universal as non all"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non all'(흔히는 'not all'로 영역되는데)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옮긴 건 역자의 부주의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게 '무지'가 아니라 '부주의'인 것은 몇 페이지 뒤인 138쪽에서 "그러므로 이것은 여성적인 전부가 아닌 것(non-all)을 나타낸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면 '무성의하거나 부주의하거나'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논증불능(undecidability)'(138쪽)인 것일까?('결정불가능성'으로 옮겨져야 한다.) "어떻게 실제로 경험된 보편성이 특수한 현실이 되는가라고 지젝은 묻는다."(133-4쪽)도 역자에게 묻고 싶은 문장인데, 원문은 "How, he asks, is the universal experienced as a lived, particular reality?"이다. "어떻게 보편성이 살아있는, 개별적인 현실로서 경험되는가, 라고 그는 묻는다."란 뜻 아닌가? 여러모로 영문학 전공자의 번역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다(교양과정부 학생들의 번역인가?).

 

 

 

 

사실 서문에서부터 몇 가지 암시/단서는 이미 주어졌었다. 저자 사라 케이가 '지젝 연구'의 창시자로서 엘리자베스 라이트와 에드먼드 라이트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서문은 시작되는데(엘리자베스 라이트의 책들은 언젠가 소개한 바 있다), "<지젝 독본>과 그들이 편집한 지젝에 관한 <문단>은 통찰력과 권위를 가지고 이 미개척 분야의 서막을 열었다."(7쪽)고 한 대목에서 '문단'은 'Paragraph'란 원어가 병기돼 있지만 잡지명으로서 고유명사이기에 그냥 '패러그래프'지라고 해야 했다.

참고문헌에 나오지만, 라이트 부부는 패러그래프 지 24호(2001)의 슬라보예 지젝 특집호를 같이 편집했던 것이고, 그것이 <지젝 독본The Zizek Reader>(Blackwell, 2001)과 함께 '지젝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지젝에 관한 <문단>"이라고 모호하게 옮길 게 아니라 "지젝에 관한 <패러그래프>지의 특집호"라고 옮기는 게 나았다.    

저자 사라 케이는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만 불문학자이자 중세문학 연구자이다: "중세 연구가로서 살아있는 사람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적어도 우리말 독자들에게까지 공유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 "비록 이와 같은 책을 쓴다는 바로 그 행위가 지젝 본인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라는 걱정이 들지만, 라깡은 그의 통찰력을 저지시키고 그로 인해 그를 망쳐놓으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다."(8쪽)

인용문의 원문은 "Lacan resisted all attempts to arrest and therby stultify his insights."이고, '저지시키다'로 옮긴 'arrest'는 문맥상 이런 류의 '입문서'를 쓰고자 하는 시도를 가리킨다. 라캉은 그런 류의 시도들에 저항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라캉은 입문서를 쓰기가 어렵고(폴리티 출판사의 이 시리즈 목록에 '라캉'은 아직 포함돼 있지 않다), 견적도 잘 안 나온다는 얘기겠다.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것. 하지만, "그의 통찰들을 엉성하게 포획함으로써 결과적으론 망쳐놓으려는 시도들"이 어찌 저지들만의 것이겠는가.

애초에 폴리티 출판사측으로부터 지젝에 관한 책을 청탁받고 케이 교수는 자신이 저자로서 부적합하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공이 프랑스 중세연구인 나는 그런 일에 결코 알맞은 인물이 아니(었)다.(A French medievalist by profession, I might seem the last person in the world to take it on.)"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Which is precisely why, on reflection, I did so."

역자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고 옮겨놓았는데, 거꾸로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바로 그것이 내가 그 일을 떠맡은 이유이다." 왜? 뒤이어 <삐딱하게 보기>에서의 <리처드 2세> 인용을 저자가 재인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부적합하 듯 보이는 유리한 지점"이 지젝의 작업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를 식별해낼 수 있는 좋은 지점이라는 걸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니, 내가 읽기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내가 그 일을 맡았던지"라는 토로는 저자의 것이 아니라 역자의 것이다. 그걸 독자의 반응으로 옮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그가 그 일을 맡았던지." 이 책의 번역 또한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중세 불문학 전공자가 맡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06. 08. 26.

 

 

 

 

P.S. 덧붙이자면, 사라 케이의 입문서는 토니 마이어스의 책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뽐낸다. 국역본에는 옮겨져 있지 않지만, 원서의 뒷표지에 보면 조운 콥젝과 맬컴 보위 같은 저명한 정신분석/라캉 연구자들이 격찬을 보내고 있다(보위는 "이번엔 지젝이 사라 케이에 관한 책을 씀으로써 보답하기를 기대해본다. 케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까지 적었다). 좀더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 거듭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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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러시아 인터넷 서점(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서점은 '오존'이다)에 주문했던 책들을 소포로 받았다. 정확히 4주 정도가 소요됐는데, 내심 오늘 책을 받았으면 했는지라 배달된 책들이 반갑고 기특했다(그래서 이런 페이퍼까지 쓰는 것 아니겠는가). 내친 김에 러시아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늘어놓는다(아래 사진은 우리의 교보문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의 '돔 끄니기', 직역하면 '책들의 집').

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러시아책들은 대략 주문 접수 후 발송까지 2-3주의 기간이 소요되고 실제 배송에 8-10일 가량이 소요된다. 이번에 받은 책들은 8월 17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데, 8일만에 받을 수 있었으니까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대신에 발송까지 걸린 기간이 거의 20일이었다. 그건 한꺼번에 책주문을 할 경우 발송대기까지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책들이 한두 권은 있기 마련이어서이다.

아마존 같은 미국서점과의 차이는 배송료를 건수가 아니라 책의 무게로 문다는 것. 그러니까 여러 권을 주문할수록 배송료 부담은 더 줄어든다. 이번에 주문했던 책은 모두 6권인데, 책값은 대략 55,000원이었고 배송료는 13,000원 가량이 들었다. 무거운 책이 없긴 했지만, 건당 9,000원 가량 하는 아마존의 배송료에 비할 바가 아니다.

Деррида за 90 минут

두 권의 전공관련서를 제외하면 오늘 받은 책들은 지난달에 검색하다가 발견한 데리다의 신간들과 벤야민의 책이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먼저 <90분에 읽는 데리다>(악트, 2005). '90분에 읽는 철학' 시리즈는 재작년 러시아 체류시절에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작년에 데리다편이 출간된 것. 호기심에 주문한 것이고 책은 거의 팜플렛 수준이다. 112쪽이고 가격은 1,500원 정도. 참고로, 폴 스트라턴의 원저는 지난 2000년에 출간됐다. 96쪽이고 가격은 7.95달러, 그러니까 7,000원 정도이겠다.

두번째 책은 드디어 러시아어본이 출간된 <마르크스의 유령들>(로고스알테라, 2006). 받아보고 나니까 소프트카바라서 별로 본때가 나는 책은 아니지만(아래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어쨌거나 매우 반가운 책이다. 256쪽이고 가격은 15,000원 가량이니까 상당히 고가의 책이다(우리와는 달리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의 책값이 시중에 비해 약간 더 비싼 경우가 많다).

Призраки Маркса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경우는 아마존에서 구할 수 있는 영역본(루틀리지, 1994)이 15달러 정도 하니까 이번에 나온 러시아어본이 얼마나 '고가'의 책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현재 품절상태인 국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은 당시 9,000원에 출간됐지만, 근간 예정으로 있는 새 번역본은 최소 20,000원 이상의 가격이 붙지 않을까 예상된다(한번에 좋은 번역본이 나오지 않으면 이렇듯 이중으로 돈을 쓰게 된다). 우리의 책값이 싸다는 얘기는 이젠 먹히지 않을 얘기이다.

Маркс и сыновья

그리고 세번째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같이 나온 <마르크스와 아들들>(로고스알테라, 2006). 이 책도 거의 팜플렛 수준인데, 104쪽이고 10,000원이 좀 안되는 가격이다(역시나 저렴하진 않다).

불어본은 2002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이미지가 뜨지 않아서 독역본(2004)을 대신 띄워놓는다.

   

한편, 이 책의 영어본은 (내가 알기에) 아직 단행본으로 나와 있지 않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심포지움 발표논문들을 마이클 스프링커가 묶어서 펴낸 <유령적 경계들(Ghostly Demarcations)>(Verso, 1999)에 실려 있는 데리다의 글 'Marx & Sons'가 원본 노릇을 하는 텍스트가 아닌가 한다. 

Происхождение немецкой барочной драмы

이제 끝으로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아그라프, 2002)(러시아어 제목은 <독일 바로크 드라마의 기원>이다). 이 책을 구함으로써 러시아어로 번역된 벤야민의 책들은 대부분 손에 넣게 되었다. 지난 2000년에 출간된 걸로 돼 있지만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얼마전 오존에서 발견하고 주문했던 것. 288쪽의 하드카바이며 가격은 9,000원 가량.

지난 1998년에 버소(Verso)출판사에서 나온 같은 하드카바의 영역본은 42달러나 하니까 좀 비싼 책이다(중고 소프트카바는 주로 10달러선이다). 나는 영역판의 복사본을 갖고 있다. 듣기에는 벤야민 선집의 한 권으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아무려나 여기에 띄운 이미지들을 전부 국역본으로 자신있게 대체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06. 08. 25.

P.S. 당장 다음주부터 개강이어서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울적하기도 한 며칠이다(이건 마치 리허설도 제대로 못 끝내고 부랴부랴 무대에 올라야 하는 배우의 처지 같다). 이번 가을에 내가 꿈꾸는 것은 미뤄두었던 데리다 읽기를 얼마간 보충하는 것이다. 그게 소위 여가이고 휴식이다. 생각만큼의 여가와 휴식을 가질 수 있을지는 확실히 미지수이지만, 여하튼 서재의 이미지도 며칠전에 데리다로 바꾸었다. 평일엔 지젝을 읽고 휴일엔 데리다를 읽는다? 평일엔 푸슈킨을 읽고 휴일엔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물론 그 전에 고래라도 한 마리 잡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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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에 관한 얘기를 쓰다 보니까 문득 아침 신문에서 읽은 작가 박영한씨의 별세 소식이 생각났다. 한때 이문열만큼의 지명도와 인기를 누렸던 작가이지만 근간의 소식은 뜸했었는데,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좀 이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병상에서는 "문학이 암보다 더욱 고통스럽다"고 토로했다니까(그만큼 치열했던 작가정신의 토로이기도 하겠다) 그가 건너간 세상은 문학이 없는,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이기를 기원하면서 그의 명복을 빈다.

아침에 내가 읽은 건 경향신문의 기사였지만 한겨레의 기사를 발췌해서 읽어본다.

한겨레(06. 08. 24) <왕룽 일가> <머나먼 쏭바강>의 작가 박영한씨가 23일 오후 6시30분 경기도 고양시 일산백병원에서 별세했다... 박영한씨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산 초량동 산동네를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3년 동안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부랑 생활을 경험했다. 스물셋 나이에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며, 베트남전 파병을 자원한다.

 

 

 



-1976년 서른 살 늦은 나이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중편소설 <머나먼 쏭바강>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나선다.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살린 이 작품은 곧 장편으로 개작되어 작가에게 제2회 ‘오늘의 작가상’을 안겨주며, 책으로 출간되자마자 10만부가 넘게 팔리면서 당대의 화제작이 된다(*제1회 수상자가 한수산씨였고 제3회 수상자는 이문열씨였다). <머나먼 쏭바강>은 한국문학에서 베트남전쟁을 다룬 최초의 소설로 꼽힌다. 베트남전쟁의 국제정치학에 대한 엄밀하고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한국문학이 베트남전쟁을 형상화하는 데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안정효씨의 <하얀전쟁>과 황석영씨의 <무기의 그늘> 등은 <머나먼 쏭바강>의 바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머나먼 쏭바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방 한 칸’을 장만하기 위한 작가의 고투는 계속되었다. 덕소, 능곡, 김포 등 서울 부근의 도농 접경지대를 떠돌며 목격한 변두리 인생들의 삶의 세목은 <왕룽일가> 연작으로 갈무리되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우묵배미의 사랑>이 바로 이 연작에 포함된 작품들이다.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 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 근처에 있는 변두리 마을 ‘우묵배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연작들은 서울에서 밀려난 이주민들과 예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이 어울려 펼치는 ‘반농 반도(半農半都)’의 독특한 풍경을 돋을새김한다(*<왕룽일가>는 TV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우묵배미의 사랑>을 표제로 삼은 책의 후기에서 작가는 “인간을 생짜배기 알몸뚱이 그대로, 충분히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밑바닥 인간들의 삶의 진면목을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드러내려는 박영한식 소설 작법의 표현에 해당한다. 박영한씨의 다른 작품으로는 <인간의 새벽> <장강> 등이 있으며, 2002년에 펴낸 <카르마>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됐다...

장선우 감독이 만든 <우묵배미의 사랑>(1991)은 그가 만든 가장 좋은 영화에 속하는데, 원작 자체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겠다. 한편, 타계 며칠 전에 작가를 인터뷰한 세계일보의 조용호 기자가 아마도 그의 생전 소식을 전한 마지막 기사를 쓴 듯하다. 카피라이트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마지막 육성을 보존하는 것도 그만큼은 중요하겠기에 부분적으로 옮겨온다(앞으로 서평이 아닌 인터뷰 기사들은 필요할 경우 옮겨올 예정이다).

세계일보(06. 08. 21) “문학으로는 안 돌아가… 그거, 암보다 더 고통스러워.” 1978년 <머나먼 쏭바강>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문단에 나와 도시 변두리의 삶을 다룬 <우묵배미의 사랑> <왕룽 일가> 등을 펴내며 한국 문단의 중추적 작가로 살아온 소설가 박영한(59·사진)씨. 그가 지금 위암으로 생사의 접경을 넘나들며 힘겹게 투병 중이다. 20일 전 일산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의사의 권유로 일반실로 내려와 진통제로 생을 버티고 있다.

-의사는 지인들에게 연락해 평소에 보고 싶었던 이들을 만나보도록 권유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병상에서 만난 그는 “퇴원하면 어떤 작품을 쓰겠느냐”는 질문에 암보다 더 문학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얼마나 문학의 길이 힘들었으면 흙빛이 된 얼굴로 메마른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문학을 증오할까.

-박씨는 2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위의 3분의2가량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그가 평소에 즐기던 술과 담배를 여전히 끊지 못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통음과 하루 2갑이 넘는 흡연이 일과였다. 술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술, 그거 만만한 놈이 아냐. 괴로워.” 오랜 친구의 병상을 지키던 김영창(59)씨가 “이제야 철이 든다”며 농을 한다.

-병실에는 그가 투병 중에도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던 인터넷 문학카페의 제자들 6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다. 제자들이 든든하지 않느냐는 말에 “하나도 안 든든해”라며 일축한다. 그는 “처음에는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져버린다”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일일이 그들의 아이디를 호명했다. “네오, 똑순이… 가만, 너는 누구더라. 말하지 마. 내가 맞혀볼게…” 그는 제자들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고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제자들은 스승이 기적처럼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특유의 호통을 치며 자신들을 이끌어주기를 기원하며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06.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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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8-24 20:46   좋아요 0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자림 2006-08-24 20:57   좋아요 0 | URL
앗, 오늘 신문 안 봐서 몰랐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암보다 더 고통스러운 문학"이란 말에서 문학을 대하는 고인의 치열한 장인 정신을 읽으며 숙연해집니다.

비로그인 2006-08-24 21:25   좋아요 0 | URL
마음이 아픕니다.

비연 2006-08-24 21:41   좋아요 0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푸른괭이 2006-08-24 23:24   좋아요 0 | URL
<머나먼 쏭바강> 재미있게 읽었고, <왕룽일가>는 어릴 때 티브이로 본 기억이 나네요. 요즘은 웬만하면 70, 80은 넘기는데, 안타깝습니다.
 

제목을 붙여놓으니까 무슨 이야기거리가 될 법도 하지만, '덧없는 행복'과 '섹스와 공포' 각각은 근간 예정인 책 제목들이다. 아침에 나오다가 우편함에 <문학과 사회>(2006 가을호)가 꽂혀 있길래 밥먹으러 갈 때마다 끼고 가서 여기저기 들춰보고 있는데(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에 대한 서평이다), 근간 소식을 전하는 문학과지성사측 광고란의 한 단락이 이렇다.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로 루소 사상의 현대성을 짚어보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덧없는 행복>(고봉만 옮김)이 역시 9월초에 나올 예정이다. 또한 파스칼 키냐르가 <은밀한 생>과 함께 2부작으로 집필한 에세이로, 기독교가 우리의 성(性)과 쾌락을 어떠한 방식으로 청교도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는지를 고대 회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섹스와 공포>(송의경 옮김)가 오랜 번역 작업 끝에 10월경에 선보일 예정이다."

 

 

서지에 좀 밝은 독자라면 토도로프(1939- )의 <덧없는 행복>의 경우 이미 <환상문학서설>과 같이 묶여서 한국문화사에서 출간된 바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1996년에 초판이 나왔고 작년에 판을 다시 찍었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기억에는 영어(혹은 일어)에서 중역된 책이기 때문에 새로 깔끔한 번역이 나온다면 반가운 일이다. 영역본도 갖고 있는 김에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라고 해서(그 탓인지 <세상의 모든 아침>은 가장 먼저 번역된 키냐르의 책이다) 눈길이 갔던 작가 파스칼 키냐르(1948- )의 책들은 '키냐르 전문번역가'로 나선 송의경씨의 수고 덕분에 우리말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전공자에 따르면 키냐르는 '어려운' 작가군에 속한다). 그간에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만 사서 꽂아놓고 있었는데 이번에 <섹스와 공포>가 출간되면 나란히 읽어봄 직하겠다(*2007년 2월에 책이 나왔다!).

 

 

특별히 <섹스와 공포>를 거명하는 것은 주제에 대한 흥미 이전에 재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러시어어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미지로 띄운 건 좀 고급스러운 판본이고 내가 갖고 있는 건 클래식 문고본이다. 참고로 키냐르는 러시아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막심네 가게에서 샀던가? 그런 까닭에 잊고 지내던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10월이 오면 다시 만나게 될 친구...

 

참고로, 키냐르에 관한 약간의 전기적 사실을 옮겨오면, "1948년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두 차례의 자폐증을 앓았고, 20대에는 68혁명의 열기와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 철학을 공부했다." '함께'? '밑에서'가 아닐까? 3-40년의 나이차가 나는데 말이다.


"1969년에 <말 더듬는 존재 L'etre du balbutiement>를 출간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 연구원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하기도 했다. 1967년 갈리마르 출판사의 원고 심사 위원으로 발탁되고 1990년에는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집필 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94년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현재 파리에 살면서 작품을 쓰고 있다." 요컨대, 대표적인 '지성파' 작가에 속하겠다. 미셸 투르니에 같은...

 

06. 08. 24.

 

 

 

 

 

 

 

 

 

 

P.S. 주문받은 원고를 마감을 놓치고도 미적대다가 잘 안 풀린다는 이유로 잠시 머리를 식힌다. 키냐르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오래전에 본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1991)인데(제라르 드파르디유 부자가 출연했었다), 마지막 대사가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였던가?(시인 유하는 이를 패러디한 <세상의 모든 저녁>을 시집으로 내기도 했다.) 오늘도 두 지인의 초상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세상을 뜨신 분들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 한갓 꿈이런가 하겠다. 덧없는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P.S.2. <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 2007)의 국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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