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하는 일이 책들과의 숨바꼭질이다. 찾는 책이 보이지 않아서 벌이는 일(일주일 전에 만졌던 책을 다시 찾는 게 매번 미궁을 뒤지는 것 같다). 흔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주 주의를 딴곳으로 돌린다(흠, 데스크톱의 키보드도 말썽이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치고 있다. 이것도 스트레스군).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온 이제니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을 펼치게 된 사정이다. 

















언제 다룬 적이 있던가. 확인해보니, 지난봄에도 '불만'을 적었었군. "나는 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폐적 세계에서 발화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 불가하다"고. 그렇다면 험담의 재탕이 되겠다. 


소개된 약력에 따르면 이제니 시인은 1972년생이고, 2008년 신춘문예로 데뷔, 2010년에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를 펴냈다. 이어서 두 권은 문지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은 모르고>(2014)와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이다. 출간 2년이 안 돼 리커버판이 나온 셈이군. 최근작은 현대문학사에서 나온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2019)다. 시집 제목대로, '있지도 않은 문장'의 세계가 이제니의 시세계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있지도 않은 대상/세계를 적은 문장들의 세계, 그게 또한 '흘려 쓴 것들'의 세계다. 


이상이 선구적인 사례인데, 무의미시는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며 시란 그 기호의 퍼포먼스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가 기본적으로 의미를 배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한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이상의 '오감도'를 중단시킨 건 독자들의 항의였다. 기본적으로 끝이 있을 수 없는 기획이다). 무의미의 남용과 범람. 의미란 지시대상(세계)과의 긴장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그 지시대상을 지워버렸기에 아무런 통제나 구속을 받지 않게 되는 것. 남는 건 언어의 기호적 유희다(좋은 경우에 재미 정도는 제공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아무거나 선택해도 무방하지만, 가령 '구름에서 영원까지'를 보자. 원시가 행갈이를 하지 않고 쓰되, 구두점은 찍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 구름, 돌, 빛, 어둠, 바람, 주머니, 바다 등이 오브제로 등장하고, 슬픔, 기억, 이름, 침묵, 죄, 영원 등이 소환되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정서의 구심점이 없다. '슬픔'을 지목할 수 있지만, 구체성이나 무게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지 않는다('막연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읽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것이 '흘려 쓴' 세계다. 아무것도 붙잡거나 붙들지 않고 흘려보내는 세계. 의미를 비워내거나 배제하는 시. 언어의 율동에 대한 연습이라고 하면 최대치의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율동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도 있다. 어차피 의미와 무관하기에 대충 뒤섞어도 된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이렇게 문장들을 뒤섞어놓아도, 별로 차이가 없는 시, 그게 무의미시다(이런 시의 생산은 AI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무의미한 시로 수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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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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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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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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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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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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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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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점심 먹을 시간에 시집 한권을 읽었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이번에 파울 첼란 전집(시인의 또 다른 유작이 되었다)이 나오기도 해서(일차로 두권이 나왔다) 다시금 손이 갔다. 이번 문지판은 문학동네 포에지 같은 재간본이 아니라 리커버 한정판이다(문지에서도 재간본은 R시리즈로 나온다).

2018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나(뮌스터에 묻혔다고) 허수경은 생몰연대를 같이 적게 된 시인이다. 1964년생. 진주 시인.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던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가 첫 시집. 나는 출간된 뒤 시간이 좀 지나서, 시집이 평판을 얻은 뒤에 사서 읽은 듯하다(당시 문지와 창비시인선, 그리고 민음시인선과 실천문학 시인선까지가 독서 범위였다). 지금도 첫번째 시집이 가장 나았던 것 같은 인상이다.

문지에서 나온 <혼자 가는 먼 집>(1992)은 두번째 시집. 이번에 다시 읽으니(리커버판은 해설을 빼서 슬림해졌다) 역시나 첫번 시집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슬픔>을 읽은 지 오래 되었으니 이 또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목도 그렇고 넋두리가 너무 많다. 이런 장면.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서늘한 점심상‘의 두 연이다(이 시는 두 연 더 이어진다). 서로 어긋나서 다투는 연인의 모습, ‘비통한 관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어서, 비유컨대 당사자들은 이 장면이 몰카처럼 찍히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치 않는 듯하다. 즉 시인 자신도 시라는 걸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시다.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라고 적었는데, 독일행의 힌트가 될까.

상당수의 시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의 심정을 담은 심경시로 읽힌다. 비록 절실한 감정을 읊조린 것이겠으나 (적어도 나 같은)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시는 드물다. 그나마 건진 건 ‘저이는 이제‘ 같은 시다.

저이는 이제 술을 팔지 않는다네
헐한 술을 빚던 저녁이 저이에게 있었던가
낡은 저녁 의자에 기대 노을 산숲처럼 끄덕이네
아주머니 차 한잔 파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나 같은 사람에겐
가슴으로 대신 누룩밭을 거두는 것을 당귀차라도 한잔.
저이가 술을 팔 때 나는 무얼 팔았던가
아주머니 편강 한쪽 주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저이 같은 가슴으로
생강밭을 고르는 것을 생강편 같은 인가 근처로 가는 것을
갈 수 있다면 아주머니
고향에 가지 말고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
이미 건너온 저 물에서만 퍼내도,
퍼내도 아주머니
낡은 저녁 의자 좀 빌려주세요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한 넋두리가 될 때 시의 리듬감도 살아나고 어조에 여유도 묻어난다. ˝넌 왜 날 버렸니?˝와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의 차이다(성숙도의 차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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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3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20-12-31 23: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 새해복많이.~
 

강의에서 주로 소설들을 읽기 때문에, 시를 읽는 건 내게 휴식 같다. 원래부터 산문소설과 시는 그렇게 대비되기도 하지만. 노동과 휴식. 그렇다고 모든 시가 그런 건 아니다. 대책없는 시들이 너무 많고 요령부득의 시집도 부지기수다. 무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시집들도 허다하게 그렇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나의 기준이나 취향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나대로의 기준과 취향으로도 읽을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시들이 없지는 않기에. 한편으론 드무니까 만날 때 기쁜 것이기도 하고.


















최근에 재간본 시집 시리즈로 나온 '문학동네 포에지' 가운데(1차로 열권이 나왔다. 절판된 세계사 시집이 다수) 내게 가장 반가웠던 건 박정대의 <단편들>이다. 1997년에 초판이 나왔던 시집. 시인도 젊었고 독자로서 나도 젊었던 때다(나는 만 서른이 되기 전이고 시인은 서른을 두해 넘긴 나이였겠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과거의 느낌이 낯선 시인들이 있고(최근에 다시 읽은 최승자의 시들이 그렇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사랑'처럼 보였다), 반면에 마치 어제 만난 듯 생생한 시인들이 있다. <단편들>이 그렇다. 


<단편들>에 실린 모든 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편의 시들이 여전히 좋다(이 시집 이후 박정대의 시들을 나는 다 따라가지 못한다. 너무 주정적이고 도취적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단편들> 정도의 취기를 좋아하는 것). 많은 시들이 그때를 환기시켜주는데, 한편으론 왕가위 영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동사서독>의 '취생몽사' 같은 시들이 그래서 좋다. 언젠가 '물질적 황홀6'을 내가 쓴 책에 인용하기도 했었는데, 아마 조교 때 펴낸 책이었겠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 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시선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


다시 읽으니 업그레이드된 버전의 박인환 시 같기도 하다(세련된 센티멘털리즘). 여긴 가식도 기교도 없다. 포즈라고 해도 괜찮은 정동, 감정의 움직임이 있다. 김수영 시들을 읽을 때 깨달은 거지만, 나는 말들의 속도감을 좋아한다. 박정대의 시들이, 다시 보니 그렇다(소월시문학상 수상자인데, 그보다는 김수영문학상이 어울렸을 시인이다).


<단편들>을 다시 뒤적이다가 '사북에서'에서 눈길이 멎었다(확인해보니 시인이 강원도 정선 출신이다). 이런 속도감과 응시는 어떠한가. 


아 벌써 어두워, 걸어가면서 고양이들은 

소리지른다, 좁은 길을 벗어난 막사 같은 집들은

덜컹거리는 문을 닫고 서둘러 성냥불을 

켜본다,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교회당의 종소리

유난히 하얗다. 골짜기 가득 쌀밥 같은 눈 내린다

아 벌써 어두워, 고양이들은 뛰어가면서

소리지른다, 여인네들은 가슴이 뛴다

저녁 밥상을 준비한다 창문을 후려치며 

바람이 달아나고 있다


시의 1연이다. 2연에서는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사내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사북'을 제목으로 단 시들을 몇 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시가 유일하게 기억하게 될 시다. 내가 좋아하며 지지하는 시의 좋은 사례다. 말의 속도감과 군더더기 없는 정확한 묘사. 사북의 저녁 풍경을 이보다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고양이처럼 여인네들처럼 독자도 가슴이 뛰게 하는 시. 












  


   



기억에도 그렇고, 확인해보니 <단편들>이 첫 시집이었고 이후에 아홉 권 가량의 시집을 더 펴냈다. 대략 절반 이상은 구입해서 읽은 듯한데, 그래도 내게는 <단편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재출간이 반갑다는 것. 
































나대로의 판단이고 추정이지만, <단편들> 이후 (일단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나 <아무르 기타> 등) 박정대의 시에는 음악이 너무 노골적으로 시를 대신한다. 시인은 가객이자 음유시인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음악과 적당한 거리와 긴장관계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인은 점차 스스로를 뮤지션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그런 시인들이 몇 명 된다. 아예 뮤지션인 경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시 자체의 음악성이 실종된다. 시 대신에 그냥 음악이 들어와 앉는 것. 시는 메탈 사운드를 들려줄 때가 아니라 다만 읊조릴 때 아름답다. 


그리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음악을 들었다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연애는 다만 연애였을 뿐 상처를 주지도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연애는 그저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였을 뿐

내 가슴으로부터 한번 떠나간 애인은 영원히 복구되지 

않았다 가끔 염소들이 울고 이 세상의 데시벨이 약간 올라가고

부서진 건물들이 다시 개축되고 몇 점의 구름이 흘러갔을 뿐

기침처럼 다만 흘러갔을 뿐


-'물질적 황홀8'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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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30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의가 없는 날이라 일거리들을 챙겨서, 노트북까지 챙겨서 동네 스터디카페로 왔다. 체인점들인지 다녀본 스터디카페는 거의 비슷한 모양새다. 무인 이용기에서 회원등록을 하고 즉시이용권이라는 걸 끊는다. 대개 2시간에 3000원. 4시간은 5000원인 식인데 가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교정과 번역 일거리가 있어서 점심을 먹기도 전에 왔지만 잠이 부족했는지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하기야 지난 두달 동안 평일에는 네댓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어떤 날은 세시간도 못자기도 했고). 수면량은 컨디션뿐 아니라 기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당연히 사고의 효율성도 떨어뜨린다. 커피를 두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려다 보니 눈길이 간 시가 성미정의 ‘잘 저어야 한다‘다. 이번에 재간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대머리와의 사랑>(문학동네)에 실려 있다.

잘 저어야 한다 매사에 잘 저어야 잘 섞이고
잘 섞여야 긴 식도에서 열린 항문에
이르기까지 괴롭지 않은 법이다 특히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 언제나 겉도는
기름 같은 프림을 잘 녹여야 한다 바닥에
가라앉은 희고 반짝이는 눈물 같은 설탕을
잘 달래야 한다 검고 끈적이는 커피 속으로
잠기는 늙은 여자를 잘 저어야 한다 커피잔 속을
위태롭게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잘 저어야
한다 커피잔 밖으로 얼룩지는 길들을
잘 저어야 한다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

반복해서 읽게끔 하는지가 좋은 시의 판단 기준 가운데 하나다. 이 시를 다시 읽은 건 ˝박마담‘ 때문인데, 더불어 다시 읽으면서는 뭔가 불충분하다는, 잘 섞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를, 특히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는 게 주제문. 보통 마담이라면 다방 마담을 떠올릴 수 있지만 다방 마담이 잘 젓지도 않은 커피를 내놓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 ‘박마담‘은 ‘박여사‘ 정도로 읽어야겠다.

그렇더라도 박마담의 등장은 이 시의 포인트인데(박마담을 지우면 알 수 있다) 두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커피의 소화 문제. 잘 젓지 않으면 소화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인가(커피에 항문으로 내려갈 만한 성분이 뭐가 있는지?). 그리고 하이힐. ˝늙은 여자를 잘 저어야 한다˝와 ˝위태롭게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잘 저어야 한다˝가 병치되고 있어서 자연스레 ‘늙은 여자‘와 ‘하이힐‘이 등치되는데 이건 자연스럽지 않다. 하이힐은 젊은 여성과 연결되는 이미지다. 그것이 ‘늙은 여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보강되어야 한다. 박마담의 캐릭터 말이다.

하지만 시에서 박마담은 그저 이름으로만 나올 뿐 캐릭터로서의 존재감이 약하다. 시상도 발전되지 않고 있고. 커피를 잘 저어야 한다는 단조로운 착상에 박마담이 가세하여 긴장감은 불어넣었지만 뭔가 미진하게 끝냈다는 인상이다. 글쎄, 왜 이런 걸 적느냐고 하면, 뭔가 될 것 같은 시가 그냥 주저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번 읽고 지나가면 될 일을 여러 번 읽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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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2020-12-29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면 시간이...로쟈님 일때문에 그러신 거에요?..

로쟈 2020-12-29 19:36   좋아요 0 | URL
휴일에 보충합니다.~

sh 2020-12-2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닐까 싶어요 식도에서 항문이라는 것은 (박마담-여자의) 인생의 시작과 끝에 대한 비유가 아닐지요. 박마담이 독자에 의해 채워지기 위해 비어 있는 자리라면요. 그렇더라도 말씀하신 미진한 느낌이 남기는 합니다만 구성과 맥락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넘지만 인상깊게 읽혀 댓글 남깁니다. 로쟈님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20-12-29 19:36   좋아요 0 | URL
커피를 젓는 주체는 ‘나‘이고 내가 마실 테니까, 식도와 항문은 나의 식도와 항문이죠.박마담의 인생의 은유라는 식도/항문이 아니라 커피여야겠고요. 그렇더라도 박마담이 캐릭터로 제시되고 있지 않기에 그런 비유는 의미(힘)가 없지요...

sh 2020-12-29 20:44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 시에서 화자가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일부러 지워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박마담이 탄 커피를 (그가 마담임에도) 잘 저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신산한 인생을 드러내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박마담이 매일 같이 커피를 탔을 것이니 인생에 대한 비유라기보다는 생의 순간들 생을 이룬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 말씀마따나 시에 박마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이 거리가 좁혀질 것 같지는 않네요.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에 관한 페이퍼를 엊그제 적었는데 좀더 보충한다. 이미 적은 대로 번역본 상황 때문에 강의에서 처음, 뒤늦게 읽게 되었다. 생전에 대단한 명사였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인색한 편이다(내가 검색한 바로는 국내에 연구논문이 단 한편밖에 없다). 대중작가라는 인상이 더 짙다. 국내의 세계문학전집판에 포함된 작품으로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민음사) 하나가 유일하다(드라마의 영향으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강의에서 다루기 위한 일차적 조건은 마땅한 번역본의 존재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어 사강은 불운한 편인데, 소설의 경우 범우사와 소담출판사 정도에서 나오다 만 정도다(소담출판사에서 선집 정도는 나오는 듯싶더니 중단되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사강은 장편소설은 21편, 단편소설집 3권을 남겼다(그밖에 희곡과 시나리오, 자전적 에세이가 다수 있다). 번역된 작품 상당수가 절판된 상황에서 눈에 띄는 것만 확인해보니 여섯 권 정도가 다룰 만하다. 물론 한 작품만 읽는다면 대표작 <슬픔이여 안녕>(1954)이지만(이미 적은 대로 아르테판도 번역은 불만스럽다). 
















화제작 <슬픔이여 안녕>에 뒤이어 이듬해 출간한 두번째 소설 <어떤 미소>(1955)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영어로는 바로 번역되었고 1958년에 나란히 영화화되었다). 두 소설을 고등학교 때 읽었지만 하도 오래 되어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두 작품을 섞어서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미소>를 다시 읽어봐야 알겠다.

















사강은 50년대에 두 작품을 더 발표하는데, <한달 후, 일년 후>(1957)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가 그것이다(1957년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1960년에 희곡 <스웨덴의 성>을 발표하기에, 소설로는 처음 네 편이 일단락으로 보여진다. 
















60년대 이후작으로는 <마음의 파수꾼>(1968)과 <마음의 푸른 상흔>(1972)까지가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그밖에 에세이로는 <리틀 블랙 드레스><봉주르 뉴욕><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등이 있다. 한권만 고른다면 <리틀 블랙 드레스>(열화당).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절판되었기에.

















역시나 절판된 책들이지만 단편집 <길모퉁이 카페>와 '환각 일기' <중독>도 출간된 책들. 아직 절판되지 않은, 그리고 유일하게 사강에 '관한' 단행본으로는 <사강 탐구하기>가 있다. 평전이라기보다는 밀착취재기 성격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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