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하는 일이 책들과의 숨바꼭질이다. 찾는 책이 보이지 않아서 벌이는 일(일주일 전에 만졌던 책을 다시 찾는 게 매번 미궁을 뒤지는 것 같다). 흔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자주 주의를 딴곳으로 돌린다(흠, 데스크톱의 키보드도 말썽이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치고 있다. 이것도 스트레스군). 리커버판으로 다시 나온 이제니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을 펼치게 된 사정이다.
언제 다룬 적이 있던가. 확인해보니, 지난봄에도 '불만'을 적었었군. "나는 왜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폐적 세계에서 발화연습만을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 불가하다"고. 그렇다면 험담의 재탕이 되겠다.
소개된 약력에 따르면 이제니 시인은 1972년생이고, 2008년 신춘문예로 데뷔, 2010년에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비)를 펴냈다. 이어서 두 권은 문지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은 모르고>(2014)와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2019)이다. 출간 2년이 안 돼 리커버판이 나온 셈이군. 최근작은 현대문학사에서 나온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2019)다. 시집 제목대로, '있지도 않은 문장'의 세계가 이제니의 시세계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있지도 않은 대상/세계를 적은 문장들의 세계, 그게 또한 '흘려 쓴 것들'의 세계다.
이상이 선구적인 사례인데, 무의미시는 언어를 기호로 사용하며 시란 그 기호의 퍼포먼스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시가 기본적으로 의미를 배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한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이상의 '오감도'를 중단시킨 건 독자들의 항의였다. 기본적으로 끝이 있을 수 없는 기획이다). 무의미의 남용과 범람. 의미란 지시대상(세계)과의 긴장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그 지시대상을 지워버렸기에 아무런 통제나 구속을 받지 않게 되는 것. 남는 건 언어의 기호적 유희다(좋은 경우에 재미 정도는 제공한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에서 아무거나 선택해도 무방하지만, 가령 '구름에서 영원까지'를 보자. 원시가 행갈이를 하지 않고 쓰되, 구두점은 찍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 구름, 돌, 빛, 어둠, 바람, 주머니, 바다 등이 오브제로 등장하고, 슬픔, 기억, 이름, 침묵, 죄, 영원 등이 소환되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정서의 구심점이 없다. '슬픔'을 지목할 수 있지만, 구체성이나 무게감을 갖고 있지 않아서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지 않는다('막연한 슬픔'의 표현이라고 읽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것이 '흘려 쓴' 세계다. 아무것도 붙잡거나 붙들지 않고 흘려보내는 세계. 의미를 비워내거나 배제하는 시. 언어의 율동에 대한 연습이라고 하면 최대치의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율동은 다양하게 변주될 수도 있다. 어차피 의미와 무관하기에 대충 뒤섞어도 된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떼의 구름이 기억으로 흩어졌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어제의 귓속말을 데려왔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묵은 발소리로 다가왔다. 한때의 기억이 구름으로 흘러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이렇게 문장들을 뒤섞어놓아도, 별로 차이가 없는 시, 그게 무의미시다(이런 시의 생산은 AI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무의미한 시로 수렴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