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을 시간에 시집 한권을 읽었다.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이번에 파울 첼란 전집(시인의 또 다른 유작이 되었다)이 나오기도 해서(일차로 두권이 나왔다) 다시금 손이 갔다. 이번 문지판은 문학동네 포에지 같은 재간본이 아니라 리커버 한정판이다(문지에서도 재간본은 R시리즈로 나온다).

2018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나(뮌스터에 묻혔다고) 허수경은 생몰연대를 같이 적게 된 시인이다. 1964년생. 진주 시인.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던 <슬픔 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가 첫 시집. 나는 출간된 뒤 시간이 좀 지나서, 시집이 평판을 얻은 뒤에 사서 읽은 듯하다(당시 문지와 창비시인선, 그리고 민음시인선과 실천문학 시인선까지가 독서 범위였다). 지금도 첫번째 시집이 가장 나았던 것 같은 인상이다.

문지에서 나온 <혼자 가는 먼 집>(1992)은 두번째 시집. 이번에 다시 읽으니(리커버판은 해설을 빼서 슬림해졌다) 역시나 첫번 시집보다 못하다는 느낌이다(<슬픔>을 읽은 지 오래 되었으니 이 또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목도 그렇고 넋두리가 너무 많다. 이런 장면.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서늘한 점심상‘의 두 연이다(이 시는 두 연 더 이어진다). 서로 어긋나서 다투는 연인의 모습, ‘비통한 관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놀라울 정도로 직설적이어서, 비유컨대 당사자들은 이 장면이 몰카처럼 찍히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치 않는 듯하다. 즉 시인 자신도 시라는 걸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시다.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라고 적었는데, 독일행의 힌트가 될까.

상당수의 시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의 심정을 담은 심경시로 읽힌다. 비록 절실한 감정을 읊조린 것이겠으나 (적어도 나 같은)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시는 드물다. 그나마 건진 건 ‘저이는 이제‘ 같은 시다.

저이는 이제 술을 팔지 않는다네
헐한 술을 빚던 저녁이 저이에게 있었던가
낡은 저녁 의자에 기대 노을 산숲처럼 끄덕이네
아주머니 차 한잔 파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나 같은 사람에겐
가슴으로 대신 누룩밭을 거두는 것을 당귀차라도 한잔.
저이가 술을 팔 때 나는 무얼 팔았던가
아주머니 편강 한쪽 주셔요 고향에 당도 못 한 저이 같은 가슴으로
생강밭을 고르는 것을 생강편 같은 인가 근처로 가는 것을
갈 수 있다면 아주머니
고향에 가지 말고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
이미 건너온 저 물에서만 퍼내도,
퍼내도 아주머니
낡은 저녁 의자 좀 빌려주세요

직설적이지 않은 은근한 넋두리가 될 때 시의 리듬감도 살아나고 어조에 여유도 묻어난다. ˝넌 왜 날 버렸니?˝와 ˝저랑 둘이서 당귀차나 끓이셔요˝의 차이다(성숙도의 차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0-12-3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20-12-31 23: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 새해복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