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북리뷰는 입문서 특집을 싣고 있는데, 고전 읽기와 정치철학 분야의 입문서들이 소개돼 있다. 개인적으로 책 선정에 관여하기도 했기에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1. 07. 09) 명쾌한 ‘입문서’ 나침반 삼아 세계 정신문화 여행 한바퀴

‘필독도서’ 목록에 실린 셀 수 없이 많은 교양·인문서의 이름들은 늘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층층이 쌓여온 고전들도 마찬가지다. 내 관심사와 연결되는 책들은 무얼까? 어떤 책부터 봐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이들을 위해 ‘입문서’가 있다. 폭넓은 지식 세계를 간추려서 쉽게 전달해주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도 대강 ‘어떤 책이구나’ 감을 잡게 만들어준다. 평소 쏟아져나오는 책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는 인터넷 서평꾼 로쟈가 책 선정에 도움을 줬다. 



서양 정신문화의 뿌리는 그리스다. 그리스 연구에 평생을 바친 앙드레 보나르가 쓴 <그리스인 이야기>(전3권, 책과함께)는 서양 문명의 발원지인 그리스에 대해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다. 호메로스부터 에피쿠로스까지, 그리스인들이 처했던 환경적 조건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살피며 그리스인들의 실질적인 삶과 생각이 어떠했는지 드러냈다. 딱딱한 글로서 전해지기 쉬운 그리스 문명의 전체적인 모습을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전해준다. 많은 그리스 고전들이 탄생한 문명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언론인인 데이비드 덴비가 쓴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씨앗을뿌리는사람들)은 이름난 서양 고전들을 다루는 책이지만, 접근 방법이 독특하다. 중년의 지은이가 집 근처 컬럼비아대학을 다시 찾아 학부생들이 듣는 교양필수 과목을 1년 동안 청강하고 책을 읽은 경험을 풀어놓은 것이다. 오랫동안 고전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지은이는, ‘지금 여기’만 강조하는 미디어 중심의 세상 속에서 “타자와 맞닥뜨리는 만남의 지점이며, 현실을 성찰하는 힘을 준다”며 고전 읽기의 새로운 의미를 강조한다. 



입문서의 가장 큰 함정은, 그저 간략한 소개와 해설에만 치중할 경우 독자들에게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이자 시인인 허연씨의 <고전탐닉>(마음산책)은 그런 함정을 뛰어넘은 고전 소개서다. 자신의 작업을 ‘사적 고백’이라고 일컫는 지은이는,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책들이 내게 와서 무엇이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은 문학작품에서부터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과 같은 사회과학 서적까지 동서양의 명저 56권을 읽고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했다. 짧은 글 속에 명료한 해설과 감상을 담았다.

사회과학에 대한 입문서로는 최근 출간된 우석훈 박사의 <나와 너의 사회과학>(김영사)을 추천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사람들이 큰 부담 없이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안내하는 책을 내고 싶었다”는 지은이의 말처럼, 사회과학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강의처럼 쉽게 풀어놓았다. 과학주의와 해석학, 환원주의와 다원론, 실존과 선택 등의 딱딱하게 느껴지는 개념들에 좀더 쉽게 다가설 수 있게 한다. 지은이는 엘리트 남성의 전투 용어로 뒤덮인 사회과학의 언어가 여성을 포함한 생활인들의 일상용어로 바뀌어야 ‘사회과학의 르네상스’가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청소년들에게 권하는 입문서로는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가 있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던 지은이가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국제 기아 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2005년 기준으로 10살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등 적나라한 기아의 실상도 충격적이지만, ‘왜?’라는 질문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지은이는 절망적인 굶주림의 현실 반대편에는 다국적 금융자본과 이를 유지하는 과두적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까발리며,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서아프리카의 작은 국가 부르키나파소에서 개혁 정치를 펼치며 식량 자급자족을 이뤄냈지만, 프랑스 일부 세력의 사주로 살해당한 상카라 대통령의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지은이는 한국어판 서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이 단지 빈곤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생각을 변화시키려 하는 인문학 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최원형 기자)  

한겨레(11. 07. 09) 2012년 ‘정치의 해’ 앞두고 ‘선행학습’

다가오는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정치의 해’다. 현실 정치가 구질구질하다고 느낄수록 ‘정치 혐오증’에 빠질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철학을 논의해야 할 필요성도 커진다. 정치철학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굴 정치 문제에 대해 좀더 심도 깊게 생각해보게 하는 책들,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검증된 인기도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있다. 이 책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등 현대 정치철학의 주요 쟁점들을 피부에 와닿는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대신 이 책은 지은이 자신의 정치철학을 또렷하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일본 지바대학 교수 고바야시 마사야가 쓴 <마이클 샌델의 정의사회의 조건>(황금물고기)은 <정의란 무엇인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등 샌델의 주요 저작들을 살피며,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샌델의 정치철학에 대해 들여다보는 책이다. 지은이는 “샌델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좋은 삶’에 대한 추구, 곧 선이 있는 정의”라며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전적인 정의론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공공철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가 역사적인 변화에 역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동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인문학자 강유원씨가 쓴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라티오)는 플라톤의 <국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등 정치사상을 다룬 서구의 고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일러주는 책이다. 지은이는 고전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을 고려할 것, 기본 개념을 철저하게 익힐 것 등 고전을 읽을 때 주의할 사항을 정리해준다. 지은이는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며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공동체 속 인간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은 말에 의한 설득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설득의 궁극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정치사상은, 결국 공동체에 사는 모든 이들이 행복한 삶을 두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정치철학에 대한 고민을 생각해보려면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 정치학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참된 공화국의 건설’을 주제로 펼친 대화를 묶은 <다음 국가를 말하다-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웅진지식하우스)이 있다. 정치철학과 역사, 용산 참사와 같은 현실 등을 넘나들며 ‘민주공화국’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지은이들은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나라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나라”라는 핵심을 짚어준다. 두 사람의 사유에는 ‘씨알’이란 개념으로 개인과 전체의 관계성을 고민했던 함석헌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다. 정치의 목적, 국가의 본질과 구실 등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주제들을 철저하게 우리 삶에 기반해서 펼쳐냈다.(최원형 기자) 

11.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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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하여 '후흑학(厚黑學)'이란 말을 최근에 알았다.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마음'의 처세술을 가리킨다고 하니 일찍 알아서 좋을 일도 없지만, 모르고 사는 것도 능사는 아니겠다. 본래 중국의 처세술이라 하나 우리 주변에도 '후흑학의 대가들'이 적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정위안 푸의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돌베개, 2011)을 읽다가, 다시금 한비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비자를 검색하다가 찾은 책이 <후흑학 - 노자와 한비자의 제왕학>(인간사랑, 2010)이다. 역자인 신동준 씨의 <후흑학>(위즈덤하우스, 2011)도 이번에 나왔는데, '뻔뻔함과 음융함의 미학'을 앞세우며 '난세의 처세술'이자 '승자의 전략'으로 후흑학을 권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반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헷갈린다. 여하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는 마음으로 <후흑학>도 읽어봄직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생존할 수 있으니... 후흑학의 용례를 보여주는 칼럼을 첨부한다.

 

사마천은 '史記'에서 항우(項羽)를 최고 영웅으로 그렸다. "진나라가 민심을 잃자,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일어나 서로 다투었다. 항우는 한뼘의 땅도 없으면서 농촌에서 궐기, 3년만에 5제후를 이끌고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나누어 왕후를 봉하고 모든 정령(政令)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패왕(覇王)이 되었다. 비록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일찍 없었던 인물이다"라 썼다. 항우는 24세에 강동에서 일어나 26세에 진나라를 멸망시켰지만, 골목대장 출신 건달이었던 유방(劉邦)의 간교에 걸려 패전하자 치욕을 못참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항우는 자신의 패배를 '하늘 탓'으로 돌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을뿐 용병술에 진 것은 아니다"라 했다. 그러나 청나라 말엽의 중국 학자 이종오(李種吾)는 '후흑학(厚黑學)'이란 책에서 "유방은 낯 두껍고 속 검은 사람이어서 천하를 차지했고, 항우는 그렇지 못해 유방에 졌다"라 썼다. '후흑학'은 이종오가 중국 5천년 역사를 훑어 '역사의 주인공'이 된 인물들의 성정(性情)을 연구한 기록인데, 대부분의 영웅호걸들이 낯 두껍고 속 검은 자들이었다는 것. '유비'는 낯두꺼운 대표적 인물인데, 덕망 높은 자신의 이미지 만들기에 갖은 술수를 다 썼다. '조조'는 속 검은 대표적 인물. 사람을 최대한 이용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가차 없이 버렸고, '난세의 간웅'이라는 세평에 동의했다.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하나를 외교부에 취직시키기 위해 직원들이 욕봤다. 딸의 편의를 생각해서 시험일정을 조절하고, 응시자격 기준을 완화하고, 외교부 간부들을 면접관으로 들여보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주었다. 관리의 위세가 추상같았던 조선시대에도 없던 일이다. 과거시험에서 자신의 조카를 급제시킨 채점관이 파직된 적도 있다. 요즘 전국적으로 '낯 두껍고 속 검은 고위직'들이 엄청 많다는 소식이다. 역사는 그런 자들이 만들어가는 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망국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인간'을 만드는 약은 역시 '공자왈 맹자왈'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악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다. 부끄러워하고 미워함은 정의의 근원이다(無羞惡之心 非人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이 한 마디라도 가슴에 품고 사는 관리가 없는가.(경북일보, 10. 0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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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흑학-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
신동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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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08일에 저장

후흑학- 원전으로 읽는 후흑학
이종오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25,000원 → 23,750원(5%할인) / 마일리지 72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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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08일에 저장

난세를 평정하는 중국통치학
리쭝우 지음, 신동준 엮어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4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2011년 07월 08일에 저장
품절
후흑- 지독하게 현실적인 처세학
판후이성 지음, 허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1년 07월 08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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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1-07-08 16:33   좋아요 0 | URL
저도 얼마전에 후흑학이라는 말을 보고 무슨 뜻인지 몰라 검색해보았어요;;;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신간은 장바구니에 넣어놓았는데 이미 꽤 여러 권이 나와있군요!

로쟈 2011-07-08 18:24   좋아요 0 | URL
몇권은 중복되는 책들이에요...

모든사이 2011-07-08 16:57   좋아요 0 | URL
후흑학..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아마 후흑학의 대가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조세프 푸셰가 아닐까요? 츠바이크가 쓴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후흑학의 대가가 되려면, 고도로 '정치적'이어야할테니..

로쟈 2011-07-08 18:25   좋아요 0 | URL
사실 처세술 일반이 후흑학이죠...

2011-07-08 2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8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7-09 20:30   좋아요 0 | URL
예전에 번역된 미시마 유키오<부도덕 교육강좌>를 요즘 새로 펴냈더군요.이 책도 일종의 후흑학이죠.

로쟈 2011-07-11 23:39   좋아요 0 | URL
이종오의 책을 보니 후흑에도 단수가 있던데요. 무작정 후흑하는 건 하수들의 수라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7-12 16:55   좋아요 0 | URL
하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고수라고들 하죠.
 

요즘 손에 들고 있는 책 중의 하나는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이다. 지난주에 동네 서점에 갔다가 아이가 자기 책을 고르는 동안 나대로 고른 책이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서점에서 잠깐 넘겨보니 편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일곱 철학자'를 다루고있는 2부에서 특히 '구텐베르크의 자기성찰' 대목이 눈길을 끌어서 결국 손에 넣었다. 관련기사를 찾으니 교보문고에선 '휴가철 CEO가 읽을 책'의 하나로 선정해놓기도 했다. CEO가 아니더라도 잠시 마음의 휴가를 얻고 싶은 이라면 읽어볼 만하다(나는 이 서재를 언제 떠나보나?).  

  

한국경제(11. 04. 01) 주의력결핍장애ㆍ노모포비아…스마트폰이 만든 디지털 질병들

우리 모두 궁금하다. 스마트폰은 삶을 정말 스마트하게 만드는가.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이용한 네트워크는 확장될수록 좋다는'디지털 맥시멀리즘'은 참인가. 칼럼니스트이자 미디어 비평가인 저자의 답은 '아니다'이다. 디지털 네트워크 덕에 다들 세상과 가까워졌는진 몰라도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법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언론 · 정치 · 공공센터에서 실시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이 책에서 그는 디지털 네트워크에 대한 의존이 사람을 지나치게 외부 지향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남과 연결되려는 욕망과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려는 욕망을 함께 지니되 중요한 건 둘의 균형을 찾는 것인데 디지털 세상은 연결된 삶만 좇도록 부추긴다는 얘기다.

왜 아니랴.눈 뜨자마자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해 밤새 누가 내게 연락했는지,남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한다.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를 확립하려 애쓰던 과거와 달리 디지털기기 속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려 든다.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인지,누가 내 말에 주목하는지로 가치를 측정하려 애쓰는 셈이다.

틈만 나면 문자메시지와 이메일을 확인하고 웹서핑을 하는 것은 물론 페이스북 담벼락을 살피고 트위터에 댓글도 단다. 이러니 어디서건 한 가지 일에 단 3분도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는 마당이다. 흐트러진 집중력을 회복하자면 빼앗긴 시간의 10~20배가 필요하다고 돼 있다. 1분만 딴짓을 해도 제자리를 찾는 데 15분은 걸린다는 말이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맹신과 의존은 사람을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게 만든다. 책에 따르면 심한 경우 주의력결핍장애(ADT) 증세도 야기한다.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잠시 숨이 멎으면서 심하면 스트레스성 질환을 유발하는 '이메일 무호흡증'과 휴대폰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란 질환도 등장했다.

디지털 중독 증상은 조직의 생산성도 감소시킨다. 비즈니스 리서치 회사인 바섹(Basex)은 직장인 대다수가 그런 방해요인 때문에 근무시간의 25% 이상을 허비하고,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 또한 연간 9000억달러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 인텔 등 인터넷 관련 업체는 2008년 학자 · 컨설턴트 등과 함께'정보과잉 연구그룹'을 구성했다. 정보 과잉에 따른 업무 차질과 생산성 저하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다. 인터넷 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도 나왔다. '휴대폰 던지기 게임'과 외딴섬에서 전자기기 없이 지내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저자가 플라톤 · 세네카 · 셰익스피어 · 구텐베르크 · 소로 · 맥루한 등 오늘날 못지 않은 변혁기에 탄생한 위대한 인물 7명의 삶을 통해 내놓은 해결책은 극히 단순하다. '가끔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라'는 것이다. "멈추고 호흡하고 생각하라.마음의 온도를 낮춰라.그래야 세상의 속도를 늦추고 때 없이 엄습하는 불안도 줄일 수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11. 07. 07.  

P.S. '연결'을 끊어보라고 제안하는 책이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오히려 새로운 연결을 발견했다. 존 맨의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은 <속도에서 깊이로>가 아니었다면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에 책을 들게 하라' 장에서 주로 참조되는 책이다. 같이 언급되는 책은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 그리고 최근에 나온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도 소개된다. 제목은 원제에 따라 <책을 위한 변론>이라고 표기됐다. 이 또한 요즘 읽고 있는 책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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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11-07-08 03:26   좋아요 0 | URL
심야에 일어나 마땅이 할 것은 로쟈의 저공비행을하는 것인데요. 안경을 벗고 대하면 집중력이 높아집니다. 로자님이 선택한 책제목은 항상신선합니다. 속도에서 깊이로!

로쟈 2011-07-08 18:23   좋아요 0 | URL
그래도 너무 일찍 일어나시네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기획회의(299호) 말미에 실린 발행인의 말은 '어느 출판평론가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서재에 자주 드나든 분이라면 '어느 출판평론가'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의 저자이면서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최성일 씨이다. 한기호 소장이 그의 책 다섯 권을 한권으로 묶어서 펴내게 된 사정을 밝히고 있는데, 마지막에 적은 "지금이라도 그가 당장 병마를 뚫고 벌떡 일어나 이 작업을 계속 진행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바람이 무망하게 돼 안타깝다.   

개인적으론 저자와 아무런 면식이 없지만 그래도 책으로는 인연이 없지 않다. 그것은 그가 2009년 여름 예스24 웹진에 실은 에밀 시오랑(Emile Cioran, 1911-1995) 리뷰에서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를 언급하고 있어서이다. 시오랑을 매개로 해서 한번은 인연이 닿았던 셈이니 '최성일-시오랑-로쟈'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겠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루마니아 태생의 작가 에밀 시오랑을 리뷰하기로 마음을 다잡자마자 벽에 부딪혔다. 시오랑의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거나 무단·중복 번역된 그의 책 대부분이 절판 상태라 그런 건 아니다.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 지음, 산책자, 2009) 에필로그의 한 대목이다. “국역본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시오랑론을 쓴다는 건 치기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대로의 시오랑론을 꿈꾸었으되, 아직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변명이다.” (...)

내 셈법이 정확하다면, 에밀 시오랑 편은 내가 1997년 이맘때부터 쓰기 시작한 번역서를 중심으로 엮은 외국 사상가와 저자 리뷰의 195번째 글이다. (국내 저자 리뷰를 더하면 200번째가 된다.) 같은 형식의 글을 오래 썼다 하여 품질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다만 꾸준히 써 온 덕분에 이력은 붙었다.

로쟈의 한국어판 시오랑에 대한 불신은 원제목과 동떨어진 번역서 제목에서 기인한다. 내 수중에 있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우리말로 옮겨진 시오랑의 책은 5종이다(편역서 한 권은 제외). 시오랑의 대표작은 얼추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말 제목으로는 어떤 책이 옮겨졌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또 다양한 이름 표기 방식은 혼란을 가중한다.

“에밀 시오랑의 이름은 루마니아어 발음에 따라 ‘치오란’이라고도 표기되는데, ‘찌오런’은 조금 과도해 보인다. 루마니아 태생이긴 하지만 20대에 프랑스로 건너와 시오랑이 평생 산 곳은 파리다. 그리고 외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운명에 대해서 비통해 하긴 했지만 시오랑은 프랑스 체재 이후에 대부분의 에세이를 루마니아어가 아니라 새로 배운 프랑스어로 썼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406쪽)

저자의 시오랑 읽기의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뒤늦게 부듯한데, 저자가 실마리로 삼고 있는 것은 수전 손택의 시오랑론이다. 이 역시 처음에 이 블로그에, 그리고 나중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은 글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수전 손택의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이병용·안재연 옮김, 현대미학사, 2004)에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시오랑론”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손택의 두 번째 평론집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그런 줄 몰랐다(이 책은 손택의 이름을 수잔 손탁으로 표기). 그도 그럴 것이 손택의 에세이 표제인 「반(反)자기사고-찌오런에 관한 고찰」만으로는 이게 시오랑론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찌오런의 경우, 우리식 표기법으로는 에밀 치오런으로 해야 하나, 그곳 원래 발음인 ‘찌’와 우리식 표기인 ‘치’의 차이가 심해 이 경우는 원음에 가깝게 표기했다.”(‘역자 후기’)

수전 손택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시오랑은 보수주의자다. 시오랑에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생육 불가능의 흥미 없는 관점이다. 때문에 과격한 혁명에의 희망을 그는 성숙한 정신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킨다. 시오랑은 “루마니아 태생인데, 그곳의 저명한 지식인 망명자 대부분이 비정치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젊은 날 에밀 시오랑은 극작가 으젠 이오네스코,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로 여겨졌는데, 엘리아데는 파시즘에 부역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엘리아데는 적어도 파시즘 성향이었다.

손택은 시오랑을 높이 평가한다. 시오랑은 “진정한 역량을 지닌 현역 저술가 중에서 가장 ‘섬세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하나이다. 뉘앙스, 아이러니 그리고 정제(精製)는” 시오랑 사고의 본질이다. 나는 시오랑에게서 ‘역설의 중첩’을 본다.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마냥 다리를 두 번 꼰달지.

그리고 이어지는 건 저자만의 시오랑 리뷰, 시오랑론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역설의 중첩' 혹은 '복잡한 혼합체'라는 키워드로 시오랑 철학의 핵심을 간추리고 있다. 그의 솜씨를 음미해본다.  

에밀 시오랑은 고립무원의 괴팍한 사상가가 아니다. 손택은 시오랑을 키에르케고르, 니체, 비트겐슈타인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자로 본다. “이와 같은 후기 철학적인 현대적 철학 전통은 전통적인 형식의 철학적 화법은 이미 붕괴되어 없어졌다고 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들에겐 아포리즘, 수기, 메모 같은 불완전한 화법과 우화, 시, 철학적 이야기, 비평적 해석 같은 위험을 무릅쓴 화법이 주된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단절된 논증”이라고 표현한 시오랑의 방법론은 라 로슈푸코나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객관적 아포리즘과는 구별된다.

“그의 에세이가 제공하는 것은 진단(diagnosis)이다. 정통 요법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활이 하나의 객체, 하나의 사물로 바뀌어 가는 것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신적으로 좋은 취미로 인정해준다.” 손택은 시오랑의 “목적은 진단에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격언집 <독설의 팡세>(김정숙 옮김, 문학동네, 2004)는 시오랑 철학의 핵심을 담았다. 시오랑 책의 한국어판으로는 드물게 저작권 표시란이 있는 이 책은 우대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책 말미에 실린 ‘에밀 시오랑 연보’에서는 시오랑, 이오네스코, 엘리아데 세 사람을 20세기 초중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라고 언급한다.

시오랑은 여러 개념의 정의부터 남다르다. 자유는 “건강한 자들이 늘어놓는 억지”다. 슬픔은 “어떤 불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갈증이다.” 절망은 “대담해진 불행이며, 선동의 한 형식이고, 조심성 없는 시대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다.” 광기가 “확산의 경제학”이라면, “정신적 정상 상태는 폐쇄 경제학이며, 실패의 자급자족이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시오랑의 아포리즘은 이렇다. “예전에 철학자는 사색을 하되 글은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멸 받지는 않았다. 인간이 효율성 앞에 무릎을 꿇은 이래, 천박한 인간들은 작품이라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생산하지 않는 사람을 ‘실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실패자’들이 바로 현자였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현자일 것이다.”

이제 겹치는 아이러니,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면 “복잡한 혼합체”를 살필 순서다. “우울함이 사라질까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이, 우울함이란 치유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크게 안도할 것이다.” 하나 더 보자. “더 큰 고통의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 순간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라 해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오랑은 80대 중반까지 삶을 이어 갔다. 세상을 비관한 그의 장수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원할 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자살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자살의 유혹과 싸우는 데 들인 끈질긴 노력을 생각한다면, 나는 충분히 구원받고, 신(神) 속에 녹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시오랑은 자살을 반박한다. “우리의 슬픔에 그리도 기꺼이 봉사했던 이 세계를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자살은 낙관주의자의 몫이다. “그들은 낙관주의자가 더 이상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살 이유가 없으므로 죽을 이유 또한 없다.”

산문집 <절망의 맨 끝에서>(김성기 옮김, 에디터, 1994)와 <절망의 끝에서>(김정숙 옮김, 강, 1997)는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중 번역된 책은 「부조리에 대한 정열」의 본문 글귀를 제목으로 삼았다. 먼저 번역된 책의 그 대목은 “절망의 절정에서”다.

<동구로 띄우는 편지>(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0)와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2)은 한국어판 제목이 다른 같은 책이다. 앞서 나온 책은 표지에 원제를 부제목으로 썼고, 저자 이름은 ‘E.M. 치오란’으로 돼 있다. 다시 나온 책은 간기에 원제목을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저자 이름은 ‘에밀 시오랑’이다. <내 생일날의 고독>(전성자 옮김, 에디터, 1994)과 <노랑이 눈을 아프게 쏘아대는 이유>(박현철 옮김, 산수야, 1995)는 다른 책이다. 앞의 책은 ‘명상집’을 내세운다. 뒤의 책은 산문집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일시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의 격언들은 사회면 기사 정도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독설의 팡세>에서)

11. 07. 07. 

P.S.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의 미덕은 국내 소개된 저작의 목록을 거의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인데, 시오랑의 경우엔 중복을 포함해 7권이 나열돼 있다(나는 모두를 갖고 있다). 그중 <내 생일날의 고독>은 이번에 찾아보니 원제에 따라 <태어난 것의 잘못에 대하여>(실험출판사, 1981)로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같은 역자의 번역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구할 수 있는 시오랑의 책은 한권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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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1-07-07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성일씨 돌아가셨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가 유작이 되겠군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는 쾌유기념 판매때 구입해놓긴 했는데요. 참 열정적이고 독특한 작업을 하신게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11-07-08 18:21   좋아요 0 | URL
유례없는 작업이고, 앞으로도 혼자 하기는 힘들 듯해요...

비로그인 2011-07-07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깝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쟈 2011-07-08 18:22   좋아요 0 | URL
네, 꼭 필요한 분들은 일찍 떠나시네요...

singing 2011-07-07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하지 않는 사람을 실패자로 생각한다... 실패자가 현자였을 것이다...
별다른 소득없이.. 생산적이지 않은 하루하루다 싶었는데 그냥 좀.. 위로가 되네요..^^

로쟈 2011-07-08 18:22   좋아요 0 | URL
시오랑과 잘 맞으시나 봅니다.^^
 

기획회의(29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아렌트 읽기를 새롭게 자극하는 책이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는 건 아니어서 애를 먹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분량이 차버렸는데, 책의 전체적인 요지에 대해선 역자 해제를 참고할 수 있으며,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다. 아렌트에게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새로움'과 '탄생성'이란 주제에 대해선 기회가 되면 따로 다뤄보고 싶다.

  

기획회의(11. 07. 05) 아렌트 읽기의 등불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 서두에 박혀 있는 문구다. 우리말 번역서보다 먼저 구입해둔 원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자나 편집자가 가져온 듯싶다. 서론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제사로선 한국어본에만 있는 셈이다. 문맥을 바꿔보면, 굳이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등불’은 책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오락거리로 읽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렌트 읽기>란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책은 말하자면 아렌트 읽기의 ‘등불’을 자임한다. 사실 어둡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아렌트의 책은 여느 철학자들만큼이나 일반 독자가 읽기에 난해한 면이 있으므로 그런 등불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렌트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의 저자가 안내하는 길이고 보면 기대치는 꽤 올라간다.   

아렌트에 대해선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을 읽은 이후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돼 주섬주섬 읽고 책도 긁어모은 편이지만 나는 서론에서부터 배운 게 있다. 새롭게 알게 됐다기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건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다. 18살이 되던 해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열일곱 살 연상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그녀의 첫 번째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카트린 클레망의 소설 <마르틴과 한나>(문학동네, 2003)에 그려질 정도로 지금은 널리 알려졌는데, 처음엔 엘츠비에타 에팅거의 ‘폭로’가 있었다. MIT 교수인 에팅거가 아렌트와 하이데거 간의 미출간 서신들을 참고하여 <한나 아렌트/마르틴 하이데거>(1995)란 작은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스캔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영-브루엘의 평가는 싸늘하다. “에팅거의 책은 그것이 비록 아렌트-하이데거 서신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하나의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팅거는 “순진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대인 여학생과 매력적이지만 무정한 기혼의 가톨릭 교수”라는 두 배역을 설정하고 “열정적인 무모함과 배신, 그리고 배신당한 정부(情婦) 쪽의 노예적인 충성심이 뒤따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영-브루엘이 보기에 이것은 한갓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아렌트의 적지 않은 적진에 탄성을 일으켰고 그녀의 지지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아렌트 읽기’는 이러한 스캔들과 무관하게, 그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사이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철학적 입장이 중요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철학적 차이에 주목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동시대 철학자 야스퍼스이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추천으로 아렌트의 지도교수가 되며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영-브루엘에 따르면, “이 두 철학자들, 즉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각각 아렌트가 한 사람의 철학도에서 정치사상가로 변신하는 경험을 엮는 데 결정적인 씨줄과 날줄을 제공했다.”  비슷한 경향의 철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공적인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나치에 대한 태도에서 두 사람은 대별된다.   

유대인 아내와 결혼한 야스퍼스가 생계의 방편을 잃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데 반해서 <존재와 시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국가사회주의의 주장에 동조하는 오류를 범한다. 알려진 대로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에 임명되며 그해 5월 나치당에 입당하고 ‘급진적인 나치 이념가’를 자처하기까지 한다. 비록 1년이 안 돼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므로 그의 동조는 일시적인 것이긴 했지만 결코 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불미스런 연루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관심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에 자신이 어떤 철학적 이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사적 스캔들 이후에 하이데거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다. ‘세계’에서 물러나 관조적 고독 속에 침잠하면서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경멸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렌트가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의 모습이었다.   

하이데거와는 대조적으로 야스퍼스는 “세계를 경멸하지도 자기 자신으로 후퇴하지도 않고 (...) 공적인 삶의 조류에 자신을 내맡기고 일관된 합당성을 견지하면서 공적인 이슈들에 관해 발언한 지식인으로서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아렌트에게서 특별한 존경을 불러일으켰는데, 세계에 대한 사랑과 공적 영역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아렌트 철학의 밑바탕이기도 했다.  

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구를 빌려 자신의 시대, 20세기 중반 전체주의가 판을 치고 곧이어 전쟁과 대량학살이 인간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좌절시킨 시대를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이때 어둠은 죽음이나 비극과는 다른 무엇이다. 무엇이 어둠인가? “어둠은 사람들 사이에 열린 빛의 공간들,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인 공간들이 외면당하거나 회피당할 때 다가오는 어떤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공적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해 지겨워하는 태도’다. 이미 20대 중반에 아렌트는 낭만주의자들의 ‘자아로부터의 도피’를 맹렬히 비판한 바 있다. 그때 자아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의 자아’이다. 그러한 자아로부터의 도피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소외’, 곧 세계로부터의 소외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으로서 ‘세계-사랑’에 대한 반란이다. 하이데거가 세계-소외의 철학자였다면 아렌트는 야스퍼스와 함께 세계-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배운 것 한 가지를 너무 길게 적었다. 이후에도 저자는 타계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란 관점에서 아렌트의 생각과 그 현재적 의미를 반추해나간다. 저자와의 동행이 아주 평탄하지는 않다. 역자의 말을 빌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히 무겁고 진지한 필치”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 또한 매끄러운 편은 아니며 “미국과 유럽의 우파로서는(On the American and European right)” 같은 구절이 “미국과 유럽의 권리에 관한”(67쪽)이라고 번역되는 식의 오역도 군데군데 독서를 방해한다. 길잡이 등불치고는 사나운 등불이라고 할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옮긴이 해제’에 책의 요지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부터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줄 수고를 덜었다. 

11.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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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ing 2011-07-0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읽기'읽고 있는데(두번째로^^)저는 쌤의 글을 읽으며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네요.ㅎㅎ
행위와 탄생성의 관계도,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둔 것도...절로 줄을 긋게되었는데 남아공의 진실과화해위원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어요.
찾아보니 푸른역사에서 '세계의 과거사청산'(안병직)이란 책이 있던데 도움이 될까요?

로쟈 2011-07-08 18:19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선 품절인데요. 푸른역사에서 할인가격에 구입하시면 될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