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9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를 거리로 삼았다. 아렌트 읽기를 새롭게 자극하는 책이지만 책장이 잘 넘어가는 건 아니어서 애를 먹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분량이 차버렸는데, 책의 전체적인 요지에 대해선 역자 해제를 참고할 수 있으며, 그게 더 빠르고 정확하다. 아렌트에게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새로움'과 '탄생성'이란 주제에 대해선 기회가 되면 따로 다뤄보고 싶다.
기획회의(11. 07. 05) 아렌트 읽기의 등불
“우리에겐, 가장 어두운 시대에조차 어떤 등불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 서두에 박혀 있는 문구다. 우리말 번역서보다 먼저 구입해둔 원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자나 편집자가 가져온 듯싶다. 서론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제사로선 한국어본에만 있는 셈이다. 문맥을 바꿔보면, 굳이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이 아니더라도 ‘어떤 등불’은 책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이다. 오락거리로 읽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렌트 읽기>란 제목을 달고 있으므로 책은 말하자면 아렌트 읽기의 ‘등불’을 자임한다. 사실 어둡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아렌트의 책은 여느 철학자들만큼이나 일반 독자가 읽기에 난해한 면이 있으므로 그런 등불이 필요하다. 게다가 아렌트 전기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의 저자가 안내하는 길이고 보면 기대치는 꽤 올라간다.
아렌트에 대해선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을 읽은 이후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돼 주섬주섬 읽고 책도 긁어모은 편이지만 나는 서론에서부터 배운 게 있다. 새롭게 알게 됐다기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건 아렌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야스퍼스의 관계다. 18살이 되던 해 마르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한 아렌트는 열일곱 살 연상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그녀의 첫 번째 스승이자 연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카트린 클레망의 소설 <마르틴과 한나>(문학동네, 2003)에 그려질 정도로 지금은 널리 알려졌는데, 처음엔 엘츠비에타 에팅거의 ‘폭로’가 있었다. MIT 교수인 에팅거가 아렌트와 하이데거 간의 미출간 서신들을 참고하여 <한나 아렌트/마르틴 하이데거>(1995)란 작은 책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스캔들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영-브루엘의 평가는 싸늘하다. “에팅거의 책은 그것이 비록 아렌트-하이데거 서신에 근거하고 있다고는 할지라도 하나의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팅거는 “순진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대인 여학생과 매력적이지만 무정한 기혼의 가톨릭 교수”라는 두 배역을 설정하고 “열정적인 무모함과 배신, 그리고 배신당한 정부(情婦) 쪽의 노예적인 충성심이 뒤따르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영-브루엘이 보기에 이것은 한갓 ‘공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아렌트의 적지 않은 적진에 탄성을 일으켰고 그녀의 지지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아렌트 읽기’는 이러한 스캔들과 무관하게, 그 너머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사이의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철학적 입장이 중요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철학적 차이에 주목하고자 할 때 중요하게 부각되는 인물이 동시대 철학자 야스퍼스이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추천으로 아렌트의 지도교수가 되며 그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영-브루엘에 따르면, “이 두 철학자들, 즉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는 각각 아렌트가 한 사람의 철학도에서 정치사상가로 변신하는 경험을 엮는 데 결정적인 씨줄과 날줄을 제공했다.” 비슷한 경향의 철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공적인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했다. 특히 나치에 대한 태도에서 두 사람은 대별된다.
유대인 아내와 결혼한 야스퍼스가 생계의 방편을 잃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데 반해서 <존재와 시간>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국가사회주의의 주장에 동조하는 오류를 범한다. 알려진 대로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 집권 직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에 임명되며 그해 5월 나치당에 입당하고 ‘급진적인 나치 이념가’를 자처하기까지 한다. 비록 1년이 안 돼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므로 그의 동조는 일시적인 것이긴 했지만 결코 피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불미스런 연루는 그의 철학의 근본적인 관심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에 자신이 어떤 철학적 이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철학사적 스캔들 이후에 하이데거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다. ‘세계’에서 물러나 관조적 고독 속에 침잠하면서 공적 영역에 대해서는 경멸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렌트가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하이데거의 모습이었다.
하이데거와는 대조적으로 야스퍼스는 “세계를 경멸하지도 자기 자신으로 후퇴하지도 않고 (...) 공적인 삶의 조류에 자신을 내맡기고 일관된 합당성을 견지하면서 공적인 이슈들에 관해 발언한 지식인으로서 거의 독보적”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아렌트에게서 특별한 존경을 불러일으켰는데, 세계에 대한 사랑과 공적 영역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아렌트 철학의 밑바탕이기도 했다.
아렌트는 브레히트의 시구를 빌려 자신의 시대, 20세기 중반 전체주의가 판을 치고 곧이어 전쟁과 대량학살이 인간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좌절시킨 시대를 ‘어두운 시대’라고 불렀다. 이때 어둠은 죽음이나 비극과는 다른 무엇이다. 무엇이 어둠인가? “어둠은 사람들 사이에 열린 빛의 공간들, 사람들이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공적인 공간들이 외면당하거나 회피당할 때 다가오는 어떤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공적 영역으로서 ‘정치에 대해 지겨워하는 태도’다. 이미 20대 중반에 아렌트는 낭만주의자들의 ‘자아로부터의 도피’를 맹렬히 비판한 바 있다. 그때 자아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의 자아’이다. 그러한 자아로부터의 도피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소외’, 곧 세계로부터의 소외이다. 그것은 인간조건으로서 ‘세계-사랑’에 대한 반란이다. 하이데거가 세계-소외의 철학자였다면 아렌트는 야스퍼스와 함께 세계-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배운 것 한 가지를 너무 길게 적었다. 이후에도 저자는 타계한 지 30년이 넘은 지금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란 관점에서 아렌트의 생각과 그 현재적 의미를 반추해나간다. 저자와의 동행이 아주 평탄하지는 않다. 역자의 말을 빌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히 무겁고 진지한 필치”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 또한 매끄러운 편은 아니며 “미국과 유럽의 우파로서는(On the American and European right)” 같은 구절이 “미국과 유럽의 권리에 관한”(67쪽)이라고 번역되는 식의 오역도 군데군데 독서를 방해한다. 길잡이 등불치고는 사나운 등불이라고 할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옮긴이 해제’에 책의 요지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부터도 책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줄 수고를 덜었다.
11. 07.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