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경이'는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이다. <채플린 - 나의 자서전>(김영사, 2007)가 문제의 책인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어서 분량이 1,000쪽이 넘는다(이 책에 견줄 만한 건 작년에 나온 패트릭 맥길리건의 <히치콕>(을유문화사)이나 세르주 투비아나 등의 <트뤼포>(을유문화사) 정도이다. 물론 이 두 권은 자서전이 아니지만). 물론 그 부피에 걸맞은 삶의 곡절들이 갈피마다 숨어 있을 터이다. 관련기사를 옮겨놓고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인다.

 

한국일보(07. 12. 22) '희극광대' 찰리의 위대한 비극

콧수염,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 지팡이, 중산모를 쓴 우스꽝스러운 거지신사의 모습으로 대공황기의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찰리 채플린(1889~1977). 채플린이 자서전을 쓰고 있던 1960년대초 한 여류소설가는 “당신이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를 가졌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4번의 결혼과 수많은 스캔들로 점철된 채플린의 여성편력을 의식한 궁금증이었던 것. 그러나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나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달리 섹스가 인간의 복잡한 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추위, 배고픔, 그리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 등이 한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는다.

<키드> <모던타임스> <황금광시대> 등 무성영화사를 수놓을 만한 탁월한 작품을 통해 백만장자가 됐지만 채플린의 예술적 자양분은 유년시절의 치욕적인 가난과 혹독한 불행이었다. 연극배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채플린의 생후 1년 만에 갈라섰고, 술독에 빠져살던 아버지는 서른 일곱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유능한 가수였던 어머니도 후두염 때문에 무대생활을 접어야 했고 정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소년들처럼 런던의 빈민구호소를 들락날락하던 채플린은 5세 때부터 무대에 서야 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잡화점 심부름꾼, 진료소 청소부, 인쇄소 직공 등을 전전해야 했다. 성공한 인물들 이면에는 가난과 불행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채플린의 위대함은 그것을 유머로 승화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채플린- 나의 자서전>이 처음으로 완역됐다. 번역본의 분량이 1,0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만큼 작품세계 이외에는 잘 알 수 없었던 채플린의 사랑, 성공과 실패 등 사생활과 공생애의 전반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그의 말이 대변하듯 비극을 유머로 극복하고 그것을 예술로 환치시킨 채플린의 낙천적 세계관을 확인하고 거기서 생에 대한 힌트를 얻어낼 수 있다면 책 두께만큼의 충분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의 미덕이라면 휴머니즘으로 귀착되는 자유주의적 철학을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2차대전 중 독일과 싸우고 있던 소련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자는 연설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오인 받아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국에서 쫓겨나지만, 실상 정치적 이념은 강력한 반(反) 파시즘이었다.

나치 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질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애국주의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이다. 그는 애국주의에 대해 “햄버거나 코카콜라 같은 지엽적인 습관에 길들여지고 학습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맹목적으로 고국을 사랑하고 충성하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요구는 나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유성영화시대에 들어서도 그가 히틀러를 풍자하는 <위대한 독재자>(1940) 같은 명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철학이 뒷받침 됐기 때문일 것이다. 풍부한 사진자료와 처칠, 사르트르, 흐르시초프(*흐루시초프), 카잘스, 아인슈타인 등 그가 만났던 20세기의 명사들에 대한 품평을 엿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1964년작.(이왕구기자)

07. 12. 22.

P.S. 한편으로 어제 잠시 들춰본 벤야민의 책에도 채플린 얘기가 나온다. 이번에 나온 선집 중 한 권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 수록돼 있는데, '채플린'이란 짧은 글 외에도 '러시아 영화예술의 상황에 대하여'에 '러시아 채플린'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눈길이 갔다. 러시아에 좋은 외국영화들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빚어지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인다.

"러시아의 개별 예술가들에게는 여기서 비롯되는 관중들의 무지가 편리한 측면이 있다. 일진스키는 채플린을 매우 부정확하게 모방하여 작업하면서 오로지 채플린이 러시아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희극배우로 통하고 있다."(228쪽)

'일진스키'는 역주에 Igor Vladimirovich Iljinsky(1901-87)로 소개되고 있는데, '일진스키'가 아니라 '일린스키'로 읽어야 한다(표기의 'j'는 'y'와 호환되는 반모움이다). 즉 벤야민이 언급하고 있는 희극배우의 이름은 '이고르(이고리) 일린스키'이고 1927년에 젊은 배우였던 일린스키는 이후에 국민배우로 성장한다(내게도 굉장히 낯이 익은 배우이다). 그가 '러시아의 채플린'이었다는 것. 

마야코프스키의 <빈대>(1928)와 메이에르홀드가 연출한 고골의 <검찰관>(1926)에 출연하기도 했던 일린스키의 영화데뷔작은 유명한 소비에트 SF영화 <알리에타>(1924)였다.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일린스키는 엘다르 랴자노프의 데뷔작인 뮤지컬 코미디영화 <카니발의 밤>(1956)에서의 일린스키다(해빙기를 대표하는 영화의 하나다). 해빙기 청춘남녀의 사랑과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를 다룬 이 영화에서 일린스키는 고루하면서도 코믹한 관료로 등장한다(http://www.youtube.com/watch?v=Rss5fhpE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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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옮겨놓는다. 이달초 작가가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것은 이미 알고 있던 바인데 그 '객담'이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두 작가에 대한 '예찬'이기도 해서 '러시아 이야기'로 분류해놓는다. 더불어 몇 가지 코멘트도 덧붙인다. 

한겨레(07. 12. 23) 러 혁명이 숨통 막은 ‘문학 우상’

나는 한번도 외국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무슨 세미나가 있어서 일본에 아흐레를 묵어야 한다면, 아홉 권의 일본 소설을 가지고 가서 하루에 한 권씩 읽고 돌아오곤 했으니 그건 여행이 아니다. 엉뚱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장소는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욕조다. 이때 손바닥에 배어드는 습기와 얼굴에 흐르는 땀을 걷어내기 위해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것은 필수.

한 십여년 전, 중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 만리장성 코 앞에서, 나홀로 호텔방에 남았다. “흥, 그 까짓 만리장성!” 그러면서 그날치의 중국 소설을 읽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채 뜨거운 욕조의 물이 식을 때까지 책을 읽는 여행자. 아무리 현지에서 읽는 그 나라의 소설이 각별한 독서 아우라를 선사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지난 11월30일에서 12월6일까지 6박7일 동안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관하는 한-러 문학교류 행사에 참가했다. 이번에도 여섯 권의 러시아 소설을 챙겨가고자 책을 골랐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 그것들을 털어냈다. 하루에 한 권씩, 가져간 책을 모두 독파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이번 여행에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그 조바심이 책읽기에 필요한 적당한 동력이 되어 주었으나, 이제는 그 조바심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늙은 것이다.

그래서 골라든 책이 마르크 슬로님의 〈소련현대문학사〉(열린책들, 1989). 시대순으로 대표적인 작가와 문학사조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작은 러시아 작가사전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어, 오랫동안 러시아 작가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참조하곤 했으나 완독을 하진 못했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 자주 들르는 단골 헌책방에서 D. S. 미르스키의 〈러시아문학사〉(문원출판, 2001)를 구했다. 앞의 책이 1917년 혁명 전의 과도기부터 소련공산당 치하의 사미즈다트(지하출판)까지를 다루었다면, 뒤의 책은 11세기 초 고대 러시아 문학의 발생에서부터 혁명 직후인 192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러시아 작가들과 서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마야코프스키와 불가코프의 나라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악마와 마르가리따〉(삼성출판사, 1983)라는 제명으로 처음 선보였으나 훗날 〈거장과 마르가리따〉(한길사, 1991)로 게재된 불가코프의 작품을 읽고 그의 ‘광팬’이 되기 훨씬 전에, 나의 러시아 문학 우상은 단연 마야코프스키였다. 20대 초반 문청 시절, 앤 차터스와 새뮤얼 차터스 부부가 함께 쓴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까치, 1981)을 읽은 순간부터, 러시아는 내 청춘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해가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아침은 희뿌연 새벽과 구분이 되지 않았고, 오후 네 시에는 아예 해가 졌다.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는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 욕조 속에서 문학기행을 했다. 레닌은 미학적 전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공산당 관료들에겐 상상력이 마비되고 없었다. 절판된 마야코프스키 희곡집은 재간되어야 하고, 미간인 불가코프의 작품은 속간되어야 한다.(장정일 소설가)

07. 12. 22.

Д. Святополк-Мирский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литературы

P.S. 러시아문학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했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교과서' 역할을 했던 것이 미르스키의 <러시아문학사1, 2>(홍성사, 1985; 화다, 1988)와 슬로님의 <소련의 작가와 사회>(열린책들, 1986)였다. 모두 영어본을 옮긴 것인데, 망명문학사가인 드미트리 미르스키의 책은 최근에 러시아어본도 출간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러시아문학사>(2006)라고 나온 책이 그것인데 876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사라고 소개돼 있다.  

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Михаил Булгаков. Пьесы

한편, 작가가 "절판된 마야코프스키 희곡집"이라고 적은 것은 3권짜리 선집의 하나였던 <미스쩨리야 부프>(열린책들, 1993)를 가리킨다. 표제작 외에 <빈대>와 <목욕탕> 같은 1920년대말의 풍자극들이 실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마야코프스키가 불가코프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는 점. '마야코프스키와 불가코프의 나라'라고 돼 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적대적 관계였다(러시아에서는 두 사람의 이 적대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도 나와 있다). "미간인 불가코프의 작품은 속간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문했는데, 주요작들로 치면 현재 1/3 정도는 번역/소개돼 있다(<투르빈가의 나날> 같은 대표작이 빠져 있다. 이미지는 불가코프 희곡집인데, 1991년판으로 800쪽 분량이다. 내가 갖고 있는 1987년판은 656쪽 분량이다. 3년전에 3,000원을 주고 구했던 책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새 번역본도 내년초에는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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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퍼렇고 허연 곳으로 여행을 떠나도 좋으련만..욕조속의 책읽기, 그것도 낯선 도시와 관련된 책을 읽기.. 손이 젖어 책장만 안젖는다면 (다소 성가신 일 일것 같지만)독서광들의 어쩔 수 없는 유희.. 어디 가까운 일본 온천에라도 다녀오고픈데 말이죠..내게 있는 마야코프스키는 누래지고 있네요

로쟈 2007-12-22 20:48   좋아요 0 | URL
일본 정도야 얼마든지 다녀오실 수 있을 텐데요...
 

그림에 문외한이더라도 한번 보면 고흐만큼이나 쉬이 잊을 수 없는 화가에 모딜리아니(모디)가 있다. '목이 긴 여인'들이 너무도 개성적이기 때문인데, 그 그림들의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연인 잔 에뷔테른의 그림들과 함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2. 21) 모딜리아니와 연인 잔의 애틋한 사랑

풍성한 갈색 머리채, 갸우뚱한 고개, 오른손으로 앞가슴을 가린 채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목이 긴 여인. 모딜리아니가 죽기 한 해 전(1919년)에 그린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이다. 태어난 해는 각각 1884년, 1898년으로 14년 차이가 나지만 1919년 같은 해에 죽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모디)와 잔 에뷔테른. “마치 항상 알고 지낸 것 같았던” 이들은 1917년 봄 몽파르나스의 화가들 모임에서 눈이 맞은 이래 3년 동안 지독한 사랑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가난한 커플은 후원가가 내준 빌딩 꼭대기의 작업실에서 알콩달콩 지내다 모디의 결핵이 악화돼 니스로 요양을 갔다. 여기서 잔은 훗날 아버지 평전을 쓴 딸을 낳았고 모디는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을 가장 많이 그렸다. 행복은 잠시. 생활고는 모디의 성격을 괴팍하게 만들어 파리로 돌아왔을 때 모디의 병세는 악화돼 있었다. 1920년 1월 모디가 병원에서 죽은 이틀 뒤 에뷔테른 역시 친정집 아파트 5층에서 투신 자살했다. 8개월 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

‘미술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모딜리아니의 주변에는 모델이 되어주겠다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안나 아크마토바(*아흐마토바), 베아트리스 헤이스팅스, 루니아 체호프스카야 등등. 하지만 이들은 모디가 잘 나갈 때의 얘기. 미술계의 주류와 타협하지 않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 술과 마약에 빠져든 그에게 나타나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주겠다며 반려가 되어 ‘생명의 예술’을 창조시킨 여성은 에뷔테른이다.

이러한 모디와 에뷔테른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복원한 전시회가 열린다. 27일부터 내년 3월16일까지 고양시 아람미술관(031-960-0180)에서 열리는 ‘천재, 열정을 그리다’ 전이 그것. 모디가 주로 초상화를 많이 그린 탓에 모디 관련 전시회의 모티브는 ‘모디와 그의 모델’이 주류였다. 하지만 모디와 마지막 3년을 지낸 에뷔테른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베일에 싸인 채 전설로만 떠돌았다. 애초 가족들의 반대에 부닥쳤던 이들의 사랑은 사후에도 마찬가지여서 따로 묻힌 지 10년 뒤에야 합장이 가능했다. 또 가족들은 잔의 작품이 모디에게 가려져 왜곡될 것을 우려해 공개를 반대해 왔다. 에뷔테른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2000년 ‘모딜리아니와 그의 친구들’이란 전시회에서부터다. 비로소 미술사적으로 대접을 받게 됐다.

한국 전시에서는 잔의 유화, 과슈, 아크릴, 드로잉 등 65점, 모딜리아니의 유화 및 드로잉 45점과 공동드로잉 1점,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엽서, 사진, 머리카락 등 150점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모디의 애정이 담뿍 담긴 그림 ‘에뷔테른’에서 막연하게 상상되던 두 사람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모디가 특별한 만큼 그가 사랑한 여인 역시 특별한 존재였음을 드러낸다.(임종업 선임기자)

07. 12. 21.

P.S. 덧붙일 사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앤디 가르시아 주연의 영화 <모딜리아니>(2004)도 소개되면 좋겠다는 것(영화의 한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XekpJXGKeTc 참조).

그리고 또 한가지는 모디가 그린 아흐마토바. 1911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린 스케치들이 남아있다. 아흐마토바(1889-1966)는 20세기 러시아시의 디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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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21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딘스키와 반 고흐 그리고 모딜리아니...까지. 방학특수인가요^^
멀리까지 가서라도 봐야겠군요..
고양시가 꽤 좋은 레퍼토리들을 마련하는것 같아요..

맨 아래 사진 아흐마토바의 표정..참 좋네요.

로쟈 2007-12-22 01:38   좋아요 0 | URL
아흐마토바에 관한 책을 요새 새로 구했는데 겸사겸사 읽어보고 싶네요...

2007-12-21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22 01:39   좋아요 0 | URL
네, 너무 잠깐이었습니다. 나중에 길게 말씀을 나누도록 하지요.^^

李潤映 2007-12-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가와 여인이 항상 일치되는 주제인지는 몰라도 같이 놓고 보면 항상 흥미있는 것이 될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언제나 사람의 삶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게 에로스적인 것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런 듯 하구요.

로쟈 2007-12-22 01:40   좋아요 0 | URL
모든 범인의 뒤에는 여인이 있다는 속설이 예술가들에게도 대부분 맞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기고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2/021162000200712200690024.html). 겸사겸사 어제의 대선을 겨냥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87년 민주항쟁(혹은 87년 체제) 20주년을 마무리하면서 개인적인 감회를 적은 것이기도 하다(기사는 주로 무페의 민주주의론에 할애돼 있지만). 서두와 말미에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잠시 인용했는데, 알다시피 80년대 대학가에서(혹은 술자리에서) 자주 불리던 노래이다. 최근에 알게 된 건 이 노래를 당시 김광석씨가 불렀다는 것(짐작엔 노찾사 시절의 김광석이니 '새파란' 가수 김광석이기도 하다). 동영상(http://www.youtube.com/watch?v=YlEUdII-EGk)과 같이 음미해볼 만하다. 그리고 묻어둘 만하다.

 

한겨레21(07. 12. 20) 더 많은 목마름이 필요하다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숨죽여 흐느끼며” 남몰래 적던 이름이 있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그의 만세를 부르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가 싶은 기억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적은 이름이 ‘민주주의’였고 우리가 부르던 만세가 “민주주의여 만세”였다. 그리고 20년, 어느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따금 묻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를.

그러자니 먼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물어야겠다. 혹은 한 정치철학자를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이 무엇인가를. 클로드 르포르에 따르면 민주주의 혁명이란 권력의 자리를 ‘텅 빈 장소’로 만든 사회적 제도의 새로운 기원이다. 이 민주주의 혁명 이후에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그 텅 빈 자리에 앉혀놓을 권력의 대행자를 뽑아왔다. 간혹 못해먹겠다고 푸념도 늘어놓는 자리이지만 한꺼번에 열두 명이나 나서서 좀 앉게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역설의 자리는 어떻게 마련되고 또 유지되는 것인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의 물꼬를 튼 바 있던 샹탈 무페의 이어지는 두 저작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펴냄)과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펴냄)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민주주의의 역설’에 새삼 주목하도록 해준다. 먼저, 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할 정도로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는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런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나’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은 불가피하다. 즉,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그래서 ‘구성적 외부’라고 부른다). 이때 ‘그들-우리’ 관계는 정치에서 자연스레 ‘적-친구’ 관계로 전화된다. 이 적-친구 관계의 갈등과 적대는 항구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이러한 관계와 조건의 산물이기에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행위자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인정할 때 더 ‘민주적’이 될 수 있다. 민주적 사회는 사회적 관계의 완벽한 조화가 실현된 사회가 아니다. 국민 전체의 ‘승리’나 ‘행복’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을 말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기만이다. 민주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승인을 가리킬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프로젝트이다(다만 덧붙이자면, 우리의 ‘적’에는 ‘적대적인 적’과 ‘우호적인 적’이 있어서 ‘그들-우리’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합적 관계도 형성하며 이를 통해 ‘경합적 다원주의’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된다). 대선은 그런 민주주의의 경연장이다. 샹탈 무페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은 적대감이 아니라 합리성과 중립성을 가장한 합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타는 목마름’이고 ‘치 떨리는 노여움’이다.

07. 12. 20.

P.S.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목마름'과 '노여움'의 대상은 어제 패배을 안은 '진보'진영쪽이다. 자칭 87년 민주화의 주역들이자 그 시대정신을 계승한 이들이지만 진정한 계승은 언제나 '배반'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에는 눈을 감은 채 (최소한) 지난 5년을 보낸 듯하다('배반'하기 위해 '계승'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절망의 골도 열망만큼이나 깊어진 만큼, 적대의 전선 또한 다시 짜여져야겠다. '민주 vs 반민주'의 구도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문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전선은 복수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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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2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한 어조 속에 숨겨진 열정의 언어를 읽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감사한 글이었습니다. 정의(定義/正義)에 관한 하나의 '지침'으로, 마음 속에 담아갑니다.^^

로쟈 2007-12-21 09:34   좋아요 0 | URL
그냥 '감회' 정도입니다. '지침'까지야.^^;

李潤映 2007-12-2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역정을 생각하니 또 감회가 새롭군요. 아마도 이러한 역정속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이 타는 목마름이고 치 떨리는 노여움이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이면에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인간이 이룩한 사회와 국가의 이면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준 치밀함과 주도 면밀함을 생각을 한다면, 인류의 민주주의에 대한 긴 여정이 보여주는 이중주에 또한 신비로움까지도 느껴진다는 생각입니다.적과 친구의 이중성에 대한 존재적 성찰은 민주주의의 근간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사람들이 그리고 사회가 겪어야 하는 과정은 타는 목마름과 치떨리는 노여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일 거란 생각도 드는군요.

로쟈 2007-12-22 01:43   좋아요 0 | URL
김지하의 시는 사실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다시 쓴 것인데, 저는 두 시 간의 상호텍스트성과 함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긴장 관계를 묶어서 다루고 싶다는 생각을 이 글을 쓰면서 가졌더랬습니다. 실상 기사에서는 그런 뜻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의 역설과 역정에 대한 생각도 나중에 같이 적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후배가 올해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문혜진 시인의 <검은 표범 여인>(민음사, 2007)을 보여주길래 몇 편 읽다가 요즘은 또 '노골적인' 시들이 유행인가 싶어 관련기사를 검색해봤다(시인의 첫번째 시집은 <질 나쁜 연애>였다!). 마광수의 관능적인지 관념적인지 헷갈리는 시들과는 분명 다른 유형이긴 하다. 한편으론 여성시인이 '섹스'에 대해서 쓸 때 독자-비평가들은 왜 관대해지거나 무장해제되는지 궁금하다(여성의 몸속에 우주와 존재의 비밀이 있다고요? 설마!).

가령 표제작의 서두는 이렇다: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표범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어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섹스를 나누다 프러시아의 스켄헤드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아도 좋겠어." 단편적인 예이긴 하나 마광수의 시만큼 헷갈린다(더불어 성욕은 진정한 욕망의 알리바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또한 '원초적 관능'과 대한 상투적 판타지는 아닌지. 조금 아찔한 시들도 있다. 가령 '홍어'의 세번재 연: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를 맡아보지 못해서 이게 실감인지 관념인지 헷갈리지만 여하튼 전철에서 펴놓고 읽지 못할 시집이 한권 더 생긴 건 분명하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조선일보(07. 12. 10) 여성의 몸속에 우주와 존재의 비밀이…

여성의 몸을 통해 우주와 존재의 비밀을 노래하는 여성시인들이 연말 시단에서 주목받고 있다.
‘젖을 물린다/ 방심한 짐승의 눈빛으로/ 달콤한 젖내에 겨워 가장 작고 예민한 입술의 애무를 받으며/(중략)/생장점이 극에 달했을 때/ 우주는 스스로를 반복한다/ 순환의 리듬이/ 세상의 경전을 살찌우는 동안/ 몸속 유전자의 기억은/ 피를 흘리며 날고기를 씹는다’(문혜진의 시 ‘야생의 책’ 부분)

최근 제2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문혜진(31)시인은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적 여성시와는 다른 새로운 여성시의 관능적 상상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심사위원들(최승호 남진우 서동욱)로부터 받았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를 도발적인 언어로 공격하거나, 여성을 풍요로운 대지의 상징으로 예찬해 온 기존 여성시의 문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 “여성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비근한 일상에서 시가 시작되더라도 곧 까마득한 시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진다”고 평가한 시인·평론가 남진우는 “여성의 육체적 심연에서 길어 올린 언어로 쓰인 시답게 이 시인의 시는 관능적이면서도 문명 저편의 야성의 부름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49편의 수상작들 중에서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로 시작하는 시 ‘홍어’도 화제작이다. 홍어를 매개로 한 후각과 미각을 통해 욕망과 죽음에 대한 본능을 선명하게 환기시킨 이 시는 음식과 허기를 연결시키면서 결국 육체성을 지닌 존재의 허무와 비애를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이미 현대문학상, 육사시문학상을 받은 2000년대의 스타 시인 김선우는 11일 오후 5시 ‘문학의 집 서울’에서 제9회 천상병 시상(詩賞)을 받는다. 수상작은 시집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벌써 네티즌들의 애송시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전문)

‘여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성적인 상상력의 내면풍경을 한 단계 승화시킨 진전된 세계가 있다’(심사위원 신경림 박정희 정호승 방민호)는 수상자 선정 이유에 걸맞게 김선우의 시집은 관능적인 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감각의 세계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존재의 깊은 울림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노래로 전한다.(박해현 기자)

07.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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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12-2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사위원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신경림, 정호승등 김선우 좋아하게 생겼습니다. 이 시인 <도화아래잠들다> 읽어보며 그 도저한 여성적 관념성에 떨떠름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그걸로 이름값 좀 하나 싶습니다. 다루는 소재에 비해 글 다루는 섬세함이나 언어적 감각은 떨어지는 여자 시인정도의 평가. 여담삼아, 이 시인 시들 강조하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얼굴모델같은 이 시인얼굴 사진을 멋들어지게 뽑아 붙여놓더군요.요즘은 문인들도 얼굴이나 연출로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나 봅니다.
문혜진의 시들은 몇편 읽어보니 김언희 이상의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헌데 '홍어' 저거 남자시인이 썼으면 무슨 뒷담화를 들을지...


로쟈 2007-12-21 10:20   좋아요 0 | URL
"헌데 '홍어' 저거 남자시인이 썼으면 무슨 뒷담화를 들을지" 저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qualia 2007-12-2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족의 암종 조중동을 인용하시다니, 저으기 우려스럽고 실망스럽습니다. 이렇게 조중동 기사를 계속 인용하신다면, 나중엔 조중동 측에서 “인터넷 논객 로쟈” 하는 식으로 기사 써주고, 로쟈 님께서도 급기야는 민족의 암덩어리 조중동에 (자의반 타의반!) 기고까지 하시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있는”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인맥/연줄 맺는 것이 아주 전형적인 방식 아닙니까. 조중동에서는 한겨레보다 엄청나게 더 많은 원고료를 준다지요. 저들은 지식인을 “매수”해서 그들만의 수구 기득권층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더러운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데에 아주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공을 들이죠. 그런 매수 공작에 한국의 소위 지식인이란 명찰을 달고 있는 수많은 “위장” 지식인들이 기꺼이 “매명”을 하고, 조중동의 간특한 이데올로기적 음모에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학교수들, 작가들 따위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님께서는 얼마 전에 암종 조선일보 측에서 주관하는 제28회 청룡영화제에 《밀양》의 출품을 거부하셨습니다. “작가 = 지식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 인간 최고의 덕목인 “진리, 정의, 양심”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진정으로 고뇌하고 비판하는 존재로서의 참 지식인은, 저 거짓과 왜곡과 위선과 기만과 증오로 일관하는 조중동에 절대로 빌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로쟈 2007-12-22 00:58   좋아요 0 | URL
qualia님의 민족주의는 존경할 만하지만 이 시집에 대한 다른 리뷰를 발견할 수 없네요. 시가 또 뭐 대수냐, 고 하시면 할말은 없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사회에서 인적으로 조중동이나 한겨레나 먼 거리에 있는 건 아닙니다(기자들은 그냥 기자죠. 다른 건 사주들이고). 더불어 조중동의 독자나 이명박 지지자들이 다 '민족의 암종'인 것도 아니고 통칭하여 '삼성'이 반민족기업인 것도 아니지요. 이문구 선생이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 상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그를 비판했던 독자들도 있었죠. 저는 물론 이창동 감독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문구 선생보다 더 존경하는 건 아닙니다. 고귀함은 존경받을 만한 것이지만 현실에 뿌리박을 수 있는 건 아니죠. '진정한 지식인'으로 누굴 염두에 두고 계신지 모르겠으나 지식인은 동시에 '오류의 인간'이라는 것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정의상 실수하지 않는 인간은 지식인이 아니란 것도)...

qualia 2007-12-24 07:24   좋아요 0 | URL
[더불어 조중동의 독자나 이명박 지지자들이 다 '민족의 암종'인 것도 아니고 통칭하여 '삼성'이 반민족기업인 것도 아니지요.]

당연한 말, 하나 마나한 말 아닙니까? qualia가 언제 저런 말 했던가요? 저런 말을 시치미 뚝 떼고 지어 넣음으로써, 마치 qualia가 (터무니없이) 조중동의 일반 독자나 일반 지지자들을 모두 '민족의 암종'으로 규정한 것처럼, 이곳을 찾는 독자들한테 부정적으로 각인시키려 하시는군요.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고교생도 수능 논술에서 예문과는 동떨어진 얘기를 저런 식으로 엉뚱하게 갖다 붙이면, 낙방인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한 존재의 진실과 양심을 왜곡하는 “불의”는 참기 힘듭니다.

로쟈 2007-12-24 08:46   좋아요 0 | URL
qualia님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1)조중동은 악이다, (2)따라서 조중동에 빌붙은 것은 '전의, 진리, 양심'에 위배되는 악이다, 아닌가요? 그때 '조중동'의 존재 자체는 무엇이 유지시키는 것인가요? 조중동이 암종이면 그것을 키우는 '숙주'는 무엇인가요? 독자의 문제도 걸려 있다는 건 기본 아닙니까? 게다가 "로쟈님께서도 급기야는 민족의 암덩어리 조중동에 기고까지 하시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비약은 고교 논술 수준에서는 허용되는 것인가요? '부정적인 각인'이란 말을 쓰셨는데, '위장 지식인'들의 '매명'이니 뭐니 하는 게 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참 지식인은 조중동에 절대로 빌붙을 수는 없다'는 전제가 암시하는 바는 뭔가요? 본인이 무어라고 썼는지 기억나지 않으시면 다시 읽어보기 바랍니다...

2007-12-22 0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2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라멘트 2007-12-2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문객들의 인문학적 소양에 보탬을 주려고, 오늘도 편견없이 인문학이나 문학작품에 대한 리뷰를 소개해주는 로쟈님이야말로 더 '민족'적으로 보이는데요. 저는 40억을 기부한 김장훈이야말로 진정한 급진좌파이고, 반대로 노동운동한다면서 챙길 거 다 챙기는 관념적 노동운동가들이야말로 꼴통 보수우파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민족에 대한 그 순수한 열망이 혹시 현실을 외면한, 민족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에 갇힌 몽상적 순수함은 아닐런지.. 조중동 독자들이나, 이명박 지지자들이나, 삼성 근무자들을 다 민족 암종의 부역자들이라고 규정하려는 어떤 분의 이분법적 사고야말로 시회내에서 증오와 분열을 양산하는 일이 아닐런지..

정치란 적대와 우정의 원리에 귀환한다지만 그 적대라는 불가피한 현상도 '이해'라는 프레임안에서라야 정당함을 갖는다고 봅니다. 적대가 증오라는 감정으로 환원되어 표출된다면, 예컨대 프랑스 혁명당시의 군중들의 귀족들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복수의 형태로, 또한 권력자적 입장에서 광주학살이나 유고의 인종청소와 같은 잔인한 대응의 형태로 표출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정치적인 것이죠. 진보든 보수든 서로의 존재가치를 '이해'하는 적대적 관계가 되는 데서 정치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이건 단순히 타협하고 적당히 합의하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이번 대선에서 과거 노무현씨를 찍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명박씨를 찍었다는데, 이런 표심의 이동은 민주 vs. 반민주라는 기존의 구도가 폐기되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변화의 징표일 것입니다. 중도실용주의로 이동한 과거 노무현지지자들의 변화를 놓고, 암종의 무리들의 '변심' 정도로 격하되어서는 안되리라 봅니다. 과거 노무현씨를 찍었다가 이번엔 이명박씨를 찍은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구요. 사회여건이나 정치구도도 이제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들뢰즈식의 생성기계로 변해가는 겁니다. 순수함은 잃지 않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런 민족주의를 꿈꿔볼까 합니다.

로쟈 2007-12-22 15:40   좋아요 0 | URL
'민족적'이란 표현을 남용하시는 거 같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기껏해야 '한국어 공동체'이고, 보다 구체적으론 불가피하게 한국어로 책을 읽어야 하는 '동류들' 정도입니다. 이번 대선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진단들이 제시됐지만, 문제는 유권자(민심)이 아니라 참여정부와 중도/진보진영이었다는 데 모아지는 것 같고 저도 거기에 동감합니다...

qualia 2007-12-24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라멘트 님, 처음 뵙겠습니다. 좀더 좋은 상황/자리에서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필라멘트 님의 글을 읽어보니, 필라멘트 님께서는 (에두루긴 했지만) 저를 은근슬쩍 지칭하면서, 저 qualia가 하지도 않은 말을 그럴 듯하게 날조하고 짜맞춰 간접 비난 (비슷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필라멘트 님의 결정적인 실수이며, 필라멘트 님의 “무의식”에 도사린 악의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필라멘트 님 자신께서 쓰신 날조 문장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런 투의 날조문은 전형적인 “조중동식 왜곡/음해 수법”과 딱 닮아 있습니다.

[조중동 독자들이나, 이명박 지지자들이나, 삼성 근무자들을 다 민족 암종의 부역자들이라고 규정하려는 어떤 분의 이분법적 사고야말로 시회내에서 증오와 분열을 양산하는 일이 아닐런지..]

qualia가 어디 저런 따위의 날조된 터무니없는 망발을 하던가요? 두 눈 똑바로 뜨시고 qualia의 댓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왜 멀쩡한 독자들이나 지지자들이나 근무자들을 끌어들입니까? “이분법적 사고야말로” 필라멘트 님 윗글의 기본 원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 근거없이 저 qualia와 독자/지지자/근무자들을 편가르지 마십시오.

위 인용문은 필라멘트 님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온 완전한 날조로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필라멘트 님 자신의 생각이고, 사상이고, 가치관이고, 세계관이고, 사고방식이고, 행동기준이고, 유전인자일 뿐입니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필라멘트 님 혼자 무슨 말씀을 하시든 참견 안 합니다. 다만, 필라멘트 님의 그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고견을 펼치시는 데에, 앞으로 괜히 애먼 사람 엮어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필라멘트 님의 날조와 왜곡 때문에 남의 진실과 양심이 심대하게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필라멘트 2007-12-24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qualia님^^
저는 평소 댓글도 잘 안달고, 논쟁같은 것도 잘 못하는 스타일인데 뜻하지 않게 댓글을 달아 님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나 봅니다. 저의 댓글은 엄밀히 말해 님의 글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 또다른 시각과 견해에 대한 필요를 느껴 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님의 댓글이 촉발제의 역할을 했지만.

제 댓글 중 "조중동 독자들이나, 이명박 지지자들이나, 삼성근무자들을 다 민족 암종의 부역자들이라 규정하려는 어떤 분의.."란 대목이 님에게 문제가 되신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은 님의 지적대로 제가 님의 댓글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유추한 저의 생각 맞습니다. 님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 아니었길래 그래서 인용부호를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좀 더 세밀히 "내가 유추해보건대.." 라는 말을 미리 덧붙였더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일단, 마치 님의 직접적인 언급처럼 비춰지게 한 이 점, 저의 세밀하지 못한 소치라 인정합니다.^^

다만 qualia님의 댓글을 쭉~ 읽어보면 위의 유추가 전혀 근거없는 건 아니란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제 글에 대한 님의 반박대로라면, 조중동 독자나 이명박 지지자들, 삼성에 근무하며 충성하는 사람들을 조중동과 이명박과 삼성과는 별개로 생각하며 이들을 다 싸잡아 비난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위에 로쟈님도 언급하셨지만 다 수구의 더러운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본체에 빌붙어 공생하는 숙주들 아닙니까. 로쟈님이 정치성 글을 스크랩한 것도 아니고 정치와는 무관한, 그냥 시인의 새시집 서평 정도를 옮겨온 걸 가지고 마치 진리를 배신한, 지식인으로서 해선 안되는 행동을 한 것처럼 분노하시는 님의 극단적인 모습을 통해 충분히 가능한 유추인 것입니다.

그 어떤 수구보수 세력과도 연관되는 걸 용납하지 않는 님의 그 순수한 열정은 높이 삽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조중동을 반대하고 증오해야만, 이명박을 반대해야만 순수해지고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는 님의 그 순수에는 왠지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수구꼴통신문인 조선일보에서 정치와 무관한 글 조차도 스크랩하지말아야 참지식인일 수 있다는 님의 태도에서 혹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함몰되어있는 분이 아닐까, 저의 오버(?)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조선일보 독자들, 이번에 이명박 찍은 사람들.. 님은 수구세력의 한패거리로 생각 안하시는지요. 정말 별개로 생각하신다면 로쟈님의 시집서평 인용 정도에 분노하시는 님의 단호한 태도와는 뭔가 앞 뒤가 좀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조선일보 안봅니다. 또한 조선일보에 대해서 님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조중동 참 문제 많은 신문들입니다. 조갑제.. 참 갑갑한 수구꼴통이죠. 저는 이번에 이명박을 찍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망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노무현을 찍었던 저로서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그냥 눈감아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명박을 찍었던 것입니다. 님이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실을 좀 수용한다는 쪽이죠.

아무튼 조중동과, 조중동 독자들을 다 싸잡아 생각하지는 않으신다니 그나마 제가 오해를 한 것 같고 제가 님을 너무 편협하게 생각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댓글들을 통해서 오해들도 조금씩 수정해 나가게 되는 거지요. 아무튼 다음에는 qualia님과 제가 서로 공감하고 일치하는 이슈에서 다시 만나, 좀 더 좋은 분위기를 함께 공유하는 기회를 갖기를 기대해봅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인데 아무쪼록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