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눈빛, 2011)에 관한 리뷰기사가 생각나 한겨레21을 찾아갔다가 읽은 건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다. 몇번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박형준 시인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에 대한 감상도 '짠'한 데가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11. 09. 12)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

8월30일 오후 4시경 서울 상수동의 어느 카페에 자리를 잡은 나는 그 뒤로 거의 2시간 동안을 한 편의 시만 읽고 또 읽게 된다. 하필 맨 처음 펼친 시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문제의 그 시는 박형준의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이다. 그렇게 2시간을 보내고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를 시인에게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제작만 몇 번을 다시 읽는 중입니다. 가슴이 아파요. 이런 아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읽겠습니다.” 그 시를 옮긴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총 10연으로 돼 있는 시의 전반부다. 뒷이야기는 이렇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여기까지다. 나는 이 시의 묘미가 부사(副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복기했다.

반지하방에 사는 사내가 있다. 사과나무에 “간신히” 열매가 맺힐 때 그에게도 “간신히” 사랑이 왔다. 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그래서 여자는 허리가 아팠다. 여자가 한동안 오지 않는다. “때 이른” 낙과처럼 “때 이른” 이별이 오려는가. “하지만” 사내는 여자를 기다린다. 요를 사두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면 요를 깔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왔다. 이 “물론”은 절묘하다. 두 개의 뉘앙스가 함께 있어서다. (1)그래,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사랑은 뜻대로 되는 거지! (2)이 답답한 사내야, “물론” 오기야 하겠지, 그러나 그런들?

언뜻 (1)인데 결국은 (2)였다. 사내는 요를 깔고 “천진하게” 웃지만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그녀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영영 떠났다. 사내는 지금 사과나무를 보며 울고 있지만, 뭘 알기는 하고 우는가? 요 하나가 방을 다 채울 만큼 작은 그의 방이 문제였다는 것을, 사랑하는 여자를 침대에 눕히지도 못하는 그 가난이 문제였다는 것을, 그런 줄을 모르는 이의 간절함은 상대방에게 오히려 잔인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

그날 저녁에 사람들을 만났고 이 시를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의견이 갈렸다. 요를 산 뒤부터의 이야기는 남자의 슬픈 환상인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다. 여자가 오기는 했으되 다른 여자가 아니었겠느냐고 짐작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만든 이야기를 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 물었다. ‘생각날 때마다 우는’ 남자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나는 되물었다. 허리가 아프다 했더니 침대가 아니라 요를 사는 남자가 슬퍼서 떠나는 여자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여하튼 너무 슬픈 시라고 투덜거리며, 우리는 경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다.(신형철_문학평론가) 

11. 09. 11.   

P.S. 시를 읽으며 떠올린 건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란 구절로 시작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이라고 마무리되는 시이다. 예전에 학원에서 중학생들한테 국어를 가르칠 때, 지문에서 나올 때마다 왜 이런 시가 교과서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었다. 청소년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너무 '노골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가난하면 사랑도 버려야 한다'는 게 이 시의 '교훈' 아닌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도 비슷한 싱숭생숭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대조를 읽어낸 이 칼럼에서 평론가가 준비한 비장의 부사는 물론 '경쾌하게'다. 그리고, '여하튼'. 여하튼 경쾌하게! 칼럼에는 이 '너무 슬픈 시'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1)가슴이 아파요. 이런 아픔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우리는 경쾌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여하튼 남은 연휴를, 골목안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이들처럼 경쾌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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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1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진하게'와 '물끄러미' 그리고 '경쾌하게'가 서로 어긋났던 기억이, 추억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그 무수한 '심심하게'들이 생각납니다ㅎㅎ 명절이라고 마땅히 갈 데도 없는 저 같은 '심심이'를 위해 좋은 글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석 잘 쇠세요~^^

로쟈 2011-09-12 14:59   좋아요 0 | URL
마땅히 갈 데가 있다고 덜 심심한 것도 아닌데요.^^ 연휴 잘 보내시길...

서투른_독서 2011-09-12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을 누일 방이 절실했던 대학시절, 눅눅하고 어두워 심장까지 축축해져버릴 것 같던 자취방이 생각나네요. 한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불안을 껴안고 잠들어야 했던 그 시절... 다리를 뻗으면 허술한 문에 엄지발가락이 닿았던 고시원과 자취방... 그래도 그때는 가난이 수치의 대상이 되지 않아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시대는... (굳이 시인의 말이 아니어도) 눈물이 나네요. 이 시대의 대학생, 청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밤입니다.

로쟈 2011-09-12 15:00   좋아요 0 | URL
세월이 더 좋아져야 정상인데요..^^;

singing 2011-09-1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감동한 저는...;;;ㅠㅠ 저라면 감동했을 듯해서.. 제가, 이래서 안된다니까요;;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그림자마저 생생한 요라니..젊은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가 요라서 그 사랑의 생생함인지, 요에 함축된 어쩔 수 없는 가난의 생생함인지..(그림자라니 후자쪽?)
암튼 아픈시네요.. 아프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추석 연휴에 묻히게 됐지만 오늘은 9.11 테러 1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에서 나온 관련서들이 그래도 조만간 몇권은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국내서로는 이슬람권 전공자들이 쓴 <이슬람>(청아출판사)이 9.11 이후 가장 큰 화제를 모았던 책으로 돼 있다. 그밖에 어떤 책들이 있는가란 기자의 질문을 받고 나도 생각나는 대로 몇권을 주워섬겼는데, '추천서'라기보다는 '관련서'로 든 것이었다. 지난주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9. 03) '추악한 전쟁' '경도와 태도' 등 읽어볼 만

"글쎄요. 아직 번역 안 된 해외서적 가운데는 읽을만한 게 더러 있긴 한데." 중동전문가인 인남식 외교안보연구원 부교수는 9ㆍ11 테러와 이후 세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에 다소 망설이는 눈치였다. 전문가의 머릿속에 이거다 하는 책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국내의 관련 도서층이 빈약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뜸을 들인 뒤 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3권. 우선 미국 abc방송 기자 존 쿨리가 쓴 <추악한 전쟁>(이지북 발행)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지원한 이슬람 테러 조직이 결국 미국에 칼끝을 겨누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경도와 태도>(21세기북스). 9ㆍ11을 전후해 자신이 쓴 칼럼과 일기를 모은 책으로 9ㆍ11로 자살을 감행한 이들은 누구이며 이슬람 세계는 왜 이들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지, 미국인들은 왜 분노의 표적이 됐는지에 대한 생각들이 펼쳐져 있다. 최근 출간된 <진리를 향한 이정표>(평사리)도 추천 목록에 들어갔다. 이슬람 과격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이드 쿠틉이 옥중 집필한 책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의 이념 구조를 알 수 있다. 



인문학 서적을 중심으로 활발한 서평활동을 하고 있는 이현우씨는 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테러리즘의 정신>(동문선), 테리 이글턴의 <성스런 테러>(생각의나무)를 추천했다. 9ㆍ11과 테러의 이면에 도사린 철학적인 문제들을 짚어본 책들이다. 지젝의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라는 제목으로 국내 번역출간됐으나 절판된 것을 이씨 등이 새로 번역해 낼 계획이다. 지젝은 책과 같은 제목의 창비웹진 투고에서 9ㆍ11로 분명해진 것은 '이런 폭력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미국이 이제 직접적으로 이런 폭력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슬람 역사서로는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쓴 <이슬람문명>(창비), 레바논계 프랑스 소설가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침이슬) 정도가 많이 읽혔다. 최근 출간된 미국 저술가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뿌리와이파리)도 반응이 좋다.(김범수기자) 

11. 09. 11.  

P.S.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대해선 작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를 통해 다룬 바 있는데, 내달에는 이 연재를 묶은 단행본과 함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될 예정이다(나는 새 번역본 출간을 제안하고 감수를 맡았다). 나름대로 9.11 10주년의 의미를 생각해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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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9-1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개정판이 나온단 말씀이시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과 엮어 필히 업어와야겠네요!^^

로쟈 2011-09-12 15:01   좋아요 0 | URL
네, 10월중엔 나올 듯해요. 독촉을 받고 있으니.^^;

쉽싸리 2011-09-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연재하신 지젝관련 글을 책으로 내신다니 반갑습니다. 연재를 초반에 좀따라가다가 놓쳤었거든요. 아무래도 책으로 엮여야 든든한거 같아요.^^

로쟈 2011-09-12 15:0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헌내 2011-09-1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재번역이라...ㅋ 기대됩니다!!!!

로쟈 2011-09-12 15:02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엔 많이 읽히면 좋겠어요...

singing 2011-09-15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나오는군요 ^^ 책꽂이에 로쨔쌤컬렉션 자리도 마련했겠다, 이제 준비할 건 질끈머리끈이네요ㅎㅎ. 연재를 미처 따라가지못하구 주저앉았는데...
보드리야르도 어려웠구...겁은 나지만 도전!!^^..

2011-09-17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8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밀린 원고 더미와 씨름해야 하는 처지에선 휴일도 달갑지 않다. 차라리 '휴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당장 읽을 책은 아니지만, 이번주에 구입한 도서목록에는 미국의 대한 환상에서 께어나라고 일갈하는 책 두 권도 포함돼 있다. 김광기의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동아시아, 2011)와 크리스 헤지스의 <미국의 굴욕>(아름드리미디어, 2011)이 그것이다. 서평기사를 찾아 스크랩해놓는다. '짝퉁 미국'인 나라의 미래는 좀 다를지 생각해봐야겠다...  

경향신문(11. 09. 10) "미국 위기 본질은 승자독식에 의한 신뢰의 위기”

미국 전역에서 도로를 파헤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쉽게 닳는 아스팔트 대신 비용이 적게 드는 자갈을 깔기 위함이다. 재정압박 때문에 낡은 도로를 방치하는 주 정부도 허다하다. 미국의 한 교수는 이를 다루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석기시대로의 귀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석기시대’는 곳곳에서 관찰된다. 뉴욕과 시카고 같은 대도시를 포함해 미국 전역에서는 ‘집에서 닭 키우기’가 유행이다. 경기침체로 주식인 육류를 사서 섭취하기가 어렵게 되자 직접 병아리를 사서 키워 닭고기와 계란을 먹으려 한다는 것이다.

김광기 경북대 교수(48)가 최근 펴낸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동아시아)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모습은 생경하다. ‘치부’를 애써 들춰냈다기보다 일상 그 자체가 치부가 돼 버린 미국인들에 대한 세밀화다.

김 교수는 지난 7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 또한 1990년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미국을 ‘하나의 전범’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2008년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콩깍지’가 벗겨졌습니다. 미국은 그 전에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변했다는 것을 느꼈어요.”

물론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몰락’을 말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사회학자로서 김 교수가 집중한 것은 경제위기의 통계적·수치적 측면이 아니라 미국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드러난 쇠퇴의 조짐들이다. 그는 작은 풍경들을 포착해 “고구마 줄기를 뽑아내듯” 그 속내를 읽는 데 집중했다.

2010년 8월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의 이스트포인트에서 공공임대주택 신청서를 배부하는 날 3만명의 시민이 몰렸다. 인구가 4만여명인 이 작은 도시에서는 이날 혼잡으로 62명이 다쳤다. 경제위기로 미국에서 2010년 한 해에만 집을 압류당한 사람들이 105만명에 이르면서 유일한 희망으로 공공주택이 떠오른 때문이다. 노숙자 수가 불어나 관리비용이 증가하자 비행기를 태워 다른 주로 보내는 주 정부도 있었다. 

책에서 미국의 음울한 풍경은 계속 이어진다. 1972년 이래 처음으로 미국의 수감자가 줄었지만, 범죄가 줄어든 게 아니라 교정비용을 줄이기 위해 재소자들을 조기석방한 때문이었다. 주 경찰들은 공용 신용카드를 주유소에서 받아주지 않는 탓에 연료를 넣지 못해 순찰을 돌지 못한다. 공공학교들은 학생 수 탓이 아니라 운영할 돈이 없어 문을 닫고 있다.

김 교수는 미국의 위기가 단순히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적 ‘신뢰의 위기’라는 것이다. “미국에 머물면서 아파트 잔디밭에서 아이들을 놀게 할 수가 없었어요. 온통 개가 쏟아낸 배설물들이 널려 있었죠. 처음 유학왔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뉴햄프셔주에서 개똥이 너무 많으니 유전자를 검사해서 추적하자는 얘기도 나왔다고 해요.” 금융위기를 불러온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자체도 상환을 생각하지 않는 무분별한 대출, ‘가불 문화’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추천서’ 한 장이면 모든 것을 신뢰하던 미국의 분위기도 사라졌다. 미국의 어느 중학교에서는 재정 확충을 위해 학생들이 20달러의 초콜릿을 사면 점수를 올려주겠다고 해 논란을 빚었다. ‘신뢰의 위기’는 고위층부터 일반인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금융위기를 불러온 자들은 회전문인사를 통해 다시 정·재계에 진출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의로 차를 버리거나 불을 지른 뒤 보험금을 청구하고, 렌터카에 기름 대신 물을 채워 반납하기도 한다.

이 신뢰의 위기는 결국 상위 10% 사람들이 미국 전체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때문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앞의 얘기로 돌아가면 요즘 미국인들이 총과 닭, 씨앗을 사려고 안달인 까닭은 ‘나 외에 타인의 도움은 없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이다. “건국이념으로 내놓은 자유와 평등, 인권과 정의라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맹목적으로 미국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미국이 외환위기 때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며 투명성을 요구했지만, 금융위기를 보면 가장 불투명한 집단이 그들이었죠.” 김 교수는 “있는 그대로의 미국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학자적 양심을 걸고 보여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황경상기자)  

내일신문(11. 09. 10) 감추고 싶어하는 미국에 관한 5가지 불편한 진실

비판적 언론인이자 작가인 저자 크리스 헤지스는 단언한다. 미국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프로 스포츠, 연예산업과 유명인 문화, 리얼리티 예능 프로가 전 국민의 눈과 귀를 홀리고 일상을 규정하는 나라,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과 돈,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용해 먹는 나라라고.

미국은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자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크리스 헤지스는 이런 미국에 메스를 들이댄다. 미국의 숨은 치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미국이 처한 위기, 나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 그 결과 저자는 "미국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파탄의 조짐은 단순히 금융위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치 경제 문화에서부터 일상과 정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체제와 삶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사회에서는 본모습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하고, 진실보다 광고와 선전이 더 설득력 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잡동사니 정보와 유명인의 뒷공론이 지식이 되고, 포르노는 사랑이 되며, 교육은 체제 유지와 권력 세습의 도구가 되고, 심리학은 행복을 파는 돌팔이 과학이 되며, 빚은 경제를 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현실이 절망스러울수록 더욱 공상에 집착하며 선동과 허풍에 의존해 위로와 안심을 구한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선동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오락을 제공하면서 독재정치로 나아간다. 오늘날 정부와 기업이 하나로 결탁한 이른바 '법인형 국가' '기업정부'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미국이 지적 능력, 도덕성, 교육, 정신, 경제 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음을 통찰한다. 그리하여 미국이 이런 환상들에서 깨어나 자기 앞에 놓인 엄연한 한계와 맞서지 않으면 끝내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한다.(안찬수 기자) 

11. 09. 10.  

P.S. "상위 10% 사람들이 미국 전체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문제와 관련해서는 최근에 나온 대니얼 리그니의 <나쁜 사회>(21세기북스, 2011)도 참고할 만하다. 사회 양극화 문제를 다룬 책으로 "저자 대니얼 리그니는 우리 사회를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으로 몰고 가는 ‘마태 효과’(The Matthew Effect)를 모든 사회 분야에 걸쳐 연구한 최초의 학자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경제 분야의 마태 효과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정치.과학.교육.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마태 효과로 인해 일어나는 양극화 현상을 설명하고, 사회를 ‘나쁘게’ 만드는 마태 효과의 모든 것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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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11-09-10 15:15   좋아요 0 | URL
한가위 잘 쇠세요!
뜬금없이...

로쟈 2011-09-10 18:51   좋아요 0 | URL
네, 즐거운 연휴 되시길...

토토랑 2011-09-11 03:10   좋아요 0 | URL
으흠..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페이퍼네요. 지금 미국 샌디에고에 머물고 있거든요.
지난번 미국 외환부채 상한액 증액 법안관련 이슈때도 우리나라 언론에 오히려 기사가 나지..
미국엔 은행에 근무하는 사람조차도 뭐 그거요~ 벌거 아녜요 하는분위기..왠지 물어본 사람이 무안해질정도의 시큰둥한 반응
대선 끝나고 나면 영향있겠죠 한마디 끝...

어느 동네를 가든지 카트에 짐 싣고 밀고다니는 노숙자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옆에 카운티에는 쌍둥이 학교 보내는데 Supply list로 학기초에 보내는 학용품만 백만원어치 샀다고 하네요..
미국에 오래산 시민권자들은 멕시코애들 노인들 과잉복지 때문에 재정이 어렵다는 그런 인식도 많은거 같아요. 다자녀 혜택이 좀 있다보니 멕시코나 이민자들이 자녀가 많거든요.

그치만 아직 영어 못하는 옆에서 보기에는,, 주급으로 주는 월급과 월세....
집세가 방 2개 조그만 아파트가 $1600 정도 하거든요. 수욜날 주급은 주는데 그날은 마트가 좀 붐벼요. 세금때고 월 400만원 받는다 쳐도, 주급이면 100만원..월세내야할돈 떼고 최소 $400 제하고, $600 남으면 마트한번 갔다오면 또 돈 나가고 이래저래 뭐 사면 또 없고. 정신바짝 안차리고 관리안하면 돈 모으기 힘들겠드라구요.

집값의 10% 현금만 들고 있어도 집 살수 있는데,,그게 월세보다 훨 싸게 치는데도.. 2~3 천만원 정도의 목돈을 마련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네요. 그 참 이런사람들이 우리나라오면 못살겠구나 싶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여기서 Job 못잡은 애들이 우리나라와서 그냥 영어강사 몇년 뛰다가 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국의 미래와 한국의 미래.. 그 참..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제네요. 로쟈님이 골라주신 책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1-09-11 09:53   좋아요 0 | URL
보통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미국과 실제 미국은 많이 다른 듯해요. <미국의 굴욕>의 원제대로 '환상의 제국'이라고 할까요...

미국사람 2011-09-15 03:09   좋아요 0 | URL
토토님 예기에 한마디 합니다.
저는 뉴욕쪽이라 서부쪽과는 상황이 좀 다르긴 합니다. 감안하시길

여기서는 지금 집값의 10% 가지고는 집을 못사구요 30% 정도는 주어야합니다. 문제는 30%를 주어도 은행에서 융자를 잘 안내줍니다.(단 금리는 엄청 쌉니다.) 토토님 말씀은 100%까지도 융자해주던 2008년 리만 브라더스 붕괴 이전 상황입니다.

지금 미국은 1945년 전쟁 종결 이후 최악의 경제 상황입니다. 1929년 처럼 대공황이 나야 되는데 대공황 경험이 한번 있으니 미 중앙은행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공황이 오는 것을 막고 있는 중이라 보면 됩니다.

만일 2009년 이후에 미국에 와서 현 상황만을 보고 미국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최악의 상황만 보일테니 토토님과 같은 관찰이 나오겠지요.

물론 현재의 미국은 지옥행 기차를 타고 있는 중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1998년 한국의 환란 이후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합니다.

소개하신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라는 책도 비슷한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읽어보지 않아 말하긴 어렵지만 개별적으로는 다 맞는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맞다고 하기 어려운 책일 겁니다.
 
민주주의 읽기

대선을 일년도 더 남겨놓고 있지만 서울시장 보선과 안철수 열풍으로 '정치의 계절'은 벌써 시작됐다. 그런 분위기에 부합하려는 듯 정치와 정치철학에 관한 책들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아마도 곧 봇물을 이루지 않을까 싶다). '정치학' 전문출판사 후마니타스에 나온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와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가 바로 눈에 띄는 책들이다. 프랑스철학자 랑시에르의 국내 '데뷔작'이었던, 하지만 오역으로 한바탕 물의를 불러일으켰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새 번역자를 만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인간사랑, 2011)란 타이틀로 다시 나왔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다시 읽어볼 기회다. 개인적으론 강의준비도 할 겸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과 함께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2011, 10쇄),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문학과지성사, 2006, 3쇄)도 어제 주문해서 받았다. 달의 책 두 권은 모두 1999년에 한국어판이 나왔는데, 아직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다. 이런 책들을 묶어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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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김순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8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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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배관표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9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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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정치- 혁명 전통의 잃어버린 보물
제프리 골드파브 지음, 이충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1년 09월 0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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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9-09 09:30   좋아요 0 | URL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 모델들은 정말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90년 판으로 읽었는데, 새로 나온 책은 번역과 편집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헬드의 이 책은 로베르토 보비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함께 민주주의에 관련된 명저 중 한 권으로 꼽는 책입니다~

저두 서점에 가서 어떤지 구경이나 해 봐야 겠습니다!

로쟈 2011-09-09 09:52   좋아요 0 | URL
네, 말그대로 '교과서' 같은 책이네요...
 

오랜만에 영화 소식이다. 아마도 김기덕의 <아리랑> 이후인 것 같다. 홍상수의 열두번째 영화 <북촌방향>이 오늘 개봉했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홍상수의 모든 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에서(인상의 편차는 있었지만) <북촌방향>이 또다른 기대작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어려운 제작여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고 매우 부지런하게 영화를 찍는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이자벨 위페르 주연작도 얼른 개봉되면 좋겠다. 조금 일찍 올라왔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08. 26) “방식 다르면 생각도 달라…‘즉흥 촬영’ 밀고 나갔다”

한국의 영화감독 중 의뭉스럽기로 따지면 홍상수(51)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술에 취한 채 쉽게 찍힌 듯한 어느 장면이 사실 50번의 테이크 끝에 얻어낸 것임을,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사실 그들이 받는 출연료는 거의 없음을, 굵고 뭉툭한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속에 사실 인생에 대한 반짝이는 성찰이 숨어있음을, 아는 사람만 안다. 



9월8일 개봉하는 「북촌방향」은 그의 열두번째 장편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1~2년에 한 편씩 작품을 내놓던 그는 최근엔 1년에 2편을 내놓을 정도로 다산하고 있다. 그는 이미 프랑스 최고의 여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 차기작 「다른 나라에서」의 촬영까지 마친 상태다. 어떤 배우들, 어떤 관객들을 ‘신흥종교에 감화된 신도’처럼 거느린 그를 24일 서울 압구정에서 만났다.

-당신의 작품은 ‘최근작이 최고작’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홍상수 감독은 “인생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몇 개 없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라며 “싸구려로 안 하면 보답이 올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운”이라고 말했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미친놈도 아니고. 어떤 작품을 끝내면 ‘기분’이 있는데, 이번엔 나쁘지 않았다. 장르영화처럼 ‘이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고 정해놓고 만들진 않는다. 다양한 반응이 있으면 그걸로 영화가 완성된다.”

-가수 백현진은 ‘술먹고 노는 장면은 홍상수가 제일 잘 찍는다’고 말했다.

“헛소리다. 술자리 장면이라고 특별히 생각하는 건 아니다. 골목길 장면, 밥먹는 장면과 마찬가지다. (밥먹을 때도 반주를 먹던데) 글쎄. 왜 그럴까.”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들었다. 

제작방식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 방식이 다르면 생각해 나오는 게 달라진다. <옥희의 영화>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구상이 없이 촬영을 시작했다. 이틀 전 정해 배우를 불러 1부를 찍고, 다시 정해 2부를 찍는 식이었다. 이번엔 그 방식을 더 밀고 나갔다. 전체적인 구상이 없이 첫날 찍고 둘째날 찍으니 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북촌방향」에선 김보경이 1인2역을 한다. ‘두 여인’의 테마는 당신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내가 오만가지 인물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삶에서 나온 것들이 새 배열을 찾고 새 표현방식을 찾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비슷한 방식이 반복되는 것이다. 영화에는 말로 집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덩어리들이 있다. 옛 여자와 닮은 여자를 찾는 것도 한 덩어리다. 그 덩어리는 우리가 피할 수 없고 공유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는 영어 대사 영화다.

“파리에서 위페르를 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기회가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위페르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내한한다고 전화가 왔다. 낮에 점심 먹는데 데려갈 데도 없어서 「오! 수정」과 「북촌방향」에 나온 고갈비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거기서 엉겁결에 출연하자고 얘기가 됐다.”

-갑자기 다작 감독이 됐다. 몇 편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나.

“그런 멍청한 목표가 있을 리가. 지금은 영화 만드는 게 중요하고 좋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계속 만들고 싶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마구 나오나.

“‘이 때쯤 찍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예를 들어 가을에 바람 부는 제주도에서 뭔가 찍고 싶다는 생각이다. 거기 맞춰서 한 번 해보는 거다.”

-영화, 책, 연극이 아닌, 주로 그림을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

“침대 위에 화집이 몇 권 있다. 세잔, 마티스, 렘브란트, 피카소… 멍하니 그림을 보면서 내가 이 그림을 왜 좋아할까 생각하는 게 재미있다. 그렇게 두 세 장 보다가 잠든다.”

-요즘 영화는 잘 안보나.

“영화에도 원형이 된 분들이 있다. 그 분들을 접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하는 건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많이 했다. 이제 그 이상으로 레퍼런스가 될 사람이 나오진 않는 것 같다.”

-요즘 당신 영화에 ‘착해서 좋아’라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제일 좋은 건 착한 사람이다. 우리들이 아기들을 보고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아무리 머리가 헝클어져도 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슬금슬금 용기가 난다. 세상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지만 이런 착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힘이 난다.”

■영화 「북촌방향」은
지방에 살면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는 감독 성준(유준상)은 서울에 놀러와 북촌에 사는 친한 선배 영호(김상중)에게 연락한다. 영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성준은 북촌을 배회하다가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옛 여자친구 집에 찾아가고, 마침내 영호 무리와 ‘소설’이라는 카페에서 술자리를 갖는다. 이 술자리는 기묘하다. 여러 차례 보이는 술자리는 하루에 일어난 일 같기도, 여러 날 반복해서 일어난 일 같기도 하다. ‘소설’은 시간이 뒤섞이는 마술 같은 공간이다. 선형의 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 관객의 감각이 매혹적인 혼란에 빠지는 공간이다. 성준은 이곳에서 서툴게 피아노를 치고, 옛 애인을 닮은 카페 사장을 만나 동침하고, 마침내 탈출해 어딘가로 향한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부는 성준이 이 지루하고 비루한 삶의 궤도에 영원히 포박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오! 수정」에 이은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다.(백승찬 기자)


11. 09.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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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9-0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석과 이은주가 연인으로 나왔던 '오! 수정'...그때 이은주가 스무살이었을 겁니다.

그리고...김보경 좋아하세요? '친구'에서 이쁘게 나왔고 드라마 '깍두기'에서 김승수 아내로 나온 게 기억나네요.늘씬하고 세련된 여인 역을 하던데 홍상수 영화에선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군요.

로쟈 2011-09-10 10:39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봤는데, 이 영화에서도 매력적으로 나옵니다.

무당광대 2011-09-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영화에선 관념적인 대화들을 많이 나누는데, 웃기면서도 슬프고 그래요. 딱 체홉 단편소설 같아요.

로쟈 2011-09-11 11:08   좋아요 0 | URL
체홉의 인물들보단 더 지적이긴 하지만, 서로 자기말만 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안된다는 점은 딱 닮았습니다.^^

msjpolitics 2011-09-14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갈수록 더 좋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너무 어릴때봐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북촌방향은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습니다. 요새 이리저리 "밤과 낮"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를 봤는데, 그 대사 하나하나가 웃기면서도 참 불편하게 만들더라구요. 유준상도 괜찮지만, 저는 김영호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안봐서 뭐라고 말하기는 좀 그러네요.

로쟈 2011-09-14 17:51   좋아요 0 | URL
<밤과 낮>을 아직 못 봤는데, 유준상의 연기는 좋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하하하>에서도 그렇고 '홍상수 연기'를 마스터하는 듯해요...

philocinema 2011-09-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 전작품중 유일하게 dvd 출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상암동에서 홍감독 '전작전'할 때 가서 보고 왔지요.
dvd로도 출시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로쟈 2011-09-22 13: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9-2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vd 수집중인데, <밤과 낮>만 안 보여서 늘 애태우고 있네요..^^

로쟈 2011-09-22 13:23   좋아요 0 | URL
영화에 대해서라면 샥샥님이 할말이 많으실 듯해요.^^

영남자파 2011-09-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은주는 가고 오수정은 남았는데...
오수정은 여성과 남성의 시각이 다르다는 생각이..
얼마전에야 도서관에서 봤는데 껍디기에 "키스하고싶다" 라고 어떤 형제님의 염원이 있길래 진짠가 분석해가면서 봤더니...허 참!

로쟈 2011-09-27 08:27   좋아요 0 | URL
오수정을 최고작으로 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