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9, 10월의 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는 '제국'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0493). 미처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견적이라도 내볼 요량으로 대출한 책이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 

옥스포드대출판부에서 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의 한 권이다. 내가 '아주 간단한 입문'이라고 부르는 시리즈로서 분량 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은 책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더 읽을 거리'가 제시돼 있는데 몇몇 권은 국내에 이미 소개된 책이어서 겸사겸사 참고해볼 만하다.

 

 

 

 

먼저, 중국사학자 페어뱅크의 <신중국사>(까치글방, 2005)는 '중국 제국에 관한 입문서'로 소개돼 있다. 알다시피 페어뱅크는 하버대학의 역사학부 교수로서 영어권에서는 중국사학의 대부 정도 될 듯하다. 최근에 10권과 11권이 번역돼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 2007)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기도 하다. 

 

 

 

 

마셜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1974) 전 3권도 무슬림 제국의 건설과 보편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서로 추천되고 있다. 호지슨의 책은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 정도가 소개돼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역사적인 '세계체제'와 '세계 제국'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로 꼽히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글방, 1999)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D. 아베메티의 <세계 지배의 동학(The Dynamics of Global Dominance)>(2000)은 "근대 제국에 관한 개론서 중 하나로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고 소개된다.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는 "식민주의에 관한 체계적이면서도 간결한 책"이라고 하며, 국역본 소개가 빠져 있지만 안토니 파그덴의 <민족과 제국>(을유문호사, 2003)은 "제국 건설과 대량 이주의 연관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책으로 아주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언급된다. 제국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주제가 오리엔탈리즘인바, 이에 대해서는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이 고전적인 저작이다. 저자가 거기에 덧붙이고 있는 건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이다. D. 카나딘의 책 <오리엔탈리즘: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나>(2001)와 함께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에 반대하는 대응들"로 제시되고 있다. 식민지와 탈식민지에 관한 연구서로는 단연 로버트 영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포스트컨티넨털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역시나 국역본 소개에 빠졌지만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룬 좋은 책"이다.

  

'아주 간명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또한 영의 저작이다(앞의 책의 다이제스트판 정도 되겠다).

 

 

 

 

J.A. 홉슨의 <제국주의>(창비, 2003)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과 함께 "제국에 반대하는 오랜 전통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반향을 얻고 있는 텍스트들"로 거명된다(국내엔 파농의 책 두 권과 전기 두 권이 소개돼 있다). 국내 소개돼 있는 책들 가운데 맨마지막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 "제국주의적 현재와 미래에 관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 중의 하나"인데, 그 논쟁에 관해서라면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이 참조가 되겠다.

Empire: The Russian Empire and Its Rivals

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지만 소장도서라서 저자의 언급이 반가운 책은 도미니크 리븐의 <제국: 러시아 제국과 그 경쟁자들>(2000).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쇠퇴를 다루고 있다. 비교연구도 잘 되어 있다"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분량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대저 이 정도는 읽어줘야한다는 얘기겠다...

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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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6 16:46   좋아요 0 | URL
제국에 대한 책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읽고 싶은 책들 중에 번역 안된 것들 혹은 절판된 것들이 많아 포기했었어요. 아부 루고드나 사미르 아민 책 같은 것들... 혹시 읽어보셨나요? 읽어보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영어로 사서 보려니.. 심적 부담이 넘 커서... 일단 로쟈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

로쟈 2007-10-16 17:12   좋아요 0 | URL
딸기님하고 제가 관심지역이 좀 다르죠.^^; 제국이라고 해도 저는 일반론과 러시아 제국 쪽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가 번역됐다는 건 알게 됐습니다. 그의 <카오스의 제국>도 소개되면 좋겠네요(찾아보니 분량이 얇은 책이군요)...
 

제국과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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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스티븐 하우 지음, 강유원.한동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품절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박지향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3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구판절판
신제국주의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구판절판
문화 제국주의
존 톰린슨 / 나남출판 / 1994년 11월
9,000원 → 9,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8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7년 10월 1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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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50'에서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문학기행>(따뜻한손, 2004; 한국문원 1997)에 대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자사에서 연재한 기획기사를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는 건 팔불출 같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책이기에 그 정도의 부덕은 눈감아 주기로 한다. 사실 '문학기행'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들 가운데 이만한 책이 또 있는지도 모르겠고(공동 작업으로는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 비견할 만하다). 한국문원과 따뜻한손에서 판을 바꿔가며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문학기행: 명작의 무대>(한국일보사, 1987)이다(그래봐야 어느 박스 속에 들어가 있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최신판도 소장용으로 사두고 싶다.  

한국일보(07. 10. 04) [우리 시대의 명저 50] <39>'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일이 시인ㆍ작가의 일에 속한다면, 문학을 탄생시킨 현장-그 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화의 향수자인 우리 모두의 기쁜 책임이기도 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중한 명작의 본적지를 찾아 창조적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그 문화의 원형을 복원ㆍ보존ㆍ재창조하는 길을 구상해 본다.”

한국일보 1986년 5월11일자 5면엔 이 같은 편집자 주(註)가 실려 ‘문학기행-명작의 무대’(이하 문학기행)란 기획 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생존 작가와 함께 그들의 대표적 소설 및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을 찾아, 문학과 현장의 창조적 길항 관계를 탐색하겠다는 참신하고도 묵직한 포부였다.

입사 9년차의 출판 담당 박래부(56ㆍ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기자는 당시 탈고 막바지에 다다른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답사하고 마수걸이 기사를 썼다. 한 주 뒤인 18일자엔 문학을 담당하던 13년차 김훈(59ㆍ소설가) 기자가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씨와 함께 가상 공간 ‘무진(霧津)’의 본적, 전남 순천만을 둘러보고 한 면 가득 기사를 부려놓았다. 86년 5월~87년 8월, 88년 10월~89년 5월에 걸쳐 무려 85회 연재된 문학기행은, 몇몇 후배 기자의 일시적 참여를 제외한다면, 온전히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성실한 취재와 유려한 문장으로 쌓아올린 기념비적 성과였다.

연재가 시작된 86년은 언론사 정ㆍ폐간 결정권을 손에 쥔 문공부가 산하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전달하던 시기였다. 기관원들이 신문사를 무람없이 드나들며 편집권을 침해하던 억압의 시절, 명작의 모태를 찾아 삶과 아름다움을 논하던 문학기행은 암담한 세월을 겨우 살아가던 이들이 망명할 수 있는 ‘말의 공화국’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문학기행은 저 엄혹한 80년대를 말의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현실 앞에 절망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한 편의 서사시”이자 “그 기행을 쫓아감으로써 악몽과도 같은 청춘을 견디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마약”이었다고 추억했다.

문학기행의 전반기(86~87년) 연재분은 87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97년엔 두 사람의 기사 71편을 묶은 <김훈ㆍ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전 2권ㆍ한국문원 발행)이 나왔다가 절판됐다. 저자들의 신문사 후배 김창영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따뜻한손’은 2004년 홍명희, 김지하, 박노해, 권정생, 전경린 등 다섯 꼭지의 글을 추가하고 전체 분량을 50편으로 추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전 2권)이란 제목의 증보판을 펴냈다. 어느덧 머리가 허옇게 센 우리 시대의 문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앉았다.(이훈성기자)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김훈=86년 봄에 장명수 문화부장(한국일보 고문)이 남도 여행을 다녀와서 문학기행 연재를 지시했다. 불과 열흘 만에 취재에 착수했으니 전체 계획이 미진한 채 시작된 셈이다. 준비는 안됐는데 마감은 숨막히게 돌아왔다. 우리가 속을 좀 썩이긴 했지만, 장 선배 말을 알아들었고 그 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 선배가 이걸 좀 알아주시길 바란다.

박래부=장 부장에게 등을 떠밀려 원주에서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다시 평사리로 갔다. 밤을 세워 원고지 30여 장짜리 첫 회 원고를 넘겼다. 2회가 김형 차례였는데 순천에 다녀와 원고를 넘기곤 못하겠다고 했다. 김형이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한 달 간 혼자서 참혹하게 시리즈를 끌고 갔다. 세상일이 신통한 것이, 1년쯤 뒤 내가 일본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김형이 예전의 나처럼 한 달 반가량 혼자서 기사를 써야 했다. 결국 힘에 부쳐 한동안 연재가 중단됐다가 내 귀국 후 재개됐다.

-작품 선정 기준은 뭐였나.
박래부=생존 작가 중심으로 꾸린다는 것이 큰 원칙이었다. 87년 대거 해금된 작가 중 정지용 등을 부분적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서사성이 중요한 기획이다보니 소설을 많이 다뤘다.

김훈=당시 문학을 비롯한 우리의 정신사는 양극화된 상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진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안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작품 선정에 신경을 쏟았다.

박래부=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자로서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다. 넘으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상황에서 투사적 면모를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연재가 시작되고 네 달 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말>지에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하고 이듬해엔 6월항쟁이 일어나면서 민주적 분위기가 많이 확산됐다.

김훈=언론의 속성이자 한계이겠지만 문학기행이 한국 현대문학사를 관통하면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골라 다뤘다고 보긴 힘들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이광수부터 시작해야할 텐데 ‘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대중 매체가 그렇게 하긴 힘들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 작품을 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김훈=현장은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명백히 그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써 증명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문학이 리얼리즘의 바탕에서 떠나있는 오늘날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문학기행은 우리 세대가 읽고 자란 문학에 대한 헌사 같은 것이었다.

박래부=작품 속 시간과 공간 배경엔 작가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문학기행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발췌해서 하나의 시리즈로 기록해두는 작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공간적 원형이 어느 정도 보전돼 있었다. 원래 모습이 훼손되기 전에 현장을 포착하고 작가의 얘기를 적어둔 것은 이젠 불가능하기에 더욱 의미있는 기록 작업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정신적 탈출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김훈=‘한국문학 지도 그리기’가 원래 기획 취지였지만 그것은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고 결국 지도를 다 그리지 못했다. 대신 회를 거듭하면서 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로써 야만의 시대에 인간과 시대에 대한 소통을 열어줄 수 있었다는 보람을 느낀다. 가령 조해일의 <아메리카>를 다루며 기지촌 여성의 쓰라린 삶은 ‘부도덕이 아닌 불행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됐다고 믿는다.

박래부=억압적 상황이 상존하던 당시, 문화부 내에서 억압의 최전선에 있던 기자는 문학 담당 기자였을 것이다. 80년대는 문학의 위상이 크고 독자에 대한 영향력도 강한 시기였다. 죽은 고정희 시인은 자기 시를 “의미를 숨길 수 있는데까지 숨기고, 표현을 우회할 수 있는데까지 우회해서 쓴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작품 속 메시지를 수위조절을 해가며 독자에게 전하는 일이 문학 기자의 몫이었다.

김훈=문단을 비롯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진지했다. 편지, 전화가 많이 오고, 찾아와서 격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 작품 안 다뤄준다고 항의하는 소설가들이었다(웃음).

박래부=당시 신문 발행면이 12, 16면 정도였는데 그 중 한 페이지를 할애해 장기 연재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다시 느끼기는 힘들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진 않았나.
김훈=박형은 나와 한 번의 분란도 없었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장 선배가 좋은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래부=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한 주는 다녀와서 기사를 써야 했고, 다른 한 주는 다음 문학기행을 위해 읽어야만 했으니까.

0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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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글날이기도 하면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기일이다. 3년전 10월 9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뭔가 꾸며보려고 하다가 형편이 닿지 않아 예전에 써둔 페이퍼만 잠시 손질해두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053649). 낮에 도서관에 갔다가 웬일인지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 2006)에 자꾸 손이 가서(연구실에 꽂아놓은 내 책은 누가 들고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출했는데(불어본은 복사했다), 혹 데리다의 유령이 잡아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딴은 며칠전부터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페이퍼를 쓰려고는 하고 있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렵다. 지난 주말의 서평기사를 옮겨오는 걸로 오늘의 입막음을 대신한다.  

동아일보(07. 10. 06)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한 마르크스는 되돌아온다

2004년 타계한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인용도 많이 된 책이다. 언어유희에 가까운 데리다의 난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제목 저자 내용 등 네 가지의 어긋남(out of joint)에서 발생한다. 이 책이 ‘햄릿’의 유명한 문구, ‘시간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에 대한 심오한 독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불일치는 그 반시대성에서 발생한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됐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선언된 시점이다. 구체적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언’으로 찬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출간된 지 1년 뒤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귀할 것임을 주장했다.

두 번째는 저자와 주제의 불협화음이다. 데리다는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사회에 있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저작을 다룬 적이 없었다. 그의 주된 활동 영역은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와 재구성이란 ‘이론’에 있었지 ‘실천’에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돌연 마르크스를 들고 나오며 ‘정의’와 ‘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

세 번째는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 유령, 그것도 복수의 유령을 병치한 제목의 충돌이다. 이 제목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거기서 유령은 일종의 반어법으로 사용된 것이었고 그것도 ‘공산주의’라는 단 하나의 유령만 지칭했다.

네 번째는 그처럼 과학성을 강조해 온 마르크스주의를 역설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넘나드는 유령적 실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독특한 ‘유령론(hantologie)’으로 해체 및 재구성해 낸 파격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도구로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해방운동의 대명사로서 어디선가 불러 대는 목소리가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망령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올 것이란 논리가 그것이다. 그래서 헤겔이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보다 셰익스피어가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이 더 강조된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이 아닌 ‘운동’이며 정교한 ‘과학’보다 메시아주의에 기초한 ‘종교’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 책은 가상과 환영, 유령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과학적 이론을 표방해 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이상인 그것을/더 이상 하나 아닌 그것을’로 끝나는 서장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그런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전복을 함축한다.

이 책은 1996년 한 차례 번역됐으나 절판됐다. 국내에서 번역된 데리다 저술에 대한 비판을 펼치던 진태원 박사가 직접 나선 이 책의 미덕은 데리다 철학의 까다로운 개념과 용어를 세심하게 안내한 점이다. 이를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으로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용어해설’부터 일독할 것을 권한다.(권재현 기자)

07. 10. 09.

P.S. <이론 이후의 삶>(민음사, 2007)도 사놓은 지 꽤 됐는데(데리다에 관한 건 예전에 <세계의 문학>에 번역된 걸로 읽었다), 복사해놓은 원서를 찾지 못해서 페이퍼를 쓰지 못하고 있다.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는 건 시간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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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9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다른 철학자들에 비하면 데리다는 쉬운 편에 속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초반이 어렵다고 하니까 역자의 충고대로 2장부터 읽으셔도 될 듯하네요...
 

이번주가 소위 '인문주간'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과 함께 작년에 마련된 프로그램이니까 올해가 두번째 행사인 셈이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할 듯한데(나도 참여해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지 않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간략한 뉴스보도를 인용하면 이런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하는 '2007 인문주간' 행사가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오늘 서울대에서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인문학자들은 개막식에서 문명의 횃불을 밝히는 동력으로서 과학기술과 산업이 중요한 것처럼, 사람다운 삶의 길을 넓혀 가는 지혜와 통찰력 또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런 내용의 인문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또 물량적 성장 위주의 산업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구도 속에서 인간성을 경제적 효율성의 하위 가치로 전락시킨 우리 사회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오늘부터 오는 14일까지 부산과 광주를 비롯한 전국 8개 도시에서 계속되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 기간 동안 학술제와 대중강좌, 문화체험, 공연, 전시 등 74개의 모두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리는 이번 인문주간 행사는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를 끌어 올려 인문학의 부흥을 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YTN뉴스)

 

'인문학 부흥'을 위해서 나대로 애쓴다고는 생각하지만 인문주간 행사와 관련하여 내가 힘을 보탠 건 전혀 없고 이런저런 일정상 참여할 수 있는 행사도 없을 듯하다. 다만 오늘 지난번에 언급한(http://blog.aladin.co.kr/mramor/1598990) 무크지 <소문>(민음사, 2007)을 받아서 예전에 기고한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오래전 글이라 좀 낯설었다!) 마침 '인문주간'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옮겨놓기로 했다. 타이틀이 또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이기도 하고(내가 쓴 문구지만 좀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저작권과도 관계가 있으므로 마지막 두 문단은 생략했다.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은 서점에서 살짝 들춰보시길. 다소 의외의 모양새이긴 하나 멀쩡한 글들과 인터뷰 꼭지들(방송인 손석희 교수, 민세원 KTX 여승무원 노조지부장)이 실려 있으므로 사보셔도 좋겠다. 그럼, 로쟈의 '인문학 근심기'를 읽어보도록 한다.

“당신이 신춘문예 당선자든 뭐든 상관없다.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게만 써라. 이래 가지고 꼴리겠어.” 한 중앙일간지 등단시인이 무작정 상경하여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야설(야한 소설)까지 쓰다가 에로배우 겸 사무원인 여직원에게 들었다는 얘기이다. 한데, 이거 야설 쓰는 동네 얘기로만 치부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요즘 위기라는 문학 동네나 인문학 동네라고 해서 사정이 다를까, 싶어서이다.

특히 인문학, 요즘 애로가 많다. 잘나가던 인문학, 한때 독서 대중의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그이들의 인생 자체를 바꿔 놓기도 했다지만, 이제는 꼬이는 인문학, 인생 망친다는 푸념을 더 자주 듣는다.(“아니, 어쩌다 인문학을 하셨어요?”) 그렇다고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지라 사회적 관심과 무관하게 자력 구제에라도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세계를 평평하게 해 준다는 디지털 시대. 그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변신을 해야만 한다면, 그 인문학의 변신은 무죄인가? 그걸 좀 따져 보고 싶다.


 

 

 

지난 1990년대 인문학 동네를 도배한 가장 대표적인 구호는 ‘문학에서 문화 연구로’였다. 구닥다리 같은 문학 연구 그만 하고 문화 연구로 관심을 확장하자, 라는 게 취지였다. 한데, 이 문화 연구, 비록 나중에는 새로운 직업군으로서의 문화비평가들을 양산해 내는 일에나 이바지하게 되지만, 태생은 좌파 정치학이다. 대중문화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따위를 폭로하자는 계몽적 시각이 기본적인 입지점이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문화 연구라는 간판을 단 교양서들이 좀 뜸하게 나오는 듯싶더니 이윽고 쏟아지기 시작한 건 문화산업 관련서들이다. ‘문화 연구에서 문화산업으로’가 2000년대의 새로운 구호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산업’이라는 명칭이 너무 나이브하다고 하여 간판에 페인트칠을 좀 한 것이 이름하여 ‘문화 콘텐츠’이다.(이거 본토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라고 한다.)  

 

 

 

 

‘문화’라 불리던 것의 간판이 ‘문화 콘텐츠’로 바뀌면 그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라 정치적 행보 또한 좌에서 우로 게걸음 치게 된다. 디지털 시대에 오직 ‘돈 되는 문화’, ‘돈 버는 문화’만이 ‘문화 콘텐츠’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격을 얻는 것이다. 같은 취지의 국가 진흥기관까지 설립되니 이건 아주 노골적이지 싶다. 그러고는 인문학의 ‘비즈니스’에 대해 묻는다. 인문학, 너는 뭐 할래? 제법 존중해 주는 것인가? 글쎄다. “인문학이 뭐 별건가, 인문학 콘텐츠가 인문학 아냐?”라는 계산을 파일 공유 하듯이 나눠 가진다면 그나마 알아주는 게 고맙긴 하다. 중과부적인 주제에 “이건 아니잖아!”라고 딴죽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궁여지책의 변명은 이런 거다. “제가 좀 게으르잖아요.” 

이런 인문학 스토리를 늘어놓자니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인문학의 유구한 위엄이기도 하다. ‘니 주제를 알라’(소크라테스)거나 ‘니 운명을 사랑하라’(니체)는 게 인문학적 정언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럼, ‘완전소중’은 아니지만 ‘대략만족’ 정도는 된다. 해서, “아무리 개 같은 짓이라도 (인)문학으로 먹고 살자.”라는 결심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 그리하여 상경한 우리의 시인, 인터넷에서 ‘야설 작가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러고는 수십 편의 야설을 썼지만 원고료는 한 푼도 못 받았단다. 되레 봉변만 당했단다. 다시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 언제부턴가 인문학 동네에 스토리텔링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보니 스토리텔링 관련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게 2000년 이후이다. 인문학 논문에도 ‘드래건(dragon)’과 ‘소드(sword)’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학의 미래를 여는 화두로 ‘컴퓨터 게임과 문학’이 회자되기 시작하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건 대세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의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먼저, 바츠 해방 전선에서 혁명에 헌신하고 있는 사용자(user)-전사들: “<리니지2>의 사용자 스토리는 약한 사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체험의 존엄성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존엄성은 굴욕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주눅 들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사회적 구조에 반대하는 행동으로부터 태어난다. (...) 한국 온라인 게임은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는 미래의 인간 커뮤니케이션들이 어떤 윤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가를 보여 주는 인류사의 시금석이다.”(이인화,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한데, 이러한 행동과 윤리가 온라인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천재적인 이야기꾼’ 빈 라덴의 경우: “빈 라덴은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수십 번, 수백 번에 걸쳐 연습했다. 잘 짜인 대본에 피나는 연습으로 이루어진 공연이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세계인들은 엄청난 반향을 보였다. 그것이 슬픔이든 경악이든 기쁨이든 간에 어떤 예술이 이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빈 라덴은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철저히 활용한 것이다.”(최혜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

하여, 스토리텔링 만세다! 그러니 ‘문화에서 문화 콘텐츠로’라는 구호에 상응하여 ‘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으로’라고 목청껏 외쳐 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실 따져 보면, 스토리 이전에 스토리텔링이 먼저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잠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다시 디지털 문화로 인류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천해 왔다고 할 때, 그 디지털 문화의 환경이 지금 다시 만나는 것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구술 문화이다. 그리하여 과거 문자의 도입이 전래의 ‘이야기’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면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또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 방식, 곧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데 이 ‘새로운 이야기’는 ‘포스트모던은 새로운 중세’(움베르토 에코)라는 진단이 무색하지 않게 어떤 ‘오래된 이야기’와 조우하고 있다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둘러보면 어느 틈엔가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로마의 신화들과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의 포로가 된 지 오래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이다. 이미 오래전에 러시아 민담학자 프로프가 정리한 바대로 이러한 판타지적 모험 서사에서 인물은 캐릭터로, 행동은 기능으로 환원/축소되지만 그러한 평면성은 3D 입체 공간 속에서 새로운 깊이를 부여받는다. 아니 그런 것으로 가장/가정된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이러한 근심은 디지털 스토리텔링과는 또 다른 스토리텔링에 관해서도 이어진다. ‘리더십 스토리텔링’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것은 기업 경영에서의 성공 신화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다. 이 스토리텔링은 허구적 상상의 세계나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을 무대로 하며, 스토리텔링은 그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다. 무엇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기업의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는 게 이 리더십 스토리텔링 전도사들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리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 하더라도 그 커뮤니케이션 효과 면에 있어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스토리텔링은 무미건조한 데이터들을 생생한 현장성과 현재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이미지들로 전환시키며 이를 통해 설득력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쉽고 단순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 청중에게 불씨만을 제공해야 더 효과적인 까닭에 너무 자세한 디테일(세부사항)을 묘사하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이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의 비결이란다. 그리하여 들려오는 성공학적 정언명령.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하라!’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어디서나 이야기 좀 달라고 한다.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부추긴다. 나름 ‘이야기의 보고(寶庫)’로서 (인)문학도 덩달아 우쭐거릴 만한가? 하지만 사정은 또 그렇지만도 않다. 구술 문화(전근대)와 디지털 문화(탈근대)의 합종연횡으로 말미암아 도토리 신세가 된 건 문자 문화(근대)이다. 그리고 모험 서사와 성공 신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리알 신세가 된 건 근대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소설이다.

 

 

 

 

근대 소설이란 무엇인가? 짚신 두 짝이다. 한 짝은 디지털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리얼리티(현실)이고, 다른 한 짝은 리더십 스토리텔링에서 버려진 디테일(세부 묘사)이다. 그 리얼리티와 디테일의 조합으로 근대 소설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반성하고 탐구했다. 우리가 ‘재미’로만 사는 것도 ‘돈’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인간으로서의 위엄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인가. 스토리텔링이 번창하는 시대에 이야기 문학의 최고 정점으로서의, 하지만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밀란 쿤데라)으로서의 근대 소설이 점차 찬밥 신세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하략)   

07. 10. 08.

 

P.S. 사실 나는 '문화콘텐츠'나 '스토리텔링'이 부각되고 있는 작금의 인문학 현황에 대한 소회를 몇 자 적으려고 했을 뿐이고, '인문학, 맨주먹으로 일어서다!'란 '선정적인' 제목을 제안한 건 편집자이다. 그 카피성 문구를 말미에 쓴 건 나지만. 그나저나 이런 '궁상맞은' 이야기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오히려 꺾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떠오른 카피 하나. "인문학, 음란과 궁상 사이에서 길을 잃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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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7-10-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요즘 문화컨텐츠학과의 스토리텔링을 접하면서 느낀 게 역시 세상은 돈과 재미가 대세인가라는 것이어서 슬프던데요...그냥 이렇게 변해가는 걸까요?

로쟈 2007-10-09 13:47   좋아요 0 | URL
쉽고 편한 걸 지향하는 게 인간의 게으른 본성일 테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시대인 것이죠...

이잘코군 2007-10-08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철학이 문화콘텐츠학과 교양학부 쯤으로 바뀌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인문학이 변해야 산다고들 말하지만, 인문학을 실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기본 바탕은 깔아놓고 응용을 해야하는데, 무조건 변화를 요구하는거 같단 인상입니다.

로쟈 2007-10-09 13:45   좋아요 0 | URL
인문학 내부적으론 그런 변화에 대응할 만한 내공 자체도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10-08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것 관심없고 그냥 인문학 서적들 마음껏 신청할 수 있고 빌려볼 수 있는 도서관이나 많이 지어졌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콜레쥬 드 프랑스 같이 비 전공자들도 마음껏 인문학 석학들의 깊이있는 강의를 들어볼 수 있는 공간이나...

로쟈 2007-10-09 13:44   좋아요 0 | URL
그런 발상의 전환은 십수 년내로 어렵지 않을까요?..

심술 2007-10-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츠 해방 전선'이 리니지2 하는 이들이 모이는 곳인가요?

로쟈 2007-10-09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인용한 거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리니지를 해본 적도 없구요.^^;

hdachi 2007-11-01 23:43   좋아요 0 | URL
리니지2의 '바츠'라는 서버에서 있었던 일종의 민중 봉기 사건입니다.
당시에 봉기를 주도했던 유저가 썼던 선동문 등이 온라인 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찾아 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거에요.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 결말까지, 결국은 현실의 재탕이라 그게 디지털 스토리 텔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매 2007-10-0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쥬 드 프랑스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학강좌"라는 강좌가 열린다고 하네요. 한국의 석학들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살펴보시는 것도 흥미로울듯 합니다. http://hlectures.krf.or.kr/ 여기에 소개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인문학 공부 안(못)한다고 시부렁거리는 사람들 많은데, 저는 원전번역의 미비등 인문학의 초석도 제대로 쌓지 못한 한국의 원로 학자들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국내용 석학들이셨어라는 뒷담화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로쟈 2007-10-09 23:04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다는 얘기는 접한 적이 있는데,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듯하군요. 동영상 서비스가 된다고 하니까 기대를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