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50'에서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문학기행>(따뜻한손, 2004; 한국문원 1997)에 대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자사에서 연재한 기획기사를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는 건 팔불출 같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책이기에 그 정도의 부덕은 눈감아 주기로 한다. 사실 '문학기행'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들 가운데 이만한 책이 또 있는지도 모르겠고(공동 작업으로는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 비견할 만하다). 한국문원과 따뜻한손에서 판을 바꿔가며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문학기행: 명작의 무대>(한국일보사, 1987)이다(그래봐야 어느 박스 속에 들어가 있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최신판도 소장용으로 사두고 싶다.  

한국일보(07. 10. 04) [우리 시대의 명저 50] <39>'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일이 시인ㆍ작가의 일에 속한다면, 문학을 탄생시킨 현장-그 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화의 향수자인 우리 모두의 기쁜 책임이기도 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중한 명작의 본적지를 찾아 창조적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그 문화의 원형을 복원ㆍ보존ㆍ재창조하는 길을 구상해 본다.”

한국일보 1986년 5월11일자 5면엔 이 같은 편집자 주(註)가 실려 ‘문학기행-명작의 무대’(이하 문학기행)란 기획 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생존 작가와 함께 그들의 대표적 소설 및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을 찾아, 문학과 현장의 창조적 길항 관계를 탐색하겠다는 참신하고도 묵직한 포부였다.

입사 9년차의 출판 담당 박래부(56ㆍ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기자는 당시 탈고 막바지에 다다른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답사하고 마수걸이 기사를 썼다. 한 주 뒤인 18일자엔 문학을 담당하던 13년차 김훈(59ㆍ소설가) 기자가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씨와 함께 가상 공간 ‘무진(霧津)’의 본적, 전남 순천만을 둘러보고 한 면 가득 기사를 부려놓았다. 86년 5월~87년 8월, 88년 10월~89년 5월에 걸쳐 무려 85회 연재된 문학기행은, 몇몇 후배 기자의 일시적 참여를 제외한다면, 온전히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성실한 취재와 유려한 문장으로 쌓아올린 기념비적 성과였다.

연재가 시작된 86년은 언론사 정ㆍ폐간 결정권을 손에 쥔 문공부가 산하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전달하던 시기였다. 기관원들이 신문사를 무람없이 드나들며 편집권을 침해하던 억압의 시절, 명작의 모태를 찾아 삶과 아름다움을 논하던 문학기행은 암담한 세월을 겨우 살아가던 이들이 망명할 수 있는 ‘말의 공화국’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문학기행은 저 엄혹한 80년대를 말의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현실 앞에 절망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한 편의 서사시”이자 “그 기행을 쫓아감으로써 악몽과도 같은 청춘을 견디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마약”이었다고 추억했다.

문학기행의 전반기(86~87년) 연재분은 87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97년엔 두 사람의 기사 71편을 묶은 <김훈ㆍ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전 2권ㆍ한국문원 발행)이 나왔다가 절판됐다. 저자들의 신문사 후배 김창영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따뜻한손’은 2004년 홍명희, 김지하, 박노해, 권정생, 전경린 등 다섯 꼭지의 글을 추가하고 전체 분량을 50편으로 추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전 2권)이란 제목의 증보판을 펴냈다. 어느덧 머리가 허옇게 센 우리 시대의 문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앉았다.(이훈성기자)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김훈=86년 봄에 장명수 문화부장(한국일보 고문)이 남도 여행을 다녀와서 문학기행 연재를 지시했다. 불과 열흘 만에 취재에 착수했으니 전체 계획이 미진한 채 시작된 셈이다. 준비는 안됐는데 마감은 숨막히게 돌아왔다. 우리가 속을 좀 썩이긴 했지만, 장 선배 말을 알아들었고 그 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 선배가 이걸 좀 알아주시길 바란다.

박래부=장 부장에게 등을 떠밀려 원주에서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다시 평사리로 갔다. 밤을 세워 원고지 30여 장짜리 첫 회 원고를 넘겼다. 2회가 김형 차례였는데 순천에 다녀와 원고를 넘기곤 못하겠다고 했다. 김형이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한 달 간 혼자서 참혹하게 시리즈를 끌고 갔다. 세상일이 신통한 것이, 1년쯤 뒤 내가 일본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김형이 예전의 나처럼 한 달 반가량 혼자서 기사를 써야 했다. 결국 힘에 부쳐 한동안 연재가 중단됐다가 내 귀국 후 재개됐다.

-작품 선정 기준은 뭐였나.
박래부=생존 작가 중심으로 꾸린다는 것이 큰 원칙이었다. 87년 대거 해금된 작가 중 정지용 등을 부분적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서사성이 중요한 기획이다보니 소설을 많이 다뤘다.

김훈=당시 문학을 비롯한 우리의 정신사는 양극화된 상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진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안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작품 선정에 신경을 쏟았다.

박래부=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자로서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다. 넘으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상황에서 투사적 면모를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연재가 시작되고 네 달 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말>지에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하고 이듬해엔 6월항쟁이 일어나면서 민주적 분위기가 많이 확산됐다.

김훈=언론의 속성이자 한계이겠지만 문학기행이 한국 현대문학사를 관통하면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골라 다뤘다고 보긴 힘들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이광수부터 시작해야할 텐데 ‘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대중 매체가 그렇게 하긴 힘들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 작품을 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김훈=현장은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명백히 그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써 증명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문학이 리얼리즘의 바탕에서 떠나있는 오늘날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문학기행은 우리 세대가 읽고 자란 문학에 대한 헌사 같은 것이었다.

박래부=작품 속 시간과 공간 배경엔 작가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문학기행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발췌해서 하나의 시리즈로 기록해두는 작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공간적 원형이 어느 정도 보전돼 있었다. 원래 모습이 훼손되기 전에 현장을 포착하고 작가의 얘기를 적어둔 것은 이젠 불가능하기에 더욱 의미있는 기록 작업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정신적 탈출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김훈=‘한국문학 지도 그리기’가 원래 기획 취지였지만 그것은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고 결국 지도를 다 그리지 못했다. 대신 회를 거듭하면서 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로써 야만의 시대에 인간과 시대에 대한 소통을 열어줄 수 있었다는 보람을 느낀다. 가령 조해일의 <아메리카>를 다루며 기지촌 여성의 쓰라린 삶은 ‘부도덕이 아닌 불행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됐다고 믿는다.

박래부=억압적 상황이 상존하던 당시, 문화부 내에서 억압의 최전선에 있던 기자는 문학 담당 기자였을 것이다. 80년대는 문학의 위상이 크고 독자에 대한 영향력도 강한 시기였다. 죽은 고정희 시인은 자기 시를 “의미를 숨길 수 있는데까지 숨기고, 표현을 우회할 수 있는데까지 우회해서 쓴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작품 속 메시지를 수위조절을 해가며 독자에게 전하는 일이 문학 기자의 몫이었다.

김훈=문단을 비롯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진지했다. 편지, 전화가 많이 오고, 찾아와서 격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 작품 안 다뤄준다고 항의하는 소설가들이었다(웃음).

박래부=당시 신문 발행면이 12, 16면 정도였는데 그 중 한 페이지를 할애해 장기 연재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다시 느끼기는 힘들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진 않았나.
김훈=박형은 나와 한 번의 분란도 없었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장 선배가 좋은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래부=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한 주는 다녀와서 기사를 써야 했고, 다른 한 주는 다음 문학기행을 위해 읽어야만 했으니까.

07. 10. 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