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이기도 하면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기일이다. 3년전 10월 9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뭔가 꾸며보려고 하다가 형편이 닿지 않아 예전에 써둔 페이퍼만 잠시 손질해두었다(http://blog.aladin.co.kr/mramor/1053649). 낮에 도서관에 갔다가 웬일인지 <목소리와 현상>(인간사랑, 2006)에 자꾸 손이 가서(연구실에 꽂아놓은 내 책은 누가 들고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대출했는데(불어본은 복사했다), 혹 데리다의 유령이 잡아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딴은 며칠전부터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페이퍼를 쓰려고는 하고 있지만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렵다. 지난 주말의 서평기사를 옮겨오는 걸로 오늘의 입막음을 대신한다.  

동아일보(07. 10. 06) 자본주의가 군림하는 한 마르크스는 되돌아온다

2004년 타계한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중 가장 화제가 되고 인용도 많이 된 책이다. 언어유희에 가까운 데리다의 난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제목 저자 내용 등 네 가지의 어긋남(out of joint)에서 발생한다. 이 책이 ‘햄릿’의 유명한 문구, ‘시간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에 대한 심오한 독해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불일치는 그 반시대성에서 발생한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됐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가 선언된 시점이다. 구체적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역사의 종언’으로 찬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출간된 지 1년 뒤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귀할 것임을 주장했다.

두 번째는 저자와 주제의 불협화음이다. 데리다는 좌파 전통이 강한 프랑스 지식사회에 있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저작을 다룬 적이 없었다. 그의 주된 활동 영역은 서구 형이상학의 해체와 재구성이란 ‘이론’에 있었지 ‘실천’에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돌연 마르크스를 들고 나오며 ‘정의’와 ‘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

세 번째는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 유령, 그것도 복수의 유령을 병치한 제목의 충돌이다. 이 제목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거기서 유령은 일종의 반어법으로 사용된 것이었고 그것도 ‘공산주의’라는 단 하나의 유령만 지칭했다.

네 번째는 그처럼 과학성을 강조해 온 마르크스주의를 역설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넘나드는 유령적 실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독특한 ‘유령론(hantologie)’으로 해체 및 재구성해 낸 파격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도구로서, 억압과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해방운동의 대명사로서 어디선가 불러 대는 목소리가 있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망령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올 것이란 논리가 그것이다. 그래서 헤겔이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보다 셰익스피어가 마르크스를 낳았다는 주장이 더 강조된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이 아닌 ‘운동’이며 정교한 ‘과학’보다 메시아주의에 기초한 ‘종교’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이 책은 가상과 환영, 유령과의 단절을 강조하며 과학적 이론을 표방해 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나 이상인 그것을/더 이상 하나 아닌 그것을’로 끝나는 서장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그런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전복을 함축한다.

이 책은 1996년 한 차례 번역됐으나 절판됐다. 국내에서 번역된 데리다 저술에 대한 비판을 펼치던 진태원 박사가 직접 나선 이 책의 미덕은 데리다 철학의 까다로운 개념과 용어를 세심하게 안내한 점이다. 이를 제대로 음미하는 방법으로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용어해설’부터 일독할 것을 권한다.(권재현 기자)

07. 10. 09.

P.S. <이론 이후의 삶>(민음사, 2007)도 사놓은 지 꽤 됐는데(데리다에 관한 건 예전에 <세계의 문학>에 번역된 걸로 읽었다), 복사해놓은 원서를 찾지 못해서 페이퍼를 쓰지 못하고 있다.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는 건 시간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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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9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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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10-1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다른 철학자들에 비하면 데리다는 쉬운 편에 속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초반이 어렵다고 하니까 역자의 충고대로 2장부터 읽으셔도 될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