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면 주말 북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는데, 대략 30분 정도면 네댓 일간지들의 리뷰를 일람할 수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3권 안팎의 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 1-2권 정도를 실제로 구입하는 듯하다(물론 그렇게만 도서구입이 이루어진다면 매달 몇십 만원씩의 책값을 물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번주도 사정은 비슷한데, 그 3-4권의 책 중 하나가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이다.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예전에 <핀란드역까지>(실천문학사, 1987)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으로 꼽은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80104 참조.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근대혁명사상사>(을유문화사, 1962)로도 번역됐었다!).

보아하니 1940년에 나온 원서 자체가 영어권에서도 몇 년전 새로 출간되었고(2003년에 나온 듯하다) 이번에 나온 건 그걸 대본으로 한 새 번역이다. 간단히 말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역사를 만들어나간' 유럽의 혁명적 사상가/혁명가들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책이다. 그 여정은 핀란드역으로 가는 철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것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이다. 전면에 있는 거대한 동상은 물론 레닌이고. 책은 지난주에 출간됐지만 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고 있다. 한겨레의 리뷰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24) 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른 살의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 첫줄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영탄조의 문장을 내뱉었을 때, 거기에 회한만 깔려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젊은 문예이론가의 가슴에는 희망도 살아 있었다. 역사에 대한 희망,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 3년 뒤 루카치는 혁명 정당에 가입해 정열적인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루카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미국 문필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윌슨은 인류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일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는 진보적 견해를 평생 고수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고 러시아 10월혁명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의 젊은 시절 관심과 열정을 응축한 책이 <핀란드 역으로>다.

1935년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펴낸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인간해방의 세상을 향해 난 철로를 달려간다는 신념을 펼쳐놓은 저작이다.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생동감, 신념의 절실함으로 인해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교양서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시절 탐독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 책이 완역돼 나왔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다다른 가장 중요한 지점이 ‘핀란드 역’ 곧 러시아혁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어판 서문을 새로 쓴 루이스 메넌드(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책의 가치가 ‘제목’이 아니라 ‘부제’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라는 부제는 역사를 창조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의 감동어린 삶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신념에 찬 투쟁을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은이 윌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부터 1917년 혁명까지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혁명가·사상가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들인다.

이 책이 그려 보이는 역사의 철로는 한 방향으로 놓인 단선 철로가 아니다. 철로는 두 방향으로 나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한 두 철로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철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에서 시작해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로 끝나는 이 철로는 희망과 믿음의 점진적 쇠퇴를 보여준다.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의 감격적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가슴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훤히 트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계급·당파·재산의 구별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역사가에겐 “민중이야말로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미슐레의 낙관은 세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었다. 두 세대 뒤의 아나톨 프랑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세운 민중을 두고 “쓰레기 같은 놈들, 흉측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부르주아의 혁명적 열정은 쇠락했고 이들이 세운 철로는 끊어져 전망을 잃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한 철로를 살핀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표어의 차원에서 실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구현하려 한 사람들이 만든 철로다. 29살 때 혁명에 참여한 그라쿠스 바뵈프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이 개시됐을 때 바뵈프는 ‘평등협회’를 만들어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평등선언’을 썼다. “프랑스 인민이여! 우리와 함께 평등의 공화국을 선포하자!”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바뵈프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생시몽·푸리에·오언과 같은 인도주의자들이 등장해 ‘사회주의 공동체’ 방안을 내놓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이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머지않아 ‘공상’에 가까운 실험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혁명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2895)를 등장시킨다. 이 책에 서술된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은 익히 알려진 대로 추방과 망명과 궁핍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펜은 마르크스의 반항적 정신을 묘사하는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스물세 살 마르크스가 쓴 시는 자기 내부의 들끓는 정열을 이렇게 묘사한다. “파도는 왜 으르렁거리는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절벽에 부딪쳐 깨지기 위해서요.”

1845년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던 마르크스는 3년 뒤 역사적 문건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팸플릿은 “시종일관 고성능 폭탄 같은 힘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이었다. 1850년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무려 17년의 세월을 바쳐 <자본> 1권을 완성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구”,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는 데 곧바로 쓰일 변혁의 도구였다. <자본>을 출간한 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건강과 내 삶의 행복과 내 가족을 희생시킨 작업”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 런던의 빈민굴에서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낸 지하의 힘, 곧 프롤레타리아가 서유럽을 뒤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도 한참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꼭 90년 전에 터진 그 혁명은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명섭 기자)

역사를 믿었던 트로츠키…인간을 믿었던 레닌

<핀란드 역으로>에서 지은이 에드먼드 윌슨은 러시아혁명의 두 주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역사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동일시의 방식은 달랐다고 윌슨은 말한다.

지은이의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는 혁명 동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소중히 여겼으며, 인류의 기억 속에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영광된 인물로 남기 위해 어떤 개인적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람은 관중만 많으면 서슴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트로츠키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역사의 무대에 섰던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에게 역사란 곧 섭리와 같은 것이었고, 자신은 그 섭리를 알고 그 섭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트로츠키는 경쟁상대 멘셰비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가련한 고립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파산했으며, 이제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라-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그러나 머잖아 그 자신도 스탈린에게 패배해 멘셰비키 신세가 됐다고 지은이는 씁쓸하게 말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달리 이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 상황을 살피며, 자기 이야기의 조리가 맞는지는 괘념치 않은 채 가능한 한 상황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또 트로츠키와 달리 레닌에게 역사는 수호천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역사는 미적거리다가 승리를 놓친 혁명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레닌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태도가 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레닌조차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의 전주곡인 2월혁명이 터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화는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민중임을 이 책의 지은이는 넌지시 보여준다.(고명섭 기자)

07. 11. 23.

P.S. 두어 가지 '주석'을 보탠다. 먼저, 책의 표지는 국역본보다 영어본이 훨씬 '현장감'이 있다. 윌슨이 1930년대 후반에 조명한 현실 사회주의로의 역사와 1991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되돌아보게 되는 그 역사는 분명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평은 끄트머리에서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 감격이 이 책에는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 적었는데, 오늘날의 독자가 그 감격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동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새로 첨가된 루이스 메넌드의 서문은 이런 점을 짚어주고 있을 듯하다. 메넌드는 작년에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 소개된 '미국철학' 전문가이다.  

기사의 한 대목: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오늘날의 지명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이지만 1917년 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였다. 1차대전 기간이라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독일식의 '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기 때문이다(레닌 사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변경된다). 그리고 러시아 10혁명은 11월 7일(옛 러시아력 10월 25일)에 일어난다. 윌슨이 잘못 기재한 것인지 기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지만.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역명은 종착역에 준하여 붙여진다. '핀란드역'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인데, 핀란드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란 뜻이다(때문에 '레닌그라드역'은 모스크바에 있고 '모스크바역'은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식이다). 해서, 문제는 '핀란드역'이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는 '핀란드'로 이제/다시 출발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헬싱키역으로 가야 하는 건가?.. 

P.S.2. 2007년의 레닌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작가 이상엽이 만난 '오늘의 러시아 풍경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2007)도 '핀란드역으로' 가는 길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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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1-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왜 '핀란드'일까 읽는 내내 궁금했었어요.좀 헷갈리겠는데..러시아사람들은 익숙해져서 괜찮겠지만.

로쟈 2007-11-24 11:20   좋아요 0 | URL
문화적 차이죠. 사실 차들이 좌행하는 나라와 우행하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요...

소경 2007-11-2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관련 대목들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황도 모른 채 버먼의 묘사만 넋놓고 읽기만 했다는.....

로쟈 2007-11-25 19:03   좋아요 0 | URL
버먼의 책들은 저도 좋아하는데 기대만큼 읽히지는 않는 것 같네요...

turk182s 2007-11-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그런뜻이..근데 궁금해서그러는데 로쟈님은 이많은 책들을 언제다읽어요? 전 회사 술자리에 모임에 도저히 안되던데..쉬는날에는 자기바쁘고,,어쩌다 연차휴가내는날 도서관가서 읽어봐야 100페이지남짓,,절망!! 님은 무슨 속독법공부하시나요?정말궁금,,^^

로쟈 2007-11-29 01:00   좋아요 0 | URL
책을 보는 것과 읽는 건 다르지요. 저는 많은 책을 보고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

jose78 2007-11-2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궁금했는데~^^ '본다'라는 구체적 방법은 뭔지 궁금궁금~~ㅋㅋㅋ

로쟈 2007-11-29 01:03   좋아요 0 | URL
대략 어떤 내용의 책이구나, 라는 윤곽을 보는 것이죠. 일종의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고, 읽기는 같이 살림을 차리는 것이죠...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의 한권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책세상, 2007)을 올려놓았었는데, 잠시 인사치레의 자료를 옮겨놓는다. <모나드론>은 지난봄 한겨레의 '고전 다시읽기'에서 다루어졌고 이 글은 단행본 <고전의 향연>(한겨레출판, 2007)에 재수록되었다.

한겨레(07. 03. 03)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

현대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남긴 유산을 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또 그 ‘말류’가 남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 탈근대 사이에는 미묘한 연계선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유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근대의 사유들은 전통을 뿌리 채 부정하곤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의 대결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유는 근대가 버렸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고 거기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들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일정한 노력을 바치고 있다.

‘전근대’와 ‘첨단’ 동시에 갖춘 철학
서구 철학사에 눈길을 맞출 경우, 우리는 그 ‘전통’의 마지막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철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형이상학자이다. 서구 형이상학은 헬라스(그리스)에서 꽃피었고 중세로 이어졌으며,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꽃피게 된다. 그 후 ‘계몽사상’에 의해 매도되지만, 독일 관념론을 거쳐 니체, 베르그송을 시발점으로 다시 세 번째 아름답게 개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철학자라는 위상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로 보았다. 30년 전쟁으로 대변되는 종교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의 분열상들이 팽배했다. 라이프니츠가 ‘종합’과 ‘조화’의 사유를 펼친 데에는 이런 유럽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채로운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킬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그의 사유에는 논리학, 자연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등등 여러 계기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요소들이 종합과 조화/화해의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그의 <모나드론>에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라이프니츠는 거대한 종합을 추구한 그의 사유 내용과는 상반되게 글 자체는 간략하게 쓰기를 즐겨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들을 쓸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그 누구의 글들보다 논리적으로 정치하며 압축적이다. <모나드론>은 짧지만 그의 사유 전체를 조망해 주는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체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제작’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중세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철학 역시 세계를 제작 모델로 보는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작 모델이란 어떤 조물주가 있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상을 말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이런 신학적 구도 아래에서 사유했으며, 모나드가 일종의 ‘설계도’로 이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형이상학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각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그 만큼이나 또한 참신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맥락을 달리 해서 읽으면 바로 그 만큼이나 ‘첨단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정한 관계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생명체들이 ‘설계되었다’는 신학적 구도에서 기계들이 ‘설계되었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구도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현대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참신한 존재론으로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의” 본질이다. 이 말은 서구의 전통 철학의 도식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면이 있다. 왜일까? ‘본질’이란 개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자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본질, 나무의 본질이라는 말은 써도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철수의 곱슬머리, 거무스름한 피부, 유난히 명랑한 성격 등등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본질’이라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성격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 등을 말한다. 본질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인 “~ity”(우리 말의 ‘~성’에 해당)는 개체에는 붙지 않는다. “humanity”는 가능해도 “Jackity”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인간‘성’은 가능해도 철수‘성’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 구도에서는 바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목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이다.

관우 ‘모나드’, 유비·장비 전제로 가능
‘모나드’는 한 개체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에는 한 개체의 성질들 및 사건들이 내장되어 있다. ‘제갈량’이라는 모나드는 몸을 갖기 이전의 제갈량의 설계도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성질들(머리카락 색깔, 코 높이, 목소리, 눈빛, 성격 등등) 및 그의 사건들(“유비를 만나다”,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오장원에서 죽다” 등등)을 내장하고 있다. 제갈량의 모나드는 이런 성질들과 사건들의 총 집합이다. 그리고 이 모나드가 바로 제갈량이라는 개인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조물주가 세계를 설계할 때 단 한 장의 설계도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도면들을 그려보듯이, 조물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설계도들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실현시킴으로써 지금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는 원래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같은데 청룡언월도가 아닌 방천화극을 쓰는 관우, 다 같은데 수염이 짧은 관우, 다 같은데 적토마가 아닌 다른 말을 타는 관우 등등 현실의 관우와 조금씩 다른 관우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라이프니츠는 이런 관우들을 ‘모호한 관우’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 조물주는 가장 관우다운 관우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세계를 만든 후 “좋았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철학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고픈 충동 느껴
그런데 이런 모나드들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만 만들고 유비나 장비의 모나드를 만들지 않는다면 ‘삼고초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사람의 어느 한 모나드는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나드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패한 사람의 모나드도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세밀하게 내려갈 수 있다.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면 당연히 베인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각 모나드들의 관계는 모두 맞물려 있어야만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관계를 ‘공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른다. 관우의 모나드 안에 “유비를 만나다”가 있어야 하고 유비의 모나드 안에 “관우를 만나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두 사건이(사실상 하나의 사건)이 “함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가능성 개념은 라이프니츠 사유의 심장부에 있는 개념이다. 흔히 라이프니츠 철학을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설명이다. ‘예정조화’란 공가능성 개념의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의 사유를 컴퓨터, 로봇, 가상현실, 분자생물학 등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싶은 철학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모나드는 정보체계로, 그 성질들, 사건들 하나하나는 ‘비트’들로, 설계도들은 가상세계로… 번역할 수 없을까? 현대문명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라이프니츠는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로서 다가온다.(이정우_철학자)

07. 11. 22.

 

 

 

 

P.S. 그러한 '철학적 충동'의 산물이 서평자 자신이 쓴 <주름, 갈래, 울림>(거름, 2001)과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 등일 테다. <모나드론>이 새로 번역된 김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라고 <주름, 갈래, 울림>을 책장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긴 책들이 하도 쌓여 있어서 무얼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현대적 번역'을 음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고, 다만 <모나드론>을 들춰보다가 새삼스레 생각난 번역어 문제에 대해 잠시 적는다. 그건 '우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질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변경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 또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모나드 내부에서는 위치를 변경하거나 생산, 증가, 감소하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것에는 부분과 부분의 변화가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나드에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窓)이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감각 종(種)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처럼, 우유는 실체와 분리할 수도 없고, 실체와 별도로 외부에서 배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체나 우유는 모나드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7항, 34쪽)

여기서 '우유'는 '창'이나 '종'과는 달리 한자가 따로 병기돼 있지 않은데, 그만큼 '친숙한' 용어라고 역자가 판단한 것인지 신기하다(그렇다고 앞부분에 미리 나왔던 용어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유'는 '우연히 있음'이란 뜻으로 '우유(遇有)'라고 병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순전히 철학용어이며 어떤 출처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이 7항 후반부의 영역은 이렇다.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ould come in or go out. Accidents cannot separate themselves from substances nor go about outside of them, as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lastics used to do. Thus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come into a Monad from outside. 

대응시켜 보자면 '우유'는 'accident'와 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걸 꼭 우리말로, 아니 우리말이 아닌 '우유'라고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증진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술적 은어'로서 자주 입에 올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익숙해지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역자나 다른 전공자들처럼) 나로선 기껍지 않은 선택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이런 용어들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우유'와 짝이 될 만한 용어로 '분유'(!)가 있다.

 

 

 

 

'분유'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용어로 한 후배가 읽던 코플스턴의 <중세철학사>(서광사, 1989)에서 처음 본 듯하다. 라틴어 'participatio'의 번역인데 'ens'를 '유(有)'라고, 'ens contigence'를 '우연유'(이게 '우유'로도 옮겨지나?)라고 옮기는 식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분유(分有)'는 '나누어 가짐'이란 뜻으로 등재돼 있지만 나는 이게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우유'건 '분유'건 너무도 고색창연한 중세틱한 번역어들이며 내게는 별로 연상시켜주는 바가 없는 용어들이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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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23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아도 요즘 플라톤책좀 뒤적이고 있는데 "분유"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분유는 그정도면 타먹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우유"는 제가 생각해도 좀 배탈날수있을것 같습니다..^^ 우유accidents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보니 두개 다 중세철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기긴 합니다만..그리스철학에서 먼저 사용된것으로 보이더군요..그런데 이러한 철학용어번역과 관련된 적절한 역자주는 찾기 힘들더요. 이런게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국어로 철학 공부할때마다 느끼는..

로쟈 2007-11-23 18:1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우유'보다 'accidents'라고 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죠. '번역'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페이퍼를 적다가 문득 서재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방문자수는 적은 편이 아니지만 다들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듯하다) 떠올린 시를 옮겨놓는다.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제목인데, 시구절을 인용하면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다(나대로의 말장난에 좀 익숙한 분이라면 '암담-암스테르담'의 유운 효과가 지겨울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같은 구절이 마음에 든다.   

물위의 암스테르담


태엽이 풀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눈이 감긴다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2  
나는 점점 더 나빠져 가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얘기나 반나절 동안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냐고?
나는 한 나무의 변두리에 주저앉아 눈에 익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어
나는 이때쯤 살갗에 모이는 소금들을 부끄러워하지 
나는 이젠 더 참을 수 없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싶어
나는 등나무 꽃 그늘 아래로 옮겨갈 테야

눈물보다도 맑은 물위에 눈꽃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가려무나, 날아가려무나, 공손한 비둘기들이여 앉은뱅이 비둘기들이여
날개의 페달을 밟으며 긴 아치를 그리며 이 물위의 도시를 떠나가려무나 
아침이면 그대 햇살 아래 예언처럼 떠오르는 도시를……  

4
나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어느 물고기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그런 얘기나 태엽 풀린 소리로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고? 

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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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11-23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위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영화도 있는데...

로쟈 2007-11-23 08:49   좋아요 0 | URL
원제도 그런가요? <암스테르담>을 타이틀로 한 영화는 여러 편 되는군요. 얼마전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기타연주곡으로 유명한 끌로드 치아리도 내한공연을 가졌군요...

섬나무 2007-11-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아닌듯한데 누구의 신가요.

로쟈 2007-11-23 15:38   좋아요 0 | URL
흠, 제가 쓴 건데요.^^;

섬나무 2007-1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는 로쟈님인데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싯구절 운운에서 그럼 다른 이 건가? 했습니다.
로쟈님 그거 아십니까? 로쟈님 시는 가을 볕 아래 좌판에 놓인 열매들 같습니다.

로쟈 2007-11-24 12:38   좋아요 0 | URL
게다가 공짜입니다.^^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해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과 함께 읽어볼 작정이란 얘기를 지난주에 적었다. 일간지 서평을 근거로 '와인 감식가로서의 지식인'(http://blog.aladin.co.kr/mramor/1703093)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와인 감식' 같은 풍미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기자에 따르면 '색다른 지식인론'이고 역자에 따르면 '지식인을 위한 기묘한 변명'에 해당하는 책은 학계와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도 포함하고 있어서 와인보다는 도수를 많이 높여야 할 듯싶다('꼬냑'이라고 할까?).

기자의 서평에 따르면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문장이야 더 까다로운 책들이 많기에 이 책만의 흠이랄 수는 없겠지만 다소 산만하다는 점은 이 책의 새로운 독자라면 고려해야 할 듯싶다. 군데군데 재치있는 비판과 번뜩이는 발상전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2장인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에서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독설과 비아냥은 일리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부피는 얇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야심적인 저작"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점은 저자가 서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다소 모순되기에 흥미롭다. "나는 생각할 가치가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청중에게든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코 엘리트 지식인들의 게으름이나 조급성을 사상의 깊이와 혼동하지 마라."(11쪽) 적어도 저자 스스로는 학자연하는 현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은 내용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체상의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 문체의 낯설음은 저자가 '독자'가 아닌 '청중'을 고려하고 있기에 빚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군데군데 역자의 실수도 가독성 떨어뜨리기에 동참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대체적으론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령 "어느 분야든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을 제공하는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9쪽)은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원문은 "Research and teaching across different disciplines provides ideal academic training for the intellectual."이고 'across different disciplines'은 '어느 분야든'이 아니라 '각기 다른 학문을 가로지르는', 즉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란 뜻이어야 이어지는 내용과 호응이 된다. 단순히 '연구와 교육'이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이 된다고 하면 싱거운 노릇이다. 다방면에 걸친 '학제적 연구와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개척의 공로자 중 하나인 '사회인식론(sociial epistemology)'은 바로 그런 학제적 연구와 교육을 근간으로 한 프로그램이 아닌가.

'사회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사회인식론은 지금까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비추어서 앞으로는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인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이다."(9-10쪽) 나름대로는 사회인식론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므로 원문을 따라 적으면 "Social epistemology is concerned with how knowledge should be produced, in light of what is known about how it has been produced. In effect, it is a kind of abstract science policy."

기이한 것은 원문의 'science policy(과학/학문 정책론)'이 번역문에서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으로 엉뚱하게 탈바꿈한 것이다(아무래도 '사회인식론'에서의 '사회'란 말의 연상작용 때문에 빚어진 착오인 듯하다. 덕분에 이후에 잘 읽히지 않는 대목은 모두 원문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장의 '추상적인(abstract)'을 나대로는 그냥 '이론적인'이란 뜻으로 이해하는데, 사회인식론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 왔는가(->지식의 고고학)를 검토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학문 정책론) 하는 그림을 제시하는 학제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왜 그냥 인식론이 아니라 사회인식론인가? 그것은 인식/지식이 그 사회적 발생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이겠다. 저자가 마키아벨리의 '권력에의 진리(truth to power)'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조건'을 '권력관계'와 나란히 놓는다면 그런 조건/관계와 무관하게 생산되는 지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풀러는 이 책의 모델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며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권력에의 진리'를 설파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6쪽)

책은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가장 유익한 대목은 지식인과 총제적 진리의 관계를 다룬 절이다(68-78쪽). 바쁘신 분들은 이 대목만 챙겨두어도 책값의 1/3은 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지식인을 표방하는 풀러이지만 그를 '포퍼리언'으로 이해할 때 사회인식론의 기본적인 관점과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 <쿤/포퍼 논쟁>이 이미 시사해주는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읽은 경우이다. 그 '읽기'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루기로 한다...

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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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들이 없나 뒤적거려보다가 '어렵게' 발견한 책이 토머스 크로의 <60년대 미술>(현실문화연구, 2007)이다(국역본의 부제가 '순수미술에서 문화정치학으로'이다).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미술/이론 세미나를 하다가 좀 읽어본 책이 그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 2005)이어서 저자와는 구면이다. 특히 '시각예술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란 그의 글은 내가 찾은 것만 국내에 3종의 번역본이 소개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아트북스판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60년대 미술>은 크로의 1996년작이니까 원서로는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과 나란히 출간되었던 책이겠다(그러니 같이 읽어보아야 할까?).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1960년대 미술은, 오늘날의 보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모든 동시대적 스캔들의 분수령이라고 언급되고, 좌파의 비평가들에 의해서는 미학적 급진주의가 성공을 거둔 드문 사례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미국의 비평가 토머스 크로는 1960년대 미술이 미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형성했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소개는 이렇다: "1960년대의 새로운 정치학 안에서 빚어진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양면적이다. 미술가들은 새롭고 공격적인 세계 시장 속에서 그들의 활동에 대한 지지가 점차 증가하자 이러한 시장의 지지와 시장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1955년부터 1969년까지의 시기가 낳은 하나의 산물이자 이 시기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올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해서 관심은 '60년대'로 다시 회귀한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얼른 떠오르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이후)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를 다룬 로도윅의 <현대 영화이론의 궤적>(한나래, 1999)과 1960년대초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다룬 <혁명과 웃음>(앨피, 2005)이다. 영화와 만화라는 각기 다른 장르와 유럽과 한국이라는 각기 다른 지리적 공간에서의 '1960년대'를 일별해볼 수 있겠다. 문화정치학의 관점에서. 흠, 내년의 한 가지 연구테마로 잡아도 좋을 듯하다...

07.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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