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관심도서를 다섯 권 꼽는다면 그 중 두 권은 뇌와 관련한 교양서이다. 하지만 교양지수로는 대니얼 에이멘의 <사랑할 때 당신의 뇌가 하는 일>(크리에디트, 2008)보다 한 단계 높은 책이 캐리 마커스의 <클루지>(갤리온, 2008)이다. '클루지'란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인데, 옛날 만화에 나오던 '깡통 로롯' 같은 걸 떠올려볼 수 있겠다. 문제는 그 '클루지스러운 것'이 우리의 뇌라는 점. 후회막급한 판단과 결정으로 자신의 지능을 의심해본 사람이라면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촘스키 왈, "나는 개리 마커스의 놀라운 업적 덕분에 인간의 정신 활동을 가능하게 한 생물학적 토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일보(08. 11. 29) 당신의 충동, 미리 예상하고 결정하라

"인생은 짧습니다. 이혼하십시오." 시카고의 한 법률회사가 버젓이 내걸었던 광고 카피다.

우리가 정말로 합리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따위 광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2주만에 광고판을 내려야 하긴 했지만, 이 광고는 평소 이혼을 생각도 하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효과를 실제 발생시켰다. 광고 내용이 현실적인 실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삶의 맥락과 밀접한 생각거리를 제공, 신념은 물론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클루지>의 저자에 따르면 이는 인간이 '클루지스러운 뇌'(132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혼을 낭만적인 연애와 화끈한 성적 만남의 관점에서 보도록 유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요술을 부리는 요술쟁이가 바로 '클루지(kludge)'다. 저자에 따르면 클루지는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그러나 놀랄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11쪽)으로 정의된다. 쉽게 말해 인간 진화의 중추에는 고장 나기 십상인 애물단지 컴퓨터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왜 해로운 줄 알면서도 흡연, 섹스, 비디오게임, 인터넷 등의 중독에 빠져들까? 우리는 왜 그저 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할까? 모든 게 진화의 오류 때문이다. 진화는 우리가 행복하도록 우리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도록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전체 자연계로 보자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포유동물인 인간은 가혹한 자연 조건에서 생존하며 진화해 왔다. 저자는 그 진화라는 기제 때문에 인간의 신념과 정신은 형편없이 오염돼 있다고 말한다. 합리성이 상황 논리나 감정에 복속되고 만다는 것이다. 2003년 아들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 결정이 좋은 예다. 부시는 말했다. "어쨌든 그는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녀석이다."(139쪽) 이 말을 보면 부시의 결정에는 확실하게, 감정이 개입돼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 우리의 마음은 중요한 순간에도 이따금 딴 데 가 있는 것일까? 최근 영국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의 시간에 섹스에 대한 공상을 하는 사무원이 세 명 중 한 명 꼴이다. 그같은 심리적 공백으로 1년에 경제적으로 78억파운드의 손실이 난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주의결핍장애가 인간의 숙명과도 같이 된 것은 나약한 인간이 가혹한 조건에서 살아 남으려다 보니, 반사 기능과 숙고 체계가 어설프게 통합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책은 가장 인간적인 특징인 언어에서마저도 진화의 찌꺼기가 엄존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한 장을 할애한다. 저자는 "영어에는 거친 조각들, 멍청한 틈들, 해롭고 도착된 불규칙성들이 가득하다"(191쪽)며 "진화의 흠 많은 걸작"이라 규정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저자는 최근의 언어학적 통찰을 인용, 논의를 진지하게 이끌어 간다.

인간의 숙명적 맹점을 통렬하게 꼬집던 저자는 말미에 이르러 우리의 세계를 현명하게 만드는 13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불완전함을 통찰하라는 전제 하에서 이뤄지는 제안이다. 그 중 '자신의 충동을 미리 예상하고 결정하라' '누군가가 여러분의 결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하라' 등의 제안은 이 책이 인간의 어두운 구석을 들추는 심리학 저서로는 대단히 드물게 사회통합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행복 가설>로 유명한 미국의 긍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기쁨과 통찰을 선사하는 놀라운 책"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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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개리 마커스는 고교를 중퇴하고 23세에 MIT에서 뇌ㆍ인지과학 박사학위를 취득, 30살에 뉴욕대 종신 교수가 된 진화심리학계의 스타 과학자. 책은 그의 이론이 낯설지도 모른다는 점을 제목에서 밝혀둔다.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이란 부제 옆에 '클루지'를 행여 '클러지'로 읽지나 않을까, 발음기호까지 달아 두었다.(장병욱 기자)

08. 11. 29.

P.S. '개리 마커스'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다 싶더니만 <마음의 태어나는 곳>(해나무, 2005)의 저자다. 스티븐 핀커의 추천사는 이렇다. "마커스는 생각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종합하여 보여준다. 재능이 넘치는 독창적인 이 책은 과학을 대중화하는 데, 그리고 과학 그 자체에 기여하고 있다." 이거 어디에 두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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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12-01 06:12   좋아요 0 | URL
뇌에 관심이 많아서, 뇌에 관련된 책을 좋아하는 저는
'고양이 생선 가게 그냥 못지나는' 것처럼 와서 읽고 말았습니다.(웃음)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8-12-01 08:33   좋아요 0 | URL
<뇌, 생각의 출현> 같은 책은 반응이 좋더군요...

L.SHIN 2008-12-02 06: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로쟈 2008-12-03 16:13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의 에필로그 제목은 '경계 또는 토르나다'이다. '벤야민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역량을 내비치는 대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 <남겨진 시간>의 영역본(<The Time That Remains>),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의 대하여>(길, 2008) 등이다(성경의 구절들도 참조해야 한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로 인용되고 있다('바울로'는 '바울'로 표기했다. 개신교에서만 '바울'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출판된 대부분의 책들에서 '바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아감벤은 먼저 제1테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를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체스판 밑에 숨어서 터키풍 의상을 입은 기계인형을 조종하여 승리로 이끄는 난쟁이"의 이미지를 포우의 소설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작고 볼품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는" 신학이 바로 그 '난쟁이'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이 두려운 적수들과의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신학을 자기 편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제1테제의 주장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을 텍스트 자체에 적용한다. 결정적 이론투쟁이 전개되는 체스게임을 밑에서 조종하는 신학자?! 그렇다면 "저자가 테제의 텍스트 속에 매우 정교하게 숨겨둘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그 누구도 특별히 지목하지 못했던 이 난쟁이 신학자는 과연 누구인가?"(227쪽) 아감벤의 에필로그는 그러한 관심에 촉발되며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 정교하게 숨어 있는 난쟁이 신학자는 바로 '바울'이다. 아감벤은 보다 구체적인 증거(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그 구체적인 '흔적'을 어떻게 찾는가?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실마리 삼아서다. 벤야민은 '파사쥬론' 즉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완전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섹션 N의 한 주석). 벤야민에게서 이 인용은 방법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국역본은 'Epic Theater'를 '서사시극'이라고 옮겼는데, 혹 일어본에서는 그렇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는 '오역'이다). "어느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속하는 컨텍스트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크라우스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인용은 언어를 이름으로, 언어를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문맥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구제하고 벌한다."라고 적었다(국역본에는 '논고'라는 엉뚱한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인용의 방법으로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른다. 벤야민이 보기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는 식자공이 글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처럼, 그 동작에 간격을 둘 수 있어야 한다."(그러한 간격두기가 낳는 효과가 연기에서는 '소격효과'이겠다.) 여기서 '간격을 두다'란 말은 영어의 'spacing', 독어의 'sperren'을 옮긴 것이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려고 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각 철자들 간의 간격을 띄우는 것을 말한다. 즉 'sperren'이라고 하지 않고 's p e r r e n'이라고 표기하는 것. 이렇게 간격이 주어진 단어는 보통 두번 읽히게 된다. '스-페-르-렌, 스페렌'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들 자간의 간격이 주어진 단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적으로 읽혀진다. 두번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번의 독해는 인용의 중복기입적인 독해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228쪽)

'인용의 중복기입적 독해'는 'palimpsest of citation'을 옮긴 것인데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에 지우고 다시 쓴 걸 말한다. 두 번 읽기가 인용의 거듭 쓴 양피지라는 것. 이제 이런 사전지식을 갖고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남겨진 시간>의 표지에도 쓰인 수고의 제2테제이다.

끝에서 4행째부터 잘 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 c h w a c h 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때문에, 우리들에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약한 메시아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국역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32쪽)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수고본에서 알 수 있지만 's c h w a c h e'(weak; 약한)란 단어의 자간이 띄워져 있다. 어떤 인용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메시아적 힘의 약함? 아감벤의 추정으로 "메시아적인 힘의 약함이 명료하게 이론화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텍스트에서이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가 그것이다. 바울은 간구한 끝에 주에게서 이런 계시(응답)를 얻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he gar dynamis en astheneia tele tai'이고, <남겨진 시간>의 역자는 "권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로 옮겼다. 영어로는 "power fulfills itself in weakness"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약함'에 있다고 하므로 바울은 흡족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리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의 강함이라."이고, 영어로는 "Therefore I take pleasure in infirmities, in reproaches, in necessities, in prosecutions, in distresses for the sake of the Messiah: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이다.

물론 벤야민 참조한 성경을 독어본이었을 텐데,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고 한다. 'denn mein Kraft ist in den schwachen Mechtig.' 즉 'kraft(힘)'과 '약함(schwache)'이 모두 출현하고 있고, 또 대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철학테제의 텍스트에서 바울 텍스트의 비밀스러운 존재야말로 자간을 비우는 것을 통하여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230쪽) 그리고 이 발견을 아감벤은 자못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으로 기록한다.

벤야민에 대한 바울의 (가능한) 영향을 시사한 유일한 인물은 타우베스라고 한다(하지만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학 단편>을 로마서와 관련시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독일의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를 말하며, 그의 <바울의 정치신학>(2004; 독어본1993)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 생전의 마지막 공개강의를 묶은 것이다(영어본으로는 150여 쪽의 얇은 책인데,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바울 관련서를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감벤은 강의의 서두에서 타우베스를 추모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의 이 강의는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했던 강의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메시아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으로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14쪽) 참고로 아감벤의 강의는 1998년 10월 파리의 국제철학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벤야민의 제2테제에서의 바울 인용이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철학테제'는 벤야민의 최후의 저작 중 하나이며 그의 메시아적 역사관이 일종의 유언적인 요약이라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기계인형의 손을 비밀스럽게 이끄는 난쟁이 신학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미 답은 주어졌지만 아감벤은 몇 가지 '흔적'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제5테제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지나간다."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제18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사를 엄청난 단축 속에 요약하고 있는 지금의 때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의 그 형상과 철저하게 일치된다."("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에서 '지금의 때(Jetztzeit)'에 대한 분석 등이 추가적인 사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결론만은 말하자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어휘는 모두가 순수하게 바울적인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를 형성화고 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드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37쪽)

이 '지금'에 대한 분석은 보다 자세한 정리를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다...

0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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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체성(혹은 요즘 더 많이 떠들어대는 용어로는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책이 나올 성싶지 않다. 다만,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한 책은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짐작에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후, 2008)이 그런 종류다. 찾아보니 책소개도 그렇게 돼 있다. "이 책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민족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까다로운 ‘정체성’ 개념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근거자료들을 성실하게 모아 놓았다. 과거의 이론은 물론 최신의 논문 자료들까지 성실히 찾아놓은 덕분에 ‘민족’에 대한 최신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사실 그런 최신 이론에 관심이 없는 중고생들까지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우리가 기댈 건 똑똑한 중고생들 아닌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29) 민족 정체성, 영화·車로 재생산되다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세계화의 물결은 각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키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격변 속에서도 어떻게 민족들은 고유의 색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민족 정체성이 사회적 혹은 역사적 요인보다 대중문화, 일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란 다양한 문화요인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재진행형 용어라고 주장한다. 책은 스펙터클하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문화와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이 배양되는 현상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민족을 둘러싼 다양성과 온갖 문화적 효과들(결국 민족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 문화요소들로 짜여진 거대한 문화적 매트릭스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 아이콘이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변형시키는지, 영화 '브레이브하트', 롤스로이스 자동차, 영국의 밀레니엄 돔 등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롤스로이스와 애스턴마틴 등 영국 자동차들은 일견 사치스럽고 계급폐쇄적인, 혹은 쾌락주의적이고 도발적인(애스턴마틴은 제임스 본드와 이미지가 연결된다) 영국 민족의 한 단면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1960년대 대중화된 새로운 영국의 아이콘 '미니'(자동차 모델)의 등장으로 자유분방함의 상징이 사회에 번져갔다. 저렴한 미니는 노동계층에 어필했고, 이전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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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꼽는다.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사를 다뤘다.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는 마침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이 새 전기를 맞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신화와 역사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가다듬었는지 보여준다.

문화 지형 속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 이것이 항상 진행형으로 변화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에도 꽤나 유효한 개념이다. 10만원짜리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에서 나타난 쟁점들이 모두 이 정체성 논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양홍주기자)

08. 11. 29.

P.S. 정체성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역시나 중고생도 읽을 만한 유익한 책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정체성에 관한 과학'을 표방하는 책이다. 이 재미있는 책을 예전에 다 읽지 못해서 아쉬운데(찾아서 마저 읽어야겠다) 여하튼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편가리기'로 거부되는 시대에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책. 다양한 연구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단, 저자는 실제적인 차별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대타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주목하는 게 아닌가란 의문도 든다. 그 역시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라고 말하기엔 너무 쓰라린, 부당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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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북리뷰를 미리 훑어보다가 관심을 좀 갖게 되는 책은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쳐>(사문난적, 2008)이다. 고딕의 문화사를 다룬 책인 듯한데, 나름대로 희소하지 않나 싶다. 흠이라면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분량이 좀 얇다는 것. 억지로 부피를 늘린 책들보다는 낫지만, 조금 싱겁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크'의 색감이 좀 엷은 게 아닐까 싶은 것. 실상은 읽어봐야 알겠다...

경향신문(08. 11. 29) 허락되지 않는 것들의 매력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 그런데 트로피를 든 채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스타일이 심상치 않았다. 새까만 붙임머리, 고딕풍의 베르사체 드레스…. 졸리는 할리우드 정상의 자리로 발돋움하는 순간 고스 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스타이자 전위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자신의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드러냈다.

애초 고딕(Gothic)이란 르네상스 사람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적인 북유럽의 고트(Goth)족이 가져온 양식이라 비난했던 데서 시작된 표현이었다. <다크 컬처>(원제 Contemporary Gothic)는 소설, 건축,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아우르는 고딕 문화의 기원과 의미, 현대의 변형 등을 폭넓게 조망한다.

근대인들에게 고딕이란 이성의 전복이었다. 서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로마 문명을 멸망시킨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말끔한 고전주의 양식 대신 뾰족한 아치, 기괴한 각도의 조형, 괴물 모양의 장식물 등으로 꾸며진 사트르트 대성당은 이성 대신 야성과 환상을 고취했다.

고딕은 복고주의지만, 그 소비자는 신흥자본가였다. 고딕 문학은 현재의 목을 조이고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과거를 그렸고, 그러한 과거를 상품화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의 몫이었다. 근대 프로테스탄트 독자들은 중세 후기 가톨릭을 혐오스러운 타자로 구성했고, 영국과 미국은 중동의 타자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현대 서구문화에서 고딕은 예상치 못한 구석에 숨어있다. 고딕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여고생 버피의 뱀파이어 퇴치담을 그린 TV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 블록버스터 영화 <배트맨 비긴즈>, 록가수 마릴린 맨슨은 ‘10대 악마들’을 위한 고딕 상품이다.



고딕 인테리어는 세련된 주부의 사랑을 받고, 알렉산더 매퀸의 고딕풍 의상은 수많은 중저가 브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딕의 역사는 줄곧 소비의 역사와 결부되어 왔다.” 자본이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비유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들어맞는 셈이다.

자본과 윤리, 하위 문화의 관계는 흥미롭다. 전자는 후자를 포섭하려들고 거의 성공하지만, 가끔 의도치 않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고딕풍의 공포영화는 ‘섹스를 하면 죽는다’ ‘술과 마약을 해도 죽는다’는 교훈을 설파하지만, 폭력과 유혈의 쾌락은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다. 도중에 일어나는 사악한 행위들이 결말의 선의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나한 푸닥거리를 한다해도 이 ‘어둠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고딕이 ‘개인과 집단의 불안’을 부인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어휘와 사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캐슬’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교외에 자리한 고딕성당 풍의 모텔을 바라본다. “고딕에는 원본이 없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고딕은 언제나 위조에 관한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떠올린다면, 한국인이 경험하지 못한 서구의 중세를 위조하는 저 기괴한 건물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백승찬)

08. 11. 28.

P.S. 생각해보니 '고딕'에 관한 책은 2권짜리 두툼한 비평논문집을 포함해 여러 권 갖고 있다. 내년쯤에는 고딕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될 예정인지라 모처럼 들춰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내엔 총서로까지 나오고 있는 고딕문학 작품집을 제외하면 건축과 영화(알다시피 팀 버튼이 독보적이다) 관련서들이 눈에 띈다...

아, 알고 보니 저자 스푸너는 고딕 전문가이고, 나도 그녀의 책을 한 권 이상 갖고 있다. <다크 컬쳐>(원제는 <현대의 고딕>) 외 다른 책들도 소개됨 직하다. 고딕은 잘 팔린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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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08-12-04 15:32   좋아요 0 | URL
고딕이 건축양식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는 걸 이제야 눈뜨게 해준 책이 '다크 컬처'인데 로쟈 님의 글을 보니 고딕 문화에 대해 좀더 맥을 잡을 수 있네요.고맙습니당~
 

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서 번역과 '반동적 행위'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따져본 것이다. 내가 읽기에 이 대목의 국역본 번역은 다소 부정확하며 그에 대한 지적도 겸하고 있다.   

번역이 능동적 행위라면 번역비평은 반동적 행위일까? 혹은 번역이 작용이라면 번역은 반작용일까? 그래서 번역이 주인의 도덕이라면 번역비평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한 것일까? ‘번역비평’이란 말을 염두에 두고서 들뢰즈가 읽는 니체를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니체와 철학>의 네 번째 장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를 모토로 하고 있는데, 들뢰즈가 제일 처음 인용하는 니체의 문장은 “La vraie réaction est celle de l'action”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이것은 “참된 반작용은 작용의 반작용이다”(<니체와 철학>, 201쪽)라고 옮겨졌다. 반면 영역본의 “The true reaction is that of action”을 옮긴 번역은 “진정한 반작용은 행위의 그것이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3쪽)라고 옮겼다. 이 대목은 <도덕의 계보>의 제1논문의 10절 첫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판 니체 전집본에서는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367쪽) 

독어본을 옮긴 이 인용문에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들뢰즈의 인용문에 상응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곧 참된 반응을 포기하고 단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하는 것, 번역을 통한 반응 대신에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제스처로 자신을 보전하는 것, 혹 그것이 번역비평은 아닌가? 니체는 그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라고 불렀다. 번역비평의 ‘창조성’이란 바로 그런 노예 도덕의 산물은 아닐는지? 그것은 반작용이자 반동적 행위이며 결국은 ‘원한’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일견 이것이 번역비평이 내몰린 궁지이다. 번역비평을 닦달하는 의혹과 비난의 시선은 어차피 능동적인 힘이 아닌 한에서 불가피하게 뒤집어써야 하는 숙명일까?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한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물어야겠다. 과연 원한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 자신이 일부러 갖다 쓴 불어 단어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정확한 정의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la réaction cesse d'être agie pour devenir quelque chose de senti”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니체와 철학>, 202쪽)고 옮겼고, 영역본의 “reaction ceases to be acted in order to become something felt (senti)”를 옮긴 번역본은 “반동적 행위는 느껴지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행위하게 되기를 중지한다”라고 옮겼다. 편하게 이해하자면, ‘르상티망’은 느끼기 위해서 반응하지 않는 걸 뜻한다. 즉, 느낌만을 계속 축적할 뿐 그에 대한 반응은 중지한 상태를 가리킨다. 국어사전에서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르상티망’을 풀이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하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계속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르상티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는 말은 모순이다. 영향 받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보통 어떤 반응이나 행동을 예비하는 것이니까. 여기서의 이분법은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만 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느냐이다. 물론 이때의 반응은 ‘참된 반작용’을 가리킨다.

들뢰즈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hypothèse topique’를 소개하면서 풀이한다. 한 번역본은 ‘위상학적 가설’이라고 옮기고, 다른 번역본은 영역본의 ‘topical hypothesis’를 따라서 ‘총론적 가설’이라고 옮겼지만 내용상으론 ‘장소’에 관한 가설이다. 어떤 가설인가? 자극/흥분을 수용하는 체계(시스템)와 그 흔적을 보존하는 체계는 동일한 체계일 수 없다는 가설이다. 어떤 하나의 체계가 자극을 성실하게 보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자극을 계속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때문에 애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한 체계는 자극들을 수용하지만 아무것도 잡아놓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기억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한 체계는 그 자극들을 항구적인 흔적들로 변화시켜서 보존한다. 이것이 이른바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이며 이들은 각각 의식과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의 구분에 따르면,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면에 또 다른 반응적 힘은 의식과 구별되지 않으며 이것은 항상 새로운 수용에 열려 있는,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에 대해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편의상 두 종의 국역본과 영역본을 인용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또 어떤 조건 아래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반응적 힘들이 의식 속의 흥분을 대상으로 삼을 때, 상응하는 반작용 자체는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니체와 철학>, 204쪽)

"두 번째 종류의 반동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활동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동적 힘들은 의식적인 자극을 그것들의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그러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은 그 스스로 작용된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6쪽)


The second kind reaction can be acted: when reactive forces take conscious excitation as their object, then the corresponding  reaction is itself acted.(Nietzsche and Philosophy, 113쪽)   
 
영역본에서의 ‘be acted’는 문맥상 ‘능동적이 된다’ 정도의 뜻이다(‘영향을 받는다’는 식의 번역은 난센스이다). 여기서 의식의 반응은 ‘행위에 의한 반응’으로서의 ‘참된 반작용’에 부합한다. 그래서 니체는 의식이 겸손해야 하다고 요구하면서도(어쨌든 의식 또한 반응적 힘이므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반응적 체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망각과 기억의 차이로 변주된다. 니체에게서 망각은 제동력이자 완화장치이고 재생력을 갖는 치료적 힘이다. 이러한 ‘능동적’ 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소화불량 환자의 처지와 같게 된다. 아무것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는 변비 환자 또한 연상시킨다). 우리가 현재 순간에 어떤 행복, 평온, 희망, 자부심, 기쁨 따위를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망각의 능력 덕분이다. 망각은 반응적 힘이 스스로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것이 반작용으로서, 반동적 행위로서 번역비평이 봉착한 궁지를 타개시켜줄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0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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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8-11-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좀 어렵네요. 번역비평이 반동적행위고, 반동적행위는 원한이고, 원한은 쌓아두는 거고, 쌓아두는 건 무의식이고, 무의식은 망각이고~전 이렇게 이해되는데요. 그러면 망각은 번역비평인가요? ㅎ 저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번역비평도 너~무나 능동적인 것 같아서 사실 이런 논의 자체가 느낌이 안 오네요.^^

로쟈 2008-11-29 13:36   좋아요 0 | URL
무의식은 망각이고, 에서 다시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무의식은 기억/축적이고 의식이 망각이거든요...^^ 저도 이런 대목에선 국역본 <니체와 철학>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 다시 옮긴 거구요(보통은 원저보다 번역본들이 더 어렵습니다)...

릴케 현상 2008-11-2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사실 무의식은 기억이고로 정리했다가...축적은 무의식이니까 다른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수정했거든요^^ 아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요.

yoonta 2008-12-1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마이클하트의 책(들뢰즈사상의 진화)를 다시 읽다가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역량에 관한 들뢰즈의 연구는 두가지 층의 구별을 밝혀준다. 첫째 층위에서 그는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둘째 층위에서 그는 기쁘고 수동적인 변용들과 슬프고 수동적인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들뢰즈 사상의 진화 309쪽>

여기에서 들뢰즈(마이클 하트)는 역량에는 순수한 형태의 긍정적인 힘인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passive) 변용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전자인 순수한 능동적 힘들은 "불투명한 채로 남아있"어서 분석하기 힘들고 후자인 두번째 층위의 수동적 변용들이 우리들의 (들뢰즈가 논한 것처럼)의식과 무의식간의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량이라는 것라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실천practice의 기반이 되는 "기쁜" 수동적 변용들, 즉 의식과 느낌들을 축적만 하고 새로운 실천(행위)를 위해 망각하지 못하는 "슬픈" 수동적 변용들, 즉 무의식으로 구분될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스피노자의 기쁨joy의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이 가능하게 되는 지점도 결국 여기서였죠. 기쁨이라는 말이 흔히 오해되기 쉬운데 사실은 순수한 의미의 기쁨(능동성)이라기 보다는 슬픔과 수동성을 망각함으로써만 얻어지는 (수동적/반응적/반작용적/반동적) 기쁨이라는 것 이것이 이 말의 좀더 정확한 해석이죠.

로쟈님 덕분에 가물가물해질뻔 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그런데 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라고 하셨는데..혹시 글의 전문은 볼수있을까요?

로쟈 2008-12-10 18:10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 2호에 게재될 예정이고 곧 출간된다네요. 나머지는 예전에 쓴 걸 좀 간추린 거라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