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의 에필로그 제목은 '경계 또는 토르나다'이다. '벤야민 전문가'로서의 관심과 역량을 내비치는 대목인데,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 <남겨진 시간>의 영역본(<The Time That Remains>), 그리고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의 대하여>(길, 2008) 등이다(성경의 구절들도 참조해야 한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로 인용되고 있다('바울로'는 '바울'로 표기했다. 개신교에서만 '바울'이라고 표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출판된 대부분의 책들에서 '바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다).

아감벤은 먼저 제1테제에 등장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를 상기시킨다. 벤야민은 "체스판 밑에 숨어서 터키풍 의상을 입은 기계인형을 조종하여 승리로 이끄는 난쟁이"의 이미지를 포우의 소설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역사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오늘날에는 작고 볼품없으며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되는" 신학이 바로 그 '난쟁이'이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론이 두려운 적수들과의 역사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신학을 자기 편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제1테제의 주장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을 텍스트 자체에 적용한다. 결정적 이론투쟁이 전개되는 체스게임을 밑에서 조종하는 신학자?! 그렇다면 "저자가 테제의 텍스트 속에 매우 정교하게 숨겨둘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그 누구도 특별히 지목하지 못했던 이 난쟁이 신학자는 과연 누구인가?"(227쪽) 아감벤의 에필로그는 그러한 관심에 촉발되며 이미 짐작해볼 수 있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속에 정교하게 숨어 있는 난쟁이 신학자는 바로 '바울'이다. 아감벤은 보다 구체적인 증거(흔적)들을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그 구체적인 '흔적'을 어떻게 찾는가?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실마리 삼아서다. 벤야민은 '파사쥬론' 즉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이 작업에서는 인용부호 없는 인용법을 완전히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섹션 N의 한 주석). 벤야민에게서 이 인용은 방법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국역본은 'Epic Theater'를 '서사시극'이라고 옮겼는데, 혹 일어본에서는 그렇게 옮기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에서는 '오역'이다). "어느 텍스트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것이 소속하는 컨텍스트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크라우스에 관한 에세이에서는 "인용은 언어를 이름으로, 언어를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문맥을 파괴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구제하고 벌한다."라고 적었다(국역본에는 '논고'라는 엉뚱한 단어가 들어가 있다).

이 인용의 방법으로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따른다. 벤야민이 보기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는 식자공이 글자 사이에 간격을 두는 것처럼, 그 동작에 간격을 둘 수 있어야 한다."(그러한 간격두기가 낳는 효과가 연기에서는 '소격효과'이겠다.) 여기서 '간격을 두다'란 말은 영어의 'spacing', 독어의 'sperren'을 옮긴 것이다. 어떤 단어를 강조하려고 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대신에 각 철자들 간의 간격을 띄우는 것을 말한다. 즉 'sperren'이라고 하지 않고 's p e r r e n'이라고 표기하는 것. 이렇게 간격이 주어진 단어는 보통 두번 읽히게 된다. '스-페-르-렌, 스페렌'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들 자간의 간격이 주어진 단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과잉적으로 읽혀진다. 두번 읽혀지는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두 번의 독해는 인용의 중복기입적인 독해로 불릴 만한 것이었다."(228쪽)

'인용의 중복기입적 독해'는 'palimpsest of citation'을 옮긴 것인데 '팔림세스트(palimpsest)'는 양피지에 지우고 다시 쓴 걸 말한다. 두 번 읽기가 인용의 거듭 쓴 양피지라는 것. 이제 이런 사전지식을 갖고서 아감벤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원고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남겨진 시간>의 표지에도 쓰인 수고의 제2테제이다.

끝에서 4행째부터 잘 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Dann ist uns wie jedem Geschlecht, das vor uns war, eine s c h w a c h e messianische Kraft mitgegeben."(때문에, 우리들에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약한 메시아적인 힘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국역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332쪽)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수고본에서 알 수 있지만 's c h w a c h e'(weak; 약한)란 단어의 자간이 띄워져 있다. 어떤 인용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메시아적 힘의 약함? 아감벤의 추정으로 "메시아적인 힘의 약함이 명료하게 이론화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텍스트에서이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가 그것이다. 바울은 간구한 끝에 주에게서 이런 계시(응답)를 얻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he gar dynamis en astheneia tele tai'이고, <남겨진 시간>의 역자는 "권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로 옮겼다. 영어로는 "power fulfills itself in weakness"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약함'에 있다고 하므로 바울은 흡족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는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리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의 강함이라."이고, 영어로는 "Therefore I take pleasure in infirmities, in reproaches, in necessities, in prosecutions, in distresses for the sake of the Messiah: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이다.

물론 벤야민 참조한 성경을 독어본이었을 텐데, 루터의 번역은 이렇다고 한다. 'denn mein Kraft ist in den schwachen Mechtig.' 즉 'kraft(힘)'과 '약함(schwache)'이 모두 출현하고 있고, 또 대비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역사철학테제의 텍스트에서 바울 텍스트의 비밀스러운 존재야말로 자간을 비우는 것을 통하여 벤야민이 조심스럽게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230쪽) 그리고 이 발견을 아감벤은 자못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으로 기록한다.

벤야민에 대한 바울의 (가능한) 영향을 시사한 유일한 인물은 타우베스라고 한다(하지만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신학-정치학 단편>을 로마서와 관련시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독일의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를 말하며, 그의 <바울의 정치신학>(2004; 독어본1993)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연 생전의 마지막 공개강의를 묶은 것이다(영어본으로는 150여 쪽의 얇은 책인데,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이번에 바울 관련서를 검색해봤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감벤은 강의의 서두에서 타우베스를 추모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우리들의 이 강의는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했던 강의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메시아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으로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14쪽) 참고로 아감벤의 강의는 1998년 10월 파리의 국제철학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그럼, 다시 돌아와서 벤야민의 제2테제에서의 바울 인용이 시사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역사철학테제'는 벤야민의 최후의 저작 중 하나이며 그의 메시아적 역사관이 일종의 유언적인 요약이라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기계인형의 손을 비밀스럽게 이끄는 난쟁이 신학자"가 누구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미 답은 주어졌지만 아감벤은 몇 가지 '흔적'을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제5테제에서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빠르게 사라진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지나간다."로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제18테제에서 "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사를 엄청난 단축 속에 요약하고 있는 지금의 때는 우주 속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의 그 형상과 철저하게 일치된다."("메시아적 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의 역사를 엄청난 축소판으로 요약하고 있는 지금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이루는 앞의 모습과 엄밀하게 일치한다.")에서 '지금의 때(Jetztzeit)'에 대한 분석 등이 추가적인 사례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결론만은 말하자면,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의 어휘는 모두가 순수하게 바울적인 것이다."그리하여 "바울의 편지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라는, 우리들의 전통에 있어서 메시아니즘의 최고의 두 텍스트가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원적인 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며, 하나의 성좌배열적인 관계를 형성화고 있다는 공통된 사실로부터 우리드은 바로 오늘, 그 '독해가능성의 지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237쪽)

이 '지금'에 대한 분석은 보다 자세한 정리를 필요로 하지만 당장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 남겨진 시간이 너무 적다...

08.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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