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북리뷰를 미리 훑어보다가 관심을 좀 갖게 되는 책은 캐서린 스푸너의 <다크 컬쳐>(사문난적, 2008)이다. 고딕의 문화사를 다룬 책인 듯한데, 나름대로 희소하지 않나 싶다. 흠이라면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분량이 좀 얇다는 것. 억지로 부피를 늘린 책들보다는 낫지만, 조금 싱겁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다크'의 색감이 좀 엷은 게 아닐까 싶은 것. 실상은 읽어봐야 알겠다...

경향신문(08. 11. 29) 허락되지 않는 것들의 매력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 그런데 트로피를 든 채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스타일이 심상치 않았다. 새까만 붙임머리, 고딕풍의 베르사체 드레스…. 졸리는 할리우드 정상의 자리로 발돋움하는 순간 고스 스타일을 선택함으로써, 주류 스타이자 전위적인 아웃사이더라는 자신의 상반된 이미지를 모두 드러냈다.

애초 고딕(Gothic)이란 르네상스 사람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적인 북유럽의 고트(Goth)족이 가져온 양식이라 비난했던 데서 시작된 표현이었다. <다크 컬처>(원제 Contemporary Gothic)는 소설, 건축,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아우르는 고딕 문화의 기원과 의미, 현대의 변형 등을 폭넓게 조망한다.

근대인들에게 고딕이란 이성의 전복이었다. 서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을 이룩한 로마 문명을 멸망시킨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말끔한 고전주의 양식 대신 뾰족한 아치, 기괴한 각도의 조형, 괴물 모양의 장식물 등으로 꾸며진 사트르트 대성당은 이성 대신 야성과 환상을 고취했다.

고딕은 복고주의지만, 그 소비자는 신흥자본가였다. 고딕 문학은 현재의 목을 조이고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과거를 그렸고, 그러한 과거를 상품화하는 것이야말로 근대인의 몫이었다. 근대 프로테스탄트 독자들은 중세 후기 가톨릭을 혐오스러운 타자로 구성했고, 영국과 미국은 중동의 타자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현대 서구문화에서 고딕은 예상치 못한 구석에 숨어있다. 고딕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여고생 버피의 뱀파이어 퇴치담을 그린 TV시리즈 <미녀와 뱀파이어>, 블록버스터 영화 <배트맨 비긴즈>, 록가수 마릴린 맨슨은 ‘10대 악마들’을 위한 고딕 상품이다.



고딕 인테리어는 세련된 주부의 사랑을 받고, 알렉산더 매퀸의 고딕풍 의상은 수많은 중저가 브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딕의 역사는 줄곧 소비의 역사와 결부되어 왔다.” 자본이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비유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들어맞는 셈이다.

자본과 윤리, 하위 문화의 관계는 흥미롭다. 전자는 후자를 포섭하려들고 거의 성공하지만, 가끔 의도치 않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고딕풍의 공포영화는 ‘섹스를 하면 죽는다’ ‘술과 마약을 해도 죽는다’는 교훈을 설파하지만, 폭력과 유혈의 쾌락은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다. 도중에 일어나는 사악한 행위들이 결말의 선의를 압도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나한 푸닥거리를 한다해도 이 ‘어둠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고딕이 ‘개인과 집단의 불안’을 부인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어휘와 사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캐슬’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교외에 자리한 고딕성당 풍의 모텔을 바라본다. “고딕에는 원본이 없다. …하나의 형식으로서 고딕은 언제나 위조에 관한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을 떠올린다면, 한국인이 경험하지 못한 서구의 중세를 위조하는 저 기괴한 건물의 유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백승찬)

08. 11. 28.

P.S. 생각해보니 '고딕'에 관한 책은 2권짜리 두툼한 비평논문집을 포함해 여러 권 갖고 있다. 내년쯤에는 고딕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될 예정인지라 모처럼 들춰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국내엔 총서로까지 나오고 있는 고딕문학 작품집을 제외하면 건축과 영화(알다시피 팀 버튼이 독보적이다) 관련서들이 눈에 띈다...

아, 알고 보니 저자 스푸너는 고딕 전문가이고, 나도 그녀의 책을 한 권 이상 갖고 있다. <다크 컬쳐>(원제는 <현대의 고딕>) 외 다른 책들도 소개됨 직하다. 고딕은 잘 팔린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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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08-12-04 15:32   좋아요 0 | URL
고딕이 건축양식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른다는 걸 이제야 눈뜨게 해준 책이 '다크 컬처'인데 로쟈 님의 글을 보니 고딕 문화에 대해 좀더 맥을 잡을 수 있네요.고맙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