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정체성(혹은 요즘 더 많이 떠들어대는 용어로는 '국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책이 나올 성싶지 않다. 다만, 보다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한 책은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짐작에 팀 에덴서의 <대중문화와 일상,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후, 2008)이 그런 종류다. 찾아보니 책소개도 그렇게 돼 있다. "이 책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다. 민족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까다로운 ‘정체성’ 개념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근거자료들을 성실하게 모아 놓았다. 과거의 이론은 물론 최신의 논문 자료들까지 성실히 찾아놓은 덕분에 ‘민족’에 대한 최신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사실 그런 최신 이론에 관심이 없는 중고생들까지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우리가 기댈 건 똑똑한 중고생들 아닌가?).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1. 29) 민족 정체성, 영화·車로 재생산되다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는 세계화의 물결은 각 민족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강화시키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격변 속에서도 어떻게 민족들은 고유의 색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민족 정체성이 사회적 혹은 역사적 요인보다 대중문화, 일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이란 다양한 문화요인들로 인해 끊임없이 변동하는 현재진행형 용어라고 주장한다. 책은 스펙터클하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문화와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이 배양되는 현상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민족을 둘러싼 다양성과 온갖 문화적 효과들(결국 민족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 문화요소들로 짜여진 거대한 문화적 매트릭스 안에서 구성된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화 아이콘이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변형시키는지, 영화 '브레이브하트', 롤스로이스 자동차, 영국의 밀레니엄 돔 등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탐구한다.

롤스로이스와 애스턴마틴 등 영국 자동차들은 일견 사치스럽고 계급폐쇄적인, 혹은 쾌락주의적이고 도발적인(애스턴마틴은 제임스 본드와 이미지가 연결된다) 영국 민족의 한 단면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1960년대 대중화된 새로운 영국의 아이콘 '미니'(자동차 모델)의 등장으로 자유분방함의 상징이 사회에 번져갔다. 저렴한 미니는 노동계층에 어필했고, 이전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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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민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꼽는다. 멜 깁슨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이 할리우드 대작 영화는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사를 다뤘다.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는 마침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이 새 전기를 맞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 설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신화와 역사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통해 어떻게 민족 정체성을 가다듬었는지 보여준다.

문화 지형 속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 이것이 항상 진행형으로 변화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에도 꽤나 유효한 개념이다. 10만원짜리 지폐에 들어갈 인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에서 나타난 쟁점들이 모두 이 정체성 논의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양홍주기자)

08. 11. 29.

P.S. 정체성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역시나 중고생도 읽을 만한 유익한 책은 데이비드 베레비의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코리브르, 2007)이다. '정체성에 관한 과학'을 표방하는 책이다. 이 재미있는 책을 예전에 다 읽지 못해서 아쉬운데(찾아서 마저 읽어야겠다) 여하튼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이 '편가리기'로 거부되는 시대에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책. 다양한 연구 심리학 자료를 통해 인간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물임을 알려준다." 단, 저자는 실제적인 차별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대타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주목하는 게 아닌가란 의문도 든다. 그 역시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결과'라고 말하기엔 너무 쓰라린, 부당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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