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서 번역과 '반동적 행위'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따져본 것이다. 내가 읽기에 이 대목의 국역본 번역은 다소 부정확하며 그에 대한 지적도 겸하고 있다.
번역이 능동적 행위라면 번역비평은 반동적 행위일까? 혹은 번역이 작용이라면 번역은 반작용일까? 그래서 번역이 주인의 도덕이라면 번역비평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한 것일까? ‘번역비평’이란 말을 염두에 두고서 들뢰즈가 읽는 니체를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니체와 철학>의 네 번째 장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를 모토로 하고 있는데, 들뢰즈가 제일 처음 인용하는 니체의 문장은 “La vraie réaction est celle de l'action”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이것은 “참된 반작용은 작용의 반작용이다”(<니체와 철학>, 201쪽)라고 옮겨졌다. 반면 영역본의 “The true reaction is that of action”을 옮긴 번역은 “진정한 반작용은 행위의 그것이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3쪽)라고 옮겼다. 이 대목은 <도덕의 계보>의 제1논문의 10절 첫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판 니체 전집본에서는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367쪽)
독어본을 옮긴 이 인용문에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들뢰즈의 인용문에 상응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곧 참된 반응을 포기하고 단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하는 것, 번역을 통한 반응 대신에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제스처로 자신을 보전하는 것, 혹 그것이 번역비평은 아닌가? 니체는 그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라고 불렀다. 번역비평의 ‘창조성’이란 바로 그런 노예 도덕의 산물은 아닐는지? 그것은 반작용이자 반동적 행위이며 결국은 ‘원한’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일견 이것이 번역비평이 내몰린 궁지이다. 번역비평을 닦달하는 의혹과 비난의 시선은 어차피 능동적인 힘이 아닌 한에서 불가피하게 뒤집어써야 하는 숙명일까?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한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물어야겠다. 과연 원한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 자신이 일부러 갖다 쓴 불어 단어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정확한 정의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la réaction cesse d'être agie pour devenir quelque chose de senti”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니체와 철학>, 202쪽)고 옮겼고, 영역본의 “reaction ceases to be acted in order to become something felt (senti)”를 옮긴 번역본은 “반동적 행위는 느껴지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행위하게 되기를 중지한다”라고 옮겼다. 편하게 이해하자면, ‘르상티망’은 느끼기 위해서 반응하지 않는 걸 뜻한다. 즉, 느낌만을 계속 축적할 뿐 그에 대한 반응은 중지한 상태를 가리킨다. 국어사전에서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르상티망’을 풀이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하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계속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르상티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는 말은 모순이다. 영향 받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보통 어떤 반응이나 행동을 예비하는 것이니까. 여기서의 이분법은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만 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느냐이다. 물론 이때의 반응은 ‘참된 반작용’을 가리킨다.
들뢰즈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hypothèse topique’를 소개하면서 풀이한다. 한 번역본은 ‘위상학적 가설’이라고 옮기고, 다른 번역본은 영역본의 ‘topical hypothesis’를 따라서 ‘총론적 가설’이라고 옮겼지만 내용상으론 ‘장소’에 관한 가설이다. 어떤 가설인가? 자극/흥분을 수용하는 체계(시스템)와 그 흔적을 보존하는 체계는 동일한 체계일 수 없다는 가설이다. 어떤 하나의 체계가 자극을 성실하게 보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자극을 계속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때문에 애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한 체계는 자극들을 수용하지만 아무것도 잡아놓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기억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한 체계는 그 자극들을 항구적인 흔적들로 변화시켜서 보존한다. 이것이 이른바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이며 이들은 각각 의식과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의 구분에 따르면,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면에 또 다른 반응적 힘은 의식과 구별되지 않으며 이것은 항상 새로운 수용에 열려 있는,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에 대해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편의상 두 종의 국역본과 영역본을 인용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또 어떤 조건 아래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반응적 힘들이 의식 속의 흥분을 대상으로 삼을 때, 상응하는 반작용 자체는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니체와 철학>, 204쪽)
"두 번째 종류의 반동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활동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동적 힘들은 의식적인 자극을 그것들의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그러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은 그 스스로 작용된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6쪽)
The second kind reaction can be acted: when reactive forces take conscious excitation as their object, then the corresponding reaction is itself acted.(Nietzsche and Philosophy, 113쪽)
영역본에서의 ‘be acted’는 문맥상 ‘능동적이 된다’ 정도의 뜻이다(‘영향을 받는다’는 식의 번역은 난센스이다). 여기서 의식의 반응은 ‘행위에 의한 반응’으로서의 ‘참된 반작용’에 부합한다. 그래서 니체는 의식이 겸손해야 하다고 요구하면서도(어쨌든 의식 또한 반응적 힘이므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반응적 체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망각과 기억의 차이로 변주된다. 니체에게서 망각은 제동력이자 완화장치이고 재생력을 갖는 치료적 힘이다. 이러한 ‘능동적’ 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소화불량 환자의 처지와 같게 된다. 아무것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는 변비 환자 또한 연상시킨다). 우리가 현재 순간에 어떤 행복, 평온, 희망, 자부심, 기쁨 따위를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망각의 능력 덕분이다. 망각은 반응적 힘이 스스로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것이 반작용으로서, 반동적 행위로서 번역비평이 봉착한 궁지를 타개시켜줄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08.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