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간단히 꼽아놓도록 한다. 어느새 4월이고, 여전히 '잔인한 달'이긴 하나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면 최악은 아니다. <실낙원>에 나오는 타락천사 벨리알의 말을 빌면, 비록 지옥에 나가떨어진 처지라 하더라도 "우리의 현재 운수는 만일 우리 스스로가 더 화를 자초하지만 않는다면, 행복이 보기엔 불행이지만, 최악의 불행은 아니니."(무엇이 최악일까?) 아파트 단지 내 목련들이 앞다퉈 흐드러진 자태를 자랑하다가 하나둘 지고 있다. 꽃핀 날들이 길지 않다, 길지 않을 것이다...  

1. 문학 

지난달부터인가 한국간행물위원회 웹진에서는 이달의 읽을 만한 책 추천자를 따로 밝히고 있지 않다. 분야별 추천자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나도 따로 적지 않겠다. 문학 분야에 선정된 책은 이승우의 <오래된 일기>(창비, 2009)이다. 추천의 변은 작가의 희소성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다. "한국문학에서 이승우의 위치는 매우 귀하다. 그의 작품 세계의 한 축엔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있고 또 다른 축엔 인간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이 있다. 그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관념적인 주제를 지적인 문체로 일관되게 작품 속에 승화시켜 왔다. 그의 데뷔작인 “에리직톤의 초상”이 한국 문학에 강렬하게 풍긴 인상을 아직도 어제 겪은 일처럼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도 꽤 많을 것이다." <오래된 일기>는 그런 작가의 중단편 8편을 싣고 있다. 대표작 <생의 이면>(문이당)과 소설작법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2006)도 이 참에 같이 손에 들어도 좋겠다. 목련나무 그늘 아래서.  

2. 역사 

역사 분야의 책은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수전 캠벨 바톨레티의 <히틀러의 아이들>(지식의풍경, 2008)이다. "1932년 10월 히틀러가 청소년단(유겐트) 단원들에게 “젊은이가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나라의 국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아무도 몰랐다. <히틀러의 아이들>은 그 후 독일의 청소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라고 소개된다.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묵직한 물음을 던지는 책이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이왕에 히틀러를 손에 들었다면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교양인, 2008)과 라파엘 젤리히만의,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생각의나무, 2008)도 같이 고려해볼 만한 책들이다(책들은 다 구해놓았지만 나는 아직 읽을 짬을 못내고 있다).    

3. 철학 

철학 분야의 책은 신정근의 <공자씨이 유쾌한 논어>(사계절, 2009)이다. <논어>라면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은 번역서와 주해서들이 나와 있는 상태이지만, "이번에 출간된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그 수많은 책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먼저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해설에 이어 발랄하고 경쾌한 일상어로 원문을 번역, 해석했다." 게다가 저자가 이전에 낸 공자/논어 관련서를 집대성하고 있다고. <논어>에 대해서는 예전에 리쩌허우의 <논어 금독>(북로드, 2006) 등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둔 적이 있는데, 그간에도 여러 권이 더 나왔다. 도올의 <논어 한글 역주>(통나무, 2009) 전3권도 도서관에서 대출해봄 직한 책이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으로 추천된 것은 미국의 국제전략연구소(CSIS)에서 펴낸 정책보고서 <스마트파워>(삼인, 2009).  "이 책은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하고 미국의 새로운 외교 전략으로 ‘스마트 파워’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즉 미국이 리더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부시처럼 군사력 등 하드 파워를 일방적으로 휘두르지 말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문화, 가치 등 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 같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통합하고 조율하여 미국의 이익과 세계의 이익을 일치하도록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스마트 파워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마트파워 = 하드파워 + 소프트파워'다. 강온 양면책이라고 할까. 조지프 나이의 <소프트 파워>(세종연구원, 2004)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미국의 마지막 기회>(삼인, 2009)도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책이다. 필요할 때 읽어봄 직하다.   

5. 경제/경영  

경제/경영 분야의 책은 역시나 생소한데, 바한 잔지지언의 <버핏톨로지의 비밀>(비즈니스맵, 2009)이다. 워렌 버핏이 누구인지는 알지만 투자할 돈이 없는 처지라 나에겐 이 '오마하의 현인'의 값비싼 충고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니 순수하게 '전기'로 읽을 수밖에 없는데, 이 책은 "버핏의 좋은 점뿐 아니라 문제가 될 수 있는 점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한다. 물론 그럼에도 "이 책 역시 거의 대부분이 그의 성공 비결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성공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워싱턴포스트 사 주식을 사들여 20여년 만에 11,609%의 수익을 올린 그의 천재성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에 큰돈을 벌게 해줄 투자대상을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는지 경탄을 하게 된다." 글쎄, 그 '경탄'도 내 몫은 아닌 듯싶다. 버핏의 투자전략에 관한 책으로는 티머시 빅의 <워렌 버핏의 가치투자 전략>(비즈니스북스, 2005)이 많이 읽히는 듯하다. 이민주의 <워렌 버핏>(살림, 2009)은 가장 간략한 소개이다. 

 

6. 사회 

사회분야의 책은 요하임 바우어의 <학교를 칭찬하라>(궁리, 2009)이다. 책은 생소하지만,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 않아서 찾아보니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칙>(에코리브르, 2007) 등 이미 몇 권이 소개된 저자다. 책은 독일의 스테디셀러라고 하는데,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교육당사자들이 힘을 모아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뇌 연구에 주력해 온 신경생물학자요 정신신경과 의사인 저자는 인간의 학습이 “거울뉴런"이라는 공명현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독창적 가설과 함께 학생-교사-학부모의 공조적 관계 형성이 학교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임을 역설한다." 인상적인 건 분량이 185쪽밖에 되지 않는 것. 원저가 150쪽 안팎이지 않을까 싶다. 두어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책이다.   

7. 과학 

과햑분야의 책은 <세계의 과학자 12인, 과학과 세상을 말하다>(지호, 2009). 무슨 책인가는 이미 제목이 다 말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진화하는 진화론’의 저자 스티브 존스, 인간의 뇌와 의식을 연구하는 수전 그린필드, 자신의 팔에 실리콘 칩 송수신기를 이식한 인공두뇌학자 케빈 워릭, 인류를 궁지로 몰지도 모르는 바이러스를 사랑하는 도로시 크로포드, 암 게놈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마이크 스크래튼, 현대 과학의 위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수학자 노먼 레빗 등 12명의 과학자들과 직접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다." 내가 아는 이름이 스티브 존스와 케빈 워릭밖에 없군...  

8. 예술 

예술분야의 책은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엽서 속의 기생 읽기>(민속원, 2009)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번에 내놓은 <엽서 속의 기생읽기>는 그런 맥락에서 하나의 주제, ‘기생’이라는 대상으로 묶을 수 있는 그림엽서들을 모아 제작한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책이다. 총 265점의 자료를 수록해 놓은 이 책은 각 그림엽서의 제목과 그림의 설명, 추측이 가능한 경우 연도 등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단락별로는 필요한 역사적 지식과 문화, 예술적 배경의 장을 함께 싣고 있어 다각도로 당대를 이해할 수 있게 배려했다." 기생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책은 기와무라 미나토의 <말하는 꽃 기생>(소담출판사, 2002). 사진집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아카이브북스, 2005)도 요긴한 자료가 될 수 있겠다.  

 

9. 교양 

교양분야의 책은 잉겔로레 에버펠트의 <유혹의 역사>(미래의창, 2009). 이미 소개한 적이 있는 책인데, "남자와 여자에 관한 적나라한 보고서다. 아마도 저자가 남자였다면 상당히 논란이 됐을 만큼 여자의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본능’을 확 까발리고 있다. 독일의 성의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저자는 여자들의 세계를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경쟁의 세계로 파악한다. 그 경쟁은 너무나도 치열하다. 진짜건 가짜건 예쁘기만 하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본능이 그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히틀러의 아이들>과 함께 좀 읽어둔 책이어서 반갑다. '유혹'을 주제로 한 책들을 좀 찾아봤지만, 결과는 좀 실망스럽다. 이명옥의 그림책 <팜므 파탈>(다빈치, 2003; 시공아트, 2008) 정도가 눈길을 끌 뿐.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한길사, 2001)로나 손길이 가는 것이 나의 한계다(오래전에 러시아어본까지 구해놓고 아직 안 읽고 있다).   

10. 시차적 관점 

아동분야 대신에 주관적인 관심사에 따라 정하는 마지막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이다. 그의 단독저작으론 오랜만이어서 독서욕을 자극한다. 페이퍼백 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기에 같이 읽어도 좋겠고,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새롭게 다시 손에 들어도 좋겠다. 지젝과 가라타니의 조우 장면을 보다 잘 관람하기 위해서. 물론 분량상으론 두어 달은 읽어야겠지만...

09. 04. 04.  

P.S. 이달의 고전은 지난 만우절에 탄생 200주년을 맞은 니콜라이 고골(1809-1852) 읽기이다. 작품집을 일단 골랐는데, <오월의 밤>(생각의나무, 2007)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어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민음사, 2002), 그리고 희곡 <검찰관>(민음사, 2005)이 필독서. 여유가 있다면,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선>(나남출판, 2007)까지도 서가에 꽂아두면 금상첨화. 흠, 고골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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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4-0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엇의 '황무지'에 대한 언급 없이 새로운 4월을 맞이하긴 참 힘들군요^^ 작년 4월 로쟈님이 어떤 상태였나 옆 캘린더를 거꾸로 돌려 가보니, 서재 상으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계시네요^^ 서재에 드러난 상징적인 로쟈님과 제가 알 수 없는 실재하는 로쟈님과의 간극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지젝은 러시아 혁명의 의미를 다시 묻는 데 굉장히 열심이군요.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그토록 두꺼운 책이 필요하다면 그 혁명이 다시 희망으로 작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참 난감하게 느껴지네요^^ 유토피아에 대한 과도한 갈망 없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까요?

로쟈 2009-04-05 09:34   좋아요 0 | URL
서재는 제 '외관'이자 피난처지요(물론 좀 허술하긴 해도).^^; <시차적 관점>은 사실 러시아혁명 얘기만 다루는 건 아니고, '시차'라는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정식화하려는 시도 같아요. 그래서 부피가 늘어난 것이고,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입니다. 현재까지는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푸른바다 2009-04-05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말을 생각해보면 '변증법'은 상징계를 지칭하고 '유물론'은 실재계를 지칭하는 듯 싶기도 하군요. 실재계와 상징계의 관계도 변증법적이라고 해야겠지만... 유물변증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은 중심축이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이동하는 것을 상징하는 듯 싶기도 하군요^^ 저도 아주 오래전에 맑스의 '철학'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보다 큰 새로운 사조의 획기적인 전기로 위치지워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정교하게 생각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실재계로의 방점의 이동은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는 '완벽한 사전의 오류'와도 관련이 있을 듯 싶습니다. 영원히 닿을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작용을 하는 실재를 가정하는 것이 상징계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끊임없는 생성에의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목적인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을 해봐야 겠지만...

로쟈 2009-04-07 00:21   좋아요 0 | URL
지젝과 화이트헤드라... 지젝도 흥미로워할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도 <검찰관>을 연극무대에 올리나요?

로쟈 2009-04-07 00:20   좋아요 0 | URL
상시 공연 레퍼토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4-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음양 2009-04-1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바다 / 정감록이 유토피아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드러내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감록을 보면 난을 피해 숨어 있기 좋은 곳, 즉 십승지설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그지역으로 특히 북쪽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주했지요. 경상도 풍기가 대표적인 곳입니다. 풍기가 인삼으로 유명해진 이유에는 황해도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인삼 재배를 시작하면서 부터이지요.
 

이번주에 나온 책들은 다행히 많지 않다. 출간 종수야 비슷하겠지만 눈에 띄는 책은 지난주에 비교해서 많이 줄었다. 개인적으론 네댓 권 정도를 꼽아놓고 있는 정도다. 그 중 한 권이 한국서양사학회에서 펴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2009)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관심을 갖게 된 주제이고 이미 몇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둔 바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국내 학자들의 시각과 연구성과도 일별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듯싶다.     

서울신문(09. 04. 03) [내 책을 말한다] 유럽편향 세계사 벗어납시다

서양에서 유럽중심주의는 그 기원을 르네상스에 두고 있지만, 19세기에 이르러 크게 번성한 근대 유럽사회의 고유한 현상이다. 유럽중심주의는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근대뿐만 아니라 고대와 중세 등 전 시대를 유럽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따라서 유럽과 세계의 역사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재구성이 실제 세계사와 일치되는지를 우리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한국서양사학회 글, 푸른역사 펴냄)는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의 편향을 극복하고 우리 입장에서 대안적 세계사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다. 한국 서양사학계는 그동안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가 지닌 어두운 측면에 대해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최근 일부 한국 서양사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자기반성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해 왔으나, 개인적인 차원이나 서양사의 일부 영역에서만 진행됐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국서양사학회는 2006년 ‘우리에게 서양이란 무엇인가-유럽중심주의 서양사를 넘어’라는 학술대회를 개최해 광복 이후 처음으로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체계적으로 영역별·시대별로 재검토했다. 이 학술대회의 공동성과를 지난 3년 동안 보완하고 발전시켜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예를 들어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로 발견은 근대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세계체제론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와 재닛 아부-루고드 등은 1492년 이전에 이미 오늘날 같은 근대 세계체제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유럽은 새롭게 근대 세계의 판을 짠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판에 끼어든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11~13세기)’은 중세 유럽이 당시 이슬람 세계보다 우월했다는 인상을 심어왔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의 하나였고, 중세 유럽은 당시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즉 ‘십자군 전쟁’은 유럽과 이슬람 세계 사이의 ‘대등한 전쟁’이 아니라 당시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변방 유럽의 ‘기습공격’에 불과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각 역사시대를 구체적으로 세계 각국의 입장에서 재검토하는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의를 갖는다.  

이 책의 총론격인 1부는 유럽중심주의를 한국서양사학이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2부·3부·4부는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의 주요 쟁점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와 순천대 강성호 교수가 각각 들어가는 글과 서문을 썼고, 성균관대 김택현 교수, 부산대 유재건 교수, 그리고 아주대 김봉철 교수 등 한국서양사학계의 대표적 중견 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해 학문적 가치를 높였다.  

유럽중심주의적 세계사 인식은 19세기 이후로 현재까지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장기간의 체계적인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단순히 선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료작업에 근거한 역사서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강성호 순천대 교수) 

09.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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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럽중심주의와 세계사의 해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12 18:41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해체하고자 하는 두 권의 책을 묶어서 다루었다. 그냥 이런 책들이 나왔다는 소개 정도다. 지난주에 여러 편의 원고를 쓰는 바람에 미처 퇴고를 못했더니 역시나 탈자에다가 구겨진 문장이 눈에 띈다. 못 사는 집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고 하던가.      한겨레21(09. 05. 16) 동서양 이분법, 상상의 역사학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51   좋아요 0 | URL
비교사학 분야의 연구는 늘 관심을 끕니다.이런 연구서를 펴낼 수 있는 것도 우리나라 학문이 많이 발전한 증거겠지요.동아일보엔 더 자세한 서평이 나오던데요.

로쟈 2009-04-06 23:4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직접 쓴 소개라서 옮겨놓았어요. '체계적인 공동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진척될 수 있을지 두고봐야죠...
 
지젝과 데리다 사이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시선이 제시되고, 이 때문에 초래되는 대상의 명백한 전치"(39쪽)를 가리키는 '시차(parallax)'를 지젝은 "두 층위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14쪽)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차적 간극이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posing an irreducible obstacle to dialectics)"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어떤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을 변증법 앞에 갖다놓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에서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곧 지젝의 내기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은 퇴각 국면에 놓여 있다. 이건 굳이 지젝의 정세판단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오히려 레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레닌의 전략적 통찰은 이런 것이었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군대가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많은 규칙들이 요구된다. .. 멘셰비키 당원이 '이제 퇴각하는군요; 나는 항상 퇴각을 지지해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퇴각하십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회답으로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 우리의 혁명 법정은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법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답한다."(14-15쪽)  

지젝이 영어판 <레닌 전집> 제33권(1966)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목인데, 엊그제인가 러시아어 원문이 뭔가 싶어서 러시아어판 <시차적 관점>(2008)을 들춰봤다가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누락돼 있는 걸 발견했다. 국역본을 기준으로 하자면 "많은 현대과학들이 자발적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지만, 그들은 철학적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란 문장 다음에 바로 16쪽으로 넘어가 "철학적으로 말하여..."로 시작되는 문단이 이어진다.    

Славой Жижек Устройство разрыва. Параллаксное видение The Parallax View

실수라기보다는 고의적인 누락으로 보이는데,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같은 주장이 러시아 번역자에겐 불편했던 것일까?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인식하기 어려운 게 러시아의 현실이란 걸 암시해주는 듯싶어서 유감스럽다.   

아무튼 그래서 러시아어본의 참조 없이 레닌의 통찰을 영역문으로만 따라가보면, 먼저 그는 군대가 퇴각시에는 진격시보다 백배 이상의 '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자는 '규칙들'이라고 옮겼지만 '규율'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라면 '백배 이상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퇴각에 동의하며 맞장구치는 멘셰비키에 대한 레닌의 응답은 이렇다.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 our revolutionary courts must pass the death sentence, otherwise they are not our courts, but God knows what."(4쪽)  

국역본은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을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라고 옮겼는데, "멘셰비즘의 공표에 대해서"란 뜻 아닌가? 핵심은 분열적인/분파적인 주장의 공개적인 표명에 대하여 혁명 법정은 가차없이 사형 선고를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겠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 엄격하게 단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건 뭐 혁명 법정도 아니라는 것.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혁명 법정'은 아니라는 것("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란 번역도 따라서 부정확하다).   

이어서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지젝의 진단.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사회정치적 참패 때문만이 아니다;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위기는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했다는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소멸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설명되어야 한다)."(15쪽)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는 "the decline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the philosophical underpinning of Marxism"을 옮긴 것인데, 나로선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한물간 것으로 취급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해보겠다는 것이 국역본 표지의 문구대로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이다.   

그러한 도전에 나서면서 지젝이 먼저 구분하고 있는 것은 '유물변증법(materialist dialectic)'과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다. 유물변증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은 '규정적 반성'에서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전환)이며 이것이 핵심이다. 반성(reflection)이란 말에는 '반영'이란 뜻도 포함돼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물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치 거울상처럼 좌우가 서로 바뀐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단어 혹은 단어들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변증법적 전환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덧붙여, '부정변증법'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전환이라고 지젝은 말한다(리뷰기사 참조).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지젝의 경우 헤겔-라캉주의와의 결합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적으로 말하여, 스탈린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우둔함의 화신이라는 말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며 사실 그 자체가 요점이다."(16쪽) 원문은 "That, philosophically speaking, Stalinist 'dialectical materialism' is imbecility incarnate, is not so much beyond the point as, rather, the point itself." 여기서 '우둔함의 화신'이라고 한 것은 '스탈린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결합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탈린주의와 결합시킨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이며 이론적 과오이고 요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바로 그러한 결합이 요점이고 문제의 핵심이다.   

"그 이유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헤겔적 무한판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즉 이를 골상학의 공식인 '정신은 뼈다'와 같이 가장 높은 것들과 가장 낮은 것들의 사변적 동일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since my point is precisely to conceive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a Hegelian infinite judgment, that is, as the speculative idnentity of the highest and the lowest, like the formular of phrenology 'the spirit is a bon.'" 

역자는 여기서 두 번 나오는 'identity'를 '정체성'과 '동일성'으로 구별해서 옮겼는데, 내가 이해하기엔 둘다 '동일성'이란 뜻이다. 해서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을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이라고 옮겼지만 나는 "나의 헤겔-라캉주의적 입장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동일성"이라고 교정하고 싶다(identity of A and B 구문). 요컨대, 지젝은 '헤겔-라캉주의 =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등식을 '정신 = 뼈'라는 헤겔식 무한판단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완고한 네번째 교사(steely Fourth Teacher)'는 '스탈린'을 암시하므로 '완고한'보다는 '강철 같은'이 더 낫겠다. '스탈린'이란 이름 자체가 '강철(스탈)'에서 파생된 가명이기도 하고.  

이제, 나머지는 사소하다. 23쪽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한자 이름이 잘못 병기된 것, 24쪽에서 '내재적 견해들(inherited opinions)'이 '전승한 견해들'의 오역이라는 것 등. 25쪽 이하에서 '들뢰즈의 보편적 단일성이라는 개념(Deleuze's notion of universal singularity)'에서 'singularity'는 보통 '단독성' '특이성' '독특성' '개별성' 등으로 옮겨지는 개념인데, '단일성'은 처음 보는 듯하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26쪽에서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주요 양식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다수성에 최소한의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이다."에서 '철학, 과학, 정치'는 '질서(order)가 아니라 지젝이 다루고자 하는 세 개의 주요 '양식(mode)'이다.   

그리고 28쪽 이하에서 'democracy-to-come'이라는 데리다적 개념은 '미래 중심 민주주의'라고 옮겨졌는데, 기존의 번역어 '도래할 민주주의'와의 관계도 각주에서 언급이 되면 좋았겠다. 29쪽에서 언급된 나보코프의 소설 <왕, 왕비, 악당>은 체스용어에서 따온 것이라 <킹, 퀸, 잭>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국역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서론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데리다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었다. "나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므로, 아마도 지금이 이러한 '극소 차이'와 그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의 근접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적절한 순간일 것이다."(28쪽)이라고 말하는 대목. 비록 라캉주의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제기해왔지만 이 대목에서 지젝은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오래전에 '지젝과 데리다 사이'라고 제목을 단 페이퍼가 생각이 나서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09. 0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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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멋대로 하지 마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1 11:05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2. 시차적 관점과 사변적 동일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04 01:39 
    며칠전부터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를 다시 손에 들고 주로 후반부를 읽었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두께가 두께인 만큼 단숨에 일독하긴 어려운 책이어서 이렇듯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어두는 것. 단, 원서와 같이 읽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독자라면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여러 번 숙독해봄 직하다(일독도 어렵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교
 
 
릴케 현상 2009-04-0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댓글들을 안 다네요. 1등 놀이를 하게 만드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0 | URL
아직 아무도 안 읽으신 책인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번역바로 잡기는 한번 더 읽어봐야겠군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1 | URL
지젝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정독해볼 만한 책입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리뷰기사들이 이번주에 올라올 듯한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고명섭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낮에 도서관에서 책을 좀 읽다가 온 터이다. '시차'(혹은 '시차적 관점')와 함께 핵심적인 키워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지만, 기사의 타이틀은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고 붙여졌다. 표지에 거꾸로 박힌 레닌 동상과의 조응을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겨레(09. 04. 04) 지젝의 주장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시차적 관점>은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이 스스로 ‘대작’이라고 부른 책이다. 한국어판으로 840쪽에 이르는 이 최신작(2006)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이은 네 번째 주저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 쓴 모든 저작의 문제의식을 종합해 변혁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 보려고 한다. 출판사에서 붙인 한국어판 부제는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인데,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그가 찾는 것은 철학적 돌파구라는 형식을 빌린 정치적 돌파구다.

이 책은 지젝의 다른 어떤 책보다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추천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까다로움과 관련해 “지젝의 글이 가끔 이해가 안 된다면, 이는 그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지 결코 잘난 척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다로움은 일차로 이 책의 비체계적 서술에 있다. 지젝은 형식상 3부로 나누어 철학적·과학적·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서로 겹치고 섞인다. 지젝은 철학·종교·문학·영화·예술, 그리고 온갖 일화와 사례를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의 접합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콜라주가 된다. 그는 모든 통념·관습·도그마를 분쇄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 도그마에 도전하는 생각들 자체의 맹점을 지적하고 깨뜨리고자 한다. 지젝의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는 책의 전편에 지뢰처럼 매복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2001년 저작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다. 지젝은 가라타니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쓴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기여는 여기서 그친다. 지젝은 가라타니가 제시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발상만 수용할 뿐 그의 나머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라타니는 그의 책에서 헤겔을 거부하고 칸트를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데, 지젝은 가라타니와는 반대로 칸트를 기각하고 헤겔을 승인한다. 헤겔주의자답게 그는 헤겔의 사유를 갱신하고 진척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난국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런 노력의 한 양상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재사유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패퇴해 철학사의 한 장으로 축소돼 버린 것이야말로 전망 부재의 오늘 현실을 보여 주는 철학적 사례로 이해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패배는 마르크스주의 혁명, 더 구체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궁극적 실패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도 함께 매장된 것이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출당하고 난 뒤 좌파적 사유에 남은 것이 ‘부정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 ‘부정 변증법’은 진정한 혁명을 사고할 수 없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현실)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다.” 부정 변증법만으로는 현실의 극복과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권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시 러시아 혁명의 긍정적 핵심을 복권시키는 일과 연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발상은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근본적 이유를 따져 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있다. 그런 사유를 요약한 말이 ‘시차적 관점’이다. 여기서 ‘시차’(視差, parallax)란 천문학에서 쓰이는 용어를 빌려온 것인바,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주체가 어떤 위치에서 보는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시차이며,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 관점이 ‘시차적 관점’이다.  

지젝이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 러시아 10월혁명 때 함께했던 혁명가 레닌과 모더니즘 예술가들의 경우다. 화가 말레비치나 시인 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은 혁명 초기에 열광적으로 레닌의 혁명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1920년대 이후, 특히 스탈린 시대에 모두 제거되거나 좌절하고 말았다. 이것은 스탈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스탈린에 앞서 레닌과 전위예술가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시차적 관점’의 결과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레닌이 좋아한 것은 고전 예술이었다. 그는 결코 전위예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위예술가들은 낭만적인 혁명 열정은 좋아했지만, 그 뒤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이 다른 시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대한 아주 긴 설명이다.(고명섭 기자) 

09.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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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04 00:17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4월은 잔인한 달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대한 갑론을박을 다루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시와 함께 관련논문을 10편쯤 읽고서 작성한 것이다. 몇 가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어 흥미로웠고 이해의 가닥을 나름대로 잡을 수 있었다. 제목엔 '깊이 읽기'란 말이 들어갔지만, 실제로는 '깊이 읽기'를 위한 심호흡이자 워밍업 정도이다. 여유가 되면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물론 더 편하고 더 좋은 건, 그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글을 찾아 읽는 것이지만).   

고교 독서평설(09년 4월호) 유명한 시? 난해한 시! - T. S. 엘리엇의 『황무지』 깊이 읽기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아마도 20세기 영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닌가 싶은 T. S. 엘리엇(1888~1965)의 『황무지』(1922) 서두다. 그런데 이 시의 모순은 현대시의 대명사라 불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도 난해하다는 데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시, 과연 우리는 『황무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황무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잔인한 달’을 맞이하여 『황무지』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 보자. 



문학 소년, 엘리엇
먼저, 시인 엘리엇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엘리엇은 1888년 미국 미주리 주(州)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니테리언의 저명한 목사였고,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근엄한 분위기에 종교적·도덕적 책임을 중요시하는 가풍은 어린 시절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엘리엇은 선천성 탈장증을 앓는 약골에다 내성적이어서,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야외 활동보다는 독서에 열중했다. 아마추어 시인이었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엘리엇은 10대 때부터 시작(詩作)에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저명한 시인들의 시를 모방하고 패러디하는 데 장기가 있었다. 나중에 그가 쓴 『황무지』에 수많은 인용과 인유가 사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뒤 하버드 대학에 진학한 엘리엇은 고대와 중세 철학, 그리스 문학, 영문학, 불문학, 비교 문학 등을 두루 공부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철학자 브래들리(1846~1924)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그는 ‘개개인의 무질서한 파편적 경험이 어떻게 질서 정연한 세계로 인식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시작 활동도 절대적 질서를 추구하는 여정으로 간주했다. 그런 배경 아래 1927년에는 영국으로 귀화하고, 종교도 영국 성공회로 개종했다. 자주 인용되는 그의 말을 빌리면, 엘리엇은 “정치에서는 왕당파,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그리고 종교에서는 영국 국교회 신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 배경과 경력이 『황무지』를 읽는 데 참고는 될지언정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엘리엇의 독특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무지』의 방대한 초고를 1/3로 줄여서 지금의 분량으로 만들어 준 선배 시인 에즈라 파운드(1885~1972)는 그에게 ‘늙은 주머니쥐(Old Possum)’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엘리엇은 『황무지』를 파운드에게 바치며 그를 ‘더 나은 예술가’라고 불렀다.). 엘리엇 스스로도 그 별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주머니쥐는 공격을 받으면 죽은 체하고 있다가 위험이 없어지면 다시 움직인다고 한다. 이런 ‘주머니쥐’ 성격은 엘리엇의 시와 시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도 그런 경우 아닌가.  



『황무지』 깊이 읽기
엘리엇은 셰익스피어(1564~1616)의 『햄릿』을 비판하면서, 이 작품에서는 상황들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햄릿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해 주는 객관적 상관물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은 비물질적인 의식이나 감정을 시각화하고 공간화하는 작업의 산물이다. 엘리엇의 초기 시인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의 한 대목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수술대 위에서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널브러져 있을 때.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무기력한 ‘저녁’이라는 시간이 “수술대 위에서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한 대응물이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다. 엘리엇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전통)를 환기하는 방법을 통해서 유동적인 현재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고정시키려 했다. 가령 『황무지』의 한 가지 에피소드를 보자. 

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 소리쳐서 그를 세웠다 :  스텟슨!
자네 밀라이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There I saw one I knew, and stopped him, crying : ‘Stetson!
‘You who were with me in the ships at Mylae! 



화자는 20세기 런던의 한 중심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스텟슨)에게 말을 붙이면서 ‘밀라이 해전’ 때의 인연을 상기시킨다.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이 해전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로마군이 카르타고 해군에 대승한 전투를 가리킨다.  

다른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적 진술은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병렬적으로 제시하려는 시적 전략에서 비롯된다. 이 같은 전략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를 제시함으로써, 지금의 상황을 보다 잘 해명해 주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현재 사건의 충격을 완화하거나 은폐하는 역할도 한다. 『황무지』의 많은 서술과 비유, 인용 들이 독자에게 모호하거나 무질서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은폐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3장 「불의 설교」 끄트머리의 병치를 보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To Carthage then I came

Burning burning burning burning
O Lord Thou pluckest me out
O Lord Thou pluckest

burning

엘리엇이 직접 붙인 주석에 따르면,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라는 구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고백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는 부처의 ‘불의 설교’에서 가져온 것이다. 엘리엇은 동서양을 대표하는 금욕주의자의 말을 이 대목에서 고의적으로 병치시켜 놓는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적 의미가 창출되거나 강화되리라고 본 듯하다(곧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를 통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황무지』 전체에 걸쳐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된 이 병치 기법이, 의미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산시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의 무질서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질서를 도출해 낼 수 없으며, 그 무질서 자체가 이 시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5부로 구성된 『황무지』는 각 부의 인과성이나 연결성이 미약하기 때문에 아예 시작과 끝을 바꾸어도 상관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 앞에 놓인 『황무지』는 ‘이야기’가 없는 시다. 이야기의 파편들만 있을 뿐, 전체를 통합해 주는 ‘이야기’가 부재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작품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세계의 황폐함과 정신적 불모 상태를 묘사하면서 소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이해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시각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이 각각 모더니즘적 이해와 포스트모더니즘적 이해이다. 전자는 『황무지』의 파편성과 다양성, 무질서가 어떤 통합적 질서로 수렴된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황무지』에서 읽는 것은 ‘통합되지 않는 다양성’뿐이라고 말한다. 또 『황무지』를 모더니즘 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창작의 기원으로서 시인의 우월한 권위를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작품을 창조하고 의미를 주재하는 시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곧 작품 해석에서 모더니즘은 시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독자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황무지』의 등장인물 티레시아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결부된다.

비록 눈이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는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시아스는 볼 수 있노라
I Tiresias, though blind, throbbing between two lives,
Old man with wrinkled female breasts, can see


티레시아스(테이레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남녀 양성의 인물로 테베(테바이)의 눈먼 예언자다. 엘리엇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티레시아스는 단순한 방관자이고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다른 모든 등장인물을 통합하고 있다. …(중략)… 티레시아스가 ‘관찰하는’ 것이 사실상 이 시의 내용이다.” 말하자면, 티레시아스는 이 시에서 ‘행위의 주체’는 아니지만, ‘시선의 주체’로서 전체를 총괄한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엘리엇은 그런 역할을 티레시아스에게 부여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 ‘늙은 주머니쥐’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으며, 또 엘리엇이 진실을 말했다 해도 그의 의도가 과연 텍스트 속에 얼마만큼 투영되었나 하는 것이다.

엘리엇, 창작 의도를 밝히다
만약 엘리엇의 말을 존중하기로 한다면,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은 독자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줄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황무지』를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며, 따라서 이 시를 중요한 사회 비평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나로선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이 시는 단지 인생에 대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불만, 그것도 하찮은 불만의 토로였을 뿐이다. 이 시는 단지 그런 불만을 운율을 맞춘 시로 써 본 것뿐이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자신의 창작 의도를 고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황무지』의 창작 동기가 된 엘리엇의 ‘하찮은 불만’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개인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한다. 1915년, 엘리엇은 영국 중산층 출신의 여성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한다. 병약한 데다가 신경 쇠약을 앓던 비비언과의 결혼 생활은 무척이나 힘들었고, 이 때문에 그는 생계를 위해 1917년 로이드 은행에 취직한다. 『황무지』를 쓰던 1921년에는 과로와 긴장으로 엘리엇 자신이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여서, 스위스의 한 요양소에 입원하기까지 한다. 이때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라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최악이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잘 알려진 전기적 사실이며, 거기에 덧붙일 수 있는 내용은 엘리엇의 ‘하찮은 개인사’다. 엘리엇 부부와 철학자 러셀(1872~1970)의 인연이 그것이다. 엘리엇은 마치 『황무지』의 화자가 런던에서 스텟슨을 만났던 것처럼, 우연히 하버드 대학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과 만난다. 곤궁한 처지에 있던 엘리엇은 곧 러셀의 아파트로 이사를 갈 만큼 그와 친해지고, 러셀 또한 그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자유 연애주의자인 러셀과 아내 비비언의 관계가 불륜으로까지 발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엘리엇은 이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황무지』는 그의 ‘하찮은 불만’의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었을까? 『황무지』의 1부 「죽은 자의 매장」은 이렇게 끝난다.

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O keep the Dog far hence, that’s friend to men,
‘Or with his nails he’ll dig it up again!
‘You! Hypocrite lecteur! - mon semblable, - mon frère!’


마지막 행의 프랑스 어 시구는 엘리엇이 보들레르(1821~1867)의 시집 『악의 꽃』에서 인용한 것이다. 거기서 ‘독자’를 뜻하는 프랑스 어 단어 ‘lecteur’는 ‘강사’를 뜻하기도 한다! 요컨대, 엘리엇은 아내 비비언조차 알아채지 못할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던 것은 아닐까? 다양한 갑론을박의 해석을 낳고 있는 『황무지』는 이래저래 난해할 수밖에 없는 시다.   

09. 04. 03.  

P.S. 뒷부분에서 "하버드 대학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이란 구절은 원래 "하버드 대학 시절의 강사였던 러셀"이라고 적어보낸 것이다(편집과정에 교졍되었다). 일부러 '강사'라고 지칭한 것은 "위선적인 독자여!"란 구절의 이중적인 의미와 호응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표면적인 인용 너머에서 엘리엇은 러셀을 상대로 "위선적인 강사여!"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인데(러셀은 이 시의 숨겨진 수신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비난'이 아내 헤이우드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것이어야 했다는 점(엘리엇은 시의 초고를 아내에게 자주 보여주었다). <황무지>는 그러한 맥락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이미 이러한 읽기를 시도한 논문들도 나와 있다).  

덧붙여, 오랜만에 황동규 시인의 <황무지> 번역을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4부의 제목 'Death by Water'를 '수사(水死)'라고 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아주 단순하게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가리키는 더 익숙한 표현은 물론 '익사'다. 이창배 교수의 번역은 '물 죽음'으로 옮겼는데, 이 또한 특이한 선택이다(3부의 제목 '불의 설교'와는 호응시키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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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생각
    from seoulrain's me2DAY 2009-04-03 10:32 
    '황무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로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