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 빅뱅 직전의 우주
프랭크 클로우스 지음, 이충환 옮김 / Mid(엠아이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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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번역자가 초벌 번역을 했으면 편집자가 비문과 오역된 문장을 확인하고, 다시 번역자가 이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함은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어 번역자의 초벌 번역 원고를 그대로 책으로 펴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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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의 노자주 한길그레이트북스 67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 한길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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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그레이트북스 시리즈는 그 번역에서 실망을 안 한 책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은 최악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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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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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는 경성 트로이카의 활동을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잘 그려낸 책입니다만 몇가지 사실과 다른 점이 있어 적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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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2쪽

얼마 후, 김형선의 구속으로 지도선을 잃은 박헌영은 자신의 방법이 비현실적임을 깨닫고 직접 조선에 들어왔다가 붙잡히게 된다. 몇 해의 감옥 생활 끝에 정신병을 가장해 석방된 박헌영은 이후 국내 운동은 국내에서 지도해야 한다는 국내파가 되어 이재유와 같은 길을 걷는다.

=> 김형선이 박헌영의 국내 연락책이었다는 점은 맞습니다. 다만 조선에 들어왔다 잡힌 것이 아니라 1933년 7월 5일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월 말경 경성으로 압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병을 가장해 석방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서인 1927년 11월입니다. 또한 박헌영이 조선 혁명운동사상 이름 높은 국제선인 것은 맞지만 1929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해 조선공산당 지부가 취소된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대중 조직속에서 당 결성을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는 점에서 박헌영이 마치 이재유와 대립적인 것 처럼 그리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박헌영은 1939년 9월 만기 출소한 후 경성콤그룹에 가담하여 활동합니다.

2. 122쪽

김형선이 중국 쪽에서 들어온 국제선이라면 권영태는 소련 쪽에서 들어온 국제선인 셈이었다.

=> '국제선'이라 불린 조직은 정확히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를 일컫는 말로써, 이 조선위원회는 박헌영 등 조선인 3명을 포함한 6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29년 모스크바에 있을 때 박헌영은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1월 상하이로 오면서 김형선과 연락을 주고 받습니다. 권영태는 1932년 5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 한 후  프로핀테른의 지시로 조선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프로핀테른은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로 코민테른이 결성한 국제노동조합총연맹 정도 되는 조직입니다. 프로핀테른은 국제선으로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국제선은 하나뿐입니다. 경성 트로이카 책에서는 국제선을 매우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세계의 혁명운동에 코민테른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혁명가든 국제선과의 연결을 상당히 중요시했습니다. 물론 책에서 얘기한 것처럼 김형선과 권영태가 국제선임을 자처하며 권위적으로 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조선에 나와 보니 권영태(權榮台)동무와 이재유(李載裕) 동무가 싸우고 있었다. 그 싸움의 원인은 권영태 동무가 국제오르그라고 주장한 데 있으며, 그것은 확실히 권영태 동무가 옳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1939년 내가 대전에서 나왔을 때 경성콤그룹이 있음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일했다. 「중앙 급 지방동지 연석간담회 회의록」(1946. 2. 19-2. 21), 이정 박헌영 전집5, 399쪽.(임경석,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과 박헌영에서 재인용)

라고 얘기했으므로 저자 안재성의 설명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닙니다.

3. 287쪽

한편, 경성꼼그룹은 조선공산당 창설 주역의 한 명으로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인 박헌영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노동 현장에 상당한 기반을 가진 것과는 달리 박헌영은 대중적인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그 대중적인 의미는 컸다. 이순금이 박헌영을 만나 설득한 끝에 합류가 결정되었다. 이관술은 인천에 기관지 편집을 위한 별도의 아지트를 마련하여 박헌영을 안주시켰다.

=> 1939년 9월 출옥한 박헌영은 그해 12월 12일경 경성에 올라와 이관술과 만나고, 같이 인천에 있는 이순금의 집으로 향합니다. 거기서 이후의 계획을 논의해 청주에 새로운 아지트를 마련하고 12월말부터 박헌영은 약 40일간 청주에 거주했다가 경성으로 올라와 1년을 지내다 지방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에 대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일때부터 알고 있었으며 출옥 후 그들과 함께 운동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영입이라는 표현은 저절치 않으며 이순금이 박헌영을 설득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4. 208쪽.

훗날 저명한 여류 문필가이던 모윤숙까지 객사하였듯이.

=> 모윤숙은 1990년 6월 7일 오전 10시 30분쯤 81세의 나이를 끝으로 서울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5. 359쪽.

남로당 문화부장이자 지리산 유격대 간부로 공개된 김태준은 짧은 재판 과정을 거쳐 11월 초에 사형을 언도받았고, 대통령 이승만이 이를 인가해 며칠 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 1949년 7월 26일에 체포된 김태준은 9월 30일 공개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한달 여 후 수색의 군 처형장에서 사형에 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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