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호의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 등과 함께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내가 또 올려놓은 책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다. 시집을 읽고 소감을 적는 게 '사회적 소임'이겠으나 이런저런 글독촉과 글쓰기 장애에 시달리는 즈음이라 그럴 만한 여유는 없고, 대신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사회적 의무감'에 올려놓는다. 몇 달 전에 스크랩해놓은 기사이다.  

컬쳐뉴스(06. 10. 09) "시는 직업이 아니라 시를 쓰는 상태"

권혁웅 시인으로부터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라는 찬사를 받은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의 작가 김경주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시집 속 미모(?)의 시인을 보고 잠깐 ‘여성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작 만나본 시인은 체구는 작지만 수염을 깍지 않은 까칠한 모습에 제대로 된 전라도 말을 쓰는 말 그대로 전라도 남자였다.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형(畸形)’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은 인터뷰 중에도 ‘기형’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은데 시를 읽는 사람이 없고, 시를 읽는 사람은 없는데 서점에 시집은 넘쳐나고 이 모든 것이 ‘기형’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기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 세상의 모든 ‘기형’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 그림이 되지 않으면 /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 「외계(外界)」 중에서

시인은 이번 시집이 첫 시집이지만 지난 2003년 등단 후 2년 동안 발표한 시들은 일부러 싣지 않았다. 시인에게 ‘현재 진행 중’인 고민들을 담아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어느 정도 제 깜냥 안에서 고민이 끝난 것들은 저한테 설렘을 주지 못하더라고요. 첫 시집이니까 지금 고민이 와 있는 자리, 지금 고민을 담은 시들을 묶고 싶었어요. 그래야 앞으로의 시간도 견뎌줄 것 같더라고요.” 

시인은 등단 후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시인에게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서울은 정말 딴 세상 같았어요.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서 실어증을 1년 쯤 앓을 정도로 말을 하지 못했죠.” 그는 말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람을 사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서울에 대한 이질감은 그의 시에 ‘외로움’과 ‘상실’이라는 감수성으로 드러난다.
 
“(…)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밤이면 방을 밀고 우주로 간다” -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중에서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낯섦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고향에서는 ‘한강’이라는 것이 매우 낯선 것이어서 소재로 들어오기 힘들거든요. 하지만 서울에 오면 ‘한강’은 아주 단순하게 존재하죠. 이 두 개의 낯섦 사이에는 새로 생겨난 것과 사라지는 것이 있는데, 연민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연민’의 정서가 시적 화두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시인이 서른 한 살을 먹는 동안 시인의 서른 한 살까지의 삶이 지나가버렸다. 시인은 그렇게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경계에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벌써 학부만 네 번째 전전하고 있는 만학도(滿學徒)다. 법학과, 독문학과, 국문학과를 거쳐 지금은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다니고 있는 그가 문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세 번째 학교에서 국문학과를 다닐 때 군대를 가게 됐는데요. 해군이다 보니 무인도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딸랑 6명이서 무인도에 있다보니 어찌나 무료하고 심심한지, 휴가 나왔을 때 제대할 때까지 읽을 심산으로 선배들이 제일 어렵고 알레고리화 되어있다고 한 시집 다섯 권을 들고 갔어요.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는데 계속 읽다보니까 어렴풋하게 시에 대한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렇게 시에 좋은 느낌을 갖고 제대한 뒤 무작정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3~4년 쓰다 보니 등단에 이르게 됐고, 지난해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라는 말을 들으며 대산창작기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이 ‘직업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지속의 순간 바로 그 상태만이 그 이름의 정체성으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라는 호명은 그 지속의 상태에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김경주 시인은 글 쓰는 것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등단 후 삼성생명에서 카피라이터를 2년간 했었고, EBS에서 사회과학 탐구 부문 구성작가를 했었다. 또 대학 친구들과 독립영화사 ‘청춘’을 설립해 단편영화 작업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계간지 『풋』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시를 쓰는 순간에만 진실하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특별히 시 쓰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다양한 장르에서 일을 하면서 시의 다양한 형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것 같아요. 지금 철학을 공부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저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쫓아서 할 겁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끝없이 헤매는 방랑자 같았다. 방랑자는 자유롭지만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주위의 것인지 모른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시인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자유의 하늘에서 펼쳐 보일 퍼덕거림을 오래도록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위지혜 기자)  

07. 01. 17.

P.S. 내친 김에 국민일보의 신춘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1. 04) 시인 ‘김경주’… 시·희곡 넘나드는 문단 괴물

시인 김경주(31). 그는 지금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그가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를 냈을 때 문단 안팎에서 ‘헉’ 소리가 들렸다. 그 중에서도 ‘미래파’라는 용어로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풍을 일별한 문학평론가 권혁웅씨가 붙인 시집 발문은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시인 김경주에게도 그런 격찬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터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미래파는 아니에요. 미래파라는 용어는 규정되고 단정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론 자체가 낡은 것이죠. 모든 시인이 미래지향적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남 광주 태생. 전남대 법대,조선대 독문과,원광대 국문과를 거듭 중퇴한 이력의 소유자. (요즘 젊은 시인들의 구심체라할 황병승을 비롯해 최승철 송승환 이현승 윤석정 시인이 모두 원광대 국문과 문턱을 거쳐간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등단 4년차에 지금은 서강대 철학과 4학년.



졸업 시험을 치르고 있던 지난 연말에 홍익대 앞에서 그를 만났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속초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40여일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할 계획입니다. (지금쯤 그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얼어붙은 바이칼 위를 미끄러지고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의 옛 유배지들을 둘러보고 싶어요. 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가 다시 이르쿠츠크를 경유해 고비 사막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고교 중퇴 이후 그의 생활은 자발적 유배의 연속이었다. 가출이 아니라 출가였다. 낮에는 학원 앞 분식집 서빙,새벽엔 신문배달,의대에 간 친구 소개로 시체 닦는 일도 해보았다. 부산 한 공원의 벤치에서 몇달간 노숙도 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남총련에 가입,화염병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입대한다.

“엄마 나 슈퍼 좀 다녀올라요”하고 입대한 해군에서 그는 바닷속 폭탄을 설치하는 심해잠수사였다. “처음 1년은 우리나라의 모든 섬을 군함타고 돌았고 나머지 1년은 무인도에서 경비를 섰지요. 모두 6명이었는데 그 중 한 놈은 자살,한 놈은 감전사했지요.” 죽을 사(死)자를 발음할 때 죽음에 저항이라도 하듯,그렇지 않아도 번뜩이는 그의 눈매가 더욱 매섭게 빛났다. 외로움의 극단에서 그의 시는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떠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외로워해 주는 것이다//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1’ 일부)

그가 살고 있는 움막을 보고 싶었다. 방이 어질러져 공개할 수 없다던 그가 천천히 앞장을 섰다. 아현동 산동네 초입에 그가 타고 다니는 ‘올드 바이크’가 서 있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 파란 쪽문을 열자 냉기 도는 옥탑방이 나왔다. 겨울엔 기름값 때문에 보일러 버튼에 가동금지 표시로 녹색 테이프를 붙여놓는다고 했다.

좁다란 2층 구조의 아래칸은 화장실과 간단한 조리시설,위칸은 침대와 책상이 놓인 침실이었고,그 옆으로 동서양 고금서책으로 꽉 들어찬 작은 서재가 있었다. 월세 20만원. 상경한 지 5년동안 흑석동 염리동을 전전하다 들어온 시인의 집은 부서진 난파선 같았다. 그 방에서 친구와 함께 ‘청춘’이라는 단편 영화도 찍었다. 그가 시집에 쓴 ‘시인의 말’에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이것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은 차고 넘치는데 시집 읽는 이가 없으니 그게 기형이지요. 기형은 퇴화도 진화도 아니고 일그러진 그 자체가 아닙니까.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괴물’에서 보여준 바로 그 괴물. 기형에 시적 언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언어가 극단적인 것은 다양성의 폭력성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상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형식 파괴가 나오지요. 시가 형식 파괴에 앞장서야 하고요.”

시놉시스,희곡 등에서 시적인 느낌을 주는 텍스트를 생산해야될 의무가 시인에게 있다는 그는 올해엔 자신의 희곡을 대학로 연극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시보다 먼저 희곡을 써왔다는 그는 “시인으로서 희곡판,연극판을 부활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심해잠수사 출신답게 그는 인생의 결락 부분을 채우기 위한 발화의 욕망에 뇌관을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도 들이지 않은 눅눅하고 차가운 방에서 이 젊은 몽상가는 그 폭발력으로 날아갈 우주의 바깥을 꿈꾸고 있었다. 시와 함께 그 자신도 폭발하고 있었다.

“예컨대 비평가 김현(1942∼1990)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이성복 시인을 찾아낸 것에 있지요. 비평가들도 10년안에 작가를 못찾으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요즘 비평가들에게는 미학이 없어요. 작가나 시인을 출판사에 연결시키는 중개 역할에 머물고 있지요. 결국 비평가는 보이고 작가는 안보이게 되는 것이죠. 문학은 좋은데 문학 풍토는 싫더군요. 그래서 문학 밖에서 찾게 되지요.”

일찌감치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드라이아이스’)라고 선언해버린 시인. 그의 시베리아행은 문학 밖에서 문학의 과녁을 찾는 순교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학보다는 삶이 먼저인 것이니 그가 허무에 함몰되지 않는 심리적 버팀목을 이번 여행길에서 찾게되길….(정철훈 전문기자)

경향신문(06. 09. 13) 김경주씨 첫 시집 출간…세상을 희롱하는 ‘외로운 울음’

외로움은 꽤 귀족적인 감정이다. 외로움은 세상과 삶이 수준미달로 여겨질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진짜 시인’은 오만불손하게 외로운 자들이다. 도무지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힘들다. 세상과 관계를 맺을수록 상처받는다. 결국 자기만의 성(城)을 쌓는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인이 예정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지만, 시인의 눈으로 보자면 세상을 비웃거나 반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난해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며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란 말을 들었던 김경주씨(30)가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를 냈다. 제목부터 외로움을 표낸다. 세상이 그를 열외(列外)시킨 것과 그가 세상을 열외시킨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구에서는 시인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별에서는 지구가 보인다”(‘비정성시’ 중). 세상과 ‘맞장’을 뜨는 패기야말로 시적 재능의 대표적 증거일 테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드라이아이스’ 중).

젊은 문인 권혁웅씨는 시집 뒤표지 ‘주례사’에서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라고 썼다.

‘기자의 감각을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 때문에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중요한 시집’은 재능의 폭발이 아니라 한 시대의 영혼과 정신의 형식을 내장(內藏)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두번째 시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수록작 ‘우주로 날아가는 방 1’에 따르면 ‘시인=세상 아닌 것’이다. 그것들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해주는 것”이다. 이때 외로움이란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자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몸의 음악과 생을 이해하는 데 시간과 사랑을 쏟는 일이 세상에서는 ‘불편한 삶’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인은 외롭다.

시인의 외로움은 방랑과 눈물로 육화된다. 둘의 공통점은 ‘떠는 일’이다. “방랑이란 (중략)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이고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상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중)이다. 쭈그려 울고 떨면서 한 점 열(熱)을 내보내는 게 그의 시(詩)인 셈이다.

그때 외로운 울음이란 자기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중). 사람을 짐승 상태로 냅두려는 미친 세상의 복수가 두렵지 않을까.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중)이다. 그러므로 미친 세상은 시인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중).

시인은 자신에게 반말하는 세상의 ‘외계(外界)’에 산다. 세상은 시인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시인은 세상 밖에서 그 세상을 슬퍼해주면서 운다. 세상의 ‘자궁’에 대한 도저한 연민 탓이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중략)/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외계’ 부분).(김중식 기자)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7-01-17 15:46   좋아요 0 | URL
젊고 새로운 시인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러워 합니다...

나비80 2007-01-17 16:03   좋아요 0 | URL
저도 일전에 김경주 시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야기는 못 나눠보고 어깨넘어로 슬쩍슬쩍 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팽팽한 건강함이 살아있는 시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겠더라구요. 시집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1-17 16:13   좋아요 0 | URL
수유님/ 작년 가을에 첫시집이 나왔을 뿐입니다.^^
소이부답님/ 한 평론가가 '한국의 랭보'란 평을 하더군요.^^

마늘빵 2007-01-17 16:31   좋아요 0 | URL
김경주를 만났던 최측근으로부터 그의 사석에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밌군요.

sommer 2007-01-18 00:30   좋아요 0 | URL
이번 호 문예 중앙에서 '낭만주의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는 걸 흥미롭게 읽었었죠. 몇 장의 사진과 한 편의 자전적 산문...놀라운 건 그에게서 낭만주의가 기억/추도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로쟈 2007-01-18 00:45   좋아요 0 | URL
다들 아시는군요.^^ 문예중앙 겨울호 얘기는 저도 들었는데, 서점에 잘 없더군요. 도서관에서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시인이야 본디 낭만주의가 제젹이죠. 소설과 다르게...

parksang 2007-01-18 11:03   좋아요 0 | URL
시 몇편을 찾아 읽었는데, 좋군요. 다만 이미지가 넘쳐나는데요. 나이 먹은 독자 입장에서 이런 시 읽기는 좀 뻑뻑하죠. 그리고 간혹 어줍잖은 잠언이 보이는 건, 흠입니다. 낯선 이름의 평론가의 ‘한국어로 씌어진 어쩌구’ 주례사보다는 경향신문 김중식 기자의 평가가 적절해보입니다. 그 역시 단 한권의 시집으로 이만한 주목을 받았던 시인이었더랬죠. 신진평론가의 '안목'보다는 김기자의 '감각'에 한표 던집니다.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9121725451&code=960205
시인은 직업이라기보다 시를 쓰는 상태다, 라는 도전적인 발언은 좋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군요.

로쟈 2007-01-18 13:1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봤는데, 말씀하신 김에 마저 옮겨놓지요. 김중식 기자도 좋은 시인이었는데, '시인'이 직업으로선 좀 대책이 없지요.^^

2007-01-19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9 00:47   좋아요 0 | URL
**님/ 김경주에게서 '아름다움'이 키워드인지는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미래파와 구별되는 건 맞구요, 구분의 근거에 대해서는 좋은 비평거리가 될 만하네요.^^

린(隣) 2007-01-19 11:13   좋아요 0 | URL
저도 작년에 가장 주목한 시인이었는데, 책표지에서 본 것만도 독특하군 했는데, 이력이 이토록 다채로운지 몰랐네요. 평범한 삶에서는 시가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 허나 들뢰즈를 보면 철학은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믿음으로 갈랍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좋은 읽을 거리들이 많네요. 몇 개 퍼갈게요.^^

로쟈 2007-01-19 11:18   좋아요 0 | URL
바쁘셨나 보군요.^^
 

마님과 따님이 '주몽'에 빠져 있는 동안 혼자 서재에서 내주부터의 독서 계획에 잠시 빠져본다.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을 구하러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하이데거(1889-1976)를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6)와 같이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생각의 가닥을 일단 적어놓기로 한다.

 

 

 

 

사실 가닥이랄 것도 없는 게 지난주에 <예술의 비인간화>(고려대출판부, 2004)를 다시 구한 다음에(이전에 갖고 있던 미진사판은 중역본이었다) 한번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하이데거의 <철학입문>을 손에 들면서 오르테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6)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이 오르테가의 책도 1929년에 마드리드대학교에서 행한 강의록이기에 시기적으로도 <철학입문>과는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철학입문>은 1928-9년 겨울학기에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행한 강의록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형이상학입문>(문예출판사, 1994)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오르테가의 <형이상학 강의>(서광사, 2002)까지 같이 읽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해서 묶여진 게 하이데거-오르테가 커플이다.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알베르 카뮈로부터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가"라는 찬사를 받은 오르테가는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정신적 스승'이란 평가도 받고 있다고 한다. 그게 아마도 스페인쪽에서 많이 하는 얘기일 듯한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중'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바가 얼마간은 인정이 되는 모양이다(특별히 실존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걸로 돼 있다).   

In the 1920s and 1930s under the spell of Ortega y Gasset, Bergson, Spengler, Keyserling and others, a reaction arose among intellectuals against the democratic and social enlightenment. The philosopher's attempt to make the "revolt of the masses" responsible for the alienation and degradation of modern culture, prepared indirectly way for fascism. Politically Ortega favored a form of aristocracy - culture is maintained by an intellectual aristocracy because the revolutions of the masses threaten to destroy culture. From the late 1920s Ortega's thought showed the influence of Martin Heidegger, whose major work, Sein und Zeit (1927, Being and Time), was not transparently political but was later interpreted against his Nazi sympathies.

 

6년의 나이차이니까 그냥 동료나 선후배 정도의 관계일 텐데(오르테가는 독일 유학시절 주로 베를린대학과 마부르크대학에서 공부했고 하이데거 또한 마부르크대학에 몸 담았었다), 여하튼 철학자로서의 절대적 크기를 떠나서 각각 20세기 독일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의 사유를 비교해가며 더듬어보는 일은 흥미로울 듯하다(단, '레져 클래스'에 속하지 않는 탓에 이런 독서계획을 여유 있게 실행할 만한 여건은 되지 않는다. 다만 준비하고 꿈꿀 따름이다).

철학에 대한 두 사람의 기본적인 입장을 맛보기로 읽어본다. 먼저 하이데거: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철학하지' 않아도 철학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 거기 있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철학을 했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철학입문>, 15쪽)

이이서 오르테가: "과거와 비교해볼 때 현재는 상대적으로 명백하게 철학적 기질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람들은 철학하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중적 분위기 속에서 철학적인 단어들이 날아오르면 곧바로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먼 길을 여행객이 돌아왔을 때 그의 여행담을 듣기 위해 그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철학자들에게로 모이고 있다.(...)  이와 같은 대중들의 정신적 변화와 일치하는 놀라운 사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철학자는 지난 시기 철학자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정신 상태로 철학을 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에 어떻게 우리가 지난 시기 철학자들을 지배했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으로 철학에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3쪽)

07. 01. 16.

P.S. 오르테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형이상학 강의>는 모두 같은 역자가 스페인어에서 옮긴 것이다. 한데 <형이상학 강의>의 서두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옥의 티가 눈에 띄어 적어보면, "오르테가는 생적 이성을 인간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로 제시한다."(10쪽)나 "이러한 도구적 이성으로의 생적 이성을 발견한 오르테가는..."(11쪽)이라고 할 때 '써'는 모두 '서'로 바뀌어야 한다. 처음엔 오타이겠거니 했는데, 반복되는 걸로 보아 역자나 편집자가 한국어에 좀 무신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러한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생적 이성을 발견한 오르테가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폐기하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Cogito quia vivo).'라는 명제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정열적인 삶은 철학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 삶 자체가 바로 철학일 것이기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린(隣) 2007-01-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독서 계획이시네요. 그래요, 나만의 독특한 의미 부여와 발견의 공부만이 긴 공부길을 지치지 않게 하겠지요. 오르테가는 철학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지의 철학이지요. 로쟈님에게 자극받아 저도 어제 받은 철학입문을 그런 식으로 독서해볼까요?^^ 더구나 전 지금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강독회를 하고 있는 처지니, 더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들뢰즈 책 읽으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까 하다가 바빠서 게을러서 또 잊고 있었거든요. 그런 주제에 이런 말 하긴 체면(?)이 안 서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들뢰즈 만큼 철학하는 인간으로서의 깊은 통찰과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는 철학자가 있을까 하고 감탄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꼭 한번 일독을 권합니다.

로쟈 2007-01-19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그렇게 재미있으셨나요? 한 10년쯤 전에 읽을 때 진도가 엄청 안 나가던 책이었는데...
 

엊그제 우리 곁을 떠난 정군님의 리뷰를 하나 옮겨놓는다. 지승호의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에 대한 것이고, 형식은 '오마이뉴스'의 서평기사를 퍼오는 식으로 하겠다(정군님의 알라딘 리뷰들은 현재로선 모두 그와 걸음을 같이 했으므로). 딴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아침에 '필름2.0'을 읽다 보니까 이번주 인터뷰이(!)가 지승호씨였다. 이달에 나대로 고른 '사회적 독서'의 대상 중 하나가 <금지를 금지하라>였기에 관심을 갖고 읽었고(이 인터뷰는 내주에 옮겨놓을 생각이다), 두 주 전쯤에 산 책을 아직 못펴들고 있지만 조만간 읽어볼 결심을 다시 하게 됐다.

그런 생각으로 '지승호'를 검색하니까 가장 먼저 뜨는 게 바로 오마이뉴스의 이 서평기사이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 서평도서에 대해서 그만한 애정과 부지런함을 갖춘 '서평꾼'이 이제 이 마을에는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고 씁쓸하다(물론 나도 '양다리 걸치기'에 대해선 충고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래의 리뷰는 그걸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오마이뉴스(06. 12. 11)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여기에 있다!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열 번째 인터뷰집을 내놓았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는 이들, 박원순,조정래, 마광수, 이상호, 정태인, 문정현, 최승호, 지승호 등 8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담긴 <禁止(금지)를 금지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분야에서 자신이 믿는 것들을 위해, 그것이 권력을 지닌 자본의 논리에 비켜나는 것일지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열혈인사들이기에 인터뷰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맨 뒤에 있는 '지승호'와 한 인터뷰다. 저자가 다른 이를 만나서 인터뷰한 것을 담은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셀프 인터뷰'다. 10번째 인터뷰집을 기념해서 담아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시도가 생소하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묵묵히 인터뷰집을 내놓았던 지승호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장 마지막에 있는 지승호 인터뷰부터 보도록 하자. 눈길을 끄는 것은 솔직함이다. 그동안 인터뷰를 통해서 소를 연상케 하는 성실함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인터넷에 달린 댓글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며,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나르시스트'라는 자평은 예의로 하는 말 같지는 않다(*지승호씨 또한 알라디너인데, 나는 본인도 고백하는, 그리고 노출하는 그의 '피해의식'이 오히려 책읽기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자는 적당히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건 굳이 저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일기장에 담을 법한 내용이라고 할까? 인터뷰집이라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저자의 어려움과 고뇌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왜 인터뷰를 계속하는 걸까? 지승호는 도올의 말, 즉 "대화는 편견의 확인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터뷰의 매력을 소개하고 있다. 대화는 힘이 세다! 그것을 믿고 인터뷰를 하며, 더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일 게다. 자본은 뒤로하고, 오로지 그 믿음 하나만 갖고 사는 열혈남자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지승호가, 대화의 힘을 믿는다는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시작은 참여연대를 나와 희망제작소를 만든 시민운동가, 얼마 전에 삼성에서 지원금을 받아 논란을 일으켰던 주인공 박원순이다. 인터뷰에서 박원순은 본의 아니게 유명인이 된 시민운동가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그 고뇌란 무엇인가?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심지어 이름만이라도 빌려달라는 것도 있다. 박원순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른 곳에서 '너무 설친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박원순은 이것을 농담처럼 말하지만 단순히 유명세로 얻은 병치레라고 치부하기에는 커다란 고민이 있어 보인다. 그런 고민을 듣는 것 외에 참여연대에서 희망제작소로 옮긴 과정, 그리고 희망제작소에서 삼성의 기부금을 받은 것에 대한 생각 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반갑다.

지승호의 질문이 날카롭기 때문일까? 박원순은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않았다. 참여연대에서 나오게 된 과정, 기업으로부터 돈 많은 것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박원순을 비판했던 이들에 대한 생각까지 들을 수 있다. 박원순, 나아가 오늘날의 시민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체크해 볼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한강>과 <태백산맥>, 그리고 <아리랑>이라는 말 많은 작품의 주인공 조정래다. 이 작품들이 말이 많다는 건 왜일까? 고발된 문학 작품! 마광수, 장정일과 달리 조정래의 작품은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무성한 말이 오고 갔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다른 인터뷰들은 기이할 정도로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작품의 의미만을 파고드는 반쪽짜리 인터뷰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조정래에 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승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파고들었다. 또 조정래에게 정치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있다. 덕분에 조정래는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작품으로 말할 기회에 이어 '대놓고 말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예의 치레에 박힌 말들이 아니라 인간 조정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말들이기에 반쪽이 아닌 정상 인터뷰가 만들어졌다. 조정래에 관한 인터뷰 중에서 가장 성실하다는 평가가 나올 만한 인터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자유정신 선동가' 마광수다. 마광수는 속칭 '야한' 소설로 말이 많은 작가다. 지승호나 마광수 또한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때문에 이들은 이것부터 파고든다. 마광수는 인터뷰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무엇이 억울한가? 마광수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 예컨대 무라카미 류의 작품처럼 야한 정도로 따지면 더 노골적이 있는데도 국내 작가들의 작품만 차별한다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서운함도 빼놓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읽어본 뒤에 '비판'을 한다면 감수할 수 있겠지만, '너무 야하다!'는 말만 듣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광수의 말은 듣기에 거북한 것이지만, 근거가 있는지라 간과할 수 없다. 외국의 것은 작품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의 것은 작품성과 별도로 '위험하다'는 이상한 이중성의 잣대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광수의 인터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로만 전락한 것은 아니다.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며 자유로우면서도 '올바른' 성문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지적하는 것들은 농담 같지만 진지하고 장난 같지만 경청할 필요가 있는 뼈있는 말들이다.

이외 대추리에서 만난 문정현과의 인터뷰에서는 '낮은 곳'에서 나이를 잊고 고군분투하는 종교인의 속마음을, 정태인과 한 인터뷰에서는 한미FTA의 위험성을 이상호와 최승호가 만난 인터뷰는 한국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들을 기회가 된다.

인터뷰 하나에 질문을 140개 만들 정도로 성실하게 준비했기 때문일까? 이들과 나눈 대화는 살아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인터뷰만 봐도 그들을 직접 만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 있고 굳세다. '대화의 힘'은 묻히지 않았고 활자 위에서 생동하고 있다. 덕분에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대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해준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 등 그들의 말만 갖고도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법한데, 그들 8명을 한 권에 담아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 싸우는, 진실을 찾는 이 사회의 일꾼들의 목소리가 담긴 <금지를 금지하라>,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담겨있다.(정민호 기자)

07. 01. 16.

P.S. 참고로 저자가 가장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인터뷰는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라고 한다. '사회적 독서'는 취향이나 형편에 따라 읽으면 좋고, 가 아니다. 의무적인 독서이고 강제적인 독서이다. 물론 그래도 각자의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많이 봐드리자면, 한권씩 그냥 사서 꽂아두시길. 그래야 책이 계속 더 나온다. 지승호 인터뷰집의 근간은 <감독, 열정을 말하다> 속편이라고. 그의 계획대로 홍상수, 김기덕 감독 편까지 포함한 인터뷰집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 2007-01-16 23:05   좋아요 0 | URL
'작금의 현실'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비로그인 2007-01-17 06:36   좋아요 0 | URL
이 글보니 더 쓸쓸해지네요......

라로 2007-01-17 15:38   좋아요 0 | URL
푸훗~ 그러네요~.ㅎㅎㅎ
로쟈님 남자분이세요?
줄곳 여자분인줄 알았다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면 할말 없지만...
님의 유머감각 좋아요~.찡긋

로쟈 2007-01-17 15:40   좋아요 0 | URL
라라님/ 그렇죠? 가을도 아닌데...
nabi님/ 제가 머리는 밀었어도 (여자처럼) 세심한 면이 있지요.^^

이방인 2007-12-11 01: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사실 시작은 Film 2.0에서 시사IN이었는데, 로쟈님도 Film2.0을보고 지승호의 책을 다시금 꺼내들었다는 말씀에 묘한 운명같은게 느껴지네요.
저는 Film 2.0메니아로, Film 2.0의 지승호씨 인터뷰를 무척 인상깊게 보았다가, 최근 시사IN의 알라딘 리뷰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로쟈님이 말씀하셨던 특정분야의 1등은 먹고 살게 해줘야 한다는 말에 필이 꽂혀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기 다시 들어오게 된 이유는 금지를 금지하라 책 읽으면서 또 필이 꽂혀 박원순의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혹시 추천해놓으신게 없나 싶어서...
 

원고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다가 맑은 정신도 아니어서 북리뷰들이나 읽어보았다. 그 중에서 지난주에 출간된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세기>(민음사, 2007)에 관한 리뷰를 하나 옮겨온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말미에 편집과정에서 빠진 대목들이 지적되고 있어서이다.

동아일보(07. 01. 13)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미완의 시대’

‘오리엔탈리즘’에서 서양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신랄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 그가 펴낸 자서전의 원제는 ‘Out of Place(제자리를 벗어난)’였다(*어느새 품절이군).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계이지만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가 조국이라고 가르친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한평생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망명객으로 살았던 이 비범한 문화비평가는 불행한 이방인의 삶을 학문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아마도 진정한 지식인은 관찰자이자 외부자로서 살아야 하는 고독한 숙명을 타고나는가 보다.

에릭 홉스봄 역시 한평생 어디서나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홉스봄은 근대 유럽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길을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 등 4권의 명저로 담아낸 역사가. 올해 아흔 살의 노(老)역사가는 국경의 울타리를 넘어 역사학에서 보편주의를 일관되게 추구해 온 좌파 지성인이다.

그는 영국계 유대인이면서 이집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스라엘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최고 마르크스학자였지만 그의 저서는 소련에서 판금됐다. 이 불행한 경험은 홉스봄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역사는 격정과 감정, 이념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하며 특히 ‘일체감’이란 유혹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뿌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라는 얘기다.

“(이방인의 삶은) 개인으로서는 고달팠지만 역사가로서는 각별한 자산이었다”고 회상한 노역사가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가 번역 출간됐다. 그에게 20세기는 ‘흥미로운 시대’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그리더니 자서전에선 흥미로운 시대로 봤다. 역설적이다. 어쩌면 어느 세기보다 끔찍한 침략과 전쟁이 벌어진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내며 해석해야 했던 자신의 삶을 은유한 것이리라.

노역사가의 회고는 자신이 왜 공산주의자가 됐는지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어린 홉스봄은 베를린에서 나치의 등장을 지켜봤다. 한편에서는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대중시위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집단 황홀경’과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 등이 그를 공산주의로 이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삶을 바쳤던 공산주의 이념은 스탈린주의로 왜곡됐고 20세기가 끝날 무렵 종언을 고한다. ‘공적인’ 역사가 노역사가의 ‘사적인’ 삶과 맞물려 쉼 없이 펼쳐진다. 680여 쪽이나 되는 기나긴 회고 내내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는 노역사가의 시선은 윤색이나 자기연민 없이 놀라울 정도로 정직하고 객관적이다.

무엇보다 이 자서전의 백미는 노역사가가 오늘의 역사학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 이 경고는 21세기 초 논쟁의 지뢰밭이 된 한국 역사학에도 긴요하다.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과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날조되는 역사가 늘어난다…오로지 (특정) 집단을 위해서만 씌어진 끼리끼리 역사(일체감의 역사)는 역사로서는 함량 미달이다.” 한국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뜨끔한 노역사가의 일갈이다.

막강한 대영제국이 졸지에 사라지고 1000년을 갈 것처럼 보였던 독일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본 노역사가. 그는 자서전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관찰자이자 이방인이면서도 역사와 시대에 뛰어들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학자의 거친 숙명임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래서 20세기는 그에게 ‘미완의 시대’다. 편집 과정에서 8장 ‘반파시즘과 반전투쟁’부터 11장 ‘냉전’까지의 주석이 빠진 것이 옥에 티. 원제 ‘Interesting Times’(2002년).

07. 01. 16.

P.S. 2002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도서관에 원저가 안 들어왔길래 구입신청을 해놓았다. 원저가 464쪽. 번역본은 692쪽이다. 번역본의 경우 대개 30% 정도씩 증면되는 듯하다. 책값? 중고본들은 훨씬 싸지만 새책의 경우에도 원서는 21불, 배송비 포함하면 3만원 정도에 구입할 수 있겠다(새책 수준의 중고본은 2만원대에 구입이 가능하다). 가격이 더 다운되지 않는 건 하드카바이기 때문. 국역본은 25,000원(10% 할인가가 22,500원인데, 요즘 나오는 책들에 비해 특별히 비싼 건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1-16 09:13   좋아요 0 | URL
아니; 편집 과정에서 3장이나 주석이 빠진 것이 '옥의 티'일 수 있는 건가요? 그 정도면 새로 찍어야 되는 중대한 실수일 것 같은데. 모두 내용주가 아니라 인용 문헌을 알려주는 주라고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실수 같습니다...
어쨌든 ^^; 퍼갑니다. 에렉 홉스봄 아저씨가 어느새 아흔살 이라니..

로쟈 2007-01-16 13:50   좋아요 0 | URL
실물을 아직 못 봐서 잘 모르겠는데, '흔한' 실수라고 판단한 것이겠죠...
 

중견작가 김영현씨가 신작소설을 냈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 2006). 소설집이 아니라 전작 장편소설이다. 300쪽 남짓이니까 분량이 두툼한 건 아니지만. 특이한 건 노골적으로 러시아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작가들은 구원론적인 주제를 탐구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걸 다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몇 년전에 읽은 것으로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를 다룬 정찬의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도 아주 실망스러웠다).

아래 인터뷰기사를 보면, 작가 자신이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멘트가 기대보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사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광신도적인 신앙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끝까지 밀고간 작가가 아니었나(왜 우리 주변엔 인도로 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작가들만 있는 것인지? '당대적 현실'은 어디로 간 것인지?). 

한국일보(07. 01. 15) '낯선 사람들' 낸 소설가 김영현

소설가 김영현(52)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이렇다. 리얼리즘, 낭만, 서정, 민중문학, 민중운동, 학생시위, 긴급조치 위반, 구속, 고문…. 실천문학사 대표라는 현재 직함이나, 낭만적 색채 짙은 그의 리얼리즘이 민중문학의 발전이냐 퇴보냐를 놓고 뜨겁게 벌어졌던 1990년대 초의 ‘김영현 논쟁’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가 4년 만에 새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을 펴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저 열거된 단어들의 어떤 기색도 찾아보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표나게 원용한 그의 이 신작은 욕망과 원죄, 악령과 신성이라는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한, 말 그대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이다.

“이제야 비로소 김영현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패배감의 터널에서 빠져 나와 문학적으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운동을 할 때는 그래도 내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편안한 것 자체도 감수하기 힘겹다고. “우리처럼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고, 아직도 몸 속에 그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2000년대로부터 조롱당하는 것 같은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껴왔죠. 지금의 세계는 좋게 말하자면 다원화한 노마디즘의 세계지만, 다른 면에선 일종의 무정부 상태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내던져진 존재가 돼버린 거죠. 오지 여행도 많이 하고, 러시아 문학도 다시 읽고 하면서 이제야 내가 어떤 문학을 해야 할지 알게 됐습니다.”

피살된 아버지와 그의 아들들의 비밀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파헤친 <낯선 사람들>은 이런 회의와 고통의 소산이다. 소설은 파렴치한 수전노 아버지와 그의 걸신들린 욕망이 낳은 배 다른 아들들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데, 이 소설에서 수도원 신학생인 차남 성연이 아버지의 진짜 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윤리적, 존재론적 갈등은 오롯이 작가 자신의 것과 겹친다.

“성연이 수도원을 떠나 첫 사랑 안나를 찾아나서는 결말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부대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수도사처럼 침묵 속에서 생을 완성해가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릴 때가 많아요. 하지만 얄궂은 운명 속에서 관계를 맺었다 해도 이 누추한 삶을 껴안고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게 의미 있는 삶 아니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간과 함께 피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사랑의 역사도 시작됐고, 그게 우릴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김영현의 작품을 김영현적이라 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 말하는 게 미안하지만, 작가는 <낯선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해 체홉, 투르게네프 등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을 활용해보려는 거대한 구상의 첫 작품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 고전으로 다시 돌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침체된 우리 문학을 위해 고전적 주제와 품격, 구도를 가진 문학을 다시 재건해내야겠고 생각했어요. 박완서 이문열 같은 1세대 작가들과 유행에 휩쓸리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텅 빈 중간세대로서 제가 할 일은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제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화력 강한 위장이 생긴 것 같다는 그는 “저도 제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는 한 달에 1주일은 집필실에 들어가있겠다고 선포까지 했다. “작가는 평생 삶의 화두를 찾아 떠도는 자기 시대의 수도사입니다. 저는 삶의 의미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막막한 우주에 영혼이라는 이토록 정교한 장치들이 존재한다는 게 바로 그 증거일 겁니다. 그걸 기독교가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네요.”(박선영 기자) 

07. 01. 15.

P.S. 미완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주인공 알료샤는 수도원을 나와 (창작 메모에 따르면) 나중에 테러리스트가 된다(구원은 그 다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시대의 수도사'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삶의 의미 따위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결의로 무장한.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의 '한국화'에 대해서 우려를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7-01-15 21:5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종교적 탐구를 기원으로 타인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방향도 있겠지요. ^^ 물론 저는 그 방법에 '동감'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반대하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1-15 22:04   좋아요 0 | URL
저는 구도소설 따위를 믿지 않습니다. 소설이 핑계가 되는. 그보다는 종교가 핑계가 되는 소설이 더 윗길이라고 생각해요. 차라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미라는 환상이 아니라 궁극적 의미의 불가능성 아닐까요?..

나비80 2007-01-16 15:34   좋아요 0 | URL
타인은 겨냥하고 자신은 관조하는 소설들이 낙양의 지가를 올린 때가 있었죠.
어떤 공교로움이나 불가해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참 모순되는 행위인데 말이죠. 그나저나 저 역시 로쟈님이 말씀하신 궁극적 의미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삶을 환유하는 입장입니다. 뭐 제 자신의 가치관에 뚜렷한 기준이 서 있는것도 아니지만. 홍상수 식으로 말하자면 "그깟 오해와 편견의 기준"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