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

번역비평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제목은 '번역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철학/이론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며 옮겨놓는 것은 발표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란 제목의 페이퍼인데(작성자는 ‘빵가게 재습격’님이다), 프랑스 철학서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늘어놓았다. 소위 ‘고급’ 철학/이론서를 읽으며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법도 한 내용이어서 잠시 읽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도대체 프랑스 지식인이란 자기도취와 자폐적인 난잡함을 지껄이는 존재들에 불과한가? 얼마 전에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을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서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책들을 몇 권 꺼내서 살펴보았는데, 도대체가 그 ‘난잡함’ 이 그 ‘난잡함’ 수준이었다.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설사하듯이 지껄여대는 것. 이건 바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이하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
 
원서 자체의 난해성과 번역의 난해성을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물론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책이어서 어렵게 옮겨진 경우처럼) “그 난잡함이 그 난잡함 수준”이라는 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강조한 대목처럼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 만약 그것이 정말 저자의 화법이고 포지션이라면 번역(자)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일단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불평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세상에는 학자들이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가 있고, 그 이론서의 서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서라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가령 ‘초기 독일 미학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매개하여 감각중추의 세계를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일종의 구체적인 논리를 가공해 내려는 기획이다.’(<미학이론>)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감각중추의 세계’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 기획’ 같은 것인데, 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보편과 특수의 의미, 미적인 것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대략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과 서술의 전문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따라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 서술 꼬락서니를 보라.” 



나는 아도르노의 책이나 독일 미학 서적을 프랑스 철학서들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되어 유독 프랑스 철학서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사실 난해성의 원조라면 칸트나 헤겔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건 프랑스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그래도 끝내 못 따라가는 건 독일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있겠다. 가령 “독일의 전통적인 변기는 변기 구멍이 앞에 있어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똥의 냄새로 병이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는 구멍이 뒤에 있어서 물을 내리면 똥은 빨리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변기는 앞의 두 형태의 중간 형태로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똥이 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할 때의 세 가지 다른 변기 스타일처럼 말이다(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리적 삼항을 ‘독일의 반성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로 대비시켰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에리카 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화장실은 제3제국의 공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와 같은 화장실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걸 “그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라고 비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비틀기가 억지스럽다면,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치켜세워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꼬락서니’는 한번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아래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의 지속을 거쳐 정상에 달했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들,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들,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의 ‘이론적’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의 서두 부분이다(내가 갖고 있는 번역서는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이후 2000년에 신판이 나왔지만 인용문을 보건대 번역은 수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딱 40년 전 책이니 액면으로도 시차(時差)를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느 정도의 낯설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번역문에 대한, 아니 푸코의 ‘꼬락서니’에 대한 ‘빵가게 습격’님의 불만은 이렇다.  

“‘역사가’는 누구인가? E. H. 카의 역사가인가? 아니면 -주석이 말하는 대로- 아날학파인가? 또한 그들의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안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은 도대체 무슨 운동이며 ‘사건들의 두께’는 어떤 형태의 두께인가? 이런 개념들을 역사학 이론서에서 찾아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 역사가들이 과거를 재단하고 일정한 이론 혹은 패러다임 속에서 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암시하려는 것 같은데, 서술이 불투명해서 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서술을 이 따위로 신비스럽고 암시적으로 나타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인용된 대목은 역자의 주석대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아날학파의 관심과 역사서술을 푸코가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그러니까 ‘역사서술’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대한 서술’, 곧 메타-역사서술이다). ‘아날학파’에 대해서 검색해보거나 관련서를 약간만 들추어보아도 전체적인 요지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열식 문장의 생경함을 전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보통의 철학/이론서 번역이 그렇듯이 원서의 난해함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역의 난해함이 더 보태진다(한국어 독자들은 이중의 난해함과 대면해야 한다!).  

철학/이론서 번역을 대할 때 ‘전문독자’가 아니라 그저 ‘평균보다 조금 나은 독자’로서 나는 그런 난해함과 접할 경우, 영역본이나 (간혹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게 되는데, <지식의 고고학> 영역본(1972)은 서두의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를 이렇게 옮겼다. “For many years now historians have preferred to turn their attention to long periods,(...)” 계속 이어지는 영역문은 인용문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짐작엔 불어 원문도 그러할 듯싶은데, 한국어본은 이를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이왕 나누는 거라면 세 문장으로 나누는 건 무리였을까?). ‘long periods’를 ‘장기적인 기간’이라 옮긴 것이 (비록 중복이긴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역사’나 ‘장기지속’ 혹은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라고 ‘의역’할 수는 없었을까?

인용문의 후반부는 어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they were trying to reveal] the great silent, motionless bases that traditional history has covered with a thick layer of events.” 영역본만을 옮기면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 거대한 무언의, 부동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도이겠다. 여기서 먼저 대비되는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들’과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다. 이건 짐작에 불어의 ‘histoire’가 갖는 중의성에 기인하는 듯싶다(크리스테바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말로는 <사랑의 역사>라고 옮겨질 때처럼). 하지만 그런 중의성을 갖고 있지 않은 영어에서는 역자가 ‘story(tale)’나 ‘history’ 가운데 문맥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을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과 대비시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역시나 불어처럼 ‘이스토리야(istorija)’란 말이 중의적인 러시아어본(2004)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들’이라고 옮겼다. 한데 문제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이란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영역본에서 “전통적인 역사가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이라고 옮긴 대목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어지럽고 두꺼운 사건들 아래 숨겨진” 정도이다. 그렇게 사건들의 더미에 덮인/숨겨진 ‘주춧돌’(초석)을 드러낸 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 아닌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국역본의 번역은 명쾌하지 않다. “신비스럽고 암시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역’이다(불어본 원서로 치자면 바로 첫 문장인데, 한국어본의 오역은 초판이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교정되지 않았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recouvrir'를 옮긴 것인데, 영어의 'cover'와 같은 뜻이다. 역자는 'recover'와 혼동한 것일까?).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연이어 나온다(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아날의 역사학자들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들을 푸코는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풍토와 그의 진동에 관한 연구”이다. 영어로는 “the study of climate and its long-term changes”이다. “기후와 그 장기적인 변화에 관한 연구”라고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어에서도 그런데, ‘기후’라는 단어가 불어에서는 ‘풍토’를 뜻하기도 하는 듯하다(찾아보니 불어의 'climat'를 옮긴 것이고. 기후와 풍토를 모두 뜻할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풍토가 어떻게 ‘진동’할 수 있는가?(역자는 ‘지진’과 같은 것을 연상한 것일까?) 러시아어본에 쓰인 단어는 ‘kolebanie’인데 ‘진동’이란 뜻도 갖지만 이런 경우에는 ‘변동’이라고 옮겨준다. 그래서 “기후와 그 변동에 관한 연구”라고 옮길 수 있다. 아무려나 “풍토와 그의 진동”즘 되면 문제는 불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부분 따로 있지 않다.  

‘빵가게 재습격’님은 이밖에도 몇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 뒤에 평균적인 독자가 가질 법한 실감을 토로한다. “아니, 프랑스인들이란 이런 난해하고, 암시적이며, 정신병자의 헛소리 같은 문구를 암송하며 즐기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고작 100년 전에 쥘 베른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박고 읽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폐적인 소리를 지껄이며 ‘68혁명’을 언급하고,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파괴성을 공격하고, 탈근대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 눈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에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의미를 고구하고 의의를 찾아내는 일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한없이 시간이 남아 머릿속의 개념을 탐구하면서 무한정 탐닉하는 종교인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 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 심오함인지 자폐적인 난잡함인지 신나게 니네끼리만 지절대라. 그리고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  

물론 이러한 불평에는 어떤 전도 혹은 전치가 있다. 거론된 책들은 프랑스인이 저자이지만 한국인이 번역해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설사 비난을 하더라도 “이런 거 번역해서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프랑스인들이 자기네 책을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 즉 문제의 출처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번역가게’는 ‘우리가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오역 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할/수정할 것(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야 번역서가 나와도 읽지 않고, 읽어도 문제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지적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번역’의 현황과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진단과 제언이 제시돼 왔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를 ‘번역가게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면 아직도 덜 주목받고 있는 성싶은 문제가 있다. 누구를 위한 번역이고, 번역비평인가 하는 점. 번역비평은 그 성격상 번역에 대한 이견과 오역에 대한 지적/교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작업의 시시비비를 번역자와 비평자간의 의견차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자칫 감정적인 문제로 전화될 소지가 있다(실상 많은 경우에 번역비평은 감정적인 대응만을 유발하곤 한다. 심지어는 법적인 대응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자나 비평자나 일차적으론 책의 독자이며, 독자로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더 정확하게, 더 잘 읽는 것이다. 즉, 독자는 번역자-독자와 비평자-독자의 제3항이자 공통항이다. 번역비평은 바로 그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문서의 사례를 들고 싶다. 먼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프로타고라스는 사람들에게 정치 기술을 가르치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애국심에 불타는 우파라면 이런 목적을 소중히 여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서는 잘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 민주적인 시민들 속에 박혀 있는 파괴분자일 뿐이다.”(190-1쪽)

‘급진적 인문학’(원제는 ‘Radical Humanism’)이란 장에서 저자는 줄곧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대비시키면서 프로타고라스를 ‘인문학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들을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어 추방한 귀족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문단이라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좀 어색하다. ‘민주적인 시민들’과 ‘파괴분자(프로타고라스)’를 대립시키고 있어서다. 원문을 찾아보니 “Protagoras is a subversive among the good citizens of Plato's idea of a republic, a democrat."(110쪽)이다.  

번역문은 ‘좋은 시민들(good citizens)’과 ‘민주적인 시민들(a democrat)’을 동일시했지만, ‘민주적인 시민들’과 ‘a democrat’는 일단 수(數)가 다르기에 문법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이 ‘민주주의자(a democrat)’는 앞에 나오는 ‘파괴 분자(a subversive)’를 다시 받은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지만,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 법전 편찬자’이다. 그는 ‘민주적인 시민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민주주의자’였다. 여기서 번역비평자의 자리는 독자를 위한 ‘교정자’의 그것이다. 모두가 서로 고쳐가면서 같이 읽는 것, 그것이 ‘희망의 인문학’이 아닐까. 



얼 쇼리스와 시카고대학의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레오 스트라우스는 불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사회과학 분야에 고전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사회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유명한 사학자로서 대학원 과정의 사회과학 방법론 개론을 가르치던 교수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내가 천진하게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라는 질문을 던지자 화를 내며 멸시조로 반응하던 일이 기억난다.”(396-7쪽)  

엘리트 고전주의자인 앨런 블룸이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란 말을 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찾아보니 이 대목도 잘못 번역되었다. 두 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 remember the professor who taught the introductory graduate courses in social science methodology, a famous historian, responding scornfully and angrily to a question I naively put to him about Thucydides with "Thucydides was a fool!"”(펭귄판, 346쪽) 역자는 ‘유명한 사학자’의 반응(responding)에 걸리는 "Thucydides was a fool!"을 불룸의 순진한 질문(question)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단순한 착오이지만 결과는 좀 중하다. 발언자를 바꾸어놓은 셈이니까. ‘독자를 위한 번역비평’의 취지는 (전문가가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하여(우리는 모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품앗이를 동원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비평에 관한 ‘대중지성’의 역할이다...   

09.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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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럴만두하군 2009-02-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이매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희망의 인문학> 개정판을 준비중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꼭 반영하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봐야겠습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로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9-02-14 15:0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면 좋겠네요...

2009-02-1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프로타고라스나 투키디데스가 나오는 문장에서는 역시 콤마의 용법을 잘 모르니까 오역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영어의 구두점은 우리나라 구두점과 다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데 학교현장에선 다루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로쟈 2009-02-14 15:06   좋아요 0 | URL
문법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실수도 있고,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혹은 무시해서) 벌어지는 착오도 있는 듯해요. 실수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교정으로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죠...

2009-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2-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가 더 큰가요? 작년에 복이 많아(?) 지인들과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요 어렵다 어렵다 하긴 했지만 프랑스 철학책을 대했을때처럼 황당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빵가게'님의 글이 좀 공감이 갑니다. 번역이 더 큰 문제라면 정말 곤란하네요. 불어를 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영어로 철학책 읽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로쟈 2009-02-15 00:44   좋아요 0 | URL
<정신현상학>을 독파할 정도면 못 읽을 책은 없으실 듯싶은데요. 안 읽힌다면 십중팔구 번역이 문제죠...--;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딱 들어맞는 책이 출간됐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강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 번역 현장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말 존중하는 주체적 번역론'을 편다. 책은 아직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저자 자신의 책소개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더불어 그가 번역한 <번역사 오디세이>(끌레마,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예전에 쓴 글도 일부 옮겨놓는다(<번역사 오디세이>는 <번역사 산책>이란 제목으로 먼저 출간됐었다).

서울신문(09. 02. 13) [내 책을 말한다] 우리 말 존중하는 주체적 번역론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이 ‘낮은 포복’이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중시하는 의역이 ‘고공 비행’이라면, 나는 원문의 결을 드러내면서도 깔끔한 한국어를 지향하는 ‘저공 비행’을 하고 싶었다.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원문에 가까운 표현을 찾느라 궁리하다 보니 한국어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얇은 영어 원서 한 권 제대로 뗀 적이 없었고 습작조차 한 적이 없었지만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에 눈떴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머리에 들어 왔다. 그리고 한국어가 이미 영어와 일본어에 깊이 물들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각은 그때부터 바뀌었다. 이미 외국어에 많이 물든 한국어에 외국어 문체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원문에서 멀어지는 고공 비행의 길로 날아 올랐다. 이 책은 잃어버린 한국어의 창공을 향해 한없이 날아 오르고 싶었던 내 마음의 비행일지다.  

물든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다. 그러나 중심마저 녹아 없어져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번역 풍토는 지나칠 정도로 원문을 숭상한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존중하는 번역 문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0년 동안 번역을 하면서 깨우친 내 나름의 방법론을 책으로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론이 아니라 문화 비판서로서 읽혔으면 하는 주제넘은 바람도 있다. 하도 바깥 글을 섬기고 바깥 사람에게 조아리다 보니 한국은 이제 바깥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고질병은 좌든 우든 밖에서 들여온 이론에 자기 현실을 두드려 맞추는 사람이 더 권위자로 인정받고 득세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그렇지 않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은 물론이고 이제는 중국도 일본도 자기 눈으로 자기 현실을 본다. 바깥을 참조는 해도 결국 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모두 주사파다. 북한의 닫힌 주사파와 다른 것은 바깥과 소통하고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열린 주사파라는 것이다. 자기 현실이 아니라 바깥 현실에서 나온 이론을 최종 심급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엘리트로 군림하는 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다. 한국이 독립국으로 되일어서는 데 먼지 한 톨이라도 기여하고픈 마음으로 ‘번역의 탄생’(교양인 펴냄)을 썼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은 번역론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싫었던 사람은 자기만 아는 노하우인 양 별 것도 아닌 업무 지식을 안 가르쳐주면서 야단만 치는 상사였다. 나중에 그런 상사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몸이 아파 직장을 일찍 그만두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책은 상상의 후배에게 드리는 나의 한국어 업무일지다.(이희재 번역문학가)   

09. 02. 13. 

P.S. 아래 인용문은<오늘의 문예비평>(2008년 가을호)에 실린 '"화(禍)를 보지 마오!”- 번역계의 풍토와 번역가의 윤리'란 글의 일부로 프랑스 번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정리한 것이다. 목차를 보니 <번역의 탄생>에서도 첫장은 '들이밀까, 길들일까 -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데, '부정한 미녀인가 정숙한 추녀인가'는 번역사의 유구한 고민거리다('주체적 번역론'은 굳이 가르자면 '부정한 미녀'를 더 강조하는 포지션일 듯하다). 역자인 이희재씨는 어떤 의도에서인지 '부정한 미녀'를 '부실한 미녀'라고 옮겼는데, 어쩌면 독특한 한국어 감각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의 탄생>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래 스틸사진은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영화 <세브린느>(1967)에서 소위 '부정한 미녀'를 연기한 카트린느 드뇌브. 지난 연말에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쓰지 유미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에 따르면, 번역의 이 ‘행실’에 대한 논쟁은 프랑스의 경우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가리키는 말로 프랑스어 표현 ‘벨 앵피델(Belles Infidéles)’이 그때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역자는 ‘부실한 미녀’라고 옮겼는데, 사실 ‘벨 앵피델’의 충실한 번역어라고는 하기 어렵다. 우리말에서 ‘부실한’은 주로 몸이 허약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이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번역으로 유명했던 번역가 페로 다블랑쿠르에 대해서 대학자 메나쥐가 그의 번역이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를 연상시킨다. 아름답지만 부실한 여인이었다.”라고 평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에 더욱 그렇다. 앵피델(Infidéle)은 ‘신앙이 없는’이란 뜻도 갖지만, 문맥상 여기서는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못한,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부정(不貞)한 여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벨 앵피델’은 ‘부정한 미녀’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미녀냐 추녀냐>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일본의 전문통역가 요네하라 마리의 책도 그 원제가 ‘부정한 미녀인가 정숙한 추녀인가’라고 하므로 ‘벨 앵피델’의 번역어로서 ‘부실한 미녀’는 그 자체로 ‘벨 앵피델’의 예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 17세기의 프랑스는 부정한 미녀가 영화를 누리던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번역의 대다수는 독자에게 잘 읽히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삭제도 예사로 알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덧붙이는 것도 예사로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부정한 미녀에게 심취한 이런 번역가들의 대다수는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이었다. 실제로 17세기 중반까지 번역은 여전히 창작과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렸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번역만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번역사에서 17세기는 ‘벨 앵피델’이 영화를 누리던 시대였지만 동시에 몰락을 맞은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 번역활동을 자세하게 분석한 “쥐베르에 따르면 16세기중반부터 프랑스 문학의 한 기둥을 떠맡아온 번역이 문학의 세계에서 그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1650년대 말부터라고 한다. 그 무렵 번역의 권위는 갑자기 떨어진다. (...) 쥐베르는 부정한 미녀가 대두한 시대를 번역이 독창적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잠깐 눈부시게 피어오른 찬란한 시대로 규정한다. 쥐베르의 생각으로는 부정한 미녀의 어원을 제공한 페로 다블랑쿠르가 뛰어난 작가적 재능을 번역에만 쏟아 부은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부실한 미녀에 경도되었던 17, 18세기에 대한 반동으로 19세기 초반에는 추세가 원문과 번역문의 단어를 일 대 일로 대응시키는 축어역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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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14 11:58 
    번역, 번역사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들
 
 
비로그인 2009-02-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보니 이희재 씨는 부정한 미녀를 품으시는 것으로 파악되는군요... 러시아 작가/번역가 중에서 생각해보면, 나보코프의 정숙한 추녀, 파스테르나크의 부정한 미녀, 이 중에서 이희재 씨는 부정한 미녀, 파스테르나크 쪽이겠네요. 흠... 양쪽 다 나름대로 경우에 따라 쓸모가 있겠어요...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않으면요... ^^

로쟈 2009-02-13 23:05   좋아요 0 | URL
오늘 신촌의 큰서점에 들렀는데도 책이 없더군요. 웬만한 서점들에 가도 요즘은 허탕치는 일이 잦습니다.--;

비로그인 2009-02-13 23:57   좋아요 0 | URL
찾으시는 책이 워낙 잘 팔려서 그런가요? 아니면 유통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로쟈 2009-02-13 23:59   좋아요 0 | URL
<번역의 탄생>을 찾았는데, 아예 들어오지도 않던데요.--;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은 중의 하나는 '아고라포비아'. 마침 엊그제인가 아고라를 주제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 '최전선의 민주주의'를 읽은 터여서 같이 묶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세히 다룰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니(언제부턴가 서재에 글쓰기가 '차포 떼고 장기두기'처럼 돼버렸다. 시간이 부족하고 책이 옆에 없다. 일에 쪼들리는 탓이고 책은 여기저기 분산돼 있는 탓이다. 거기에 체력도 부실하니 기껏해야 '빅장'이나 부르는 것이 현재로선 나의 최선이다. 이러다 판이 끝날까 염려스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메모' 수준의 정리다. 먼저 칼럼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2 .12) [여적]아고라포비아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이란 독특한 문답법으로 폴리스 사람들과 토론을 벌여 진리 터득을 도왔다. 그 장소가 아고라라고 불리는 광장이었다. 아테네 아고라의 경우 가로 700m, 세로 550m로 꽤 너른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곳에서 민회, 재판, 사교, 상업 등 사회활동을 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린 곳도 아고라였다. 아고라는 여론형성과 의사소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공적인 의사소통이나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공간, 나아가 소통 자체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다.   

아고라포비아(광장공포증)는 낯선 거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 등 공공장소에 혼자 있게 되면 심한 공포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증상이다. ‘포비아’에는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비행공포증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광장공포증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이유로 다중이 모인 상황에 노출되기를 두려워한다. 가령 지각을 자주 하는 신입 회사원이 모두 일에 열중한 사무실에 들어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일 때 느끼는 감정도 그런 것이다. 이게 심해지면 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인터넷 토론방 ‘아고라’가 포털 다음의 초기화면에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 소식에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와 아고라포비아가 떠오른 건 공연한 연상작용 탓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고라는 지난해 광우병 촛불 정국에서 문자 그대로 인터넷 소통을 위한 광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족벌신문들에 대한 광고불매 운동에 공간을 제공했다. 이런 것들이 정권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게다가 현재 사이버모욕죄 입법 추진이 강행되고 있다. 미네르바 사건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쯤되면 촛불 이후 경찰 조사로 이미 기가 꺾인 아고라가 ‘후퇴’를 결정한 저간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이 정권이 기존 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모욕죄 신설에 매달리는 모습에는 아고라포비아의 증세가 역력하다. 그렇다면 이 증세를 치료할 방법은 없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언론 장악을 획책하는 정권에 제대로 된 아고라, 소통의 공간 조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병세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부터 일이 꼬였으니 아고라포비아의 치료는 애시당초 무망한 것이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2. 12.  

P.S. 바우만의 글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평사리, 2005)에 수록돼 있다. 책은 세계화 이후의 전망에 관한 저명한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의 글모음인데, 독어본을 옮긴 것이고 바우만의 글 또한 독어로 씌어진 것이어서 아쉽게도 원문과 대조해보진 못한다(따로 영어로도 발표했을 듯싶지만 출처를 알 길이 없다). 말미에 실린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대담을 두어 달 전에 읽은 바로는 썩 좋은 번역은 아닌데 말이다('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였던 부르디외를 '프랑스 단과대학 사회학과 교수'라고 소개한 대목은 역자의 상식을 의심하게 한다).    

 

참고로, 그라스와 부르디외의 대담 '자본주의를 길들이자!'는 1999년 12얼 5일에 독일 브레멘 라디오방송국에서 제작되어 방송되었다. 대담의 독어판 요약은 독일 주간지 '디 자이트'에 실렸으며 영어판은 '더 네이션'(2000. 07. 03)지에 '아래로부터의 문학(A Literature From Below)'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2002년 3-4월호)지에는 '진보적인 복고(The 'Progressive' Restoration)'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두 판본이 서로 약간 다르며 국역본은 뉴레프트 리뷰 판본과 일치한다(영어, 불어, 독어본은 http://www.homme-moderne.org/societe/socio/bourdieu/entrevue/gras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럼 바우만의 글로 넘어가서, 그가 말하는 아고라란 무엇인가? 우선 바우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개념, 오이코스(oikos)와 에클레시아(ecclesia)를 소개한다. 각각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에 나오는 말인데, 전자는 "온화하지만 때로는 드센 사적인 영역"이고 후자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 즉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주 드물게 찾아가지만 우리의 모든 삶과 관계된 공공의 사안들이 규제되는 먼 곳에 놓인 영역"이다(번역이 좀 감질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순하게 말하며 오이코스는 사적인 영역이고, 에클레시아는 공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세번째 영역이 바로 아고라다. "아고라는 완전히 사적인 것도 아니고 완적인 공적인 것도 아닌 공간이며, 동시에 일정한 정도로 양자의 일부를 포괄하고 있는 영역이다."(41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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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경찰 무죄, 철거민 유죄’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기대할 것 없는 수사였고, 예상되었던 결론이다.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소위 '억압적 국가장치'로서의 경찰/검찰 권력이란 한갓 권력과 지배계급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 행사 및 법원의 판단에 의하여 구체화된 형벌권의 내용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국가권력작용"이란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더라도 검찰(권)과 사회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해서, 권력의 충복으로서 검찰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주권을 도둑맞은 국민이 못났을 뿐이다). 그것이 희생자 유족들이 주저앉아 있는 자리이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다(MB집단에게 국민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니그로'다!). 바로 계급이 나뉘는 자리이다...    

‘용산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9일 오전 희생자 유족들이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들어가려다 경찰에 저지되자 영정을 들고 청사 현관 앞에 주저앉아 있다.

경향신문(09. 02. 10) [책읽는 경향]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강력한 통제수단이었음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배웠다. 인디언의 역사를 삭제한 채 구성된 아메리칸 드림, 승리자였던 조조 대신 유비를 중심으로 구성한 소설 삼국지 속에서도 배제의 정치적 혐의는 읽을 수 있다.  

최근 ‘용산 참사’를 보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반응이었다. 사건 초기 각종 언론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아내려는 떼쟁이 이익집단의 과격한 이해관계 관철 수단(점거농성과 화염병)의 지긋지긋함에 초점을 뒀다. 시위를 한 절박한 이유나 배경, 이들의 삶의 조건과 철거 이후 어떻게 추락할지에 대한 인도적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벨 훅스·모티브북)는 미국 사회가 엄존하는 계급간의 문제점을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고 탐욕·부·질시의 위험성을 공유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도록 배웠던 미국”이 쾌락적 소비주의의 만능 속에 빈자와 약자를 얼마나 당당하게, 그리고 죄책감 없이 무시하게 됐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렸을 때 늘 듣던 말이 있다. ‘부잣집 애들은 공부를 못하고 가난한 집 애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 계급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순환되고 있음이 반영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부자는 영원히 부자이며 가난은 영원히 대물림되는 ‘신 계급사회’에 와 있다. 문제는 점점 이런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됐으며 죄책감조차 없어져 간다는 점이다. 약자에 대한 무감각을 한국사회가 어떻게 키우고 있는지 알려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 사회야말로 다시 계급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권미혁|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09. 02. 09. 

 

P.S.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 이어서 지난해 말에 출간된 벨 훅스의 또다른 책은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모티브북, 2008)이다. "인종.성.계급의 ‘경계 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벨 훅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벨 훅스가 그러한 목표를 실행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와 결실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너네 공부 안 하면 철거민 된다'라고 주입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과연 그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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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느낌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11 10:28 
    벨 훅스 읽기 : F4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사회가 우울하다.
 
 
Arch 2009-02-09 23:55   좋아요 0 | URL
기사의 한부분이 정정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부분. 논의의 여지는 많겠지만, 다들 자신의 위치는 중산층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의 교육이나 신분상승의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적극적이잖아요. 혹은 자신이 세워놓은 중산층의 위치가 너무 높아 그 정도면 되는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거나.
경계짓기를 유머 코드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개콘이고, 부자의 억울함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는 드라마를 보며 대리만족이나 눈이 즐거워지는 체험을 한다니 할말없죠.

로쟈 2009-02-10 11:10   좋아요 0 | URL
저는 그것이 인간이 본성인지,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말하듯이 자본주의하의 '이차적 본성'인지 헷갈립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질 듯싶은데요...

yoonakim 2009-02-10 12:20   좋아요 0 | URL
너네 공부안하면 철거민 된다.....밥 먹고 누우면 소된다...가 더 낫네요. 정말 끔찍한 가운데 살고 있단 생각이 듭니다. 감성구조의 변화와 그것이 고착화되는 속도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막막함과 황당함 무력감을 기본으로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별로 없어요.

로쟈 2009-02-10 13:05   좋아요 0 | URL
인문학(혹은 책)이 뭘 바꿀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약간 지체시킬 수 있을 뿐인지, 그런 고민까지 하게 됩니다...--;

yoonakim 2009-02-10 12:22   좋아요 0 | URL
참, 이리 멘젤 영화는 비디오로 여러개 가지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전주영화제 세미나용으로 받았던 테잎이거든요.^^

로쟈 2009-02-10 13:04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럼 나중에 신세를 좀 질게요.^^

게슴츠레 2009-02-10 13:35   좋아요 0 | URL
"F4 판타지에 몰입하는 사회에서 나는 기대를 꺾게 된다..." 완전 공감입니다. 나름의 '도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공중파에서 <꽃남>이 방영되는 것도 신기하다만, 그걸 일체의 무리없이 완벽하게 즐기는 데 성공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말이지 놀랍다고밖에 말 못하겠습니다. 단순히 '도'를 넘어섰다는 보수적 개탄을 넘어서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들이 쏟아져 나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로쟈 2009-02-12 22:34   좋아요 0 | URL
그게 딜레마입니다. 미디어비평을 위해서 '꽃남' 시청자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2009-02-1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2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2-12 10:51   좋아요 0 | URL
F4가 뭐죠??

로쟈 2009-02-12 22:33   좋아요 0 | URL
흠, 산책님도 '따'시겠는데요...

릴케 현상 2009-02-13 12:08   좋아요 0 | URL
앗 농담이었다고 해도 될까요!
 

용산 철거민 참사가 용역들의 폭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이 용역들이 조폭과 연루돼 있다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5). 경찰이 이 용역들과 철거민 공동진압에 나섰다면, 말 그대로 '조폭과 손잡은 경찰'이 되겠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더라도 이런 모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권력의 아리까리한 토대'를 이렇듯 다 드러내놓아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그래도 공권력은 여전히 공권력인지?). 하긴 MB부터가 '대통령'이란 직위를 무슨 사조직의 보스인 양 알고있는 바에야(그걸 자랑스레 'CEO'라고 부른다. 조폭 두목도 요즘은 CEO다) 진작에 더 기대할 것도 없긴 했지만...   

용산 참사 사고 당일인 지난 1월20일 남일당 건물 3층에서 철거민과 대치하고 있는 호○건설 용역 직원들.

시사IN(09. 02. 07) “용산 철거 용역 목포 조폭과 관련”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나. 죽으려고? 아니다. 경찰에게 화염병 던지고 새총을 쏘려고? 그것도 아니다. 돈을 더 받으려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으로는 부족하다. 망루에 오른 이유를 철거민들은 용역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지난 1월20일 용산 참사 현장에서 만난 한 철거민은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 올라갔다. 그냥 있으면 일방적으로 맞으니 살려고 망루로 도망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철거민은 “용역들에게 한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와 분노를 짐작할 수 없다. 용역 깡패들에게 맞설 힘이 모자라니 요새를 만들고 화염병을 들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서 희생된 고 윤용현씨(48)는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 올라갔다가 용역이 무서워 망루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지난 1월21일 순천향병원에서 만난 윤씨의 한 친구는 “망루 쌓는 일을 도와주고만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래에 용역이 진을 치고 있어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윤씨의 아들 윤현구씨(20)는 아버지가 울먹이며 하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용역이 쳐들어왔는데 네 또래 애한테 얼굴을 얻어맞았어….”

철거 용역회사에서 일하는 한 호남 출신 조직폭력배는 “철거민들이 망루를 만들어 올라가면 철거 작업이 복잡해진다. 망루에서 철거민들이 올라가려는 우리를 상대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버티면 작업이 장기화한다”라고 말했다. 철거 회사의 다른 동료는 “망루를 정복하는 것은 원래 용역의 몫인데 이번에는 손에 피 안 묻히는 경찰이 직접 나섰다. 매우 특이한 경우다”라고 말했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은 폭력의 치외법권지대다. 철거가 추진 중인 용산 거리는 비열한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재개발 현장에서 용역들은 공권력의 비호를 받는다. 위는 지난해 6월 경기 수원의 재개발 현장.

주먹이 법인 재개발 현장

지난 여름부터 철거를 거부한 세입자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매일 아침 오물과 음식 쓰레기가 수북이 쌓였다. 벽에는 섬뜩한 낙서가 가득했다. 빈집에는 밤마다 불이 났다. 용역들의 소행이었다. 철거민이 떠나고 찾아오는 손님이 줄어들수록 폭력의 수위는 높아만 갔다. 어렵게 식당 문을 열면 험악한 용역들이 들이닥쳐 손님과 시비를 벌였다. 편의점에서 손님이 술을 마시면 술 먹는다고 때리고, 쳐다보면 쳐다본다고 때렸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지는 일이 용산에서는 다반사였다.   

철거 회사 용역들은 노인·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욕을 해댔다. 팬티만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목검을 들고 있었다. 이곳 주민 박선영씨(여)는 “동네 어른이 맞고 있는 걸 보고 나서기라도 하면 용역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주민들에게 주먹질을 했다. 몸무게가 100kg 정도 나가는 용역이 뺨을 때려서 나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참사에서 숨진 이상림씨(72)의 며느리 정연신씨의 증언이다. “2008년 7월1일 아버님이 현수막을 달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는데 용역 깡패들이 사다리를 흔들고 급소를 잡아서 땅에 내동댕이쳤다. 아버님은 바닥에 쓰러져 맞고 옷도 다 찢겼다. 신고했지만 경찰이 오지 않아 도망가야 했다. 고소장을 냈더니 용역 깡패도 다음 날 맞고소를 했다. 그런데 아버님은 전치 3주가 나오고 그 용역은 4주가 나왔다. 70대 노인이 30대 깡패들에게 밟히고 맞았는데 아버님한테 사전 구속영장이 떨어져 수배자가 됐다. 형사들이 잡으러 왔다.”

하지만 무법천지, 어디에도 경찰은 없었다. 용산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한 세입자는 “신고를 해도 이 동네에는 경찰이 잘 오지 않았다. 와서도 용역이 합법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라고 말했다. 구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세입자들은 거의 매일 용역에게 폭행당했다. 지켜보는 구청 직원과 경찰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용역 폭력과 관련해 철거 회사 호○건설의 관계자는 “편파적인 사건과 사진만 가지고 철거민들이 일방적으로 피해자라 주장한다. 우리가 당한 자료도 많다”라고 말했다. 용산 4구역 철거 용역을 맡은 회사는 호○건설과 현○건설산업. 사고가 난 남일당 건물과 그 주변을 관리하는 회사는 호○건설이다. 하지만 경찰 물대포를 쏜 용역 직원이 현○ 직원임을 보더라도 두 회사가 공조 철거에 나섰다는 철거민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높다.

철거업체는 재개발 조합이나 시공사에서 선정하는데, 두 업체는 삼성물산·포스코·대림 등 시공사를 통해 철거업체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현○건설의 고위 관계자는 “2008년 4·5월께 삼성물산·포스코 등 대기업 시공사가 주관한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내 수주를 따냈다. 계약은 조합과 하고 2008년 7월1일부터 호○과 구역을 나눠서 이주 관리를 했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의 한 고위 관계자도 “주관사인 삼성을 통해 공정하게 입찰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용산 지역 재개발 주관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이를 부인했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조합에서 우리도 일을 따냈다. 시공사는 공사만 할 뿐 철거업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은 2006년 2월 본격적으로 철거업에 뛰어들었다. 철거업을 하던 입△산업과 참△△건설 출신 직원들이 주축을 이뤘다. 공동 대표이사 ㅇ아무개씨·ㅁ아무개씨도 모두 입△산업과 참△△를 거쳤다. 설립 첫해인 2006년 호○ 건설은 46억8200만원, 2007년에는 75억62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삼성물산이 재개발 사업을 하는 서울 종암동·석관동·길음동·마포·아현동, 그리고 사고가 난 용산의 철거를 맡은 회사가 호○건설이다.

한 철거회사의 고위 관계자는 “조합에서 특별히 철거업체를 지정하지 않으면 삼성 일은 호○이 거의 도맡아 한다. 업계에는 삼성 임원이 호○의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호○의 고위 관계자는 “3년 정도밖에 안 된 회사지만 이쪽에 일을 오래 한 분이 많아서 삼성 일을 많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호○건설이 전남 목포의 폭력조직 ㅅ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건설업계와 조직폭력배 사이에서 파다한 소문이다. 철거회사를 운영하는 한 조직폭력배는 “입△·호○의 ㅁ과 ㅇ은 (조폭)생활하는 ㅅ파 식구들이다. 철거라는 것이 전형적인 건달 사업인데, 입△·호○은 조폭 바닥에서 가장 성공한 조직이 하는 회사다”라고 말했다. 광주 출신 한 조직폭력배는 “호○은 어찌 보면 돈과 주먹이 결합한 국내 최대 조직이다. 거의 모든 조직이 와해되고 이름만 남았는데, ㅅ파는 철거로 떼돈을 벌어서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조직원이 가장 많다”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폭력조직의 한 두목은 “ㅅ파는 철거해서 돈을 많이 번 애들이다. 이번 사고로 괜찮으냐 했더니 문제없다더라”고 말했다.  

복도가 시커멓게 탔다. 호○건설 용역들은 “추워서 불을 피웠다”라고 말했다.

ㅅ파는 목포 3대 조폭 중 하나
호○과 조폭 관련설에 대해서는 일부 시공사에서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시공사 간부는 “철거회사 직원들은 하는 일이 본래 터프할 수밖에 없다. 노인정에서 데려다 쓸 수 없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목포의 ㅅ카페를 근거지로 만들어진 ㅅ파는 서산동·오거리파와 함께 전남 목포 3대 조직폭력 단체다. 전남경찰청의 한 조폭 담당 경찰관은 “ㅅ파는 검찰과 경찰이 관리할 정도로 이름난 범죄 단체로 재범을 염려해 경찰이 특별 관리하는 조직폭력배만도 33명에 이른다. 1996년 조직원이 살해당하자 오거리파 조직원을 잔인하게 보복 살해한 이후 ㅅ파 조직원은 유흥업소와 건설회사에 진출해 사업가로 변신한 것처럼 생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경찰의 조직폭력배 관리 대상에 따르면 목포 지역 ㅅ파의 두목은 ㄱ아무개씨. 그 밑에 부두목과 행동대장 3명이 받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의 관리가 서울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광주의 한 베테랑 조폭 담당 형사는 “서울로 간 조폭 중 경찰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조폭이 훨씬 많다. 용역회사에서 ㅅ파 애들을 쓰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한 조직폭력배의 증언에 따르면 상경한 목포 ㅅ파의 실질적 두목은 ㅈ아무개씨와 ㅅ아무개씨. 철거회사를 하는 한 조직폭력배는 “ㅈ 아래 ㅁ아무개·ㅇ아무개 또 다른 ㅇ아무개 등 수십명이 ㅅ파 식구로 호○건설에서 일한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ㅅ파 관련에 대해 묻자, 호○건설의 한 고위 관계자는 “마음대로 생각해라. 직업이 철거여서 몇 년 전에도 ㅅ파로 수사받았지만 명확하게 해명됐다”라고 말했다. 

광주 출신의 한 조폭은 “3년 전 ㅅ파를 광역수사대 쪽에서 범죄 단체로 엮으려 했는데 ㅈ의 로비로 살아남았다. ㅈ은 인맥이 좋고, 한 번에 2000~3000명을 모을 수 있을 정도로 돈과 능력이 있다”라고 말했다. 전남 지역의 한 조직폭력배는 “ㅅ파가 경찰 관리 대상에서 이름을 뺄 정도의 능력은 된다”라고 말했다. 호남의 한 조폭을 통해 ㅅ파 조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용산 사고가 커서 복잡하겠다”라고 물었다. ㅅ파의 한 행동대원이라는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다. “경찰 즈그들이 알아서 허겄지요. 그 정도는 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주진우기자) 

09. 02. 08.  

P.S. 무리한 철거시한을 담은 철거공사 계약서에 관한 기사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08174637 참조. 한편 드물게 철거촌을 다룬 영화로 김수현 감독의 데뷔작 <귀여워>(2004)가 있었다. 소재로만 다루고 삼천포로 빠진 영화인데, 아직도 한국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드물다는 점은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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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9-02-08 18:28   좋아요 0 | URL
공권력과 조폭, 잘 어울리네요..

로쟈 2009-02-08 22:21   좋아요 0 | URL
사실이 그렇더라도 너무 노골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21:57   좋아요 0 | URL
특정 지역을 명시하여 제목으로 뽑은 것이 염려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의 이 기사 댓글에 전라도 놈들은 죽어야 된다는 글들이 엄청나게 올라오더군요.

로쟈 2009-02-08 22:20   좋아요 0 | URL
경찰 수뇌부는 경상도에서 맡고, 용역 하청은 전라도를 주는 시스템인가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9 22:30   좋아요 0 | URL
각 지역마다 이런 일이 있으면 해당지역 조폭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관행인 것 같아요.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일은 아닙니다.각 지역 조폭들에게는 꽤 수지 많은 장사라고 하니까요.이게 1~2년 된 일도 아니구요.